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선지자선교회 1985년 7월 8일 월새

 

본문 : 출애굽기 20장 4절∼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리를 너무 가볍게 그렇게 듣는 그런 버릇을 우리가  고쳐야 하겠습니다.

 5절과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삼 사대까지 다 망치겠다 그런 것을 계약으로  선포해 놨고 또 천대까지 축복을 하셔서 복되게 하겠다 이렇게 계약을 선포해  놨으니까, 하나님이 당대만 망친다 할지 라도 하나님이 망치는 그 멸망을 사람이  어떻게 벗어나며 또 하나님이 천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했는데 그 축복을 누가  방해할 자 있습니까? 우리는 온 세상 사람이다 우리를 복되게 한다고 해도  하나님이 망치면 온 천하 사람 그까짓 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또 온 천하  사람들이 다 나를 해쳐서 망하게 하겠다고 달라든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시면 그까짓 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기를 돕는, 따지고 보면 그까짓 거 아무 힘도 없는  것인데도 자기를 돕는 한 두 사람만 있어도 그것을 배경을 삼아 가지고 안심할  줄도 알고 또 그것을 배경을 삼아 가지고 우쭐거릴 줄도 알고 이렇게 하면서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이렇게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않는 이런 계약으로 선포해  놓으신 이 사건에 대해서는 너무 우리들이 그렇게 크게 보지를 않습니다. 안  커서 크게 보지 않는 것인가? 우리의 심령이 마귀화 되어서 마귀란 놈은  하나님의 편에 있는 일은 아무리 크고 두렵고 강한 일이라도 없는 거 같이  그렇게 여기도록 우리를 자꾸 유혹을 줍니다. 그것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 가지고  우리가 그런 것이지 하나님이 그렇게 두렵지 안하고 세상 것 만치 권세가 없어  그런 것도 아니고. 또 그 말씀하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지 안해서 그런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가 들어서 우리를 변질시켜 가지고 참 크신 하나님의  그 축복도 아주 업신여기고 크신 그 하나님의 진노의 저주도 우리가  업신여깁니다. 그것은 순전히 그 사실이 업신여길 만한 그렇게 경한 일이 아니고  우리 자신들이 마귀에게 유혹 받아서 우리 자신의 그 마음과 모든 생각이  변질되어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이 삼 사대까지 망치겠다 천대까지 축복을 하시겠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세상이 어떻게 해칠 것이며 하나님이 저주해서  망치면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복되게 도울 수가 있겠습니까? 안 됩니다.

그분에게 모든 것이 주권되어 있고 그분이 홀로 주권의 능력을 가지고 이루시지,  인간은 되는 거 같으나 들여다 보면 속에 하나님이 되게 하시면 되고 안 되게  하시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되게 하시는 것도 하시고 그 사람을 통해서  안 되게 하시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어두워 그렇지  껍데기를 벗겨 놓고 들여다 보면 전부 하나님의 조화인데, 사람들이 이런 거  저런 거 이용당해 가지고 하는 것이지 실상 하나님이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치 비유컨대 시계 침이 자꾸 돌아가면서 시간을 가리킵니다. 몇 시 몇 분  이렇게 가리키고 침이 가리키니까 그걸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은 그 침은 시간을  정확하게 가리켜 주는 것인 줄로 그래 알고 있지만 침 그거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속에 있는 기계가 그렇게 다 돌아가면서 그 침으로 하여금 시간을  가리키도록 그렇게 작용하기 때문에 되는 것이지 시계 침 그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시간을 알려 주는 것 아닙니다. 속에 기계에게 이용당해 가지고  그와같이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나타나 보이는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하나  하는 그것은 속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심이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지 사람 제가 무슨 단독이 권리 있어 하는 것은 털끝만한 것도 단독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그 뿐만 아니라 사람은 평가하는 것이 너무 좁습니다. 내 눈앞에 성공이  됐는데 그것이 도리어 멸망되는 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 잔치 비유에 그 품군들이 어떤 사람은 모두 다 성공했습니다.

장사해서 성공했고 가정 이루어 성공했고 집 지어서 성공했고 모두 성공을  했는데, 그 성공한 사람들은 왕이 잔치하면서 부르니까 '아 나는 지금  장사하느라고 바빠서, 집을 짓느라고 바빠서, 나는 또 토지를 사서 바빠서 나는  거기에 갈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고, 아주 형편없는 쓸모 없어 가지고 저  밀려 돌아다니는 길가의 거지 몹쓸 그런 인간은 그 왕이 '그 사람들 청해서 안  오니까 인제 다 데려오라. 못난 사람들 다 모조리 쓸어오라' 그래 가지고 그  사람들이 왕의 잔치에 들어갔었습니다. 왕의 잔치에 들어갔으면 뭐 안 들어가도  이 사람들은 저거 재미에서 좋지 않는가? 나중에 왕이 잔치를 마치고 난 다음에  나머지기 있는 그 모든 자기 볼일 있다고 자기 행복스럽다고 왕이 초청해도 오지  안하는 그 사람들은 모조리 다 죽여라 했습니다. 전부 전멸을 시켰습니다.

