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4 14:06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
1987. 12. 9. 밤 (수)
본문:로마서 8장 3절∼6절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그전에는 주일학교 공과를 장년반 예배 때에 설교하는 그것으로써 그쳤고 이제 반사들이 자기들이 공과를 가지고 준비해서 가르쳤는데 그럴 때는 좀 열심도 내서 가르치고 또 준비도 하고 이렇게 힘을 썼었는데 나는 좀 더 잘 되게 하려고 공과를 일주일 내내 공과 공부를 하다시피 새벽에도 삼일예배도 오일예배도 이렇게 자꾸 증거해서 그저 자기네들이 공과를 충분히 준비해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도록 이렇게 얼마 동안 해 나오니까 이제 반사들은 더 게을을 부리고 ‘이제는 뭐 공과 안 봐도 예배 시간마다 말하니까 공과 볼 필요도 없이 되겠다’ 이래서 그런지 아주 반사 선생들이 게을을 많이 부립니다.
그래서 그 공과 한 번 설교하면 그다음에는 제가 설교를 공과 설교를 안 합니다.
안 하고 혹 주일날 아침에도 이제 앞으로는 제가 또, ‘교실마다 모여 가지고 그래 하면 좀 부장들이 아마 좀 힘을 쓰지 않겠나?’ 해서 이래 봤는데 부장들은 조금 힘을 쓰는 그 애타하는 것이 이제 조금 생겨져도 또 반사들은 뒤로 아주 저뻥해 가지고 넘어갑니다.
그래서 지난 반사회 때에 ‘그러면 지금 각 교실에서 이래 모이는 게 여러분들 마음에 덜 좋으냐? 그러면 한목 이층에서 예배를 보고 나뉘는 게 좋으냐? 여러분들의 의견을 들어보자.’ 하고서 손을 드니까 대개가 다 그전과 같이 그렇게 예배를 보고 각각 나뉘어서 그래 간다든지 각 교실로 모여 간다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그렇게 또 반사들 거의 전부라고 할 만치 소원을 했습니다.
이제 또 앞으로 그래 볼 모양인데, 도야지도 그놈이 자꾸 울고 이럴 때에 아마 사료 없는갑다 사료 주고, 또 자꾸 울면 그다음에 아마 무슨 섶이 없어서 그런가보다 뿍데기를 넣어 주고, 그다음에 그래도 자꾸 울면 이거 무슨 아마 돈사가 부정하니까 그런가보다 또 청결도 해 주고, 그래도 울면 그때는 몽둥이로 뚜드리든지 안 뚜드리면 ‘이건 자꾸 울어 쌓아니까 귀찮아 안 되겠다’ 그만 잡아먹어 버리든지 그것밖에 없습니다.
그런 게 다 우리에게 계시인데, 이래도 반사들이 안 들어 저래도 반사들이 안 듣고 그러면 나중에 하나님한테 매 맞지 뭐 제까짓 게 뭐 딴거 할 게 뭐 있소? 하나님 두렵소. 하나님 두려워요.
그래서 지금 이 교역자들도 저거가 평생 연구해도 모를 만한 그 진리를 가르쳐 주면 이제는 녹음 여기, 요새는 녹음기가 있어 놓으니까 녹음해 가지고 가서 ‘여기 있다’ 하고서 그저 그거 몇 번, 저거 집에 가서 한 번이나 두 번 듣고 그래 가지고 설교하고 이러니까 뭐 설교가 모두 형편이 없고 교회가 자꾸 내려갑니다.
그래 이것들이 그런가 싶어서 모조리 저 마지막 교역자서부터 강제로 ‘교회마다 일 년에 한 번씩 집회를 해라. 집회를 하는데 너는 누가 가고 너는 누가 가고’ 다 이렇게 말단에서부터 보내니까 이게 거기 가 가지고는 전부 뭐 대부흥사 노릇을 합니다. 이러니까 길러 놓기는 길러 놨는데 게을하니까 이거는 매를 때리든지 뭐 하나님이 뭐 인제 어떻게 하든지 다른 길이 없는 것 같아요.
