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양, 드라크마 비유

 

1983. 4. 11. 월새

 

본문 : 눅15:3-10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를 받고 받은 도를 가지고 자기를 구원하는 데는  현실이라는 그 현실을 통과하여서만 행할 수 있고 그 행함을 인하여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도를 들을 때는 어려움이 없지마는 이들은 진리대로  자기가 살아서 구원을 실상으로 이루게 되는 그때는 반드시 어려움이 있다고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리를 듣고 다 실행하려고 출발했다가 그만 그  만나지는 어려움 때문에 사람들이 결실을 못하고 다 중단되고 맙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돌밭에 뿌린 씨라 또 덤불 밑에 뿌린 씨라 이렇게 말씀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를 받아 가지고 실상인 구원을 이루려고 할 때에 그  어려움이 부딪혀지니까 그 어려움을 인해서 별별 그 생각이 그때는 떠오르게  됩니다. 평소에는 들은 말씀대로 그대로 실행하면 되리라 이렇게 사람들이  생각을 하지마는 막상 그 현실을 당하게 되면 거게서 말씀대로 살기는 힘이  드니까 말씀대로 그대로 살지 않고 좀 무슨 변동을 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자기가 말씀대로 살아 당해지는 그 어려움을 피하는 길이 있는가 해서 그  피하는 길을 찾고 노력하는 것이 인생의 생의 본능입니다.

 또 그럴 때에 악마인 마귀는 우리 속에 자기 속에 안 믿을 때의 사람, 또 믿을  때도 성령으로 살지 않은 그것은 내나 자기 아닌 자기인데 아무리 잘 믿는  사람이라도 그게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옛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마귀요 자기를 죽인 원수지마는 그세 또 자기인 줄 알고 일생 동안 그놈이 하고  싶은 것은 제가 하고싶은 것인 줄 알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인데,  그것이 와서 꾀웁니다. '네가 기어코 이렇게 고집하고 할 게 뭐 있느냐?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하는 일이라든지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책임을 지신다든지 그러면 할 만한 가치가 있지마는 네가  이렇게 설교들은 말,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성경인 줄로  아느냐? 그것은 사람의 말이기 때문에 공연히 네가 그걸 지키려고 해도 고통만  하지 그것 지켜봤자 아무런 뭐 의가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나 진리가  책임지는 것도 아닌데 네가 왜 그것 가지고 고집을 하느냐?' 이렇게 할 때에  자기가,  '내가 지금 이와 같이하려고 하는 이 주장과 이 걸음이 과연 성경에서 똑똑히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신 것인지 흑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설교하는 사람이  자기가 이렇게 꾸며대서 설교한 그 사람의 말인지 그게 과연 내게 좀 의문이  있다.' 자기 혼자 말하는 것이오. 자기 혼자에게 마귀가 그렇게 유혹 주고 또  자기 혼자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각할 때에 '그러면 이게 과연 성경 말씀이가? 그러면 인간이 가르치는 인간의  말을 듣고 내가 이러는 것이가?' 하는 그런 의문이 생겨질 때에는 꼭 성경  말씀인 줄 알고도 그 말씀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어려움이 있으면 '어느  구멍으로 피해서 도망칠까?' 이렇게 생각나는 것이 인간의 생의 욕심, 그게  들어서, 평안 하려는 안일 욕심 그게 들어서 그래 하는데 그때에 이게 성경이라  하는 것이 확실히 자기에게 증거가 되지 않으면 그만 그때에 그것을 버리고  탈선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기가 성경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알 수 있어도 한창 탈선해서  그 어려움을 피해서 탈선하는 그 길을 걸어가고 싶을 때에는 좀 생각해 보니까  찾아보면 분명히 성경에 있고 성경에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이 자기 양심의 빛에  벌써 '찾으면 성경에 이렇게 말한 것이 확실히 보여지겠는데' 이러면 찾아  들어가 가지고 성경에 이렇다 하고 나서 자기가 어기면 더 자책이 되어지니까  성경에 그렇다는 그것을 찾으면 보일 수가 있어도 그만 찾지 않고 얼버무려서  '뭐 잘 모르겠다.' 이러고 범죄 하는 것입니다. 탈선하는 것이오.

 이게 인생인데 제가 마찰된 마찰의 그 교리가 성경이 아니고 인간의 말이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그것을 생명을 내놓기까지 고집할 그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그런 용기가 나오지 않고 그런 담력이 나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 말씀을 들을 때에는 반드시 그 말씀을 해석한 것이니까 그  해석이 과연 성경에서 나온 해석이가, 성경은 세상에 다 둬도 둘 만한 곳이 없는  그런 많은 것을 축소해서 영감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록해 주신 것이 신구약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 한 절 속에는 한없는 여러 수백 권의 내용의 해석이 들어  있다 그말이오.

 들어 있으나 자기가 설교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이게 과연 성경 안에 있는  것인가? 이거 성경 풀이가? 이것 억지로 해석을 해서 인간 생각으로 해석을 해서  이래 해 놓은 것이가?' 요것을 자기가 살펴 가지고 '과연 이 성경 안에는 요  이치가 들어 있다. 요 진리가 들어 있다. 그러니까 성경에 명문 되어 있지  않지마는, 성경에 그대로 기록돼 있는 것은 아니지마는 성경 말씀 안에 요  사실이 들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이나 요 사실이나 다 한가지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무엇이든지 듣고 배운 것이라면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 성경이라는  것을 깨닫고 성경에다가 근거해서 요거는 성경 말씀이라는 요것을 확실히 자기가  잡고 난 다음에는 실은 설교집이니 그런 것 다 태워버리고 없애버려야 됩니다.

왜? 성경을 해석해 준 것이기 때문에 그 해석을 가지고 성경을 배우는 것이지  해석 배우는 것 아니오.

