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가치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23일 주후

 

본문 : 고후5:3-10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 지체 중에는 그 가치를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또 모르는 것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고  또 필요가 많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맹장은 그것은 필요 없는 게 공연히 붙어 가지고 그렇다고 해서 다  생생한 사람들이 맹장을 잘라서 없애버리고 편리케 한다고 했지마는 요새는 또  맹장 그게 필요하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인간의 지식은 언제나 미비점이고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몸을 만드실 때에 당신이 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만드셨습니다. 사람들이 아주 필요하게 많이 사용하는 것은 오히려 천대를 하고  또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은 더 후대를 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이 다  동등 권리를 가지도록 하나님이 온 몸을 고르게 해서 모든 지체가 다 합해서 한  몸을 이룹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 각자의 처소를  각양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처지 저런 처지 이런 형편 저런  형편 여러가지 그 형편을 하나님이 만드셨는 데 우리가 거기에서 보고 '이것은  가치가 더 있다 덜 있다 또 이거는 필요 있다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다.

그것은 우리 사람들 생각을 표준해서 자의적 평가입니다. 인간 뜻대로 평가한  평가지 만드신 하나님이 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만드실 때에 우리의 모든 지체 가운데에 다 필요하고 그것이 없으면  그만치 병신되고 다 있어야 필요한 지체로 전지자가 전능으로 만드셨는데 우리는  전지자의 그 지식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지자가 그것을  만드셨는데 우리는 '이런 건 뭐할라고 만들었는고?' 전능자가 만들었는데 '이런  거는 공연히 필요 없이 만들었다. 잘못 만들었다. 이래 만들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다 자의적 평가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들이 세상에 살 때에 이런 처지 저런 처지 이런  형편 저런 형편 뭐 인간이 이해 못 할 고락, 이해 못 할 굴곡 이해 못 할 고저  높고 낮은 것. 이렇게 수많은 형편과 사정과 처지를 하나님이 만드셔서 제가  원하든지 안 원하든지 그 현실 속에서 자기 형편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저런 사람은 사람으로 난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사람으로 참 태어난 것이 불행스럽다' 이렇게 말을 하지마는 그것 다  하나님이 필요 있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만드신 것이기 때문에 일차 창조에서  하나님이 만드신 그걸로써는 가치 있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지능이 구비하고 또 민첩하고 또 명랑하고  활발하고 모두 다 유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귀하고, 이렇게 아무리 모든 것이  구비하고 잘 생겼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써는 추호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것만으로써는 만물 중에 제일 천한 것입니다.

 왜 천한고 하니 다른 만물은 있다가 원소로 돌아가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짐승이나 식물이나 무생물이나 그것이 원소로 돌아가면 그만 자체는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나 사람은 잘났든지 못났든지 영원히 불멸의 존재입니다. 영원히  멸해지지를 아니하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만물에게는 심판이 없는데  사람만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잘나고 생겼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이차 창조인이 연결을  가지지 못하고 일차 창조로만 있으면 참 만물의 때와 같은 인간입니다. 만물을  더럽히기만 했고 만물에게 영원히 송사받을 거리만 만들었지 만물 가운데에 제일  불쌍하고 가련하고 비참한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차 창조의 자연인이 이차 창조의 그리스도의 이 구속을 입었을  때에는 그는 피조물 중에 제일 존귀한 자로서 하나님 다음의 존귀와 실력과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 그것이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차 창조의 사람으로서는 아무도 가치로 삼지를 말아라  자랑하지를 말아라 이차 창조로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사망과 생명과 오든  피조물, 모든 피조물의 움직임 그 전부가 다 인생에게 귀속되고 인생이 그것을  심판하고. 관할하고. 주관하고 또 양육하고. 그 모든 것에서 오는 영광을 다  받아들이고, 이래 가지고 그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바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그 영광을 바치는 이 이차 창조의 가공 역사, 가공 은혜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그 사람의 가치가 얼마가 되든지 결정이 되는 것이지 이것 하나도 못 받은 것은  피조물 중에 제일 불행스러운 것이 인생이라 그렇게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인생만 심판을 받습니다. 만물은 심판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 생각대로 우리 지식대로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과 또  처지와 형편과 사정 그런 것은 다 존비 귀천이 있다. 녜, 존비 귀천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존비 귀천으로 비판 하고 평가하는 그 지식이 악령으로  말미암아 나온 그 지식이기 때문에 그 지식은 인간 저거 생각대로 비판한 것이고  저거 생각대로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 심판이 올 때에 그때에 심판하신 그대로 가치는 정해지는  것입니다.

 천하 사람이 다 공통으로 '이것은 제일 가치 없다'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이것이 피조물 중에 제일 가치 있다' 하면은 제일 가치 있는  것이 그때에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 되어 있는 자기 되어 있는 자기와, 자기 되어 있는  자기와 또 자기에게 닥쳐진 자기 형편 사정 처지 그것을 다 인간적으로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귀하다 천하다 해서 어떤 사람은 참 한없이 존귀한 사람이라 어떤  사람은 천한 사람이라 이렇게 그대로에 평가해 가지고 사람들은 근심 걱정에  눌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 잘못입니다.

 야고보서 1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낮은 형제라  말은 인간적으로 비판해서 제일 가련하고 불쌍한 처지 또 그런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을 가리켜서 낮은 사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낮은 형쳬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예수님 믿기 전에는 자기는 인간 중에  제일 천물이고 자기 처지는 참 말할 수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처지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지식을 떡 받아 가지고 자기를 보니까 자기가 천하지 않다  그말이오.

 자기가 천하지 안하고 누구만 못지 않는 꼭 동등 이런 이용 가치, 가공 가치,  이차 창조로 성화 가치가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인간 지식으로써는  '나만치 못난 자가 있을까?' 하면서 낙심도 했고 낙망도 했고, 부러워하기도  했고, 참 슬퍼하기도 했지마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떡 가지고 보니까 아주  그만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이래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나는 인종 가운데에 제일 희망  없는 자인 줄 알았더니마는 나도 왕과 대통령과 학자와 부자와 꼭 같은 희망이  있는 자로구나. 꼭 같은 희망이 있는 자로구나. 앞으로 내가 재생될 때에는 제일  존귀한 자로도 재생이 될 수가 있고 이차 창조에서 재가공의 존재가 될 수가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부한 형제라 말은 인간 지식대로의 아주 모든 것이 구비하고  위대해지고 훌륭한 자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서 부한 형제라.

