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7 09:49
자기 부인
1988. 12. 20. 화새
본문: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하는 이 죽는다는 것은 육체가 죽는 것을 안 죽도록 살린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게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것을 가리켜서 죽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당장 안 죽어도 차차 죽습니다.
모든 사람이 왜 죽느냐? 난 사람은 안 죽은 사람 없이 다 죽습니다. 왜 죽느냐? 죽는 그 이유는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죽을 몸이라 말은 우리의 이 몸은, 우리의 마음과 이 고깃덩어리로 된 이 육을 가리켜서 여게 몸이라 그렇게 말했는데 우리 영은 중생돼서 이미 영생이 돼 가지고 있지마는 우리 육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법적으로는 살았지마는 실상으로 실제까지 사느냐 안 사느냐 하는 것이 앞으로 문제입니다.
실제로 사는 것은 자기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영원히 살고 예수님의 대속을 벗어버리면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죽을 때는 이 심신의 이 형체가 죽느냐? 심신의 형체는 죽지 않고 삽니다. 그러나 심신의 형체의 그 속에 진수, 정신과 힘이라는 그 정력, 정력은 이것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 정력이 그대로 있느냐? 정력이 변해서 기능이 됩니다. 정력이 변해서 기능이 됩니다. 정력이 변해서 기능되는 것을 가리켜서 '혈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 그랬습니다.
심는다는 것은 이 심신의 껍데기는 형체요 알맹이는 정력입니다. 이 정력이 투자가 되는데, 투자된다 말은 자본을 넣는다 말이오. 정력이 투자되는데 그 투자되는 데에 이 육체의 욕심을 따라서 투자가 되면 그는 그 정력 기울여 가지고 썩어질 기능을 만듭니다. 또 성령으로 심는 자는 성령으로 투자되면, 성령의 감동으로 그 정력이 쓰여지게 되면 그 정력이 변해서 기능이 되는데 영생하는 기능이 됩니다. 그래서 '썩어질 걸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고 혈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산다' 이랬습니다.
신령한 몸이라 많은 그는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는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을 가리켜서 신령한 몸이라 했는데 우리들도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신령한 몸으로 다시 부활한다 잇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이 심신으로 된 육, 육의 정력이 이것이 썩어질 기능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또 영생하는 기능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영생하는 기능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죄 없는 기능, 의로운 기능, 또 하나님과 화친된 기능, 다시 말하면 진리대로 된 기능, 영감대로 된 기능, 하나님을 향해서 영생하는 기능 이런 기능은 썩지 아니할 기능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심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대로 거두나니' 이거는 비유고, 콩 심으면 콩 수입하고 팥 심으면 팥 수입한다는, 농사짓는 것을 인용해서 비유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육체로 심으면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으로 심으면 영생을 거둔다' 하는 것이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죽을 몸이라' 그말은 하나님과 끊어질 수도 있고 안 왑 어질 수도 있는 이 몸인데 우리가 법적으로 살았기 때문에 법적으로 산 이 육이 실상으로도 살 수 있고 법적으로 살았던 것이 실상으로 살지 못해서 죽을 때에는 그것을 가리켜서 둘째 죽음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니까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말은 이 몸의 알맹이, 깨로 말하면 깻묵은 껍데기이고 기름은 알맹이가 되겠습니다. 이 심신으로 된 육의 껍데기는 형체요 알맹이는 기능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일생을 살아서 깻묵 같은 껍데기 이 형체는 부활할 때에 부활하고 살아 있지마는 그 속에 기능은 다 죽어 버리고, 왜? 기능은 죽을 것만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일생 동안 인간 지식만 자꾸 공부해서 만들었으니까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유식한 사람이지마는 그 지식이 필요없는 나라에 갈 때에는 그 지식은 가지고 못하고 다 망하고 맙니다. 세상에서 일등 과학자가 되면 시집도 가려고 하고 또 부모네도 그런 자녀를 만드려고 애를 쓰고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지마는 과학은 하늘나라 가는 것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만 하늘나라 가는 것은 진리, 영감, 죄 없는 것, 의로운 것, 하나님과 화친된 것, 또 하나님을 향하여서 사는 것. 돈을 목표로 하고 사는 것도 있고 자기 존영을 목표로 사는 것도 있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는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사는 것도 있으니까 하나님을 향한 것 이것만 안 죽고 영생하지 딴거는 다 죽습니다.
