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4 13:22
원시하는 자가 되라
본문 : 벧후1:4-11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이 신앙생활 하는 데에 어제 아침까지는, 순서를 우리가 잘못 잡으면 우리가 방황하고 한정된 그 기간에 곧은 길을 찾지 못하면 그만 허송세월하기 쉽습니다. 이 물질의 이치도 바른 길이 있는데 하물며 신령한 이치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고 밝아지는가?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육신의 눈도 어두워집니다. 그말은 무슨 말인 고 하니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눈이 바르고 똑똑하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자꾸만 자기에게 당할 그 낭파를 모르고 자꾸 낭파될 일만 자취해서 자멸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신앙생활을 이리 저리 치우치지 안하고 모든 신앙생활을 이렇게 순서를 잡아서 구비하게 해 나갈라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오늘 아침에 봉독한 말씀에는 소망을 잡고 힘써 신앙생활 해 나가라 그것을 여기에 초두에 말씀했습니다. 어제 아침에는 우리는 복을 생각해야 된다 했는데 복이나 소망이나 다 비슷한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생각해서 여기에 신앙의 여덟가지 면을 말했는데 그런 면을 힘을 써라.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데 힘을 써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하면' 이런 것을 네가 힘쓰는 이 면에 힘쓰는 일을 힘을 쓰면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으면 소경이라"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우리는 신앙생활에는 힘쓰는 것이 있어야지 힘쓰지 안하면 안 됩니다.
자기에게는 힘쓰는 일이 있어서 이 신앙생활에 마음이 앞서 가고 몸이 뒤따라가는데 언제나 신앙 생활하는 데에 몸이 따라가지를 못하고 몸이 감당치를 못하는 이런 정도로 늘 마음에 힘씀이 앞서야 됩니다. 사람이 마음에 힘씀이 자고 게을해져 있으면 몸은 싱싱하게 있지만 몸은 싱싱하지만 몸의 힘이 모지랄 만치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그런 일이 안 됩니다. 힘은 암만 있어도 신앙생활이 안 됩니다. 그 신앙생활은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언제나 성령을 따라서 영이 가고. 또 영을, 중생된 그 영을 따라서 마음이 가고, 성령과 영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 마음을 따라서 몸이 움직일라 하니까 몸은 언제든지 둔하고 약합니다.
이러니까, 몸이 언제나 모자랍니다. 뭐 이십 세 되는 그런 청년도 자기 몸의 힘이 모자랄 만치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것이 그것이 자기의 걸음을 정상적으로 걷는 것이고, 삼십 세 된 사람도 그러하고, 사십 세 된 사람도 그러하고. 오십 육십 칠십 이상의 사람들도 다 그러합니다. 자기의 힘이 육체의 힘이 모자랄 만치 그렇게 마음의 힘, 마음의 힘은 어떤 것인고 하니 마음이 이런 것 저런 것 해야 될 것을 깨달으니까 그 깨달은 일을 하려고 하니까 몸이 따라가야 되니 몸의 활동이 생기게 되고, 또 마음이 표준하고 원하는 그것과 이 몸이 따라가지 안해서 하지 못했으니까 항상 몸의 힘이 모자라는 이런 정도의 힘쓰는 그것이 정상입니다.