 이 성경 하나님의 지시을 알기 전에는 모든 사람이 자기를 존귀하다고 여기고  부러워하고 참 스스로도 '나같이 복된 사람이 없고 위대한 사람이 없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의 지식을 턱 받아 가지고 하나님이 지식으로 가치를  생각하니까 내가 높다 크다 위대 하다 하는 그 가치가 없는 것 한가지요. 없는  것 한가지요 없는 것 보다도 오히려 재가공하는 데에 장애가 많이 있어서 없는  것보다 못 할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부자가 천국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고?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 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

 이러니까 그렇게 가치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차 가공인 진동되지 안할,  영원한 그것이 우리에게 이루어질 때에 비로소 영원한 인생 가치가 되어지는  것인데 그것으로 보니까 '모든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는데 나는 기 차는 것이  있다. 모든 사람이 제일 고귀하다고 했는데 이거는 아무 한닢 푼치의 가치도  없고 심판받을 것밖에 없고 내가 죽어서 털어버려 버리고 없애버리니까 없는  거와 꼭 같은 것들이구나' 하는 것을 비로소 자기가 느껴서,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자기가 참. 다른 사람이 '아이구 참 복됩니다' 자기가 뭐이 복됩니까? 나같이  지금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뭣이 복됩니까? '무엇이 어떻고' '그것이 뭐  오늘 벗어질지 내일 벗어질지 압니까? 그것이 들어서 하나님을 찾는 데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성화를 입는 데에는 그게 들어서 교만해서 그것 때문에  오히려 지장 되고 방해되는 일이 많습니다. 남의 형편을 사실을 바로 모르고  이야기 하지 마십시오.

 우리 인간의 지식은 거짓된데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 비판해 보니까 나같이  불쌍한 사람이 없는데 불쌍한 것이 다른 사람이 불쌍하고 나도 불쌍하고 꼭 같은  동등인데 공연히 우쭐해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존귀만 받고 저는 위대한 줄  알고 이렇게 교만만 부리고 자긍만 부렸기 때문에 이 자긍했으니까 얼마나  비참한지 모릅니다.

 "자기의 낮아짐 자랑할지니" 왜?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들도 그 행한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이것을 다 결과를 보고 보니까 가공 안 된 것은 인간의 가치로 생각지 말아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는고 하니 오늘 우리는 인간들의 그 자의적 지식,  따라합시다.

 자의적 지식!  자의적 지식!  이거는 인간 지식 인간 스스로 저거가 생각하는 대로 지식인데 이 지식 가지고  비판해서 나는 불쌍하고 가련하다 어떻다 어떻다 하지마는 하나님은 그것이  필요해서 다 만들었는데, 이뭐 눈썹 이것이 무슨 역할을 합니까? 밥을 만드요,  돈을 벌어 가지고 오요, 이것이 뭐 걸어가는 데 필요합니까? 아무 것에도 필요  없어. 없지마는 눈썹 이것 이건 또 하나님이 필요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뭐 손 이런 것보다도 눈썹 이걸 가꾸기를 아주 또 잘 가꾸려고 애를  씁니다.

 이래 가지고 눈썹 잘못 났으면 뭐 그만 머리를 들지 못해. 내가 그전에도  말했지마는 언제 차간에서 보니까 아주 신사고 잘났는데 도무지 뭐 낯을 들지  못하고 퍼뜩 이랬다가 또 그러고 같이 앉아 있지를 안하고 앉았다가 의자에  앉았다가 저 밖에 나가 있고 옆에 사람들에게 뭘 사 주고 자꾸 이래 쌓는데 '저  사람이 무슨 죄가 있나 왜 저 사람이 모두 다 저자세로 저래 가지고서 모든  사람에게 힘을 쓰지 못하고 저런고?' 했는데 자세히 자세히 보니까 눈썹이  하나도 없어요. 문둥이라. 눈썹이 하나도 없는 문둥이. 이래 놓으니까 그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워서, 아마 요새는 거기다 눈썹을 만들어서 가발 모양으로 거기  붙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인간 생각으로 그렇지 사람은 꼭 같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자기라 하는 것을 우리가 믿읍시다. 이걸 가져야 됩니다.

 우리 자신들은 이렇게 저렇게 된 그것이 절대자이신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신  그분에게는 꼭 같이 필요합니다. 없어서는 안 될 꼭 같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만드셨고 또 우리의 사는 처지도 '이런 처지는 이건 없으면 좋겠다'  하지마는 그 처지도 없어서는 안 될 처지를 하나님께서 다 만드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깨달은 성도들이 말하기를 '세상의 성도에게 당한 모든 형편은  동등 이용 가치를 가지고 있다 동등 이용 가치를 가지고 있다. 또 인간의 잘나고  못나고 천층 만층이라 하지마는 예수 안에서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꼭 동등 가치  꼭 같은 필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차 창조의 그 가공, 그리스도의 피공로를 인해서 성령과 진리가 가공 역사를  하는데 이차 가공을 하면 어느 왕이 가공받은 것이나 누운뱅이가 가공받은  것이나, 문둥이가 가공받은 것이나 부자가 가공받은 것이나 가난한 자가  가공받은 것이나 이차 창조의 가공을 받은 것은 가 보면 가치가 꼭 같다. 가치가  꼭 같고 꼭 존귀하고 영광스럽다.

 그러나 다만 그것이 이차 창조의 가공의 은혜 이 성화의 은혜를 십분지 일만  받은 것, 십분지 일만 받았으면 십분지 구 받지 못한 그것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거기는 진공이오. 그것은 말하자면 팔로 말하면 형체는 있지만 속에 힘이  없으니까 힘이 없으니까 팔이 이래 흔들지도 못하지 없는 것 한가지라. 다리도  있지만 보기에는 있지만 걸어 다니지를 못해, 이것. 형체는 부활하지마는 속에  기능 부활은 안 됩니다. 기능 부활은 지금 부활해야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차 가공을 부분적으로 받아서 가공화된 것 그것은 다  영생화됐고 온전한 것 됐고 그것은 크게 말하면 생명의 나라 천국의 천국의 한  지체와 같이 됐기 때문에 크나 작으나 다 같은 것입니다.

