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10:38
자기의 나쁜점과 남의 좋은 점을 찾자
1987. 7. 5. 주일오후
본문:빌립보서 2장 5절∼11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오전에 증거한 대로 기독자가 고난 없이 주를 섬길라고 하면 결국은 실패되고 맙니다. 역부러 고난을 자취하는 고행주의가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자는 고난을 가치로 삼든지, 고난을 자기의 또 취미로 삼든지, 고난을 위해서 무엇을 경영하든지 하는 것은 기독교는 아닙니다. 이것은 고행을 위주로 하는 고행주의라는 아주 나쁜 이단입니다.
그러나, 기독자가 정상적인 신앙 걸음을 걸을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고난을 당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과 고난을 당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같이 하나님을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 고난 없이 섬기는 일이 좋습니다. 더 좋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피하면 주님을 기쁘시게도 섬기지도 못하게 될 때에는 고난이 좋아서 고난을 취하고 달게 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기쁘시게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입니다.
빌립보 1장 29절로 30절까지에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아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 얻는 줄 알고 구원 얻는 믿음은 가지고 구원은 탐하면서 주를 바로 섬기고 위할라고 할 때에 고난이 따라오면 그 고난을 피하는 사람 되기 쉽습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주를 위해서 고난도 받아야 할지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또 30절에는, “너희들이 지금도 내게 대해서 보고 듣는 바와 같이 너희들에게도 나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렇게 또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싸움은 무슨 싸움인가? 우리가 하나님은 한 분뿐이시요 사람은 참 몇십억 몇백억도 되는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나 한 분 하나님의 그 본질과 본성과 또 마음과 뜻과 소원과 생각과 경영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세상에서는 각 사람의 그 개성, 또 개심, 개욕 그런 것을 따라서 사는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생각하기를 화원에 가면은 한 가지 꽃만 있으면 관상에 너무도 성글기 때문에 각종 각색의 화초가 있으면 더욱 화단이 아름다운 거와같이 사람들이 수많은 그 개성대로 이렇게 사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움이 된다 그렇게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를 않습니다. 성경은 수많은 기독자들이라도 다 각각 자기 마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이 한 마음으로 다 돌아가서, 수많은 입장과 처지에서 수많은 종류의 신앙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한 마음으로, 같은 뜻으로, 같은 사랑으로, 같은 우애로, 같은 자비로, 같은 긍휼로, 같은 봉사로 이렇게 한 맘 한 뜻으로 해야 된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한 맘 한 뜻이라 말은 여러 사람의 마음인데 여러 사람의 마음을 집합시켜 가지고서 각종 각성의 그 마음을 한테 단합해 가지고 살라는 그 말씀이 아니고 자기 마음은 다 죽여버리고, 주관은 다 죽여버리고 자기 아닌 객관인 예수님 한 분의 마음을 다 자기 마음으로 영접하여서 이래 가지고 살아야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동기도 하나님 한 분으로 동기가 돼야 되고 목적도 방편도 하나님 한 분으로 목적과 방편이 돼야 되고 이래서 맺어지는 결과도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맺어지는 결과가 돼야 되지 나머지기는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타고 맙니다.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람들이 어두워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잡탱이를 가리켜서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요 모래 위에 지은 집이라 이랬습니다.
반석 위에 지은 것은 반석은 한 개요 모래는 종류가 수많습니다. 수많은 인간 토대 위에 세운 것은 다 넘어지고 하나님 한 분의 토대 위에 세운 것만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싸움은 어떤 싸움인가? 대내적으로 자기 안에서는 자기 마음을 죽여 부인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자기 마음을 삼아서 하나될라고 할 때에 자기 안에 있는 싸움이 일어나고, 또 자기 밖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있는데 그것들이 다 요구하고 있는데 내가 거게 귀속하지 안하고 다 그것을 버리고, 아무리 외로와도 하나님 한 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되어 살라고 하니까 대외에 전쟁이 생깁니다. 이래서 마음이 하나님과 합하려고 피조물과 합하려고 하는 데에서 싸움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싸움은 기독자들이 다 싸워야 하는 이 싸움이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첫째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한 분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하고, 또 그다음에는 다른 사람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 3절 끝에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에서든지 하나님과 나와는 마음이 하나되어야 하는 요것을 명심해서 내 마음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영접하여서 하나님의 마음과 나와 한 마음이 되어서 살면 거기서 생명 역사가 시작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과 자기 마음이 하나되지 안하면 아무리 살아봤자 다 헛일입니다.
이것을 제일 위주로 해서 우리가 힘써야 하는데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사람은 전체가 무슨 노력이냐 하면은 자기 마음을 양보하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세우고 모든 사람을 자기 마음에게 귀속시켜서 복종시키려는 그것이 이 세상 사망의 법칙입니다. 그건 전부 다 사망의 법칙입니다. 사망의 법칙이요, 자기 마음을 비워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삼아서 이렇게 사는 이것이 생명의 법칙입니다.
우리가 과거에 세상에서 사망의 법을 지키고 대대로 수천 년 동안 살아 내려왔고, 우리도 밸 때도 그 속에서 뱄고, 날 때도 그 속에서 나왔고, 자라기도 그런 사회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망의 꺼풀을 벗어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이것을 사망인 줄 알고 이 사망의 꺼풀을 벗어나려고 애를 써도, 자기가 죽자껏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이, 벗어나는 노력은 못 되고, 그것이 하나님이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하고 하나되는 이 은혜를 구하는 그 구함의 정도의 실력입니다. 알겠습니까? 앞집 뒷집, 수상 수하, 모든 전후 좌우, 모든 사람, 이 사람들이 전부 가치로 두기를 자기 마음을 양보하지 안하고 자기 마음을 세워서 자기에게 한 사람 복종시키면 그만치 실력 있고 존귀하고, 열 사람 복종시키면 그만치 실력 있고 존귀하고, 그것을 가치로 삼기 때문에 전인류가 그 가치를 얻어서 가치 있는 실력 있는 사람 될라고 모두 다 애를 쓰고 모든 사람이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이 속에서 살면서 자기 부인하고, 자기 부인하는 것이 자살 행위인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아닌 다른 이 곧 하나님의 마음을 따라간다는 이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쉬운 것이 아니고 이것이 또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천만 명을 두고도 물어보면 그것은 다 자살하는 행위고 무가치한 것으로서 생각하지 가치로 삼지를 안하는 세상입니다.