'죽을 몸도' 그말은 네가 몸의 형체는 택한 자면 다 부활할 때에 부활해서 껍데기는 같지마는 속에 기능은 다르다. 그러면 사람이 꼭 같은 사람인데, 외모의 형체야 뭐 이목구비 수족이 눈 있고 귀 있고 코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기능에 따라서 한 사람이 천 사람 만 사람도 더 당합니다. 억만 사람도 더 당합니다. 억만 사람을 뭉쳐도 한 사람을 당하지를 못합니다. 그거는 뭐이냐? 그거는 기능 문제입니다.
그러면 기능은 처음에 타고 날 때에 기능을 타고 났나? 아니오. 자기의 정력을 기울여 가지고 기능을 만들었는데 썩어질 기능 만든 사람 있고 영생토록 있을 기능 만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 기능도, 하늘나라에 가서는 하나님에게 필요한 기능, 바르고 곧은 기능, 옳은 기능, 의로운 기능, 거룩한 기능, 깨끗한 기능, 공평된 기능 이런 기능이지 흉측한 그런 것들은 그 나라에 용납지를 못합니다.
그 나라에는 과학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인간의 어학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수단 좋고 간교하고 이중 십중으로, 요새도 청문회에서 보면 십중도 더 되는 그런 사람의 수단 방법이 그 나라에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그런 것이 필요하고 요긴하고 모든 사람이 다 보기에 잘먹고 잘 입고 잘 살고 이러니까 그걸 배우려고 애를 씁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경은 복술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지혜가 아니고 마귀가 준 인간 지혜기 때문에 그런 거는 다 멸망받습니다.
이러니까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 말은 하나님과 끊겨질 몸, 형체 말고 몸 속에 알맹이, 몸의 이 껍데기 이목구비 이것이 알맹이겠습니까? 이목구비 수족이 기능 가진 그것이 알맹이겠습니까? 어떤 게 알맹이요? 기능 가진 그것이 알맹이라고 느껴집니까? 그거 확실히 느껴집니까? 그것은 날 때 타고 난 것 아닙니다. 날 때는 다 같이 났는데 그 사람이 정력을 어학에 투자하면 어학이라는 기능이 생겨집니다. 그 사람이 그 정력을, 테레비 보니까 묘기라고 날아다니는 사람 있어요. 어떻게 그 사람이 기계체조를 잘 하는지. 거게다가 정력을 기울이면 기계체조 하는 그런 기능이 생겨집니다.
어떤 사람은 쓰리하는 것, 도둑질하는 이것을 자꾸 정력을 기울여서 공부하니까 이제 도적질하는 게 늘어집니다. 그 도적질하는 그런 기능이 하늘나라 갈 건가? 못 갑니다. 도적질하는 기능이 못 간다고 하면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으로 되지 아니한 기능은 전부 도적질하는 기능입니다. 과학도, 어학도, 모든 정치성도, 수단도, 방법도 그게 전부 도적질 잘하면 세상에서는 높이 봅니다. 제일 도적질 잘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대가리가 됩니다. 세상에는 대가리 되지마는 하나님 앞에서는 제일 큰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다 전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눈이 밝고 그 시야가 광대하기 때문에 썩을 것, 욕된 것, 약한 것, 혈육의 것, 또 없어질 것 멸망받을 것, 영영한 것, 참 가치 있는 것 이걸 취하기 때문에 이런 지혜의 눈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한 성구가 천천 금은에다 비할 수 없이 낫다, 천천 금은보다 낫다 하는 것은 그것은 눈이 더 밝은 사람은 우주 전부보다 하나님의 한 말씀이 낫다고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예수님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하를 얻고도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자기를 빼앗기고 자기를 잃어버린 자가 된다.
현실에서 자기를 뺏기고 자기를 잃어버리는 현실로 살게 되는데 왜 그렇게 사느냐? 이 세상 것 탐내다가 그리 된다. 온 천하 얻어도 너는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했으면 손해 갔다 그렇게 평가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의 심신의 전부는 기울여서 뭐 하고 사느냐? 하나님의 뜻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거는 천천 금은이 아니라 억억만금보다 낫습니다.
천하보다 낫습니다. 현실에 해당된 하나님의 뜻 고 뜻 외에는 자기에게는 유익된 게 하나도 없고 고 뜻은 하나님과 자기와 하나되기 때문에, 고 뜻은 하나님과 자기와 하나돼. 하나돼서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 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일 보배로움을 알고 현실에 하나님의 뜻 그것을 바로 찾으려고 자기의 있는 힘을 기울이고 바로 찾았을 때에는 자기 목숨을 내놓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고 살라 하면 행할 수 없을 때에는 목숨을 주고 현실에 하나님의 뜻을 양보하지 않고 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치를 바로 알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저 먼저 금요일날 밤에 그 O목사가, 하나님의 것이 다 내것이요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되어서 곧 하나님의 그 전부가 내것이다. 내가 가진 거는 다 하나님의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증거를 했습니다.
