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23:09
우상
본문 : 출애굽기 20장 4절∼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여기에 새긴 우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우상의 이름이 각해 가지고 있는 것을 새긴 우상이라 그렇게 한 것입니다. 우상의 이름이 지어져 가지고 그 우상 이름 있는 우상, 이름 있는 그 우상을 만들지 말라.
'너를 위하여' 이렇게 말씀했는데.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각각 다 자기대로는 참 가장 요긴한 길을 걷겠다고 해 가지고 모두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힘껏 걸어갑니다. 그런데 걸어가는 그 길이 자기를 위한 걸음이 되든지 주님을 위한 걸음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걸어가면 우상이 되어지고 주를 위해서 걸어가면 뭐이 되어지는고 하니 믿음이 되어집니다.
사람이 이런 거 저런 거 모두 선택해 가지고 각 분야에서 자기대로는 슬기 있게 준비를 한다고, 이렇게 모두 가장 요긴하다고 자기로서는 가장 중요하고 그것이 다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자기 길을 택합니다. 자기 길을 택하는 데도 주를 위하여 자기 길을 택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위하여 자기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두 가지로 사람은 나누어집니다.
자기를 위하여 자기 길을 택한 사람과 주님을 위하여 자기 길을 택한 사람과가 뚜렷이 알고 보면 그 두 길은 아주 완연히 판이합니다. 그 두 길은 다릅니다.
자기를 위해서 길을 택한 그 사람은 그 길을 걷는 그 전부가 다 자기 의견대로 자기 지능대로 택하고. 또 자기 욕심대로 자기 견해대로 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길을 선택할 때도 제 마음에 제일 좋은 길, 제 지혜에 제일 자기에게 복되고 유리하다 싶은 그 길을 택하고, 또 그 길을 걸어갈 때도 언제든지 그 길을 한 자욱 한 자욱 선택해서 구별해서 가는 그 구별의 지혜가 다 자기 지혜요, 또 구별해서 걸어가는 그 능력이 다 자기 힘으로 걸어갑니다.
그러면, 자기 위하는 그 공부를 하든지 기술을 배우든지 자기는 어떤 사업을 하든지 어떤 출세를 하든지 무슨 성공을 노려서 가든지 가는 그것이 다 자기 걸음인데 그 걸음을 선택할 때부터 그 선택권을 누가 가지고 선택하는고 하니 자기가 자기 것을 가지고 선택을 하고, 또 한 자욱 한 자욱 걸어가는 것도 자기의 지능을 가지고 자기가 걸어가고. 걸어가다가 그 길을 이렇게 저렇게 혹 구비를 튼다고 하면 그 가는 길을 가다가 구비를 틀 때도 누가 들어서 그것을 방향을 운전해 가지고 그렇게 가는 구비를 틀어서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비유컨대는 그렇게 걸어가는가? 그것도 내나 자기가 그것을 운전해 가지고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자기에게 그것이 합당하도록 가장 슬기롭다 하는 그런 그 자기 지능을 가지고 항상 운전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그 사람은 자기를 위한 그 걸음을 걸어갈 때에 처음부터 선택하는 것이, 자기의 운전하는 것이. 자기의 또 그 일에 대해서 속도 조정이라는 그런 것도 전부 자기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전부 자기가 들어서 건설한 것이요, 그것이 막바로 자기가 변화해 가지고 생겨진 자기의 소생이요 소산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만들 때에는 자기가 선택해서 자기의 지능으로 모든 것을 조절하고 운영해서 만들었지만. 자기가 만든 것이지만 만들 때부터 자기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으로 하여금 가장 자기를 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만들기 때문에 만들어진 그것은 누구보다도, 뭣 보다도 자기에게 대해서는 가장 자기를 잘 위하고 효력 있게 위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사람들은 차차 차차 인식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자기를 위해서 무엇이든지 만든 그것은 그것의 요소도 자기요 그것의 시공자도 자기요, 만들어져 가지고 있는 것도 그것은 다 자기가 그렇게 화해 가지고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처음에는 시작했지만 그것이 잘못 둔갑을 해서, 잘못 둔갑을 해 가지고 하나님의 것 가지고 전부 자기 욕심대로 자기 견해대로 자기 지능대로 하나님의 것을 이용해서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자기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도 그걸 더 의지하게 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보다도 그걸 더 바라보게 되고, 하나님을 애착하는 것보다도 그것을 더 애착하고. 하나님을 아끼는 것보다도 그걸 더 아껴서 그 사람은 거기에 속하여 그것에게 자기의 모든 행복을 다 맡겨 놓고 바라보고 그렇게 사는 사람이 필연적으로 됩니다. 