 성경을 바로 성경만 보고는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해석하는 그 설교를 듣고  설교로 인해서 이 성경 말씀에 '요 성구는 과연 이런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알면 그 다음에, 중매쟁이가 소개를 해서 신랑을 만나게  했으면 신랑 만나고 난 다음에야 중매쟁이가 무슨 자기에게 그저 평생 감사나  하고 그저 알고나 지내지 뭐 그 사람을 남편처럼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이와 마찬가지로 설교하는 것은 성경 해석은, 성경 말씀은 남편과 같은바 성경  말씀을 설교로 소개해 주고 알게 해 주는 것이니까 설교로 가지고 성경 말씀을  자기가 깨달아서 '과연 성경 이 성경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구나' 하는 그것을  잡고 난 다음에는 중매쟁이 같은 그 설교집은 태워버리는 것이 좋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엇이든지 자기가 천하에 둬도 다 두지  못할 만한 많은 것이 간단한 육십육 권에 다 내포돼 있는데 육십육 권 도리를  그냥 본문을 읽는 그 본문을 아는 본문을 읽고 외우고 하는 그것만 가지고는  자기가 이 육십육 권이 가르치는 그 실상인 세부에 그 구체적인 것을 자기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이루는 실지의 행위를 할 때는 깜깜해서 어찌될지  모르게 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해석을 가르쳐 배움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배우라 이랬다 말이오.

 좋으나 우리가 배운 그것이 성경에서 나왔는지 안 나왔는지 그것을 또박또박  살펴서 '요것은 성경에서 나왔다. 요 성경 안에 요게 들었구나, 과연. 또 이  설교의 해석은 이것은 암만해도 이 성경에 여게는 내포되어 있지 않았는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이것은 억지로 엉뚱한 것을 끌어다 붙여 가지고 지금  이렇게 해석을 한 것이지 성경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억해다.' 단정을  지우면 그 해석은 집어던져야 될 것이고, 또 '이 해석은 과연 성경에 맞다. 성경  안에는 요 사실이 내포돼 있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깨달았으면 깨닫고 난  다음에는 깨닫게 한 그 설교는 다 던져버리고 성경 말씀만 가지고 자기가 잡고  그대로 걸어나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설교를 들을 때에 소리에 기울여 가지고 그  소리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소리는 유창하게 하는 소리라든지 아주 큰 소리로  한다든지 웅장한 그런 소리하는 그 소리에게다가 가치를 두고 소리를 듣는 데에  주력하는 그런 사람은 무슨 소리든지 소리만 뭐 그 소리가 진리에야 맞든지 안  맞든지, 상관이 있든지 말든지 소리만 좋으면 소리만 크면' 그 사람은 거게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그런 사람 그것 다 가짜요.

 또 어떤 사람은 소리가 아니라 그 사람이 유창하게 아주 웅변을 베풀고 있으면  그 웅변에 자기는 가치를 두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천사가 와 가지고 진리를  말한다 할지라도 웅변이 아니면 자기는 거게서 아무런 감화를 받지 못하는 그런  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 진리야 이리 갔거나 저리 갔거나  어찌됐든지 그 말을 해서 그 말을 들을 때에 아주 말이 기분이 상쾌하고 또 아주  열변을 토할 때에 자기는 거게서 감응을 받는 그런 사람도 그 가짜요.

 또 설교를 들을 때에 그 사람이 아주 묘한 이치를 가지고 이렇게 강론을  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그 이치가 아주 박식이고 또 유식하고 하니까 그  가르치는 이치가 지식이 그게 뭐 성경에서야 맞든지 안 맞든지 어떻든지 그  사람이 가르치는 그 이치가 환하니까 그 이치에 따라서 그 사람이 또 감응을  받는 그런 사람도 가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설교를 들을 때에는 '이 사람의 설교는 그저 소리 하나는 좋다.

성대 하나는 좋다. 성대는 좋으나 딴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또 이 사람의  설교는 웅변적이다. 웅변은 참 좋다. 말 재주는 있어 웅변은 좋다. 그러나  진리는 없다, 이 사람의 설교는 아주 유식하기는 유식하지마는 세상 지식에  유식하지 성경 지식에는 상관이 없다. 또 이 사람의 설교는 들어보니까 하나의  정서적이요 감정적이지 하나님의 도리,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그 구원의 이치나 또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가르치는  것이나 그런 것은 없다. 이렇게 논평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걸 모르고, '그러면 나는 어데 속해 있는가?'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말을  못해서 더듬어 말하든지, 또 아주 말재주가 없어서 그 말하는 것이 앞뒤가  그렇게 조리 있게 말하지를 못하고 그 말이 흔들흔들하게 그렇게 말을 하든지,  또 그 사람의 음성이 아주 듣기에 거북한 그런 못쓸 음성으로 말을 하든지, 그게  다 좋으면 좋지마는 어쨌든지 가치를 거게 두지 않고 '보자,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로 가르치고 있나?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나?' 그러면  하나님을 가르치는 데에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라 저런 하나님이라 하나님관,  자 따라합시다. 신관! 신관! 신관이라 말은 하나님 신(神)자 볼 관(觀)자,  하나님은 이러나 저러나 그래 보는 것을 가리켜서 신관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말하는데 신관은 불교도 신관이 있소. 유교도 신관이 있소.

무신론주의자들도 신관이 있습니다.

 무신론주의자들은 '어리석은 기독자들은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 있다고 이렇게  본다' 해 가지고 그들은 '하나님이 없는 걸 사람들이 이렇게 만들어 추상적으로  이렇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래 또 보고 있습니다.

