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소망

 

1984. 9. 23. 주전

 

본문: 누가복음 9장 51절∼62절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저희가 가서 예수를 위하여 예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촌에 들어갔더니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고로  저희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시니라 길 가실 때에 혹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5l절로 56절까지의 예수님의 그 속성을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도 우리와 꼭같은 인성을 가지신 분이시요 원죄가 없었고 그 후에  스스로 범한 본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래도 십자가에 대속하실 때가  가까움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로 결심을 하셨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결심하는데 굳게 결심하셨다 그렇게 또 말씀했습니다.

 예수님도 인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시는 그 생애을 하실 때에 애로나  그런 마찰들이 작은 것도 있고 크고 많은 그런 일들도 있는 것이 우리들과 꼭  같습니다. 그런데 대해서 그저 예수님의 신성도 되는 대로 그때 그때 힘을 써서  이렇게 해 나가시는 것이 아니고 미리부터 예수님께서 믿음을 지켜 나가실라고  하는데에는 어떤 그 마찰과 애로와 경로가 있을 것을 생각하시고 결심도 하시고  또 어떤 애로점이 있어도 거기에 조금도 요동하지 아니해야 할 일에 대해서  기도도 하시고 또 굳게 결심도 하시고 이렇게 해서 그 승리 생활을 이루어  나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오늘에 신앙생활을 해 나갈라고 할 때에 우리에게는 원죄의  부패성과 본죄의 그 세력들이 있는 것이 주님과 다르지 영감은 우리가 받은  영감이나 꼭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가지신 인성으로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서  준비하고 각오하고 결심하고 기도하고 이라는 가운데서 앞으로 닥쳐올 모든  어려움을 예측 예상하시고 기도해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구하여 그 도움의 약속이  확실히 임했을 때에 안심도 하시고 그 일이 아직까지 미정되어 있을 때에는 참  그 땀방울이 변하여 피 방울이 되기까지 그렇게 기도하셨고 아버지의 응락을  받으시고 난 다음에는 안심을 하시고 이렇게 신앙 걸음을 걸어서 흠 없는 완전  승리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모든 비판에 대해서 결심이 있어야 되겠고 평가에 대해서  결심이 있어야 하겠고 또 우리의 그 말에나 행동에나 마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결심이 있어야 하겠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대해서나 자신에게 대해서나 모든  사람들과 자기의 모든 관련된 사물에 대해서도 우리는 미리 미리 계획이 있어야  하고 비판과 평가와 결정이 있고 또 하나님에게 모든 부족한 것을 도와 달라는  간구가 있고 이렇게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만 주님의 가신 그 걸음을 우리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또 하나님의 섭리로 듣고 듣고 보고  접촉하는데 대해서 우리가 깨달아지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깨달아지는  거, 성신의 감화가 우리 양심을 통해서 깨달아지는 거, 우리가 사람들과 모든  사물들을 접촉하는 데에서 우리가 깨달아지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전부 다 우리의 구속을 위한 구속 역사입니다. 왜? 어떤 그 순서든지  우리의 구속 역사를 위하지 아니한 순서가 없고 우리 구속 역사를 위하여  존재되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고 또 이 모든 것을 우영하셔서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그 섭리도 구속을 위한 섭리 아닌 섭리는 한 섭리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의 할 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미래사를  계획을 가지고 또 하나님 앞에 간구도 하고 또 의논도 해서 수정도 하고 이렇게  하는 이것을 그저 함부로 무책임하고 그뭐 자기 혼자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를 상대해서 살아도 그 아이에게 대해서 어떻게 자기의 한  일이면 뒤를 생각하고 책임을 지고 거기에 준해서 좋은 결과가 맺어지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어린 아이라도 그렇게 무시해서 대하면 자기가  더러워집니다. 다른 아무 상대방이 없이 자기 혼자 스스로 이 공상을 한  공상이라도 그 공상을 아무나따나 공상 할 수가 없고 또 공상한 그것을 그대로  그저 생각하고 집어던졌으면 그만이다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기는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도 '그 생각을 버렸으면 그만 아니냐?' 버리기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버렸다 할지라도 그것이 언젠간가 자기에게 영향이  반드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우리의 언행 심사의 움직임을 신중히 해야 되겠고 또  미래사에 대해서 우리는 계획을 자기 힘대로는 하고 또 하나님 앞에 의논해서  수정도 하고 결심도 하고 각오도 이래 해서 자기가 혼자 살든지 누구와의  상대해서 살든지 무생물의 모든 만물로 더불어 상대하든지 그 모든 것은 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저 지난 아침에 ○○○조사님이 설교할 때에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 하는  것을 깨닫고 살아야 된다는 그 아주 진리를 증거를 했습니다.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이요 주님이 직접 세밀히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조심 없이 해서는 안 되고 또 아무나 따나 말해 놓고 생각해 놓고 자기 혼자  일이라고 그저 집어던진다는 그것은 저 혼자만 집어 던졌지 제가 말이나  생각이나 뜻이나 소원이나 가졌던 그것을 던졌다고 던져진 것은 아닌 것입니다.

