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되신 주님의 사랑

 

1982. 3. 18. 목새

 

본문: 마태복음 25장:31절-40절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와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저도 이 성구에 대해서 옛날에는 이것이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이라. 그렇게  깨달았고 또 그렇게 증거도 했고 여기에서 어려움 당한 사람을 도와 준데  대해서도 육적으로 어려움 당한 사람을 육적으로 도와주는 것을 말씀한 것이라  그렇게 깨달았고 또 증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차차차차 여러 면으로 깨달음도 자라가고 또 믿음도 조금씩  자라갈 때에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잘못  깨닫고 기본구원을 말함이라 육을 육의 어려움에 대해서 말씀함이라 이렇게 잘못  깨달아 증거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죄해서 버려서는 안됩니다. 왜 우리는  깨달음이 점점 고쳐져 가고 또 모든 면이 치료되어가고 또 성장 돼 가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자가 온다는 이 인자로 이렇게 재림하시는 주님을 당신이 당신을  이렇게 소개할 때에 인자라고 이렇게 소개한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인자라 말은  구약에는 부족한 사람들을 가르쳐서 인자라 이렇게 표시한 일이 있지마는  신약에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인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주 사람 중에도 제일 가난하고 연약하고  무지 무능한 제일 인간 중에 하급 인물을 가르쳐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람되시되 사람 중에는 그래도 상등이나 중등이나 이런 인물 되심이  아니고 인간 중에 제일 말단의 사람이 되기까지 주님은 낮아지시고 가난해  지시고 무지무능 해졌습니다.

당신의 주장이라 하는 것은 호리도 해보지를 못했습니다. 당신의 욕심이라고는  호리도 행해보지를 못했습니다. 순전히 동등 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자기를  비어 비었으며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으로 좀 낮아지고 낮아진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 되기까지 낮아지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복종을 하되 살고 복종하는 것이 아니고 죽기까지 복종으로 끝나버렸습니다. 복종  아닌 요소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 것이 하나님이 인자 되심이 사랑이요.

또 그 다음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영광으로 온다.

하니까 영광으로 온다고 하니까 이는 참 세상 사람들이 해석하는 대로 아주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은 그 허영 영광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저 먹을 것 입을 것 있는 사람은 영광 위해서 노력합니다. 김일성이도 영광  위해서 노리고 있습니다. 모든 정치가들이 한번 정권을 잡겠다 하는 것 전부다  영광심 명예심 권력심 여기에서 다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영광으로 온다 하니까 이것은 예수님이 이렇게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존귀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우러러보고 모든 사람들을 누르고 이용하기  위해서 오셨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영광은 영광과 덕으로  우리를 부르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영광은 당신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면서  가장 원수 되어있는 피조물 다른 만물은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안 했습니다.

여기에서 있는 이 화초 이런 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지 안하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복종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이 접을 붙이고 이렇게 조화를  붙여서 잡것을 만든 것이 인간이 다 지은 죄지 그 자체가 뭐 변질되고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제일 원수 된 것이 사람인데 원수 된 자에게 당신이 받을  형벌을 대신 받으시고 행할 것은 대신 행하시고 조물주로 더불어 화친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기울였으니까 이것이 전부를 원수 된 상대방 위해서 다  희생 하셨으니까 감탄이 안될 수 없고 그 사모가 안될 수 없고 존대가 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 영광으로 온다 이 말은 사랑의 그 반응으로 온다 그 말이요. 사랑의  반응으로 오신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인자 됐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이 다  영광을 주께 돌립니다. 이보다 더 감사한 분이 어데 있으며 이보다 더 큰일한  분이 어데 있느냐? 지옥에 있는 자들도 그들이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제일 이  인자 되신 분에게 영광과 존귀를 돌리게 되는 것을 가르쳐서 '그들이 입으로 주라  시인하여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참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이분보다 더  완전하고 온전한 분이 없으시다. 이분의 하신 일이 이러하다. 이것을 가르쳐서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린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인자  되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피조물이 다 미워하고 대적하고 나를 착취한 자가 온다, 나를 침략한  자가 온다, 내게 거짓된 자가 온다, 내 원수가 온다, 나와 서로 경쟁하던 자가  온다, 이렇게 하지 안하고 모든 피조물이 다 영광을 돌려 아참 영광의 주가 온다  영광의 주가 온다 영광을 누구에게 돌리겠노? 이에게 돌리지, 누구에게  감사하겠느뇨? 이에게 감사하지 감사도 이 이상할 때가 없고 존귀를 돌릴 때도  머리 숙일 때도 복종할 때도 제일 높은 평가를 할 때도 이분 외에는 없다하는  이런 분으로 당신이 오는 이것도 사랑입니다.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그 보좌는 권위의 보좌가 아닙니다. 위엄의 보좌가 아닙니다.