그거는 천이면 천 다 그렇게 되지 자기를 위해서 뭣을 해 놓은 것이 우상되지 안하는 일은 절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몰라서 견해를 깊이 분석하지 못해서 그렇지 자기를 위해서 한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에게 우상되지 안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세히 가서 좀 생각해 봐야 되지 그냥 이래 들으면 무슨 말인가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는 사람인데, 그런 걸 듣고도 이해 못 하면 실지로 자기가 그것을 분석해 가지고 스스로 깨달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위하는 것은 뭘로 가지고 알 수 있느냐? 자기 위하는 것은 자기 위해서 나가는데, 자기 위하는 것을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데 만 들어 나갈 때에 하나님의 그 계명과 하나님에게 거리끼지 안할 때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에게 거리끼지 안하고 하나님의 법칙에 거리끼지 안할 때에는 주를 위하는 것인지 자기를 위하는 것인지 자기 자신도 그것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분별하지 못하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분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가다가는 그런 토막을 만들어 주십니다. 그런 현실을 만들어서 하나님과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것을 조성할 수가 없고, 또 그것을 조성 할라고 하면 현저히 하나님의 법칙에도 거슬려야 되고 하나님에게도 거슬려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일을 해야 되는 그런 것이 뚜렷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자기가 이제까지는 몰랐지만 '아. 이것이 결국은 하나님과 대립적이며 하나님의 그 진리에 다 배치가 되는 비진리적인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그때라도, 그럴 때는 '이제까지 내가 선택 한 그 종류와 조성해 놓은 것을 한꺼번에 다 던져 버릴지라도 이제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에 거리끼니 나는 할 수 없다' 하여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을 자기가 영접할 때에 그때에 그것이 없어지든지 그대로 있든지 어쨌든지 그것은 그것으로서 다시 회개해서 속량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속량이 되어져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 되고 진리에게 속한 것이 됩니다.
내가 그것을 버렸을 때에 버리면 없어지는 것도 있고, 버리면 버렸는데 버리니까 없어질뻔 했는데 없어지지 안하고 그대로 보존되는 것도 있습니다.
버렸을 때에 없어진 것도 사람들은 좁은 시야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없어졌으니까 없어진 줄로 알지만 절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위라 하는 거는 털끝만큼도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게 눈에 보기에는 없어졌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과 하나님을 거슬려 있던 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되기 위해서 그것이 절단 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인 그 진리에게 옮겨져 가지고 진리의 것이 되어졌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속량이라, 구속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회개로, 우리가 회개로써 잘못된 것이 속량이 되고 구속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럴 때 그것이 없어지지 안하고 그대로 보존이 돼 있습니다. 보존이 되어 있으면 그것도 보존되어 있는 것이 벌써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에 합당하게 존재한 것이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일단 포기했는 데도 그대로 있으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다시 온전한 것으로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의 특수 보호로 보호함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불의의 것이 아니고 의로운 것으로써 지금 자기가 소유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의로운 것으로 소유하게 돼 가지고 있으나 하늘나라의 것은 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의롭게 쓰면 이제 의롭게 자꾸 돼져 나갑니다. 그러나 그것을 의롭게 돼서 의에 속했지만 잘못 쓰면 그것이 불의로 다시 변질돼서 나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주를 위함인지 자기를 위함인지, 주님 위함이 아니면 자기 위함이고, 자기 위함이 아니면 주님 위함이라. 자기가 뭐 민족을 위한다 하는 것도 그것도 내나 자기 민족이기 때문에 인류를 위한다 하는 것도 자기가 인류이기 때문에 결국은 분류해서 세밀히 분석해 나가면 궁극적으로는 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함이냐 자기 위함이냐 둘 중에 하나인데, 주를 위하는 것은 자기에게 거슬릴 때에 자기가 절단이 나도 그것을 보존하면. 