 됐고, 그것이 이차 창조의 성화의 이 가공 은혜를 받지 못한 그 부분은  멸해지고 그것 받은 것은 이런 모양으로 받았거나 저런 모양으로 받았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당신이 필요해서 다 만드셨고 모든 이런 처지 이제 다 처지를  줬기 때문에.

 자기의 현실은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그 현실을 하늘에서 오는 처 소 하늘에서  오는 처소, 하늘에서 오는 자기의 영원한 현실. 이 세상 현실 이것이 무궁세계의  자기 현실이 되는데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만든 그 현실을 보내는데 하늘에서  오는 그 현실을 자기가 덧입는다.

 그러면 진리화된다, 영감화된다 하나님화됐고 진리화됐고 진리와 하나됐고  하나님과 하나됐기 때문에 그것은 존비 귀천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사람들이 인간 생각대로의 그 차이점 있는 이 걸 가지고  비관하지도 말 것이고 이것 가지고 또 자기가 조심없이 '이까짓거야 뭐' 이렇게  생각하지도 말고. 자기의 닥친 현실은 어떤 보잘것 없는 현실이라도 그 현실의  가치가 아주 이거는 중대하다 하는 그런 현실의 가치와 꼭 같은 가공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현실은 중요하고 저런 현실은 천하다. 그런게  없습니다. 현실은 꼭 같은 가치를 가졌고, 마지막에 결론을 짖는 그 현실도 그  결론 짓는 그 현실이나 그 전에 준비한 현실이나 꼭 같은 가치를 가졌습니다.

결론을 지음으로 과거에 그 전에 모두 다 이루어 놓은 것이 결론으로 완성을  하는 것이니까 완성의 가공이 나 밑에 완성을 찾아 가는 모든 준비의 가공이나  꼭 가공된 것은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꼭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 생각으로써 사람 심신의 용모나 기능이나 또  활동이나 그런 것을 높다 낮다. 그렇게 차이 있는 것으로 평가하는 그것을  우리가 버려야 되겠고, 또 자기의 형편과 처지 닥치는 그 처지를 '저거는 귀한  형편이다 이거는 천한 형편이다, 저거는 영광된 형편이다 이거는 참 가련한  형편이다.' 그렇게 인위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형편 그것의 가치는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제이차 창조 성화의 가공. 하나님과  진리로 가공, 하나님을 위하는 것으로 가공,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으로  가공. 하나님이 기뻐하고 좋아하시는 것으로 가공, 가공 문제에 가치가 달린  것이지 거기에 가치가 달린 것은 아닌 것을 우리가 깨닫고 여기에 대해서도  우리는 인간 생각으로 비판과 평가를 가지지 안해야 됩니다.

 이것이 성경 명문에 한 성구에 또렷이 딱 있는 건 아니지마는 전 성경에 보면  전성경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전성경은 이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 백 마리 가운데에 한 마리를 잃으니까 아흔아홉 마리를두고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간다는 그것은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예를 들면은 전신의  전체의 가치나 세포 한 개의 가치나 가치가 꼭 같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게  없으면 그만치 전체에는 병신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조그만한. 이제 이 물질적인 육체라 하는 것은 이거 세포도 얼마  있으면 그게 자꾸 없어지고 도태해지고 자꾸 개조되고 이렇지마는 이제 그런  것은 다 자연계시인데,  자기가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하나가 제이차 가공인 성화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다고 하면 그거는 하늘나라에 있는 모든 것의 보배로움과 그것  하나의 보배로움과 같습니다. 양이 같다는 것이 아니라 보배로운 보배성이 꼭  같습니다.

 하늘의 그 하나의 보배로움이나 전체의 보배로움이나 같습니다. 하나는, 그 한  사람은 그것이 하늘나라에 무한한 숫자의 그 성도들에게 다 필요해서 요거  하나의 역사가 모든 성도들에게 다 필요의 혜택을 다 입힐 수 있습니다. 또 모든  성도 전체의 그 역사의 혜택을 요 한 사람이 다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은 세상에는 개체주의니 전체주의니 이렇게 하는 철학들이  있지마는 그런 것으로 나가면 성경은 그 철학적인 성경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철학이면 기독교와 비슷하 게 같은 것인 줄 알지마는 철학은  기독교와 정반대인 원수가 철학입니다. 철학은 기독교의 반대요 원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이단이 제일 어디에 많이 나왔는고 하니 철학에서 제일  많이 나왔습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철학이면 기독교와 같다' 이래서 '목회자가 되려 하면은  예수를 잘 믿으려 하면은 철학을 공부해야 된다' 그렇게 지도하는 교수도 깜깜한  무식한 사람이요, 그 사람도 무식한 사람이요,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철학은 말하자면 인간의 주관주의입니다'. 철학은 인간의 주관주의 입니다.

기독교는 주관을 다 죽여버리고 저 창조주이신 자존자이신 그분의 주의 곧  객관주의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가치, 우리의 현실의 가치 이것은 하늘나라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하나님이 다 아셔서 만들어 놓으시고 구비해 놓으신  것이기 때문에 나 하나 구원을 바로 이루는 것이 하늘나라에 있는 전채에게  도움이 됩니다. 혜택을 줍니다. 나 하나 잘못해 실패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있는  그 전체에게 피해를 끼치는 자기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또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나 하나가 잘못되면 하늘 나라에 그만치  손해간다.