이래서, 제가 여기 금요일날 짜다라 오지마는 설교를 잘 안 해 주고 그만 다른 사람 시키고 잘 안 합니다. 또 주일날 여게서 설교하는 것은 딴데 못 나가구로 녹음이 안 될 수 있는 그런 뭐 있으면 녹음이 하나도 안 되도록 하고 여기 편집실에서 보내지 안하고 그만 저거끼리 좀 연구해 하도록 그렇게 하면 싶어도 전부 녹음기가 있으니까 다 녹음을 하니 벌써 여게, 뭐 어째서 가는지? 여기 설교하고 나서 세 시간이면 저 서울까지 다 돌아서 전국에 다 전달됩니다. 그거 어째 그래 되는지 나는 그거 모르겠어. 그거 알아요, 어떻게 그래 되는지? ○○○씨 알아, ○○○씨 알아? 세 시간이면 거게서 다 연락 받아 다 듣고 있대요.
그래서 다른 데서는 그 진리 하나 들으려고 하면 설교록을 한 설교면 벌써 세 시간 네 시간이나 설교록에 참 몇십 페이지가 되는 그것을 읽어 가지고 이러는데 여게서는 그것도 아니고 어떻게 게을 부리는지, 인제 교역자도 그럴 건데 여러분들은 주일학교 반사들 광고만 자꾸 하요.
반사들은 그 공과를 외우고 자기가 눈감고 명상해 가지고 연구하고 또 그대로 자기가 실천하면서 거게서 이제 경험에서 체험에서 얻은 그 복음을 가지고 가르쳐 주도록 그렇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번에 보니까 반사 중에도 일등 반사들이, 스물 몇 명만 빼 가지고 이래 봐도 그 사람들에게서 준 것이 얼마? 팔백 얼마? 칠백이십 명이 줄었어요. 그 한 이십 명에서 칠백이십 명.
그러니까 일등 반사들을 했던 사람들이 다 지금 허리띠를 풀어 놓고 있으니까 그다음에서 다 모두 그렇게 합니다. 백 목사 위해서는 한내끼도 하지 마십시오.
백 목사 위해서는 하지 말아요. 백 목사 위하는 것은 또 그것은 다 멸망받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저 주님 위해서 한 것만 영원히 남습니다. 이러니까 백 목사 위해서 한다고 생각지 말고, 주님 위해서 하니까 바로 그것이 복입니다.
그 사람이 주님 위하지 안하면 주님도 그 사람 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더 민첩합니다. 뭐 인간이 지혜 가지고, ‘내 힘만’ 하지만 그까짓 거 인간의 힘 그래 봤자 팩 틀어버렸으면 골케골케 병신되고 팩 틀어버리면 또 그만 픽 쓰러져 죽어버리고 무슨 힘이 있습니까, 있기를?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한 자는 물칩니다.
그러니까 반사 선생들이 좀 주의를 해야 될 것이고, 그러고 남권찰들 좀 허리를 동여야 됩니다. 남권찰들이 너무 게을을 부립니다. 게을부리면 천물됩니다. 게을을 부리면 하나님께서 세상에서도 게을부리는 남자는 천물을 시켜요. 또 하늘나라에서도 천물됩니다.
오늘밤에 봉독한 말씀은 그 성경을 들고 이제, 필기 그거 하지 말고 성경 들고 그래 보십시오. 성경 들고 뜻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줬습니다. 율법을 준 것은 처음 율법은 구약 성경 말씀이 첫 율법이고 두번째 율법은 신약 성경 말씀이 두번째 율법입니다. 이것을 율법이라면 율법이고 복음이라면 복음입니다.
어짜면 율법이 되고 어짜면 복음이 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법도가 이러니 이 법도대로 내가 지켜야 되겠다’ 하고 지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됩니다. 또 복음을 지키는 사람은 ‘이는 나를 사활로 대속하신 주님이 이렇게 지키면 당신이 성사는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기 때문에 대속하신 주님 시키는 대로 나는 이 도리대로 지키는 것이요 지킨다고 이것 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 지키라 하시는 분이 내가 이래 지킬 때에는 그 모든 것을 해 주심으로 된다.’ 그러면 지킴으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되고, 또 ‘지키면 주님이, 시키신 주님이 다 해 주신다.’ 은혜로 되는 것을 믿고 바라는 사람이 복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율법과 복음.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하나님이 이 율법을 신구약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주셔서 “이대로 살면 구원되고 이대로 살지 못하면 다 죄가 되니까 멸망받는다” 이렇게 하나님이 이 법칙을 내 주셨지마는 이 법칙 가지고 성공을 못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 법칙을 암만 내 줘 봐야 인간들이 약해서 이 법칙대로 하지를 못했습니다. 구약 성도들이 하지 못하고 신약 성도들도 인간이 무지 무능하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구비하게 이렇게 하라고 작정하시고 선포해 주셔도 이대로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못 한다 그말이오.