지혜의 보좌가 아닙니다. 권위의 보좌도 아니요, 위험의 보좌가 아니요, 지혜의  보좌도 아니요, 부요의 보좌도 아니요, 창조주의 보좌도 아니요, 주제자의 보좌도  아니요, 영광의 보좌라 모든 피조물들에게 그 이상 할 수가 없는  이렇게 사랑으로 역사해서 모든 피조물이 참 그 사랑, 그 은총, 그 희생, 그 봉사,  그 사랑에 다 감격해서 오실 때 모든 사랑이 다 이런 참 영광이라 하는 그  영광의 보좌, 사랑의 보좌, 희생의 보좌, 봉사의 보좌, 섬기는 보좌, 하나님이  종노릇한 보좌 영원히 종노릇하는 보좌, 이러기 때문에 영광의 보좌입니다.

이것도 사랑을 가르쳐서 말씀한 것입니다.

사랑의 주님이 사랑의 역사를 이루신 그 역사가 사랑의 지위를 보좌는 사랑의  지위 아무도 그 이상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보좌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지 못해.

구역장도 인자 되심같이 사랑에 구역장 있고 암만 그 식구가 찾아봐도 그가 나  위해서 낮아진 것보다 더 낮아질 수가 없어 그는 나 위해서 낮아진 자다, 그는 나  위해서 가난해진 자, 그는 나 위해서 천해진자다, 그는 날 위해서 곤욕을 당한  자다, 그는 날 위해서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은 자시다. 이것이 인자 같은  권찰이요. 영광으로 오는 것 암만 봐도 자기 식구가 그분을 이모로 조모로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것 외에 없어.

그저 지혜적으로 능력적으로가 아니고 그의 사랑적으로 내가 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의 구역장 영광의 위치 아무리 누구누구를 대고 평가해봐도 자기가  아는 대로는 그이 같은 영광의 위치에 자기가 영광의 위치에 모실 뿐 아니라  아무리 평가적으로 비판적으로 해봐도 그이의 그 영광의 위치를 아무도 차지한  사람 없고 차지할 수 없고 앉을 수도 없고 내가 또 그 자리에 모실 수도 없어.

영광의 보좌 인자 같은 장로, 인자 같은 목사, 영광의 장로, 영광의 목사, 영광의  보좌는 존귀한 자리입니다. 영광의 제일 높은 자리 영광의 위치 이런 장로도 있고  이런 목사도 있고   그는 예수로 인해서 존귀한 인자 반대에 존귀한 권찰 제가 권찰이 아니면은  제나 내나 일 대 일 일터인데 권찰직으로 인해서 대단히 높아졌습니다. 대단히  존귀해 졌소. 대단히 커졌습니다. 존귀의 권찰 장로 목사 위엄의 아주 위엄스러운  위엄의 권찰 장로 목사 영광의 보좌 반대 권세의 보좌 모든 사람을 착취하는  착취의 보좌 모든 사람을 모든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보좌 이 섬김 받는 보좌의  권찰도 장로도 목사도 있는데 주님은 이러한데 그는 그러기 때문에 그는 주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노아 때에 방주 만드는 것이 모든 계명의 표준적 계명 표준적 요구  표준적 구원 도리가 된 같이 불심판 예수님의 재림의 이 구원을 바라보는 자는  사랑이 표준계명입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요구의 표준입니다.

