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1:08
이삭의 신앙
본문:창세기 26장 1절-33절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어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 하시니라 이삭이 그랄에 거하였더니 그곳 사람들이 그 아내를 물으매 그가 말하기를 그는 나의 누이라 하였으니 리브가는 보기에 아리따우므로 그곳 백성이 리브가로 인하여 자기를 죽일까 하여 그는 나의 아내라 하기를 두려워함이었더라 이삭이 거기 오래 거하였더니 이삭이 그 아내 리브가를 껴안은 것을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창으로 내다본지라 이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불러 이르되 그가 정녕 네 아내여늘 어찌 네 누이라 하였느냐 이삭이 그에게 대답하되 내 생각에 그를 인하여 내가 죽게 될까 두려워하였음이로라 아비멜렉이 가로되 네가 어찌 우리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백성 중 하나가 네 아내와 동침하기 쉬웠을 뻔 하였은즉 네가 죄를 우리에게 입혔으리라 아비멜렉이 이에 모든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나 그 아내에게 범하는 자는 죽이리라 하였더라 이삭이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고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블레셋 사람이 그를 시기하여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그 아비의 종들이 판 모든 우물을 막고 흙으로 메웠더라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장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이삭이 그곳을 떠나 그랄 골짜기에 장막을 치고 거기 우거하며 그 아비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 이는 아브라함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이 그 우물들을 메웠음이라 이삭이 그 우물들의 이름을 그 아비의 부르던 이름으로 불렀더라 이삭의 종들이 골짜기에 파서 샘 근원을 얻었더니 그랄 목자들이 이삭의 목자와 다투어 가로되 이 우물은 우리의 것이라 하매 이삭이 그 다툼을 인하여 그 우물 이름을 에섹이라 하였으며 또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또 다투는고로 그 이름을 싯나라 하였으며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가로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의 장소를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아비멜렉이 그 친구 아훗삿과 군대장관 비골로 더불어 그랄에서부터 이삭에게로 온지라 이삭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미워하여 나로 너희를 떠나가게 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의 사이에 맹세를 세워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며 너로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 이삭이 그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서로 맹세한 후에 이삭이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평안히 갔더라 그날에 이삭의 종들이 자기들의 판 우물에 대하여 이삭에게 와서 고하여 가로되 우리가 물을 얻었나이다 하매 그가 그 이름을 세바라 한지라 그러므로 그 성읍 이름이 오늘까지 브엘세바더라
이삭이 자기가 살고 있던 그곳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어서 견디기가 어려워서 흉년을 피해서 그랄이라는 그 블레셋 땅으로 갔습니다. 블레셋을 통과해 가지고, 애굽은 모든 것이 다 풍부하고 윤택하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려고 살기 좋은 애굽을 향해서 지금 내려갔습니다. 그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셔 가지고 말씀하시기를 ‘네가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에 머물러 있어라 그러면 내가 네게 복을 주겠노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이삭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상당한 어려움들이 있었습니다. 가정에서 어려움이 있어서 이삭이 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고, 본의 아닌 그 말을 한 것을 보면 그분이 그 생명의 위협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 고난, 흉년으로 어려움 당하는 그 자리에서 블레셋까지 온 것은 하나님이 꾸중하시지 아니하시고 잘했다는 말입니다. ‘여기 왔으니 다시 애굽으로는 가지말고 여기 머물라’ 한 것 보면 거기 온 것은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이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취급하시는 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도는 고행의 도가 아니라 하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고생을 좋아하고 고생을 취하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 기독교는 고행주의가 아니라 하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고생을 피해서 내려온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셨습니다.