주와 주를 위해서 보존하면 주를 위함이 되고, 또 아무리 주를 위한다고 해도 가다가서 자기와 자기의 그 소욕을 보존하기 위해서 주와 주의 계명이 자기에게서 파괴를 당해서 나간다고 하면 그것은 주를 위함이 아니고 자기를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생활해 나가면서 이것이 주를 위한다고 해도 내 중심은 주를 위해서 하지만 그게 참으로 주님을 위함인지 혹은 나를 위함인지 그것이 알쏭달쏭해서 잘 구별하지 못할 때에는 항상 조심하면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문을 가지고 있다가 어떤 그런 단계에 둘이 주님과 주님의 뜻과 나와 내 뜻이 서로 대립되는 그때를 당할 때에, 그때에 내가 주님에게 소속시킬 수도 있고. 나에게 소속시킬 수도 있고 그것이 그 때에 판정히 돼서 판가름이 납니다. 판가름이 나서 어디 속한 것이라 그렇게 돼 집니다. 그러기에 그럴 때에 우리가 그것을 구별해 가지고 주님에게 속하고 주의 계명대로 되어지는 것으로 자꾸 이렇게 개량을 시켜서 잘못된 것을 속량을 해 가지고 자꾸 그렇게 주님과 주님에게 속해지도록 그렇게 만듭니다. 만들어 나가니까 그 사람은 무슨 어떤 세상 사람이 따라가지 못 할 정치적인 성공이라든지 과학적인 성공이라든지 기능적인 성공이라든지 무슨 재벌적인 성공이라든지 무슨 무슨 종류의 그런 성공이든지 그 성공이 자기냐 주님이냐 주의 뜻이냐 자기 주관의 뜻이냐 이 둘이 대립되는 그때를 통해 가지고 그것이 주를 위함이 될 수도 있고 자기 위함이 될 수도 있어서 그게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고 주의 계명대로 그렇게 된 것은 그것이 우상이 안 되고 그게 뭐이 되느냐?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됩니다.
그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라도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그것은 그것이 그렇게 함으로써 차차 차차 우상이 만들어져 가고, 자기가 무슨 일을 선택해서 처음에는 구별하지 못했지만 그런 어려운 시험의 단계가 왔을 때에 그때는 다 주님을 위하는 것으로, 또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그렇게 소속을 시키고 개량을 시켜서 그래 가게 되니까 그는 시험을 당함으로써 나중에는 어떤 게 만들어지느냐? 믿음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 재산이 만들어졌는데, 그 재산 만들어진 게 아니라 믿음 만들어졌다. 또 그 사람이 어떤 높은 학식을 만들었는데 그 학식이 그것이 학식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믿음 만들어진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믿음 만들어졌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 학식을 자기가 마련할 때에 온갖 시험을 당할 때에 그거 다 믿음이냐.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만드는 것인데. 믿음이냐 자기냐 이렇게 둘이 이렇게 견제할 때에 그때에 자기와 자기의 주관을 버리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이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것이 믿음이 만들어진 것이라. 그러면 몇 해를 공부를 했던지 몇 해를 그 일을 계속했던지 하는 가운데에 쌓여 있는 것은 전부 이 우상이냐 믿음이냐 하는 그 두 가지 투쟁 가운데서 자기는 믿음 만들어진 게, 믿음 만들어진 것으로써 이 사람이 공부한 것은 전부 믿음 뭉텅이다. 이 사람이 돈 번 것은 믿음 뭉텅이다.
이 사람이 지금 돈 번 것은 이 것은 우상 뭉텅이다. 이 사람이 공부한 것은 우상 뭉텅이다. 우상 뭉텅이 가 되든지 믿음 뭉텅이가 되든지 둘 중에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 뭉텅이는 그럴 때에 주와 주의 계명을 따라서 자기가 그 모든 것을 취급해서 던지든지 가지든지 했고. 자기는 그것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자기와 자기의 주관을 따라서 하나님이야 계명이야 어찌 됐든지 자기와 자기 주관을 따라 가지고 그것을 보존하고 성장시키고 유지시켰으니까 그것은 자기를 위한 우상이 만들어졌고. 또 그게 아니면 곧 하나님으로 인한 믿음 만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돈 같이 보이지만 실은 믿음이라. 믿음 뭉텅이라. 믿음으로 싸워 가지고 없어질 건데, 믿음으로 싸워 가지고 믿음을 지킴으로 없어질 뻔한 것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의 조처로써 그것이 보존된 그런 것도 있고, 또 믿음을 지킴으로써 자기가 그게 없어질 뻔한 것이 하나님의 특수 은혜로 보존된 것도 있고. 또 그게 아니라도 자기는 없어졌으면 없어졌지 하나님의 그 믿음을 지키고 그걸 위주로 하니까 그것이 없어지지 안해서 남았든지 그래 남았든지 저래 남았든지 믿음을 지킬 때 남았으니까 믿음으로 그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믿음으로 남아 있는 거, 공부도 믿음으로 남아 있는 거, 자기 사업도 믿음으로 남아 있는 거, 재벌도 믿음으로 남아 있는 거, 이 사람은 믿음으로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이 믿음을 지켰으면 박살됐을 터인데 이것은 자기 주관으로 남아 있는 거,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 남아 있는 거. 자기 위했기 때문에 남아 있지 그래 안 하면 절단났을 것이고, 또 자기 주관으로 하지 안했으면 절단날건데 자기 주관으로 해서 남아 있는 것이라.