 어떤 못된 그 아이가 미국에서 자살을 했는데 자살한 그걸 조사하다 조사하다가  나중에 어째,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는대 그 유서를 발견해 가지고 뒤에  보니까 그 자살하는 것이 '자살하면 아버지 어머니가 걱정할 것이라' 아버지  어머니 마음에 근심하는 그것이 좋아서 근심시키기 위해서 자살을 했다 하는  그런 유서가 나왔다고 그래 언제 신문에 난 것을 제가 한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것 모양으로 그런 자 모양으로 '나 하나가 이렇게 천국에 필요하니까 나 하나  잘못되면 천국에서 이렇게 손해가 오고 전체에 그만 치 피해를 끼친다. 피해  끼치는 것이 재미난다.' 이래 가지고 제 구원을 절단내는 그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나 하나가 잘못되면 하늘나라에 큰 피해가 되기 때문에 안  되겠으니까 나 하나가 구원을 잘 이루어야 되겠다' 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자기가 '에 나는 뭐 해도 잘 안 되고 이러니까 내가 심술이나 용심이나  부려서 나 못 먹는 음식에 코를 푼다고 마찬가지로 이제 나는 안되니까 심술을  부려서 나 하나가 잘못돼 가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 그것도 하나님이 예정해서 그자는 그렇게  해 가지고 또 삐끌어져 나가도록 그렇게? 예정된 대로 제가 그와 같이 이루어져  나가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대로 이루어져 나가지 그게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은  하나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도 제가 소 마음을 먹은 것도 하나님의 예정대로 또  하나님의 능력이 그런 자가 되도록 해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또 그 말을 들을 때에 '나 하나가 들어서, 내가 나 하나 같으면 내야 뭐 내  행동이 나쁘니까 고통을 당해도 좋고 망해도 좋지마는 안됐다. 하늘나라에 나  하나 때문에 많은 성도들에게 피해를 끼치면 되겠느냐? 내가 죽어도 내가 이  일을 해야 되겠다 하는 그거는 또 그것도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가지도록  예정하시고 그런 마음을 전능한 능력으로 지어 주셔서 그런 자가 됐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예정. 주권적 의지의 예정 주권적 능력의  성취로서 되어지는 것인데 총괄해서 이 모든 것을 합해 가지 고 한말로 말하면  보이지 않는 자존하신 하나님을 이런 것 저런 걸 로 인간의 수많은 마음의 구조  인간의 마음같이 변해지는 것이 없습니다. 굉장합니다. 수많은 인간의 그 마음의  형태 그 모든 것으로 결론적으로 그 모든 걸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

 요런 마음을 가지고 요리 된 것은 하나님이 요래 심판을 했고 조런 마음을  가지고 조래 된 것은 조래 심판을 했고. 요런 건 요래 칭찬을 했고. 요런 것 할  때에는 요런 애로가 있었고. 조런 걸 할 때는 요런 무슨 비참이 있었고 실패가  있었고 성공이 있고 이렇게 된 이런 것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영원하심과  불변하심과 진실하심과 거룩하심과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것이 또  영원히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보여 주고 알려 주는  이것을 도모하는 하나님의 예정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정은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를 조성하려는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인데 그 목적을 위해서 예정됐고 목적 위해서 창조됐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제목에 '예정' '창조' 이래 놨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예정' '창조'  그러면 하나의 순서로 보지 안 봅니다. 그것을 요다음에는.'하나님의 예택 구원'  목적 안에서 택정 구원이라든지 예택이라 말은 없는 데에서 미리 당신이 그렇게  예정으로 정하셨다 그말이오. 예정 구원입니다. 예택 구원 예정 구원 창조 구원  또 구속 구원 이렇게 구원이라는 것을 붙여야 사람들이 좀 알겠습니다.

 이래서 인생의 가치가 꼭 동등으로 하나님께서 필요하셔서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로 만족하는 것이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자기는 암만  병신이라서 뭐 무슨 제일 천한 병신이라도 자기는 자기로서 만족하고 또 자기의  처지로서 만족하고 거기에서 이차 창조인 가공을 입으면 인간으로 제일 천한  그것이 인간으로 볼 때에 인간이 볼 때에 제일 존귀하다고 가치하는 것이나 꼭  동등 가치의 동등 미, 동등 권위, 동등 필요, 동등 하나님이 필요로 여기고  기뻐하시고 즐거워하시고 귀중히 대우하기를 꼭 동등으로 대우할 수 있는 그런  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우리 앞에 성화의 남은 구원인 것입니다.

 제가 아까 그 솔 그걸 보고서 몇백만 원이라 했는데 내가 몇백만 원 그걸 내가  액수는 모르겠고 '그걸 내가 어디서 봤던가?' 이러니까 어찌 일본서 내가 본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그때 깜짝 놀랬어. 내가 지금 요새 몇백만 원 하는 그런 것  몇천만 원 하는 그런 것 가지고 놀래지 않을 건데 그때는 그걸 보고 그 금액을  보고서 어짜든지 깜짝 놀랬어요. '이것 뭐 이럴 수가 있겠나?' 큰 소나무인데 뭘  어찌 조그만한 분재 해 가지고 그래 있는데 그 아주 그렇츰 작아도 가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 또 '이거 얼마입니까?' '그거는 누가 얼마 부르고 갔습니다'  이러는데 그보다 더 주면 뉘가 가지고 가지마는 더 안 주면 못 가져가요. 그때  그게 벌써 가격에 팔려 가지고 있어요, 벌써 그게  우리가 이 자연면에서, 자연면에서 우리가 가치를 평가하지 맙시다. '자연에  있는 이것의 가치는 꼭 동등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무슨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 제이차 창조의 성화의 가공을 입으면 무궁세계에서 꼭 동등의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그것들이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고 어디서든지, 우리  생각대로 평가해서 이 까짓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이거야 뭐 힘쓸 게 뭐  있나 해 봤자 성화돼 봤자.' 그렇게 생각하지를 맙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한 그 의에 대해서도 우리가 볼 때에 '이 의는 십  원짜리다. 이 의는 백 원짜리다. 이 의는 억만 원짜리다.' 우리 자의대로  평가하는 것은 아무 실력 없습니다. 그것 공연한 말이요 헛말이오. 가치 없어.

하나님이 그때 평가하실 터이니까, 하나님이 평가하실 터이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평가할런지 모릅니다. 어떻게 평가할는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필요해서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해서  우리 용모가 천태 만상이요 우리 처지가 천태 만상이 되는 이것이 뭐이냐? 뭣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이렇게 만드셨는 데 이것이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그것의 가치가 다 천태만상의 가치로서 하나님 앞에 필요한 그런 것으로  만드셨기 때문에 그 가치는 우리는 동등 가치로 알아야 되고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필요해서 다 만드셨기 때문에 진리의 것이 되고 영감의 것이 되면은 꼭  동등입니다.

