2015.12.17 15:39
장로의 범위와 할 일
1982. 6. 17. 목새
본문:누가복음 16장 10절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게 된다” 하신 이 말씀은, 첫째 하나님 당신이 돕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거기에까지 도달할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입니다.
우리의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건설구원에 추호도 이루어 가질 자는 인생에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 중에 건설구원을 이루는 사람도 있고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건설구원을 우리가 이룬다 하니까 아예 ‘기본구원은 우리는 상관도 없이 다 이루어지는 구원인데 같은 구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아, 기본구원은 공짜배기니까 그 기본구원은 뭐 가치없는 구원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기본구원은 왜 전적 은혜요 인적 요소는 하나도 거기에 가담되지 아니하느냐 하면 거기에는 인적 요소가 조그만치라도 가하게 되면 기본구원에 방해가 되고 기본구원에 흠점이 되어서 기본구원이 안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기본구원은 참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할 수 있는 완전성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이 아무리 세밀히 판단한다 해도 털끝만치도 정죄할 것이 없는 완전이라야 이 기본구원을 얻게 되지 완전이 아니면 안되기 때문에, 인간의 요소가 조그만치라도 가해지게 되면 완전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전적 은혜로 되는 것이고 인적 요소는 하나도 가담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속사도 교부의 이름을 잊었는데 그분은 말하기를 기본구원을 예복으로 비유해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은 다 쫓아냈다. 예복 입은 사람들은 다 용납을 했다’ 하는, ‘기본구원을 얻는 하늘나라에 가는 데에는 다 예복을 입고 가야 되는데 그 예복에 실밥 하나라도 인간의 것이 들어 있으면 그 예복은 더러워서 들어가지를 못한다. 그 예복에는 실밥 하나도 인간의 것은 없고 전적 주님의 공로만으로 된다’ 그렇게 누가 표현을 했다 하는데, 폴리갑이라던가? 어떤 사람인가? ○목사님은 아마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 늘 하시니까. ○목사님 어디에 있습니까? 그 사람 이름이 무엇입니까? 폴리갑이던가 내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옳은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은 인적 요소는, 예를 들어서 천국 들어갈 때에 그 옷을 입고 천국에 들어간다면 ‘그 옷에 실밥 하나라도 인간의 것이 들어 있으면 안 된다.
순전히 대속하신 예수님의 것만이라야 들어간다’ 그렇게 표현을 했다 하는데 그 표현이 대단히 잘됐습니다.
기본구원은 너무 어렵고 너무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공로가 털끝만치라도 섞여 있으면 더러워져서 안 되기 때문에 인간 요소가 들어서는 안되고 전적 은혜라는 것이고, 또 건설구원은 사람들을 통해서 구원을 얻는다. 기본구원을 얻은 사람이 기본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이 권리를 가지고 건설구원을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온갖 은혜를 자기가 입어 가지고, 그 은혜를 힘입어서 건설구원을 이룬다. 그래도 이 건설구원은 인간이 들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적의 것이고 그렇게 어렵고 가치있는 것은 아니라 이렇게 또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기본구원에 대해서 어린 신앙들은 대개는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뭐 공짜배기니까, 공이니까 그것이야 가치가 적은 것 아니겠느냐?’ 너무 어렵고 인간으로만으로서는 절대 불가능하기를 인적 요소 하나만 들어도 안되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전적 객관의 역사요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또 건설구원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는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한 대로 갚는 구원이라 하니까, 이것은 우리의 힘을 들여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적인 정도의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존귀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건설구원도 이 구원의 요소가 다 완전성의 것입니다. 이 구원의 요소가 다 완전성의 것이기 때문에 이 구원은 완전입니다. 또 영원 불변의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건설구원도, 인간에게는 완전성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기본구원 얻은 이 구원도 하나님과 연결된 그 연결에서 하나님으로 인하여 완전된 것이지 인적 요소가 그렇게 완전으로 변해진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억만 년 가도 떨어지면 사망뿐이요, 순전히 더러운 것뿐이고 약한 것뿐인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이것도 전부 하나님 단독이 하시는 일인데, 하나님의 그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이 완전자 그분의 능력으로만, 그분의 형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것에 발표하기를 ‘네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는 이 말씀 하신 것은, 우리의 행함이 건설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행함이 건설구원을 이룬다는 말이 아니고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당신이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시겠다 하는 이 조건입니다.