이 속에서 우리가 대대로 자라왔고, 뿌리박혔고, 우리 습관이 이것으로 가득 차 가지고 있는데, 자기 마음이나 욕심이나 생각이나 뜻이나 그런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 한 분에게로 돌아가서 나 아닌 다른 것을 나를 삼고 나는 부인한다는 그 생활이 그렇게 쉽게 되지 안하는 것인데 이것을 말로 알아듣지도 못하니 그 사람이 언제 그 생활이 실천되겠습니까? 이게 된 것만치 건설구원이 되지 이거 안 된 것이 건설구원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요새 모두, 건설구원을 말하면 율법주의니 또 행함을 위주로 하느니 하고서 반대하는 것이 온 세상 교회들입니다, 여러분들. 우리 총공회는 안 그런데 우리 총공회도 이 부인하는 목사들이 십분지 구나 될 것이고 혹 인정하는 사람은 십분지 일쯤 되거나 말거나 이런 정도의 것이니, 이 설교를 해서 누가 들어서 효력이 날 것이라고 설교를 하는가? 과연 그렇습니다. 그래도 증거하지 안하면 파수꾼이 나팔 불지 아니한 뒤에 하나님의 영원한 형벌이 있기 때문에 나팔은 붑니다. 부는데, 들을 자는 들을 것이고 또 업신여겨서 등한히 만홀히 여길 자는 만홀히 여길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 하여” 이것만 하면서ㅡ이 뭐 모든 다 이거 선행은 선행인데ㅡ이것을 하면서 마음을 구별하지 안하면, 백 사람이 해도 백 사람의 마음을 살펴 가지고서 한 마음으로 해야 된다, 같이 하라 말은 여러 종류의 마음인데 결과적으로는 똘똘 뭉쳐서 하나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수많은 다수가 합해서 단일수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같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다수가 합해서 단일수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같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이렇게 모든 믿음 행위를 하면서 “한 마음” 한 마음이면 누구 마음을 양보하고 누구 마음을 주장할 건가? 뉘 마음을 양보할 것인가? 세상에는 자기 마음을 강제에 눌려 그렇지 스스로 양보할 인간은 하나도 없는 세상인데 아무 강제당하지 안하고 스스로 자원적으로 양보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을 다 합해서 하나로 돼야 된다. 천 인이 하는 일이라도 천 인의 마음이 다 돌아가서 한 마음이 되어져야 된다. 한 덩어리 한 마음이 되어져야 된다. 한 마음 누구? 5절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했습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돌아가서 한 마음이 되어져야 된다.
“같은 사랑을 가지고” 같은 사랑은 사람마다 사랑이 각각 다른데 같은 사랑이면 뉘 사랑 따라갈 건고?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따라가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짜든지 하나가 돼야 됩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이 도요 천인 만인이라도 합해서 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이래서 “교회는 한 몸이라” “수많은 교인들은 한 몸에 붙은 한 지체요 한 세포라”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가지고 해라” “아무 일을 하든지 다툼으로 하지 말아라” 아무 일을 하든지 너는 네것 할라 하고 나는 내것 할라 하고 너와 나와 대립되는 그런 걸 하지 말아라. 서로 대립 있는 일을 하지 말아라. 대립 있는 일 하지 말아라.
그러면 대립 있는 일 하지 말라 하면은 전부 모든 사람에게 다 자기를 양보해서, 그러면 자기 주장 없이 하면 된다 말입니까? “다툼으로 하지 말아라” 그러면 다툼으로 하지 말라 말은 두 사람이 하는 데에, 두 사람이 하는데 두 사람의 그 의를 행하는 마음이 두 마음이 되고 두 의견이 되고 두 주장이 되면 안 된다 말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양보하라 말입니까? 열 명이 해도 예수님 한 분의 마음, 예수님 한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해야 되지 둘이 해도 분쟁하면 헛일, 억만 명이 뭉쳐 가지고 해도 하나되지 안하고 그 속이 둘 이상이 되면 헛일.
또, “허영으로 하지 말고” 허영은 인간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 건 전부 허영입니다. 하나님 한 분을 영화롭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 하나님께 영광되는 것. 이것도 다 어려운 말입니다. 실컷 해도 제게 영광되게 할라 하지 하나님에게 영광되게 할라고 하지 안하는, 제게 영광되게 하면 그게 아주 알속 있고 좋은 줄 알아도 손해입니다.
우리 교회에 전자올갠이 이제까지 없었는데 어떤 사람이 전자올갠을 산다고 말하기 때문에 ‘전자올갠은 우리가 사겠다. 그러니까 너는 하나님게 연보해라.’ 연보하고 전자올갠은 우리 교회서 샀습니다.
그라니까 그 사람이, ‘내가 사는데 그렇게 안 하면 좀 나를 알아주고 아무 것이 샀다 그러면 좋을 터인데 목사님이 왜 저렇게 하는가?’ 그런 마음을 가졌으면 내가 당장에 하지 말라 했을 것이라. 저는 여러분들이 나를 삼십육 년 겪어봤지마는 아니면 아니라고 뭐 당장이요, 뭐. 죽음 앞에서라고 요동치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민군 앞에서도 당당히 할 일을 하고 살았습니다.
이러니까 자기는 자기대로 하나님께 바쳤고 이리 해서 이런 것이 다 뭐이냐? “허영으로 하지 말고” 요 성경을 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모처럼 하는 일을 하나님 영광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되지 못하고 그 영광을 인간이 쪼그매라도 받아버리면은 하는 저도 벌받고 하나님에게도 진노되고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이게 사랑이라. 이것을 알기 때문에 하지 모르는 인간 같으면 또 그렇게 시키면 삐꿔 돌아가. 우리 교회서 삐꿔 돌아간 일 많습니다.
