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선지자선교회 1985년 7월 8일 교역자회 

 

본문 : 출애굽기 20장 4절∼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 새긴 우상이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글을 거기다가 각해 놓은 우상이라  하는 말씀인데, 그러면 거기에다가 글자를 박혀 놨으면 어떤 글자를  박히겠습니까? 어떤 것이든지 거기에 해당되는 글을 박히는 것인데. 박히는 중에  하나를 대표적으로 말한다고 하면 그것의 그 이름을 박히는 것이 그것이 다 일반  이치입니다.

 여기에 새긴 우상이라고 하면 무슨 글을 써 가지고 만든 그런 우상인가  그렇게만 우리가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있는 대로를 다 기록하지  안하고 그저 본인이 바로 깨달을라고 원하는 그 마음 있는 자와 또 그자에게  성령으로 감화 감동 시켜서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 간추려 기록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천하에도 다 둘 곳이 없을 만한 그런 다수한 양을 간단한 이 신구약  66권에다가 간추려서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추론도 할 수 있고, 추상도 할 수 있고, 또 해석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후서에 보면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이 경의 기록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한 마디 한 마디  받아 가지고 기록한 것이니라.' 그런 뜻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기록한 것도  기자들이 하나님에게 한 마더 한 마디 들어 가지고 들은 그대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요, 또 사사로이 풀지 말아라 하는 그 말씀은 성경을 간단 명료하게  기록한 이 성경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을 받아 가지고 또  하나님에게 하나 하나 해석을 받아서 그대로 성경 해석을 하라 하는 그러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환상 계시나 꿈 계시나 소리 계시나 자연  계시나 온갖 계시들이 있지만 이런 것들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우리에게 있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주의하는 것이 가하니라 말씀해  놓고, 모든 경의 말씀은 사사로이 풀지 않도록 주의해라 하는 그 모든 말씀을 다  종합해서 보면 끝에도 그랬고 또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라는 그 샛별도 내나 우리 심령이 밝아져 가지고 영감을 받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도록 그렇게 주의하라는 그런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참 우리가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것은 어떤 것이  바로 해석하는 것인고 하니, 혹 해석하는 데 대해서 주석을 쓰는 사람 이 해석을  한 것이나 또 설교하는 사람이 해석하는 것이나 그런 해석은 다 그것이  소극적이고 자기가 성경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 당한 현실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그 현실에 자기가 성경을 어떻게 풀이해 가지고 자기가 어떻게  현실에 그 성경을 해석하느냐, 성경을 어떻게 깨닫고 행하느냐 하는 그것이 그  풀이 중에는 제일 적극성 있는 중요한 풀이인 줄을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성경 해석을 아무래도 우리가 풀이하는 데는 우리가 풀이할 때 설교할 때에도 이  성경을 풀이하고, 또 주석을 쓸 때에도 우리가 이 성경을 풀이하고 하지만  그것은 다 소극적이고, 내가 현실을 만났을 때에 성경을 어떻게 풀이해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하는 그것이 제일 적극적이요 제일 중요한 해석인 줄 압니다.

그러면 우리 해석 가운데는 주석 해석보다도, 내가 주석을 쓰느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도, 설교하느라고 해석하는 것보다도, 내가 현실에 어떻게 행해야 되느냐  하는 거기에 대한 해석을 바로 가지는 것이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인 줄 압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경에 보면 우리가 성경은 이렇게 일반적으로는 배우지만 참  적극성 있는 그 가장 실질적인 각자들이 자기 현실을 만났을 때에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그것은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묻지 말아라  했는데. 묻는 그게 어떻게 해야 될 것을 묻지말라 그런 것이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는 그것이 내나 성경 풀이입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성경 풀이라는 걸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그것이 성경 풀이인데, 그 성경 풀이는 다른  사람에게 묻지 말고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너희에게 바로 가르쳐 줄 터이니까  그대로 행하라. 그러면 거기에도 내나 성정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다 그  영감 받은 그 마음 가지고 성신의 감동 받은 마음 가지고 성경 해석을 할 게  아니라 성령의 감화를 받은 그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해라고  아주 명확히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우리 가 해석을 하고 그대로 고 현실에서  행하는 것이 그것이 옳은 것인 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너무  그 실상에는 거리 먼 그런 껍데기 외식에서 날뛰기가 쉬운 줄을 압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해석은 아야 성신의 감화를 받기 전에는 성경  해석을 다 잘못하게 되기 때문에 그런 일은 다 자타를 망치는 일이기 때문에  성신 감화 없이 성경을 깨달을라고 그렇게 생각을 가지지 말고 부족해도 내가  성령의 감화를 받아 가지고라야만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그러면 성신의 감화 받았으면 감화 받은 것 가지고 내가 성경을 마구잡이로  해석해 나갈 게 아니라 성신의 감화 받은 내가 이제 하나님께서 또박또박 나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대로 해석을 해야 된다 하는 요 그 정확성을 우리가 성경  해석의 방법에 우리 준비의 표준을 삼아 가지고 이렇게 해야 되지 그냥 자기의  상식 가지고 좔좔 그리 해석한다든지 또 이 세상 무슨 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성경을 분해해 가지고 그저 일시 사람들만 알아듣도록 하면 됐다 하는 그런  주의를 가지고 한다는 것은 그거는 받을 심판이 많은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다 이 성경에 다 보면 성경 해석은 제일 본인이 이 현실을 당했을 때에  어떻게 하나 하는 그것은 그것이 막바로 그 경을 자기가 해석해 가지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게 해석 중에는 그게 제일 적극성 있는 해석이요 그것이  제일 중요한 해석입니다.

 여기에도, 우리는 요새 늘 이 말씀을 늘 가지고 오늘 아침에도, 어제 아  침에도, 뭐 어제 종일도 그저 이 말씀입니다. 이런데 여기에 새긴 우상이라  이랬는데, 저는 깨닫기를 이렇게 깨달았옵니다. 여기 새긴 우상이라면 또  우상에다가 글자를 새겨 놨으니까 글자를 새겨 놨다고 하면 그 새겨놓은 글자  가운데에 제일 중요한 게 뭐인가? 아마 그 우상의 이름일 것입니다. 우상의  이름. 우상의 이름이 기록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우상에 대한 그 모든  거기에 소속한 그런 해설들이 거기에 붙어서 기록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아라 이라고, 그 다음에 그 죄의 값을 갚되 삼사 대까지  그 죄를 갚겠다, 또 그것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신 그걸 보면  우리가 그저 물건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다가 각자를 해서 글자를 각해 가지고 해  놓은 그런 것만을 말한다고 하면 고 몇 가지 안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렇게 판정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이 새긴 우상이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어떤 이름이든지 이름 가진 이름이 있는, 이름이 난 이름이 있는  우상이라. 이래서 이름 있는 우상이라.