'그런고로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족속을 그 앞에 모으고 모든 족속을 그 앞에  모으고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 다니면서 네가 이 도를 전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요 세례를 주라. 나는 세상 끝 날까지 너와 같이 하겠다.'  "성령이 임하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으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나를 나타내리라 나를 보여주리라 나는 창조주와 인자 된 자인데  창조주가 인자 된 것을 보여주고, 대 주제가 섬기는 종의 종이 된 것을 전해서  보여주고, 권세로 으뜸이 아니고 종으로 으뜸이라 종으로서는 제일 으뜸이라  이러기 때문에 영원 무궁토록 주님의 위치는 제일 낮은 섬기는 종 중에 제일  밑자리에서 섬기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 '모든 사람 위해서 생명까지 다 바쳐서 섬기려고 왔다.

세상나라는 큰 자들이 위에 있지마는 너희들은 그렇지 않다 크고자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하리라' 종이 되는 것으로 큰 것 봉사되는 것으로 큰 것, 다른  사람에게 이용되는 것으로 제일 큰 것. 자기 위해서는 하나도 한 사람도 자기  위해서는 이용하지 못했고 모든 사람에게 자기 전부는 이용을 당한 것 이용된 것  이것으로 큰 것의 높은 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제일 종의 종, 제일 낮은 종이 누군가 아버지시요, 그  위에 그보다 좀 높은 종은 누군가 성령님이시요. 그보다 높은 종은 누군가 그  위에는 누가 얹혀 가지고 있는가 그 위에는 선지사도들이 얹혀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양은 예수님의 형상을 입어서 참 예수님 증거 하는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 사람을 보아 하나님이 인자 되신 것을 짐작할  수가 있고. 그 사람을 보아 영광의 주를 짐작할 수가 있고 그 사람을 보아 예수  안에 있는 지위는 영광의 지위라 착취의 지위가 아니고, 부요의 지위가 아니고,  영광의 지위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나를 본 자는 예수님을 보았거늘 어떻게  보여 돌라고 하느냐" 할 수 있는 이런 사람으로 그 형상 그 속성 그 신성과 그  인격에 그 속성에 모형을 입는 형상을 입는 이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너희들을 부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형상을 입기 위해 입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셨다 그렇게  밝혔습니다. 아가서에는 보면 나의 사랑하는 자는 거기 신랑은 주님을 상징한  것인데 나의 사랑하는 자는 양떼에 발자취를 따라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선지사도들이 자기 위해서 살려고 세상은 노력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가까운  사람까지 자기 위해서 살고 먼 원수까지도 자기를 위해서 살려고 살도록 하려고  하는 것이 모든 세상 권세자 들인데  예수님은 그와 정반대요 모든 선지사도들도 그와 반대인데 그와 반대인 그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이 주님이 사랑하는 자입니다. '양들의 앞서간 양 앞서가  양으로 살고 간 그 양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그자가 내가 사랑하는 나의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의 사랑하는 자이다.'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로 더불어 참  연연하는 그 연애하는 것을 아가서에서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어떻게  사랑하며 그 성도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 '나의 사랑하는 자는 앞서간  양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장막 곁에서 염소새끼를 먹이는 자라 장막 곁에서  염소새끼를 먹이는 자라'  거게 있는 염소가 이 염소라 제가 ○○○ 가 가지고 살다온 어떤 전도사를  만났습니다. 만나서 거게는 다 목축업을 하고 있는 산에다가 한 사람이 몇 천  마리씩 이렇게 목축하는 곳인데 목축에 대해서 제가 물어봤습니다.