그러니까 우상은 자기와 자기 주관, 자기가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것이 우상이요, 또 우상이 아닌 것은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법도대로 함으로 인해서 존재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 믿음으로 그게 생겨졌기 때문에 실은 돈 뭉텅이가 아니라 믿음 지킨 믿음 뭉텅이라. 그것이 지식 뭉텅이가 아니라 그게 믿음 지킨 믿음 뭉텅이라.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믿음을 만들어서, 믿음을 만들어서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사람으로 믿음으로 부강해지는 그 믿음 만든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우상 만드는 사람이 있고 이게 아니면 저거고 저게 아니면 이거고 둘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전에 고 김형봉 목사님은 늘 그런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저도 몇 번 집회를 참석했는데, 참석할 때에 제가 한 네 번인가 그 집회를 참석했는데 참석할 때에 그런 말을 자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믿음을 만들어라 하는 그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믿음을 만들라고 하는데 그때는 제가 무슨 말인가 해석을 분명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몰랐는데, 제가 지금 생각할 때에 믿음 만드는 것이 그것이 믿음을 지킴으로, 믿음을 지킴으로 무슨 물건 만든 그것도 믿음 만드는 것이요, 또 믿음을 지킴으로 그 모든 것이 존재케 되는 그것도 믿음 만든 것이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만들 때에 어떻게 만드는가? 자기의 그 모든 언행심사로 믿음을 만들고 자기의 모든 자체와 소유로 믿음을 만들어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체가 믿음 뭉텅이요, 자기의 소유가 다 믿음 뭉텅이요 자기의 모든 가지고 있는 기능이 다 믿음 뭉텅이요, 자기가 또 생활한 그 십 년이나 사십 년이고 오십 년이고 뭐 몇십 년이고 산 모든 생활 그게 전부 다 믿음 뭉텅이라. 그렇게 믿음 뭉텅이를 만든 사람도 있고, 우상을 만든 사람도 있고 그렇게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아주 너무 자꾸 미끄러져 가지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암만 말해야 그만 못 알아듣기 쉽습니다. 오전에도 내나 이 말씀이오. 오전에 이 말씀인데 또 말씀하고 나니까 또 교인들에게 배어 들어 가지 안했으니까 오후에 또 해서 또 말하면 속에 얼마나 종 깊이 심겨서 박혀 들어가고 배어질 건가 하고 말하고 보면 또 나중에 박히지도 안하고 찍해야 하나의 그 지식으로 외우기나 하고 자기의 그것을 옮겨서 말할 수만 있으면 됐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그런 것은 다 외식이요, 그럼으로 자기를 교만한 결과를 만들고 만들지 자기를 변호하거나 자기를 변화시키거나 자기가 구원을 이루어지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너를 위하면 너를 위하는 것으로서는 우상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너를 위하는 것이 우상이 안 될라고 하면 너를 위해서 하는 것이 너를 위하느냐 주님을 위하느냐 둘 중에 어느 것이냐 네가 어느 거 할래 할 때에 그때에 주님을 위하고 자기 위하는 것을 안하는 것으로 팩 돌아서도 돌아서야 저게 자기 위한 것이 주님 위한 것으로 돼지지 그렇지 않으면 그만 자기 위한 것으로 술술하게 그런 고비의 마디만 지나가면 그 다음에는 뭐 주님 위하는 것이나 자기 위하는 것이나 별 구별이 없기 때문에 몇 십년은 자기를 위하는 거 만들고도,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 뻔뻔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생활이라 하는 거는 세밀해야 되고 철저해야 되고 무엇보다도 고 진실이라는 진실이 이게 중요하고 진실보다 신앙 양심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냉정스럽게 그렇게 마구 덮어서 아무나따나 합리화 시킬라고 떠듬거려서 이렇게 주모아서 덮어 가루는 그 사람으로서는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천 리 만리 거리가 멉니다.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이 정결치 안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또 정결한 사람이 하나님 본다.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렇게 양심이라야 비로소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찾아갈 수 있고 만나볼 수가 있지 그거 아니면 안 된다 그말인 것입니다.
