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3:52
자신을 시험하라-믿음에 있는 것
1986. 9. 27. 새벽 (토)
본문:사도행전 3장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초자연의 역사, 사람이 하지 못하고 하지 안한 하나님이 하신 그 역사를 과거에는 기적이라 이적이라 이렇게 다 번역을 했는데 지금은 모두 다 공통적으로 표적이라 이렇게 번역을 합니다.
과거에, 이적이라 말은 인간이 하지 않는 특별한, 인간 것이 아니고, 자연의 것이 아니고 특별한 역사로 됐다는 그런 것을 표시하고, 그 일을 한 그 능력 자체를 표시하고, 그 역사 자체를 표시하고, 지금 기적이니 이적이니 이렇게 말하지 안하고 표적이라 이렇게 표적으로 번역된 것은 성경에 그렇게 초자연의 능력으로 해 놓은 그 역사는 ‘하나님의 이 능력이 이렇게 했다’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증거하는 그게 원 주가 아니고 이렇게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형식인 이 사실은 그 속에 사람들이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그 속에 있는 그 내용을 표시해 주는 하나 표시해 가지고 그와 비슷한 그 일을 표시해 가지고 이것을 봄으로 ‘표적이라’ 안에 들어 있는 그것을 껍데기로 안에 이런 게 들어 있다 하는 것을, 들어 있다는 그 흔적을 그것을 표시해 주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그 모든 기적적으로 된 그 일은 ‘아, 이거 하나님의 권능이 커서 이렇게 이런 일이 기적으로 됐다, 참 하나님 능력 컸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역사적인 그 사실을 그거는 형식으로, 그 계시는 형식 계시인데 형식 계시를 문서 계시로 해 놓은 이 문서 계시의 목적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적 중에 껍데기 목적만 알았지 근본 목적은 모르는 것입니다.
근본 목적은 사람들이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런 방편을 써 가지고 사람들이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렵고 볼 수 없는 그 속에 들어 있는 그 내용을 표시한 것들이다, 내용을 표시한 것들이다, 그 내용의 그 흔적을 표시한 것들이다, 그래서 표적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래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어떤 그 기적이든지 이적이든지 그것을 표적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런 것들은 다 표적입니다, 다 표적. 표적이라 말은 그 속에 우리에게 필요한 그 참된 것이 있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 표시해 놓은 표시하는, 알려 주는, 표시하는 그 흔적이지, 표시하는 그 흔적이지 그거 된 그것이 실상이요 우리에게 ‘그뭐 하나님의 능력이 이런 능력이 있다, 이런 게 있었다, 너도 이런 일을 만나라, 너도 이와 같은 일을 만나라, 이런 일을 너도 당할 수 있다, 받을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알리기 위한 게 아니고 그것은 그 속에 참 영생에 속하고 완전에 속한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 없어질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 표시해 준 하나 표시다. 표시한 그 한 흔적이다, 그래서 표적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에는 신구약 성경은 문서로 하나님의 이 구원에 모든 관한 것을 우리에게 기록해 주셨고, 하나님의 구원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문서로 기록해 준 것이 문서 계시라 이래, 문서 계시라. 문서로 나타내 보였다.
계시라 말은 열 계 자 말이오. 열어서, 보일 시자, 열어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것을 열어 보이셨다, 문서로 열어 보였다, 그것을 가리켜서 문서 계시라 이라고, 또 이런 저런 모양이나 형식이나 이런 모양, 이런 모양 저런 모양, 이런 형식 저런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한 그것을 가리켜서 형식 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여기 나면서 앉은뱅이된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사도 당시에는 그 형식으로 그렇게 보여 준 형식 계시로 보여 준 그것을 다시 문서 계시로 기록해 가지고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당시 형식 계시로, 형식을 가지고 보여 주신 그 형식을 받은 사람들은 ‘이 형식 이것이 무엇을 표시하고 있는가?’ 그 속에, 그 형식을 하나님이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그것은 그 속에 무엇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하셨는가 그 알맹이를 찾지 못했으면 다 외식이요 다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인 그 일을 보고서 모든 사람들이 우 따라오니까 예수님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나를 찾고 따라온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배부른 까닭이라. 그거는 너거가 껍데기 없어질 하나 표적, 껍데기 표적 그것만 보고서 그 표적 그거 너거가 소망을 가지고 지금 나를 찾아왔지 그 표적을 보고 온 것은 아니다. 표적을 보고 온 것은 아니고 떡 먹고 배부른 까닭에 왔다. 떡 먹고 배부른 그거는 하나 계시한 그 도구로 기관으로 썼는데 계시된 그 도구요 그 방편으로 이용할라고 하는 그 형식 모든 물질 그런 거 보고 오지 그것이 너희들이 볼 수 없는 거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속에 알맹이가 있으니까 알맹이 그것을 네가 보고 그 알맹이에 소망을 가지고 온 것 아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어짜든지 이 표적을 보고 ‘안에 요것으로 말미암아 속에 들어 있는 표적이 있으니 그 표적을 내가 차지해야 되겠다, 그 표적을 차지해서 그 표적을 내가 알고 표적 그것을 내가 실상으로 이루어야 되겠다.’ 요렇게 소망하지 안하고, 안에 있는 것을 표시해 알리기 위해서 한 형상을 만들고 한 형식을 만들어 가지고 한 그 형식과 형상 그거는 다 없어질 것들 가지고 없어지지 안할 것들을 표시한 것인데, 없어질 것 그것들만 보고서 거게 소망을 두고 그것만 깨닫고 있는 그런 자들은 다 외식자가 되고 맙니다.
실컷 구원 이루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지었지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은 거와 같은그것도 비유입니다하나님이 공력을 시험할 때 심판할 때 다 불탈 것만 준비했지 불타지 안할 영원, 완전, 불변의 것은 준비하지 못했다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없어질 것들을 가지고 형식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은 없어질 것 그것들을 알고 그것 받으라고 하는 게 아니고 그것으로서 없어지지 안할 것들을 알리기 위해서 그것은 하나의 나타내 보여 주는 도구로 기관으로 이렇게 썼는데 껍데기 이것만 보고 속에 알맹이 보지 못하고 있다.