지금부터 한 삼십 오 년 됐습니다. 거게 대해서 나한테 조금 지식을 주십시오.

물으니까 아는 대로 얘기하는데 양 열 마리 머리 염소 한 마리씩이 끼어  있답니다. 양 열 마리 머리 염소 한 마리씩을 끼웠는데 그것은 왜 염소는 나쁜  긴데 뭐 하려고 끼워놓습니까?  예 여름에 더울 때에 양만 먹이면 양은 참 이는 예수님의 성격과 같은 성격을  가졌습니다. 한 마리가 누웠으면 다른 양이 와서 땅에 눕지 안하고 더울 것은  생각지 안하고 그 위에 포개 누우면 가만히 들어 누웠다가 또 위에 한 마리 포개  누워도 또 눌려도 그대로 눕고 또 눌려도 그대로 눕고 나중에 그 양이 결국은  죽어버립니다. 맨 밑에 놈 죽고 죽어도 가만히 누웠대요. 죽어도 가만히 위에서  누우면 누운 대로 눌려 가지고 그냥 있지 그러다가 죽는 답니다. 양 열 마리 머리  염소 한 마리씩을 먹이면 양이 두 마리만 한테 포개 눕지를 못해 이래 가지고  그의 목장에는 반드시 양의 십분 지 일은 염소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제가 듣고 아! 염소새끼를 먹이라고 하는 아가서에 말씀하신 이 염소가  과연 택한 자로구나! 왜 교회에 보면 별별 사건쟁이가 있습니다. 시기 질투 이간  간사 묘략 궤휼 요렇게 아주 몹쓸 양떼 고게 하나 들어서 교회 사건을  일으키는데 그게 없으면 좋을 것 같애도 그게 없으면 그 교회는 사랑으로 인해서  망해버리고 맙니다. 그 사랑이 변해서 인간 사랑으로 화해 가지고 하지마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항상 원수가 있으니까 경계됩니다. 고발자가 있기 때문에  경계됩니다.

이래서 교회는 돼나가는 것이니 장막 곁에서 염소새끼를 먹이는 자라. 그 자도  주님의 구속으로 된 것인 줄 알고 그를 더 미운 아이 안 품에 품으라는 말과  같이 그를 사랑함으로 그를 기어코 라도 그리스도의 형상의 사람을 만들라고  애쓰는 그것이 주님의 사랑하는 자라  어떤 성자가 가다보니까 비참한 문둥이가 있어서 비참한 문둥이가 있어서 그  문둥이를 데려다가서 씻기고 이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러면서 그 갈곳 없는  문둥이를 보낼 수가 없어서 자기 집에 자기 방에 한테 모셔놓고서 또 날마다  목욕도 시켜주고 또 그 진물 난 것을 다시 갈아 입히고 이렇게 하니까  마지막에는 씻구로 대주는 것이 그 권세입니다. 어찌 어데 갔다가 시간이 늦어서  올 시간에 오지를 못하고 씻길 시간에 씻기지를 못했습니다.

그 뒤에 오니까 호령을 치면서 '어데 갔다 왔느냐'고 야단을 쳐서 '예, 고만 이리  이리 되어서 조금 늦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하면서 물을 데워 가지고  씻겨줄라고 물 데워주니까 '안 한다 네 까짓한테 씻기지 안 한다' 이래서 그분이  엎드려서 얼마나 빌고빌고 이러니까 나중에 비로소 마음이 돌아와서 슬그머니  데면서 씻길라하니 슬그머니 대 주거든. 그때 그분이 하나님 앞에 회개를 하면서  '내가 이 형제를 푸대접하고 사랑치 못했고 내 주관으로 살고 이 형제를 생각지  못했다'는 것을 참 회개를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그 상처를 씻겼는데 다 씻기고  보니까 상처는 완전히 다 나았어.