그 양심은 뭐인가? 신앙 양심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해 가지고 말씀대로 내가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쓰고 참으로 옳게 바르게 뭐 죽든지 살든지 나는 말씀대로 바로 할란다 하는 그 마음가지는 그것이 신앙 양심인 것입니다.
그게 착한 양심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하는 생활이 우상이 되든지 믿음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이지 믿음 안 됐으면 우상됐고 우상 안 됐으면 믿음됐습니다. 그러면 믿음 된 것은 전부이 시작부터 그것이 개량될 때부터 어려운 역경을 당할 때에 그것이 다시 돌아설 때부터 전부 주님 위하는 것으로 돌아섰고. 위하는 것으로 개조했고, 위하는 것으로 개량됐고, 위하는 것으로써 그것이 개량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전부가 안팎이 다 주님 위하는 것뿐이요, 그것이 주님 위하는 것뿐이니 그것이 뭐인가? 그것이 믿음 뭉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을 만들어 가진 것입니다.
가졌으면, 그 사람은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러면, 우상 만든 자는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라고 해도 절하지 말라는 이 계명이 그 사람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 아니고 절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절을 하니까 정죄를 받는 것입니다. 정죄만 받았지 절대 위하지 못합니다. 자기를 위해서 우상 만들어 놓고 그 우상 거기 다가서 절 안 할라 한다고 절 안 하게 됩니까? 죽었으면 죽었지 절 안 하고는 못 견딥니다. 제가 하고 싶어서 못 견딥니다. 뉘가 하라 소리 안 해도 저는 절을 합니다. 뭐 절하면 죽일란다 해도 죽일라 해도 제가 절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뉘가 절하라고 권하지 안해도 자기는 절하게 됩니다. 왜? 자기 전부가 그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그거 아니면 죽고 망하는 줄 알기 때문에 전심 전력을 거기 기울여 가지고 절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우상이 아니고 믿음을 만든 것이라면 믿음 만든 것은, 믿을 만들어 놓은 것은 거기다가 대 가지고 믿음 만들어 놓은 거기에다가, 믿음 만들어 놓은 거기에다가 절하라 하는 그 믿음 만들어 놓은 자는 그 믿음에다가 절하게 됩니다. 믿음에다가 절한다 말은 믿음 만들어 놓으면 내나 믿음에게 복종하고 굴복하게 되고 믿음에게 끌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 이 뭐이냐?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는 그것이기 때문에 그래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 따라서 움직이지 안하면 죄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을 만든 사람은 믿음을 따라가지 안하면 그것이 죄가 되고, 또 우상을 만든 사람은 우상을 따라가지 안하면 자기가 바싹 깨져 버려야 되기 때문에 우상을 따라가지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요거 좀 퍼뜩 들으면 좀 알아 듣기가 어려우나 그걸 기억하고 가만히 가서 눈감고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한다고 말씀한 대로 요 말씀을 오랫동안 고요히 정신을 차려서 묵상하면 거기에 대해서 확실한 고 판정이 나고 명백한 판결이 나게 될 것입니다.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그 섬기는 것. 섬기지 말라 하지만 제가 우상을 만들어 놨는데 안 섬길 수가 있습니까? 그 우상이 뭐입니까? 우상이 그것이 무슨 뭉텅이입니까? 우상이 무슨 뭉텅이지요? 우상이 그거 무슨 뭉텅이요? 우상이 자기 뭉텅이라. 자기 뭉텅이. 자기 뭉텅이 아니요? 우상이 자기 뭉텅이인데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서 그걸 만들었는데 만들어 놨으니 더 커졌는데 그걸 부인할 수가 있습니까? 부인 절대 못 합니다. 우상 그것이 곧 자기 덩어리입니다. 자기 덩어리. 자기 위하는 덩어리, 자기 중심 덩어리, 자기 위주 덩어리. 자기 주관 덩어리. 자기 지혜 덩어리, 자기 지능 덩어리 전부 그게 자기 덩어리요. 자기 덩어리요, 믿음 만들어 놓은 거는 믿음 만들어 놓은 거는 그거는 뭐이 덩어리입니까? 자기 전부 부인 덩어리요. 