너희들의 행함에 따라서 내가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겠다. 기본구원은 너희들의 행함에 따라서 이루어 주지 아니하고 내가 전적 이렇게 주권으로 이루어 줬지만, 이제 기본구원을 이루어 줘서 기본구원을 받은 너희들에게는 이 기본구원을 잘 힘입어서, 내가 볼 때에 기본구원에 대해서 네가 잘하니까 내가 건설구원을 주겠다 이렇게, 기본구원을 어떻게 이 은혜를 감당하는가 하는 것을 봐서 내가 너를 건설구원을 주지, 기본구원은 내가 네야 어떻든지 줬지만 건설구원은 기본구원을 네가 소중히 여겨 가지고 이 구원에 대해서 합당한 행동을 해서 내가 볼 때에 ‘이것은 기본구원을 준 데 대해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내 마음이 흐믓하다’ 이럴 때에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지 그게 안되면 내가 건설구원을 안 준다 그말입니다.
기본구원은 우리 상관없이 우리에게 주셨고, 건설구원은 기본구원 얻은 그 기본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을 보아서 당신이 다시 건설구원을 주신다 그말이지, 건설구원의 요소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이 승리하는’ 이 말은 건설구원인데 ‘그걸 할 수 있다.’ 이러니까 죽도록 충성만 하면 자기의 요소 가지고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건설구원은 순전히 주님 혼자 하시는 것인데 혼자 해 주심을 받을 수 있는 그 자격이 뭐이냐? 당신에게 옳다 인정함을 받은 후라야 당신이 주신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기본구원도 건설구원도 전적 하나님의 은혜이지 인간의 요소는 추호도 들어 있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알아야 됩니다.
이것이 세계에 이제까지 있는 교리 중에 많은 난제가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전적 사람의 힘 가지고 된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과 하나님의 힘을 합해 가지고 된다.’ 또 ‘사람이 하나님의 그 은혜를 거부만 안 하면 된다.’ 별별 논리들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다 장단점이 다 있습니다.
칼빈주의는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 또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과 사람 힘을 합해 가지고 된다.’ 루터주의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만 하지만 않으면 된다.’ 그 교파마다 각각 다른데, 칼빈 선생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라’ 하는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예정하셔 가지고 이런 이런 순서를 해 가지고 이루어서 사람이 이룬 것같이 보여지지만 실상은 그것이 다 긍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금 제가 말하는 거와 약간 다릅니다. 그는 전체를 이래 통 털어 말하면 ‘전적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이렇게 하는 말이고, 지금 내가 하는 말은 통 털어서만이 아니고 현재 이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은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실 수 있도록 하나님에게 건설구원을 받을 자격을, 받을 자격을, 건설구원을 이루어 주심을 받을 자가 되는 것이고, 받을 자가 되는 것이고, 받을 자가 될 때에 당신이 와 가지고 없는 데다가 건설구원을 와 가지고 혼자 만들어 주십니다.
마치, 갑자기 비유가 잘 안 나오는데, 집을 짓는데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런 집 한 채를 지어 달라고 자기가 간청을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내가 좋은 집을 지어 주지’ 이렇게 약속을 했는데 집 한 채를 지어 달라고 이래 간청을 하니까 아들이 둘인데 하나는 안 지어 주고 하나는 지어 줍니다. 하나는 지어 달라고 하지도 아니하고 감사치도 아니하고 이러니까 안 지어 주는데 한 아이는 ‘집을 지어 주십시오. 하나 지어 주십시오. 아버지가 지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지어 주십시오.’ 이러니까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는 지어 줍니다.