너희들에게 오병이어를 먹여 준 것은 그 속에 참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참된 보배를 너희에게 알릴라 해도 알리지 못하고 알리기 어렵기 때문에 오병이어라는 이 형식, 없어질 것들을 도구로 삼아 가지고, 그걸 기관으로 삼아 가지고 너희들에게 보여 줬는데 찍해야 너희들은 형식으로 보여 준 이 외부에 보여 주기 위해서 물질을 이용한 그 물질 그것 보고 나를 따르고 그 물질 행위한 그것으로써 볼 수 없는 속에 알맹이 영원하고 신비한 것을 보여 준 그것을 보고 나를 따라오지 안하고, ‘아, 이러니까 이분에게 오병이어로 이란 이것은 이제 이분과 우리의 뭐 바치는 거 이것을 합해 놓으면은 이거는 말할 수 없는 확대가 되고, 말할 수 없는 풍성이 되고, 번성이 되어서 이것은 지극히 적은 거 가지고, 지극히 적은 자기와 하나님과 더불어 합하면, 주님의 축복으로 더불어 같이 둘이 합하고 보면은 이 오병이어가 오천 명 먹인 것처럼 나 하나 주님에게 바쳐서 일치되면은 이거는 뭐 오천 명이 아니라 억억만 명 우주와 영계와 모든 것을 먹이고도 남음이 있다.’ 하는 이 참 광대하고 사실을 보여 주지마는 그거는 모르고 이 도구로 이용한 떡 먹인 이거, 떡만 먹은 그거 배부른 그거 까닭에 우 따르고 있으니 주님이 탄식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신령한 거 없어지지 안할 완전한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불완전한 것들을 가지고 이리저리 하고 있는데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혈육이 먼저요 신령한 것은 다음이라” 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은 둘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해 주신 것인데 첫째 아담에게 속한 이것만 알고 둘째 아담에게 속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항상 외식이요 껍대기니까 그저 없어질 것들 가지고 준비하고 영원히 없어지지 안할 것들을 가지고 준비하지를 못한다.
사람들이 이 구원 도리에 대해 가지고도 인간이 힘을 쓰는 대로 모든 것 다 하나님이 된다, 네가 행한 대로 갚아 주겠다 이렇게 해서 인간들이 힘을 써서 뭘 구원을 이루는 일을 하고 성화되는 일을 하고 나니까 자기 마음에는 생각하기를 ‘내가 힘쓰니까 됐다’ 힘쓰니까 됐다, 사람이 힘을 쓰니까 사람의 힘으로 됐다, 사람의 힘은 불완전한 것이요, 다 죽은 것이요, 썩은 것들이요, 저주요, 정죄 아래에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사람의 것들 가지고는 암만 해 봤자 썩은 것이 썩은 것 만들지 썩은 것이 뭘 썩지 안한 것을 어찌 만들 수 있으며, 불완전 것이 불완전한 거나 만들지 불완전한 것이 어떻게 완전한 것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런데 너희들은 불완전한데 불완전한 너희들이 이제 이렇게 행하면 완전한 것이 만들어진다 하는 그것은 너희들이 있는 대로 죽도록 충성하면 내가 들어서, 너희들이 있는 거 썩을 거 그런 거 가지고 그걸 다해서 하면 내가 썩지 안할 참을 가지고 있는 내 힘 다 들여 가지고 이제 썩지 안할 것을 만들어 주겠다 하는 말씀이라 그 말이오.
이런데, 이 심령이 아직까지도 변화받지를 못한 사람은 언제든지 이 껍데기 가지고 놀고 껍데기라야 잘 듣지 안 듣습니다. 이러니까 성경 말씀보다도 이 세상에서 과학 공부나 이 세상에 무슨 사회 공부나 이 세상에 있는 거 배암의 지식, 배암의 지식, 암만 해 봐야 죽는 거, 또 속이는 거 속는 거, 죽이는 거 죽는 거 이거는 맛이 있고 취미 있고 가치 있게 딱딱 듣고 그거는 뭐 들을 것이 있고 대가리를 싸 짜매고 들을 만한 그런 것이 있지마는 성경에 기록한 그런 것은 뭐 그거는 순 거짓말이요, 비합리적이요, 비논리적이요, 비 모든 이 세상 경험 체험한 통계적 역사적이기 때문에 그런 건 시시하게 그렇게 여깁니다.
또, 예수 믿는 사람들도 그러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 속에 신령한 것을 주시기 위해서 없어질 것들을 말하는데 없어질 것들을 말하면 소망을 가지고 마음에 딱 들어붙지마는, 다시 말하면 성경 가운데 있는 땅에 있는 말을, 땅에 속한 말, 땅의 것을 이루는 거, 땅에 속하고 땅의 것을 말하고 땅의 것을 이루는 거 이런 것은 들을 때에 귀에 쏙쏙 들어오고 취미있게 듣지마는 하늘의 소리는 듣지를 못합니다.
여기 서부교회 교인으로서 오랫 동안 예수를 믿어도 저 모두 이 땅에 속한 말하는 그런, 그런 뭐 설교록도 잘 보고, 또 그런 기독교 잡지도 잘 보고, 그런 테이프도 잘 듣고 하지마는, 그 말은 들으면 귀에 쏙쏙 들어가지마는 이 성경 말씀 나면서 앉은뱅이된 이것을 이제까지 벌써 몇 시간을 말한 게 아니라 뭐 여러 날 이렇게 말했지만 고거는 귀에 안 들어간다 말이오.
안들어가는 건 뭐이냐 하면은 안 들어가는 것은 그것은 말씀이 달라서 안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아직까지 변화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 말이 들리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변화가 돼져야지 자신이 변화되지 안하면은, 하늘의 것으로 변화되지 안하면 하늘의 것이 들려지지 않습니다.