우리 여기 비디오 지금 하고 있는데 이 비디오를 그때 장로님 다섯 분인가 네 분인가 서둘러 가지고서 이것을 했습니다. 할 때에 저는 거기 대해서 찬성을 한 마디도 안 했습니다. 아마 섭섭했을 것이오. 또 뭐 뭘 한다고 하는 것도 반대나 하지 내가 환영하지 안했습니다. 왜? 그럴 때에 자기네들을 쏙 빼버리고 없애버리고 하나님 하도록 그래 하면 좋을 터인데 이제까지 배우고 했는데 하는 것이 조금 빛깔이 다르기 때문에 그게 비위가 상해서 그리 했었습니다.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복음의 일을 해도 네것 내것, 우리는 고려파다, 우리는 총공회파다, 합동파다, 또 통일파다, 성결파다, 침례파다 이래 가지고 그 파 있는 거는 좋습니다. 좋은데, 자기네들이 하는 것은 칭찬하고 좋아하고 삐뚤어져도 가루어서 덮을 줄 알고, 조그매라도 좋은 거면 뭐 드러낼 줄 알고, 다른 데서 하는 것이면 삣고 깎고 헐고 이렇게 하니 정말로 한심한 것입니다.
이게 다 다툼으로 하기 때문에, 교파마다 열심히 하는데 그것도 ‘어느 교파에서 저와 같이 하니 우리도 다 같은 구속을 받아 가지고 해야 될 것 아니야? 왜 우리는 못 하노? 우리도 열심히 하자.’ 얼마든지 좋지마는 그 속에 다른 이 하는 것과 제가 하는 것이 있어서 신앙도, 신앙 생활도, 의도, 진리도, 복음 운동도 남의 것 제것이 있다고 하면은 그거는 벌써 귀신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다툼으로 하지 말라는 이 말에 막 가슴을 치고 내가 이짓 한다고 이짓 한 그 아프고 이래도 이 가짜되기가 쉽고 이 고치기가 어려운데 그것을 자랑삼아 하고서 이렇게 아픔이 없이 하니 언제 그것이 고쳐지겠습니까? 또, “허영으로 하지 말고” 허영은 다 자기 좋게 자기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다허영입니다. 자존하신 한 분 하나님 그분을 영화롭게 그분에게 영광되게 한 것이라야 이게 허영이 아니지 나머지기는 전부 허영입니다.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이라 말은 오전에 뭐라고 배웠습니까? 겸손한 마음이라는 겸손이라 하는 것은 뭣이라고 했습니까? 정상.
정상. 겸손이라는 것은 옳은 것은 옳은 줄 알고, 그른 것은 그른 줄 알고, 죄인은 죄인으로 알고, 부족한 것은 부족한 줄 알고, 무능한 것은 무능한 줄 알고, 자기를 똑똑히 바로 알고 바로 행동하는 것이 겸손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그게 내나 그말이오. 자기를 바로 모르고 하는 행동은 다 교만입니다. 또 그 모든 삐뚤어진 걸 옳다고 하는 것도 다 교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네가 어데까지 타락됐으며, 어느 멸망 가운데 빠졌던 자이며, 어떤 어떤 그 대속을 입어 가지고서 네가 나온 자이며, 오늘도 그분이 아니면 일 초도 살 수 없고, 그분이 아니면 숨도 못 쉬고, 그분의 것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네 밑천을 환하게 알면, 너를 알면 네가 너 자랑하고 남 멸시하고 이렇게 할 수가 없는 네인데, 공연히 그래 너를 모르고 이와같이 과인하고서 과대 평가하고 과상해 가지고서 이와같이 되는 이런 것이 없이 네가 너를 똑똑히 알고 네 정상적인 네가 돼 가지고 하고 정상적인 네가 돼 가지고 살아라 그말입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요것도 도덕으로 하는 말 아닙니다. 요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인생의 본분이오. 인생의 정상이오.
남을 낫게 여기라 말은 언제든지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은 나에게 우대를 받을 존재요 나는 그를 섬길 존재라. 나는 그를 위해서 있고 그는 나에게 위함을 받고, 나는 그의 종이 되고 그는 나의 상전노릇 하는 이렇게 내가 나를 생각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요거 무슨 선을 하는 게 아니고 그거 정상이오. 요거 아닌 건 전부 비정상입니다.
사람이 요 정상에서 떠나서 제가 한 사람보다 낫게 생각하면 그만치 비정상이고, 백 사람보나 낫게 생각하면 그만치 비정상이고, 그러면 나은 거는 뭐인데? 나은 거는 제것 아니고 주님이 와 주님의 것이 나았지, 주님의 것이 제게 와 가지고 그렇지 제것으로 나은 것이 어데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게 정상인데 우리가 정상된 사람이 돼야 될 터인데 비정상 그것은 정상인 줄 알고 정상의 이 심지는 이것은 비정상으로 알고 사는 것이 우리기 때문에 이거 완전히 고쳐야 됩니다.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자기 일을 돌아보라 그말은 자기 할 일이 뭐인지? 자기 할 일을 다 했는지? 자기가 지금 빚진 것이 없는지? 자기 의무와 책임과 본문을 다 했는지? 남에게 줄 걸 다 줬고 타를 위해서 있는데 위하는 본분을 다 했는지? 이러기 때문에 오전에 우리가 작정한 것은 자기가 한 것은 많이 했든지 적게 했든지 그거는 하늘나라에 가서 갚음을 받을 터이니까 오늘은 생각할 것 없고 자기에게 생각할 것은 무얼 생각하라 했습니까, 오전에? 뭘 생각하라 했소? 쉬운 말로 단점이라고 말했는데, 단점이라고 했는데 단점이라 말은 자기가 모든 자기 아닌 객관에게, 자기 아닌 창조주도 있고, 자기 아닌 모든 사람들도 있고, 자기 아닌 마귀들도 있고, 이러니까 자기 아닌 모든 객관에게 대해서 자기가 할 일을 못 한 것이 뭐인고, 할 일 한 것은 생각해 볼 필요가 없고. 할 일은 했으면 뒤에 상이나 받지 뭐 지금은 할 필요가 없고. 못한 그것을 찾기 위해서 못 한 것은 그거 뭐이냐? 단점이라.