 그러면, 여기 이름 있는 우상이 얼마나 수가 많은가? 그 밑에 말씀하시기를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과 또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모든 것이라 다  말했으니까 그게 뭐 천천 억억으로 헤아릴 수 없는 그렇게 숫자가 많은 것일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숫자 많은 것을, 하늘에 있는 모든 형상과 땅에 있는  형상이라면 하늘의 형상이 그것이 뭐 그 천천 만만이라고 할 수 있고, 땅에 있는  형상도 천천 만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면 수 많은 형상인데, 또 고  위에는 새긴 우상이라고 이라니까 그 새김을 무슨 비석같이 이렇게 각자 각한  그런 거로 볼 건가? 새겼다는 건 이름을 썼다는 것인 데 이름 있는 우상이라.

이름 있는 우상이라. 그러면 새긴 우상은 이름 있는 우상이라. 이름 있는  우상이면 뭐인가? 이름 있는 모양인데 그것이 우 상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선물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름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는  말입니다. 이러니까 이거는 사람이라, 혹은 가정이라, 이거는 과학이라.

학문이라, 돈이라. 자연이라, 뭐 바다라, 물이라, 산이라. 짐승이라. 무슨 그  이름을 가진, 이름을 가진 어떤 것이든지 하는 이 말은 있는 종류대로 어떤  종류든지 하는 그것을 여기에다가 총칭해서 새긴 우상이라 그렇게 말한 것인  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면 확정이 되어집니다. 그 다음에 양을 말한 것을 보면  그렇게 안하고는 그 양에 대해서 이 해당되는 각한 그 새긴 우상을 찾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비문에, 새긴 우상 하는 그것은 어떤 그 이름을 가진 것이든지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든지 그것을 우상으로 만들지 말아라 하는 말입니다. 어떤  이름을 가진 것이든지 뭐 사람이든지 돈이든지 과학이든지 학교든지 또  기업체든지 지식이든지 이런 영광이든지 귄세든지 뭐 세상에 우리가 아는 대로는  이름 없는 게 있습니까? 아는 대로 이름 없는 게 하나도 없어. 행락이라는 것도  이름이 있고, 또 기쁨이라는 것도 이름이 있고, 이름 안 붙은 게 없어. 그러니까  너희들이 그 이름을 아는 대로, 너희들이 이름 아는 대로, 너희들이 무엇이라고  아는. 너희들이 무엇이라고 그 종류와 이름을 아는 대로 그 모든 것이 다 우상  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상 될 수 있다. 네가 만일 네  생활에는 백 가지 그 종류. 인간이나 모든 땅에 있는 모는 것의 백 가지 종류를  네가 접촉하고 산다고 하면 백 가지 종류가 다 너에게 우상 될 수 있다 그  말입니다. 백 가지 종류가 다 우상 될 수 있다. 사람이 활동 범위가 넓어서 다른  사람은 백 가지 가지고 사는데 그 사람은 천 가지를 활동 범위에서 천 가지를  사용한다면 천 가지 그것이 다 우상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뭐이든지 새긴  우상, 이름 있는 그 모든 것은 인생들에게 우상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여기에  나타낸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또 섬기지 말라' 이런 건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절하는 것은 거기에 복종하는 것이 절하는 것이겠고, 섬기는 것은  그것을 위주로 중심으로 이와 같이 하는 것이, 그것이 위하는 것이, 그것이  섬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위하는 것. 그러면 네가 만 든 것, 네가 만드는  것, 네가 만드는 것 천 가지고 만 가지고 종류대로 네가 그 종류 어떤 종류든지  그것을 위해서 네가 하나님 버릴 수 있다. 또 그것에게 네가 끌려 갈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땅위에 뭐 종류가 어떤 종류든지 무슨 가치 있는 종류면 그것이  끌려가지만 가치 없는 종류는 끌려가지 안한다 이렇지만, 가치 없는 종류가  아니라 어떤 종류든지 다 너는 끌려 갈 수 있고. 또 너는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  버리고 그거 위해서 하나님 버리고 또 거기에 끌려서 하나님 배반하고 하나님 법  어기고 그럴 수 있다 하는 요것을 지금 우리에게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우리가 이 깨달음을 이래 가진다고 하면 새긴 우상이라는 것은  그 이름 있는 우상이라 그것을 여기에 표시해서 새긴 우상이라. 이것이 좀 아마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좀 안 될 것입니다. 이거 이해 가 안 되면 이 뭐 설교  들어야 아무것도 모르게 됩니다. 새긴 우상이 모든 존재, 명칭 있는 명칭 있는  명칭 있는 종류는 어떤 종류든지 너에게 우상 될 수 있고, 또 그것에게 끌려서  하나님 배반하고 거기에 끌려 갈 수 있고. 또 하나님 배반하고 그거 위해서.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을 배반하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그렇게. 그러면 뭐 보는 것, 들리는 것, 접촉하는 것 전부 우상 다 될 수 있고,  내가 생각하는 것, 아는 것 말이오. 들은 것, 본 것. 내가 지식하는 것,  접촉하는 것 전부가 다 우상이 돼 가지고 나를 망칠 수 있는 그것이 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될 수 있다. 또 그러면 너를 망칠 수 있는 것은 것에게 네가 안  끌려가면 괜찮은데, 하나님 두고 끌려가지 안하면 좋겠는데 하나님 될 두고 그리  끌려가게 된다. 또 하나님 위하는 것 될 두고 그것을 위주로 위하는 것 되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지식이 너르면 아는 게 딴을 것이고, 또 지식이 좁으며  아는 게 수가 적을 것인데 네가 지식이 넓어서 네가 아는 그 종류의 수가 천이고  만이고 뭐 만이고 억만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이까짓 거야 싶으지만 그것은 다  너를 끌어서 하나님에게로 가야. 하나님께 끌려가야 될 터인데 하나님께 끌려 갈  것이 하나님에게 끌려가지 안하고 그것에게 네가 끌려 갈 수 있다. 또 하나님  위하지 안하고 하나님 위하는 것 버리고 또 그거 위할 수 있다, 너에게 우상 될  수 있다 하는 그 말입니다. 우상 될 수 있다.

 그러면, 이걸 우리가 어떻게 면하겠습니까? 그러면 안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생활해 보면 그거 뭐 사소한 것인데 나는 거기에 마음이, 마음이  순간이라도 끌려 가지고 하나님께 끌리지 안하고 거기에 끌려 가지고 우리는  시간을 경과할 때가 있고, 또 하나님 위하는 것보다 그것을 위해서 시간을  경과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우상은 그것을 위하는 것이요, 거기에 끌려가는  것이니까 위하는 것 끌려가는 것인데, 위하고 끌려가는 그 종류가 천 가지 만  가지 아니라 네가 아는 대로 열 가지 이름 알면 열 가지, 백 가지 이름 알면 백  가지 네가 아는 모든 종류의 것은 너로 하여금 하나님 멀리하고 그것에 끌려가고  하나님 위하는 것 버리고 그거 위하는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될 수 있어서 위하는 건 어짜든지 우리는 하나님만 위하고 또  하나님에게만 복종해야 될 우리들인데, 다른 데 복종하지 안 해야 될 터인데.