이래서 그 사람이 본질과 본성이 하늘의 것으로 변화가 돼야 되고, 또 소망이 하늘의 것으로 변화가 돼야 되지 변화되기 전에는 항상 그것은 땅에 것이나 듣고 하늘의 거는 듣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땅의 말은 세상 말은 잘 듣지마는 하나님의 말 하늘의 말은 듣지를 못한다, 하늘에 속한 말은 듣지를 못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래 믿어도 효력은 있기는 있습니다. 뭐 그거는 참, 여러분들이 지금 말하는 것을 알아들을라면은 참 힘이 듭니다.
여게서 나면서 앉은뱅이, 앉은뱅이 이렇게 쭈욱된 이것은 이 앉은뱅이가 이렇게 나았다 하는 그것을 보이기 위해서, ‘아, 앉은뱅이, 예수 믿는 것은 앉은뱅이가 낫는 것이다.’ 이게 아니고 이 나면서 앉은뱅이는 뭘 가리켰으며, 메어다 놓는 것은 뭘 가리켰으며, 또 그가 구걸하는 것은 뭐를 가리켰으며, 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낫게 했으니까 나은 것은 무엇이며, 낫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뭐 여러가지 우리가 말하기를 일곱 가지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안했습니까? 그거는 뭣을 가리킨 건가? 이거 하나 하나를 자기가 따져서 ‘과연 이것은 주님이 이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일곱 가지가 이루어진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볼 수 있도록 없어질 것들 일곱 가지가 이루어졌는데, 없어질 거 일곱 가지가 이루어졌는데 없어질 거 일곱 가지 이루어진 그것은 표적이라. 그것은 표적이라. 없어질 거 일곱 가지 이루어진 거는 표적이라. 그러면 그 표적은 속에 뭣을 표시한 거라 말인가, 뭣을 발표시키고 뭣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없어지지 아니할 것 일곱 가지를 없어질 거 일곱 가지 가지고 나타내 보였다.
그러면 없어질 일곱 가지 그것만 보고 평생 예수 믿는 사람 있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은 표적이기 때문에 이것은 없어지지 아니할 것들 일곱 가지를 말한 것이니까 없어지지 아니할 것 일곱 가지 그것을 찾아서 믿는 사람 있고, 그 사람은 이제 진실한 사람이고 이 사람은 외식하는 사람이라 그거요. 이 말이 이해가 됩니까? 처음에 새벽기도 나온 사람들, 봐. 오늘 아침에 나오겠다고 막 결심을 하고 어제 손도 들고 했지마는 제가 거짓말 할라고 한 것 아니고, 아니고 ‘그뭐 나오면 되겠다’ 싶어서 그때 영감이 오니까 `나오면 되겠다' 싶어 `나오면 되지’ 나오겠다고 손을 들었는데 막상 오늘 아침에 다 낙제해 떨어졌다 말이오. 오늘 아침에 나온 거는 보니까 뭐 오늘 아침에 나온 사람 그저 한 팔백, 팔백은 조금 넘겠고 그런 정도밖에 안 나왔어. 그거 다 그 사람들 다, 왜? 제가 하고 싶어도 안 된다 말이오.
구원 얻는 이 모든 구원 얻는 거는 다 영생에 속한 것이요, 완전에 속한 것이요, 불변에 속한 것이요, 다 영생에 속한 것인데 이것은 사람이 못 합니다. 사람이 만들지 못합니다. 사람이 털끝만한 것도 만들지 못합니다.
못 만드는데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만드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사람이 하는 대로 되어지니까 사람이 생각할 때는 사람이 만들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만든 거는 털끝만한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거, 사람이 만든 거는 썩어질 사람인데 썩어질 거 가지고, 썩어질 거 가지고 사람이 만들어 봤자 썩어질 것밖에 안 되는데, 썩어질 거 가지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해 썩어질 거 만들면 만든 것만치 하나님께서 썩지 안할 것 가지고 썩지 안할 것 만들어 준다 그말입니다.
믿음을 연단한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인간은 썩어질 걸 만드는 그 껍데기 속에 썩지 안할 것,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 만들어진 그것이 있어야 되는 것인데 이제 사람을 이런 믿음 생활 하다가 자꾸 이런 시험 저런 시험,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왜 그런 어려움을 겪게 하느냐? 그 어려움을 겪게 하는 것은 그 어려움에서 썩어질 인적 요소가 만들어 놓은 것은 그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을 주니까 그때에 인적 요소로 만든 것은 없어지고 불타 버리고 신적 요소로 만든 그것만 남아 있기 때문에 이제 그 환난을 만나면 환난 전에는 이만한 뚱뚱한 한아름되는 것이 환난 한번 통과을 하고 나니까, 어떤 사람은 환난을 통과하고 나니까 쏵 다 타 버리고 하나도 알맹이 없는 사람도 있고 환난을 통과하고 나니까 나중에 주먹덩이만한 거 남은 것도 있다 그 말이오.
그것을 비유해서 금은, 이 주먹덩이만한 금을 불에다가 연단하면은 은도 타고, 모두 구리쇠도 타고, 신주도 타고, 쇠도 타고, 뭐 흙도 타고, 돌도 타고, 다 타 버리고 순금만 남아 있는 것처럼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니까 완전자이신 영원 불변자이신 이 신적 요소가 와 가지고 만든 그것만 남아 있고 인적 요소로 만든 이 모든 불탈 것들은 다 타 버리고 속에 알맹이만 남아 있으니까 자기가 이렇게 큰 줄 알았는데 ‘이것 다 아니다’ 요것만 남아 있는 고걸 보고 ‘요것만이 내게 있다’ `나는 요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순전히 없다.’ 이래서 하나님이 인적 요소로 네가 만들면 내가 신적 요소로 내가 없어지지 안할 완전한 것을 만들어 주겠다 하는 그것을 여기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여게, “예수의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을 믿으므로 성하게 된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그 이름이 만들었다, 이름이 만들었어. 그 이름이 만들은 요거는 완전한 것을 만든 것입니다. 완전한 걸 만든 건데 “예수로 난 믿음이 이를 완전케 했다” 예수로 난 믿음이 이를 완전케 했다 하는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그 믿음, 영감과 진리대로 사람이 순종하는 행위하는 그 순종하는 행위를 통해서 그 속에 하나님께서는 완전케 만들었다.