반드시 거기에 대한 심판이 있고 거기에 대한 보응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행동록에 기록되고 유사의 것들이라는 것을 알고 심각히  오늘에 포기를 한다든지 고친다든지 해야 되지 그저 그런 것을 예사로이  취급해서 그저 던지면 그만이라 그런 그 방종한 생각을 우리는 안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사는 이 모든 생활인데 그저 아무 계획  없이 또 어떻게 비판 없이 평가 없이 결심 없이 이렇게 아무나따나 되는 대로  산다는 그런 것은 너무 우리의 마음이 조심 없는 마음이요 하나님 앞에 거룩을  범하고 망령을 행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마태복음 6장에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는 이 말씀을 혹 오해를 해 가지고 미래사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말이  아니고 미래사의 하늘나라에 가서 있을 일까지도 오늘에 해당된 것은 오늘에  생각해야 되고 오늘에 준비해야 될거는 오늘에 준비해야 되고 오늘에 설계할  것은 예산 할 것은 오늘에 예산해야 되지 그저 마구잡이로 미래 없이 되는  것같이로 그날 그날 그 당장 생활로 한다는 그것은 짐승이야 그래하지, 중생되지  아니한 사람들도 사람이라는 것은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은 더욱 그러 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상을 앞으로 입어가야 될 사람인고 하니 단번에 영원 미래를  예정하신 주님의 그 형상을 입어가야 할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이 범사에  모든 것을 생각해서 자기의 생각이 영원히 변동될 수 없는 생각을 영원히 회개할  것이 없는 소원을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는 그런 계획으로 나아가야 되고 그런  모든 것을 주님에게 물어서 주님에게 피동됨으로서 나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경을 읽든지 듣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보든지 할 때에  거기에서 비판이 없으면 우리는 존귀한 성도지마는 짐승과 같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거기에서 이게 나으냐 저기에 나으냐? 오늘에는 이게  낫지마는 십 년 후에는 어느 게 낫겠노? 십 년과 이 세상에 있어서는 이게  가치가 높지마는 일단 세상을 떠나고 나면은 그 다음에는 어느 것이 가치  있느냐? 이 평가도 시간을 초월한 평가를 우리가 가져야 되겠고 공간을 초월한  평가나 비판을 우리가 이렇게 가지고서 우리도 결심도 하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을 때나 들을 때나 이 예배 드릴 때에도 자기에게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자기의 과거를 다 놓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과거는 과거로 잊어  버린다.' 그 그럴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과거를 과거로 잊어 버린다면은 그거는  짐승만도 못합니다. 과거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과거를 다 책임지고 또  자기의 미래를 과거로 참고로 삼고 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바른 계획을 가지고  하나씩 성취해 나가야 될 이런 어려움을 가져 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에  과거를 가지고 자기가 비판해서 회개할 것을 그 시간에 말씀을 들으면서 잘못된  것은 회개도 하고 또 과거에 삐뚤어진 것은 고치기도 하고 또 새롭게 깨달아진  것은 결심도 하고 작정도 하고 그라는 가운데 주님에게 구하고, 이러니까  들으면서 과거와 대조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면서 또 하나님에게 정리할  것을 정리하면서 맡길 것은 맡기고 간구할 걸 간구하고 의논할 것을 의논하고  문의할 것을 문의하고, 이라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의 그 성도의  심신이나 또 자기가 신구약 성경을 읽을 때의 자기의 심신이나 모든 보고 듣고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심신이나 우리의 심신은 진실로 안팎에 눈이 있어야 되고  쉬지 않고 우리는 분망하게 번개와 같이, 에스겔 1장에 말씀한 대로 번개와 같이  움직이지 안하고는 될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얼마나 기독자가 부지런해야 되며  얼마나 노력해야 되며 얼마나 조심해야 되며 얼마나 대조하고 비판해 보고 또  비판해 보니까 이거는, 틀렸다, 틀렸으면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고칠 수  있습니다.

 '아, 이 비판이 이제 생각하니까 너무 부분적이고 너무 국부적이고 이 전체면이  아니다.' 이래서 우리는 비판도 날마다 새로워져야 되겠고 평가도 새로워져야  되겠고 '아, 이것이 아주 가치 있다고 생각했더니마는 이것은 어느 범위에서는  가치 있지마는 어느 범위에 가니까 가치가 적다. 그러면 이 세상에 가치 없는  것이 있느냐? 가치 없는 것이 하나도 없고 가치에 대해서 그 직위가 없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이 가치는 요 정도고 요것보담은 이하고 요것은 요  가치보다 그 이상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든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이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자연히 생각이 많다 보니까 지식이  더해지고 또 거기에 대해서 연구가 더 광대해지고 이러니까 거기에서 연성해서  앞으로 천군 천사들도 심판하고 모든 세상을 다 심판할 수 있는 그런 실력가로  이렇게 성장돼 나가는 것이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하는 것도 얼마 전에 그 한 몇 시간  설교를 했고 또 아침으로도 설교를 했습니다. '자기 할 일을 그저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잘해 주신다' 하는 그 말은 무슨 조건 하에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하나님에게 다 맡기면 하나님이 비판을 너에게 지도해 줄 것이고 평가를  지도해 줄 것이고 모든 행동을 지도해 줄 터이니까 그 지도할 때에 네 심신을 다  기울여서 그 지도를 받고 또 거기에 따라 복종해서 움직이고 네 전부를 다  기울여도 너로서는 할 수 없다 하는 이것을 알고 주님에게 모든 그 비판과  평가의 그 원인을 그 동기를 맡길 때에 그분 이 시발을 시켜 줄 때에 너는  심신을 다 기울여서 거기에 복종하게 되면 네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보충하셔서 다 완전을 이룰 수가 있다. 지극히 큰 것도 다 할 수가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예배 볼 때에 주님도 이렇게 결심도 하시고 굳게도  하시고 결심하는 데에는 앞으로 미래사를 생각하시고 거기에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가운데에서 대략 시기도 짐작하셨고 거기에서 또 당신이 결심도 하시고  또 굳게 결심도 하시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주님도 이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이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한다고 계획 없이 산다는 그것은 이것은 참  짐승 생활입니다. 또 되는 대로 하나님에게 다 맡겨놨으니까 그러면 나는 아무  책임 없다는 거. 그러면 내가 못 하기 때문에 맡겼기 때문에 나는 그거 맡기고  난 다음에는 당신이 뭐라고 하는가? 이 말을, 맡겼으니까 당신이 나를 말을 하라  하나 하지 말라 하시나? 사람을 대할 때 마다 말을 하라 하시나 안 하라 하시나?  자기 단독이 말해 버리면 그만인데 당신의 그 지도를 받아서 내가 말을 해야  되겠으니까 해야 될지 안해야 될지 이러니 다른 사람에게 옆에다가 자꾸 말을  하는데 나는 말을 대답을 못 하는 것은. 왜 내가 이렇게 저렇게 내가 나 혼자  대답할 것이지마는 그분이 대답을 하라는 대로 내가 해야 될 모양이니까 문제니,  이러니까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이 벙어리가? 이 사람이 남의 말을 무시하나? 그  오해를 많이 받고도 비로소 자기 양심 속에 신앙 양심 속에서 '아,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것을 그 주님이 말씀해 주시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라는 걸 깨달을 때에는 그 말을 해서 사람에게 아주 버림을  당할지라도 의가 끊어질지라도 자기에게 어떤 그 피해가 올지라도 또 자기가  어떤 손해가 그 말을 하고 난 다음에는 그 말대로 해야 될 터이니까 큰 손해가  갈지라도 자기는 해야 되고 이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신자가 그렇게 사는  것이 신자 생활이기 때문에 잘못하면 그 감각 없는 사람으로 살기 쉽습니다.

 그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예배 볼 때에 거기에서 아무 비판이 속에서 움직여  나가지 안하고 평가가 움직여 나가지 아니하고 과거에 대조하는 대조가 움직여  나가지 안하고 거기에서 회개와 새로운 결심과 각오가 이렇게서 나가지 안한다고  하면 그런 아무 감각 없는 짐승같이 이성 없는 짐승같은 그런 생활이 되기  때문에 성도의 생활의 꺼풀을 완전히 벗고 성경을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예루살렘 가는 걸음에 사마리아 들어가니까 사마리아는  대립이 돼 있기 때문에 영접을 안 했습니다. 영접을 안 하니까 제자들이  말하기를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해서 저들을 멸하라고 하랍니까?' 그런 제자들  자기에게 능력이 있는거 아니고 주님이 그렇게 해라 하면은 된다는 것은 다  믿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시면 그대로 된다. 너무 오랫동안 삼 년 동안 거의  따라 다녔기 때문에 처음에는 주님이 하신 말씀이라도 에누리를 하고 안 되지  이랬지마는 벌써 이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의 역사를 이루실 때가 가까웠기 때문에  제자들은 많은 그 배움을 가진 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무엇이든지  명하시면 주님이 명령하시면 그 명령에는 그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바다를  바짝 마르라고 명하실 때에 마르라고 명하라 할 때에는 '예' 하고서 바다를  마르라고 명하면 바다가 말라진다는 것을 그들은 벌써 믿었습니다. 제자들이  그거는 믿었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런 말을 할 때에 주님께서 꾸짖었습니다.