믿음 만들어 놓은 거는 자기 부인 덩어리요, 하나님 인정 덩어리요, 순종 덩어리요. 하나님께 복종 덩어리요, 하나님 중심 덩어리요, 하나님 위주 덩어리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덩어리라 그말이오. 이렇게 사람의 하루 하루의 생활은 아주 판이하게 본질과 본성이 다 판이하게 달라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계약을 선포해 놓으신 이 계약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라. 어떤 것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이라? 자기 뭉텅이, 인간을 자기 뭉텅이로 지옥 가서 영원히 멸망받을 것을 자기 뭉텅이를 그것을 다 부인하고 하나님 뭉텅이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의 뭉텅이로 만들라고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셨는데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하나님에게 속한 하나님의 것으로 변화를 시켜서 개조 개량을 할라고 애를 쓰지 안하고 자꾸 자기만 키워 가지고 자기 뭉텅이, 자기 뭉텅이 그게 지옥 갈 뭉텅이인데 그게 뭐냐? 악성과 악습으로 되어진 자기 뭉텅이인데, 그러니까 그 마음을 자꾸 이거 멸망받을 옛사람 자기로 둘러싸고 둘러싸고 자꾸 덮고 가루고 뚤뚤 뭉치고 자기라는 밧줄로 동이지 자기라는 보자기로 싸지, 이래 놓으니까 그까짓 거 뭐 아무리 산 거지만 그 두꺼운 돛베 같은 거로 수십 꺼풀 칭칭 감아 가지고 밧줄로 동였으면 장사인들 무슨 소용 있습니까? 사자도 그 속에 죄였으면 저는 꼼짝 못 하고 죽었지 별 수가 없다 말이오. 그래 자꾸 자기를 지금 자꾸 매장시켜서 이렇게 뚤뚤 뭉쳐 가룹니다.
그것을 하나 형식 계시로 보이기를 마르다와 마리아가 자기 오라비 나사로를 아주 극히 사랑하는 사람인데. 그 삼남매가 서로 보고 살고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인데 사랑함으로 그 동생을 베로 동였고, 사랑함으로 무덤 파고, 무덤에 갖다 집어 넣고, 사랑함으로 단단히 무덤 어구를 돌로 막아서 예수님이 왔지만 살릴 수 없도록. 가만히 내비뒀으면 시체로 그냥 있었으면 당장 살릴 것이고, 또 그 갖다 옮겨다 파묻지 안했으면 더 빨리 살렸을 것이고, 또 돌 속에 파묻지 안했으면 쉬울 것이고. 또 돌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냥 누이다 놨으면 그만 살면 벌떡 일어나 나올 터인데 감아 가지고 있어서 그놈을 나중에 풀지 안했습니까? 그 뭘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이 내나 삼남매가 그 자기의 영, 혼, 몸으로 그렇게 상징해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사랑함으로써 죽이는 것을 하나 그 형식 계시로 우리에게 암시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자손의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그 축복 받고 저주받고 이렇게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자유롭게 보응을 받아 가지고 그와 같이 가는 것인데 우리가 무슨 신앙생활이든지 도중에 안 됩니다. 도중에 안 되니까 처음부터 시발을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앙 그 개별 개별의 생활에 대해서 다 종자라 그렇게들 말했고, 움싹이라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본부터 그것이 바로 돼야 됩니다. 오늘까지 생활이 잘못됐다 하면 지금부터 근본부터 그것을 고쳐서 바로 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계명은 첫째 시발이 뭐인고 하니 자기를 위함이냐 주를 위함이냐 그것이 이제 이 시발인 것입니다. 자기 위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 주관대로 하는 그것이 벌써 주를 위한다 해도 자기 주관대로 하면 그것이 자기 위함이요 주를 위함이 아니요. 또 자기가 자기 주관대로 하지 안하고 성경 말씀대로 한다고 해도 중심이 자기를 주님보다 높이 여겨서 자기를 아끼고 자기를 위해서 한다고 하면 아무리 성경 말씀대로 써서 해도. 그것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심이 발라야 되고, 그 방편인 그 법규가 바로 돼야만 그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것은 우리가 이 모든 행사를 나를 중심해서 나를 위한 것인가 이거 주님을 위하는 것인가, 또 주님을 위하는 것이라도 그 방편을 쓰기를 내 주관의 방편을 쓰면 그것이 결국은 나를 위함이요 주를 위함이 되지 안하고 하니까 중심이 주를 위함이 돼야 되겠고, 또 방편이 주님 이 주신 성경 말씀의 이 계약 방편이 돼야 되겠으니까 여기에 대해서 신강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우리가 돼야 되겠습니다. 