지어 준다고 해서 그 아이가 집 짓는 데에 모래 한 웅큼도 갖다 넣은 것도 없고 또 갖다 넣을 수도 없고, 와도 걸거치기나 하지 그 일에는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지만 다만 아버지가 지어 주려고 약속한 그 약속을 믿고 ‘지어 주십시오.’ 자꾸 이렇게 간청하니까 아버지 마음이 움직여서 ‘내 지어 주지’ 하고 지었을 때에 아주 좋은 집이 한 채, 큰 집이 한 채 지어졌으면 그 집을 지어 가지고, 이제 그 아이의 집입니다. 저 아이는 그런 집이 없습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집이 있으면 집 지은 그것이, 집이 제 힘으로 지은 것은 거기에 조그만치도, 뭐 모래 한 줌도, 조그만한 꼬쟁이 하나도 저는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가 지어 줄 수 있도록 그 아이가 행동한 것, 아이가 된 것 그것뿐이지 집을 지은 것은 순전히 아버지가 지은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우리의 건설구원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인적 요소로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인적 요소는, 건설구원은 신적 요소로만 되는 것인데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신적 요소의 역사가 자기에게 올 수 있도록 인적 요소의 행동한 것뿐이지 이 건설구원과는 완전히 그 사이가 떨어져 가지고 있는 이것이 우리의 건설구원입니다.
그래서 어떤 주의는 ‘순전히 우리의 구원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 하나님에게서 온 것 그것뿐이라. 인적 요소의 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다’ 하는 이런 주장도 세계에는 많을 것입니다. 또 ‘이는, 우리 구원은 하늘에서 온 것만이 아니고, 하늘에서 온 것과 땅에 있는 우리의 것과 이것이 한테 종합을 해 가지고, 인적 요소가 많이 안 들고 조그매라도 거기에 들어 가지고 됐다’ 그렇게 또 주장하는 그런 주장들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에는 온갖 주장들이 있는데 그 주장들이 있을 때에 그 주장을 논리해 가지고 능가하지 못하면 그 주장들에게 다 정복을 당하고 그 주장이 옳다 인정하는 것이 이것이 세상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와 가지고 주장하시기 때문에 그분에게 인정받는 것이라야 되어지는 것이니, 인정받는 것은 그분이 한 것 외에는 인정받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분이 한 것만 인정받을 것이 되지, 그분이 한 것만 인정 받을 것이 되는데, 그분이 와서 하게 되는 것은, 인간이 기본구원 없는 자는 상관없고, 기본구원 받은 자는 그 기본구원을 어떻게 네가 감당하느냐? 그 기본구원의 은혜를 감당하는 것을 봐서 건설구원을 주신다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기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온전한 보수를 말하는 그것이 그것이고, ‘너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죽은 자가 어떻게 죄 가운데 있겠느냐? ‘너는 죽었고 있는 것은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것이요 그분을 위해서만 살고 다시는 네 자신을 위해서는 살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살지 않아야 된다’ 하는 요것이 기본구원을 잘 감당하는 행위라 그거요.
그러기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면 지극히 큰 것도 된다’ 하는 그 지극히 큰 것을 어떻게 인간이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극히 작은 것 되면 큰 것도 된다는 요 말을 볼 때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인간의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는 것을 요 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충성해 봤자 지저분한 것, 우리 교회에서 연보 아마 천명이 한 연보가 한 사람 한 연보보다도 액수는 적을런지 모릅니다. 지저분하게 많이 해 봤자 뭉텅 뭉텅 하는 사람이 많이 하는 그것이 돈이 붓는다. 이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그것이 아니라 그거요. 실력 없는 사람 천명이 가 가지고 말해 봤자 안되는 것 실력있는 사람이 편지 한 장만 하면 된다 그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 백성이 암만 해도 그 나라에 대통령이 하나 말하면 그 말이 더 권위있고, 그보다도 강대국의 대통령의 편지 한 장이라면 그 나라 대통령 그런 것 뭐 십 배 백 배 능력이 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요구는 그게 아니오.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성되게 한다’ 하는 이 말씀은, 인간의 그 실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는 요것을 요게서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실력을 하나님이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 공사를 하는데 인간의 실력 보고 노임을 줍니까 그 사람의 마음 보고 노임을 줍니까? 우리는 마음 보고 노임을 줍니까? 마음 보고? 입을 보니까 틀린 것 같애. 그래 내가 자꾸 물었지. 마음 암만 좋아도 실력 없으면 노임 제일 적게 받습니다. 그것은 실력대로 가요. 우리는 일을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실력을 따라서 댓가를 주고 우리는 그를 씁니다.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그 실력을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 아니오. 또 일을 많이 했다 적게 했다, 일한 그 양을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 아닙니다. 실력도 요구하심이 아니고 일한 양을 요구하심도 아니고, 뭘 요구하느냐?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충성이라 하는 것은 종에게 쓰는 말이오. 상관과 하관의 부하와 상관에게 대해서 쓰는 말이요, 왕과 백성에 대해서 쓰는 말이지 아무데나따나 쓰는 말 아닙니다. 아내가 남편 위해서 암만 잘해도 그것은 열녀라 하든지 하지 충성이라 그런 말은 못 씁니다. 그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그말이오.