이래서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렇게 멸망받을 그 심신의 진짜 알맹이 진수 그것을 죽지 않고 영생하도록 만들 수가 있다. 그러면 지금 이 몸은 죽을 수 있는 몸이요, 하나님과 떨어질 수 있는 몸이요, 영원히 끊어지지 아니할 수 있는 몸이요,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의 전부가 자기 것 되고 자기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 됩니다. 자기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하나님의 것 전부는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과 연결되면 연결된 것만치 하나님의 전부는 자기 것이요 하나님과 끊어지면 끊어진 것만치 마귀로 하나됐기 때문에 마귀와 하나된 것은 그것은 유황불 구렁텅이에 들어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생된 사람이라도 현실에서 자기의심신의 정력을 어데다가 기울였느냐? 기울여 가지고 만들어진 기능이 그것이 썩을 것이라면 다 기능도 자기의 그 모든 그 정력도 다 그것은 유황불 구 렁텅이에 가고 형체만 부활해 가지고 하늘나라 갑니다. 이래서 '썩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떻게 하면 썩을 몸을 살립니까,? '썩을 몸도 살리시리라' 어떻게 하면 썩을 몸을 살린다 했습니까? 거게 읽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썩을 몸을 살린다 했습니까? 어떻게 하면 썩을 몸을 살린다 했소? 1 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하는 건 성령 말합니다.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예수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의 영이 무슨 영입니까? 그의 영이 무슨 영이요? 성령.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면 우리 죽을 몸을 살리는 것은 죽을 몸을 안 죽도록 영생하도록 살리는 수도 있고 그만 죽여 버리는 수도 있는데 그러면 살리는 것은 뭐이 와 살립니까? 성령님이 살립니다. 죽이기는 뭐이 죽입니까? 악령이 죽입니다. 이러니까 우리 현실은 악령으로 사느냐 성령으로 사느냐 거게서 죽고 사는 것은 판정이 납니다.
성령으로 심는다 그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산다 그말이오. 성령이 시키는 대로 산다 그거요. 이러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9절 끝에,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니니라.
예수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을 알고 모르는 그것은 예수 믿고 안 믿는 것 아닙니다. 성경 말씀을 아무리 알아도 그것 가지고는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지금 그 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지 성경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 아니고 성경 말씀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영이,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그때부터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중생된 것은 성령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식은 무슨 결과를 만듭니까? 지식만 있으면 무슨 결과를 만듭니까? 지식은 교만케 합니다. 지식이 있으면 교만하다 말은 지식이 있으면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성령 안 오면.
왜? 지식을 자기에게 쓸 줄을 모르고 지식을 다른 사람에게 건너다 보면서 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만 합니다. 지식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은 심판해서 옳고 그르다 다 그렇게 하지마는 자기 심판할 줄은 모르게 됩니다.
성령이 자기 안에 계셔야 자기 심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어떤 사람을 말하기를 '너는 속에 성령 모시기를 네가 힘을 쓰지 않고 지식만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고 꼭 녹음기 모양으로 이렇게 설교만 하면 이래 된다고 생각하는데 네 하는 설교는 속에 생명이 없다.' 생명이 있는 설교는,어떤 설교가 생명이 있는 설교입니까? 여기 O선생, 성령의 감동이 속에 내주해야 생명 있는 설교지 성령 없는 지식만 가지고 하는 것은 그것은 산 설교가 아니고 살리는 설교가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은 '내가 너희들에게 전하는 것이 성령의 감동과 권능에 있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린도 전서 2장에 말씀하시기를.
그러기에 그 어떤 사람은 '내가 어 아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꼭 그렇게 하는데 설교를 잘 못한다 하니 참 이거는 영 기가 찰 일입니다.' '네가 성신의 감동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 수가 없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 말씀을 지식으로만 아니고 그 속에 성령의 능력이 가야만 저도 살고 남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이오. 요걸 해결 안 하니까 그 사람이 뭐 지식으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뒤떨어지지 않고 또 말도 잘하고 굉장하게 하지마는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다른 이의 음성은 모르기 때문에 달아 나느니라 했습니다. 목자의 음성이 목자가 누가 목자입니까? 거게 목자, 목자가 누가 목자요? 주님이 목자시요. 그러니까 주님의 음성은 듣는다 그말은 영감의 음성은 듣지마는 영감 없는 음성은 마귀의 말이기 때문에 달아납니다.