 그 신관이 세상에는 열 백도 더 되는 이 신관이 있는데 책에 이 책에는 이렇게  신관을 말하고 저 책에는 저렇게 말하는 이것이 가득찬 것이 세상인데 하나님을  말한다고 해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은 '하나님을 이 사람이 가르치기는  가르친다. 요번 보니까 이 사람 설교는 하나님에게 대해만 가르친다.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니까 참 좋다. 됐다.'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해 가르치는데  '그러면 그 가르치는 것이 성경대로 가르치나? 보자, 그 사람 가르치는 것이  성경에 있나 없나? 성경대로 가르치나?'  가르치는 것을 배우면서,성경대로냐 아니냐? 성경이 가르치는 그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 자기가 다른 철학이 가르치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지? 공자 맹자가  가르친 것을 가르치고 있는지 그것을 또 알아야 할 것이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들을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가르친다든지, 또 인간의  도덕에 대해서 가르친다든지, 또 무슨 이 경제 물질에 대해서 가르친다든지,  가정에 대해 가르친다든지 가르칠 때에 그 가르치는 것이 성경대로냐 성경대로  아니냐 거게다가 근거를 해 가지고 배워야 되겠고, 또 가르칠 때에 그 말이  아무리 둔해도 '그 사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가? 구 가르치는  것이 암만 둔하게 가르치기는 가르쳐도 성경에 있는 것을 가르치면서도 다른  사람이 잘 깨닫지 못한 참 성경에 깊은, 인간이 잘 몰라서 모두 그대로 행하지  못하는 그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는,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설교를 들을 때에 가치를 어데 두느냐?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다가 가치를 두고, 성경 말씀 거게만 끝을 마치는 게 아니라 성경  말씀 안에. 성신이 감동시켜서 깨닫게 해 주시는 깨달음 거게다가 가치를 두고,  그 가치 안에 성령이 같이하느냐 안 하느냐 거게 가치를 둔 사람은 그 사람은  미혹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어데를 가도 무신론주의 속에 가도 상관없습니다.

무신론주의 강론 속에 들어가면 무신론 강론을 하기 때문에 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 하는 것을 그 사람이 강하게 인식해서 견고하게 돼집니다. 왜 이런  말하는고 하니 우리 교인들이 참 어려서 너무 진리를 가르쳐 봐야 그 뭐인지  그것을 알려고 구별하려고 애를 쓰지 않기 때문에 모두 너무 아직까지 진리를  모르니까 진리를 모르면 마귀의 말에 넘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아야 마귀의 유혹을 받지 않지. 양성원에서 가르치는데 앞으로 교역자  될 사람들이고 지금 교역자들이 그래 모여 있는데 그 뭐인지 몰라. 그러니까 이  세상 마귀의 그 사탄의 깊은 것은 굉장한 함정인데 그 갖다 들어내면 좋다고 다  들어갈 사람들이라. 다 들어갈 사람. 도무지 비판이나 구별성이 없다 말이오.

 그것은 뭐냐?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자기가 성경대로냐 성경대로가 아니냐,  또 성경대로의 권위만이 크고 참되지 그 외에 그런 것은 암만 말해 봤자 그  수없이 있지마는 가치 없다. 이렇게 하나님 말씀과 성경 말씀에 가치를 이것을  바로 정가하지 못하고 있다 그거요. 그래서 내가 지금 어떤 사람에게 어떤  목사에게 말을 할 건데 그걸 내가 해 주면 그에게 대해서는 예언적이라 유익이야  있지마는 오히려 시기가 안 돼서 지금 말하면 그 사람이 유익은 보면서도 내게  대해서 그 사람이 너무 자기에게는 억울한 소리한다 그렇게 감사히 받지 못하면  그 일을 말하는 건 제가 유익을 보지마는 일반적인 다른 은혜를, 내 교훈을 받기  때문에 다른 은혜를 받지 못할까 해서 그것을 말을 못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교학실에 가 가지고 할 때에 전체를 두고는 그 말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 세상 지식의 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항상 성경  말씀만 증거하고 성경 말씀만 해석하니까 그것은 그만 가치 없는 걸로 예사로  여기고 저 마귀가 한 어떤 유명한 철학자가 유명한 과학자가 말하는 그것은 생전  자기는 듣지도 못했고 공부도 안 하고 못했기 때문에 이제 그런 말한 마디를  자기가 들을 때에 '요 말을 내가 한 마디를 써야 '그 사람이 철학에 대해서도  과학에 대해서도 아주 세상 그 상식에 대해서도 유식하더라' 그렇게 인정하지  해서 그놈 자기 나타내려고 그걸 써먹으면 벌써 그때 자기가 자기 나타내지,  주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게 벌써 주님하고 거리가  많이 멀어지게 됩니다.

 멀어지게 되면 자꾸 마귀란 놈은 '네가 봐라, 성경 말씀은 다 아는 것인데 이런  말 한마디씩 해 줘라.' 그러니까 그런 말 하면서는 주먹을 뚜드리면서 제게 힘이  나온다 말이오. 힘이 나오는 것은 자기가 과거에 몰랐던 것 자기도 이만한  상식이 있고, 이만치 유식하고, 이만치 사회 지식이 있다 하는 그것을 한 마디  내 보내야 자기를 무식하다고 인정하지 않지 싶어서 그 말을 하는 그것이 뭐냐  하면 자기 나타내는 건데 그 말을 할 때에 주먹을 뚜드리고 힘이 난다 말이오.

 그 힘이 순전히 마귀 힘인데 그 힘을 내서 보면 성령은 그만 다 달아나 버리고  그만 자기가 그 마귀 힘만 가지고 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어떤 사람이 되느냐?  순전히 그 지식으로 자꾸 기울어지고 하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자기가 설교하는  것을 교인들은 은혜를 받지를 못하고 교회는 부흥이 안 되고 교회는 자꾸 쇠퇴해  나가고 배척을 당합니다.

 배척을 당하면 '이거 찌저거리들, 순 아무것도 무식한 데라 그렇지 나는 유식한  사람이라 유식한 설교를 하는데 무식한 것들이라 그렇지 설교가 나빠 그렇지  않다.' 이런 사람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유식하면 성경에 유식한 것이 필요하지 세상 유식은 마귀  지식이요 하는 요것, 세상에는 하나님의 지식과 마귀 지식이 두 지식이 있다  하는 이 말이 그렇게 쉬운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지금 세상에 책을  들어보십시오. 여러 수천 권 읽어야 그게 없습니다. 그게. 여게서 들으니까 그걸  가치 없는 말로 예사로 듣지마는 '세상에 지식을 마귀 지식과 하나님의 지식 두  지식이 있다' 하는 그 말을. 한 사람이 없어, 그 말을.