이런데 충성이라는 이 말은 주님의 피로 구속하신 그 구속을 전제로 두고 지금 발표한 명사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구속하신 주님을 생각하고 하든지 큰 걸 생각하고 하든지, 당신이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하신 주님을 생각하는 요 생각을 당신이 요구하신다. 뭐 무능자의 생각이나 유능자의 생각이나, 일을 많이 할 자의 생각이나 적게 할 자의 생각이나 우리의 생각을 요구한다. 우리의 마음을 요구한다. 또 계속, 계속 당신의 구속을 생각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러니까 요 ‘지극히 작은 데에 하면 큰 데도 한다’ 하는 요 말씀은 우리의 사람이라는, 우리의 사람이라는 요 인격 요것을 당신이 요구하시지 실력을 요구하시지를 않는다. 우리의 인격을 요구하시지 당신이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일의 양을 그것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다만 천 명을 모아 봤자 한 사람의 할 양만큼 못하고 한 사람의 실력만 못할지라도, 못할지라도 천 명 한 천 배나 되는 그 사람이 자기는 실력있으니까 하루 한 번이나 열흘 만에 한 번이나 이렇게 헌신하는 고것보다 만분지 일도 안되는 고 사람이라도 고 사람이 고 마음을 끊지 아니하고 고 마음을 계속적으로 당신의 구속을 생각하면서 구속받은 자로 사는 고것을 당신이 요구하신다.
그러면 실력을 요구하시지도 아니하고, 일의, 성사해 놓은 일의 양을 당신이 요구하시지도 아니하시고, 실력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또 일의 양은 뭐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그것을 요구하시지를 아니하시고 다만 구속받은 자의 그 마음, 그 사람 그것을 당신이 요구하신다 하는 것을 여기에서 발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주를 위해서 하려면, 그래 작은 것이라도 그 작은 것이, 그것이 일의 작업 양에 대해서 쉽고 또 실력에 대해서 실력 없는 사람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지, 아무리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그것을 구속하신 주님을 위해서 하려고 하면 마음은 그 생각을 가져야 되고, 그 마음은 가져야 되고, 그 시간에 자기의 사람이라는 그 사람은 거기에 기울어져야 될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아무리 인간의 잘난 사람의 억억만분의 일도 안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그 사람이라는 것이 당신의 구속에 붙어 있기를 원한다 말이오. 구속에 붙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까짓 거 잘난 사람의 억만분의 일도 안되는 그까짓 거야 붙어 있어 봤자 지저분하이 귀찮다. 한달 만에 일년 만에 한 번 나를 섬겨도 이 무능한 자의, 못난 자의 억만 배도 더 되는 그런 사람의 한 번씩 뜨끔 뜨끔 와서 섬겨 주는 그것을 원한다.’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말이오.
그거는 무능한 자 가난한 자는 약한 것 그런 것 암만 모아 봤자 그까짓 거 소용없는 것이니까, 개천에 물이 내려와서 방천이 떠 내려가는데 그것 뭐 조그만한 모래 그거 한 웅큼씩 암만 집어 넣어 봤자 훌훌 떠 내려가 소용없고, 이러니까 그거 뭐 천명 와 가지고 모래 집어던져서 날아가는 것 소용없고 하나가 큰 덤박 한 개 턱 갖다 놓으면 그것이 효력 있다.
우리는 무능하기 때문에 그걸 원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가지신 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실력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고 일해 놓은 그 양을 요구하시는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를 요구하신다.