못 하는데,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실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이제는 인간의 육신이 연약해서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우리 대신 해 주시려고 나타나신 것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체의 모양으로 보내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를 다 담당시켜 가지고서 죄를 담당해서 죄 있는 아들로 보냈습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우리 죄를 두터씌워서 담보를 시켜 가지고서 죄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났습니다.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이래 가지고 주님이 우리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죄를 정하사” 이렇게 예수님이 우리 죄를 다 걸머지신 것은 왜 걸머지셨느냐?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육신을 좇지 않고” 육신을 따라서 육신 하자 하는 대로 하지 아니하고, “육신을 좇지 않고” 이 말씀은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육신이 하자 하는 대로 하지 안하고 그말입니다.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안하고, 육신을 따라 하지 안하고, 육신이 하자 하는 대로 하지 안하고, 그러면 육신이 뭐인지 나중에 나옵니다. 육신이 하자 하는 대로 하지 안하고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영이 하자 하는 대로 하고 영이 시키는 대로 하는 그 사람에게 말이오. “우리에게” 우리가 육신을 좇아 행하지 안하고 영을 좇아서 행하는 믿는 자들에게 그말입니다.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이 ‘이래 해라 저래 해라’ 하는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인 그 율법이 ‘이래라 저래라 또 이것은 하지 마라 저거 하지 말아라.’ 이 율법이 ‘이런 것은 하지 말아라. 이런 해라.’ 율법이 요구하는 요구대로 만족을 이룰 수 있도록 하려 함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인간 단독으로는 율법대로 내가 이행해 가지고 구원 얻을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율법대로 다 행해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생겨진 것은 어떤 길이 생겨졌느냐?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의 죄를 담당을 시켜서 죄 없으신 분을 죄인으로 보내 가지고서 우리 대신 형벌을 받게 하셔 가지고 우리를 죄에서 구출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완전히 행한 사람으로 죄는 하나도 없는 사람으로 이렇게 우리 대신 행해 가지고서 이와같이 하신 그 공로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입혀 주신 이유가 뭐이냐? 그 이유는 우리가 육신을 좇아서 행할 수도 있고 영을 좇아서 행할 수도 있는데 육신을 좇아 행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이 그 일을 해 주시지 안하시고, 육신을 좇아 사는 사람에게는 그 일을 해 주지 안하시고 영을 좇아 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대신 같이 행하셔서 그 일이 다 완성이 되도록 그렇게 하시기 위해서 대속하셨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육신 좇는 자는, 육신 따르는 자는, 육신이 시키는 대로 하는 자는 육신 그놈은 항상 육신의 것만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만 생각하고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육신의 일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데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그 결과가 어째 되는가? 또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는 그 결과가 어째 되는가 그다음에 말했습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절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니라” 그러면 우리는 육신의 생각으로 살면, 육신을 좇아 살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그 사람의 행위에는 상관이 없고 영을 좇아 살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그 사람의 것을 책임지고 하기 때문에 율법 완성을 할 수가 있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육신은 뭐이 육신이며 영은 뭣이 영인가? 육신은 뭣이 육신이며 영은 뭣이 영인가? 영이 아닌 것은 육신이요 육신이 아닌 것은 영입니다. 영이 아닌 것은 육신이요 육신이 아닌 것은 영입니다. 딴게 없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영을 좇는 생활이 아니면 육신 좇는 생활이요 육신 좇는 생활이 아니면 영을 좇는 생활 두 가지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알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영을 좇는다, 영은 뭘 가리켜 말하는 것인가? 그 영은 사람들의 영을 말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영을 좇는 자라 말은 하나님을 좇는 자라 말이요, 하나님의 영을 좇는 자라 말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성령을 좇아 행하는 자라 그말입니다.