그저 아무나따나 무슨 주님을 위한다고 대충해서 이거 복음을 위한 게 아니냐, 다른 사람을 위한 게 아니냐, 이거 뭐 주일 지키는 게 아니냐 그렇게 무더기금으로 제가 생각해 가지고 그렇게 쉽게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개별 개별의 생활에 다른 사람 보면 '저거 예수 믿는 사람 저거 그만 최면술에 걸려서 예수 믿는 정신병에 걸렸다' 다른 사람이 욕을 할지라도 우리는 참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이해 못할 미친 사람이 돼야 됩니다. 왜? 남한테 말은 못 해도 뭐 퍼뜩 의례이 해 나갈 것도 '아, 이것이 중심이 주를 위함이냐 나를 위함이냐' '아, 이 사람 뭐 하고 있어?' 대답은 안 해도 '자, 이거 참말로 주를 위함이냐 나를 위함이냐? 이거 지금 뭣을 위함이니까, 그 위함이 나 위함이겠느냐 주를 위함이겠느냐?' 이렇게 분석해 보면 대개는 주님 위한다는 게 자기 위함이 되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발견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주님 위하는 것은 언제가 주님 위하는 것이냐? 자기가 그것을 발견해 가지고 이거는 분명히 나를 위했다, 나를 위했다 하고 그놈하고 투쟁해서 나를 위한 것을 잘못됨을 알고 나를 위한 것을 돌이켜서 이것을 돌이킬라고 애를 쓰고 주를 위하는 것으로 돌이킬라고 애를 쓸 그때가 주를 위함에 가깝고, 주를 위했다고 생각하고 안심하고 있을 때는 나중에 가보면 순전히 자기 위함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어떤 한번 ○○○목사님이 한번 설교할 때에 제가 그때 참석해 가지고 듣는데 그분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제가 그와 같은 종류로 말하는 걸 한 번 봤습니다. 또 그라고 ○○○목사님이라고 ○○신학교 조직 신학 맡아 가지고 있는 목사님이었는데 제가 알기로는 한국에 조직 신학으로서는 ○○○목사님이 제일 권위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권위 있게 봐 주지를 안합니다.
그러나 그분은 참 조직 신학에 권위 있는데 조직 신학은 권위 있었지만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모르겠습니다. 그 뭐 생명을 내 놓는 그런 데 대해서는 아주 빈약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미국 가 가지고 먼저는 필라델비아 거기서 어느 교회를 본다든가 뭐 무슨 책을 쓴다든가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를 위함인가 나를 위함인가? 이것을 주의 법칙을 지킴인가 나를 지킴인가? 뭐 법칙 지키는 것은 뚜렷하기 때문에 그거는 좀 찾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함인지 나를 위함인지 그것을 구별 못 해서 자기 고의가 아닌 자기 위하는 그런 것으로 나아가는 걸음을 걷기가 쉽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이 '이거 나를 위함인가 주를 위함인가 똑똑히 구별해 주십시오.
그라면 내가 나를 위하는 거를 하지 안하고 주님 위하는 것을 내가 해서 이 길을 걸어가겠습니다.' 그렇게 소원하고 있는 자에게는 뚜렷이 구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십니다. 기회를 하나님이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를 위할라면 이렇게 해야 되고 주를 위할라면 이렇게 해야 되는 뚜렷이 나타날 그때에.
그때에 자기 소원이 자기 위하는 것을 버리고 주를 위하고자 하면 그때에 주를 위하는 것으로 완전히 그것을 개량시켜서 완전히 속량을 시켜 가지고 변화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이 없고 주를 위한다고 말은 하기는 해도 속으로는 자기 위하는 것을 끊어 버리고 하면 어찌 되느냐? 자기 위한 거 주님 위한 거 둘이 다 위함이 됐으면 좋겠다. 자기는 절단나고 주를 위함이 되면 어찌 되나? 거기에 대해서 소원하지 안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 가지고 어린 마음가져 있는 사람은 주를 위함이라는 것이 자기에게 닥쳐지면 마음에 고민스러워질 것이요, 어찌 하다 보면 기회 놓쳐 버리고 결국은 자기 위하는 것으로 그만 미끄러져 버리고 말기 쉽습니다. 이런 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고통인 것입니다.