 이러니까, 잠시 전에 아주 구비한 행복을 가진 사람들은 잠시 후에 전멸 이  됐고 아주 천하고 망한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왕의 잔치에 초청을 받아 가지고  행복스럽게 됐습니다. 그것이 비유입니다. 그 왕은 하나님을 가리 켜 말씀하신  것인데, 인간들이 세상에 성공이 됨으로 하나님의 도를 만홀히 여기다가 완전히  멸망을 당하고 세상에서 아주 천해지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를, 이제  천해지니까 죽지도 살지도 못해서 다 망하고 나니까 예수나' 믿어 볼까 하면서  믿어 가지고 성공하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그렇게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이계명에서. 이 계명뿐 아니라 다른 계명도 그러합니다.

또 실은 열 가지 계명이지만 한 가지 계명을 지키면 열 가지 계명이 다  지켜집니다. 실은. 뭐 열 가지 계명이 있으니까 이 계명에도 생사가 달렸고 저  계명에도 생사가 달렸고 이러니까 열 가지 계명이나 지키려면 힘든다 싶지만  실은 한 가지 계명을 지키면 열 가지 계명이 다 저절로 지켜집니다. 이 계명  지키는 사람은 삼 계명도 저절로 지키게 됐고 사계명도 지키게 됐고 그거 안  지키면 이 계명이 안 지켜지니까. 오계명도 지키게 됐고 육계명도 지키게 됐고  칠계명도 지키게 됐고 팔계명도 지키게 됐고 지키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그 어느 열 계명 중에 한 계명 어느 계명이라도 그 계명을 지키면 실은  모든 계명을 다 지키는 자가 되어 지고 지키지 안하면 그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열 계명을 열 가지로 나눠 놨지만 실은 그 계명이  껍데기를 떼고 들어가 보면 하나입니다. 하나인데 외부에 나타나기를 그렇게  열로 나타난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가정이나 우리 개인이나 우리 사업이나 모든 것이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데에 달렸다 하는 그걸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거는 틀림없는 실상인데, 사람들을 마귀가 유혹시켜 가지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 하나와 나와 삐뚤어지면 망하고 흥하고, 무슨 일 하나 잘못 하면  망하고 흥하고 그것만 알고 있지. 그 사람에게 아무리 삐뚤어져도 하나님이 되게  하시면 되고 일이 아무리 잘못 삐뚤어져도 하나님이 되게 하시면 됩니다.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면 물려 죽는 것이 그게 뭐 과학이고 그거는 틀림없는 이치인데  사자 구덩이에 들어가 가지고 살아 나 와서 오히려 원수를 다 정복하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데는, 없는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면 아무도 방해를 못 합니다. 또  하나님이 안 되게 하시면 아무도 그걸 건설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개인이나 가족이나 그 모든 것이 다 망하고 흥하는 것이  주님 한 분에게 달렸다 하는 요것을 믿는 것이 이것이 중요합니다. 뭐 일시에 그  사람이 건강해 가지고 공부 잘해서 출세 잘하고 하니까 잘된 줄 알았지만 그  사람이 어디 그것으로서 다입니까? 세상에서도 아직 남은 세상이 있기 때문에  남은 장래가 어찌 될란지 그거 모릅니다. 사십까지 그 사람이 행복됐다 할지라도  사십 후에 오십에 어찌 될란지 육십에 어찌 될란지 칠십 될 때에 어찌 될란지  모르고 칠십이 넘어서 죽는 날까지 잘 됐다 할지라도 그 다음에 영원 무궁세계가  있기 때문에 영원 무궁세계에 그 사람이 어찌 될란지 모른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오늘 안 이루어졌다고 안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오늘 안 이루어져도 내 일 이루어질 수도 있고 금생에 안 이루어져도  영원 무궁세계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은 금생에 이루어지든지 내세에  이루어지든지 틀림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망하는 것은 어떤 게 망하는 길인가? 우상 섬기는 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또 복된 길은 무엇이 복된 길인가? 주님 사랑하고 그 계명 지키는  것이 복된 길입니다. 그만 간단하요. 주님 사랑하고 그 계명 지키는 것은 다  성공되고 행복되는 길이고, 또 우상 섬기는 것은 암만 형통해도 그거는 망하는  길입니다.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참 불행스럽다' 이래서 모든 면을, 가정이나  자기 신세나 모든 것이 망하고 망해서 세상에서 볼 때 세상에서는 저 사람보다  더 비참하고 불행스러운 사람은 없다 하는 그 사람 이 영원 무궁한 세계에  인간으로서는 저 사람보다 더 행복된 사람이 없다 그렇게도 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런 사람도 될 수가 있어.