그래 그분이 다 낫고 난 다음에 다시 그 앞에 땅에 꿇어 엎드려 가지고 통회를  하면서 자복을 하고 '내가 이제는 주님 안에서 선생님을 위해서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고 그라고 난 다음에 아무데도 가지 안하고 그 여생을 그 종 그  선지자를 따라서 섬기는 일로 끝을 마쳤어.

이렇게 하는 그것이 염소 새끼지만 염소 새끼지만 마지막에는 그것이 순전한  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는 그런  것은 아니지만은 참 돌변되어서 자기 여생을 다 주님에게 바친 그런 사람마다  바쳐서 된 사람에게 그 영감 그 진리가 전달되어서 또 바친 사람이 되어진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0장에 보면은 앞서 가면 인도하는 양떼는 너를  따라온다 네가 앞서가면 양떼가 따라온다. 네가 불러내고 난 다음에는 네가  앞서가면 양떼가 너를 따라온다. 양떼를 앞서보내고 뒤에 회까리로 깔리면서  이렇게 인도하는 것은 이 세상 양을 인도하는 법이지만은 이 양을 인도하는 것은  목자가 앞서가면 양이 따라오는 것이 이것이 목자를 목자가 양을 인도하는  인솔하는 방편이라 하는 것을 요한복음 10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고로 이 말씀은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고 건설구원에 대한 그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요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인 것을 이것을 깨닫고  굳게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본구원에 대한 말씀으로 하면은 그 다음에 해석이  다 정반대로 디벼집니다.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인 것을 깨달아야 그 다음에  해석이 억해가 되지 안하고 성경 진리대로 다 맞는 해석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여기에서 대해서 곤고함을 당한 그것이 영적 곤고함을 당한 것을  말씀하고 육적 곤고함을 당한 것을 말씀한 것이 아니라는 요것을 둘째로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주교에서는 이 영적이라는 면은 생각지 않습니다. 순전히  육적면으로 해석하고 합니다. 천국 열쇠를 베드로에게 준다는 이 해석도 육적으로  해석해 버리고 맙니다. 그것이 천주교 된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그 사람이 타락하면 영적면을 생각지 안하고 점점 육적면으로  나옵니다. 육적면으로 나오는 자는 인간들은 육이 되어있고 영면을 모르기 때문에  육의 면을 하지 안하고 영의 면만을 하면 그 영으로서 자랄 수 있는 데 영면하는  자에게 육면으로 하는 이자는 육면으로 하면서 이것이 껍데기다 영면을 향하여  한다고 하면 되어지지만은 이것을 순전히 육면으로 하면서 이것이 제일이라 하는  그자는 영면으로 역사 하는 자의 제일 원수입니다. 이것이 이름이 뭐입니까? 이  신앙이 뭐입니까? 외모를 취하는 외식신자라 하는 것입니다. 외식신자 우리가  육면에 대해서 안 하면 육에 속한 자들이 오해를 합니다.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육면에 대해서 하는 것은 세상이 하는 것이요 세상이 아는 것이요. 믿음  없는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이요. 그것으로서 시작해서 점점 영면으로 그를 이끌어  갈 때에 구원이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으로서 다요 이것이 표준이라 생각하면  헛일입니다. 일 학년 아이를 아무리 대학교수의 지식을 가졌다 할지라도 일 학년  그 입학학생을 가르치려고 하면 그 학생과 같은 사람이 내가 되어 가지고  거게서부터 가르쳐서 최고의 지식까지 그를 교훈해서 인도해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일 학년 학생 동무와 같이 되어 가지고 가르치는  것과 고것만이 있는 자가 가르치는 거와 향상과 진보는 없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이 그러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 서부교회가 영면이 목표가 되지 안하고 영면을 위해서 육의 면을  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는 육의 면을 암만 해도 다 썩는 것이요, 기독교의  적입니다. 사람들에게 오해를 주고 잘못된 것을 표준 하도록 만들기 쉽습니다.