“예수로 난 믿음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완전케 만들었다” 그러면, “예수로 난 믿음이 완전케 만들었다” 예수로 난 믿음이 완전케 만들었는데 그 믿음은, 믿음은 그것이 사람이 심신으로 행하는 것입니까 이제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까? 믿음은 뭐입니까? 사람의 심신이 행합니다. 사람의 심신이 행하는데 심신이 행하는 그 속에 심신이 행한 것만치 하나님께서 신적 요소가 와서 행하는 일이 있습니다.
인적 요소로 행동하는 그 속에, 인적 요소의 행동이 없으면 안 되고 인적 요소의 행동이 있는 그 속에 신적 요소의 행동이 있게 된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이것은 인적 요소가 했습니까 신적 요소가 했습니까? 인적 요소가 했는데 “그라면 생명의 면류관을 내가 네게 주리라” 하는 그것은 신적 요소가 했습니까 인적 요소가 했습니까? 신적 요소가 했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믿는 것은 얼마나 이거 자기를 다하고 참 기울여서 진정 소망하고 진정 믿어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껍데기 이 세상에 있는 이 과학이니 뭐이니 배암 지식 이것을 통달하는 것보다도 쉬운 줄로 알고 그보다도 쉽게 얻을라 하기 때문에 다 헛일이라 그 말이오, 헛일. 이것은 아무리 해도 인간으로 할 수 없는데 계약이 그래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계약적으로, 인간이 계약을 지키니까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한다는 그것은 사람이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축복해 가지고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한다 했으니까 사람이 손으로 합니다. 손으로 하는데 사람의 손으로 하는, 사람의 손으로 한 그것이 만들어 가지고 위에 있고 머리되고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했습니까, 손으로 사람이 만든 거, 사람이 만든 그거 가지고 됐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만들 때에 하늘에서 하늘 문을 열고 하늘에서 내려 줘서 내려온 그것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 위에 뛰어난 것이 됐습니까? 이거는 누가 만든 겁니까? 누가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들었소 하나님이 만들었습니까? 사람이 만든 것은 썩을 것이 썩을 것 만드는, 사람이 만드는 꺼풀 속에 하나님이 만들었으니 사람이 네가 썩을 거 없어질 거 그거 네가 만들면 내가 없어지지 안할 참된 것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하는 그 계약이라 그 말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상에 속한 무슨 자연의 축복이나 이 세상 없어질 이런 축복을 받는 것도 그것도 우리가 할 때에 그 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이 요런 좋은 방편을 주시니까 그 좋은 방편대로 하니까 그 방편대로 하니 우리가 좋은 방편을 썼고 우리가 힘을 써서, 하나님이 좋은 방편을 가르쳐 줘서 그 방편과 우리가 힘을 써서 그것 가지고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그것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다만 하나님과 나와의 쌍방이 계약해 놓은 그 계약이 있어서 그 계약의 당사자인 내가 계약을 지키니까 하나님이 이 계약을 지켜서 이루어 줘서 그것은 순전히 보이고 썩어지고 없어질 걸로 만든 거 이것은 내가 만들었고 썩어지지 안 하고 영생할 그 완전한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인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은, 그러면 하나님이, 내가 하면 되고 왜 안 하면 안 되는가?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되는가? 하면 되고 안 하면 안 되는 그 이유는 하나님이 썩어질 것으로 ‘네가 하면은 네가 진정 소원하는 것이고, 썩어질 걸 다해서 하면은 네가 진정 소원하는 것이고, 또 가질라고 애를 쓰고 보배인 줄 알기 때문에 내가 해 준다.’ 하는 그 계약을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약의 당사자이니까 계약하신 당신이 계약 이행을 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썩어질 것으로 계약 이행을 하면 당신은 썩지 안할 것 가지고서 계약 이행을 해 주시는 것이니까, 우리가 모든 다 이런 저런 노력 하는 것은 내 노력 가지고 만들어 가지고 하는 그것을 우리가 원해서 노력을 합니까 내가 이 썩어질 것으로 노력을 하면은 계약자가 그 썩지 안할 것으로 해 줄라고 약속했기 때문에 완전한 그분이 와서 완전한 것을 만들어 주시도록 하시기 위해서 내가 이 썩어지고 모든 완전치 못한 것을 내가 만드는 이 생활을 하는 것이 이것이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이게 신앙 생활이라. 이거를 모르는 사람은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까 암만 예수를 평생 믿어도 말을 못 알아듣는 사람 있어. 그 암만 평생 믿어도 그 사람은 땅의 말이라야 취미가 있지 하늘의 말은 들리지 안해.
자기가 참으로 변화 변질이 되고, 자체가 변질이 된 건 뭘로 변질이 됐소? 우리 변질된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와 영감과 진리로 변질됐어. 그러면 영감이 없어질 것입니까 영원한 것입니까? 진리는 없어질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이 세 가지 대속을 이룬 이거는 없어질 것입니까 이거는 뭐입니까? 영원한 것인데 이거는 무슨 영원한 것입니까? 영원 완전을 이룬, 영원 완전을, 영원히 있을 완전을 이룬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알겠습니까? 영원한 완전을 이룬 것이 예수님의 대속이요, 영감과 진리는 이 노력해 가지고 예수님의 대속을 만든 것이오.
예수님의 대속을 만들어서, 이 진리와 영감은 예수님의 대속을 만들라고서 한 것이요, 건축자가 없어질 집을 자기가 만들면 자기의 있는 힘을 다 기울여 가지고 자기가 혼자 못할 걸 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가지고 하나의 좋은 건축을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삼위일체가, 삼위일체가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이루기 위해서 삼위일체가 전부를 다 기울여 가지고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이 일을 했습니다.