 작은 것도 진리와 영감의 것이면 영생입니다. 작아도 진리와 영감 대로  것이라면 우주가 다 달라들어도 그걸 해치지 못합니다. 우주는 그의 것입니다.

눈꼽재기만한 진리와 영감의 것이라도 요것은 우주 와 모든 피조물은 이것의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것에게 지배를 받아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거기에서 인위적으로 평가를 해 가지고 마귀의 미혹에  들어서 하늘에 있는 처소를 덧입는 그 일에 대해서 잘못하면 등한히 여기는 그런  일이 되기 쉬우니까 등한히 여기는 그런 일을 안 해야 됩니다.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에도 '요 일에서야, 요 일이야 순종하는 그 순종 그것이  무슨 큰 의가 되겠느냐? 죽느냐 사느냐 큰 사회와 민족이 막 휘떡거리는 그런  굵닥한 그런 중대한 문제 거기에서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대로의 된 그것은  가치가 있지만 아무도 없는데 나 혼자 있는 요 한 현실에 여기에서 영감과  진리대로 한 요것이야 영감과 진리대로 됐다 할지라도 이것의 가치야 얼마가  되겠느냐?' 그렇게 우리는 생각하면 안 됩니다. 꼭 동등입니다.

 그걸 가지고 하나님께서 뭘 만들런지 모릅니다. 그 조그만한 그걸 가지고  무엇을 만들런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은 다윗이 자기가 목동 노릇할 때에 그때에  자기의 소꿉장난 한 그것이 일국을 다스리는 일도 됐고 또 요셉이가 자기가  가면서 그뭐 철없는 꿈 이야기 한 그것 이 애굽 나라의 총리대신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이에 조그만한 한 토막이라도 그게 한 토막이라도 거기에서  빗나면 안 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는 이 동등 가치라는 이것을 깨닫고 하늘에서 오는 처소 덧입기를  어짜든지 힘씁시다. 덧입으면 그만 가치 있어집니다  하늘에서 온 처소는 뭐이냐? 이것이 이렇게 생긴 것이 예를 들면 비유컨데  이렇게 생긴 것이 이것이 땅의 것인데 하늘에서 오는 이런 게 있다. 그 말은  하늘에서 와 가지고 하늘에서는 우리 인간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오는 것은 영감과 진리인데 영감과 진리가 와 가지고 이것을 영감화 만들어  버리고 진리를 만들어 버리고 영감과 진리화 만들어져 버렸으면 이것이  피조물로서는 창조주 그 다음의 위치를 가지고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존재화돼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입니다.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닥쳐진 모든 형편 사정,  물질적으로나 지위적으로나 권세적으로나 모든 것 전부. 그 모든 것을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혀서 그것이 자기가 이 세상에 닥친 백 가지면 백 가지 천  가지면 천 가지 모든 형편 사정 처지 그 모든 것이 진리화돼 버렸고 그게 진리와  하나가 됐고 영감화돼 버리고 그게 진리가 됐고 그것이 영감 됐고 진리와 영감화  되어 가지고 이것이 하늘나라 가서 보니까 그 사람의 이 세상에서 산 그 생애가  전부 진리화되고 영감화돼 가지고 그게 진리화된 처소 속에서 영감화된 처소  속에서 자기는 거기에서 살고 있는데.

 이 세상에서 그걸 성화시키지 못하고 보니까 이것은 다 그만 불타 없어져  버렸습니파. 성화시키지 못하니까 이것은 둘째 사망의 해로 다 없어집니다.

이러니까 하늘나라 가니까 자기의 처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벗은 자로 자기  처소는 아무것도 없어. 이런 처소도 저런 처소도 아무것도 없어.

 요거는 아마 여러분들이 좀 배우기가 좀 힘드는 말인데 이걸 믿음 이 아니면 좀  배우기가 힘듭니다.

 진리의 가치가. 진리의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진리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까? 녜 없지요. 영감의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영감의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영감의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영감이면 완전인니다. 영감이면 영원입니다. 영감은 하나님과 직접 연결돼  있습니다. 영감이면 완전이요 진리면 완전입니다.

 영감이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손가락으로 가르쳐 보이소  녜 하나입니다. 진리가 하나입니까 둘입니까? 하나입니다. 그 진리가 이렇게  저렇게 역사는 여러 군데 여러 것으로 역사하지마는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감화 진리화 됐으면 그것은 완전입니다. 그것은 완전입니다.

완전의 가치가 차이 있습니까? 완전의 가치가 이 완전과 저 완전과 가치의  차이가 있습니까? 완전은 하나뿐입니다. 가치의 차이가 없습니다. 완전의 권위는  둘입니까 하나입니까? 하나입니다. 완전의 권위의 차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감화 자꾸 사람들이 말이지요, 왜 지금 내가 오늘 설교하는  것이 힘이 드느냐 하면은 이 인간 지식, 인간 지식 이것을 가지고 인간 지식대로  세상의 형편과 처지와 인간이 되어 있는 그 자체의 가치를 인간 저거대로의 높이  낮게 평가를 해 놨기 때문에 이게 지금 들어서 고장이라 그말이오.