 이런데, 그래 인제 이래 가지고 자기가 권위가 없으니까 배척을 당합니다.

그러면 저 혼자 참 유식하고 교인들에게는 아무 반응이 없고, 뭐 꿀 먹은  벙어리라 하더니만 달기만 달지만 발표 못하는 것 모양으로 자기 혼자는 좋아서  내가 유식하다 하지마는 교인들에게 아무 반응이 없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제가 세상 지식 그걸 가지고 거석한 것은 교인들이  들으려 합니까?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데 목자라는 것은 주님을 말한 것이니까  주의 음성 다시 말하면 영감의 음성만 듣는 것이 양떼들인데 택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그게 들려지는 것인데 그것 아닌 것은 은혜가 안 되니까 저 혼자는  뭐 유식한 말을 해 가지고 세상에 철학이니 과학이니 정치학이니 세상에  사회학이나 오만 것 전부 다 이렇게 강론하는데 양떼들은 그것 먹고 자라지를  못하고 교회는 부흥이 안된다 그거요. 이라면 마지막에는 제가 배척 당할 수밖에  더 있습니까?  제가 그런 걸 안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슨 전문가가 되고 전공가가 돼 가지고  그걸로 가지고 또, 말하자면 철학이면 철학 그것 하나에 전공해 가지고 그것도  세상에 다른 사람보다 앞서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그것만 듣고 또 밥을 먹을 수  있고 그것만 듣는 사람들도 모이지마는 그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마지막에,  성경만 가지고 권위 있게 날 뛰던 자가 성경 외에 다른 그런 것을 취해서 성경  권위와 그 권위와 같다고 해서 마음이 기울어지고 그게 유익하다고 한 그때부터  그 사람은 자꾸 권위가 떨어지게 해 가지고 마지막에는 아무 짝도 못쓰는  사람됩니다.

 제가 그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그 사람이 아마 죽었을 것이오. 장 조사님이라고  아주 버틀이 좋고 몸이 이렇고 아주 얼굴도 잘생겼습니다. 그랬는데 그분이 장  조사라고 유명한데. 제가 집사로 있을 때에 그 장조사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니까  그 장 조사님이 자기 입에서 머리카락이 뭉텅뭉텅하게 자꾸 나오는데 머리카락이  나오니까 그 머리털 그걸, 여인들의 머리털. 이게 나오는데 뭉떵뭉떵하게  나와요. 구름같이 나와요, 똑. 연기같이.

 나오니까 그것을 양떼들이 먹고 난 다음에 모두 걸려서 뭐 발동을 하고  죽을라고 구불텅이를 치고 어떤 것은 안 먹을라고 내 두르고 이러는 것을 보고  '그 이상하다' 해서 그 다음부터는, 나는 그때 조사라 하면 천사같이 다  생각하고 이랬는데 그래 그 장 조사에 대해서 이상하다 해서 내가 좀  물어봤습니다.

 이리 저리 물어보니까 그 사람이 한학자라 이래, 한학자라. 학문 학자라  이래요. 그래 내 마음에 '한학자라? 이 유교와 기독교를 혼합을 해 가지고 이  유교를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 속에서 양떼를 죽이는 그 머리털이 아닌가?' 그런  생각에 제가 나서 그이의 설교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한번 그 사람이 거창읍교회서 설교를 하는데 그때 내가 이제 나는 벌써 그런  모든 과거가 있기 때문에 유심히 들었습니다. 들으니까 이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말하는 데에는 힘이 없고 하나님 말씀을 하다가 공자나 맹자나 유교의 유력한  사람들의 신학, 그들의 또 잠언이나 그들이 말해 놓은 유교의 어떤 깊은 그 문자  하나를 쓰면서, 그 문자 하나를 쓰면서 그때는 아주 그만 강단이 깨지도록 그 힘  센 사람이 뚜드려 대면서 힘을 내는데 그것 순전히 유교를 소개하며 힘을 내더라  그거요. 그래서 '저게 양떼를 죽이는 것이로구나.' 단정을 지웠지요.

 단정을 지우고 제가 그 뒤에 한번 만나 말했습니다. 나는 집사인데 집사라도  그때 그분들이 멸시는 안했습니다. 왜? 집사로서 그건 그때 집회도 다니고,  조사가 안 될라 해 그렇지 또 이러기 때문에 그렇게 무시는 안하는 판인데, 제가  만나 가지고서 '장 조사님-단둘이 만나서- 미안하지마는 제가 이런 이런 그  이상함을 봤는데 내가 물으니까 한학자라 하는데 장 조사님이 언제 설교하는 걸  보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힘이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때는 가치  없는 것으로 힘없이 증거하고 유교에 대한 어떤 문자나 그 하나 무엇을 하나  말할 때에는 그때는 힘이 나 가지고 강단을 뚜드리며 하는 걸 봤습니다.

그러니까 장 조사님의 힘은 유교의 힘이요 영감 도리의 힘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기독교의 정반대니까 앞으로 다시는 유교에 대한 문자나 그런 것은 전연히  철폐하고 성경 말씀만 가지고 설교하는 그 일로 노력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이러니까 웃으면서 '예, 뭐 제가 그것 모릅니까? 성경이 제일이지 어데 한학  그게 뭐 힘이 있습니까?' 이렇게 말은 했습니다마는 얼마 후에 목회를 못 하고  나와 가지고 여기 초량교회, 초량교회에 와 가지고 신앙 생활, 생활하다가 그  다음에 거게서 사주책을 내놓고 장 조사가 저 초량에서 사주책 펴놓고 길가에서  사주보고 앉았다 하는 그 말을 내가 부산 여기 서부교회 있으면서 내가 말을  들었습니다.