 그러기에, 권능은 권능은 그 사람에게 그 사랑이 있어야 권능이 나타납니다.

사랑 없는 자에게는 권능을 주시지를 아니합니다. 또 승리나 성공은 승리나  성공은 겸손이 없는 자에게는 주지 않습니다. 만일 그걸 주면 도로 역효과가 될  것이고 또 권능을 그 사랑 없는 자에게 권능을 주시면 악용해 가지고서 낭파될  것이기 때문에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결심과 각오가 있는  사람이 돼야 되겠고, 우리가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데에는 반드시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악을 뽑아 버리면 능력이 옵니다. 또 교만을 뽑아 버리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든지 승리와 성공을 주십니다. 때가 되면 높이신다는 그  때도 여전 그런 때입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여짜오되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제 주님을 따르는 것이 복인 줄 알고 주님을 따르겠다고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좇는다, 따른다. 믿음이라 그 같은 말입니다. '좇으리이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좇는다는 말은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간다는 말은 사상적으로. 예수님을 따라가고 또 지식으로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또 모든 행위로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 모든 인식으로도 예수님을  따라가고 성품으로도 따라가고 모든 성공으로도 예수님의 성공에 따라간다는  말입니다. 그말을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을 본받고 예수님 닮고  예수님 같이 돼야 된다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여기에 좇는다고 그렇게 한 말로  말한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짜오되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주를  좇으리이다' 하는 이 말을 그 사람이 말을 했으나 실은 이 계시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계시의 기관으로 이용된 것입니다. 요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계시의 기관으로 그 사람이 이용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주를 좇으리이다' 이 말을 했으나 이 말 한 것이 영원 전에 예정된 대로의  이 말이 나왔고 그 본인은 이 말 할 때에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이 말을 하게  됐고 이 말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도가 되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어디로 가시든지 주님을 좇으리이다 하는 이  좇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말을 한 그 본인은 그 사실을 알았는지 모르는지  모르지마는 우리는 이 좇으리이다 하는 이 말에 대한 뜻을 우리는 정확히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좇는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주와 같이 된다는 말입니다.

주님을 따르는다는 말입니다. 배운다는 말입니다. 그 주님과 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같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 좇는다는 이것은 우리는 다 주님은 좇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주님을 좇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식도 주님의 지식을 내가 따라가야 되겠고  지혜도 따라가야 되겠고 능력도 따라가야 되겠고 사상도 따라가야 되겠고 소망도  따라가야 되겠고 행위도 따라가서 주님을 닮고 본받고 배우고 주님과 같은 그  자가 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주님이 대답하시기를 '예수께서' 58절에 가라사대 여우도 여우도  굴이 있고 여우도 굴이 있고-그전에 우리 배울 때는 우리나라 말이 여호인데  이제는 또 여우가 됐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그러면 주님을 따르는 데에 그  조건을 주님이 들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에 주님의 제자가  되는데에 주님 같은 자가 되고저 하는 데에는 아주 그 어려운 조건이 하나  있으니 이 조건을 네가 해결 짓지 안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여우도 공중에 나는 새도 다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그 종류대로 다 준비한 것이 있지마는 나는 나를 위해서 내 생각대로 내  소원대로 내가 나를 위하여 준비한 것은 나는 하나도 없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요 문제가 해결이 되는 그것이 주님의 제자되는 이 걸음을 걸어  가는데에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자기에게 대한 이 세상일에 대해서 자기에게  대한 세상일에 대해서는 자기는 하나도 그런 조건을 따지지 아니하고 계획도  없고 예수님의 제자되는 이 하나 목적을 두고서 이렇게 하는데에는 세상과  세상에 대해서는 소망을 하나도 가지지 말아야 하는 것을 말 합니다.

 세상에 대한 소망은 하나도 가지지 말고 이 한 목적을 위해서 해야 되는데,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저가 저를 위해서 이렇게 마련 해놓은 이런  저런 모든 그런 이권들과 조건들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그말은  인자는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그 지방에서는 머리 둘  곳이 없다 그말을 우리 한국말로 말하면 어떤 말로 쓰느냐 하면은 '너는 송곳  꼽을 땅도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과거에 이 공장 이 오기 전에는 농사로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 재산이 다 토지가 재산이기 때문에 아 그 사람이 아무것도 없다  하는 사람을 표시할 때에 '그 사람은 송곳 꼽을 땅도 없다' 그렇게 말한 거와  같은 그런 말의 뜻이라고 말을 합니다.