자기가 못 한 것 말이오. 할일 못 한 것, 책임 못 한 것, 의무 못 한 것, 본분 못 한 것, 봉사 못 한 것, 높이지 못한 것, 위하지 못한 것, 섬기지 못한 것, 줄 것 주지 못한 것 그런 것 이것을 가리켜서 자기 단점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아”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첫째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이 어떻게 하고 있노?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본분을 어떻게 하고 있노? 다른 사람이 못 한 거는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 한 것 보고, 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한 그런 거는 내비두고 자기 못 한 것 보고, 자기에게는 자기 하지 못한 것 보고,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자기 본분한 것 다른 사람의 의무와 책임을 한 것, 다른 사람에게는 그 사람의 좋은 점 옳게 한 점 그점을 보고,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나의 기쁨은, 나의 기쁨은 사도 바울의 기쁨입니까 누구의 기쁨입니까? 누구의 기쁨입니까? 하나님의 기쁨이오, 성령이신 하나님의 기쁨.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자” 이렇게 말씀했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성경에서 여게 저게서 찾아 가지고 그저 간추려서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 따라가지 말고 하나님 따라가서 하나님하고 하나돼라 하는 이거 하나님 기쁘시게 하는 것이고, 또 네가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하지 못한 네게 단점, 네게 잘못된 것, 할 것 하지 못한 것, 안 할 것 한 것, 이러기에 잘못된 것 찾아서 힘써 고치고 하나님에게 고쳐 달라고 구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점 그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자기가 볼 때도 감동이 되고 모본받을 만하고 좋은 점이고 장점이고 하는 그점을 찾아 가지고 자기도 그와같은 것을 자기에게 마련하도록 노력하고 또 마련해 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해서 구해서 마련해 주심을 받고, 또 자기의 잘못된 점을 찾아 가지고서 거게서 두 가지 해서 안 되는 것 낙망하지 말 것 게을하지 말 것, 또 다른 사람의 이 장점을 찾아 가지고서 해서는 안 되는 것 두 가지, 사람 높이지 말고 사람 따라가지 말 것. 이것을 시시하게 알지마는 그 사람이 성화되지 안했으면 모릅니다.
다른 사람 좋은 점 있으면 본받아서 그를 따라가고 그를 높여 줘야 된다 하는 것이 일반 해석일 것인데 저는 정반대입니다. 따라가다가 망하는 걸 나는 너무 많이 봤어.
내가 예수 믿은 지가 그래도 한 오십여 년 됐고 했는데 잘한 사람 따라가다가 망하는 것 많이 봤고, 잘한 사람 창찬해서 그 사람 망치는 것 많이 봤고, 다 망했어 뭐.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안 한 것 이거 말하고 이래 가지고 다른 사람이 높여 가지고서 안 망한 사람이 없습니다.
나도 요새 내가 자꾸 위험한 말 합니다. 위험한 말 하는 것은 내가 신사참배도 안 했고, 동방요배도 안 했고, 그들과 매일 격투로 투쟁했었고 이것을 말 안 하고 가만히 숨겨 뒀었는데 그만 이제 나이가 한 팔십이 되니까 노망을 하는지, 여러분들을 사랑해서 구원하고자 하는 그 욕심이 강한지 이거 내 말은 말로 안 닿기 때문에 자꾸 이거 좀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해서 이제 이랬으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높이면 반드시 내가 그로 말미암아 넘어지고야 맙니다. 넘어지고야 맙니다. 높여 가지고서 떨어지지 안한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랬는데, 여러분들이 나를 높이지 마십시오. 여러분들이 또 똑똑히 알고 보면 기함할 만치 그런 더러운 단점이 꽉 찼는 내입니다. 그저 말씀만 듣고 행하십시오.
이래서 오전에는, 앞으로 내일부터 월요일부터 월, 화, 수, 목, 금, 토. 엿새 동안에는 자기 나쁜 점을 찾는 것과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찾는 요것만 일주일 내내 계속하자. 계속해서, 그 일만 할 게 아니라 그만 그 사람이 되도록. 이제 다음 일주일 딱 지나고 난 다음에는 언제든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사람의 좋은 점만 볼 줄 알지, 좋은 점만 볼 줄 아는 요 색경이 돼서 좋은 점만 볼 줄 알고 나쁜 점은 보지 안하고 좋은 점만 보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나쁜 점만 보고 요 사람이 되도록, 자기에게 대해서는 나쁜 점만 보는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점만 보는 그 사람으로 사람을 바꾸자 하는 요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사람이 바뀌어질라고 하면은 그런 행사를 많이 해야 사람이 바꿔집니다.
그런 행사를 해야 사람이 바꿔집니다. 이런고로 그런 행사를 많이 해 가지고서 사람이 바꾸어지도록 그렇게 하자. 그러면 그런 일을 하자. 남의 좋은 점만 보고 자기의 단점만 보는 그것을 자꾸 이렇게 하루 종일 계속하고 이틀도 계속하고 사흘도 계속하고 자꾸 이리 계속하다가 보니까 그만 그 사람이 돼 버렸어.
그 사람이 됐으면 그 사람은 이 세상 사망 법칙으로 본다고 하면은 완전히 못쓸 인간 아무짝도 못쓸 완전히 그거는 패배자 아무짝도 못쓸 인간이 됐다고 세상에서는 평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 사람은 온전하고 깨끗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대자가 됩니다.
요것을 다음 주간에 우리가 일주간 내내 요 일만 하자. 요 일만 하자. 공장에 가도 요 일만, 길 가도 요 일만, 예배 볼 때도 그저 하나님 말씀 들을 때 아니면 요 일만, 혼자도 여럿이도 요 일만, 요 일만 계속하도록 요렇게 일주일 내내 해 가지고서 사람이 바꾸어지도록.
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이라니까 이제는 행위를 고쳐서, 턱 사람 만나면, 남을 낫게 여기라 했으니까 자기 생각하는 것보다도 다른 사람부터 먼저 생각해야 될 터인데 사람마다 만나보면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됐든지 제 주머니부터 생각합니다. 제 입장부터 생각하요. 다른 사람 생각지 안하고 저부터 먼저 생각하는 요 행세를 완전히 뜯어고쳐야 되겠습니다. 완전이 뜯어고쳐야 되겠어.
생각도 제 생각뿐이고, 도모하는 것도 제 도모뿐이고, 유익되는 것도 제 유익뿐이고, 손해도 제 손해만 알고 남의 손해 생각할 줄 모르고, 제 손해보다도 남의 손해 먼저 생각하고 제 손해 다음 생각하고, 남의 유익 먼저 생각하고 제 유익 뒤에 생각하고 이래야 될 터인데 남보다 자기를 먼저 생각하고 자기를 낫게 여깁니다. 요 행세를 우리가 뜯어 고칩시다.
이 행세는 가증스러운 행세요 이 행세는 추하고 더러운 행세입니다. 이거는 짐승의 행세요 사람의 행세는 아닙니다. 이거는 사람이 변질된 육체의 행세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영의 행세는 아닙니다.