 그걸 내가 양성원에 가서 말을 했어. 기독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이 권위와  세상 지식의 권위를 다 지식이면 지식이라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말씀은 영계와  우주 모든 것을 창조한 그 창조의 능력을 가진 말씀이요 인간의 지식은 아무리  천하에 있는 책을 다 모아놔도 하나님이 지어 놓은 만물을 마귀가 유혹시켜  가지고 마귀의 사람이 되고 난 다음에 거게서 저희들이 이렇게 말한 것이기  때문에 눈에 본 건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 된다 그게 과학 아닙니까? 그것은  맞지마는 인간 이치나 하나님 이치나 인간의 생활 이치나 거게 대해서는 하나도  옳은 말이 아니고 사람을 배암이 꾀어서 죽인 그 내나 배암의 말이기 때문에  기독자를 깨워서 멸망시키려는 그 외에는 내용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릇이 좁고 마음이 좁고 시야가 좁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만한 그게 없어. 그러니까 그 안에 삼켜지고 만다 그거요.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하나님 말씀에 요 근거해서 알아야 되는데 왜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또 보느냐 하면 어제 말했지요? 하나님과 하늘에 있는 모든 것이 정신  집중이 그 회개에 있다. 또 모든 능력의 집중이 그 회개에 있다. 또 그 기쁨도  회개된 거기에 기쁨이 있고 그 기쁨의 지금 기쁨을 조성하려는 그 목적도 회개에  있다. 그러면 회개하면 기뻐한다.

 그런데 그 회개는 사람이 능동적으로 하는 게 아니고 순전히 피동 적이다.

그것을 말했습니다. 또 피동이라면 루터파라 하는 파는, 루터 파는 무슨  주장이냐?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을 주실 때에 거부만 하지 않으면 그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말했고, 또 감리교의 교리자인 요한 웨슬레는 '우리 구원은  하나님과 사람이 둘이 힘을 합해 가지고 구원이 이루어진다.' 그렇게 주장을  했고, 칼빈은 구원은 '전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칼빈의 깨달은 것이 바른 깨달음입니다. 그러면 전적 하나님에게 피동  되는 은혜이나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시키려고 하실 때에 그 감화를 받아들여야  회개가 되어지는 것이지 그 감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신의 감화를 소멸치 말아라 감화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감화에  복종으로, 그 감화에 복종하는 이 순종 믿음으로 구원이 된다 하는 그것과  그것을 거부하지 않으면 된다는 것과 아주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그것은  칼빈이 전적 은혜라 하는 그 은혜라 하는 그것을 거게서 순종으로 된다. 전적  은혜나 그 은혜를 우리가 받는 데는 순종으로 받지 순종 외에 딴것으로써는 받을  수 없다 하는 그것을 다시 해석을 붙여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러면 여게 목자는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했는데 그 다음에서는 보면  '하늘에서는' 말했소. 양 잃은 것을 말해 가지고 양을 찾을 때에 '하늘에서는  기쁨이' 그래 말했습니다.

 여게 7절 끝에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요 하늘에서는 기뻐한다.

위에는 보니까 목자 하나로 나타났지마는, 목자 하나로 나타났지마는 그  다음에는 목자를 다시 거게서 덧붙여서 발표해 놓기를 하늘이라 그 하늘이라  그래, 하늘이라 그러면 목자 하는 것은 개체인데 하늘 한 것은 복수입니다.

단수요 그 복수입니다. 그러면 하늘에 모든 것.

 또 그 다음에 드라크마에 대해서는 l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 니라 요 드라크마를  찾은 것은 여인 개체인데 그 다음에 또 발표하기는 "하늘에 사자들이라" 하늘의  사자들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요한계시 l2장에 보면  '해를 입은 여인이 있는데, 해를 입은 여인이 있는데 그 머리에는 열두 면류관이  있다' 했습니다. 열두 면류관이라면 열두 승리라 말인데 열두 승리라 그 말은  십이 지파 십이 사도의 승리를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인이 아이를 배어서 아이 낳을 그 해산 기약이 되니까 용이 해산하면  제가 절단 나기 때문에 해산 못하도록 이렇게 기다리고 있다가 그 해산하면  삼키려고 이러다가 여인이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들을 낳으니까 그 용이 해산된  그 아들을 삼키려고 달려드니까 그 아들을 하늘로 올려가 버렸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아들이 누구냐? 철창으로 만국을 부수고 다스릴 아들이다 그것  내나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을 가리켜 말하는데 그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을 누가  낳았느냐? 그 구약 아담 하와 때부터 하나님이 시작한 "여인의 후손이 배암의  후손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기리라" 하는 그 말씀하신 대로 구약 교회, 구약 교회  전부가 메시아를 잉태해 가지고 있다가 구약 교회가 탄생시킨 것이 뭐냐?  메시아, 도성인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이러니까 배암의 용역사들이 예수님을  멸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을 삼키려고 이제 하다가 십자가 못 박혀 죽이니까  저는 삼킨 줄로 알았는데 그것이 완전히 승천해서 완전 승리를 한 일이 됐기  때문에 마귀가 실패를 한 것입니다.

 거게 여인이라고 발표한 것이나 여기 여인이 드라크마를 찾는다고 발표한  것이나 이것은 드라크마 말한 이 여인은 교회를 말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러면  예수님 빼놓은 거냐? 교회는 성령과 진리와 무엇이 합한 것이 교회라고  말했습니까? 결혼식 할 때마다 내가 이 말을 하는데. 교회는? 성령은  하나님이요, 하나님과 또? 진리와? 사람. 그 사람과 셋이 합해서 하나되어  움직이는 그것이 뭐냐? 교회 행사입니다. 그게 교회요. 교회 머리는  예수님이시요. 교회는 인간만이 아니고 그 머리는 곧 하나님이 그 머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보니까 자, 여인은 교회를 모형한 비유인데 그러면 여인은  어디다가 집중을 하며 또 이 목자는 어데 집중하느냐? 목자의 마음이 어데 가  있으며, 목자의 고민이 어데 있으며, 목자의 노력이 어데 있습니까? 목자의  기쁨이 어데 있습니까? 어데 있지요? 목자나 여인이나 그 신경도 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또 잃어버린 드라크마 하나 거기에 집중돼 있습니다. 또 노력은 어데  집중돼 있습니까? 노력은 어데 집중돼 있지요? 노력도 마음도 거기 있고 노력도  집중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기뻐하는 기쁨은 어데 집중돼 있습니까? 기쁨도  그 잊어버린 것 찾은 데 거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제 오전부터 말하고 오후에도 말했는데 거게 대해서 깨달은 사람  있으면 거머쥐고 '아!' 하고 큰 힘이 나올 건데 깨닫지를 여러분들이 참,  깨달으려고 말하지 않고 어쩌든지 아까 말한 대로 그렇게 설교를 듣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거게 깨달음의 역사가 없다 그거요.