그러기에 아주 젊은 사람이 이 성직을 맡아서 무슨 반사 직을 맡는다든지 유치반이나 중간반이나 반사 직을 맡는다든지 무슨 전도사 직을 맡는다든지. 또 그라면 다른 어떤 성직을 맡는다든지 또 이 세상에 무슨 다른 직책을 맡는다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할 때에 그 사람이 마음의 활동이 그 몸의 활동보다 앞서서 몸이 따라가지 못하는 정도의 그 활동을 가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저가 회사에서 일을 하면서도 '오늘 내가 오늘 하루는 이렇게, 이렇게 내가 신앙생활하겠다.' 이래 생각했는데 해 보니까 그게 안 되니 또 잘못됐다. 또 하루 종일 신앙생활하고 생각하니까 아, 내가 이렇게 할 걸,' 그러면 자기는 힘이 모지랄 만치 했는데 마음에 늘 잘못됐다. 잘못됐다 그렇게 갈급을 가지는 것이고 또, 마음도 그러면 자기 마음은 언제나 만족이냐? 마음은 또 자기의 영에 따라서 모자랍니다. 자기가 그 마음이라는 것이 자기가 이래 기도하는 가운데에 혹은 이 진리를 생각하는 데에 자기 속에 옳고 참되고 바른 생각이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는 그런 마음이 없었는데 자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나왔고 그런 마음이 나왔고 그런 표준이 나왔고 그런 계획이 나왔고 자기 마음보다 훨씬 뛰어난 부지런한 것이 중생된 영의 활동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보면 마음은 좀 게을하고, 또 마음은 방탕하고 한갓되지를 못합니다. 자기가 자기 마음을 볼 때에 마음이 한갓되지를 못하다 이 마음이 게을하고 이 마음이 아무나 따나 방종한 마음이라. 그 마음이 마음에 아주 모든 것 하는 것이 너무도 불미스럽고 불미스럽고, 또 진실되지를 못해서 자기 마음에 대해서 그 신용을 하지 못하겠고 자기 마음을 아주 좀 단속해야 되는 그런 마음이 그런 속에서 그런 뜻이나 생각이나 그런 것이 나옵니다. 나오는 그것이 중생된 영의 작용입니다.
이래서, 마음은 중생된 영으로 말미암아 항상 재촉을 받고 재촉을 받고 권유를 받고 늘 위에 상부 명령에 따르면 너무도 허무한 것을 느끼고 또 몸은 그 마음에게 재촉을 받고 늘 허무한 것을 느끼고, 이렇게 몸에게 일은 자기가 무슨 일해 놓은 것 그 일을 이렇게 이렇게 했을 터인데 그 일이 잘못됐다 일은 몸에게 재촉을 받고, 그래 사물은 몸에게 재촉을 받고 몸은 마음에게 재촉을 받고, 마음은 영에게 재촉을 받고 영은 성령님의 재촉을 받고. 진리의 말씀은 이 모든 것을 심사하는 율법이 됩니다.
진리는 이 모든 것을 영감도 심사할 수가 있고 중생된 영의 행동도 심사할 수가 있고, 마음도 심사할 수가 있고, 몸도 심사할 수가 있고 모든 행위도 심사할 수가 있고, 심사하는 아주 먹줄 다림줄과 같고 저울과 같고 이러기 때문에 이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는 행동도 심사할 수 있고, 몸도 심사할 수 있고, 마음도 심사할 수 있고, 영도 심사할 수 있고 이래서 이 진리는 마치 목수에게 잣대와 같고 다림줄과 같습니다. 이것을 안 대보면 모른다 그말이오. 이 척수가 됐나 안 됐나? 암만 훌륭한 목수라도 대략 짐작을 하지만 척수를 딱 대봐야 아 좀 길다 짧다 알 수가 있고 또 이 먹줄을 딱 대봐야 이게 굽었다 곧 다 이것을 알 수가 있다 말이오. 이러니 성경 말씀은 그렇게 다림줄이라. 목수가 이래 탁 줄을 떼 고 보면 보이지 않습니까? 그것을 다림줄이라 하는데 다림줄이라. 또 잣대라 이렇게 성경에 표현을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항상 몸이 좀 피곤해서 못 따라 갈 만치 그러니까, 모두 해 놓은 일은 해 놓은 일은 몸에 대해서 부족하게 해 놓은 일은 그 몸이 소원하는 대로 하지를 못했습니다. 안 되어 있습니다. 또 몸은 마음의 소원대로 되어 있지 못합니다. 또 마음은 영의 소원에 미달입니다. 영은 성령님의 소원에 항상 미달된 것은 죄라 미달된 게 아니고 무한하신 성령님의 역사가 그에게 와서 무한이 돼지지를 못한다 그거요. 이러니까, 거저 늘 이렇게 힘을 써도 마음에 부족하다 마음에 부족함을 자꾸 느껴서, 그러니까 몸이 마음에 붙들리니까 그만 피곤한 줄 모르고 이렇게 했는데 뒤에 보니까 몸이 말을 안 듣고 몸이 그 마음에 못 따라가는 그 정도가 그게 실상입니다. 그게 정상이라 말이오. 그러나 이거는 몸에 힘이 남았지만 만족하고 아무런 자기에게 뭐 마음에 재촉이 없는 그런 사람은 벌써 신앙을 자고 있는 사람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우리가 이렇게 신앙생활은 힘을 써야 합니다. 5절에도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또 10절에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힘을 안 쓰고는 이 신앙생활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젊을 때 시작했든지 어렸을 때부터 시작했던지 항상 힘이 모자랍니다. 힘이 모자라고 젊다고 힘이 남는 게 아니라 젊을 때도 힘이 모자라고 늙었어도 힘이 모자라고 아이일 때도 힘이 모자라고, 힘이 모자랄 만치 그렇게 되는 그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힘이 남아 있지만 신앙생활 할 일도 없고, 할 그렇게 재촉의 마음도 없는 그것은 벌써 그 신앙이 잠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을 써 신앙생활을 하면 눈이 밝아집니다.