우리가 양로원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그런 것이 뭐 가 가지고 전도는 한번씩  하지마는 그 돕는 것이 무슨 것이 있겠습니까 이래도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지 안 하면 안되기 때문에 우리 동에서는 뭐 봉사할 일이  있으면 우리 서부교회에다가 말합니다.

그 서부교회는 언제 갖다가 내가 누를 보냈더니만 무슨 목사회가 있어서  구청에서 목사 종교가들 대표자 회의가 있다해서 그 다른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때 ○ 조사님이 갔던가 ○ 목사님이 갔던가 ○ 목사님이 갔던가 했습니다.

가니까 거게서 시청에서도 나왔는데 서부교회에 대해서 말해. 서부교회와 같이  이렇게 솔선적으로 한다면 참 우리 사회가 잘되겠다 우리는 별로 한일이 없는데  그러나 거게서 양로원에 이런 노인들이 추워서 어려움을 당한다 하면은 우리는  그냥 물리치지 안 했습니다.

다만 연탄 몇 백 개씩이라도 그렇게 했고 또 다른데서 이 어려운 시에서  어려움을 당한 그런 아동들을 이렇게 보호하고 협조한다는 그 감사의 편지가  매월 한두 장씩 한두 군데서 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약소하지마는 기억하고 매월  얼마씩을 그렇게 보내서 그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암만 해봤자 영을 구원하는 데에 이르지 안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지만은 그거 위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안 하면 하지  않는 것이요.

그러기에 건설구원에 대한 말씀이라는 것 그 밑에는 영면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것 셋째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불심판을 면할  표준계명이 무엇이냐 사랑이다. 얼마나 큰 것인지 모릅니다. 성경을 읽는 다고  되는 것이 아니요. 저는 이것을 깨달은 지가 오래지 않습니다.

노아 홍수 때의 표준계명이 방주를 만드는 거와 같이 말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표준계명을 사랑이라 하는 이것을 깨달은 지는 얼마 되지 안 했어.

아마 금년인지 작년인지 그럴 것입니다. 작년 말인지 작년 말기인지 금년인지  그럴 것이요. 표준계명이 사랑이라 하나님께서 이것을 저에게 알려 주신데 대해서  어떻게 감사한지 내가 감사의 참 감격해서 눈물을 머금었어 어떻게 감사한지  우리가 계명에도 수많은 계명이 있는데 노아 때에 수많은 계명이 있는 걸 다  지켰지만 이 계명 저 계명 암만 지켜도 방주 만드는 요 계명 외의 것은 소용이  없었어. 방주 만드는 것이 표준이요. 말세에는 사랑이라 그리고 보니까 모든  성경이 이걸 가르치고 있고.

그리고 난 뒤에는 성경을 보니까 모든 성경이 이걸 가르치고 있었소. 나는 눈이  어두워서 그때까지는 깨닫지 못했어. 그때 하나님이 얼마 전에 알려줘서 이것을  깨닫게 됐어.

모든 성경 말씀은 이 사랑이 하나님의 표준계명이라는 것을 결론적으로는  가르치고 있었는데 나는 그걸 몰랐기 때문에 그 가르치는 증거 하는 것이 다  미비점이라 갖추지 못한 미비 된 증거라 그런고로 이 사랑이 표준계명이라는  것을 굳게 잡읍시다.

오늘 아침에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이냐? 이렇게 말씀하시고 고 다음에 여섯  가지를 말씀하시는데 여섯 가지 이것이 육적으로 생각하면 해석을 하면 아무  가치 없습니다. 이종교에도 다 이거하고 있습니다. 살인강도들도 저거 단체끼리  다 이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인 것인 것을 깨달을 때에는 하나님이 사랑이  이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판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정의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난밤에 말씀같이 우리는 어데서든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사랑의 사랑이요 사랑의 완성입니다. 우리의 현실은 주님 만들어 주시는 현실인데  인간을 쓰고 누구보고 뭘 이용해도 당신이 그걸 후려 잡아 이용해 가지고 우리의  현실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현실에는 하나님께서 사랑에 대한 지식을 온전케 하기 위해서 사랑에  대한 모든 것을 치료하기 위해서 사랑으로 성장시키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어떤 현실에서라도 사랑이 병들면 안됩니다. 사랑이 병들면  안됩니다.