자기의 단점만 생각하는 데에 노력할 것이 몇 가지라고요, 손가락으로? 자기의 단점만 보는 데에서 자기가 해야 될 일 두 가지, 또 자기의 단점을 보는 데서 자기가 해서는 안 될 일 몇 가지입니까? 손가락으로. 두 가지.
남의 좋은 점을 보고서 자기가 노력할 일이 몇 가지입니까? 노력할 일 몇 가지, 손가락으로. 두 가지. 저 미국서 온 사람 두 가지 이래 들어, 손가락 두 가지. 둘.
그래. 또 안 행해야 될 일, 안 해야 될 일은 몇 가지입니까? 안 해야 될 일 몇 가지? 둘.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오후에 본 말씀입니다. 그러면 요것도 여러분들이 그저 해석을 들을라고 말고 자세히 깨달으면 됩니다.
5절에 보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위에 말한 것을 한번 되새겨서 다시 말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될 것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거는 누구에게 했습니까? 이거는 누구에게 한 것이지요? 이거는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목사님, 누구에게 한 것이요?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요? 예수님에게 한 것입니까? 그래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거는 누구에게 대해서 한 것이라요? 누가 한 것이라요? 누가 한 것이라요? 누가 한 것입니까? 누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저래 놓으니까 깜깜하게 저래 놓으니까 성경을 뭐 깨달아 나갈 리가 있어야지. 누구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저 ○○○교회 미쟁이? 내가 알기 쉽게 하기 위해 하는 거라.
삐꾸지 말아요. 뭐이지? 또? 택한 백성들에게.
동생이 왔으면 잘 대답해. 동생 좀 잘 깨달아요. 그거 좀 잘 기르면 괜찮겠는데.
동생. 동생 왔어? 동생 여기 왔어? 안 왔어? 그때 내가 한 마디 하고 그라니까, 제가 잘 못 깨달았어. 더 배워야 돼. 그만 안 오네. 그거 좀 잘 깨닫는데 고거 잘 배우면 희망 있는데 그래 나가버리면 헛일이라. 못써, 그만. 거기서 더 깊이 잘 깨달으면 돼요.
요것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한 일입니다.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안 맞아요? 이거는 환하게 아는 것데 이거 뭐 알기 어려워요? “그는” 하는 거는 예수님 아니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의 본체이지마는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랬으니까 누구한테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요? 하나님께 대해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안하시지 안했어요? 이런 것을 몰라, 이거야 뭐 환한데?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자기를 비어” 자기를 왜? 누구에게 대해서 자기를 비웠다 말입니까? 누구에게 대해서 자기를 비웠소, ○○○목사님? 하나님에게 대해서 자기를 비웠지요.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종의 형체를 가졌으니까 누구에게 대해서 종노릇 합니까? 누구에 대해서 종의 형체 가졌습니까? 누구에게 대해서?○○○집사님, 하나님께 대해서. 좀 얼떨떨한 것 아닌가?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들같이 되었으니까 누구 앞에서 사람들같이 되었습니까? 하나님께 대해서 사람들 같이 됐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사람 모양으로 누구 앞에서 나타났다 말입니까, ○장로님? 누구 앞에서 사람 모양으로 나타났다 말이요, 저 ○장로님? 누구 앞에서? 누구 앞에서? 왜 대답 안 해? 모르면 모른다 하든지 하지.
우리 교회서는 인제 다음 주일날 장로 지금 여기 인사시킬 거라. 이래 놔야 장로들이 좀 인제 좀 콧대가 좀 쭈그러지지. 왜 그러냐 하면 이 장로로 떡 일으켜 세워 놨으면 모두 다 장로님으로 알고 ‘장로님, 장로님’ 하는데 장로노릇 안 하면 뒤에 가서 얼마나 수치를 당할 것입니까? 인제 큰 시집 살리게 됐어. 이제 시집을 좀 살려야 되겠어.
“자기를 낮추시고” 또, 누구에게 대해서 자기를 낮췄다 말입니까? 이거야 다 알 수 있지 않소? 하나님께 자기를 낮추지 안했어요?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누구에게 복종했어요?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 이 8절까지에 한 일이, 5절로부터 8절까지에 하는 일이 누구에게 대해서 한 일입니까, ○○○권사님? 하나님께 대해서 한 일은 틀림없습니까? 틀림없어요? 하나님께 대해서 한 일은 틀림이 없는 사람 손 들어 봐요. 녜, 틀림이 없습니다.
틀림이 없습니다.
이랬는데, 하나님께 대해서 한 일은 틀림없고 전부 하나님께만 대해서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했습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했는데, 하나님께 대해서 했는데 그 효력은 누구에게로 갔습니까? 그 효력은 누구에게로 갔소? 그 효력이 누구에게로 갔어요? 효력이 예수님에게 갔어? 고 효력은 누구에게 갔어? 예수님에게 갔다.
○○○집사님, 얼떨떨한가배. 어데 갔어? 안 들려. 우리에게 왔어. 하나님에게, 순전히 하나님에게 했는데 그 효력이 우리에게 왔습니다. 요게 신앙 생활이오, 요게 신앙 생활. 요게 대한 정의를 모르면 신앙의 맛을 모르고 그 신앙은 소경 행위 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 순전히 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대해 순전히 한 일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사람을 위한 일이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위한 일이고 사람 위한 일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니? 동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동기는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시작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 됐습니다.
하나님을 상대해서 했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려는 목적에서 했습니다. 요것이 기독자의 올바른 신앙 행위입니다. 요렇게 몇 가지로 가지고서 자타의 신앙 행위를 구별한다면 더듬을 것이 없어. 환하게 정평 정가가 나옵니다.
이라니까 9절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그를 지극히 높여” “지극히 높여” “이러므로” 위에는 뭣 됐소? 위에는 낮아졌습니다. 위에는 낮아졌소. 위에는 낮아졌는데 아주 박살이 되고 낮아졌는데 이제 당신은 하나님을 향해서 낮아지고 깨지고 박살됐습니다.