영을 좇아서 행하는 것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말은, 생명이라 말은 영을 좇아서 행동하는 그것은 전부 살리는 행동이요 산 행동이라, 살리는 행동이요 산 행동이라 하는 말입니다. “영을 좇아 행하는 자는 생명과 평강이니라” 생명이라 말은 살리는 행동이요 산 것이 하는 행동이라.
그러면 하나 실례를 든다고 하면 그 사람의 사업이 영을 좇아 하면 죽은 사업이 살아나고 살아난 사업은 살아서 점점 성장돼 가고, 또 그 사람의, 뭐 학생이라면 공부하는 것도, 공부하는 것도 영을 좇아 사는 것은 그 사람의 공부가 죽어 있는 공부가 살아나고, 그 사람의 지능이 죽어 있는 지능이 살아나고, 그 사람의 지식이 죽어 있는 것이 살아나고, 살아난 그것이 점점 살아서 자라가게 된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그러면 우리의 심신은 죽어 있는데 영을 좇아 살면 우리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고, 살아 있는 기능은 점점 살아서 자라가게 되고, 우리에게 있는 도덕도 영을 좇아 살면 그 도덕이 뽀스락뽀스락 살아나고, 그 인격이 살아나고, 정신이 살아나고, 모든 의지가 살아나고, 양심이 살아나고, 전부 뭐이든지 영을 좇아 사는 것은 무엇이든지 죽은 것은 자꾸 살아납니다.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 영을 좇는 행동이요, 영을 좇아 하면 죽은 것이 자꾸 살아나고, 살아난 것은 자꾸 살아서 자라갑니다. 산 것이 자꾸 살아가면 자라갈 것 아닙니까? 우리의 육신의 이것은 뭐 이것은 자꾸 죽어가는 거기 때문에 십 년 살면 그만치 죽었고 오십 년 살면 그만치 죽었지만 모든 것이 다 죽기 전에는 자꾸 산 것은 살면 자꾸 자라갑니다.
뭣이든지 명예도 그러합니다. 그 사람의 명예심이든지 도덕심이든지 화목심이든지 이해심이든지 관용심이든지 인격이든지 또 무슨 경건이든지 진실이든지 거룩이든지 정직이든지 의든지 무엇이든지 죽은 것은 살아납니다.
곧지 못한 부정은 죽은 것 아닙니까? 부정이 영을 좇아서 행하면 그것이 정직이 됩니다. 자꾸 살아납니다. 영을 좇아서 행하는 것은 전부 죽은 것이 살아난다. 네 정신이 죽었다. 욕심도 죽은 욕심 산 욕심 많습니다. 죽은 욕심은 영을 좇아 살면 그 욕심이 차차 차차 살아납니다. 전부 살아나요.
영도 육도 소유도 사업도 활동도 영광도 기쁨도 평강도 가치도 전부 살아나. 영을 좇아 살면 전부 다 살아나. 안 살아나는 게 하나도 없어. 전부 다 살아나.
살아나고, 살아 있는 것은 영을 좇아 살면 점점 더 장성하고 충만해지고, “생명과 평강이니라” 평강이라 말은 그것을 잘 누리고 산다 그말입니다. 이제 살려 놓은 것을 잘 누리고 살고, 죽은 것을 살려 가지고서 잘 누리고 살고 ‘아무것이 그 사람들은 그 회사가 아주 그만 기울어져서 지금 골케골케하고 곧 지금 죽겠더라. 회사가 죽겠더라.’ 이랬는데 영을 좇아 살면 그 회사가 살아납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해 보십시오. 뭐이든지 살아납니다. 살아나고, “평강이니라” 살아나고 살아난 그것이 평안하게 그 평안을 잘 누리고 산다 그말이오. 평안을 잘 누리고 산다.