누가 나에게 어떻게 해서 무슨 분위기 무슨 사건 무엇이 봉착해도 사랑이 병들면  안됩니다. 사랑이 퇴보되면 안됩니다. 사랑의 지혜 지식이 가리어지면 안됩니다.

요것이 굳게 잡으면 자기 현실에서 소경 되지 안 할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녜, 이 사랑을 행할 때에는 상대방은 이해를 하는 것 아닙니다. 이해를 못하는  것이요. 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에게 생명을 주고 너희들은 나에게 사망을  준다" 그 말은 나는 너희들에게 사랑을 주는데 너희들은 날 미움을 준다 나는  그를 귀중히 여겨서 이렇게 하는데 귀중히 여길수록 상대방은 멸시하고 무시하고  천대합니다. 그래도 그로 인해서 사랑이 자라야 되고 사랑이 치료돼야 되지 그로  인해서 사랑이 병들면 안됩니다. 그 성자가 문둥이에 대해서 그는 문둥이 하는  일에 사랑이 병들어 사랑을 치료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잘못한 것을  치료했습니다. 사랑의 지식을 그는 더 깨달아 가졌습니다. 사랑이 성장되어  울면서 씻을 때에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이 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가면은  능치 못할 것이 없어.

 십분 기도하고 난 다음에 권찰회 모입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1636 인생의 두 길/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811004주후 선지자 2015.12.16
1635 인생의 두 길/ 베드로후서 1장 4절-11절/ 1981년 41공과 선지자 2015.12.16
1634 인생의 생애/ 갈라디아서 6장 6절-9절 / 1980년 5공과 선지자 2015.12.16
1633 인생의 실력과 부요/ 사도행전 3장 16절/ 1976년 46공과 선지자 2015.12.16
1632 인생의 종말/ 요한계시록 20장 11절-15절 / 1975. 8. 3. 제 31 공과 선지자 2015.12.16
1631 인생의 중요한 문제/ 이사야 49장 24절-26절/ 810915화새 선지자 2015.12.16
1630 인생의 평가/ 골로새서 2장 20절-3장 10절/ 820117주후 선지자 2015.12.16
1629 인인관계의 계명/ 마태복음10장 40절-42절/ 881212월새 선지자 2015.12.16
1628 인인관계의 계명을 지키라/ 에베소서 6장1절-9절 / 881120주전 선지자 2015.12.16
1627 인인관계의 깨끗/ 마태복음 5장 21절-26절/ 850501수새 선지자 2015.12.16
1626 인인관계의 중요성/ 마태복음 10장 11절-26절/ 820702금야 선지자 2015.12.16
1625 인인관계의 투자/ 마태복음 10장 40절-42절 / 820630수새 선지자 2015.12.16
» 인자되신 주님의 사랑/ 마태복음 25장 31절-40절/ 820318목새 선지자 2015.12.16
1623 인자하심이 영원함에 대한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 880131주후 선지자 2015.12.16
1622 인자하심이 영원함에 대한 감사/ 시편 136장 1절-26절/ 880131주전 선지자 2015.12.16
1621 인정-성화-행함/ 마가복음 9장 23절-24절/ 830109주전 선지자 2015.12.16
1620 인정-성화-행함/ 아가서 4장 6절/ 820829주후 선지자 2015.12.16
1619 인정-소망-행함의 믿음/ 에베소서 1장18절-23절/ 840222수새 선지자 2015.12.16
1618 인정하고 믿을 것/ 요한계시록 3장 17절-22절/ 840819주새 선지자 2015.12.16
1617 일 계명의 중요성/ 출애굽기 20장 1절∼6절/ 881130수새 선지자 2015.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