 이러니까 주님은 당신이 당신을 위해서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내게 대해서는. 아버지가 다 하실 것이요 나는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그 명령을 지키는 거 그것만이 내가 했지 나 한 일은 그  두 가지만 내가 했지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데 네가 나를 좋아서  따라 올라고 하니 나는 이런 자인데 네가 지금, 말하는 그것도 네가 알지 못하고  말한다. 나를 좇는 것은 너를 위해서 나를 좇는 것이 유익이 있겠다. 해  가지고서 너를 그 세상적인 방편으로 나를 좇는 것이 유익되겠다 하는 그런  허영과 허욕에 속해 가지고서 그런 소원을 하고 있는데, 나는 나를 위해서는  하나도 내가 준비한 것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너를 위해서는 하나도 준비하는 그것이 없는 것이 내  제자가 되는 그 첫 발자국을 떼놓는 것인데, 네가 나를 위한다는 그거 조차도  너를 위해서 그 위하는 방편을 나를 위하는 것으로 너를 위하는 방편 어떤,  사람은 공부를 많이 하는 것으로 자기를 위하는 방편, 어떤 사람은 기술을  배움으로서. 어떤 사람은 권세를 잡음으로써 자기를 위하는 방편을 취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네가 내 제자 된다는 그것도 너를 위하는 한 방편 중에 가장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하면 안된다. 내 제자가 되는 걸음은, 내가 나를  위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조그마한 것도 없다.'  이러니까 네가 내 제자가 된다고 하면 네게 대해서는 네게 대해서는 아야 모든  것을 다 주님에게 맡겨 놓고 네가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평안하거나 고난스럽거나  네가 천대를 받거나 존대를 받거나 그 네 형편 그 처지야 어찌 되든지 그것은  상관하지 말고 다만 주님의 제자 나를 따라 오려는 것 나를 배우려는 것 요거  하나만 네가 가지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배워서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요 또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이 우리 소망이요, 주님의 형상은 아버지의  형상인데 주님의 형상 입는 것이 곧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니 예수님의  제자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한 목적만 두고서 이 예수님의 제자가 만들어지는데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만들어지는 데에는 그 하나님처럼 거룩하고 온전하고 깨끗한  자가 만들어지는 데에는 참 하나님에게 기쁨이되고 영광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주실려고 우리에게 대해서 우리가 어떤 자를 만들든지 당신의  계획이시니까 사람마다 다 구원은 같은 구원은 아니니까 자기에게 그 분담된 이  구원을 이루고저 하면은 이 구원 하나만 목적을 하고 네가 따라와야 되지 이  구원을 이룬다고 하는 네가 땅에 있는 이러 저런 소망을 그것을 이루는데에, 그  이루는 방편이 이루는 방편이 세상에 수많은 방편이 많지마는 오병이어로  오천명도 먹이고 또 죽은 자를 살리기도 하고 하니까 이분이 능력 있으니 이분을  따라다니면서 내 욕망을 이루는 것이 제일 슬기로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고서 나를 따라서는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따르는 것은 곧 아버지의 그 신성을 배우는 것이요, 또 그  형상인 예수님의 그 속성을 배워서 신인 양성 일위의 그 속성을 배워 가지고서  예수님 같이 되어지는 것이니 예수님과 같이 되어지는 이것이 참사람이 되는  것이요 하늘나라의 영광의 나라에 구원을 얻는 것이요 모든 피조물들의 중보자  제사장이 되는 것이요 선지자가 되는 것이요 왕이 되는 것인데 이런 것은 물질  가치가 아니고 권세 가치가 아니고 땅에 있는 이런 것들의 가치가 아닌 이런 그  고차원에서 이 구원을 이룰라고 네가 하면은, 첫째 땅의 소망을 네가 버려야  된다. 땅의 소망을 버리고 또 너를 위해서 그 준비하는 그것을 버리고 너를  위하는 것을 버리고 땅의 소망을 버리고, 어떤 형편의 처지에 이르든지 이제 이  구원만을 바로 이루고 참사람만 되고 온전한 사람만 되고 하나님 앞에 복 받는  가정만 되고 복 받는 개인만 되고 복 받는 교회만 되고 하나님이 만족하고  기뻐해서 참 모든 불신자나 마귀들이 볼 때에도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기까지 이렇게 되는 이 구원을 이룰라고 하면은 이 구원 이거 하나만을 소망을  가지고 네가 하지 안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그 가난에서 가난에서 이루어질 그 부분도 있고  부요에서 이루어질 부분도 있고 한없는 억울함에서 참음으로 이루어질 그런  부분도 있고 억울하게 매장을 당하는 그런 데에서 자기가 견디므로 구원을  이루어질 그런 부분도 있고 아주 지극히 존귀하게 되어지는 존귀한 그런  자리에서 구원을 이룰 그런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우리가 주님 같은 그런  이 구원을 이루어서 참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나의 기뻐하고 사랑하는  자라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거늘' 말씀하시기까지 그렇게 온전함을 이루는  그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하나님이 십자가에 대속해 주신 것도 이것이  목적입니다.

 우리를 뭐 홍포입은 부자와 같이 돈 많고 권세 많게 살다가 죽어서 지옥 가는  그런 세상에서 속아서 어리석어 속아서 그렇게 공연히 헛되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런 자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하나님처럼 온전하고  지혜로와서 지금도 그러하고 천 년이 가도 후회 없고 만 년이 가도 후회 없고  억만 년이 가도 후회 없고 영원히 가도 후회 없는 이런 참 옳고 바르고 참되고  깨끗한 이런 구원을 우리가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땅위에서 인간에게 닥쳐온 천태만상의 모든 형편들이 있는데 그 모든 형편이 다  내 구원을 이루는 데는 다 쓰여 질는지 모른다. 그 모든 형편이 내 구원을  이루는 데는 쓰여 질는지 모른다. 네가 세상에서 제일 아픈 사람을 무슨 아주  모진 병이 들어 가지고서 그 늘 고통하다가 세상을 떠나는 그런 순서도 네게는  있을는지 모른다. 네가 암병이 걸려 가지고서 고생하면서 몇 해든지 근근히 바짝  말라 살다가 가는 그런 형편이 있을는지 네가 억울하게 매장을 당하되 일 년  이태 그 억울하게 매장을 당해 가지고 헤어나지 못하는 그런 매장 가운데에서  네가 참고 견디고 거기에서 인내를 가지고 거기에서 믿음을 지킴으로 이룰 수  있는 그런 일도 있을는지 모르기 때문에, 네 구원에는 땅 위에 어떤 형편과  사정과 처지가 필요한지 너는 모른다.

 주님은 그것을 다 아시기 때문에, 그 주님이 모든 것을 만들어 가지고 너에게  적응시키는 것이니까 아야 각오하기를 나와 같이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내가 나를 위해서 준비할  요런 준비 계획 나를 위해서 요런 계획 나를. 위해서 요런 거 그런 거 하나도  없다. 없고 그래 또 해놓은 것도 하나도 없다. 전부 해놓은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 사랑하는 걸 해놨고 주님에게 순종하는 걸 해놨고 주님의 뜻대로  하는 것이 해놓아진 것은 전부 그것뿐이지 딴거는 없다.

 이것을 밝히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사람은  자기의 세상과 세상에 있는 처지는 주님이 나보다 잘 아시고 나를 사랑하셔서  잘해 주시기 때문에 당신에게 탁 맡겨 놓고 그저 부요가 오면 부요에서 우리  구원 이룰 것이고 가난이 오면 가난에서 구원 이룰 것이고 고독이 오면 고독에서  구원 이룰 것이고 사형이 오면 사형에서 구원 이룰 것이고 존귀가 오면 존귀에서  구원을 이루어서 우리는 다만 우리 구원을 이루는 이 목적만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루는 유일한 방편인 주님 시키시는 대로 하는 그것만이 우리 목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땅의 것과 땅에 있는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주님의 제자되는 주님의  형상을 입는 요 하나 소망만 주일학교 학생도 그러하고 부인도 그러하고 독신도  그러하고 노인도 그러 하고 젊은이도 그러하고 다 주님의 그 형상을 이루어가는  요것만이 소망으로 삼아야 됩니다. 요것만이 소망으로 삼는데에 거기에는 어떤  형편이 쓰일란지 모르기 때문에 세상에 이런 형편이나 저런 형편이나 어떤  형편으로 주님이 바꾸어 가도 내게 필요해서 바꾸어가는 것이니까 그 형편에  내가 할 일은 주님이 나에게 인도하시는 고 인도를 따라서 믿음 지키는 거  복종하는 거 그것 밖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단일 소망을 가지고 나아가면서, 저 먼저 새벽에 그 ○장로님이  설교할 때에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생명이 있는 믿음과 죽은 믿음을 구별하는  데에는 모든 주위와 환경의 자기 현실에게 피동되는 것은 죽은 믿음이요. 어떤  현실에게도 피동되지 안하고 영감과 진리에게 피동되는 그것은 산 믿음이라. 또  자기가 땅위의 온 천하 것을 다 주마고 말해도 그게 절 한번만 하면 다 주마  해도 그것이 아니라 다만 주님의 형상을 입어서 주님의 그 구원, 주님이 주시는  구원, 우리의 그 행위구원 자체의 그 성화구원 건설구원 이거 하나만이가  소망이기 때문에 이 소망 하나만 언제든지 가지고 주님에게 복종하는 이  하나만이 방편으로 삼고 우리가 대적할 것은 어떤 현실에게라도 거기에 피동되지  않을라고 하는 것이 안 죽을라고 하는 것이요, 피동되지 않고 영감과 진리에  피동되는 그것이 살므로 통과 된 것이기 때문에 생명이 승리한 면류관을 얻는  것이라.' 하는 그런 뜻의 설교를 했는데 좋은 설교를 했습니다.