그러면 그렇게 하나님 위하지 안하고 다른 것 위하고 하나님께 복종하지 안하고  다른 것에게 복종하면 그게 뭐인가? 그것이 바로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미워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주님 미워하는 것이다. 주님 미워하는 것이라면  그 댓가가 어떤가? 그 죄를 갚되 그 삐뚤어진 그 댓가를 너희들이 치르는데 삼사  대까지 그 삐뚤어진 것에 대한 그 댓가를 너희가 받아야 한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 이래 놨으니까 이것을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성경을  너무 지나치게 해석을 해서 없는 것을 자꾸 그래 해석하면 도리어 성경에 네가  더 없는 것을 가하면 형벌을 더 가해서 받는다. 또 있는 것을 없애면 또 네가  구원에서 제해져서 받을 구원을 못 받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는데. 그러기에  우리가 참 상이 아니면 심판이 됩니다.

 여기서 새긴 우상이라는 이것을, 이 새긴 우상은 무슨 비문같이 이래 써 놓은  그런 우상 그런 것을 종자를 말할라고 하면 그까짓 것 몇 개 안 됩니다. 몇 개  안돼요. 그런 거는 뭐 얼마든지 피하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어떤 형상이든지 하는 것을 보면 그  형상이라고 하면 어떤 종류라면 종류마다 형상이 있지 않습니까? 그 모든 종류가  다 포함됐다 말이오. 거기에 다 포함됐기 때문에 여기에 새간 우상이라면 새긴  우상은 따로 있고. 또 그 모든 모양은 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게 다 같은  말입니다. 그 새긴 우상이라고 발표해 놓고 그 다음에는 '하늘과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형상이든지' 하는 걸 보면 새긴 우상도 그러하고, 또 이 모든  모양도 그러하다 그런 것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우리가 아는 대로의 종자는 내게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이  될 수 있다 그 말은 내가 거기에 끌려 하나님에게 끌릴 걸 거기에 끌릴 수 있다.

또 하나님 위할 것을 그거 위할 수 있다. 그러면 그게 뭐이냐? 그게 죄다, 그게  삐뚤어졌다. 그러면 삐뚤어진 그것의 영향이 삼사 대까지 간다. 그러면 이걸  이길 도리가 뭐이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이것을 이겨서 우상을 만들지 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면, 우상 만드는 것은, 자기가 우상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무엇에 절을 하는  것 신사 참배라든지 단군 신사나 또 이순신 동상이나 신사나 또 기자 제단이나  뭐 이런 걸 말하는가? 그런 것은 다 몇 종류고 사소한 것이고 그저 그런 것은  속에서 우리가 어떤 범죄했다는 그 증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과거에 신사  참배에 한 그것이 신사 참배 안 했다, 했다 그게 아니고, 신사 참배를 그것을 안  한 사람은 신사 참배만 안 했다 그렇게 보면 안 되고. 한 사람은 신사 참배만  했다 그래 보면 안 됩니다. 그 신사 참배는 안 한 사람은 그것은 우상이 많지만  그 우상을 하나님 보시기에 우상을 섬기지 아니한 물론 다 회개하고 회개해서  우상을 섬기지 아니한 그 증표가 뭐이냐 하면 그 신사 참배 안 한 것이다. 또  신사 참배하는 건 자기는 뭐 생명을 내대고 이렇게 전부를 기울여서 전력했지만  그 사람은 우상에 절하게 됐다.

 그러면, 과거에 신사 참배 한 걸 보면 어떤 사람은 참 힘을, 한 예를 들면,  무슨 비유로 말한다면 힘을 한 백 톤쯤이니 힘을 쓰는 데도 기어코라도 신사  참배를 하고 만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그 일 톤도 힘도 쓰지도 안하고 신사  참배 안 하고 지낸 사람 있습니다. 그것이 어째 그러냐? 이것은 눈에 보이는  우상이라는 이거는 인간이 이해 못 하고 우상인 줄 뚜렷히 모르는 그런 그  소스락 그런 평소 생활에 우상 그 섬김을, 우상 숭배를 많이 한 사람은 너는  우상 숭배를 많이 했다 하는 증표로 이제 그 우상 숭배를 하게 했고, 또 이  사람은 우상 숭배 안 했다 하는 그 증표로써 우상 숭배를 안 하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 우상 숭배하는 데서 고생을 오히려 노고를 많이 한 사람도 우상  숭배를 이기지 못했고 또 아주 별로 힘을 안 쓰고도 우상 숭배를 이긴 사람  있다.

 그러면, 그 신사 참배로써 그 사람이 우상 숭배했느냐 안 했느냐 그 판가름에  결정 지우는 그 신사 참배냐. 또는 인간이 자타들이 모르는 은밀한 그 우상  숭배를 하고 안한 그 비밀의 것을 이것을 모든 자타들이 볼 수 있도록 드러내는  하나 증표라고 볼 수 있느냐? 인제 그것도 좀 문제입니다. 이거 좀 억해같지만  그 깊이 여러분들이 가서 생각하면 그게 맞습니다.

 그러면, 예를 들어서. 우상 숭배 앞으로 단군 신사가 나온다고 하면은 단군  신사에 절을 하지 안할라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때 나는 생명 내놓을란다.

생명을 내 놓고 나는 우상 숭배 안 할란다. 생명 내 놓을 각오를 하고 기도를  하고 또 자기는 결심도 하고 많이 기도를 합니다. 기도하는 그 방편 가지고  기도하고, 나는 어떤 고문과 고행을 당해도 나는 우상 숭배 안 하겠다. 단군  신사에 절하지 않겠다. 또 그 뭐 어떤 그 독약을 먹인다 해도 나는 우상 숭배 안  하겠다. 독약을 먹여도 안 하겠다 죽여도 안 하겠다, 고문과 고행을 줘도 안  하겠다, 감옥에 갇혀도 안 하겠다 안 하겠다. 그러니까 안 하겠으니까 안 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이런 결심과 각오를 자꾸 다지고 다지고 하는  그것이 우상 숭배를 이기는 그런 법칙인가? 그 법칙 하나 있겠고  거기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닥치지 안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도 없고 내일 일은  내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그랬으니까 이런  성구를 본다면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 제가 각오한다느니 결심한다느니 그거는 한  일면으로 말하면 하나님 말씀을 어긴 게 되고 만다.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  하는데 그 뭐 제가 생명 내놓을 것까지 다 이렇게 한다는 것 그게 방법이  아니다. 우상 숭배 안 할라면 오늘에 무슨 그 종류든지 어떤 종류든지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그 알고 있는 이름을 가진 종류 뭐이든지. 예를 들면 만일 그 나무 한  포기라도, 나무 한 포기라도, 또 무슨 버러지 하나라도. 고기 한 마리라도, 또  짐승 하나라도, 그 새 한 마리라도 또 사람 하나라도. 뭐 돈 한 푼이라도, 물건  하나라도 어쨌든지 이름을 가진 어떤 물건이든지 그것을 네가 우상으로 삼지  안해야 된다. 그래서 이런 것을 우상으로 삼지 안하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에게 하나님 배반하고 거기에 끌려 가고, 또 하나님 위하는 것 버리고  그거 위하고. 그거 위하는 그것을 안하도록.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뭐 하루 접촉하는 그런 종류로 말해도 뭐 몇 십 가지라  할 게 아니라 몇 백가지 됩니다.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으로 말하면 그 뭐 심히  숫자가 많은데 그 많은 숫자가 이렇게 막 지나가고 있는데 그런 것을 우리가  우상되지 않도록, 우상되지 않도록 그것에게 주님에게 끌리지 안하고 주님 버려  두고 거기에 끌려가고, 주님 위하지 않고 그거 위하고 하는 그런 일 안 할 라고  조심을 발발 떨면서 아무리 해 봐도 그거는 안 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 해  놨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어야 됩니다. 암만 말해도 안 된다.