피로 값주고 구원한 거는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들여서 우리를 대속하셨기 때문에 당신의 대속, 당신의 대속으로 우리를 받은, 나라는 이 사람 요것을 당신이 요구해서 구원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도 이것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 자기의 실력이 있으니까 이 실력 가지고 건설구원을 이루겠다 하는 이런 계산은 아주 틀립니다. 아주 틀려요.
요것을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이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자기의 실력 가지고 이루려고 하는 사람은 참 속은 사람이오. 또 자기의 그 일한 양, 자기는 많이 할 수 있는 작업량, 자기는 공작하는 그 양, 작업량, 그 일해 놓은 양 그것 가지고 건설구원을 이루려고 하면 헛일입니다. 양이 아니고 그 사람이기 때문에, 실력있는 사람이, 10분지 9를 실력있는 사람이 당신에게 바친 그것보다 억만분의 1도 안되는 그런 못난 인간이 열의 열을 다 바친 그것을 당신이 요구하시고 평가하시고, 그 사람의 10분지 1이나 실력있는 자의 십분지 일이나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은 꼭 동등점으로 본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똑똑히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가난한 자가 성공하기가 좋고 가난한 자가 다 성공을 많이 했고 부요한 자들은 성공을 못 했다 그거요. 그러면 공평되지 않지 않는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력있는 자는, 네가, 실력있는 자 너나 실력없는 자나 꼭 같은 자인데 내가 실력있게 해서 너는 많이 있고 저는 적게 있고, 닷 냥쭝 줬고 두 냥쭝 줬고 한 냥쭝 줘서, 내가 준 것이 잘났지 네가 뭐 잘나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그대로 다를 내놓는 것을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이지 많이 주니까 그것을 제것인 줄 알고 ‘나는 실력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 실력없는 사람 뭐 한달에 30일 아침 새벽기도 나가는 그것보다 나 같은 사람은 1년에 한 번만 나가도 내 가치가 크지.’ 어리석게 속았다 그거요.
그런고로 지극히 작은 데라 말은 우리의 인격 전부를 말하는 것이오. 많이 들이는 것, 계속하는 것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오. 큰일이야 열흘 만에도 나고 한 달 만에도 있고 1년 만에도 하나 있지만 지극히 작은 것은 어찌 됩니까? ○○○ 선생, 지극히 작은 것은 어떻게 있지? ○○○ 선생, 계속 있어? 지극히 작은 것은 계속 있답니다. 지극히 큰 것은 1년 만에도, 10년 만에도, 어떤 것은 10년 만에 한 번씩 닥치는 것도 있습니다, 크니까.
지극히 작은 일은 계속 있다는 것 요걸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은 계속 있다. 지극히 작은 것 까짓 거 해 봤자 그렇지만 지극히 작은 일 그것도 주를 위해서 하려면 거기에서 마음도 고 시간에는 거기에 들어야 되고, 또 생각도 들어야 되고, 내 인품이라는 게 거기에 기울여져야만 될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지극히 작은 것이라 말은 저 깊이 들어가서 보면 주님은 나를 계속 당신이 차지하고 싶어 한다. 나를 계속 당신이 차지하고 싶어 하신다. 계속 나를 요구하신다. 나를 당신 곁을 떠나지 않기를 원하신다.
못난 것, 피투성이 더러운 것 그까짓 것 뭐 하려고? 못나도 내가 당신에게 계속 붙어 있는 것을 원하지 천하에 제일 잘난 사람이라도 잘났다고 이틀 만에 한 번이나 열흘 만에 한 번이나 오는 것은 내게 필요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자체의 실력이나 무엇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이 인격이 당신에게 다 기울이는 이것을 원하신다는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이래서 이 사실을 알고 보니까 높은 자는 푹 낮아져 버립니다. 자기가 높아서 뭐 세상 일에 ‘그거 뭐 천 명 다 가 봤자 안되는 것 내가 가서 편지 한장만 하면 되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된 줄로 알았는데 하늘나라는 그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세상에서 높아진 자는 ‘높은 이것 가지고 미혹만 받기 쉽지, 높은 위인이나 낮은 위인이나 당신이 요구하시는 것은 나라는 인품의 다를 요구하는 것이니까 높은 게 필요 없다’ 하고 푹 깨져 버렸습니다. 낮아져 버립니다.