이런 것을 요한복음 15장에도 “아버지는 농부라” 그말은 뭐이냐 하면은 이제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를 나누니까 아버지로 말하니까, 이제 와서 계시는 분이 두 분이고, 와서 계시는 분이 성자가 와서 계시고 성령도 와서 계시고, 그러면 예수님이 와서 도성인신해 가지고 계실 때에는 성자, 성령 두 분이 와서 계십니다.
두 분이 와서 계시는데 거게 한 분 빠진 이는 내나, 한테 있지마는, 한테 있지마는 구별한 그 직책적으로서는 성부가 있으니까 성부도 다 들었다.
그러면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다, 이 구원을 만드는, 농부가 포도를 만들기 위해서 하는 것, 농부가 이 포도 만들기 위해 하는 것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만들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여 가지고 있다.
그러면, 기울이는데 구원을 만들기 위해서 작용한 것이 뭐이냐? 구원에 필요한 것을 예정을 했고, 또 창조를 했고, 보존 했고, 관리를 했고, 대속을 했고, 우리를 중생을 시켜서 이렇게 하셨다 하는 그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여게 있는 이 사람이 볼 수 있고 없어질 거 썩어질 걸 가지고 이 형식을 가지고 이런 형식이 나면서 앉은뱅이가 구걸하다가 이리이리 해 가지고 낫고 그래 가지고 뒤에 성전에 들어가고 이렇게 했다 하는 그것은 썩어질 거 가지고 다 볼 수 있도록, 안 믿는 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누구든지 볼 수 있도록 그래 만들어 놓은 이 모든 것은 인간, 인간의 요소, 인간의 요소, 인간의 요소 피조물의 요소, 인간의 요소 피조물의 요소 이거 인적 요소 요거 가지고 해 놓은 요것은 없어지지 안할 거, 영원한 거 완전 요소가 해 가지고 만드는 그것을 표시해서 알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그것을 잡아야 알맹이 잡은 것이지 그거는 잡지 못하고 껍데기 이거 하나의 그 속에 알맹이를 알리기 위해서 나타낸 그 표적, 나타낸 표적의 모든 형식, 표적의 형식만 보지 그 형식으로 표시한 표적 속에 알맹이 그거는 잡지를 못하고 보지를 못하고 이렇게 하면은 외식하는 사람이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이걸 얼마나 새기고 얼마나 우리가 생각하고 명상하고 기도하고 이렇게 깨달아야 될란지 참 얼마나 여기 무한이 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간단하게만. 그러면 나면서 앉은뱅이는 뭘 가리킨 건가? 그거는 병든 사람을 가리킨 건데 그거는 변질된 인간이라. 타락으로서 본지위에서 타락해서 변질된 인간이라. 선악과 먹기 전에는 하나님의 창조하신 그대로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었었는데 그후에 변질이 됐다. 변질이 돼서 병든 인간이 됐다. 그러니까 정상적인 걸음은 걷지 못한다 고거 앉은뱅이를 가지고 우리에게 표시를 해서 알렸다 그 말이오.
그러면 자기는, 백 살이나 백오십 살이나 산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성한 사람의 걸음은 한 뼘도 걸어가지 못하고 성한 사람의 걸음은 하나도 없다. 그 병든 것으로, 병든 자로, 변질된 자로 출생됐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니까 변질이 뭐이 됐느냐? 이제 영이 변질됐고 이 심신의 육이 변질됐고 영육이 다 변질됐습니다. 영육이 변질됐는데, 영육이 변질된 그 변질된 그것을 고쳐 주기 전에는 아무리 수고해도 다 헛일이다. 뭐 수고해도 헛일이다.
수고해도 헛일인데 그 수고한 그것은 무슨 수고냐? 구걸하는 생활을 구걸하기 쉽도록, 구걸 할 구걸을 많이 하도록, 구걸하기에 편리하도록, 구걸에 성공을 하도록 그렇게 하는 모든 노력들이다. 요것도 뭐 깨달으면 참 팔짝 뛰고 사람이 기절할 만치 요렇게 깊이 느껴지지 안하면은 다 속에 알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은 영은 중생되고, 그러면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았습니다. 영이 중생되고 또 심신은 뭣되는 것이 고침받은 것입니까? 심신은 뭣되는 게 고침받은 것이요? 예? 심신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완전히 성화되면, 성화되면, 악령과 악성 악습으로 말미암은 그 지능을 가진 것이 이제는 이 피공로와 영감과 진리의 이 기능으로, 이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 능력으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죽은 심신의 기능이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능력으로 살아납니다. 진리의 능력으로 살아났습니다. 살아났으면 이거는 죽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살아나면 죽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한번 살아난 것은, 이번에 우리가 예수님께서 지금 대속해 놓은 것을 확정지우는 것이 우리 현실인데, 확정지우는 것이 우리 현실인데 이 현실에서 한번 확정을 지웠으면 그것은 뭐이 됐습니까? 영생이 돼 버렸습니다.
영생이 됐기 때문에,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능력은 전지 전능의 무한의 능력이요, 이 능력은 모든 피조물을 다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이요, 이 피조물을 없는 가운데서 만든 능력이요, 이 피조물을 영원히 보존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피의 능력, 그걸 여러분들 그 전에 배웠는데 그 사죄에 대해서 자꾸 연구를 해야 돼요, 사죄에 대해서. 이 사죄가 어떤 것이며 칭의가 어떤 것인지, 자, 칭의는 뭐이 칭의입니까? 칭의는 무엇이 칭의입니까? 예수님이 대신 행해 주신 것이 칭의인데 뭘 대신 행했다 말이요? 뭘 대신 행한 것입니까? 예?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 전지의 지혜가 입법해 놓은 거, 그러면 입법에 여기 법에 빠진 게 있습니까? 빠진 게 있겠습니까? 빠진 게 없습니다. 그러면 이 입법은 조문이 얼마나 될까요? 몇천 조문이나 될까요? 몇천 조문이 아니라 억억억억?? 암만 사람이 평생 말해도 그 조문을 다 말하지 못해요. 평생 말해도 그 조문을 다 말하지 못합니다. 이 조문을 인간이 행할라면 억억억억억억만분의 일도 제가 아무리 평생 한다고 해도, 평생 한다 해도 억억억만분의 일도 못 해요, 이행을 못 해요. 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하지도 못 해. 이런데 이것을 예수님이 다 대행했어. 이 대행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대행인지. 이것은 사람이 변화가 돼야 되지 변화가 되기 전에는 모릅니다.