 우리의 견해는 너무 좁습니다. 우리는 뭘로 가지고 평가하느냐? 이 세상만  가지고 비판합니다. 세상적으로 잘됐나 못 됐나 그것만 가지고 비판하는 것인데,  하나님 말씀은 영원 무궁에 잘됐느냐 못 됐느냐 하는 그걸 가지고 평가를  했습니다. 아무리 세상으로 떠날 때까지 모든 게 구비하다 할지라도 영원  무궁세계가 다 헛일됐으면 그 사람 불쌍한 사람 아닙니까? 또 세상에서 모든 게  불쌍하다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지 안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했는데. 복될 수 있는 사람이 됐는데 세상에 복되지 안했다면  그 사람 무궁세계에서 그 사람이 복되게 됐다면 뭐 하룻밤 나그네 고생이  고생입니까? 영원 고생이 고생이지. 하룻밤 나그네의 평안이 평안입니까? 영원한  평안이 평안이지.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쪼브라운 생각을 가지지 말직 뭐 '우리 생각에 이렇다.

비판에 이렇다.' 우리 비판과 생각을 하나님의 비판과 생각에다가 대조해 놓고  '우리 비판과 생각은 이런데' 그렇게 하나님에게 대해서 자기를 세우면  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빌립보 2장 5절 이하에 말씀하시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무슨 마음인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동등될 것으로,  하나님이 '이렇다' 하는데 '나는 이렇습니다. 이렇게 동등될 걸로 시비할 걸로  생각하지 안하고 동등될 걸로 여기지 안하고 자기를 완전히 비웠다 그말이오.

자기를 부인했다, 없는 것같이 하고 하나님에게 절대 복종 하나로써 나아갔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그런 하나님의 우편의 위치를 예수님의  인성이 점령했습니다. 신성이야 물론 하나님이시지만 예수님의 인성이 그렇게  신성 따라 복종해 가지고 성공을 한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짜든지 이 우상 숭배를 하지 안하도록 힘을 써야 됩니다.

우상 숭배는 껍데기 우상 숭배를 하면 알맹이 우상 숭배를 하게 되고 또 알맹이  우상 숭배를 안 하면 껍데기 우상 숭배를 안 하게 됩니다. 이렇게 껍데기와  알맹이가 첩첩이 뭐 몇 꺼풀이 있는지 모르지만 이렇게 이 꺼풀 속에 이 꺼풀이  있고 이거 꺼풀 또 이게 있고 이거 꺼풀에 이게 있고 이거 꺼풀에 이게 있고 뭐  꺼풀이 많이 있지만 실은 이게 하나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상도 여러  층어리가 있는데 그게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알맹이 우상 숭배하는 자는  껍데기 우상 숭배도 하게 되고 껍데기 우상 숭배 안 한 그 사람은 사람이 몰라  그렇지 속에 알맹이 우상 숭배도 안 한 사람입니다. 안 한 사람. 알맹이 우상  숭배를 안 해야 껍데기 우상 숭배를 안 할 수가 있고 껍데기 우상 숭배를 하면  알맹이 우상 숭배를 벌써 먼저 하고 있는 사람이라 그거요. 껍데기 우상 숭배나  알맹이 우상 숭배나 그것이 같은 것인 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한 사람은 알맹이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이오, 다. 그 껍데기 우상 숭배를  그런 박해 가운데서도 우상 숭배를 안 하고 그렇게 투쟁해서 견디는 그런  사람들은 속에 알맹이 우상 숭배를 벌써 안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상 숭배는 그것이 우상한테 절한다 안 한다 섬긴다 안 섬긴다 거기서 자기가  안할라고 하면 안 됩니다. 저 시발에서부터 그것을 시작해서 시발에서부터 고쳐  나와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할 때에 제일 쉬운 것은 할 때에 이것은 나를  대신해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를 구속하시고 피로 값 주고 나를 샀기 때문에  나는 주님의 대속을 입었으니 주님의 것이 됐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세상에  있는 어떤 중요한 일이라도 나 위해서는 할 수 다,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 수  없고 대속하신 주님 위해서 살아야된다 하는 것을 성경에 많이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대속을 자기가 생각하고 깨닫는다면 자기는 자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아야 되지. 이러니까,  무엇이든지 자기는, 장가를 가도 주님 위해서 장가가야 되겠고 시집을 가 도  주님을 위해서 시집가야 되겠고 자기는 뭐 밥을 먹어도 주님을 위해 먹어야  되겠고, 일을 해도 주님을 위해 해야 되겠고, 자는 것도 주님 위해 자야 되겠고,  주님을 위해서, 잠을 안 자면 안 될 테니까 주님 위해 자야 되겠다 먹는 것도  주님을 위해 먹어야 되겠다, 안 먹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일하는 것도. 모든  경영하는 것도 주님을 위해서 하는 거기서부터 시발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것이 뮤 되는데? 나는 어짜고? 아, 주님 위해서, 자꾸 주님 위해서 다 하면  나는 어짜고? 내가 주님 위해서 하면 전지 전능의 주님이 나 위하기 때문에,  내가 날 위하는 것이 더 유익하겠습니까, 주님이 날 위하는 것이  유익하겠습니까? 이러니까, 내가 주님만 위하면 주님은 나를 위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게 되면 주님은 나를 멸하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에서는 몰라요. 잘 되는지 못 되는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여기 다 시골서 온 사람, 여기 시골에 지금. 시골에, 지금도 시골에  일 년에 시골에 한 번씩 다녀오는 사람 한번 손들어 보십시오. 일 년에 시골에  한 번씩 다녀오는 사람. 남반은 있는데 여반들은 생전 일 년에 한 번도 못 가는  가베? 네, 여반들이, 여자들이 남자보다 더 자유있고, 뭐 시장에 가 보면 전부  뭐 물품은 여자 쓰는 물품만 만들지 남자 쓰는 물품은 아무도 안 만듭니다. 들어  봤자 안 팔리니까. 남자들은 그저 돈이나 뿍뿍 벌어 가지고 소 모양으로  생활비나 당하지 그것들은 하나도 자유가 없고 먹는 것도 여자가 갖다 주면 먹고  못 주면 못 먹고 그러니까, 돈은 암만 벌어도 빠짝 마른 남자 있고 또 여자는  암만 가난해도 저거는 또 엉뚱하이 저거 맛있는 거 딱딱 해 먹어서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전부 여자가 독권이고 남자가 권세 하나도 없소 이런데, 그런 데는  욕심을 차리지만 다른 욕심은 못 차리는 구먼. 그러면, 시골에 갔다 온 사람  들어 보니까 몇 사람 안 되네. 사람이 잔치집에 가는 거보다도 초상집에 가는  것이 복 있습니다. 사람 죽는 걸 좀 보는 것이 잘 사는 거 보는 거보다 낫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시골 좀 가보는 게 좋습니다.