 우리는,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집이 있지마는 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다'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어떤 데 그렇게 대답을 했느냐? '나도  주님을 좇겠나이다,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겠나이다, 주님을  배우겠습니다. 주님을 본받겠습니다. 주님을 닮겠습니다. 주님과 같은 주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지극히 큰 포부를 말했는데 이 포부가 우리 믿는 사람의  포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욕망을 굳게 잡고 이 욕망 하나를 가지고서 살아야 됩니다.

자기는 그저 이 욕망 하나를 가지고서 살면서 세상에 어떤 욕망이 많이 있어도  욕망을 변동하면 안 됩니다. 욕망을 변동하지 안하고 이 한 유일의 욕망을  변동하지 안해야 된다는 요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되겠고 이 욕망을 변동 안  해야 되겠고,  또, 이 욕망을 이루는 데에는 어떤 그 현실이 필요한지 나는 모르기 때문에  당신이 어떤 현실을 주시든지 나는 그 현실을 달게 받아서 어떤 현실이 오든지  말든지 그거는 나와 상관치 말고 다만 그 현실은 주님이 내 구원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적절한 것을 당신이 주셨기 때문에 그 현실에 대해서는 나는 달리  평가하지 말고 나 할일은 거기에서 뭐인가, 나 할일은 거기에서 뭐인가? 주님이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다만 그들이 와서 움직이는데 따라서  내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며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키는가 하는 그것만 나타날  것뿐이다. 나 할 일은 요거 두 가지만 나 할 일이기 때문에 요 두 가지만 하니까  그들이 요 두 가지를 행하는 데에 쉽게 하면 요 두 가지 행하는 그 빛이 적게  나타날 것이고 그들이 이 두 가지를 하지 못하게 아주 최대의 어려움을 가지고서  방해를 하면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는 것이 최대적으로 나타날 것이고  그것뿐이지 딴거는 없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제자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인데, 이 소망을 가지는 데에는  우리가 단단히 결심하고 가질 것은 '이 소망은 하나만 가지라, 이 소망을  변동하지 말아라, 요 소망을 변동하게 하려고 온 세상이 다 이렇게 저렇게 한다  할지라도 너는 모든 오는 현실에서 유일한 이 소망을 고 현실에서 달성 달성할  것이지 고 현실을 양식으로 요 소망이 양식으로 잡아먹어서 고 현실을 이 소망이  이용을 해서 이 소망만 키워 나가고 이 소망만 견고해서 나갈 일이지 그 모든 그  현실에게 너는 유혹받고 피동되지 말아라.'  그러면 그 모든 현실에 대해서 현실은 내 유일한 소망을 달성하는 한 귀중한  재료로 주님이 그와 같이 주신 것이요 귀중한 연습으로 주신 것이요 귀중한  시련으로 주신 것이요. 연습으로 주셨으면 연습할 것이고 시련으로 주셨으면  시련할 것이고 또 그것을 이용으로 줬으면 이용할 것이고, 거기에서 또 이  소망이 더 견고해지라고 했으면 견고해질 것이고 요 소망을 놓지 말고 거기에  너는 아무런 평가하지 말아라. 네게 오는 현실은 어떤 현실이든지 이용 가치도  꼭 같고 이용가치도 꼭 같고 또 그 이루어지는 그 결과도 같고 네게 대해서는 꼭  같은 것이지 다를 거는 없다. 꼭 같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할 일은 뭐이냐? 거기에 너 할 일은 두 가지만 할 일  이다. 두 가지 할 일은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일, 거기에서도 주님을 사랑하는  일, 또 거기에서도 주님을 따르는 일, 주님을 사랑해야 소망하고 주님을 따라야  그분의 제자라야 배워지지요. 이러니까 어데서든지 주님 사랑 요동치 안하고  주님 따르는 일 요동치 아니하고, 뭐하려고? 주님의 제자되는 이 소망 이거 하나  달성하기 위해서 이렇게 나가야만 우리 신앙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개는 다  그렇게 돼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자기가 참 주님의 제자되는 거, 주님의 그 신격을 신성을 따라서 된 예수님의  인성과 같이 되어져서 우리도 하나님의 감화와 진리의 도움을 힘입어서 우리도  예수님의 인성이 천상천하 모든 피조물 위에 있는 중보자가 된거와 같은  예수님의 그 인성과 같은 고 인성을 우리가 입는 이것이 성화 구원이요  건설구원이요 행위구원이기 때문에 이것만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요거 하나만 잡아야 됩니다. 요거 하나만 잡고 놓지 말고 요거 하나만 잡고  놓지 말고 요거 하나를 이루는데에는 하나님께서는 온갖 천 가지의 천 가지의  현실이 여기에 필요한지 만 가지 현실이 필요한지 무슨 현실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는 일방적인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극히 큰 구원을 소망해 이루어  나갈라고 하면서 내가 아는 대로 이 구원 소망 이것은 새사람의 소망인데, 이  육덩이 고기 덩어리의 욕망으로서 등 따시고 배부르고 잘 먹고 잘 입는 이것을  원하고 있으니까 이 욕망을 원하는 거와 정 모순 된 것입니다. 정 모순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땅에 있는 이 소망을 가지고는 이거 이루지 못합니다. 땅의  소망을 완전히 버리고 땅의 소망은 뭣 때문에 버리느냐? 이 하늘의 소망 이  소망을 하나 위해서 땅의 소망은 완전히 버려야 됩니다. 완전히 버렸을 때에는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주님이 보실 때에 내게는 어떤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열,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백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천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어떤 극단의 종류의 현실이 필요한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이 이것을 예정하셨고 당신은 아십니다. 당신은 생명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졌고 당신은 창조주시기 때문에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일렀으리라. 제자들이  근심하는 것 보고 아버지 집에 가서 있을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내가 왔다.

만일 그렇지 안한다면 내가 너거를, 사랑하니까 엿세 동안에 만든 그까짓 거야  다 줄 수도 있지 않느냐, 다 줄 수도 있지 않느냐?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했습니다.