9절에,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이런 것이 없으면 소경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힘쓰는 일이 없으면 그만 소경됩니다. 힘쓰는 자의 힘쓰는 일이 없으면 소경돼. 이거 뭐 말씀에 따라오지를 안하고 이러니까 졸아지지 말씀에 따라오면 졸아질 이유가 있는가? 이치가 있는가? 딴거 가지면 졸아져요. 우리가 찬송할 때도 딴거 들어오는 그걸 찬송할 때에 딴 거 들어오는 그런 것 좀 짤막하니까 잘 알겠지요. 예배 볼 때도 딴 게 들어오면 딴게 들어오면 그만 졸음 옵니다. 딴게 들어오면 그 놈이 내나 마귀요 딴게 들어오면 마귀가 주는 것입니다. 딴 생각이 들어왔으면 마귀가 지금 딴 생각을 줬고 딴 생각이 들어와서 그 생각에게 벌써 지배를 받아 가지고 딴 생각이 들어와서 그 생각이 나를 주관해 가지고 그 생각으로 내가 생각할 때에는 벌써 마귀가 내 속에 들어 왔다 말이오. 딴 생각이 들어오는 것은 마귀란 놈 들어오는 거는 아니고 마귀란 놈이 딴 생각을 넣어 줍니다. 넣어 줄 때에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이것을 물리치면 되는데, 떡 들어오면 그 놈을 영접해 가지고 그 놈이 하자 하는 대로 한번 생각합니다. 잠깐 생각했으면 벌써 마귀가 들어와서 나를 지배했소.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 놈이 나를 제 맘대로 합니다. 이래 놓으니까 그 다음에는 졸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뭐 딴것도 이런 것 저런 것 해 가지고 예배는 그 자리에 보면서 저 혼자 어디든지 돌아다닙니다. 소용없네. 무슨 꼭 소용 있는 걸 생각하느냐 하면 소용 있는 걸 생각 않고 소용도 없이 이 생각 저 생각 자꾸 들어오니까 마음에는 '이것 자꾸 안 됐는데 예배드리면서 이런 것 들어오면 안 되는데' 이러면서도 이 생각 저 생각 막 들어와 가지고 연상적으로 뭐 잘못하면 온 세계를 돌아다니고 제가 어릴 때부터 행동한 그 행동 세계를 전부 삑 한 바퀴 다 돌아옵니다. 이렇게 거짓되기 쉽다 그거요.
그런고로, 딴 생각 들어오면 조는 것 딴 걸 생각지 말아요. 이 말씀을 받을 때에 주님과 이 진리 요 둘을 자기가 지금 자기가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라면서 거기서도 복을 생각해요. 내가 이 시간 복 받는 사람돼야 되겠다 내 목적을 달성해야 되겠다 하는 뭐 산 운동이 있어야 되지 그것 없이 죽은 자 모양으로 떡 앉아서 피동만 돼지면 안 됩니다.
이런 것이 없으면 소경이라 멀리 보지 못한다 소경이면 그 사람이 멀리 볼 수 있습니까? 우리는 멀리 보는 일을 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할려고 하는 목적은 어디 있느냐 하면 우리는 소경이 안 돼야 되겠다 또 근시자가 되지 안해야 되겠다. 요 두 가지를 증거 할하고 한 것입니다.