 그러기 때문에, 뚜렷히 어떤 그 뭐 우상 숭배라고 국가적으로나 그  시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나타났을 때에 그것을 안 할라고만 네가 애를 쓰지  말아라. 그거 안 하는 것보다 네가, 네가 관련 가지고 있는 알고 있는  종목대로의 모든 종목 그것이 너에게 우상되지 않도록 네가 노력을 해서 그것이  네게 우상되지 안하면 나중에 가서 형식 우상은 네게는 필요가 없다. 그 우상  없어지니까 너는 우상 섬기지 안하는 자인데 그 뭐 껍데기 그런 우상을 가지고  우상 섬긴다, 절해라 안 절해라 하는 그런 시험도 오지 않는다. 그런 시험도  오지 안하고 아무 어려움도 오지 않는다. 그 사람에게는 거기 대해서 뭐 우상이  한다 해도 거기에 대해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이 신사 참배해라 마라 그런  말도 없고 아무 어려움도 없이 그런 건 다 그 사람에게는 상관도 없다. 예를  들면 담배를 피우지 안하고 아주 금연한 사람에게 담배 조사가 뭐 그 사람에게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 아무 필요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래 된다.

 그러면 우리가 모든 종류대로의 그것이 내게 우상되지 않아야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 두고 거기에 끌려가는 것, 또 하나님 위하는 것 두고 그것 위하는 것이래  되는 것 그걸 안 해야 되겠는데. 이걸 안 할라고 하면 우리가 미치겠습니다.

우리가 미쳐요. 그렇지 않습니까. 뭐? 한 시간에도 여러 수많은 종류를  접촉하는데 이거 위하지 않고 주님 위해야겠다. 그거 위하지 않고 주님  위해야겠다. 자꾸 이라면 그란다고 해도 하다가 보면 나중에 가다가 그거 위하지  안한다고 주님 위한다고 했는데 하다 보면 삐쭉 나가서 기도한다 하는 것도 또  어만 데 가서 서서 있는데, 기도한다고 어만 데 가서 있고. 또 찬송한다고 어만  데 가서 가지고 있으니까 이거 참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거기에 대해서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그래  말씀했습니다. 4절에 '너를 위하여' 이제 어디서부텀 이 일을 우상. 또 삼사  대까지 이 하나님 앞에 죄의 보응을 받는 이 일을 면할려고 하면 어디서부터  면해야 될까? 네가 거기에 섬기지 말라니까 섬기는 것을 안 섬길라고 거기서  애를 써야 될까, 또 절하지 말라 하는 절하지 안하는 데 거기서 애를 써야 될까,  또 하늘에나 땅에 있는 그런 형상 그거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그런  것으로 가지고 너의 우상을 삼지 말아라. 그러면 우상 삼지 안하는 거기서 애를  써야 될까, 또 이런 저런 이름하는 그런 모든 이름 있는 그런 것을 우상되지  않도록 그렇게 애를 써야 될까 그런 것도 해도 안 된다. 그거 안 된다. 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뭐이냐 하면 네가 어디서 시발이 되느냐? 모든 것을 너를  위해서 하는 그것을 네가 돌이켜서 크나 작으나 그만 네가 나는 나 위해서 살  사람 아니라 나는 뭐 좋으나 하찮으나 뭐 나 위하는 거는 할 수 없다. 나는 주님  위해야 된다. 나는 살아도 죽어도 먹어도 마셔도 나는 주님만 위해서 사는  사람되는 그걸 네가 힘을 써서 그걸 양보하지 말아라. 그걸 놓지 안하면 자연히  그 모든 것은 생각지 안해도 저절로 다 따라가서 다 돼 버린다 하는 요 승리의  방법을 우리에게 아주 참, 아주 간단하고 중요하게 우리에게 알려 줬습니다.

 이러니까, 요것도 자기가 요 계명이 요게 그렇게 간단한 것 같은데. 요 이  계명이면 요거 간단한 것 같으나 요 계명은 얼마나 어렵고, 모든 계명이 알고  보면 이렇게 깊고 어렵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계명을 하나 깨닫는 데는 뭐  학자도 필요 없고 자기가 그렇게 자기를 위하는 일을 그것은 안 되니 자기 위한  일을 버리고 모든 듣는 것이나 보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접촉하는 것이나  모든 것을 나는 주님만 위해서 남은 여생은 살 자이지. 내가 주님 외에는  아무것도 위할 수 없는 자이다, 나는 주님 위하는 것이 내 생활이다 요것만 네가  연습해 가지고 그것만 할라고 하면, 그것을 할라고 하면 우상에게 가기 전에  우상되기 전에 네가 자꾸 회개할 게 나온 다. 주님 위할라고 했는데 주님을  위하지 못했다, 주님을 위주하지 못했다. 자꾸 주님 위해야 되는데 거기서 자꾸  고치다 보면 나중에는 우상 다 절단 나 벼렸고, 나중에 신사참배니 그런 거 뭐  단군 신사 오는데, 단군 신사 오는데 너는 자꾸 거기서 하 이거 내가 오늘도 또  이거 위하지 못했네, 또 이 시간도 위하지 못했네, 아, 요것도 내가 주를 위하지  못하고 요것을 날 위해서 했네.' 고거 고 씨름만 하다가 보니까, 그거 하다  보니까 단군 신사에 절 안 한다고 목사들을 잡아다 놓고 다 뭐 뚜드리고 고문  고행했는데, 그만 자기는 소문도 못 듣고 돌아다니고 뭐 돌아다니면서 단군 신사  절하면 그 죄가 된다고 이렇게 외치고 이래도 너에게 대해서 '너 지금 그 단군  신사 절 안 하는 사람 죽이는데 네가 외치고 돌아다니느냐?' 암만 외치고  돌아다녀도 그 사람에게 대해서 '네가 어찌 단군 신사에 절하지 말라고 이래  선전을 하고 있느냐?' 거기에 대해서 아무 상관이 없다. 거기에 대해서는  말하지를 안하고 거기에는 상관이 없다. 우상 시험이라 하는 것은 네게는 오 지  못한다 하는 그런 것을 자기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이든지 자기 위하는 것이 삼사 대까지 죄의 보응을  받는다는 그만 그 시발입니다. 자기 위하는 거기서 고쳐야 되지, 자기 위하는  거기서 고쳐서 자기를 위하지 안하고 구속하신 주님을 위하는 거기에서 돌아서야  되지 자기 위하는 거 해 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생명 바쳐도 안 됩니다.