 요러니까, 예수님의 형상을 입는 예수님과 같이 된 예수님과 같이 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그 예수님의 모형을 입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의 찬미가 돼서 아버지에게 만족해서 모든 만물이 다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 주라 칭한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의 형상을 입어서 주님의  형상을 입어 주님의 제자가 되어 우리의 모든 것이 모든 피조물들이 우리를  보고서 아, 우리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해서 우리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어서 모든 피조물이 볼  때마다 우리를 보고서 아 아 하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영광의  찬미가 될 수 있는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천상천하의 모든 피조물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실 때에 우리가 받아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착취하고 가해하는 거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것을 다 만족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 수도  있고 그들을 영원히 다스려서 행복되게 할 수 있는 이런 제사장 선지자 왕이  되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예수님이 승리하시고 아버지의 보좌에 함께 앉는  거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승리하고 승리하신 예수님의 보좌에 함께 앉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히 제사장하고 영원히 왕노릇하고 영원히 선지자  노릇하는 이 구원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그 인격성, 예수님의 인격성, 예수님의  지능성, 예수님의 인격성, 예수님의 모든 기능성, 예수님과 같이 기능면이나  인격면이나 모든 속성면이나 모든 계획면이나 모든 것이 예수님과 꼭 같은 자가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은 기본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거 아니고  건설구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첫째 우리 소망이라. 이 소망을 우리가 바로 잡아야  됩니다. 이 소망을 굳게 잡고 요 소망을 예수님의 제자되는, 예수님의 모형이  되는, 영광의 찬미가 되는,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떻게, 아버지를 보여 달라 하느냐' 예수님의 꼭 같은 그런 인격성  그런 그 모든 면에 그 생활도 예수님과 꼭 같고 예수님의 모형이고 모든 자체의  기능도 예수님의 모형이요 인격도 예수님의 모형이고 연행 심사도 예수님의  모형이 되어지는 요것이 우리의 구원의 소망입니다. 요것이 언행 심사가  예수님과 같고 우리의 기능이 같고 우리의 소원이 같고 우리의 사상이 같아서  예수님과 꼭같이 되어지는 요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요것이 기독자의  소망입니다. 요것이 건설 구원입니다. 한 말로 말하면 건설구원인데 요 소망만이  우리 소망이라, 요 소망, 하나만이 우리 소망이라는 요 단일 소망으로 완전히  결심을 하고서 요 단일 소망으로 완전히 축소시켜 가지고서 단일 소망으로  완전히 확정을 지어야 됩니다. 요것이 흔들리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자꾸 착각을 합니다. 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거 저런 거  방편으로 하시지요. 방편으로 하시는데 그래도 우리 믿는 사람이면 다 그런 것도  자기를 연구해 봐야 될 것입니다. 만일 어떤 때 세상에서 좋은 것도 있고 반가운  것도 있고 기쁜 것도 있고 이래 되는데 그럴 때에 우리가 비판해 봐야 됩니다.

비판해 볼 때에 '야, 그러면 주님과 주님에게 대한 이 소망 이 소망을  버리고라도 이것을 취할 수 있으면 취해야 되겠느냐?' 어림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몰라도 저는 이럴 때에 자, 이게 좋은데 주님과 주님에게 대한 이  소망 이 구원을 버리고도 취하였겠느냐? 버리고도 가치로 여길 거 있느냐?  버리고도 내가 좋아할 것이냐? 버리고도 내가 기뻐 할 것이냐?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이 '주여 당신이 주시는 이 구원의 소망 이것을 두고 이것을  두고 이거 외에 않게 뭐 있습니까? 이것을 주고 딴거 취할 만한 그런 땅의  소망이 있습니까?-하나도 없다는 것을 당신이 볼 때에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하는 그것을 우리는 확실히 단정할 수 있습니다. 단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천 번이든지 만 번이든지 단정할 수가 있습니다. 다 그거는 돼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가다가 유혹을 받아 가지고서 이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 유혹을 받아  가지고 이 소망에 손해 가는 일을 우리가 할 때도 많고 이 소망을 손해보는 일도  할 때도 많고 이 소망을 상관없는 그런 이 소망을 잊어버리고 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막상 이 소망을 버리고도 이것을 취해야 되겠다 하는 것이 있느냐? 아마  그런 것은 여러분들에게도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예수님이 주신 이 소망을 버리고도, 요거는 좋으니 이것을  이것을 버린다면은 예수님의 주시는 이 구원의 소망을 버리지 이것을 버릴 수가  없다' 예수님의 구원의 이 소망보다 중량이 자기에게 행동할 때에는 그와 같이  하지마는 평가적으로 해 가지고서 이 중량이 내가 가진 보는 이거 무슨 어떤  중량이든지 지식이라든지 명예라든지 지위라든지 권세라든지 행락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가정이라든지 물질이라든지 어떤 것이라든지 예수님께 대한 이  구원의 소망 이 소망을 버려도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 하는 그런 것이 있는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봅시다. 없지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다 우리 믿는 사람은 벌써 눈을 띄어놨오. 눈을 띄어놔 가지고서 이제 인생이  죽는다 죽고난 다음에 어찌된다. 부활의 심판이 있다, 언제든지 죽는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미인이라도 저 미인도 저거 엄마하고 옆에 앉았으면 아무리 저  미인이라도 얼마 안 가서 저 쪼글쪼글한 할마이 아이구 부어서 송장같은 할마이  할마이같이 될 저 미인이라 하는 걸 그걸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금 어린애가  아주 도톨도톨하이 꽃봉오리 같아도 그거 보고서 아주 나같이 늙어서 털털하이  이래 가지고 송장 비슷한 옆에 사람이 있으면 아, 저거나 내나 저거나 그거나  얼마 며칠 있으면 저 송장된다는 걸 우리가 알기 때문에 벌써 알기 때문에  우리는 근시자 아니고 멀리 보는 그 모든 면을 보는 원시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미혹에 들지를 아니합니다. 여러분들이 공연히 고만 이리 살다보면 마귀란  놈 가운데에 분주한 복잡 가운데에 내가 이걸 놓고도 이것보다도 이 중량을 크게  높여 가지고서 산다고 이렇게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주 비판해서 혹 '주여 내가 이 시험에 들어서  이렇지마는 이 구원과 비교는 안 됩니다. 이 구원에 만일 흔들리고 문제가  된다면 이까짓 거 당장에 버릴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돼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유일한 구원의 이 유일한 소망을 우리는 굳게 잡아야되고 이거  첫째, 고 다음에 이제 오늘 문제이라면 '보자 이 세상에서 사는데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그라면 어떻게 그래 살 수가 있느냐? 하는 여러분들의 문제에  부담이 많이 갈 줄 압니다. '유일한 구원의 소망 요 구원의 소망, 하나만  가지라'하는 요것만 요것만 오전 설교만 듣고 말면은 그 사람 '그러니까 누가 다  믿을 수가 있어. 어떻게 할 수가 있어.' 낙망하는 사람들이 많을 터이니까  이러기 때문에 오후 설교를 계속 들어야 이거 바로 다 알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주님의 제자가 되는 우리의 이 성화구원  건설구원 주님과 같이 되어지는 주님의 제자가 되는 이 소망 하나를 우리의  소망으로 가지고 요동치 안해야 돼. 이 소망은 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 소망은  바꿀 수는 없습니다. 혹 망령되게 이 소망을 두고서 이런 거 저런 거 하고 이런  장난을 하고 이런 그런 모든 노릇을 하기는 하지마는 떡 '이 구원이냐? 이  구원만 네게 없어진다. 이 구원 버린다. 이 구원 너는 안 준다.' 이 구원의  문제가 될 때는 그까짓 것이 눈에 안 보이는 것이 성도들입니다. 중생된 사람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유일한 이 구원을 소망으로 두고, 둘째는 이 구원을  소망으로 둔다면 이루는 방편에는 이 구원의 어떤 현실이 필요한지 우리는  모르니 세상의 역사에 나타난 모든 인간의 모든 비참한 형편도 있고 가련한  형편도 있고 존귀한 형편도 있고 여러 가지 종류의 형편이 있으니까 내 구원을  이루는데에는 어떤 어떤 그 형편이 내게 필요한지 나는 그걸 모릅니다. 나는  그걸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나는 모르니 주님 어떤 어떤 형편을 내게에  이용하시라도 내 구원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형편은 다 이용해 가지고서 내  구원을 완성시켜 주십시오' 하는 그것을 우리가 자꾸 기도해야 되겠고 그거 자꾸  우리가 새김질해서 우리가 지식적으로 상식적으로 견고히 가져야 될 것이라  말이지오.