 이게 들어서 자꾸 선입적 관념으로 그 가치 그 평가해 놓은 그것을 그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무리 하늘에 있는 처소를 덧입어도 땅에 있는 인간이 볼  때에 가치 크다 하는 것은 하늘에 처소를 덧입어서 영감화 진리화 됐으면 가치가  크고 인간이 볼 때에 제일 천하다는 그것은, 천하기 때문에 그까짓 거야 진리화  영감화 돼 봤자 몇닢 푼치 되겠느냐 이러기 때문에 이것을 배울기가 힘들고  가르치기가 힘들고 이거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서 잘 안 된다 그말이오. 진리는  하나요 영감도 하나요. 진리와 영감은 권능도 같고 영광도 같고, 지혜도 같고  동등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껍데기 형편이 자기는 이런 사람 이 처지 저 처지 또 이 모양  저 모양 어떻게 됐든지 그것이 영감화되면은 완전입니다. 영감화됐으면  완전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기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영감화 진리화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살 터인데 이것을 다 세상에서 제 욕심대로 하고 세상을 표준으로 세상 좋게  하려고 하고 세상을 표준하니까 세상에 없어지면 없어지는 것으로 알고 세상에  있으면 있는 것인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지식이 달라서 하늘나라로 옮기지를  안한다 말이오. 투자 하지를 안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만 그것이 다 둘째  사망의 해로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리화되지 못하고 영감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자기가 입고 있는 그  모든 처소가 다 불타서 없어져 버리고 다 죽어 없어지고 다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 가지고는 자기의 처소가 없어 이러니까 벌거벗은 자라 처소  없이 사는 자라 처소가 없는 자라 이러니까 "벌거벗은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함이라" 하는 걸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입음을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자들로.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 자기가 닥치는 현실이라는 자기의 처지를 그것을 인간적으로  크다 작다. 중요하다 덜 중요하다. 귀하다 천하다. 권위가 있다 없다 요렇게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거는.-참 이거 어려워서.-그거는 하나님이 엿새 동안에 지은 것입니다. 엿새  동안에 지은 것이라 가치가 아주 하무한 것입니다. 그거는 가치가 허무한  것이오.

 그것은 가치가 허무한데 그것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 하늘에서 오는.처소.

영감과, 진리화되는 것 요게 땅에 있는 이것이 가치가 큰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영감화되고 진리화되는 데에서 비로소 완전한 가치로 되는 것인데 영감화된  그것과 영감화되지 안한 그것과 그 가치는 비교 못 해. 영감화되지 안한 그거는  다 죽은 것이요 다 썩은 것이요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 아무 가치 없는 것이라.

영감화되면 영감화되는 거기에 가치를 둡니다.

 영감화되는 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이니 영감은 뭐인가? 영감은 영원 자존자를  아는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를 높이는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를 섬기는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와 연결된 것이 영감이요. 영원  자존자의 모든 것을 다 제가 힘입고 힘입을 수 있는 것이 영감이라.

 영감이기 때문에 자. 이것이 영감이니 이 영감은. 이 영감은 무엇 이 입은  영감이라 이 영감은 예를 들면은 이 영감은 비유컨데 이 영감은 똥덩어리가 입은  영감이라, 이 영감은 주먹덩이가 입은 영감이라 이는 콩내끼가 입은 영감이라,  이거는 흙덩이가 입은 영감이라,  어쨌든지 그 영감을 입은. 영감을 입은 그 입은 것의 그것의 가치가 가치가  아니라 영감 입은 것이 가치라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영감 입은 영감을 입어진,  영감을 입어진 그것이 가치가 아니라 그 입은 영감이 가치라 그말이오. 영감이  가치라 그러기 때문에 요 입어진 그것은 이것이 크나 작으나 가치는 꼭 같애.

그런데 다만 거기에 영감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하는 거기에 가치가 결정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감은 가치를 크게 보지 안하고 입은 그것을  가치를 크게 보기 때문에 자꾸 이게 착각이 되어서 일이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오 후 시간에 자꾸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꾸 아멘으로 알아듣지를 못하는 것 같다 그말이오. 그것을 세상  것으로 비유를 하면 무엇으로 비유를 할꼬? 예를, 뭐 비유가 안 되지마는 비유로  하려면은 흙으로 만든 그릇이 있고. 또 나무로 만든 그릇이 있고 뭐  프라스틱으로 만든 그릇이 있고. 또 무슨 종이로 만든 그릇이 있고 다 한  되박이, 한 되 드는 그릇이 있습니다. 한 되 드는 그릇이 있는데 거기에 보석을  다 한 되씩 가득 가득 담아 놨습니다. 보석을 한 되씩 가득 가득 담아 놨습니다.

 담아 놨으면 담아 놓은 그것을 사람들이 사려고 가치를 평가할 때에 그러면  가치를 그 그릇을 보고 '이거는 흙으로 만들었고, 이거는 나무로 만들었고.

이거는 아주 은으로 만들었고. 이거는 뭘로 만들었고' 그 그릇의 어떠함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되느냐 속에 들어 있는 보석으로써 가치가 결정되느냐  어느 것을 가치로 보겠습니까? 그 그릇에 가치를 둡니까 안에 담긴 보석으로  가치를 둡니까? '이거는 뭐 흙으로 만들었으니까 이건 가치가 적다 이거는 이거  아주 나무로 잘 만들었으니 가치가 있다.' 그것을 보고서 가치를 평가를  하겠습니까 속에 있는 금을 보고서 가치를 평가하겠습니까? 금을 보고 가치를  평가합니다.

 이랬는데 보니까 이거는 한 되짜리인데 한 되짜리라도 이거는 팔 홉밖에 안  들었다. 이 그릇은 아주 뭐라 할꼬? 양은으로 만들어서 양은으로 만든 그릇이고  이거는 흙으로 만든 그릇이고, 이거는 나무로 만든 그릇이고 이거는 돌로 만든  그릇이고 이런데 이 그릇이 아주 층어리가 많이 있습니다.