 고함만 지르고, 전부 설교해도 '저 설교는 보자, 하늘의 것을 준비시키는  설교냐, 땅의 소망을 두는 설교냐? 저 설교는 무슨 설교냐? 하늘의 소망을 두고  땅을 그 자본으로 비용으로 투자하라는 설교냐? 저 설교는 땅의 것을 소망 두고  땅의 것을 만드는 설교냐?' 그러면 땅의 것을 소망하는 땅의 설교를 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그자들은 땅에 소망하기 때문에 제일 두려운 것이  죽음이 제일 두려울 것이오. 천국 가기가 제일 두려울 것이오. 세상에서 천년  만년 살고 싶을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그걸 우리가 정평 정가해서 이래 나와야 되는데, 그래서 제가 이번에 하나님께서 대구에 허락을 하면 여러분들에게 복이고 허락을  안하시면 여러분들에게 복이 없습니다. 제가 이번에는 가 가지고 아무래도 이것  이 복음이 모두 땅의 복음과 하늘의 복음 이걸 구별을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좀  정의를 해 줘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제가 가졌습니다마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란지?  그러기에 여게 정신도 힘도,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교회의 전 지혜도 능력도 그  회개시키는 회개에 집중돼 있고, 소망도 회개에 집중돼 있고, 기쁨도 회개에  집중이 돼 있다 하는 그것은 요 성경대로라고 여러분들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또 이 회개에 대해서는 죄인이 하나 돌아오면 했으니까 이 회개는 안  믿는 사람이 예수 믿는 그 회개만으로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은 이 성구에 대해  진짜는 다 모르고 껍데기 수박만 핥고 만 사람들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둘이 있습니다. 두 회개. 하나는 기본회개요 하나는  평생회개인데 기본회개는 중생을 말하고 평생회개는 자기의 성화 건설 이 구원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요 회개라 하는 것은 단번에 되는 기본회개와  평생 죽는 날까지 회개되는 평생회개와 요 두 회개를 다 포함해서 여게 회개하는  것으로서 말하는 것이라 그거요.

 만일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사람이 주일도 잘 지키고 다 예수 잘  믿어서 그 사람이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됐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이 신신학이나  이 세상에 아니 그런 것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지금  제일 근심거리라 그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이 '내가 이제까지에 지금 주장했던 건 이건 참 신신학을  주장했다. 신신학에 속했다.' 하는 그것을 회개하면, 회개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오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사람이 회개한 그것은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온 것 아닙니까? 여러분들 어떻소? 그건 죄인 회개 아닙니까?  어떻소? 그건 죄인 회개 아니오? 그것은 그래 하는 그렇게 신신학을 주장하고  있는 그것은 의인이요 죄인이요? 그러면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으면 그 죄인  하나가 돌아온 것 아닙니까? 왜 대답을 안 하요? 그 죄인 하나 회개하고 돌아온  것이오.

 이러기 때문에 여게는 기본회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평생회개도 다 포함된  회개 전체를 두고 말한 비유라 하는 그걸 여러분들이 굳게 잡아야 된다 그거요,  그러면 기본회개 안한 사람에게는 기본회개가 회개의 순서 일 것이고  기본회개를 한 사람은 그 사람에게 이제 평생 회개의 순서가 있을 터이니까 그  한 순서 한 순서 회개가 진행될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는 기본회개를 지금 해야 될 사람들입니까 이제 건설회개  평생회개에 착수돼 가지고 평생회개를 때야 될 사람들입니까? 평생회개를 해야  될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평생회개를 하면 평생회개 할 것이 한 가지입니까, 여러 수십  가지입니까, 수백 가지입니까? 우리가 회개할 것은 얼마나 많다고 생각합니까?  회개해야 될 것이 한 개겠소, 열 개소, 백 개겠소? 얼마가 되는지 모릅니다.

 바울이 회개해 갈수록이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했소. 그러나 주님이 나를  회개시키는 그 죄는 열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돼요. 그  하나라는 것. 하나라는 게 성경에 뭐이냐? 한 양에게 갔고 잊어버린 한  드라크마에 간 그 하나에게 갔다는 그것을 깨닫고, 그러면 내게 죄를 회개할  것이 열 가지 백 가지가 있지마는 하나님께서 내 죄를 회개시키려고 지금  하나님의 몇 가지가 기울어져 있습니까? 교회와, 여인은 예수님이 머리된 교회,  교회 운동, 복음 운동, 또 주의 대속하신 선한 목자이신 주님 그 전부의 지혜가  어데 집결돼 있습니까? 내게 대해서는 그 지혜가 어데 집결돼 있습니까? 그  지혜가 내가 회개할 그 한 죄에 집결돼 있습니다. 그 능력은? 한 죄에 집결돼  있습니다.