박살됐는데, 당신이 올라갈라고, 이 세상에 선거 운동하면 전부 제 자랑하고 돌아다닙니다. 나는 이렇고 이렇고 나를 이래 알아 주십시오 이래 하고 다니지마는 이 생명 생활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꾸 자기를 낮추고 높이는 이는 따로 있고, 자기는 자기를 자꾸 깨뜨리고 다른 사람은 뭉쳐 세우고, 자기는 자기를 삦고 깎아서 단점만 보고 다른 이가 자꾸 살을 붙여서 키워서 높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이러기 때문에 자기 크는 일을, 자기 높이는 일을, 자기 영광스러운 일을, 자기 명예있는 일을, 자기 위하는 일을 하나님이 하게 하지 안하고 자기가 하는 그것은 사망 행위요 자멸 행위입니다.
자살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위하는 그 위함이 사람 위함이 되는 이 일로서 자기는 자꾸 죽어지고, 낮아지고, 약해지고, 작아지고, 가난해지고, 죽어지고 이러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높여서 지극히 높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자기를 높일라고, 어짜든지 우리 교역자들도 보면 그 참 생각이 달라. 뭐 어데 좀 큰 교회로 부임하라 하면은 뭐 이의가 없고 당장 번개같이 순종합니다. 번개같이 순종합니다. 기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일거리 많은 그런 낮아지는 그런 곳으로 가라 하면 그만 실쭉하요. 그거 다 예수 믿는 이치를 몰라 그렇습니다.
저는 낮아지는 게 저 하는 길이라. 작아지는 게 저 하는 길이고, 가난해지는 게 저 하는 길이고, 천해지는 게 저 하는 길이고, 죽는 게 저 하는 길이고. 하나님은 자기를, 자기가 자기를 그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그렇게 하면은 하나님이 자기를 높이고 키웁니다.
과거 제가 저 거창 산골에 있을 때에는 이 부산에 일본 들어갈 때 한번 와 보고 부산이니 서울이니 못 가 봤어요. 거창에 있어도 합천 해인사 못 가 봤습니다. 저 위천 수성대라 하는 데도 못 가봤는데 어째 한번 요행이 돼서 갔소.
이랬는데 마산에서, 마산 무슨 교회고, 조 권사님이 있는 교회? 신마산교회.
신마산교회 그리 오라 하는데 그때 그런 교회는 감히 찾아보지도 못합니다, 겁이 나서. 아주 큰 교회고 좋은 교회고 부자 교회입니다. 이랬는데도 그 교회로 오라 하고 저 위천교회로 오라 하는데 위천교회는 그때 쪼그만한 교회입니다.
그럴 때에, 나는 그렇지 안한 사람인데, 오라 하니까 내가 있다 말하기를 속으로 말은 안 해도, ‘위천교회요?’ 내가 이래 놨다 말이오. 집회 갔다 오면서 그 교회에 ○○○목사님 자기 장모가 있다가 말하기를 ‘조사님 우리 위천교회로 오십시오. 위천교회 비어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라는데 내가 말하기를 ‘위천교회요?’ 하도 우스워서 `위천교회요?' 했는데 요놈이 속에 그만 알맹이가 돼 버렸어.
그다음부터 ‘위천교회요? 위천교회요?’ `너는 위천교회보다 훨씬 크지?’ ‘위천교회요?' `위천교회는 뭐이 위천교회지?' `위천교회요?' 어떻게 그만 밥을 못 먹고 며칠 동안 고통을 하고 난 다음에 이인재 목사님이 두 번이나 신마산교회로 부임해 달라고 청원을 두 번이나 거창까지 올라와 가지고서 그렇게 말해도 거게를 못 갔습니다. 저 위천교회, ‘위천교회요?’ 하는 그 말이 하나님 앞에 죄가 돼서 한 자욱을 옮겨 떼지를 못하고 그리 갔었어.
우리가 요 도리를 알아야 됩니다. 순전히 하나님에게 대해서 한 일인데 그 한 일에 효력은 전부이 이 멸망받는 인간들에게 다 효력이 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 곧 멸망하는 죄인들을 구출하려는 이 일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서 지극히 높였다 그랬어.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앞으로 요번 주간에 세 가지 할 일인데 자기 단점, 남의 장점, 인인 관계 할 때에 남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위하는 것이 선한 일 하는 게 아니라 위하는 이것이 물벌거지가 물에 사는 것이 제 생의 법칙이기 때문에 물에 나오면 죽어버려. 새는 나무에 사는 것이 제 생의 법칙이기 때문에 물고기 물에 사는 거 시원하고 좋은 줄 알고 물에 들어가 버리면 저는 죽어. 이와 마찬가지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면 이것이 사는 법칙이라. 선한 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생의 법칙입니다.
이래서, 이 세 가지 우리가 다음 주간에 연습하고, 연습을 하면은 이 일을 못 하도록 마귀란 놈이 야단을 지길 건데. 좀전에도 벌써 마귀가 와 가지고 저 수위실에서 야단을 치고 고함을 지르고 뭐 싸움이 한바탕 일어났어. 내가 여게 가만히 짐작하기를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마음이 그리 가서 설교가 삐끌어지도록 할라고 그렇게 마귀가 애를 써. 그래도 내가 요동치 안했어. 설교 그대로 계속하니까 그놈은 패전하고 달아나 버리고 요 설교 했어요. 나중에 예배 마치고 가봐요. 아마 무슨 잡이가 한 잡이 난 것 같애.
이렇게 요 세 가지 일을 요 하는 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일이기 때문에 요 하는 일은 순전히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요 세 가지를 여러분들이 하면,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요 세 가지를 하면은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둘째는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둘째로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자, 우리 뚱뚱이 목사님 ○○○목사님, 둘째는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자기를 위함이 된다. 서영준 목사님, 뭐라 하노? 남을, 둘째로 남을 위함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요게 꼭 성경법대로 돼 나가는 거라. 주님 하시는 발자취를 따라가는 거라. 처음에는 세 가지 하는 것이 주님이 하라 했기 때문에 주님 위해서 하는 것이라, 주님 위해서 하는 것.
남의 장점만 보고 자기의 단점만 보고, 남의 장점만 보고 네 가지, 자기의 단점만 보고 네 가지, 남과 자기와 서로 상대할 때에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위하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먼저 위하고 요라는 것 요 세 가지 일을 우리가 다음 주간에 하게 되면 요 전부는 다 주님을 위하는 일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을 위하지 안하면 헛일이라. 주님 위하는 일이 돼.