생명 바쳐도 절대 안 되고 그거는 다 지고야 만다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 지는  것은 신경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 위하는 거기서 자기 위하지 말고 주님  위하는 그게서 고 결정이 되는 거기에 성패가 있는 것이고 다음에 성패 있는 거  아닙니다. 뭐 만들지 안하고 한다는 그거 성패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만들지 말라는 것은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지 무슨  우리가 조성하지 말라는 말 아닙니다. 우리가 조성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지 그 조성하는 걸 금하는 것 아니요. 하늘의 것도 땅의 것도 세상  사람보다 우리가 그 사람들 하나 만들면 우리는 둘 만들어야 되겠고. 그 사람들  만들지 못하는 걸 그 사람들 보다 일 년 앞서 만들면 그만침 우리가 승리할  것이고, 십 년 앞서 만들면 더 큰 유익을 볼 것이고, 그러니까 자꾸 만들수록  우리가 승리하는 것이지 그게 만드는 게 나쁜 거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런데 다만  우상으로 만들지 말라.

 그러면, 우상으로 만들지 안하면 어떻게 우상으로 만들지 안 할 수 있느냐?  우상으로 만들지 안하는 것은 다만 그 모든 것을 나를 위해서 하지 안 하고 주를  위해서 하면, 주를 위해서 하는 거기서 결정을 지워서 주를 위해서 하지  안했으면 그게서 돌이켜서 다시 주를 위해서 하는 것으로써 돌아서서 그것을  주를 위하는 것으로 시발해 가지고 주를 위해서 네가 만들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살기도 하고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사용하기도 하고 주를  위해서 하는 그것만 요 동안하고 그게 만약에 그거를 가졌으면 즉시 주를 위하는  걸로 돌이키라.

 고게서 돌이켜서 고 주를 위하는 고 자리를 떠나지 안하고 네가 주를 위하는 고  자리서 살게 되면 모든 너의 하는 일은 다 그게 우상되는 게 아니고, 그것이 다  우상되는 게 아니고, 우상이 안 되면 뭣 되겠습니까? 네 선물이 되는데, 선물이  되는데, 선물된다는 그것은 그것이 그 실체의 실체를 말하는 것 아니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다는 그런 그 하나님에게 선물 받았다는 것인데, 그게  우상의 반대는 뭐이겠습니까? 우상의 반대는?

 그것이 자기를 위하면 말이요, 자기를 위하면 자기를 위하는 일을 할 때에 그  때에 거기에 쓰이는 지혜가 무슨 지혜겠습니까? 자기를 위해서 뭘 하면 그  쓰이는 그 사용되는 지혜가 무슨 지혜겠습니까? 누구의 지혜겠습니까? 뱀은  얼토당토 안 하게 뱀은 저 어만 걸 그럴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하는 일을 할 때에  그때에 이용되는 지혜는 누구의 지혜겠습니까? 자기의 지혜입니다. 자기의 지혜.

그 자기 지혜 아닙니까? 자기의 지혜. 또 그 일을 하는 데에 힘은 누구의  힘이겠습니까? 자기의 힘입니다. 자기의 지혜, 자기의 힘, 요 들어 가지고 집에  가서 오래 동안 명상하면 나올 겁니다. 자기의 지혜, 자기의 힘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자기의 힘 뭉텅이, 자기의 지혜 뭉텅이가 이제 무엇을 만 들어  놨습니다. 자기 힘 뭉텅이, 자기 지혜 뭉텅이가 만들어 놨는데, 그러면 자기  힘으로 만든 자기 힘 뭉텅이요, 자기 또 지혜 뭉텅이인데, 자기 힘 뭉텅이 자기  지혜 뭉텅이 그거는 어떤 뭉텅이입니까? 그거는 어떤 뭉텅이 지요? 원죄 뭉텅이.

네, 자기 뭉텅이에 가까왔는데, 자기 뭉텅이라는 고 게 자기 위하는 뭉텅이  아닙니까? 자기 위하는 뭉텅이 그렇지 않소? 자기 위하는 뭉텅이 아니겠소? 이  좀, 자기를 위해서 할 때에 그때 자기 위해서 할 때에 자기 딴에는 자기를  위하니까 자기 지혜로서는 제일 자기 위함이 되어지도록 자기 위함에 자기  지혜로서는 자기를 위하는 이상적인 제일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자기 위하는  일을 만드는 데에 그 지혜로 쓸 것 아닙니까? 또 자기 위하는 것을 만들 때에 그  힘도 자기 위하는 그 일이 잘 되도록 자기 위함이 잘 되도록 자기에게 있는 좋은  힘을 다 들여 가지고 그 일을 만들지 안하겠습니까? 고 일 만들었으니까 그것은  만든 뭉텅이 그것은 무슨 뭉텅이냐 하면 자기 위하는 뭉텅이요. 자기 위하는  뭉텅이인데 자기 위하는 뭉텅이인데, 자기 위하는 그 뭉텅이가 자기 지혜로  되어진 그 자기 지혜의 뭉텅이요, 자기 힘의 뭉텅이요, 그런데 그거는 자기  위하는 뭉텅이라. 그러니까 그 뭉텅이는 그 뭉텅이 존재가 자기 위하는  뭉텅이요, 자기 위하는 힘으로 만든 뭉텅이요, 자기 위하는 지혜로 만든  뭉텅이니까 이 뭉텅이는 순전히 자기 위하는 뭉텅이입니다.