죽자껏 설교는 막 웅변을 토해서 천하에 제일가는 설교를 하는데 양은 슬슬 달아납니다. 안 모입니다. 그거는 왜 그러냐? 목자의 음성이 아니기 때문에.
목자의 음성은 영감의 음성이라야 목자의 음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기를 힘을 써야 됩니다.
성령을 모시는 데에는 어떻게 힘을 써야 된다 했습니까? 뭣이 하나님을 찾아간다 했습니까?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갑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하나님을 봅니다. 자기 속에는 마귀가 들어와 가지고 자기 마음이 마귀하고 한덩어리 돼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가 있으며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양심 생활을 안 하면 그 신앙생활이 다 헛일입니다. 껍데기는 되지마는 자기 속이는 것뿐이고 하루 살면 하루 사는 것만치 자기 죽이는 것뿐이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양심을 지키지 아니한 자는 양심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친하고 좋아하고 양심을 지키는 사람은 양심 지키지 않는 그런 일은 하지도 못하고 또 그런 말은 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김현봉 목사님은 양심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양심은 어떤 것이 앙심입니까? 기독자의 양심은 성경대로 옳고 바르고 참된 것을 성경대로 하려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성경대로 하려고 하는 게 양심인데 양심에 병든 양심이 있습니다. 병든 양심은 어떤 게 병든 양심인가? 화인맞은 것이 병든 양심입니다.
화인맞은 것은, 화인은 뭐입니까? 화인은 양심의 주인이라 말입니다. 그 양심은 주인이 생겼습니다. 그 양심은 주인이 생겼어. 어떤 사람의 양심은 돈이 주인됐어.
그 사람의 양심은 항상 돈을 기준해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합니다.
또 그 양심은 자기 양심이 돼 버렸습니다. 자기의 것이 됐습니다. 그러니까 그 양심은 자기를 중심해서 비판합니다. 그 양심이 화인맞은 양심입니다.
양심은 자기의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것도 아니요 이러기 때문에 이 세계에 유력한 신학자들 가운데에서 '양심은 인간의 요소가 아니라, 인적 요소가 아니라.
신적 요소도 아니라. 신적 요소와 인적 요소 그 사이의 중간에 있는 아무것의 요소도 아닌 것이 양심이라.' 그렇게 까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양심을 깊이 살펴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양심은 인적 요소입니다. 인적 요소지마는 이 양심은 자기 것이 되지 않은 것이 산 양심이요 자기 것이 되어서 무엇이든지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으로 자기 편이 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그것은 양심이 아닙니다.
자기 것이 안 되고 자기에게 대해서나 남에게 대해서나 아닌 것은 아니라 옳은 것은 옳다 하는 것이 그것이 산 양심이요 어떤 것에 종이 되지 않은 양심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외우고 실천해서 거게서 다소나마 경험하고 체험한 지식을 얻어 가지고 경험하고 체험한 이 지식을 가지고 학생을 가르칠 때에 내가 음식 먹고 소화하는 거와 같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자기가 자기 양식 삼아 가직서거게서 얻은 젖과 같은 경험과 체험의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때에 그들에게 양식이 되어집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이거 잊지 맙시다. 어쩌든지 꼭 계속해서, 티끌 모아 태산된다고 하루 삼십 분씩 하는 기도가 적은 것 같지마는 일 년을 모으면 얼마가 되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칠 년이 이제 꼬빡 넘어가는데 그러면 칠 년 동안 하루 삼십 분씩 모은 그 시간을 계산을 해 보십시오. 기도가 얼마나 되는가? 이렇게 기도해 가지고 자기의 미래의 어려운 것을 다 해결지울 터인데 이 기도를 등한히 하는 사람은 안 됩니다.
암만 기도해도 양심 안 쓰면 헛일이오. 산에 기도하러 가는테 보면 양심을 쓰면 저런 걸 깨달을 수 있을 터인데 아무 양심을, 양심은 하나님 말씀대로 요러면 되나 안 되나, 요러면 되나? 자꾸 이거 작용하는 그게 양심인데 그게 없기 때문에 뭐 가 가지고 퉁퉁 재만 저질러.
어쩌든지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계셔야 됩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오셔야 되지 성령님 없는 것은 개인 신앙생활이나 단체 신앙생활이나 혹은 목회 생활이나 설교나 그 모든 것이 다 외식이요 껍데기요 생명 없는 신앙입니다.
껍데기는 믿는 것이지마는 속에는 이리, 그 악마가 속에 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밤낮 해 봤자 저 위해서 저 높이는 것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