또 거기 하나님이 머물라고 그렇게 하셨을 때에 그 생활에도 어려움이 있고 또 가족적인 어려움도 있고 그렇게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어려움을 피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하신 것을 보면 기독교는 또 안일주의의 기독교도 아닙니다. 어쩌든지 평안한 것만 찾는 것이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도 여기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뒤에 하나님께서 ‘어쨌든지 네가 애굽으로 가지 말고, 그랄 여기에, 어려움이 있어도 여기 머물러 있어라’ 하실 때에 이삭은 처음에는 어려움을 피해서 거기까지 왔지만 하나님이 ‘어려워도 거기 머물러 있어라’ 할 때에는 어려움을 피해서 평안하기만을 위하여 움직이지를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이제는 괴롭든지 평안하든지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래서 우리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라고 하나님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고행주의도 아니요, 또 안일주의도 아니요, 평안하기만 위해서 이리 저리 취해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신앙 위주로 사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그 고생 끝에, 그랄에서 이삭이 농사짓는 그 농사에 백배를 얻었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백배를 얻었다.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 해에 백배나 얻었고, 또 여호와께서 축복을 하셔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어 노복이 심히 많으므로’ 이러니까 모든 면에 크게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이삭이 농사를 잘 짓는 무슨 농사의 기능이 있는 것 가지고도 되지 않았고, 또 자기가 무슨 주선을 잘해 가지고 그렇게 된 것도 아니고, 여기 보니까 ‘여호와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이 모든 것이 됐다’ 하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복을 주어서 농사도 백배나 추수를 하고, 또 복을 주어서 사람들도 그 식구들이 많이 불어서 창성하게 됐고, 또 종들도 많고 짐승들도 많고 큰 거부가 되어서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해서 ‘네가 우리보다 더 강해졌으니 우리의 머리가 될까 겁이 난다’ 고 할 만치 그는 복을 받아서 복으로 창성하게 됐습니다.
그는 고생을 피하는 것은 하나님이 ‘잘했다’ 인정하셨으니 기독교는 아무나따나 고생이나 하라 하는 그런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고행을 위주로 하는 그런 고행위주의 기독교도 아니요, 또 그러면 평안하기만 위해서 어디든지 평안만 찾아 돌아다니는 사람인가? 평안 위주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은 어쨌든지 잘살 곳이 있으면 뭐 거리를 상관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이야 뭐라고 했든 간에 잘살 곳이면 찾아 돌아다닙니다.
외국이든지, 그저 보면 조금 자기 육체에 이로움만 있으면 어디든지 찾아 돌아다닙니다.
기독교는 자기 잘되고 평안한 그런 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배워야 되고, 그저 괴롭든지 평안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괴로움을 취할 필요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면 괴로움도 달게 받고, 또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좋은 평안이 있어도 그것을 취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이렇게 사는, 신앙주의로 사는 것이 기독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세 가지 주의를 벗어났습니다. 고행주의를 벗어났고, 안일주의를 벗어났고, 신앙 위주로 사는 이 이삭이 되어졌을 때에 그가 조건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가 뭘 잘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렇게 한 해에 백배라는, 그 우리가 말로 쉽지, 우리는 말하기를 너무 과장해서 말을 합니다. 2배만 늘어도 ‘몇 십배’ 이렇게 말하지만 하나님은 획 하나도 에누리를 하지 않는 하나님이, 무슨 농사를 짓는데 백배나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백배 아닌 것을 백배라 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인데, 하나님이 거짓말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죄인을 당신이 취급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백배가 수확이 된 것은 이는 우리가 털끝만치도 에누리하지 않고 그렇게 믿어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의 축복으로 됐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복 주어서 사람 부자도 되고 짐승 부자도 되고 곡식 부자도 되고 모든 부자가 됐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세 가지 순서를 지나고 네 가지 순서에 큰 부자가 됐습니다. 아주 물질 성공을 하고, 물질 성공을 했습니다. 짐승도 많고, 또 곡식도 많고 재물이 많으니까 재물을 관리하는 모든 종들도 많고, 이래서 넷째로 성공을 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우리가 걸어갈 길로 주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이기 때문에 이상만, 그렇게 걸어가니까, 첫째 둘째 셋째 지나니까 넷째에 이렇게 큰 거부의 순서를 만난 것이 이상만 아니고 우리도 꼭 그와 같습니다. 우리도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소용없는 고생을 당해서는 안되고 어쨌든지 고생을 피하고 잘살려고 하는 그 주의는 좋습니다. 그러나 잘살기만 위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잘살려는, 이것만 위주로 해 가지고 믿는 사람들이 일을 한다면 하나님의 축복은 만나지 못합니다. 고생을 면하고 잘사는 것이 좋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명령이 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이면 괴롭든지 즐겁든지 꼼짝 못하고 명령을 지키는 신앙 위주의 순서를 밟아야 됩니다.