 이러니까, 이 뭉텅이가 자기 위하는 뭉텅이니 자기가 모든 세상에 어떤 게  접촉해 볼 때에, 그러면 자기를 위하는 것 중에 제일 자기 보기에 자기 지혜로  볼 때에, 자기를 위하는 것 중에 제일 자기를 위하고 알뜰히 위하고 유력하게  위하고 참 자기를 위한다는 것이 뭐 백 개 천 개 있다 할지라도 자기가 볼 때에  자기 위하는 것으로서 제일 참 자기를 알뜰히 위할 수 있는 그 뭉텅이는 어떤  뭉텅이겠습니까? 어떤 뭉텅이겠습니까? 어떤 뭉텅이지요? 예? 어떤 뭉텅이지? 그  뭉텅이가 여러 뭉텅이 있는데, 자, 이게 날 위할란가 저게 날 위할란가? 그러면  자기 위하는 것을 찾습니다. 자기 위하는 것 뭣이 좀 내게 유익할고, 날 위할고?  자기 위하는 걸 자꾸 이래 찾고 돌아다니는데 자기 위하는 것을 찾고  돌아다니는데, 그 많은 존재들이 있는 데 그 존재를 볼 때에 이게 날 좀 잘 위할  건가, 저게 날 잘 위할 건가 자기 위하는 걸 찾고 다니니까 자기를 제일 잘 위할  것이 한 뭉텅이 있는데 그건 뭐이겠습니까? 네? 뭐 이겠지요? 그거지요. 그거  아니겠습니까? 자기를 위하는 뭉텅이를 또 자기 위하는 힘으로 만들었고 자기를  위하는 지혜로 만 들었으니까 이거는 순전히 자기 위하는 뭉텅이기 때문에  천하에 다 돌아다녀도 그것밖에는 자기 위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 중에  제일 자기를 위하는 게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그것에게 절을 안 하고  그것에게 위하고 섬기고 절하고 섬기는 일을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  이해가 됩니까? 안할 수가 없어요.

 무엇이든지, 요거 지금 여러분들이 알기 어려운데, 무엇이든지 이름 있는  종류라고는 뭐이든지 자기가 지금 그 기술을 배운다든지 공부를 한다든지 돈을  벌었다든지 사업을 했다든지 가정을 이루었다든지 뭐 자기의 무슨 어떤 돈을  벌었다든지 무엇이든지 자기를 위해서 그것을 했으면, 자기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그것을 하면, 자기 위해서 그것을 했는데 자기 위하는 것을 하는데 자기 위하는  것을 할 때에 거기에는 반드시 지능이 들어야 되는 것이니까 자기를 위하는  것을, 위하는 것을 할 때에 거기는 반드시 지능이 들어야 되겠으니까 자기를  위하는 것을 할 때에 지능이 들었으면 그 지능은 누구의 지능이겠습니까? 누구의  지능입니까? 자기 지능인데 자기 지능이 면 자기 지능도 많은 지능이 있는데  자기 지능 중에 그 지능은 뭣하는 지능입니까? 자기를 위하는 지능입니다.

자기를 위하는 것을 자기 위하는 지능이 만들었기 때문에 그거는 자기 위하는  뭉텅이요, 자기 지혜로 비판하고 평가 해 볼 때에 그것이 제일 자기를 위할  것으로 보여지니까 그것을 자기가 그걸 제일 아끼고 섬기게 되고, 또 거기에  절해서 거기에 끌리게 된다는 것은 필연한 사실인 것입니다. 이 필연적의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자기를 위한다는 요게부터 갈래길을 돌아서  가지고 요게서부터 돌아서야 되지 자기 위하는 그거는 돌아서지 안하고 그  다음에 나가 가지고 서 생명 내 놔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왜정 때에도 왜정 때도 꼭 고 경중대로 가요. 경중대로 가서  그 신사 참배 그런데에 거기에 대해서도 조금 맞고 만 사람, 조금 고생 받고 만  사람 어떤 사람은 고생도 받지 안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어. 상관이  없어 뭐 신사 참배 그거 안 한다고 이래 해도 상관없는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그거요. 있었으니까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그랬을까? 그러면 그 사람은  신사 참배 안 할라고 자꾸 외치고 돌아다녀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도 못했고 말도 안 하고 그렇게 외치고 돌아다녀도 신사 참배를 하지  안했다. 또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을, 신사 참배하지 말라고 이렇게 해도  거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말을 하지 못했다. 말하지 안했다. 어째 그럴까?  왜 그랬을까? 그게 어째 그럴까? 그것은 거기에 대한 철학을 연구를 해 봅시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거기에 대한 철학을 연구했습니다. 저게 대해서 그 어떤  사람은 그랬는데 어째 그럴까?  그걸 보니까 하나님이 이거 네가 우상 숭배하나 안 하나 이렇게 현재보고  시험해서 우상 숭배 안 한다 이걸 따져 볼라고 하면 그 우상 숭배를 안 하기  위해서 고생을 예를 들어서 백 개 고생을 받은 사람이 있고 한 개 고생 받은  사람 있고. 이러니까 한 개 고생 받은 사람은 한 개 고생 받고 그거 안 하고  말았고, 어떤 사람은 백 개 고생을 받아도 신사 참배를 우상 숭배를 하고 말았다  말이오. 그러니까 그게 공평이 없거든. 그게 무슨 그 속에 비밀이 그 속에  철학이 들어 있을까? 이제 요새 사람들 말로 말하면 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보이는 것으로써 보이지 안하는 것의 그 원인의 저 깊은 것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 그것이 철학 아닙니까? 그러면 어째서 그럴까? 또 그보다도 어떤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뭐 신사 참배 안 해야 된다고 자꾸 이렇게 막 이렇게 해도 그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들이 귀가 없어 듣지를 못하는지 어짜는지 거기에  대해선 아무 상관도 안하고, 말 한 마디도 거기 대해서는 도무지 접하지를  안하고 했으니까 그거는 왜 그랬을까?  그것을 우리가 추론해서 이렇게 생각해 볼 때에, 그러면 그 사람이 만일 평소에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다. 우상을 만들지 안했다. 우상을 만들지 안 했다.

우상을 만들지 안했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우상을 그 사람은 우상을 만들지  안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예? 자기를 위하는 것을 하지 안했다. 우상  만드는 것 자기 위하는 것을 하지 안했다. 그러면 자기 위하는 것을 하지  안했으면 그 사람은 뭣 했을까? 이 자기를 위할라고 하니까 와 가지고 위하지  못하게 해서 자기를 위하지 못했는데, 자기를 위하지 못했으니까 일은 해야  되는데 일을 하는 데 자기 위하지 못하니까 그 사람은 주님 위한 것이 된다  말이오. 자기 위하지 못하고 주님 위했다 말이오.