소경은 육신의 소경도 있지만 마음의 소경도 있습니다. 마음의 이 소경이 눈을 뜨는 것은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어떻게 하면 밝아지느냐? 마음의 눈이 밝아지는 것은 소망이 하늘에 있으면 밝아집니다. 소망이 하늘에 있으면 밝아지고 또 소망이 하나님에게 있으면 더 밝아집니다. 그래서 눈이 밝아지는 순서는 소망이 하나니까 하늘나라에 있게 되면 속에 양심이 머리를 들게 됩니다.
양심이 머리를 들게 되고, 하늘의 소망과 하나님께 소망이 없으면 그만 양심이 멸시를 당해 버립니다. 양심이 멸시를 당하고 욕심 감정 또 시기, 쟁투 뭐 이런 게 자기 속에 일어나게 되니까 마구 양심을 눌러 꺾고 그만 파묻어 버리요.
그러기 때문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그라고 난 다음에는 눈이 흐리면 온 몸이 어두운 것같이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하는 그 빛을 말한 것은 양심을 가리켜서 빛을 말한 것입니다. 육신의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깜깜해지는 것처럼 그 눈만 어두우면 수족이 보입니까? 아무것도 안 보이지.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보다도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빛이라 하는 것은 양심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양심이라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빛입니다. 양심이 그 사람을 인도 하는 데에 제일 최고의 인도자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이 하나님이 인도를 하지 안하면 인간 양심 가지고는 다 이종교를 마련하고 결국은 자멸을 마련하지 옳은 것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자꾸만 이 몸의 눈이 어두운 것보다도 마음의 눈이 어두운 것을 더 마음에 그 고민을 가지는 이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육신의 눈도 어둡고 마음의 눈도 어두운데. 그 사람은 마음의 눈이 어두운 데에 관심이 큰가? 육신의 눈이 어두운 데에 관심이 큰가? 육신의 눈에 어두운 것도 그것도 불편하고 이렇지만, 성도는 육신의 눈에 어두운 데서는 자꾸 육신의 눈이 무슨 이렇게 급하게 아프고 이래 병든 것 있으면 그렇지만 육신의 눈이 어두운 데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그것이 기독자입니다. 육신의 눈에 어두운 것 물론 자꾸 눈에 뭐 가시가 들어왔다든지 그리 아니면 티가 들었다든지 눈에 무슨 아픈 병이 걸렸다든지 그리 아니면 눈썹이 나가지고 눈을 찌른다든지 이렇게 눈물이 나서 눈물이 나서도 눈물 닦기만 하지 육신의 눈이 어두운 데 대해서는 ○○○, ○○○. ○○○선생은 말이요 예민한데 도무지 그걸 지배해야 되지 지배하지를 안해. 아주 민첩하기는 민첩한데 자기가 무엇을 이렇게 자꾸 힘쓰는 것이 힘을 어떤 면에 힘을 써야 되느냐 하면 ○○○씨는 이 사회성씨 힘을 써야 되고 윤리성에 힘을 써야 되고 횡적면에 힘을 써야 된다 그거요. 횡적, 옆으로 나가는 것. 그걸 힘을 안 쓰면 호리 호리하이 커 가지고 그만 딱 부러져 버립니다. 삼밭에 큰 삼밭에 큰 삼을 찌면서, 이거 삼이 아니기 때문에. 뺑뺑 돌려서 도토라지씨가 혹 삼밭에 난다 말이오. 나면 삼은 찌면서, 도토라지 그거는 쪄 넣으면 안 되니까 도토라지 그거는 남겨 놓고 삼만 찝니다. 삼 찌고 나면 호리호리하 이 요러니까 바람이 불면 당장 그만 척 넘어가서 그만 구부러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이 종만 생각하고 횡을 생각지 안하면 자꾸 넘어진다 그말이오.
내가 ○○교회 ○○○목사님에게 너는 만날 종만 생각해서 호리호리 크고 횡이 없기 때문에 옆으로가 없기 때문에 언제든지 가 가지고 처음에는 이렇지만 나중에 보면 그만 횡이 없어서 한 두 사람만 거머쥐고, 제일 이 교회에 이 사람이 제일 성자라 생각했는데 그게 나중에 보면 신앙 하나도 없어요. 이래서 ○○○교회에서도 그 신앙에 뭐 ○조사인가 양봉 한사람 돈 좀 내고 하니까 제일 좋다 했는데 그 사람이 낙심 해 가지고 오래까지 있다가 말았고, 또 ○○에 가 가지고 지금 몇 사람 만 가지고 있고 그거 안 돼. 이 횡이 없기 때문에 그리 됩니다. 그러면, 눈이 어두워져요.