주님이 명령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백 목사님이 다음 주간에 지금 이 세 가지 하는 주간으로 삼자 하는 것은 내 말이 아니라. 주님이 하라고 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뿐이오. 좋게 말하면 주님의 입이 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말하는 것이요, 좀 박하게 말하면 주님의 스피커가 돼 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지금 말하는 것이오.
이러니까, 주님 명령인 것을 알고 요 세 가지를 하면 첫째는 하나님 위하는 일 되고, 둘째는 그라면 누구 위한 일 돼요? 남을 위한 일 돼요, 남을 위하는 일.
이라면은 모든 사람의 양식이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이 됩니다. 이라면 만나는 사람마다 구원이 돼요.
자기 먼저 생각지 안하고 남 먼저 생각하면 그 사람과 보고 듣는 사람에게 구원이 됩니다. 자기 단점 남의 장점 보고서 네 가지 노력하면 보는 사람의 구원이 되고 듣는 사람 구원 되고 접촉하는 사람에게 구원이 됩니다. 될 상합니까 엉터리요 거짓말입니까? 예, 그렇게 하면 모든 사람의 구원이, 모든 사람을 위함이 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되겠다고 생각되는 사람? 그 위함이 될 상바릅니까 안 바릅니까? 둘째로 모든 사람 이웃을 위함이 될 것 같습니까 안 될 것 같습니까? 될 것 같습니까? 그라면 손 들어야지 왜 안 들고 그래. 그래도 손 들어야지. 그러면 됐어.
이래 가르치면 어린아이들 가르치는 것 같지마는 여게는 하늘나라는 어린아이라.
여기는 박사 열 가진 사람이 여기 와서는 어린아이가 돼 가지고 배워야 돼. 저거 그거 가지고는 죽는 박사고 죽이는 박사지 살리는 박사는 아니야.
그라면 셋째는 누구를 위함이 됩니까? 예? 셋째는 누구 위함이 되지요, 그렇게 하면은? 셋째는 자기 위함이 되는데 자기 위할 때는 자기가 위합니까 이웃이 위합니까? 하나님이 위해 줍니다. 하나님이 위해 줘. 여러분들 똑똑히 알아.
예수님께서 제일 처음에 누구 위했어요? 누구 위했어요? 하나님 위했고, 그 하나님 위한 것이 두번째는 누구 위한 게 됐어요? 우리 위한 게 됐지요. 그러면 세번째는 누구 위함이 됐어요? 큰 소리로 좀 해 봐. 뭐 기운이 안 나는가배. 당신 위함 됐지. 당신 위할 때는 누가 위했어요? 하나님이 위했어! 멋지게 위해, 멋지게! 이것이 천국 가는 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자기가 왕이요 자기가 제일 요긴하고 보배지마는 하늘나라 가는 데는 자기를 부인해야 자기를 인정함이 되고 자기를 건축함이 됩니다.
이제 어짜든지 내일부터 이거 실시인데 어짜든지 내일부터는 이제 꼭 한번 실행해 보십시오. 실행해서 요 세 가지를 요번 오는 주간에는 요 세 가지만 전공하는, 요 세 가지만 전공하는 이 전문하는 이 주간이 되도록 해 봅시다.
이 세 가지 해서, 그라면 이제 보면 사람들의 얼굴이 달라질 거라. 얼굴도 달라지고 또 향기도 달라지고, 나는 금요일날 밤에 어떤 집에 한 군데 심방 갔는데 어떻게 주님 찾고 행동하는 데 향기가 나오고 좋은지 어떻게 좋은지 하도 좋아서 내가 있다가서 옆에서 코에다 코를 대고 한번 맡아 봤어. 이 코에서도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오나? 곧 지금 숨이 갈라고 깔딱거리는데 코에다 내가 요래 딱 대고 맡아 보니까 코에서도 향기가 나오고, 그렇게 아프면 속에서 막 쇠똥내가 나고 굉장할 건데, 죄 지은 사람의 그 코에서는 뭐 쇠똥내가 나고 굉장할 건데 보니까 향기가 나와. 내가 있다가서 ‘코에서 아무 악취가 나오지를 안하네요. 다 그래 해요?’ 하나도 안 나와. 그래서 집에 오니까 기쁘고 즐겁고, 그때 보니까 어떻게 좋은지 그만 그 사람이 가는 데에 나도 같이 따라갔으면 싶은 마음이 있습디다.
내가 어제 저 양산동 기도실에 가지고서 이래 있으면서 어떻게 사모가 되는지 또 한번 전화를 했어. 하니까 훨씬 좀 나아서 좀 뭘 미음 먹는가 뭐 한다 하는데, 말은 한다 하는데 전화로써는 듣지를 못했어요.
여러분들, 주님만 사모하고 주님만 생각하고 주님 한 분만으로 전부 하면 주님 한 분을 위하는 행동에는 막 향기가 나옵니다. 주님을 위하는 그 마음에는, 주님을 위하는 정신에는, 주님 위하는 거기에는 굉장한 향기가 나오고 굉장한 기쁨이 나오고 굉장한 맛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거는 뭐 송장이라도 물고 빨고 싶은 뭐 사람이 되고 마는 거라요.
참 예수 예수 보배로운 예수지마는 이 예수를 오늘에는 얼마든지 자유로 취할 수 있지마는서도 가면은 그다음에는 취하기 어렵습니다.
이러니까, 자, 다음 주간에는 우리 주님은 몇 가지로 위하기로 했습니까, 손가락으로! 몇 가지로 위하기로 했습니까? 뻐뜩 들어 봐요. 나는 밑에는 안 보이요. 버뜩 들어 봐요, 좀 팔을 쭉 펴서. 이래 한번 뻐뜩 한번 들어 봐, 이래 좀.
이래 한번 뻐뜩 들어 봐. 이 모두 곰배팔이네. 이 젊은 사람 남반들은 다 드는데 여반들은 모두 다 신경통 있는가 이래 한번 뻐뜩 들어 봐, 이래 들어 봐.
○○○집사님, 못 들겠어? 더 못 들어? 퍼뜩 한번 들어 봐, 이래 이래.
그래. 다음 주간에는 세 가지. 잊어버리지 맙시다, 세 가지. 어짜든지 다음 주간에는 새벽 예배 설교하는 것도 이거 할 것이고 어짜든지 세 가지, 세 가지 우리는 다음 주간에 전공 기간입니다, 전공 기간. 전문 기간. 이제 이 세 가지만 하는 그 주간으로 합시다. 세 가지.