이렇게 이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 예수님의 대속은 완성을 해 놓은 거라, 완성. 율법의 완성, 또 모든 삐뚤어진 것을 완전 정리의 완성, 삐뚤어진 걸 영원, 영원히 삐뚤어진 게 하나도 없지, 삐뚤어진 거 뭐 억억억만이라도 삐뚤어진 거는 완전히 정리해서 삐뚤어진 것이 하나도 없게 한 것이 그것이 사죄입니다. 또 하나님의 그 법을 다 완전히 이행한 것이 그것이 칭의입니다.
하나님하고 완전히 결합인데, 하나님하고 완전히 결합인데 하나님이, 비유컨대 하나님이 귀때기, 모 말이요, 하나님의 그 각이, 하나님이 요 모도 있고 조 모도 있고, 요 면도 있고 조 면도 있는데 하나님의 그 모가 몇 모나 될상바릅니까? 몇 모나 될상바릅니까? 하나님의 모가 몇 모나 될상바르요? 하나님의 면이 몇 면이나 되겠소?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지 안해요? 이걸로 말하면, 이런 걸로 하나 말하면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고 요 면도 있고 뭐 있지 안해요? 이거 다 여러 면 있지 안해요? 하나님으로 말하면 몇 면이나 가지고 있을까? 예? 한번 말해 봐요. 몇 면이나 가졌겠어요? 예? 무한한 면을 가졌어, 무한한 면. 무한한 면, 우리가 영원히 가도 그분은 어떤 면을 가졌는지 알지도 못해요. 이 무한한 면 전부를 다 완전 화목을 했다 말이오, 완전 화목을. 이것이 예수님의 화친이라. 예수님의 화목이라.
이러니까, 이것을 아는 데서 ‘예수님이 대형하신 것이 요만치 대형했다, 요런 죄를 대형했다.’ 열 가지 대형하신 것을 아는 사람은 그만치 열 가지 아는 것만치 그만치 그 사람은 온전해지고 커졌고, 백 가지 ‘아이구 백 가지 대형을 했구나’ 그 사람은 그만치 커졌고, ‘억억만 가지 대형을 했구나' 커졌고, 이 사죄를 아는 데에서 사람이 완전해짐이 커져 나가고, 칭의를 아는 데서 커져 나가고, 화친을 아는 데서 커져 나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하나님의 설계를 아는 것이요, 모든 삐뚤어진 걸 아는 것이라. 이것은 여러분들이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들으면 성령이 여러분들에게 알게 해서 표시를 못 할지라도 이 진리가 여러분 안에 가서 역사할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이 세 가지 능력으로 우리 심신의 기능을 살렸어. 그러면 세 가지 능력으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난 것만치, 또 세 가지 기능으로 영은 완전히 살아났고, 완전히 전체가 살아났고, 살아났으나 아주 갓낳아 놓은 아이 모양으로 장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살아났지마는 능력이 아직까지 어려.
우리 심신의 기능은 그 현실을 통해서 이것은 더 성장하는 게 아니고 현실을 통해서 즉시 즉시 살아나는 것인데 그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기 전에는 영이 중생해도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지 못한 사람은 항상 구걸하는 사람이다, 중생된 사람이라도 심신의 기능이 살아난 것만치 그 사람의 모든 언행심사는 다, 구걸하는 것의 반대 뭐입니까? 구제하는 것이다. 이것도 여러분들이 깊이 느껴서 깨달아 알아야 될 거라 그 말이오.
땅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뭐 종교 창설자나 또 땅위에 모든 도덕가나 모든 정치가나 뭐 부모나 형제나 모든 인류나 전인류가 다 그 자체의 영이 중생되지 못한 사람은 이 모든 존재를 해하고 모든 존재를 이용할라 하고, 모든 존재를 자기를 위해서 이용할라고 하는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신의 기능이 이 세 가지 능력으로 중생하지 안한 그것은 구걸하는 그 일 외에는 할래야 할 수가 없다. 할래야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이 이 영이 중생된 후에 이 심신이 성화된 것만치 자기 중심의 것은 벗어날 수가 있다, 자기 위주의 것은 벗어날 수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면 자기 위주의 것이, 자기 중심의 것이 그라면 뭘로 되느냐? 완전자이신, 자존자이신, 대주재이신, 창조주이신, 모든 것의 근원이 되신 그분 중심으로 위주로 되어지니까, 그분 중심 위주로 되어지기 전에는 모든 존재를 해치는 것뿐이지 모든 존재에게 털끝만치라도 유익 주는 것은 없고 모든 존재를 죽이는 것뿐이다. 이거는 이해가 됩니까? 이거 이해될라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이런데 하나만 말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지난밤에도 말했는데 그 베드로가 물위로 걸어가니까, 물위에 떠뻑떠뻑 걸어가니까 물위로 걸어가는데 뭐 조금도 빠지지도 안하고 아주 활기있게 잘 걸어갑니다. 잘 걸어갑니다. 걸어가는데 그때 걸어갈 때에 베드로에게, 걸어갈 때에 그 베드로와 물에 빠져갈 때에 베드로와 거게 뭣이, 뭣이 있다가 없어져 가지고 그 모든 행동이 달라졌습니까? 딴거는 하나도 변동된 것 없어. 없어진 거 없어. 믿음이 있으니까 됐고 믿음이 없으니까 안 됐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성입니다, 믿음의 신비성.