이것 두 가지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죽은 것 살아나고 살아난 게 평안하게 잘 계속되고 그것을 잘 누리고 지내면은 그만하면 다 된 것 아닙니까? 육의 모든 것 소유나 자기의 육체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범죄하면 사망이기 때문에 꼭 수명이 아니라 죽습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도 다 광범위한 예정이지만 한목 무더기로 여러 수천만 수백만 이렇게 죽는 것이 그것이 전부 죄값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이 지금 예수 믿다가서 한번 육신이 죽지 않습니까? 한번 죽는 이것도 일차 아담에게 속해서 범죄한 그 값으로 한번 죽습니다. 그리 아니면 죽을 필요가 없어. 값으로 죽고 이제 신령한 몸으로 새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영을 좇는 자는 생명과 평강이니라” “생명과 평강이니라” 그러면 그 반대로ㅡ영을 좇는 자는 성령의 인도대로 한다 말이요, 하나님의 인도대로 한다 말이요, 그것을 가리켜서 영을 좇는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육체를 좇는 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그러면 육신의 생각은 뭣이 육신의 생각인가? 육신의 생각은 영의 생각 아닌 것은 전부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래야 이 판정이 나지 사람들이 육신의 생각 ‘이것도, 이것은 선한 건데, 이것은 선한 건데, 이것은 옳은 건데’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속습니다.
영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 성령의 생각이요 성령의 생각 아닌 것은 전부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 사람이 도덕을 말하든지, 선을 말하든지, 의를 말하든지, 진실을 말하든지 뭐를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전부 육신을 좇아 사는 것이요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언행심사의 움직이는 것이 이게 아니면 저거요 저게 아니면 이겁니다. 마치 밤이 아니면 낮이요 낮이 아니면 밤이라 하는 것과 같이, 삶이 아니면 죽음이라 죽음이 아니면 삶이라, 성공이 아니면 실패라 실패가 아니면 성공이라, 그런 양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영의 생각이 아니면 육신의 생각이라. 영을 좇는 게 아니면 육신을 좇는 것이라.
그러면 “육신 좇는 것은 사망이라” 사망이라 말은 육신을 좇으면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사망이라 말은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은 것은 더 썩어지고, 망한다는 것은 자기의 가진 자기 소유, 명예도 소유요, 지위도 소유요, 물질도 소유요, 건강도 소유인데 그런 것은 다 망한다. 죽고 망한다.
이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하는 이런 것을 우리가 백 번 외울 게 아니라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여러분들이 자꾸 재독을 하십시요, 뭐 밤이나 낮이나.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니라” 이것을 몇천 번이든지 외워서 그만 자기 몸에 꽉 배도록 해서 이것을 연습을 하고, 무엇이든지 하면 ‘내가 이것은 육신 생각이가 영의 생각이가? 육신의 인도를 받는 것인가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인가? 육신의 소원대로 하는 것인가 영의 소원대로 하는 것인가?’ 내나 육신을 좇는다 말은 육신의 생각대로 한다 말이요, 육신의 좋아하는 대로 한다 말이요, 육신의 소원대로 한다 말이요, 육신의 욕심대로 한다는 말이요, 영을 좇는다는 건 영의 생각대로 한다 말이요, 영의 소원대로 한다 말이요, 영을 따라 한다 말이요, 영의 욕심대로 한다는 말이오.
이러니까 요것을 우리가 익혀서 꼭 요것을 우리가 우리 마음비에다가, 우리 마음에다가 각해서 딱 새겨서 요것을 변동할래야 변동하지를 못하고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리지를 못하고 항상 요것이 우리에게 가뜩 차도록 해야 됩니다.
그저, 다른 것을 해석을 못 해도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이라 말은 육신을 좇는다 말이요 영은 생각은 영을 좇는다 말이니까 좇는다 해도 좋고 생각한다 해도 좋으니까 그만 ‘생각’으로 익히는 게 제일 좋겠습니다. 그게 거기 시발입니다. 시발하는데니까.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육신의 생각 영의 생각.’ ‘네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게 뭣이냐! 뭐 생각하고 있느냐! 눈을 감고 뭐 생각하고 있느냐! 뭐 생각하고 있느냐! 너 죽는 거야! 그것 생각하면 죽는 것!’ 저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전체가 망할 생각을 지금 뭣 때문에 하고 있느냐, 있기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네가 암만 잘나고 억세고 어떤 지위에 있어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 하나님이 이렇게 법을 정해 놨는데 제가 안 죽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억센 인간이라도 땅위에 안 죽은 인간 하나도 없어요. 다 죽습니다. 다 죽은 것은 아무리 억세게 무신론을 주장해도 죽는 것은 하나님이 죽는다고 하는 그 정한 대로 죽는 것이고 명령에 복종이오. 스탈린이 제가 하나님을 없다고 부인했으면 하나님이 죽으라 하니까 죽었지 제가 오라 하니 오고 썩으라니 썩었지 별수가 뭐 있습니까, 있기를? 이러니까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정합시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뭣인가? 영의 생각 아닌 것이 육신의 생각이지. 영의 생각은 뭣인가? 육신의 생각 아닌 것이 영의 생각이지. 이게 아니면 저거고 저게 아니면 이거라. 왼쪽 아니면 오른쪽이고 오른쪽이 아니면 왼쪽이라 하는 것 모양으로. 있으면 있는 것이고 있지 안하면 없는 것이지 뭐.