우리는 힘씀이 없으면 마음의 눈이 어두워집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안 보이요.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그 마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에게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자기의 구원에 대해서 그 생각이 안 떠오른다 그 거요. 안 떠올라서 안 떠오르니까 새로운 깨달음이 없습니다. 믿는 사람 이 새로운 깨달음이 없다는 그것은 벌써 마음의 눈이 어두워진 것이요 신앙이 잔다는 것입니다.
설교하는 설교자도 자꾸 새로운 깨달음이 나와야 됩니다. 새로운 깨달음이 나는 것은 보고 나서 또 보니까 또 새것이 보이고 새것이 보이는 것처럼 새로운 깨달음이 나와야 되고 반사와 권찰도 신앙이 자지 안하고 깨어 있으면 주일학교에 대해서 '내가 이래 할 걸' 이러고 항상 못 한 것뿐 이라. '이랄 걸 저랄 걸' 또 자기 사업에 대해서도 '이랄 걸. 요거 잘못 됐다 저거 잘못됐다.' 자꾸 그것만 생각이 돼 집니다. 그것만 생각해지고 자기가 사업에 대해서 요랄 걸 저랄 걸 자꾸 할 것만 생각하고 잘못된 것 생각지 않는 것은 벌써 망할 징조입니다.
자기가 사업을 하는데 내가 이게 틀렸다 저게 틀렸다,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뭐 표준에 대해서 자기 사업에 아주 복술자 자기 사업에 꾀를 쓰는 그런 사기 협잡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을 본을 떠서 나도 이렇게 할 걸 저렇게 할 걸 그게 아니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을 첫째는 향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법칙을 우리가 가지고 '아. 내가 하나님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내가 이리 할 걸 저럴 걸'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랄 걸 저랄 걸' 자꾸 날마다 아침마다 하나님 앞에서 징책을 본다. 징책을 본다는 내가 이렇게 잘못됐기 때문에 너는 이런 해가 네게 돌아올 것이다. 너 이게 잘못됐기 때문에 이렇게 책망한다. 자꾸 징계와 책망을 받는 것을 가리켜서 징책이라 합니다. 나는 아침마다 징책을 본다. 이래서 손을 씻어서 또 행동을 또 씻고 씻고 이래도 자꾸 더러운 것만 나옵니다.
이랬는데, 어떤 사람은 마구잽이로 살아도 모든 생활이 형통하고 재물은 점점 부해집니다. 그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 그 사람을 성경에 뭐 라고 했습니까? 이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아, 저런 사람은 저래도 잘되는데 나는 이와같이 늘 이렇게 아침마다 징책을 받고. 진리의 말씀에게도 책망받지,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 징계받지 항상 이거 잘못됐다고 후회만 이래 생각하고 손을 씻어서 깨끗하게 한다.' 자꾸 자기의 행동을 또 이렇게 깨끗하게 깨끗하게 이렇게 해도 항상 찾으면 뭐 잘못된 것만 나오고. 뭐 돌아오지는 안한다 이러다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 눈이 열렸습니다.