 시골 가서 보십시오. 못 가거든 들어도 들으십시오. 시골 가 들으면 어떻게  사람이 변해지는지, 그 사람이 그 동리에서 제일 잘 살았는데 그만 한 몇 십 년  동안에 완전히 망해 버렸고 그 사람이 그렇게 그 가정이 다 실실하게 밋밋하게  그렇게 잘 됐는데 그만 그 가족이 참 허무하게 그렇게 절단이 나 버렸다. 또  아무것도 아닌 가족이 그렇게 올라섰고 그 사람이 푹 망하고 푹 올라서고 하는  그런 것을. 시골에선 볼 수 있지만 도시에서는 망해도 앞집 사람이 요 집에 가도  모르고 이라니까 도시 사람은 전혀 모릅니다. 그 가정이 망했는지 흥했는지 어디  그걸 몰라요. 시골은 그 가정이 뚜렷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망하고 흥하는 걸  잘 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도시 사람은 뭐 망하고 흥하는 것 못 보기 때문에  사람이 잘된 걸 봐도 고 토막 그것만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오늘 잘됐는데 내일  망하는가 그걸 못 보지. 또 오늘 그 사람이 망한 것 같지만 내일 또 어떻게  되는고 보자 흥하는 갑다 그걸 못 본다 그 말이오. 시골은 그것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참 복이 있고 시골 사람들이 훨씬 모든 지능이  도시 사람보다 낫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 도시든지 그 도시의 위대한 사람  쳐 놓고 시골에서 나온 사람이 위대한 사람이지 도시에서 나 가지고, 출생해  가지고 위대한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없어요. 오늘도 아마, 부산도 아마 행정  관청으로부터 교육계 모든 교계 뭐 사회 거기에서 다 볼 때 굵직한 대가리는 다  모두 시골서 나왔지 도시에서 나와 자라 가지고 그렇게 대가리 된 사람이 별로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시골은 좋습니다. 도시만 좋은 줄 알고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러니까, 시골에 가 보면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허무하게 망하는지. 좀 전에,  저는 거창에 있었는데 거창 사람 만나면 나는 장 시골에 갔다 온 사람 자꾸  만나면 그런 거 나는 묻습니다. '그 아무것이 집이 어찌 됐노? 아무 가정이 어찌  됐노' 이래 물으면 전부 다 망했어. 다 망하고 아주 쇠 힘줄. 쇠 힘줄은 부들  부들하이 질깁니다. 질기면 쇠 힘줄이라 해. 쇠 힘줄 같이 주 달려 가지고 있는  거는 예수 믿는 거요. 보면. 못 믿어도 어째 그것이 쇠 힘줄같이 그렇게 좀  실하게 강하게 달려 가지고 있지, 세상 사람들은 뭐 되는 것을 보면 똑 고드름.