그러면 신앙으로 살려고 하면, 그 이삭의 형편을 보면 심히 외로움이 있었고, 또 두려움이 있었고 위협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그 왕이, 블레셋왕이 그 창문으로 이래 내려다 보니까 이삭의 내외가 서로 끌어안는 것을 봤다 했으니 그 왕의 감시 아래에 있었고, 또 이삭은 그 아내로 인해서 지금 죽임을 받을까 겁이 나 가지고 떨고 있었으니까 그뭐 외로움이 얼마나 외로우며, 두려움이 얼마나 했으며, 그 고생이나 그것도, 그렇게 그를 제일 권세자가 시찰하고 살피고 있는 그 입장에 먼 데도 가지 못하고 바로 그 창문 가까이 이래 있었으니까 그가 고통스러운 것을 우리가 대략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뭐 도마 위에 오른 고기와 같은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이삭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여기 있으라 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이삭은 신앙으로 그 자리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에게 큰 복을 주실 수 있었고, 또 이삭은 큰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어도 주의 계명을 떠나지 아니한 자이니 하나님께서 복을 암만 줘 봤자 복 때문에, 제일 귀한 것은 생명인데, 하나님의 명령에는 생명도 가리지 않는데, 복 준다고 복에 따라서 움직일 이삭이 아니고, 또 그에게 아무리 복을 많이 준다고 해도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 어겨서 제 마음대로 그렇게 행해서 화를 마련하는 그런 일이 없을 터이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안심하고 복을 얼마든지 줄 수 있었고, 또 이삭은 그 복을 많이 받았지만 그에게는 자기를 누르는 무슨 짐이나 자기를 억압하는 그런 것들이 안 됐었습니다. 우리가 간단하지만 이 세 가지 순서를 통과하면 넷째로 이런 복을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길입니다.
공연히 기독교는 고생하는 게 기독교인 줄 알고 쓸데없는 고생을 자취하는 그것도 죄요, 또 고생을 피하는 것을 하나님이 인정한다고 어쨌든지 평안하기만 원해서 하나님 말씀이야 어찌 됐든지 잘 먹고 잘 입고 평안한 그것만 위주로 해서 이사도 돌아다니고 업도 이 업 저 업, 어찌 됐든간에 그 배를 하나님으로 삼아서 날뛰는 그런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행주의의 도인도 아니요, 안일주의의 도인도 아니요, 신앙 위주의 도인인데 신앙을 어디까지 지킬 것이냐? 자기 생명이 도마 위에 놓인 거와 같은 그런 어려움은 있어도 하나님이 여기 있으라 했으니까 그 자리를 피하지 아니하고 지켰으니 있는 것을 참 다 들여서 하나님의 법도를 지키는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을 맞이할 앞잡이입니다. 고것이 통과돼야 하나님은 축복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야 그 축복해 주시는 것이 자기를 망치는 화가 되지 아니하고 자기를 종으로 잡아 부리는 멸망의 상전이 되지 아니하고, 또 하나님도 안심하고 맡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이렇게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를 해서, 이와같이 되면 조금 있으면 저거 나라가 다 그 사람에게, 이삭에게 다 빼앗겨 버리고 그만 자기네보다 강성하겠다 싶어서 그때부터 시기해 가지고 이삭을 해하기 시작합니다.
거기는 우물이라면 재산의 전부라고 할 만치 됩니다. 왜? 너무 그때는 참 가뭄이 심한 물이 귀한 곳이기 때문에 물만 하나 있으면 그만 살기에 문제가 없습니다.
우물 하나 팔려 하면, 거기서 한 5리도 내려가고 3리도 내려가고 이렇게 빙빙 돌아서 내려가는 그 우물 하나 얻으려 하면 얼마나 힘이 드는데, 이 사람들이 전부 이삭의 우물을 다 메워 버렸습니다. 모든 우물을 다 메우고 쫓았습니다.
또 좀 피해 가지고 근근이 우물을 파 가지고 먹으면 또 따라와서 메웁니다.