 그라고 고라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이런 저런 그 현실에 어떤 현실이 오는데  그 현실에 따라서 내가 피동되기 쉽다 그 말이오. 아무리 해도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슬픈 일이 오면 그만 슬픈 일이 오면 슬픔에 피동이 돼 가지고서 이 구원을  손해 보는 일이 많고, 어떨 때는 기쁜 일이 있으면 기쁨에 피동돼 가지고서 이  구원에 손해보는 일이 많고, 어떨 때는 그 많은 형통의 재물이나 그런 게 앞에  턱 닥치니까 고만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서 이것이 구원을 잊어버리기 쉽고, 또  어떤 그 두려운 일이 오면 그 두려움에 피동돼 가지고서 이 구원을 손해볼 일이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어떤 것이 오든지 우리에게 닥쳐지는 현실은 이 구원에 필요한 것을  당신이 구비시켜 가지고서 큰 힘 들여서 만들어 준 것이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독침을 가지고 왔다면 공산주의를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을 여기에까지 보여  가지고서 내한테까지 오기까지 하는데는 얼마나 순서와 애로와 여러 가지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나에게 독침 온 요 현실도 내 구원을 위해서 주님이 요게  필요하기 때문에 나에게 보내 주신 것이니까 요 필요한 현실인 줄 알고 그  필요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요 현실에 피동되지 안하고 이 현실에 유혹받지  안하고 그저 이 현실에 피동되지 안 하고 유혹받지 안하고 이 현실은 착각하지  안하고 내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 하는 요것을 견고히 잡자 말이오. 우리  현실은 와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는 그 착각으로서 원망 불평 시비가 나는  것인데 그런 착각이 우리에게 없도록 하고, 좋든지 나쁘든지 우리는 그 현실에게  피동되지 아니하도록 우리가 결심을 하고,  그러면, 거기서 뭐 할 것인가? 뭐 할 것인가? 내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현실을 내 구원을 위해서 이용을 한다. 그 ○장로님이 그런 설교  했습니다. '그 현실을 우리는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잡아먹어야 합니다. 그  현실을 우리는 밥으로 먹어야 합니다.' 그 좋은 말했습니다. 그 성경에 그와  같이 말씀해 놨습니다. 그 현실을 내 구원을 위해서 이용하고 내 구원이  튼튼해지도록 잡아먹고서 그걸 먹고서 살인의 구원이 튼튼해 살이 찌도록 내  현실에 잡아먹고 현실을 이용하도록 하고  그러는데는 잡아먹으려면 어떻게 잡아먹으며 이용하려면 어떻게 이용하는가? 그  현실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거, 주의 명령에 복종하는  거 요것만 하면 그 현실은 나에게 좋은 영양이 됩니다. 천하의 제일 아주  불행이라는 그 어려움이라는 불행이라는 그런 조건이라면 대단히 영양이 많이  들어 있는 그 현실이기 때문에 고 현실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게 복종만  하면은 고 현실 하나 잡아먹어서 내 구원을 이루면 이 구원이 영광이요  존귀입니다.

 그러기에, 왜정 말년 때에 신사 참배 고 하나 잡아먹고 난 그 사람들이 해방  후에 얼마든지 영광 있게 구원을 영광 있게 하지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그때 뭐  해방 후에는 한 상동 목사님, 주 남선 목사님 손 양원 목사님 그런 분들  그전에는 뭐 보지도 안했지마는 그라고 난 다음에 그만 그들은 참 하나님의  대리자요, 한 상동 목사님이나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참 천사처럼  여겼고 주 남선 목사님도 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손 양원 목사님도 다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거 잡아먹고 자랐기 때문에 영광이라 그 말이오. 또 6·25도  잡아먹고 앞으로는 세상에서 그와 같은 일을 사람에게 광고된 것도 있지마는  광고 안 된 것도 많이 있으니까 그런 그 어려운 현실을 잡아먹고 실력 강한 그  구원을 이루어 가지고 있는 그자의 하늘나라의 영광은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땅에 있는 형체도 있고 하늘에 있는 형체도 있는데 모래 알도  한 형체요 하늘의 태양도 한 형체인데 모래알 한 개의 그 가치와 권위와 하늘에  있는 태양의 가치와 권위와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이와 마찬 가지로 부활한  자의 영광도 이와같이 차이 있다 말씀했습니다.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걸 알고 유일한 소망을 굳게 잡고 '이 구원을 이루는데에는  무엇이 필요한지 나는 모릅니다. 당신이 아니까 주여 내가 무지하다 할지라도  나는 당신이 주시는 현실이 내 구원에 없어서는 안 될 필요 할 양식으로 알고  필요할 재료로 알고 알고 있사오니 어떤 현실을 줄지라도 하나도 지체하지  마시고 빠지지 마시고 다 현실을 주시고 그 현실을 주실 때에 내가 그 현실을  양식처럼 잘 이용해서 이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다만 거기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계명을 지키는 것, 내가 주관으로 행동하려면 기뻐하고 감사할 거 온전히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그저 주님을 사랑하고 계명 지키는 거 요것을 하게 해  주옵소서.' 요 세 가지를 하게 해 달라고 우리는 하나님에게 간구합시다.