이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하나라도 지켜서 참 “주의 말씀은 천천 금은보다 낫다” 하는 그 말은 주님의 말씀은 지켜 보니까 천천 금은보다 수입이 더 큽니다. 다른 것 다 몰라도 “육신의 생각은 망하고 죽는 것이라.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러니까 자기가 무슨 일이든지 큰 것이나 작은 것이나 경영을 하든지 자기 혼자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해도, 소원만 해도, 일을 해도 ‘내가 이 일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을 따라 하는 것이냐 영의 생각을 따라하는 것이냐?’ 혼자도 앉아 생각하며 ‘내가 이 생각이 지금 육신을 따르는 생각이냐 영을 좇는 생각이냐?’ 거게서 혼자 있든지 둘이 있든지 여럿이 있든지, 분주하든지 뭐 조용하든지, 자기 집 안에서든지 집 밖에서든지, 사업에서든지 공부에서든지 뭣이든지 요 두 가지만 판별을 해 가지고서 육체의 생각을 피하고 영의 생각으로 하루를 해 보면, 하루를 해 보면 그날 해가 다 지기 전에 자기에게 정리되는 것이 정리되고, 고통이 줄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멸망 가운데 깊이 폭 빠져 가지고 있으면 하루만 육체의 생각을 물리치고 영의 생각으로 살면 과거에 안 하던 걱정이 생겨지고 염려가 생겨지고 두려움이 생겨져서 ‘어찌 됐든지 이는 멸망 여게서 벗어나야 되겠다’ 하는 그 생각이 납니다.
하루만 그 육신의 생각을 피해도 벌써 그 속에 치료가 시작돼요. 영의 생각으로 따라 하려고 하루만 해도 벌써 그 사람에게 새움이 틉니다. 새움이 터. ‘아, 이래 해야 될 건데 못 했다. 내가 이래야 되겠다.’ 그 새 소망이 생겨지고 새로운 소원과 계획과 산 희망이 있는 참 희망 있는 그런 움싹이 터오릅니다.
이러니까 그걸 뭐 천천 금은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까? 하루 동안을 살아 본다고 살아 보면 주의 법도는 천천 금은보다 낫다 하는 것이 다 살아 본 사람들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 지켜서 사는 것이 이 세상에 무슨 빌딩이 뭐 수백 채 있는 것만 못한 줄 압니까? 그것은 가치가 없어. 살아보면 이것은 그보다 더 나은 것이, 더 견고하고 확고한 것이 자꾸 생겨져.
우리 믿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 거지로 지냅니까? 거지로 지내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껍데기 외모, 외모는 세상 뜰 때 가져가지 못하는 건데 외모가 없으면 있고 있으면 없는 것입니까? 그래 사는 사람마다 외모도 있어질 뿐 아니라 외모보다 더 영원히 없어지지 안 할 그 내용이 점점 충실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아예 요 지식을 단단히 잡고 자기가 육체를 좇는 육체의 생각대로 무엇이든지 경영했으면 아예 ‘이것은 사망이다. 이것은 사망이다.’ 이러면 그 사람이 가다가도 주저할 수가 있고 거게서 다소 돌이킬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마귀란 놈은 그걸 잊어버리게 하요. 하나님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하는 것을 하나님은 자꾸 이렇게 말해 주는데 마귀 이놈은 요걸 잊어버리게 해.