그래도 이삭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조금만치라도 손해가는 일을 하지 않았고 또 분발하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아무리 상대방이 자기에게 억울하게 해도 억울함을 면하고 남음이 무한하게 해 주실 수 있는 주님을 상대해 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염려가 안됐습니다. 또 자기를 손해보이는 일이, 그는 참 가슴을 칠 만치 자기 재산의 반을 빼앗다시피, 목숨을 빼앗다시피 하는 그런, 우물을 메우는 그런 일이지만 이삭은 그는 온유하고 겸손했고 평안했습니다.
왜? 아무리 상대방들이 자기들을 손해를 보여도 주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주님이 그것보다도 더 잘해 주실, 얼마든지 능가하실 수 있는 주권자시요, 주재자시요, 하나님이시요, 당신만을 바라보는 자에게 수치를 당케 하지 않는 하나님이심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마음에 든든하게 참고 견뎠던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보면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자기 아내가 벌써 그때 나이가 많아서, 나이가 많아서 벌써 경수가 떨어졌고 늙어서 쪼그라진 할멈인데 애굽에 가 가지고 그 아내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인해서 자기를 죽일까 싶어서 거짓말을 했고, 또 이삭도 그래 한 것 보면 어찌 하나님께서 그렇게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아름다운 용모를 줬으며, 또 이삭에게는 그렇게 아름다운 아내를 줬던가? 그것이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아무리 두려운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아니하면 사라의 딸이라’ 한 거기에 사라의 미가 생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여기서도 이렇게 우물 하나 메웠으면 분해서 참 그 용모가 변할 터인데, 안색이 변할 터인데 하나도 그렇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하나님만 보고 참는 그 생활에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괴롭힐 자가 없었고 조급하게 할 자가 없었고 분발시킬 자가 없었고 상을 찌그리는, 그들에게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의 그 마음을 아무도 상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세월을 지나가면서 그 생활을 하니까 ‘나이는 많아도 그 용모가 아름답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그런 생각이 듭디다.
며칠 전에 어떤 사람하고 저하고 앉아서 어떤 사람의 그 사진을 보면서 ‘아, 이 사람 얼굴은 확 피였습니다. 어느 한 군데 피부를 봐도 맺힌 것이 하나도 없고 전부 감사와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렇게 얼굴이 한쪽 구석도 맺힌데가 없이 참 기쁨과 감사와 겸손이 충만한 그런 용모를 가진 사람은 혹 보면, 간혹 몇 달 만에나 며칠 만에나 혹 가다 보면 그런 사람을 하나씩 만날 수 있지 참 드뭅디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인데 저도 그 사진을 보니까 그랬었습니다.
이렇게, 그런 외롭고 지금 생명을 빼앗으려 하는 도마 위에 오른 고기와 같은 그런 형편과 사정에 놓였을 때나 또 자기네들의 모든 것을 억울하게 애매하게, 공연히 시기해서 해치는 이런 큰 억울함을 거듭 거듭 당해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능가하시고 능히 구원하고 당신을 바라보는 자에게 수치나 손해를 보이지 아니할 주를 깨닫고 바라봄으로 그 마음들이 온유와 평강과 감사와 기쁨이 넘쳤으니, 이삭의 아내의 용모가 그렇게 아름다웠다.
처음 시집올 때에는 그렇게 유명하게 아름다웠다는 그런 말이 없었습니다. 좀 아름답기는 아름다웠지만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았는데 그의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되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는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을 하고 단마음으로 양도하고 양보하고 참아서 주의 이름을 욕 돌릴까, 주님에게 영광을 돌릴까, 참 욕을, 근심을 돌릴까 이것만 생각해서 그저 주님에게 기쁨이 되고 그 사람들에게도, 축구라 하든지 바보라 하든지, 그들이 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그런 의인이나 감탄을 주기 위해서 그렇게 살았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그에게 얼마를 줬든지 이제는 물질만 성공이 아니고, 그만 그 옆에 있는 그 블레셋 왕이 찾아온 것을 보면 물질 성공보다 권세 성공 됐지, 겁이 나서 화친하자고 찾아왔습니다. 찾아오니까 ‘우리를 쫓아내고 그래 놓고 뭐 하려고 찾아왔노?’ 하니까 ‘당신은 하나님 여호와께서 축복하시는 분이요 축복받은 줄 알기 때문에 당신을 거리끼면 우리가 망할 터이니까 당신이나 당신의 후손이나 우리 후손이 서로 화목하고 해치지 않기로 맹세를 하자’ 고 그래 달라 붙으러 찾아왔습니다.