 그러면 그 전부가 욕망하고 있는 욕망은? 되기를 원하는 욕망은 어데 있습니까?  하나 회개에 있습니다. 요것을 아는 요것이 폭탄이 터져서 폭발되는 능력이  거게서 나옵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나오는데, 회개는 능동적이라고 했습니까?  피동적이라고 했습니까? 요것도 그 보니까 어째 피동이라 하느냐? 보니 목자가  와 가지고 양 찾아서 아듬었고, 드라크마는 그것은 묻혀 가지고 있는 것을 그  여인이 쓸어 가지고 찾아 가지고 주워 가지고 들었지 제가 들려졌습니까? 순전히  찾는 자의 그자의 능동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찾아짐을 받은 그자의 힘으로 된 게  아니라는 요것을 똑똑히 구별을 해야 됩니다. 구별할 필요가 어데 있느냐?  그러면 그분이 우리를, '회개는 순전히 능동이라' '회개는 수동이라' '회개는  능동이요 나는 거게 피동이라' '회개는 둘이 힘을 아울러 되는 것이라' '회개는  거부만 안하면 되는 것이라' 그 거부할래야 거부를 어찌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부하면, 거부하지 못하는 건데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요게 구별돼야 되는 것이 무엇 때문에 요것이 구별돼서 확정이 돼야  되느냐 하면 그분이 그러면 능동적으로 나를 회개시키려고 하면 나를 회개시키는  역사가 뇌성 벽력으로 역사 합니까 강제로 꺾어서 역사를 합니까? 그분이 내게  역사 하는 것은 뭘로 역사 합니까? 손을 가지고 역사하요, 권위를 가지고  역사하요, 위엄을 가지고 역사하요, 뭘 뭐 무슨 무력을 가지고 역사하요? 그  역사 하는 게 뭘로 역사합니까? 감화로. 감화라니? 깨닫게 하는 것, 깨닫게 하는  그것 가지고 역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깨달아지는 그것이 이 전능자요, 창조주요, 만유의  대주재시요, 십자가에 대 속하신 주님이시요, 교회의 머리되신 이분과 여인,  모든 교회 복음 운동 전 세력, 성령과 진리의 이 모든, 지금 교회는 세 가지가  하고 있지 않소? 성령과 진리가, 성령과 물과 피가 지금 운동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 전부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지혜와 능력과 욕망이 다 내게 기울어져  있는데 어데 기울어져 있느냐? 내가 회개할 지금 순서로 되어 있는 그 하나에  기울어져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에 기울어져 가지고 있으면 그분이 내게 하나에  기울어져 가지고 있는 그 증표가 뭐이냐? 기울어졌으면 그분이 전부를 기울여  가지고 역사 하는 데에 그 역사가 뭐이냐? 그 역사가 뭐입니까? 그 역사가  뭐이요? 나에게 깨닫게 해 주는 그것이 그 역사라 그거요.

 왜 능동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피동으로 되는 것을 요걸 믿으라고   자꾸 말하느냐 하면 이렇게 참 한없는 능력이 와 가지고 나를 구원하려고 지금  착수한 것이 뭐이냐? 나에게 깨닫게 해 주는 그것은 한없는 능력이 와 가지고  깨닫게 해 주는 것인데 그 깨달음 그것을 자기 주관적 마음으로 비판해 가지고  버린다 그거요.

 그것이 막바로 이렇게 크신 하나님의 십자가 대속하신 그분이시요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신 이분이심을 모르고 모르고 배척한다 말이오. 제 마음인 줄  알아. '내가 이 마음 먹었다가 버린다.' 요게서 사고가 일어나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승리를 못하는 것입니다. 모든 승리한 종들은 다 여게서 승리를 했소.

이러니까 순전히 능동적이 아니고 피동적이다 하는 것을 그것을 잘 깨달아  잡아야 될 터인데 그게 알기가 그렇게 쉬운 게 아니고, 알려 하면 쉬운데.

이러니까 이것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것이 생명을 내놓느냐 안 내놓느냐 하는  그런 문제를 다 통과해 나가야 될 터이니까 이것 뭐 그냥 뭐 그래도 좋다 그렇다  저렇다 하는 그런 것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확정이 돼야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진실해지면 점점 도를 듣고,  도를 바로 듣지 못한 사람은 제가 저한테 속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아.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소.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뭐라 하든지 뭐 욕을 하든지 뭐라 하든지 해서 내게 고칠  것 있으면 고치면 됩니다. 고칠 것 없으면 참고 기다리면 오히려 복 될 것이고  아무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다 말이오.

 뭘 암만 지글거려 쌓아도 암만 지글거리든지 말든지 내가 고칠 것 있으면  얼마나 좋소? 얼른 고치지. 그러면 그 사람 내게 선지자 아니요? 또 내게 없는데  억울하게 말하면 참고 견디면 복있지. 손해갈 게 하나도 없다 말이오. 욕은  손해갈 게 하나도 없어. 욕은 손해갈 게 하나도 없고 훼방은 손해갈 게 하나도  없어. '훼방을 받으니 저러는갑다'그 사람 위해서 말했지 훼방은 훼방 받는  사람에게는 손해갈 게 하나도 없습니다. 왜? 훼방 받을 때 제가 손해 가는 것은  그것은 훼방 받으니까 훼방하는 그것은 악인데 악에게 피동돼 가지고 악을 하면  제가 손해가지. 그건 제가 잘못해 손해요.

어떻게 훼방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과연 고칠 것 있으면 또 고치니까 큰 유익  봤고 또 고칠 것 없는데 억울하게 그러면 그것은 손해입니까? 참고 견디면  복있고. 이러기 때문에 성령으로 믿음으로 사는 자에게는 해할 자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해할라고 때렸는데 그분을 존귀케 했어. 예수님을 십자가 못박아  죽였는데 그 대성공을 하게 해 줬다 말이오. 마귀가 거기 간담이 녹아요. 마귀의  법을 예수님이 이기고 말았다 그거요. 그런고로 어짜든지 바로 깨달아야 됩니다.

바로 깨닫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보면 우리 교인들도 뭐 아마 이렇게 진리로 몰아대고 이러니까, 영 뭐 듣기가  싫고 잠이 오고 기가 막히는데 그만 저 땅에 복음을 설교하는 그런 불파나 그런  사람들 와 가지고 한번 했으면 막 굉장히 뒤벼질 것이오. 대번 다 죽을 것이라  그말이요, 다 죽을 것이라.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이야, 아직까지. 그래 가지고  있어.