이 믿음의 신비한 것은, 믿음의 신비성 이것은 과학이 분석을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과학이 분석할 수 있소 없소? 과학이 분석 못 합니다. 초인간적이요, 초자연적이요, 초피조물의 그 역사이기 때문에, 초피조물의 그 역사이기 때문에 피조물 가운데서 ‘이거 같다. 저거 같다.’ 피조물 가지고 그것을 표시할 만한 피조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
없는데, 이것은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고, 접할 수도 없습니다.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왜? 우리는 이 피조물 요소밖에 없기 때문에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접할 수도 없어.
없는데, 이것을 아는 방법은 뭐이냐? 이것을 아는 방법은 믿어 보니까, 믿어 보니까 볼 수 있는 흔적이 표적이 나와. 믿어 보니 볼 수 있는 표적이 나온 그것을 보고서 볼 수 있는 표적을 가지고 볼 수 없는 속의 그것이 알맹이가 되어진 것을 알 수가 있다 그거요.
그러니까, 믿음을 아는 방편은, 믿음의 이 비밀, 믿음의 신비한, 믿음의 신비한 것을 아는 방법은 다른 방법 없습니다. 요걸 믿어 봐야 아요. 믿어 보니까 돼요, 믿어 보니까. 믿어 보니까 되는데 안 믿어지거든. 못 믿게 하는 것이 많거든.
믿으면 믿는 대로 되는데, 믿는 대로 되는데 요 믿음 요것을 되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온갖 것을 증거를 해서 성경에 다른 모든 것은 요 믿는 믿음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요런 증거 저런 증거를 자꾸 해서 믿음을 보충하고 믿음을 보강케 하고 믿음을 조성하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다 있는 것입니다.
믿어 보면 아는데. 믿어 보면, 믿어 보면 어찌 압니까? 믿어 보면 뭘 보고 압니까? 믿어 보면 인적 요소로서 발표가 되기 때문에, 믿으면 내가 믿는 것은 인적 요소로 믿는, 내가 인적 요소로 믿으면 신적 요소가 역사하는 그 역사로 말미암아 보이지 안한 영생에 속한 신령한 것이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이제 그것이 이루어진 표시로서 인적 요소 요 피조물의 요소로서 이루어진 이 표적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 이것으로 인해서 그 속에 볼 수 없는 신령한 것을 이루어진 것을 우리가 알 수 있고, 또 신령한 것 이루어진 그것으로 인해서 완전자가 역사한 그 역사를 우리가 알 수 있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자, 믿는 믿음 가지고 모든 거 다 되는데, 믿는 믿음 가지고 다 되는데 ‘믿으면 되지’ 네가 믿는다는 믿음은 껍데기 중에 껍데기기 때문에 그 믿음이, 믿는지 안 믿는지,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하는 그 믿음은, 믿음이 뭐이냐 하면은 믿음이 그 실상이 된 것이라야 된다. 믿음이, 믿음의 그 실상이 이루어진 것, 실상이 이루어진 거는 인적 요소에 이루어지지요. 인적 요소에 이루어지는 그걸 가지고 신적 요소가 조성한 것을 네가 알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은 네가 믿어 가지고 믿으면 얼마나 믿겠느냐? 네가 믿는 믿음이 됐나 안 됐나 하는 그 증거는 너에게 인적 요소에 나타난 표적이 있어야 된다. 나타난 흔적이 있어야 된다.
예를 들면은 하나님의 주권 능력,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개별 섭리하신 그것을 믿으면 다 돼요. 믿으면 다 되는데 하나님이 주권의 능력을 가지고 모든 걸 개별 섭리하신다 하는 요걸 믿고 안 믿는 그것을 하나님이 알려 주기 위해서, 예를 들어서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는 불미에 불을 달궈 놓고서 ‘너 지금 이 우상에게 절 안 하면 저 불미에 집어 넣는다’ 그렇게 할 때에 불미에다 집어 넣는다 이렇게 할 때에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는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 요것을 믿고 안 믿는 것이 그럴 때에 나타난다 그 말이오. 그럴 때에.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는 하나님이 하시지 안하는 개별 섭리, 개별 작용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님의 주권 개별 섭리를 믿는 그 사람은 자기에게 불미불을 달궈 놓고서 이렇게 할 때에 그 불미불 달궈 놓은 그것이 누가 한 것으로 믿어집니까? 누가 한 걸로 믿어집니까? 주님이, 하나님이 하신 것인 것을 믿어지지요.
그러면 거게 대해서, 거게 대해서 자기를 해할 것이라고 인정되겠습니까 유익될 것으로 인정되겠습니까? 그러면 그걸 그렇게 했으면은 그렇게 섭리해서 그렇게 지금 불미를 만들어 놓고 불미의 환경을 만들어 놓은 그분이 주님이 만들으셨으니까 주님이 만드신 그분은 내게 대해서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예? 믿음 요구한다 말이오.
하나님의 개별 주권 섭리를 믿는 믿음을 네가 가졌나 안 가졌나, 또 이와 같이 지금 하는 것을 확실히 내가 한다 하는 것을 네가 안다면은 이거는 네 구원을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네 구원을 위해서 네 유익을 위해서 하고 있단다는 것을 네가 확실히 아느냐 모르느냐? 그 사람의 모든, 마음에서 다 표시가 나. 믿고 안 믿는다는 것이 마음에서 증거가 되고, 행동에 증거가 되고, 피부에 증거가 되고, 정신에 증거가 되고, 그 모든 행동에 증거가 된다 그거요.
이제 그 믿고 안 믿는 거 볼 수 없는 그 믿음을 볼 수 있는 것으로써 믿는다 안 믿는다 하는 그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런 작용을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기 위해서 이렇게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을 만들어 주시기 위해 역사하시는데 이 믿음을 만드는 방법이 뭐이겠으며 이 믿음을 아는 방법이 뭐입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하나 순종해서 그 표적이 나타난 그 표적으로 압니다. 그 표적으로.
불미를 만났을 때에 얼굴이 새파래지면, 새파래지면 그거 뭐입니까? 새파래진 그거 뭐입니까? 새파래진 그거는 뭐입니까? 그 새파래진 게 뭐이지요? 표적.
새파래진 그게 뭐입니까? 표적. 표적이라니 무슨 표적? 속에 믿음 없는 표적.