보면 이렇게 여호와를 바라보는 자에게 물질 성공만이 아니고, 물질 성공하고 난 다음에 큰 해가 또 왔습니다. 해가 와도 또 주를 바라보면서 참을 때에는 이제는 권세 성공을 해 줬습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꼭 그 순서요. 권세 성공을 해 줬습니다. 권세 성공만 해 준 것이 아니라 인격 성공도 해 줬습니다.
그러니까 저분들이 권세도 두렵지만, 저희가 그렇게 해쳐서 쫓아내고 해 놓고도 그 권세가 두려웠으면, 두려우면 예비를 하고 대비를 하지, 권세를 두려워하면서 유유하게 찾아와 가지고 안심을 하고 턱 흉금을 열고 ‘당신은 이런 사람들이니까 우리와 화친을 하자’ 하는 것을 보면 그 이삭이 의인이라는 것, 백번 이삭에게 잘못해도 이삭이 복수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 그가 관대하고 얼마든지 관용할 수 있는 참 의인이요, 그런 큰 사람이라는 그 인격에 그들이 안심하고 찾아왔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삭이 그들을 위해서 잔치를 열고 거기에서 쉬도록 하고, 갈 때에 서로 맹세를 맺고 이러니까 아주 그 가까운 원수라는 원수들, 그 블레셋 나라로 더불어 밀접한 그런 친교를 맺고 갔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 뒤에 보면 그렇게 친교를 맺어 줘도 그들에게 끌려 가서 안심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언제든지 조심해서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여기에서 이 일곱 가지 순서를 잘 배울 수 있습니다.
고행주의가 아니라는 것, 안일주의가 아니라는 것, 신앙주의라는 것, 신앙을 지킬 때에 많은 애로가 있지만 신앙을 양보하지 않고 지켰다는 것, 그러니까 넷째로 큰 축복을 해 줬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인간 힘으로, 또 그 조건이 좋아서 된다는 이런 생각 가지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흥하고 하나님의 징계로 망합니다. 그 외에 딴거 없어요. 축복으로 흥하고 징계로 망합니다.
이렇게 넷째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고 난 다음에 그들이 심한 대항을 했습니다. 따라다니면서 대항을 했습니다. 이런 일이 축복받고 나면 또 생깁니다. 축복받고 난 다음에 우물을 메우고 가라고 떠나라고 쫓아내고 하는 이런 박해가 있었지만 그럴 때에 일 대 일로 대적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봄으로 참았습니다. 하나님을 봄으로 온유했습니다. 하나님을 봄으로 여유가 참 넉넉히 있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하는 가운데에 이삭뿐만 아니라 이삭의 종업자들도 그만 전부 의인이 다 돼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렇게 사는구나! 그렇게 살아 그렇게 양보하면 안될 줄 알았는데 더 좋은 우물 나오고, 또 빼앗기고 나면 더 좋은 우물 나오고 이렇게 하나님이 해 주시는 것이구나!’ 해서 거기에 같이 따라다니는 종업의 사람들이 다 의인입니다. 다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다 여유있는 온유의 참 신앙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그분은 권세 성공도 했고, 사람 성공도 했고, 영광 성공도 했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모든 사람들이 와 가지고 이삭에게 화친을 청하고 이삭에게 와 가지고, 찾아와서 그를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존대하면서 화친을 청했습니다.
일곱째는 모든 사람을 다 얻어서 자기를 존대하고 친근하고 했습니다. 이러니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당신만 바라보면 뭐 흉년도 어려움도 사람의 박해도 조건의 나쁜 것도 자기의 무능한 것도 상관없이 당신 한 분만으로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고 이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이 길은 인간이 하나님과 도를 버리고 제 힘으로 제 꾀로 나간 그것은 다 결과적으로 패망이지만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그의 인도대로 따라간 사람들은 패망 같으나 다 성공이요, 결말은 모든 것이 겸전했습니다. 물질 성공, 권세 성공, 이웃 성공, 영광 성공, 사람 성공, 하나님에게 대한 성공 전부 다 성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