고드름 압니까? 고드름이 뭐인지 알아요? 고드름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고드름은 거의 다 아는구만. 고드름은 물이 내려와 가지고 얼어서 이래 드리져  있는 것이 고드름 아닙니까? 고드름은 그만 딱 부러지면 부러져. 건드리면 딱딱  부러지지 않습니까? 그 모양으로 이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고드름  한가지라. 어떻게 금방 흥했다가 금방 망했다가 이래 돼 버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쇠 힘줄 한가지라. 그것이 망해도 질기지, 어디 가 붙어도 붙어  있으면서 그게 그대로 살아 있고 계속돼 있습니다. 뭐 그렇게 왈칵 잘되지도  못하고 못 되지도 못하고 그렇게 된다 말이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걸  조절하시기 때문에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시골에 가 보면 예수 믿고 안 믿는 것이 망하고 흥하는 것이 환하게  보여지지만 도시에는 그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구약 성경 말씀을 믿는  사람은 세상 내눈 앞에 됐나 안 됐나 그거 본다는 거보다도 하나님 말씀을  믿으니까 뭐 눈으로 가지고 열. 번 본 그것보다 도 하나님 말씀이 말했으면  그것이 사실이라 실상이라 이래 믿는 사람에게는 도시나 시골이나 상관이 없어.

 이러니까, 우상은 자기 위해서 만들면 그만 우상 됩니다. 요걸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자기를 위하면 그것은 결국은 우상이 된다. 어떻게 해서? 자기를 위해서  뭐이든지 시발해 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하게 되면 그 하는 방편도 자기 것이  되고 하는 힘도 자기 힘이 되고,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되면 방편도 주님의  방편으로 해야 되고 또 주님을 위해서 하는 것은 주님의 돕는 능력이 아니면 할  수가 없다. 주님만 위할라고 하면 그 모든 것은 주님의 지혜와 주님의 능력으로  하지 안하면 안 되도록 딱 돼 가지고 있어.

 이러니까,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만날 애로요. 주님 위해 사는 사람은 고통  고통 이래서 애로가 많으니까, 이거 애로가 많으니 고통이나마 그 고통이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써는 도울 수 없도록 만들어 놓고 하나님 힘으로 돕고  그러니까, 주님을 위하는 것은 방편과 능력이 전부 하나님의 방편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능으로 만들게 된다. 그거는 하나님의  지능으로 안 만들래야 안 만들 수가 없도록, 하나님의 지능이 아니면 만들 수가  없도록 되는 환경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능으로 만들 게 된다. 또 자기를  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능으로는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지능으로 할 수  없도록 돼 가지고 있고 하니까 자기의 지능으로만 하게 돼 가지고 있다. 그래  되니까 고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를 위해서냐 주님을 위해서냐 여기서 그만  결정되는 것입니다. 자기 위하는 것만 변동 안 되면 만들어지는 지능도 자기  위하는 거 되고 말고 주님 위해서 하는 것이 되면 그거는 뭐 다른 것이, 주님  위하는 거만 변동 안 하면 그것은 모든 만드는 지능이 전부 주님의 지능으로만  하게 돼 있는 것입니다.

 요거는 여러분들이 지금 말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거요. 요거 알라면 좀 여기서  신앙있는 사람 명철한 사람이 그 사람이 가 가지고 뭐 몇 시간 동안 명상하면서  그 모든 것을 잘 생각해 보면 알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해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면 벌써 심령이 밝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 설교를 잘할 수 있고 그  사람이 성경을 바로 깨달을 수가 있고 그 신앙이 어리석은 마귀의 꼬임을 받지  않는 사람되어지는 것입니다.

 요거 딱 가서. 오늘 아침에 요 제목을 줄 터이니까. 자기를 위해서 모든 일을,  자기 위하는 것을 그것을 변동 안 하고, 자기 위하는 것을 변동 안 하면 그 모든  하는 것은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게 되고 그것은 나중에 가서 그것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살게 되고 또 그것에게 따라서 피동되고 그것을 위주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게 된다. 또 주님을 위해서 하게 되면, 주님 위하는  것만 변동 안 하면 주님 위하는 일은 세상이 못 하게 하기 때문에 주 위하는  그것만 가지게 되면 나중에 그 이루는 것은 주님의 전지한 지혜로만 될 수 있고  전능의 능력의 도우심으로만 될 수가 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한다는 그것만  변동 안 되고 꼭 그것만 가지고 있으면 그 조성하는 지능도 주님의 지능으로  하게 되고 또 나중에 만들 어 놓으면 자연히 그것은 만들어 놓은 그것도 주를  위하는 것이 되어지고 또 자기의 모든 것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주를 위하는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 살게 되지 딴 데 피동될 수가 없고 그라면 또 위주로 하는  것도 그것을 위 주로 해 가지고 살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잘됩니다.