그때, 하루 종일 말해도, ‘암만 왕은 그래도 아예 나는 절 안할 줄 아십시오’ 하고서 담대하게 말한 그것은 무슨 표적이요? 믿음이 있다는 표적이라 그 말이오.
이랬는데, 그것은 자기 주관적 표적입니다. 주관적 믿음입니다. 주관적 역사인데, 주관적인 그 역사인데 그 속에, 불 속에 가서 불에 타지 안하고 이제 불내음새도 나지 안한 그것은 주관 역사입니까 객관 역사입니까? 객관 역사라.
그러면 우리가 믿는 것으로 자기 주관 역사에서 믿고 안 믿는 것을 일차적으로 검사해 가지고 믿음의 유무를 알아야 되겠고, 그 다음에는 그걸로 알았으면 만점이냐? 아니야. 그 속에는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와 가지고 역사하는 그 역사가 오는 그것이 있어야 이제 되는 것이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이루는 이 모든 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의 깊이와 넓이와 이것을 아는 사람이면 뭐 종교 통일이니 뭐 문선명이 그런 정신 빠진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이걸 알면 ‘모든 종교와 기독교가 같다’ 이런 소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와 모든 종교는 억억억억만 리도 더 떨어져 가지고 하늘과 땅보다도 차이가 더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거 뭐 여러분들이 이해가, 가만히 생각하면 혹 이해가 될 수 있을 터인데 또 이것을 또 다 가르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믿음이 제일입니다. 지난밤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거 있고 또 둘째로 기뻐하는 거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는 것을 지난밤에 제가 거게 대해서는 처음으로 증거했습니다.
마음으로 믿으면 그 실상을, 우리에게 주마 하나님이 약속한 그것을 실상을 자기가 벌써 마음으로 가지고 누리고 그것을 실상을 잡았습니다. 실상을 취했어.
마음으로 믿을 때 실상을 잡았고, 또 몸으로 믿을 때에, 몸으로 믿을 때에 이제 볼 수 있도록, 몸은 보이지 않습니까? 보이는 몸으로 믿을 때에 볼 수 있는 것이, 볼 수 있는 실상이 나오고 마음으로 믿을 때에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실상을 가지게 된다.
마음으로 믿을 때에 볼 수 없는 신령한 실상을 자기가 벌써 소유하게 됐고, 또 그것을 볼 수 있는 몸뚱이로 그 믿을 때에 볼 수 있는 그 실상을 자기가 가지게 된다. 이것이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실상이라” 이래서 과거에는 내가 깨닫기를 일면으로만 깨달았는데 일면이 아니고 이거는 양면으로 깨달아서 양면을 말한 것이다 하는 것을 비로소 제가 깨닫고 증거를 했습니다.
그것도 여게 따라서 문제가 뭐 하나가 아니라 여러 수십이 나옵니다. 그걸 쓸라 하면 책에다가 몇십 권이 돼도 못 쓸 만치 그렇게 많은 게 되니까 이것을 잘못 깨달으면 뭐 이렇게 저렇게 이단이라, 잘못이라, 삐뚤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하는 게 거기 따라오지를 못해. 벌써 중생된 영이 범죄하지 않는다 범죄한다 이거 가지고 논리를 하는 그 밑에 아주 어린 유치한 거게서는 이런 것은 근방에 오지도 못해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갑니다. 그 믿음을 아는 법은 내가, 믿음 아는 법은 믿음이라. 믿으니까 믿음을 알게 됐고, 또 믿음이 생겨지게 되고 이렇지, 앉아 논리적으로는, 논리에게 이용당할 게 아닙니다. 믿음은 신적 요소이기 때문에 내가 그 사실로 인정해서 거게 복종해서 그 사람이 되어질 때만 되는 것이지 다른 거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그저 자꾸 오면 여러분들이 자꾸 변화가 되어질 터인데, 이 변화가 돼야 알지 변화가 되지 안하면, 성화가 돼야지 성화 안 되면 몰라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권찰님들이, 뭐 지권찰님들은 얼마씩 안 되니까, 식구가 얼마 안 되니까 전화로 해요, 전화로. ‘오늘 새벽에 나왔더나 안 나왔더나, 어떻게 형편이 어땠노, 네가 무슨 노력을 했노, 어데서 실패당했노, 뭐했노?’ 알지도 못하고 새벽기도 나올라 하면은 믿지 않는 마귀들이 그날밤에는 새벽기도 나갈라 하니까 밤새도록 잠을 못 자구로 애를 먹이거든. 요걸 다 알아야 돼. 밤새도록 잠을 못 자구로 해요. 또 친구가 잠을 못 자게 하지 사건이 일어나지, ‘우리가 새벽기도 못 나오구로 할 때에 어떤 놈이 방해나는고 보자’ 하면 그 방해가 막 바다에 물처럼 꽉 짜여 가지고 나를 들이 밀고 들어와서 새벽기도 못 나오게 하는 그 적이 천천만도 넘다는 요걸 발견하고야 ‘햐, 이렇게 어렵고이 적을 이기고 나가는 것이니까 이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안하면 안 되겠다.’ 이걸 아는 것이지. 그냥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뭐 안 나오고 싶으면 안 나오고 그래 되는 것이 아니라 그거요.
오늘 새벽기도 나올라 했는데 못 나온 그자에 대해서 방해하는 자가 몇 십이나 됐는가? 어떤 자는 발견하기를 ‘아, 열이다, 둘이다, 하나다, 요 사람이 그랬다, 조 사람이 그랬다. 자기 좋아하는 사람이 그랬다, 뭐 어떻게 했다, 무슨 친구가 그랬다, 사건이 그랬다.’ 아니야. 나중에 알고 보면은 천천이요 만만이라. 그렇게 즐비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안하면 안 돼. 내 힘으로 다하면 하나님이 도와 주시요. 내가 막지 못할 걸 다 막아 가지고 원수를 막아서 우리에게 새벽기도를 나올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새벽기도 나오는 자도 제가 한 것같이 알고 이러니까 전혀 무식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