 주님 위했으니까, 그래 주님 위하는 일을 할라고 하니까 주님 위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세상에서 방해를 많이 합니다. 방해를 많이 할 때에 방해를 받았으면,  주님 위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방해를 할 때에 방해를 받았으면 그 사람이 무슨  지혜를 썼을까? 예? 주님 위하는 일을 할라고 하는 데 세상이 못하구로 방해를  할 때에 그 방해를 자기가 받았으면 그 사람은 무슨 지혜를 쓴 사람일까? 자기를  위하는 지혜를 쓰지 안했소? 주님 위하는 지혜를 쓸라고 하니까 못쓰구로  방해하는데 방해를 받지 안하고 방해하든지 말든지 주님 위하는 일 했으면 그  지혜를 용납지 안했지만, 그 주님 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방해를 받았으니까  그 침노를 받았으니까 그 사람은 주님의 지혜를 쓰지 못한 것 아닙니까? 주님의  지혜를 쓰다니? 주님의 지혜를 써서 주를 위해서 하는 것은 주님의 지혜를 써서  해야 되는데 주님의 지능을 써 가지고 주님을 위하는 일 할라고 하니까 하지  못하게 해서 그것을 하지 못했으니까 그 사람은 세상 지능을. 자기 지능을 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지능을 쓴 사람인데, 아무리 세상이 그것을 주님 위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이래 하는데 매를 때려 가지고 못하게 해도 합니다. 또 그 사람을  감옥에 가둬도 또 합니다. 죽여도 죽어도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슨 지능을  썼습니까? 예? 주님의 지능을 썼습니다. 주님의 지능을 써 가지고 주님 위하는  거를 만들었으니까 그 뭉텅이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되겠습니까? 주님을 위해서  한 뭉텅이인데 그 뭉텅이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될고? 예? 그 뭉텅이 이름을  뭐라고 지어야 되겠어요? 자, 주님 위하는 일을 할라 하니까 주님 위하는 일을  할라 하면. 주님 위할려고 하는 일을 할라고 하면 주님의 지혜로 해야 되지  주님의 지혜로 안 하면 주님 위하는 일 안 되거든 주님의. 지혜와 주님 법칙대로  해야 되지 또 주님의 그 주님의 능력으로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해요? 주를  위하는 힘으로 하고 주님 위한 지혜로 해야 되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할라고 할 때에 세상 이 방해해서, 이것을 양보하지 안하고 자꾸 주님 위하는 그  지능의 일을 합니다. 하다가서 뚜드려 맞고 하다가서 감옥에 갇히고 하다가 죽임  당하고 그래도 하다가 죽임 당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주님 위하는 그 위한  그것이 무슨 뭉텅이겠습니까? 그걸 믿음 뭉텅이라고 하면 어찌 됩니까? 고 믿음  뭉텅이야. 하나님에게 복종한 믿음 뭉텅이라 하면 어찌 됩니까? 믿음 뭉텅이라.

믿음 뭉텅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면 잘못 지어진 이름입니까? 그게 믿음  뭉텅이입니다. 믿음 뭉텅이  그러기에. 우리 하는 일은 믿음 뭉텅이가 되든지 우상 뭉텅이가 되든지 둘이  됩니다. 우상 뭉텅이는 자기의 지능으로 말이요, 자기, 자기 위하는 것을 자기  위하는 지능을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자기 위하는 뭉텅이가 됐습니다. 또 주님  위하는 그 뭉텅이는 무슨 뭉텅이인가? 주님 위하는 뭉텅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믿음 뭉텅이가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면 필연적으로 나중에 자꾸 세상이 못 하게 할수록 믿음 뭉텅이는 커집니다.

못 하게 할수록. 그러니까 주님을 위하는 생애는 마지막에 믿음 뭉텅이가 자꾸  커져 가지고 돼집니다. 또 자기를 위하는 그것은 무슨 뭉텅이냐? 자기를 위하는  뭉텅이는 자기 뭉텅이가 됩니다. 자기 뭉텅이가 되고 하나는 믿음 뭉텅이가  됩니다.

 믿음 뭉텅이가 된 것은, 그것은 전부 믿음 뭉텅이가 됐으니까 그 믿음 뭉텅이가  된 그것은 그 요소가 어떤 요소겠습니까? 예? 그 무슨 요소요? 예? 고거는 신적  요소입니다. 하나도 딴거 섞이지 않고 신적 요소요, 하나님 요소 신적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이야 이 세상에서 뭐 그 우상 숭배라고 하는 거는 얼토당토 천 리 만  리 먼데, 그러기 때문에 그 우상 숭배라는 그것 가지고 하나님께서 내나 그  시험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 하나님이 하시는데  벌써 이거는 싸워서 믿음 뭉텅이가 돼 가지고 있는데 그걸 새삼스레 너 주님 그  위하는 일을 말고 이 세상 위하는 일을 할래 안 할래? 그거 벌써 싸워 가지고  벌써 통과해 왔는데 그런 싸움이 있을 필요가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다 같은  그런 어려움의 박해를 당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그렇게 쉽게 이기고 어떤 사람은  어렵게 이기고 어떤 사람은 죽자 껏 애를 써도 안 된 사람이니 그것이 어디서  그러냐? 저 깊숙한 원인에서부터 돼 나와서 그런 것이다 하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위하게 되면, 요것도 말이오. 주님만 위하게 되면 다 주님의  지능, 주님의 지혜가 뭐입니까? 지혜가 신구약 성경 말씀 아닙니까? 주님만  위하게 되면 주님의 지혜로 하게 되고, 또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는데 그  주님의 구속의 것인 줄 알고 자기는 주의 것으로 알고, 자기는 주의 것이요  자기는 주의 종이요, 자기는 주의 성전이요. 자기는 주의 지체 요 자기는 주의  몸이라. 이런 줄 알고 이래 했으니까 그 지능이 누구의 지능입니까? 주님 위하는  일을 할라고 하니까 내 지능인데 주님의 지능이요, 내 지능인데 주님의  지능이요, 내 지능과 주님의 지능이 같이 돼서 내가 주님의 것이 돼 가지고 주의  것만을 내 것으로 삼으니까 내 것은 없고 주님의 것만을 내 것으로 삼으니까  내게 있는 것은 다 주님의 것이라.

 이러니까 주님을 위하는 요게서. 주님을 위하는. 주님을 위하려는 요게서  만가지가 다 돼 버립니다. 다 돼 버리고, 자기를 위하는 데 여기서는 다  만가지가 다 멸망으로 돼고 마는 것이니 주님을 위하느냐 자기를 위하느냐.

누구를 위하느냐? 요게서 우리가 입각해 가지고 주님 위하는 요 자리를 떠나지  말아야 우리의 생애는 승리가 되는 것이지, 주님 위하는 자리를 떠나 놓고 난  다음에 그 뒤에 생명 내 놔도 아무 소용없어요.