왜 여기 앞에 있는 사람 졸고 있어? 뭘 생각하다가 졸고 있어, 생각하기를? 죄악이 들어오고 난 다음에 잠이 들어 와. 죄가 들어오고 난 다음에 잠이 들어 와.
그러니까 우리 이 서부교인만이라도 이렇게 말씀을 하나라도 지켜보면 이보다 더 복이 없는데, 미국을 그때에 기울어졌을 때에 그 나라를 구출한 사람이 무디 선생이라 하는 유명한 부흥사인데 그분이 간증을 하기를 ‘믿음보다 더 큰 수입은 없다.’ 자기는 하나님 말씀대로 행해보니까 그것보다 더 큰 수입이 없어. 뭐 세계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큰 수입이 있다는 걸 자기가 수입을 봤기 때문에. 다 그렇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육신의 생각은, 육신을 좇는 자는 죽고 망한다.” 요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목사가 해도 육신을 좇는 일 육신의 생각 그것은 죽고 망하는 것 외에 딴길이 없고, 장로가 그래도 죽고 망하는 것 외에 딴길이 없고, 권사가 그래도 죽고 망하는 그것 외에 딴길이 없고, 뭐 집사도 권사도 반사도 전도사도 평신도도 예수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육신 좇아서 육신 생각대로, ‘육신 생각’ 하면 돼요, 그만. 육신이 하자 하는 대로 하는 게 육신 생각이라. 육신이 하자 하는 대로 하는 것이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거라. 육신의 생각으로 살아.
“육신의 생각대로 사는 자는 사망이요 영의 생각대로 사는 것은 생명과 평강이라” 어짜든지 이것을 자꾸 외워 봅시다. 이것 좀 유치한 것 같지만 유치하지 않아요. 아직까지 이것 너무 최고의 이 공부기 때문에 이런 공부를 지금 입학도 못 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 시간에 자, 잠깐 손가락으로 세면서, 손가락으로 세면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이것 스무 번만 해 봅시다. 자, 시작. 한번 해 봐요.
“욱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한 번.
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또 두 번.“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또 세 번.“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또?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자꾸 이래 가지고 좀 자꾸, 스무 번 하면 너무 많다. 열 번만 해 봐요. 자, 열 번 한 사람 손 들어. 서이 들었다. 너이 들었다. 이제 한 이십 명 들었다. 여게도 한 삼십 명 가량, 오십 명 들었다. 아직 다른 사람들 못 했어. 예.
이것을 그저 오늘밤에 가 가지고서 이제 오늘밤에는 자기 전에는 백 번 해 보겠다, 그리 아니면 오십 번 하겠다 해 놓고서 자꾸 외워서 그만 입에 환하게 익도록.
이래 가지고 언제든지 이것이 등불입니다. 자기가 어데 가서 이래 거석할 때에 친구하고 만나든지, 혼자 하든지, 뭐 가족끼리 만나든지, 뭘 하든지 ‘아,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그러면 내가 이거 육신의 생각이가 영의 생각이가? 어데 속했노?’ 육신의 생각이면 사망이니까 뭘 뭐 더듬을 게 뭐 있습니까? 해도 사망인 줄 알고 하라 그말이오. 사망인 줄 알고 해요.
반사 선생님들은 요 공과를 외우고, 믿음은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해서 공과를 외우고 명상을 하면서 자기가 믿음 생활, 그 밑에 해석해 놓은 대로 믿음 생활을 해 봐요. 믿음 생활을 해 보면, 자, 믿기는 누가 믿습니까? 믿기는 누가 믿습니까? 믿기는 누가 믿습니까? 개가 믿소 사람이 믿소 우리가 믿소? 믿기는 우리가 믿습니다. 믿는 데 믿는 대로 하는 이는 누가? 믿음이 합니까 누가 합니까? 믿는 대로 성취시키는 것은 누가 성취시켜? 주님이 시켜. 믿기는 우리가 믿고 믿는 대로 이루어 주시기는 주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주님이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면 당신이 이루어 주신다 하는데 돈을 내라 해도 낼 건데 믿으면 이루어 주실라 했는데 왜 우리가 믿지 않습니까? 뭐 주님이 우리한테 뭐 거짓말 한 일이 있습니까? 그런 일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