요거는 참 알기가 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시작에 주를 위하는 시작으로 나서 가지고 주님  위하는 요것을 중간에도 변동 없고 끝에도 변동 없고 주님 위하는 요것 만 변동  없으면 그 모든 거는 여기에 따라서 주욱 따라갑니다. 주님 위하는 걸 변동 안  하면 세상은 방해만 하지 세상은 도와 주지 않습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의  생활은 세상이 전부 방해하고 이렇게 방해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으로만 이 일이 되어져 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생애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위하느냐 자기를 위하느냐 여기서 망하고 흥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가다가 주님을 위한다 해도 나중에 중간에 가다가서 어려우면 그만  자기 위하는 것으로 돌아가 버리면 절단나지만 주님 위하는 거만 변동하지  안하면 세상은 방해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할 수 있지 능력이 아니면  안 되는 그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순전한 지능으로 만들었으면 그것은  완전이요 영원인데 누가 그것을 깨트리겠습니까? 깨트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여러분들이 좀 가서 좀 생각을 살려 봐요. 좀 생각을 살려. 뭘  좀 생각할 줄을 알아야 되지, 그래서 사람들이 노동 안 합니까? 노동이라,  노동이라는 것은 수고로울 로(勞)자 움직일 동(動)자인데, 움직일 동자인데,  노동이라는 것을 움직일 동자를 쓸 때에 기계 움직이는 것은 사람 인변, 사람이  없이, 사람 인변이 없이 움직일 동자만 쓰고, 사람이 노동하는 것은 사람 인변을  써 가지고 움직일동을 씁니다. 그거 뭐이냐 하면 사람은 기계가 움직이는 거와  다르다 그말이오. 사람은 기계가 움직이는 거와 다르고 사람은 생각해 가지고,  비판 평가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사람이 노동이다 하는 걸 말합니다. 이런데  어떤 사람은 그 움직일 동(動)자를 아무 자나 따나 이렇게 쓰는데 그것은 거기에  대한 철학을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노동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사람은 생각해 가지고 노동해야  됩니다. 기계는 그게 뭐 생각해 노동하는 게 아니고 기계는 만들어 놓은 대로  그대로 그만 움직이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게 아니고 사람은  여기에 대해서 현재도 미래도 장래도 또 과거도 생각하고 이라면 나는 어떠며 나  아닌 이웃은 어찌 되며 또 나를 만드신 하나님은 어찌 되느냐, 창조주와 자기와  모든 피조물과의 이것을 세 삼각을 생각하고, 또 과거 현재 미래라는 이 삼각을  생각하고 이렇게 해서 생각해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 그게 사람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오늘은 좀 생각을 좀 살려 봅시다. 이제 주님을 위하는 그것만  변동하지 안하면 그것을 이루는 지혜도 능력도 하나님의 것으로만 되게 되고 또  나중에 그 이루어 놓은 그것이 이루어 놓은 그것이 주님을 위해서 주님에게만  피동되는 것이 되어지고 주님 위주로만 되어진다. 한 번만 주님을 위해서  시작하는 그것만 변동 안 하면 이 모든 되는 것도 주님의 지능으로 되고 된  그것도 다 주님 위하는 것이 되어지고 주님 위주로 하는 것이 되어지고 하나  잘되면 모든 게 다 잘된다. 잘된 거 하나 거머쥐고 그것을 변동 안 하면 모든 게  다 잘된다 하나 잘못된 그걸 변동 안 하고 고래 있으면 모든 면이 전면이 다  모든 것이 끝까지 다 잘못되고 망하고 만다 그것을 좀 연상해서 생각해 보라,  연상이라 말은 계속 생각해 가지고 그것을 또 거기서 또 붙여 생각하고 붙여  생각하고 하는. 자꾸 이와 같이 생각하면서. 연상하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판정을 지워야 됩니다. 그저 생각나는 대로 푹 생각나는 대로 푹. 이 생각나면  푹 저 생각나면 푹 그런 사람은 그 사람은 인간으로서도 철학이 없는 사람이오.