자기는 자기 일생동안 해 봤자 실력있는 사람 하룻동안 하는 것도 못 당하는 못난 자로 알았는데 아주 ‘낮은 자는 높아지는 것으로서 자랑한다.’ 자기는 낮아서 아무것도 아닌데 낮은 자기나 높은 자기나 하나님에 대해서는 맞먹는다 그말이오. 맞먹어. 동등 가치로 되어 있어. 이러니까 못난 자가 다 기울이기 쉽거든. 잘난 자는 다 기울이기가 어렵더라 그거요.
그것을 ‘지극히 작은’ 이 말 하는 이것은 우리의 전부를 당신이 요구하신다.
계속적으로 당신에게 기울여 당신의 것으로 살기를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못나도 당신의 것으로 계속 사는 것과 아무리 잘나도 당신의 것으로 계속 살지를 못하고 이틀 만에 한 번씩 사는 것과, 이틀 만에 한 번씩 사는 그것은 당신에게 필요없고, 당신에게 필요없고, 하루 하루 계속 하나님 앞에 사는 것만 필요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렇게 사는데 결정을 짓는, 마지막에 ‘합격!’ 합격시키는 것은 어떻게 합격이 되느냐? 합격 발표를 할 때에는 그렇게 발표를 했습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준다’ 요렇게 말씀했습니다.
요 말씀은, 요렇게 자기가 계속 바치는 것을, 계속 당신에게 충성, 계속 충성을, 못나도 잘나도 상관없고 계속 충성을 당신이 요구하시는데 요구하시는 그것이 한정이 있다.
요 일에 대해서는 요만큼 요구하시고 저 일에 대해서는 저만큼 요구하시고, 사건마다, 성화의 그 부분마다, 우리 성화는 보스러기를 주 모은 것, 티끌 모아 태산 같은 것처럼 이렇게 보스러기를 주 모아 가지고 건설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우리의 심신은 보스러기를 모아 가지고 우리의 마음이 됐습니다. 우리 마음은 수만 개가 합했고, 우리 몸도 수만 개 수억 개가 합해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더 수가 많이 얽혔다 말이오.
이러니까 한 개 한 개 이렇게 구원을 이루는데 거기에 대해서 당신이 한계한 것이 있기 때문에, ‘요거는 몇점만 되면 된다. 너는 요 계속이 얼마만 되면 된다’ 하는 고 한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고 한계에 도달해야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시험을 참는 자 복이 있다.’ 자기가 신앙생활 하는 고것이 가다가 좀 어려워질 때에 그때에 어려워진다고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는 것이 복이 있다.
왜?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한계점이 있기 때문에 요것에 대해서 ‘옳다, 인제 됐다.’ 인정을 받아야 합격이 돼 가지고 그때 ‘사랑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준다.’ 그렇게 옳다 인정하는 고 한계가 있다.
또 밤중 비유도 그것이라 그말이오. ‘열흘동안 네가 시험받는다’ 고것도 또 한계를 말했어. 열흘이 지나가면, 열흘동안만 되면 됐습니다. 열흘 지나고 난 다음에는 상관없고 열흘동안만 되면 되는데, 열흘동안이 중요하지. 열흘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 이튿날 제가 해서 채우면 될 것 아닌가? 안된다 그말이오.
한정이 있다. 한정이 있어서 그 한정 거기에, 한정에 거기에 합격이 되어야 된다 하는 고것을 가리켜서 ‘이 일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하는 걸 말하는 것입니다.
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이 말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이것은 이제 그 양을 말합니다. 이것은 양을 말하요. 죽도록 충성하라 그 말은, 그러면 건설구원, 생명의 면류관 건설구원이 이루어진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 말은 우리를 다 기울이기를 원한다 그말이오. 우리를 다 기울이기를 원한다.
또 ‘지극히 작은 데’그 말은 계속하기를 원한다. 지극히 작은 일을 이제 저 여선생이 대답했는데 지극히 작은 일은 계속한다. 계속되어 있다. 단박에 끊어지지 아니하고 계속돼. 그러면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계속을 요구하신다.