 발람이 자기가 거기서 그 주님에게 피동하지 안하고 자기가 주님을 위하느냐  자기를 위하느냐인데. 자기 위하는 그 일을 옮겼오. 주님 위하는, 자기는 주의  것이니까 주님을 위해야 될 터인데 주님 위하는 일을 하지 안하고 자기 위하는  것으로써 무슨 청산 유수의 변명을 했고, 또 이런 저런 방편을 썼고, 하나님  앞에 민첩한 꾀를 많이 썼습니다. 그 발람 보면. 꾀 많이 썼고. 또 자고 가라  하고, 나중에 또 뒤에 가서 또 새로 재차 오라고 또 청하기도 청했고, 뭐 이렇게  해 가지고 나중에 마지막에는 그 생명 내놓고 하나님의 법도를 지켰습니다. 생명  내놓고 법도를 지켰지만 왜 그 사람 마지막에는 망령으로써 어디 맞아  죽었습니까? 원수에게 맞아 죽지 안했습니까? 칼에 맞아 죽었지? 그러니까 보면  아주 순교적인 그런 생활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시발이 틀렸기 때문에 거기에  보면, 얼핏, 내가 처음에 보고 그랬어요. 처음에 보고. 이 발람이 이렇게  놀랜만치 참 생명을 아끼지 안하고 하나님 법도를 지키고 하나님과 약속을  지키고 이렇게 했는데 마지막은 완전 멸망이라. 그게 뭐이냐 하면 처음에 잘못  돼 버렸기 때문에 잘못된 그걸 돌아서야 되지 그걸 돌아서지 안하고 그 중간에  아무리 결사적으로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요 이 계명에서는 제일. '너를 위하여' 하는 요것이  열쇠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결정되지 다른 데서 결정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요게서 요게 입각해 가지고 요 자리를 옮겨서지 안해야 되지요 자리  옮겨서 놓고 난 다음에는 뭐 온갖 충성 결심. 희생 암만해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거는 될 수가 없어.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가 거석하고, 그러니까 우리는 모든 범사를, 범사  그것에 제일 종자가 있다. 모든 종류마다 종자가 있습니다. 종자가 있기 때문에  그 종자에서 이제 개종을 해야 되지 그 종자를 심어 놓고 그거 나지 않도록  암만. 예를 들면 사람이 심은 것은 그대로 거둔다고. 콩을 심어 놓고 난 다음에,  아, 그만 팥을 심어 버리면 쉬운데, 그 콩은 심어 놓고 난 다음에 콩 나지  않도록 팥이 나도록 할라고 애를 쓰고 힘을 쓰고 뭐 정신을 쓰고 자기 생명을  바치고 밤새도록 잠 안 자고 해 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심은 대로 난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 모든 말씀을 해석해 보면 이제 종자에서 힘쓰라  그말이오. 종자에서. 종자를 거기서 개종을 해야 되지 종자를 심어 놓고 중간에  어떻게 변동한다고 해 봐도 심은 그대로 난다. 종자 그대로 결과는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종자 생활.

 그런고로 그 어떤 사람이 설교하기를. '천하에 가득 찬 모든 죄가 너를 해하는  것보다도 자타가 알고 있는 네 죄가. 네 죄 하나가 네게 해를 더 준다. 천하에  있는 모든 죄보다도 자타가 아는 네 죄 하나 그것이 네게 해독이 더 크다.

자타가 아는 네 죄 전부의 해독보다도 다른 사람 모르는 너만 아는 그 네 죄  하나 그것이, 네 죄가 여럿이 있지만 다른 사람은 모르는 죄가 많지만 그거 다  냅두고 다른 사람 모르고 너만 아는 죄 고 하나의 해독이 네게 대해서는 더  크다. 또 너만 아는 그 모든 죄의 그 해독보다도 네가 모르는 죄의 하나가  해독이 더 크다. 네가 모르는 모든 죄의 해독보다도 주인을 바꾸지 안한 그 죄의  해독이 더 크다.' 다시 말하면 네가 너를 위해서 사는 것, 다시는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안하고 대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 한  것이니까 주인을 바꿔서 이제는 너는 네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라. 너는 네가  네 맘대로 살게 아니라 주의 종이라. 이러니까 너는 주님의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주의 종이라. 주님에게 복종해서 사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주를 위한다는 것, 주를 위한다는 것 요것 하나가 모든  것이기고, 주님을 위하지 안하고 자기를 위하는 것 해 놓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뼈 빠지게 충성을 암만 해도 소용없다. 아무리 희생해도 소용없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종자인. 네가 목회도 너를 위해서 하나 주를 위해서 하나 네가 설교도 널  위해서 하나 주를 위해서 하나. 네가 성경을 봐도 주를 위해서 성경을 보나 너를  위해서 보나? 어깼든지 너를 위한다는 그것이 도적놈의 원 종자인데 고놈을  단속하지 안하고 그걸랑 냅두고 겉어머리 암만 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네가 단속을 해서 너를 위하지 않는 거기서 싸워라. 거기서  싸워서 너를 위하려는 고놈하고 싸워 가지고 주님을 위하느냐 너를 위하느냐  그게서 싸워 가지고 주님을 위하는 거기에 입각해 가지고 고 자리를 떠나지  말아라. 고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다 승리가 이루어진다.

 그러면, 주님만 위할라 하면 이 세상에 대적하는 것이 전부 주님 위하는 것만  만들어 줍니다. 주님 한 분만 위할라고 하면 세상에 방해하는 것들이 자꾸 주님  위하는 일이 더 되게 만들고 자꾸 이렇게 도 와 주지 방해할 자는 하나도 없어.

주님 위하는 생활을 방해하는 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주님 위하는,  세상에 공산주의도 주님 위하는 일을 도와 주고, 또 더 도와 주고, 안팎에서  전부 다 도와서 그럴수록 자기 안에나 자기 몸 밖에 있는 전부는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서 더 강하게 되어지는 것이니까 범사에 주님을 위해서 산다는 요  자리에서 가지고 요 자리를 옮겨 서지 말아라 하는 그것을 여기서 가르친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요 이계명에. 이계명은 뭐 우상 섬기면 모든 전체 다  들었으니까, 해석하면 전부가 다 들었어요. 요 전부 필연성이 그 요것 보면 전부  필연성의, 필 연성적으로. 필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지 이거 원인 있으니까 그  다음에는 필연적으로 고 다음이 되고, 고 다음에는 또 고거는 필연적으로 자꾸  필연적으로, 전부 필연성이라. 필연적이지 이건 뭐 그 중간에 뭣이 이래  변동돼서 그런 게 아니라 그거는 필연적으로 불변적으로 그와 같이 될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네, 그러면 잠깐 기도합시다.

 주님 무한한 주의 법칙을 유한한 우리에게 알리실려고 하니, 완전하신 주의  힘을 거짓된 우리에게 주실려고 하니. 영생의 생명을 죽음에게 주실려고 하니  이는 저희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다만 주님의 혼자의 능력이신 십자가의  피의 공로의 능력과 그 신의 감화 감동의 능력과 이 진리의 능련 외에는 이 일을  이루실 이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이미 등용하셨사오니 이 세 가지 능력으로  항상 우리를 붙드시고 충만케 하사 없는 가운데서 주님이 창조하신 거와 같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없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새로 주시는 것으로써 우리에게  충만케 하사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계약하신 대로 다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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