 우리가 허탄한 걸음 걸어봤자 소용없습니다. 뭐 이거 저거 걷는 그것이 다  어리석은 걸음이지 오늘이라도 그만 세상을 떠나면 그만입니다. 주님 오시면  그만입니다. 어리석은 걸음이요, 이 걸음을 걸으면 모든 것이 다 잘 됩니다. 안  되는게 아니오. 이 걸음 걸은 사람은 또 굶어 죽어야 됩니까? 그 주님을 위해서  굶어 죽었다고 하면은 그 영광이 얼마나 큰 것입니까? 우리는 영원한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 복이 우리에게 오지도 안할 터인데 공연히 주님이  하루도 굶김을 주지도 안할 것인데 제가 죄를 지어서 굶었으면 굶었지 이런데  공연히 주를 위해서 굶으리라 죽으리라 이렇게 어리석게 이렇게 생각지 말고  자기를 과대평가하지 말고 오늘 오전에 꼭 요 세 가지를 잡읍시다.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이 구원 이루는 거 아니면 우리는 살 필요도 없고 먹을  필요도 없고 잘 필요도 없습니다. 뭐 시집 갈 필요도 없고 장가 갈 필요도 없고  살 필요도 없습니다. 이 구원 이거 하나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사는 자이기  때문에 이 구원 하나를 우리의 소망으로서 단일 소망 단일 소망 유일 소망 요  소망을 놓지 맙시다. 요 소망을 굳게 잡고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하지마는  좇는다 하지마는 좋으면 나머지기 두 가지가 있어야 되는데 그래도 그 사람들이  따라왔는지 저거 길을 도망을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단일 소망을 가지면 요 소망을 달성하는데에 어떤 그 현실이 필요한지 나는  모르나 당신은 아니 어떤 현실이든지 여기에 필요한 현실을 줄 때에 그거는 다만  가리지 말고 다 이 구원을 위해서 이용하는 사람이 되어 그 현실을 마치 배고플  때에 좋은 음식이 오면 침 넘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 구원에 대한 욕망을  가지면은 어떤 현실이 올지라도 그 현실에 대한 불만 불평이 아니고 그 현실에서  온전히 기쁘게 여겨 이 현실을 먹고 또 이 욕망을 이루겠다 하는 이 기뻐하고  즐거워 하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 줄 알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셋째로는 그것들에게 피동되지 말고 아버지를 사랑하는 거와 주의 계명에  복종하는 거 요것만 하고 거기에 피동되지 안하는 거 요 세 가지를 우리가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되겠습니다. 요것은 언제든지 요 기본 방법이기 때문에  기본 방법이기 때문에 이 방법은 뭐 밤이나 낮이나 어디서든지 우리는 이것을  가져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주를 따르겠나이다.' 할 때에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버지를  장사하게 해주옵소서.' 하는 그 대답을 했고, 또 '주를 따르겠나이다.' 하다가서  주님이 말씀하시니까 그 가족을 작별케 해주옵소서 그런 문제 난제 둘을  말했습니다. 난제 둘을 말했는데 난제 둘을 그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아야 유일한  소망으로 요 현실을 양식 삼아 이용해 가지고서 그 주님을 사랑하고 복종하는 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모르면 무식하고 모르면 안 됩니다. 여기에 뭐 뭐꼬? 장질부사 장질부사 거석할  때 위생할 줄 모르니까 장질부사에 대해서는 위생할 줄 모르니까 그때  장질부사로 사람을 많이 죽었을 때에 저 거창서는 사람 넘어다니는 이  잿만당마다 새끼를 이래 주욱 달아놓고 낫을 이래 이래 막 틀어 가지고 이래  놓고 이래 고아 놨습니다. 그러면 장질부사 쫓는다고 말이지. 그래 가지고서  사람 오면 거석한다고서 이래 가지고 했는데 의사들은 그때에 그 장질부사  방안에 암만들어가도 괜찮다 그 말이오. 암만들어가도 괜찮아. 그 사람들은  괜찮은데 별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째 그렇소?' 이래 물으니까 장질부사에서는  먹는 것만 끓여 먹고 또 이 손으로 이래 입으로 들어가는 그 구멍이니까  날라다니는 게 아니고 그거는 구멍이니까 그저 싹 씻고 소독하고 그 뭐 끓여서  이래 먹으면 암만 병자하고 같이 있어도 상관이 없다. 왜? 전염이 아니고 균이  와 가지고 그렇다 하니까 아, 의사들은 위생할 줄 아니까 겁내지 안하고  편리하고 수월한 그 길이 있었는데 그 모르는 사람들은 고만 겁이 나 가지고 그  동리 근방에도 못 갑니다. 먼 데 가서 만나도 아이구 이 전염 와서 죽을라  이랬습니다.

 그것 모양으로 우리가 진리를 바로 알면 바로 알면 그 진리를 이용해 가지고서  우리가 능히 자유롭게 잘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 모르면 그만 우리가 떨어  가지고서 그 날뛰기는 날뛰지마는 위생이 바로 되느냐? 모르는 사람이 아무리  범위 넓게 애를 쓴다고 해도 외나 전염될 전염은 되고 말지 그걸 방비를 바로 못  한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후에는 그 다음을 증거를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오전에 요 세  가지를 놓지 말고, 여러분들 이 세 가지를 들을 때에 쉽게 듣지 마십시오. 쉽게  듣지 말고 '아, 나는 이 소망을 둘로 하지 않겠다 유일한 소망을 가지겠다. 이게  내 영원히 구원이 망하고 흥하는 것이니까 망하고 흥하는 것이 뭐 이거 둘 서이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고 유일한 이 소망 하나만 가져야 되겠다, 우리 부부는  유일한 소망 하나만 가지도록 하자 우리 가족은 유일한 소망 이 하나만 가지도록  하자, 우리 교회는 유일한 소망 하나만 가지도록 하자, 우리 민족은 유일한 소망  하나 많든지 적든지 그 전부는 다 유일한 소망 단일 소망 요것만 가지고 단일  소망만 가지고  둘째 알 것은 무슨 현실이 있는지 몰라. 내가 이렇게 부강하다가 당장에  거지되는 현실이 필요한지 몰라. 나는 그거 몰라. 아이구 오면 어쩔꼬? 그게  만일 내 구원에 필요한데 그것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거 없이 안 될 것 같으면  그것도 주셔야지, '주여 당장에 올라가다가 푹 떨어져도 내 구원에 필요하면  나는 이해 못해도 내가 그래도 새김질하면 이해할 터이니까 주십시오. 또 푹  올라가면 내가 날라갈 듯이 날뛴다 해도 그것도 필요하면 주십시오.'  '그래 가지고 그때에 올라가든지 내려가든지 어떻게 되든지 내 구원을 위하여  이용하도록 주님이 주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이용을 하고 그것에게  이용당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이용을 그것에게 이용을 당할라하면 그것으로  피동되는 것이 이용당하는 것이고 그것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그걸 이용하려고  하면은 거기에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의 계명대로 행하는 그것이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니까 요 이용해 주옵소서.' 요 세 가지를 굳게 잡고 나갑시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현실에게 피동되는 이런 못난 사람 되지 맙시다. 현실에게 피동 되는  못난 사람 되지 맙시다. 우리는 현실을 양식으로 먹을 수 있는 이 잘난 사람이  됩시다. 유일한 소망을 놓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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