또 ‘죽도록 충성하라’ 말은 뭘 요구하는 것입니까? 저 ○조사님, 다를 요구하는 것, 다를 요구하신다. 죽도록 충성하라 말은 다를 요구하신다.
또 ‘이것에 대해서 옳다 인정하심을’ 말하는 것은 무엇을 요구하신다는 말입니까? 개별마다, 개별마다 한계점이 있으니까 한계점에 도달해야 돼.
개별마다 한계가 있다 고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 우리가 배운 것은 우리의 건설구원은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이 혼자 와서 해 주시는 것인데, 당신이 와서 해 주실 수 있도록, 어린 아이가 아버지에게 말했으니까 집 짓는 거는 근방에 오지도 않았지만 나중에 지어 놓고 ‘이거 내 집이다’ 하는 것처럼, 아버지가 집 짓고 아이는 집 짓는 데 하나도 손도 안 댔지만 왜 아버지가 그 아이에게는 집 주고 저 아이에게는 주지 않았느냐? 저 아이는 아버지의 준다는 약속을 잊어버리고 있고 이 아이는 약속을 기억하고 있고, 이 아이는 아버지에게 지어 달라고 해서 아버지가 ‘이렇게 지어 달라고 하니 내 마음에 지어 주고 싶다.’ 그 마음에 지어 줄 만한 그 마음 움직임을 한 것이 그것이 그 아이의 실력이지 집 짓는 그것은 실상은 상관이 없었다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당신이 건설구원을 우리에게 와서 해 주실 수 있도록 당신이 요구하는 그 사람 되어지는 그것이 문제이지, 건설구원은 순전히 당신의 능력으로만 됐다 요것이 여러분들 진리입니다. 요걸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 나와 있지 않아요, 지금.
이 세계 교회 교리에 깨달은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깨달은 사람들이 다 발표를 해서 문서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잘 안 나와 있다 그거요. 칼빈주의의 궁극적 구원이라는, 전적 은혜라는 이 말은 좀 각도가 다릅니다. 이것은, 지금 말하는 것은 그 각도 안에, 그 각도 안에서 또 한 범위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이치가 까다롭지만 까다로운 고것을 모르면, 인간이 암만 까다로워 봤자 까다로운 인간을 단번에 만드신 그분이신데 그분만치 까다롭지 못하요. 암만 까다로워도 그분만치 까다롭지 못하고 아무리 세밀해도 그분만치 세밀하지를 못합니다.
이랬는데 이것이 한 사람은 세밀하기를 80% 세밀인데 불합격, 이 사람은 아주 그까짓 거 천 명 만나 봤자 아무것도 아닌데 이것은 합격, 잘났든지 못났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 다라야 당신이 받아 줘.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다를 요구한다 말이오. 다를 요구하는 것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실력을 가지고 하나님 은혜를 가져오려고 하지를 말아라. 또 자기가 일해 놓은, 그 일 해 놓은 그 성사의 양을 가지고 하나님의 것을 가져오려고 하지 말아라.
하나님은 일한 양 그까짓 거야 엿새 동안에 우주를 만드는 그분이 만들려면 그까짓 것 얼마나 돼? 그러니까 일 많이 해서 일 양 가지고 이 구원이 되리라고 생각지 말아라. 네 실력 가지고 되리라 생각지 말아라. 그저 당신이 다를 원한다. 계속을 원한다. 다를 원한다, 계속을 원한다, 당신의 마음에 흐뭇한 그것을 원한다. 당신이 준 것은 하나도 남김없이 다를 원하시는, 주님이 이 건설구원에 당신이 요구하시는 그 요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요것을 알아야 구원얻지 요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믿사옵나이다’ 하면 된다는 그 일이 얼마나 틀렸소? ‘믿사옵나이다’ 하면 된다는 그것을 정죄를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 도리를 잘 들어 배워야 되지, 벌써 설교 듣기를 ‘아이고 지저분하다. 잔소리 많다.’ 잔소리로 들려지고, 너무 세밀히 말하면 ‘잔소리 많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그 일이 어떻게 되겠소? 과학물도 하나 만들 때에 거기에 대한 이치를 듣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그 이치대로 실행하려 하면 더 힘드는데, 논리로도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자기가 그 일을 해 내겠소? 실지로 또 하지 않으면 그 일이 어데 물질 조성이 됩니까? 안된다 그거요. 그보다도 신령한 것은 더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말해 놨지만 이것은 하나 그저 껍데기, 껍데기, 이 껍데기 속에 들어 있는 거라. 이 껍데기, 하나의 윤곽뿐이오. 그 안에 세밀한 것은 인간의 말로 발표가 됩니까? 발표를 못 해. 억억만 배도 넘는데 어떻게 발표가 되겠소? 그걸 기록을 하려 하면, 기록한다고 하면 이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을 만치 세상에 차고 넘는다는 것인데, 그게 이 66권 조그만한 책에 함축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겠소? 이것은 우리 속에 무한하신 성령님이 오셔 가지고 이 일을 작용해서 일으키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의 도의 세밀함을 들어야 실지에, 세밀한 그것이 백지 소용없이 세밀하면 그 사람은 정죄받습니다. 왜? 복잡하게 말하는 것은, 어지럽게 말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는다 했습니다.