자기가 지금 그와같이 깨끗케 하는 것은 아직까지 눈이 소경이라 모른 다 말이오. 깨끗케 하다가 그라다가 골방에 들어갑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신앙이 바로 정상이 되어지고 보면 환하게 보여지니까 그렇게 날마다 징책하지 안하고, 어떻게, 보니까 현저히 악을 행하는데 마구잡이로 죄를 망할 일을 해도 그 사람이 형통한 것을 보니까 눈을 뜨고 보니까 그 사람이 졸지에 패망될 그것이 자꾸 지금 저축되는 걸 보니까 그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위태해서 못 견디겠다 말이오. 그저 갑자기 패망이 당할 그것이 그에게 보여지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오는 패망을 과거에 그렇게 징책 받음을 인해 가지고 오는 패망을 보고 보니까 그 패망은 요 징책 받음으로써 그걸 막았고, 저 징책 받음으로써 그걸 막았고 징책 받음으로 자꾸 이거 자꾸 막혀서 패망이 막혀 나가고 저 사람들은 패망을 자꾸 취해서 모두어 나가고 자기는 패망을 자꾸 헐어서 이걸 틔워서 패망이 오지 못하는 이 피난을 바른 길을 가는 그것을 깨닫고 난 다음에야 '나는 우매 무지한 짐승같은 자입니다. 내가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 참 짐승 같았습니다.' 이렇게 그 사람이 회개한 것을 73편에 기록해 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힘을 쓰면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면 자꾸 깨달아집니다. 깨달아져서 죄에 대해서 깨달아지고 뭐이 죄에 대해서 깨달아진다 말은 잘못이 자꾸 깨달아진 다. 잘못이 깨달아지면 기분 좋지 안하는 것 같지만 그걸 초월해서 신앙으로 나가는 사람은 잘못이 깨달아지면 평안이 오고 맘이 평안하고. 잘못된 것은 깨달아지지 안하고 잘한 것만 자꾸 깨달아지면 벌써 그 사람은 알니다. 아니까, '내가 잘한 것만 자꾸 깨달아지니까 이거 망할 징조로구나. 내게 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징계가 오겠구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평강을 안 가집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이 자꾸 칭찬하면 어떤 사람 어릴 때는 그게 좋습니다.
칭찬을 받으면 좋지만, 칭찬을 하면 벌써 그 사람은 속으로 근심을 합니다. 왜? 칭찬이 오고 난 다음에는 박살이 오기 때문에 칭찬 올 때에 그 사람은 근심하면서 '주여 나를 왜 이리 버리십니까? 자꾸 나에게 대해서 이 칭찬이 오고 내게 대해서 흠점은 깨달아지지 안하고 칭찬만 오니까 이다음에 나를 어떻게 때릴라고 이렇게 하십니까?'그게 고만 자꾸 그 칭찬 오는 것도 자기에게 예고입니다. 칭찬이 올 때는 '아 나에게 큰 징계 받을 징계가 앞으로 있구나.' 거기에 예고고 또 자기에게 뭣을 징책이 올 때에는 징책이 올 때에는 '아, 징책이 내게 오는 것을 보니까 앞으로는 나에게 축복이 지금 그 다음을 뒤를 따라서 오겠구나'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 그것이 멀리 보는 사람이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원시하는 사람이 돼야 되겠습니다. 원시하는 사람은 자기가 이 모든 자기 사물에 대해서도 감시를 해 봐야 되겠고 일이나 물건이나 자기 행위에 대해서 감시해야 되겠고 또 자기 마음에 대해서 감시해야 되겠고, 또 자기 현재에 대해서 감시해야 됩니다. 현재에 대해서 감시를 하는 것으로서 만족할 게 아니라 현재에 내가 이 물건 접촉은 어찌 하고 있겠다, 일은 어떻게 지금 접촉을 하고 있다. 내 행동은 어떻다 내 몸의 성품은 어떻다, 내 마음의 성품은 어떻다 이걸 자꾸 따져 들어가는 사람은 원수는 정욕이라, 원수는 정욕이 내 원수다. 정과 욕심이 내 원수 다 이라고 난 다음에 모든 것을 캐 들어가면 잘못에 뭐 이 면으로 잘못됐다, 저 면으로 잘못 됐다. 욕심으로 잘못된 사람 감정으로 잘못된 사람 시기로 잘못된 사람. 분노로 잘못된 사람, 또 자기가 허영으로 잘 못된 사람, 허욕으로 잘 못된 사람. 명예 영광심으로 잘못된 사람 이 모두 다 잘 못된 게 많은데 잘못됨을 자꾸 찾아 들어가 보려니까 속에 알맹이 못된 놈이 거기서 모든 걸 다 지배하고 다스리고 있는데 속에 있는 고놈이 뭐이냐? 요놈이 자기입니다. 