그 사람을 말하기를. 요새 미개한, 요새 발달된 것도 야만입니다. 요새는 전부  물질 발달뿐이지 인간의, 인간이 볼 수 없는 그 이면의 오묘한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요새 사람들은 철학 없는 사람이 많아요. 철학 없는 사람 보면 '아,  콤퓨터만 하면, 콤퓨터 세상이기 때문에 콤퓨터만 하면 뭐 대통령도 다 하고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이 필요있는가?' 그런 어떤 대학 교수가 하나 말하기  때문에 나하고 싸워 가지고 마지막에, 차에 내려오다 그래 가지고 했습니다. 그  콤퓨터를 누가 만들었는데? 인간이 만들었으니까 만든 그 사람의 하나의  거석이지, 그것이 뭐 생각할 줄 모릅니다. 아마 콤퓨터 억만개를 여기에 놔 놔도  지금 '자. 앞으로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노' 생각하는 거는 하나도  모릅니다.' 만 개 놔도 그거 생각 못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등신 같은  사람이라도 고 하나 있으면 여기에 대해서 앞으로 이래 되나 저래 되나 한번  생각할 수가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은 지상 현실주의입니다. 현실. 눈에 보이는 현실주의가  20세기의 자랑하는 이 과학 세대라 하는 것이오. 그러나, 그 현실 외에 모르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거 뭐인가? 그것이 철학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사람을 접촉할 때 그 사람이 현실주의로 보는 거로만 위 주해서 날뛰고 그 뒤에  보이지 안한 이면에 뭐이 있느냐, 앞으로 보이지 않는 미래가 어찌 되느냐  그것을 생각지 않는 철학 없는 사람하고는 그 사람을 상대 안 해야 되지, 철학  없는 막살이, 철학 없는 사람은 막살이 하는 사람이라. 막살이 하는 사람  가지고는 뭘 상대해서 일을 못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그래도 누가 제일 승리하느냐? 철학을 아는 사람이 제일  승리합니다. 이 ○대통령도 보면. 얼마 전에 ○대통령이 그거 말했습니다.

노인당을 위하고 또 뭐 효를 하라 효행을 기르라 이라는 것은 그것은 요새 이십  세기에 우리나라에 있는 독특한 일입니다. 미국 같은 나라에 '효성을 해라 또  노인을 대우해라' 그런 것이 없습니다. 없는데. 한국에는 이래 노인 대접하라  하는 이것이 있어 가지고 참 아주 큰 철학을 하나 잡은 셈입니다. 사람은 나타난  거 그 이면에. 이면에 이 것이. 이것이 원인이 어디서 생겨 나왔느냐? 그것이  철학입니다. 또 이라면 지금 현재는 좋지만 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에 어찌 되느냐 하는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철학입니다. 그것을 사람이 아는 범위 내에는 콤퓨터  가지고 되지만 사람 이 모르는 그 속에 궁구는 콤퓨터는 만 개가 있어도  요만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철학 외에 종교가 있다, '그 사람은 철학은 있지만 종교가 없다.' 철학 위에  종교가 위입니다. 종교라는 것은 사람, 사람 이상의 어떤 존재가 있어 가지고  그이의 그 주장이 있기 때문에 그이의 비위에 서끌리면 망하고 그이의 비위에  합당하게 되면 성공하게 된다. 이래서, 철학 위에 종교가 있기 때문에 그 신을  찾을려고 애를 쓰는 것이 모두 다 미신으로부터 모두 이 종교들입니다.

 그런데 참 종교가 좋은 것인데 종교는 하나뿐입니다. 하나 외에는 전부,  사람들이 종교가 좋은 줄 알고, '사람보다 뭣인가 능력있는 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의 비위를 맞춰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분에게 공을 들어야 된다' 이래  가지고 공들일려고 하는 것이 알지 못하는 신에게 손을 비비고 공을 들여서  '백일제를 지내면 된다. 물을 평생 마당에 떠놓고 공을 들이면 된다' 그거는  무슨 신인지 모르나 어쨌든지 절대적인 제일 주권하는 능력있는 신이 있으니까  그 신에게 부르짖어서 그 신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인간 이 모르는 아주  주권하는 그런 권세의 신이 있으니까 그분에게 도움을 받아야 된다 해 가지고  모든 미신들도 생겨진 것이고 종교 유사 단체의 그런 모든 이종교들이 생겨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찾아 가지고 찾을라고 애를 썼지만 석가모니 같은 그런  독실하고 위인들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다만 그러면, 사람 이상히 지극히 큰  존재는 누군가? 자존하신 하나님 그분뿐이신데 그분에게 대한 그 도움을 받으면  좋긴 좋은데 그분의 도움, 알지 못하는 신 내가 모르지만 제일 주권하시는 능력  많은 그분의 도움을 받을라고 뭐 백일사제도 지내고 또 평상에 물 떠 놓고  새벽마다 목욕하고 축사하는 일도 하고 그렇게 하지만 그분의 도움을 입은  사람들이 없습니다. 혹 가끔 가 다 있긴 있습니다. 너무 그 사람이 참 성심  성의로 하고 그 사람이 옳은 것을 위해서 그와 같이 하려니까 하나님이 그  포원을 이루어서 그렇게 들어 주는 수도 있지만 그것은 참 만에 하나 억만에  하나 이렇게 되는 것이고 되나 껍데기 약간 하나님이. 하도 그래 쌓아니까,  자손이 없어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 자손을 준다. 또 그 사람이 자기에게 무슨  원통한 일이 있어 가지고 그라니까 그 원통을 풀어 준다 이런 것이지, 하나님이,  너무 그러니까 이래 보시고 돌아다니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사람이 너무  지성스럽게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이 감동되어서 이래 하는 일이 있지만 그래  된다 해도 그것만 됐지 하나님과 연결이 안 된다 말이오.