자기 단점, 남의 장점, 대인 관계에 먼저 상대방부터 생각하고 위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로서는, 그다음에 자기 위해야 됩니까? 처음에 상대방 생각하고 위하고 그다음에는 누구 위해야 됩니까? 자기 위하면 또 죽어. 상대방 생각하고 위하는 마음 가졌으니까 이제는 자기는 생각한 대로 위하는 대로 그대로 할 것뿐이라. 이게 사는 길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답답해서 바울이 말하기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사망법에는 그렇지 안하지마는 생명법에는 그렇습니다.
이제 다음 주간 요 세 가지 요것을 전공하기로 요것만 전적 힘쓰기로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사람들 자,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표로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녜, 이제 다 됐어.
요것만 하면 이번 주간에 요래 가지고 요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놀랄 거야.
하나님이 놀랄 거야. ‘햐, 너거 서부교회가 나는 이런 줄 몰랐다.’ 놀랄 거야.
놀라고 ‘야, 머리가 허여이 다 죽어가는 송장 같은 백 목사 잘한다.’ 또 놀랄 거야. 그라면 이제 당신 위함 모든 이웃 위함, 자기 위하는 것은 누가 위해 줘요? 하나님이 위해 줘요.
이제 다음 주간에 요거 꼭 실시합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실시합시다. 요라면 여러분들에게 요 일을 실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악마의 마귀가 굉장할 것입니다. 해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염려 말고 하십시오. 하면 승리는 내것입니다.
자, 그 찬송 뭐 ‘믿고 살자’ 하는 그거 몇 장이요? 72장? 이 찬송 힘있어. 72장.
여게서일랑 통일 합동 그런 것 말하지 말아요. 가만 있어, 내가 광고 하나 합니다.
좀 미안합니다, 광고.
무엇이든지 우리가 개혁을 할라 하면은 힘이 안 드는 것 아닙니다. 우리 이번에 찬송가 만드는 것 사람들은 시시하게 알고 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은 전부 통일이 좋다고 다 그거 다 사 버렸어. 서울이 굉장한 곳이라. 좋을수록이 더러워요.
서울이 부패하기는 어떻게 잘 가속도로 부패해지는지.
이 찬송이 제이 성경입니다, 제이 성경. 찬송에 있는 그것이 그 사람에 벌써 교리와 신조가 되고 맙니다. 이런데 그 찬송가에 교리와 신조에 큰일 날 그런 삐뚤어진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 찬송가에는 그런 것 다 고쳤어. 다 고쳤어. 다 고치고, 외나 성신의 감동 받아서 찬송 지은 사람은 따로 있는데 그 뒤에 사람들이 다 고쳐버려. 제 생각대로 다 고쳐버렸어. 잡탱이가 되고 말았어. 이런 거, 찬송 지은 사람의 그 사람의 영감 받아 지을 때의 그것이 좋은 것은 고거 전부 다 복구시켰습니다.
복구시켜 다 그래 해 놨어. 이러기 때문에 이 찬송 이것이 하나 큰 개혁이라.
무슨 개혁 운동 한다고서 뭐 사람이 몇백 명 몇십 명 죽고 몇천 명 죽고 하는 그 개혁보다도 이거 큰 개혁입니다.
우리 총공회는 요 찬송가에 지금 요 조금 활자 잘못된 거 그런 것 몇 가지 불구비한 게 있는데 그런 것 수정해 가지고서 할 수 있으면 요것을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요 찬송에 더 보태지 안하고 요거 가지고서 계속 부를 것입니다.
세상에는 찬송가가 이제 달마다 변해 갈 것입니다. 변해 갈 것이고 우리가 요래 함으로서 찬송가가 변하지 안하고 다 또 수정해서 할란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 큰 개혁인데, 이것도 다 목회설교록에 다 나갈 거야. 나가면 욕을 하든지 듣고 깨닫는 사람은 깨달을 것이고. 큰 개혁인데, 큰 개혁이 될 터인데 이 개혁을 하는 데에 오늘 아침에 보니까 주일학교는 지금도 뭐 백팔십 몇 장 몇 장 옛날 그거 쓰고 있어. 이거는 뭐이냐? 우리가 개혁한다 하면서 장년반은 이래 거석하지마는 학생들은 돈 댈 수가 없으니까 그 돈을 못 내니 그 찬송가를 지금 이렇게 개혁한 이 찬송가를 그들에게 가지게 하지를 못하고 돈이 없어 못 하고 있어.
그런데, 지금 내일부터는 다시 재판에 들어갈 것입니다. 재판에 들어가 가지고서 우리 서부교회서 일만이천 권을 주문을 할라 합니다. 이만 권 했다가 다 들어갔는데 일만이천 권 주문한 것은 뭐할라고? 주일학교에 만 권 또 중간반에 이천 권. 이라니까 일만이천 권을 할라 하면은 돈이 얼마입니까? 오백삼십만 원이지? 사백오십 원씩, 얼마입니까? 뭣을? 그런데 모양 꼭 같은데 규격은 같고 종이 질만 좀 나쁘고 삼백 원이라고? 삼백 원이면은 더 줄었습니다. 그라면 삼백육십만 원입니까? 삼백육십만 원이요? 삼백육십만 원? 이 삼백육십만 원 학생들에게 개혁해서 그라고 난 다음에 딱 요것 되면 나머지기 찬송은 다 모아 가지고 다 불사를 것입니다. 저 빈들에 가 가지고서 다 우리가 불사를 것이오.
불살라 버리고 요 찬송으로 딱 통일하겠습니다, 우리 서부교회는.
이라는데, 삼백육십만 원 누가 낼 사람 있거든 내, 뒤에 가서 잘 기도해 보고.
세상에 왔다가 이제 학생들 중간반 주일학생들 만이천 명의 이 찬송가 개혁에 이제 삼백육만 원을 들이는 것이 주님이 기뻐하시고 자기가 세상에 왔다가서 할 일을 하고 갔다고 생각하거들랑은 삼백육십만 원 내요. 낼 사람 있으리라 내가 생각합니다. 안 내면 내가 빚내 가지고 내가 내요. 왜? 이만치 값있는 일 뭐 어데 있소, 있기를? 이러니까 그거 없어 가지고 이 찬송을 주저주저하는 그런 거 이거 개혁 정신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