자기, 자기 고놈이 들어서 그 모든 걸 작용 하고 있어서 고놈이 자기 아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옛사람 자기,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똘똘 뭉쳐 가지고 되어 있는 자기, 옛사람 자기 고놈이라는 것을 깨달아서 자꾸 심사하는 사람은 원수 중에 원수가 자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기라는 것이 영으로 된 자기 아니고 자기 아닌 것이 자기를 죽여 버리고 이것이 자기를 죽여 버리고 자기 주인은 죽여 버리고 자기 주인 대신에 이 놈이 들어왔다 그말이오. 내가 비유하기를 자기 주인인 호주는 죽여 버리고 이 호주 죽인 원수 이놈이 호주와 같이 가발도 하고 뭐 색칠도 하고 옷도 그래 입고 꼭 그대로 와서 말하니까 자기 남편인 줄 알고 반가와하기도 하고 섬기기도 하고 대접도 하고, 또 모든 걸 의지하기도 하고 이렇게 하니까, 고놈이 얼마나 좋겠소? 그래 가지고 절단을 낸다 말이오. 그러니까 요 자꾸 자기의 현실을 심사하는 데에서 마지막에 원수는 자기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원수가 자기라는 요것이 원수라는 것을 알고 그 놈으로 더불어 싸우는 이 싸움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눈은 마음의 눈을 가지고, 현실을 살펴야 된다. 시간적으로 마음의 눈을 가지고 이 현실을 살펴야 된다. 이래 가지고 이제 요것만 살피는 것은 요것은 눈이 밝은 것이지 멀리 보는 사람은 아니라 그말이라. 이 마음의 눈을 가지고 이제 현실만 살필 게 아니라 과거를 살핍니다. 과거 내가 어제 행동은 어땠지? 내가 먼저 달의 행동은 어땠지? 작년에는 어땠지? 재작년에는 어땠지? 내가 몇 년도는 어땠지? 어땠지 어땠지 해 가지고 다윗은 자기 어머니 모태에서, 그 아이 선다고 안 합니까? 아이 선다고 이라지요. 아이가 선다 안 합니까? 잉태되는 것, 자기가 어머니에게서 잉태될 그때까지를 미루어서 과거를 봤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성령이 오시니까 '내가 모태에서 죄악 중에 잉태했구나' 자기가 잉태될 때 그 환경에 주위에 어머니의 전부 다 죄속에서 잉태됐다는 것을 발견했다 말이오.
과거를 한 발을 보는 사람은 미래를 한 발을 봅니다. 과거에 자기에게 있어서 자기 볼 때로 과거를 다 보는 사람은 미래에 대해서 또 봐서 그러니까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내가 이래 살면 이렇게 살면 내가 금년에는 어떤 생활하겠느냐? 이렇게 살면 내가 명년에는 어찌되며 내가 또 늙으면 어찌되며 죽을 때는 어찌되며 내가 앞으로는 어찌 될까? 어찌 되겠느냐? 이래 되면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는 어떠한 사람이 되겠느냐 무궁 세계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이래서 원시, 멀리 본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과거를 쭉 이렇게 내다보는 것이 원시요, 과거를 보면 또 미래에 되는 것이 보여지고, 또 원시하는 것은 자기에게 자기로부터 다른 사람을 봅니다. 자기로부터 모든 사람과 자기와의 관련을 봅니다. 이래 가지고 그 관련을 보니까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설 때에 다른 때는 생각이 안 났는데 하나님의 제단 앞에 서니까 다른 사람이 너를 원망할 것, 다시 말하면 내가 다른 사람에게 잘못된 거 있다. 원망할 거 생각난다 그거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는 사람이지 하나님 앞에서 뭣을 바치는 생활 헌신하는 생활을 하든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거기서 내가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가 어찌 되는 것. 기도를 하지 안할라 할 때에는 그게 생각이 안 났는데 기도할라 하니까 '아. 그 사람과 나와 막혀 있다.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피해를 끼쳤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 내가 잘못된 부담을 줬다.' 이렇게 그것이 자꾸 생각해서 기도할라 할 때에 눈이 밝아져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대한 것 과거에 대한 것 미래에 대한 것 자꾸 눈이 밝으니까 둥그렇게 널리 보인다 그말이오. 널리, 과거도 한 발 열 발 보이고 미래도 열 발 보이면 과거와 미래가 같으면 둥그래질 것 아니요? 또 자기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이렇게 열발이 되는 둥그래져 보이요. 신앙생활은 둥그래지는 거라.