 연결이 안 됐는데 연결된 거는 뭐이냐?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피조물이 연결하는 데는 연결한 돌다리가 있어. 연결한, 연결한 돌다리가  있으니까 연결한 그돌다리가 뭐인가? 연결한 그 다리가 뭐인가? 연결되는 그  다리가 뭐인가? 연결되는 다리가 뭐입니까? 그거 아는 사람 한번 손들어 봐요.

연결되는 다리를 아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봐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뭐라고 했습니까? '또 나를 믿으라' 배워도 모른다 말이오.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이신데 자존자이신데,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과 연결이돼야 뭐 돼지지? 연결이 돼야 돼지지요?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나와 연결이 안 되니까 하나님을, 내가 아무리  하나님에게 부르짖어도 그 부르짖음이 올라가지 안하지, 아무리 하나님에게 많은  축복이 있지만 내가 암만 끌어 올라 해도 끌어오지 못하지. 그런데, 그 가운데에  연결시킨 중보자가 누굽니까? 자. 중보자가 누군지 아는 사람 손들어 봐요. 네,  인제 그라면 아는데 그거 내나 와 그래 모릅니까?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결이  중보자입니다. 내나 예수님이십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아무도 올 사람이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안했어요?  이러니까 성경을 이걸 알아야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는 그와 연결이 돼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석가모니 같은  사람을 찾을라고 애를 써도 찾지 못했는데 우리는 아무 애도 쓰지 안 하고 찾기  싫어서 '나는 교회 안 갈란다. 안 갈란다' 이렇게 반대를 했는데 어떻게 어떻게  애를 써 가지고 예수 믿도록 됐다 그말이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왜 그리  예수 믿기 싫은데 자꾸 남의 권면으로 억지로 예수 믿게 됐고, 또 석가모니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을라고 그렇게 애를 썼지만 찾지 못하게 됐고 그것이 무슨  이유입니까? 어디서 그게, 어디 그 원인이 있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 있어요?  ○○○집사님, 하나님의 택함에 있어. 우리가 생기지도 안한 저 목적. 하나님의,  하나님의 목적에서 부터 시발됐기 때문에 누가 그걸 변동하겠는가 말이오.

 이러니까, '아. 하나님이, 내가. 내가 하나님 목적 안에서 지음 받게 됐다.

목적 안에 있다. 목적 안에 있게 됐다.' 목적안에 있게 된 이것을 목적 안에  있을라고 천하 사람이 나를 도와서 운동한다고 그 운동이 되겠습니까, 또 모든  천하에 있는 세력을 다 합했다고, 합해 가지고 나를 돕는 다 해 가지고 내가 그  목적 안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목적 안에 들어가 있는 걸 온 천하가  끌어 낼라고 해서 끌어 낼 수가 있겠습니까? 이 절대적인 이 택함을 입은 이  구원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인해서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난  다음에 감사를 얼마나 하고 참 몇 달 동안을 물을 흘리면서 '주여, 감사합니다.

어떻게 나를 이 목적 속에서 지어 주셨습니까' 하는 데 대해서. 참 감격해서  감사의 and텅이가 뭐 집채뭉텅이 산 뭉텅이보다 더 많은 사람 있고, 지금까지  예수를 평생 믿어도 택함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이 눈꼽째기 만치 없는,  눈꼽째기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택함을 입었지만 눈꼽째기만치도 감사한  덩어리가 없는 사람도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하늘나라 가서 구원의 차이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런고로. 오늘 아침에는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해서 하는 이것이 아주 전멸인.

것입니다. 자기 위하는 그것이 그만 전멸이 그 속에 다 들었오. 또 내가 살든지  죽든지 괴롭든지 즐겁든지 나는 주님만 위해 살아야 되겠다. 주님 위해 살아야  되겠다 하는 주님 위하는 요것이 괴로와도 변동 없고, 어려워도 변동 없고, 또  지루해도 변동 없고, 세월이 오래 가도 변동 없고, 주님 위하는 것이 뭐 이런  환경 저런 환경 아무리 변해지고 시대가 변해져도 주님 위하는 것만 변하지  안하면 요거 하나 가지고 모든 거 성공 다 되는 것입니다. 요것을 꼭 잡아요.

 통성으로 기도 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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