 층어리가 많이 있는 그릇을 만들었는데 요것은 보석이 꼭 보배는 같이 동질의  보석이 요거는 한 되가 들었고. 요거는 아홉 홉이 들었고 요거는 육 홉이  들었고, 요거는 칠 홉이 들었고. 요거는 서 홉이 들었고 요거는 한 흡이 들었고  요래 들었으면 그 값을 장사꾼이 와서 흥정을 하려 할 때에 뭘 보고서 흥정을  하겠습니까? 그릇 보고 흥정하겠습니까 그 안에 있는 보석 든 것 보고 흥정을  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 이거야. 이거야 나무로 만들어 놓은 건데 뭐 나무도 뭐  얄굿게 뚝뚝하게 못을 박아 이런데 나무로 만들어 놨는데 이거는 양은으로  만들어 놨는데. '양은으로 만들었으니 이거는 값이 얼마입니다. 이거는 나무로  만들었으니까 값이 헐합니다' 이렇게 그 평가를 하겠습니까 속에 든 보석을  가지고 평가를 하겠습니까? 보석으로 평가하지 그릇 그것으로 평가하지를  않는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가리켜서 질그릇이라 그렇게 말했어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 이거 이 사람이 형편은 이렇다, 좋은 형편이 다 저 사람 형편은 나쁜  형편이다, 이 사람의 지능은 위대하다. 용모는 위대하다. 명예가 이러하다 세상  권세를 이렇게 잡았다는 그 모든 것은 그것은 다 질그릇과 같고 껍데기와 같은  것이요. 그것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진리와 영감화 되는, 진리와  영감이 그 속에 와서 담겨 있는. 진리와 영감이 있는 그것으로써 가치가 된 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있다 말하기를 '이거는 그릇이 이런데  가치 없고 그릇이 이런데 가치 없구만' 그러면 보석이 한 되가 들었고 다른 것은  구 홉 팔 홉 그랬는데 한 되 든 그것은 그릇을 만들기를 순 쓰지 못할 꾸룽내가  나는 무슨 얄궂은 똥쪼가리 같은 그런것 가지고 들이 만들어 놔서 꾸룽내가 난다  말이요 보석은 한 되 들었지마는. 그러면 그때 평가할 때에 거기에서 제일 가치  있는 것이 어떤 것이 제일 가치 있겠느냐 그말이요?   어느 게 가치 있겠습니까? 은으로 만든 것이 가치 있겠소. 스텐으로 만든  그릇이 가치 있겠소. 좋은 나무로 만든 오동나무로 만든게 가치 있겠고 이제  꾸룽내 나는. 꾸룽내 나는 똑 그 무슨 똥찌꺼기 같은 그런 것 가지고 주 만들어  냄새가 쿨쿨 나는 그게 가치 있겠소 어느 게 제일 가치 있겠소? 여기 비디오  옆에 앉은 여기 청년 한번 대답해 봐. 은으로 만든 그게 제일 가치 있어? 어느  게 제일 가치 있을까요?  아는 사람은 무엇을 제일, 그릇 냄새 나는 그 제일 더러운 그릇에도 한 되가 꼭  차 가지고 있으면은 그것을 값이 제일 비싸다 해도 그놈을 차지할 것 아닙니까?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다 비유니까 이것이 잘 맞지 안하고 이렇지마는 그  비유는 또 거기에만 가야 되지 다른 데 건너가면 헛일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 것 이것이 다 완전한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불변한 것이요. 영생하는 것이요 참된 것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존귀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으로만 사는  것이요,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요 그것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좋아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지요? ○○○목사님 그것이 워입니까? ○○○목사님 그게  뭐이지요? 왜 대답을 안 해 벙어리가? 귀머거리가? 왜 대답을 안 해? 뭣이지?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위하고 하는 그것이 무엇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뭐이 그래 합니까? 무엇이 그래 하지요? 무엇이 그래 하지요? 무엇이  그래 합니까? 사람이 그렇게 합니까? 무엇이 하지요? 영간과 진리가 합니다.

영감과 진리가 하요.

영감은 뭣하는 것입니까? 영감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하나님의  뜻에 딱 맞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이 당신을 위하는 그 유일한 것으로  우리에게 보낸 것이 영감입니다. 그것이 와 가지고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와서 뭐 하느냐? 영감은 우리에게 와서 뭐 하느냐? 와서 하는  일이 '하나님만 바라보라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라 하나님만 두려워하라 하나님만  영광되게 하라 하나님만 존귀케 하라. 하나님만을 이렇게 존귀케 하는 그것이  영감이니 껍데기야 어떻게 됐든지간에 처지야 어떤 처지됐든지 그 처지에서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어서 아주 비참한 문둥이 제일 병신인데 제일 병신 그  병신 거기에 영감이 와서 충만해서 그 병신에게서. 영감이 충만 해서 그  병신에게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게 존귀케 하는 것만이 그 병신 속에 가득히  찼다면은 그것이 보배 아니요? 그게 하늘에 가서 천대를 받겠소? 이만하면 다  알아들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어떤 처지 형편, 사정 어떤 기능,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영감화 진리화 됐다 말은 하나님 영화롭게 하는 화, 하나님 존귀케 하는 화,  하나님만을 아는 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화 됐다 말이오 됐으면 보배입니다.

어디서 됐든지 그까짓 거 처지 형편 사정이 상관이 없다 그말이오.

 아무리 못난 자라도 상관 없다. 그 말이오 아무리 잘난 자라도, 천하에 제일  잘난 자고 구비한 자인데 천하에 제일 행복스러운 현실을 가지고 사는데 그  현실은 하나님을 대적 하는 현실이요. 그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이요, 멸시하는 현실이요, 이러면 그것이 무슨 가치  있습니까?   이러기에 하나님과 연결되는, 그리스도화되는, 그리스도화 되는 데에서 인생의  가치를 삼고 그거 안 된 것은 가치로 칠 것이 없느니라, "코에 호흡이 있는 자는  수에 헤아릴 것이 없느니라" 호흡 있는 이 인체만으로 인간만으로 되어 있는  이것은 아무 가치 없다. 많으면 뭣하며 적으며 뭣하며 억억만 명이면 무슨 가치  있느냐? 가치 없다. 인 생이 그리스도의 것이 될 때에. 하나님과 연결이 될 때에  진리화될 때에. 영감화될 때에.

 그 사람이 진리화된다 진리화됐으니까 진리화됐다 말은 뭐화됐다 말이요?  영감화됐다 말이지요 영감화 진리화 됐다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영감화 진리화  됐으면 그게 뭣된 겁니까? 녜. 영감화 진리화 된 것은 하나님만을 두려워하고,  하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만을 위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하나님만을 사모하고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고, 하나님을 지존자로 모시는 그것이 영감이요  진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감화 진리화 됐으면 껍데기야 어째도 상관  없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은 '나는 이렇게 위대함을 줬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하고 영감을 영접하고 진리를 영접해서 이래 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셨으니 나는  이 처지에서 여기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존귀케 하겠다.'고 해 가지고  영감화 진리화 됐습니다. 영감화 진리화 됐습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에 영광이 같을까요 상이 같을 까요?  같겠습니까. 영광이 같겠습니까 상이 같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영광이 같겠소  다르겠소? ○○○? 뭘 어때? 앞에 말이라 하면 아는가? 뭐라 해 잘못 들었어?  그러니까 귀가 있어야 소용 있어야지. 뭐 ○○대학에서 일위로 졸업했다고 뭐  신문에 나고 야단 떠들어 쌓지마는 일위 아니라 특위면 뭐하는고? 소용없어.