이렇게 자꾸 봐서 자꾸 눈이 밝아지는 그것이 주님을 바로 대해서 기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지 주님 앞에 기도하려고 하는 사람이 기도하러 가니까 '아, 아무것이 그 사람 괘씸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이거 잘못했다.' 저는 잘한 것만 보여지고 남에게는 자꾸 잘못한 것만 보여지고 이러니까, 고 사람은 기도하면 어찌 되느냐? '주여, 내가 요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다.' 자꾸 그러니까 악이 강해지고 독이 강해지고 자꾸 원망이 강해지고 불평이 강해지고 자기 의가 강해지고 자꾸 이러니까, 그 사람 뭐이 강해지는 것입니까? 어? 옛사람 자기가 강해지는 것입니다. 기도함으로서 옛사람을 죽여 부서트리는 사람이 있고, 기도함으로써 옛사람이 자꾸 강해지는 사람 있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은 그것이 나중에 예수 믿는 신앙생활 오랫동안 하면 고집쟁이가 되고, 아주 이기주의 자기 욕심쟁이가 돼 가지고 그 사람은 남을 모릅니다. 남을 모르고 고집쟁이 돼 가지고 점점 자꾸 악한 자가 돼. 그러기에 예수 잘못 믿은 사람 그 사람은 인간 중에 최악의 인간을 택할라면 예수 잘못 믿고 예수님을 주관대로 믿는 그 사람이 최악의 인간입니다. 세상에 그렇츰 악한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 아침에 원시하자 멀 원(遠)자 볼 시(視)자 원시라 말은 멀리 본다 그말이오. 멀리 보는 사람은 현재를 보지 않고야 멀리 보겠습니까? 그러니까, 마음의 눈이 밝아 가지고, 자기 현실을 둥그러이 다 보고 그 다음에는 과거 미래로 이렇게 원시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으로 이렇게 원시하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제 자기에게 붙은 것이 일이오. 자기에게 붙은 것이 물건들이기 때문에 이 사물을 원시하고 이렇게 자꾸 널리 보는 이 원시하는 사람이 우리가 돼야 합니다.
원시치 안하면 그 사람은 언제 거저 넘어 질는지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원시의 반대는 무엇이냐 하면 옛사람 자기에게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에게로 들어가서 자꾸 이래 좁아지고 좁아지면 자기 밖에 없어. 자기 밖에 없어. 자기가 제일이야. 그것이 뭐이냐? 자기가 제일이라. 자기 잘하고 자기 옳고 자기는 착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에게 희생했고 다른 사람을 돕고 전부 자기에게 장점이 있는 그렇게 자꾸 들어가는 고 자기가 뭐입니까? 고게 뭐이지요? 옛사람이라 하고 다른 이름 또 하나 있지? 원죄 고게 원죄입니다. 이래서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같이 된다 말은 하나님이 광대한 지식을 가졌으니 자기가 광대한 지식을 가지는 그면이 하나님과 같다 말이오?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서 자기를 표준해 가지고 자기 좋아하는 것은 다 좋은 것이고 자기 싫어하는 거는 다 나쁜 것이고, 자기 위하는 것은 다 자기가 좋다고 인정하고, 자기 행하는 것은 자기가 나쁘다고, 자기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되어지는 그 자기 위주로, 하나님은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인데 위주 중심이 하나님 같다 말이요? 하나님같이 원시 광대시가 하나님 같다 말이오? 중심이 같다 그말이오? 자꾸 이래 근시가 되면 자기 쪽으로 기어 들어가요. 원죄 속으로 들어가요.
원죄 속으로 들어가니까. 천상천하에 자기가 제일이라. 그러니까 불교에 깊이 들어가면 불교에는 천상천하에 유아독존 그것이 불교의 종말입니다. 천상 천하에 자기가 오직 제일이라. 유아독존이라. 이렇게 자꾸 멀리 안 보고 좁게 보면 기어 들어가고 자기 속으로 들어가서 그게 뭐냐? 그것이 무형의 감옥인데 영원한 감옥입니다.
성경에, 주님이 옥에 갇힌 자들에게 와서 전도했다 하는 이 옥을 가지고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주장하면 지옥에도 주님의 전도가 있기 때문에 지옥 가 가지고도 천국 갈 수가 있다 이렇게 말하는데 그 옥이 뭐이냐? 자기 속에 갇힌 사람, 제속에 갇힌 사람 그게 옥에 갇힌 자라. 그게 있는 자에게, 그러니까 요한계시록 1장 5절에 보면 '죄에서 주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해방했다 말은 갇혔었다는 말이오. 그러면, 죄에 갇혔던 자를 해방시켰다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