 생명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 여게 박태선씨가 전도관에서 그때 하도  그때 막 전국이 떠들고 뭐 야단을 지기기 때문에 내가 운동장에 가 가지고 꼭,  한 사십 분 들었어. 사십 분 듣고 난 다음에 완전히 파악하고 거기 대해서 제가  말한 그대로 지금 다 결실이 맺어지지 않았소? OOO 목사가 또 그가 여기 고신에서 청해 가지고 여게 미공보원 옆에 그때 광장  있을 때 거게 해 놓고 굉장히 집회를 하고 야단을 지겼습니다. 나는 가지  않았어. 안 갔는데, 우리가 서울에 원남교회를 세웠는데 원남교회를 그  뒤에,-원남교회를 세워 가지고 고신에게 다 뺏겨버렸고, 또 중앙교회도 세워  가지고 고신에게 뺏겨버렸고, 원일 교회도 세워 가지고 고신에게 뺏겨버리고  교회를 우리가 세우고 다 뺏기기는 우리가 다 뺏겨버렸습니다.-이랬는데 그때  거기 가니까 OOO 목사를 청해 가지고 집회를 한다 하는데 그 한 시간 밤예배인데  설교 들었어. 그러고 난 다음에 보니까 교회가 웅성웅성하고 뭐 야단이 났어, 막  은혜 받았다고. 내가 가니까, 내가 그때 그 교회를 세운 사람이요, 또  그때까지도 여게서 도움을 줘 가지고 하고 있는 교회요, 또 내가 거기 교역자를  파송해 가지고 세웠는데 그때 교역자 파송한 사람이 누구냐? 내 밑에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 OOO 목사님 동생 OOO 목사님을 OOO 목사님이 거기다 세워. 나는  다른 이를 하려 했는데 그분을 OOO 목사님이 소개해 세웠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그만 그 역사는 다 말할 것 없지마는. OOO 집사님이 나중에  보니까 딴 복음이 돼 놓으니까 자기가 교회 세우려고 그분이 죽도록 모아 가지고  교회 하나 세울 만한 돈을 모아 놨었는데 그 돈을 OOO 목사님이 말하기를  '너희가 교회 세울 게 아니라 원남교회에 백 조사를 이리 청해서 올라오면 교회  세울 것 뭐 있나? 그러니까 보내 줄 터이니까 네가 그 돈을 우리 동생 미국 가는  여비로 달라.' 이래 가지고 그 말에 넘어가서 그 여비를 줬어.

 그때는 그 여비가 비쌌습니다. 그때 서울에 있는 집 칠십 평 집을 흥정을  했는데 그 살 수 있는 돈인데 삼각산 제가 집회할 때 와 가지고 그 사려 하는 그  돈인데 솔빡 그리 줘 가지고 나중에 가서 내가 그때, 이복순 집사 아는데 그  무슨 교회요, 성결 교회? 그 교회 집회를 가니까 원남교회 교인 집사들이 좋아서  기뻐 와 하면서 '언제 오십니까?' '언제 오다니 무슨 말이냐?' '조사님 이사를  언제 하십니까?' '나는 여기 원남교회 안 온다.' 이라니까 모두 다 발칵 뒤벼져  가지고 '왜 이렇게 말했는데,' OOO 목사님이 나한테 와 가지고 사과를 합디다.

'과연 이래서 이리이리 됐습니다.' 내게 책임 없는 일이고 말았었습니다.

원남교회 가니까 OOO목사가 설교하는데, 내가 가니까 그래도 있는 모든 원로  집사들이나 모든 남녀 집사들이 우 와서 한 방 모였어. 그래 내가 마지막으로  말했어. '이제 너거들은 뭐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너거 마음대로 이래  하니까 내가 어떻게 해야 내 교훈이 여기 와 미치지도 안하고 이러니까 마지막  말하고 간다. 양도천 목사는 그 사람은 기독교가 아니다. 너거 보기에는  신신학에 가 가지고 지금 전국이 떠들고 이렇지마는 그 사람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 사람은 하나의 세상 주의자인데 민족주의자도 못되고 그 사람은 지상  천국주의자도 못되고 이상야릇한 거짓 기독교다.' 그것을 내가 말하고 그 뒤에  안 갔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계룡산에 가니까 계룡산에 새일 무슨 당이던가 뭐이던가 큰 집을  하나 지어놨는데 그 OOO 목사가 지어놨는데 그것 뭐하려고 지어놨느냐? 거게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거기 지금 천국이 건설되고 거기 예루살렘 되고 거기서  된다고 집을 하나 지어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은 그 사람 절단 나서 어데 가  파묻혔는지 없습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양심을 쓰고 바로 나가려 하면 가짜를 알 수가 있는 것인데  자기 속에 같은 것이니까 제동무 제 찾았는데 뭐 다를 게 뭐 있겠소?  이러니까 천국은 말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말로 되는 것도 아니고 욕심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니오. 또 배짱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데에 설복이나 매수나 당할 하나님이 아니오. 하나님은 그런 것을 다 아시고  심판해서 당신의 목적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모든 세력이 매장을 하려고 마구 까뭉캐고 이리 갈고  갈고 이래도 하나님이 갈지 않으면 그것은 섭니다. 일어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요 진리를 바로 깨달아서 나가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다 헛일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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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 읽는 자/ 에베소서 6장 18절-19절/ 880814주새 선지자 2015.12.16
1600 잃은 양 비유, 회개/ 누가복음 15장 3절-7절/ 830410주전 선지자 2015.12.16
» 잃은 양, 드라크마 비유/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1월새 선지자 2015.12.16
1598 잃은 양, 주님의 요구/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3수새 선지자 2015.12.16
1597 잃은 양, 한 죄/ 누가복음 15장 3절-10절/ 830413수야 선지자 201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