 그래 하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자연 은총을 많이 줘서 이렇게 다른  사람보다 이떻게 뛰어나게 참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해 줬으니 내가 영감과  진리를 영접해야 되겠다. 내가 주를 힘써 섬겨야 되겠다.' 또 하나는 가련한  처지에서 '내가 이와 같이 된 것도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 위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처지에서, 잘나고 못났을지라도 나는 이 처지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케 하는 영감과 진리 영접해서 영감의 사람 진리의 사람으로 나는  살아서 이렇게 이렇게 천하지마는 영감과 진리의 사람으로 살아 주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겠다' 하고 갔으면은 누구를 아름답게 볼까요? 처음에 자입니까 뒤에  자입니까? 하나님이 다 좋아하시지마는 뭘 좋아하실까요?  처음에 자는 자기가 속에 들어 있어. 나를 이렇게 대우해 줬기 때문에 나도  하나님 이래 하지마는 뒤에 자는 내야 어찌 됐든지 상관 없고 자기의 전폭은  어찌 됐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기쁘시게 하려 하기 때문에 거기에 좋다 말이오.

그게 예를 들면은 조그만한 분재 하나 해 놨는데 그게 돈이 값이 그렇큼 비싸.

 그것 모양으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낮은 자는 높아진 걸 자랑하고 높은 자는  자기의 낮아진 것을 자랑하는 이것이 진리를 깨닫은 자의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 있었습니까? 아까 그게 어디 있었지? 야고보서 1장 9절에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아짐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 짐을  자랑할지니' 깨닫고 보니까 이래. 이 세상 평가는 아무 가치 없다 말이오. 그걸  가치로 평가로 그걸 청가로 삼아서 뭐 상대할 게 없다 말이오. 그것 아무 그것을  표준할 것이나 뭐 아무 참고할 필요도 없어.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 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한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가치로 둘 것이 없다 그거요.

 그런고로 오늘 오후에 이 말씀을 여러분들이 잘 새겨서 들읍시다.

 이제 우리는 인생의 가치가 용모의 잘난 데도 가치, 용모의 잘난 것도  인생만으로 하나님을 떼 놓고 인생만으로 말하면 키 작은 사람보다 큰 사람이  가치 있을 것이고, 약한 사람보다 강한 사람이 가치 있을 것이고 얼떡떨한  사람보다도 아름다운 사람이 가치가 있을 것이고 무식한 사람보다 유식한 사람이  가치가 있을 것이고,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가치 있을 것이고. 이 가치가  인간적으로 말하면 가치가 있지마는 거기에 무한의 가치, 무한의 권위, 무한의  존귀, 무한 완전 영원한 것이 거기 와서 담기는데 이것이 담기나 안 담기나가  문제입니다. 이것이 담기느냐 안 담기느냐?  이것만 담기면 누가 있다 말하기를, 아주 꾸룽내 나는 그릇이라. 아주 제일  천한 그릇이라. 이 천한 그릇인데 그 안에 보석이 제일 많이 담겼으니까 값이  제일 비쌉니다. 제일 비싸.

 그릇이 이거는 '아 이거 돈이 이렇습니다.' '왜 그렇소?' '이 그릇이 얼마나  좋습니까' '여보. 내가 뭐 보석 사러 왔지 뭐 그릇 사러 왔소? 그까짓 그룻 그거  몇닢푼치 된다고, 그까짓 것이야? 그릇은 그것 내비두고 뭐 보따리에 싸 줘도  보석 중량만 보고 나는 사는 사람이오. 누구를 바보로 아요? 뭐 그릇 줘다고  그릇 보고 내가 가치 평가하겠소?' 그렇게 말하지 않겠어?  여러분들, 우리 보배가 질그릇에 담겼어 이거는 가치 없어. 이제 영감화되는 것  진리화되는 여기에 가치가 있습니다. 영감화되는 게 진리화되는 것,  왜? 영감화되고 진리화되는 게 워인데? 영감화가 진리화 한가지인 데 영감화가  뭐이냐?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화됐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화 됐고,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사모하고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으로만 피동하는 화됐으니까 그러니까  피조물 중에는 제일 존귀하지. 예수님의 가치를 거기에 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은 참 이 나그네 세상에서 없어질 것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느니라' 하는 이 말씀이 너희에게 전한 곧 복음이니라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피차에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의 씨로 되었나니 피차  뜨겁게 사랑하라' 사랑하라 말이 무슨 말이요? 사랑하라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은 사랑 가지고 죽입니다. 사랑의 정의를 바로 내리지 못하고 있어요.

신학생들에게 사랑을 바로 가르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 사랑해 가지고 막  죽인다 그말이요.

 제일 보배가 사랑이요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입니다. 테레비에서  라디오에서 나오는 그런 사랑은 다 죽이는 사랑이요 가치없는 사랑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성경 말씀으로 자기 지식을 삼아 가지고 살아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랍시다.

 인생은 질그릇과 같습니다. 인생은 가치 없는 것입니다. 인생에게 진리가  담기고 영감이 담길 때에 가치 있습니다. 인생의 가치는 영감과 진리로 인생의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것이 아니고는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고관대작이면 그것 가치 있습니까? 그것 가치로 삼지 마십시오. 어떤 공후  백작이면 거기 가치 둡니까? 아니오 미인이면 가치를 둡니까? 젊음에 가치를  둡니까? 어떤 체력에 가치를 둡니까? 아니오. 인생의 가치는 영감과 진리에  있습니다.

 왜? 영감과 진리는 자존 독존자 그분에게 대해서 피조물로서 가장 올바른  행위와 태도를 가지게 하는 것이 영감과 진리기 때문에 이제 그분으로 생겨진  것이 그분으로 존영하고 살게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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