그 세밀이 자기가 실지로 그 걸음을 걸어가려고 할 때에 거기에 빠져서는 안될 필요한 고 종류 범위 내의 것이 구비한 그 세밀이어야 되지, 필요없는 걸 말만 많이 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을 어지럽게 만들기 때문에 정죄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거요.
이 세밀이라는 것은 실지로 살려고 하면 고 순서가 통과돼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모르면 그때 다 넘어지고 속아질 것이기 때문에 미리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이라 그거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난밤에도 재독을 했는데, 와서 재독을 해서 자꾸 재독하는 데 듣고, 들으면 여러분들 귀가 뚫린다 말이오. 귀가 뚫려야 돼. 귀가 뚫려도 이 귀가 뚫려야 돼.
이 귀만 뚫리면 다가 아니라. 이 귀 뚫려 가지고 다 들어도 소용없소. 이 귀가 뚫리는 가운데에서 동시에 눈으로 볼 수 없는 양심의 귀가 뚫립니다. 양심의 귀가 뚫리면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재독하는 길이 났으니까 어쨌든지 그때 다 들으십시오. 몇시 몇시까지 합니까? 엊저녁에 보니까 늦게까지 하던데? 일곱시 반에서 몇시까지 하요? 아, 그러면 상당히 많이 걸릴세. 일곱시 반부터니까 아홉시 반이나 열시까지 가겠구만. 오전 오후 다 하려 하면. 그렇지요? 그러니까 열시쯤 되면 다 듣는 거냐? 재독을 듣고 삼독을 듣고 자꾸 들으면 이 귀가 뚫리면 그 다음에는 잘 들려집니다. 또 이 귀가 뚫리는 동시에 속에 마음의 귀가 뚫려 놓으면, 마음의 귀가 뚫려 놓으면 그만 깨소금보다도 더 꼬시고 달고, 아무 데 가도 이 진리가 아니면 그만 못 견뎌. 듣기가 싫어. 못 견딘다 그거요.
그런 사람은 아무리 괴로워도, 설교가 길어도 지루하지 않지만 그것을 귀가 안 뚫린 사람, 귀가 뚫린 사람으로서 듣는 것은 고만 그때 교만의 시험에 들어.
귀가 뚫려 가지고 듣는 사람은 들어 봐야, 그것은 도리어 자기로서는 지나가 통과한 것이기 때문에 고만 ‘그 설교 들어야 유익될 것 뭐 아무것도 없고 그저 이렇다’ 할 때에 그만 졸아요. 나도 그런 시험에 많이 들어.
혹 제자들을 이렇게 설교 시켜 놓고 난 다음에 처음에 고것이 새 싹수가 있고, 무엇이 있으면 좀 딱 듣는데 자꾸 쓸데없는 소리만 지저분하이 해서 아무 영감 없으면, 고만 이거 들을 필요가 없는 것으로 여겨지면, 그것이 교만인데 고만 그러면 그 다음에 잠 와요. 설교할 때 잠 오는 거 누가 졸든지 그것은 벌써 시험에 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