이래서, 요걸 구별할라고 자꾸 애를 쓰고, 사람이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옳고 그른 것을 확실히 판정되고 난 다음에 시행이라 하는 거는 문제가 없다. 그 시행을 자기가 똑똑히 구별해서 바로 아는 것보다 훨끈 쉽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거는 퉈 생명 내 놓으라. 해도 안 내 놓으면 안 내 놓고 내 놓으면 내 놓고 뚜렷하게 그렇지만 이걸 도무지 사이비하니까 뭐인지 그것을 구별하지 못해서 바로 아는 것이 생명 내 놓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도, 그렇게 어렵다고 그렇게 높이 평가해 놓고 하나님 앞에 항상 기도하기를 바로 깨닫고 바로 알게 해 달라고 자꾸 그렇게 기도하는 그런 사람들이 우리도 다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자기가 몇 해를 살든지 사는 가운데 해 놓은 일도 있겠고, 또 해 놓은 그 행사도 있겠고, 그러면 자기 이력도 있겠고 해 놓은 일도 있겠고, 해 놓은 물건도 있겠고. 모든 거 다 또 살고 살아나온 자기도 있는데 그 자기나 자기 소유나 또 자기 행동이나 자기의 그 모든 일이나 그 모든 것이 그것이 다 믿음 뭉텅이가 돼야 됩니다. 믿음 뭉텅이가. 믿음 뭉텅이가 돼야 됩니다. 살아서 나중에 보면 그 뮈 별스러운 게 아니고 믿음 뭉텅이 안 되면 우상되고 우상 안 되면 믿음 뭉텅이 됩니다. 둘 중에 하나이지 자기는 뭐 믿음 뭉텅이가 아니라도 우상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시험을 자꾸 치르기 때문에. 자기라는 것은 이제 다 포기하고 믿음 하나. 믿음 하나라는 거는 주님 인정하고 주님에게 순종하는 것인데, 주님 인정과 주님 순종. 주를 사간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거 이거 하나만 남고 나중에 여기 이런 때도 보니까 이럴 때 닥쳤을 때도 닥치니까 할 수 없어서 다른 거는 다 포기해 버리고 이제 주님 사랑하는 거 하고 계명 지키는 거 하고 고거 하나만 남아 있었고, 또 몇 해 있다 된 것도 또 남아 있었고. 나중에 그럭 저럭 살다 보니까 그 사람에게 남아 있는 것은 소유도, 자기의 무슨 소유도, 믿음, 주님 사랑하고 주님 계명 지키는 거 고 소유도 그 뭉텅이라. 그거 지킴으로 그게 남아 있는 것뿐이라. 이제 그거 팔고 그게 남아 있는 게 아니라 그거 지킬라고 하고 보니까 그게 남아 있고, 그거 지킴으로 남아 있고, 그거 만들기를 그거 지킴으로 만드는 거, 그저 지킴으로 만드는 거, 그거 지킴으로 남아 있는 거, 이러니까 자기의 소유라든지 일이라든지 행동이라든지 자기라든지 그 전부가 다 믿음으로 된 믿음 뭉텅이라. 믿음 뭉텅이가 아니면 그 전부는 다 자기 뭉텅이라. 자기 뭉텅이, 다시 말하면 우상 뭉텅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자기는 비판하면 나는 믿음 뭉텅이가 몇 분지 몇이며 또 내가 우상 뭉텅이가 몇 분지 명인가? 그것을 구별할 수가 있어서 신앙이 자라가면 나중에 가서 자기로 된, 자기와 자기 지능으로 된 자기 뭉텅이. 말하자면 우상 그거는 왜 자기 뭉텅이를 우상이라 하나? 자기 뭉텅이 그거는 자기를 위해서 만들어 놓은 뭉텅이기 때문에 자기는 반드시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고 거기에 속하고, 그거 위주로 그거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단다는 거, 그거 내나 이름은 다르지만 하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노경에 가서라도 그것을 자기 뭉텅이, 우상 뭉텅 이를 이 것을 마구 헐어 던져서 믿음 뭉텅이를 만들라고 이렇게 하면서 믿음 뭉텅이를 만들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오지 못해 가지고 고대하는 그런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그 믿음 뭉텅이를 만들라고 하면 평소에는 뭐 할라 해야 되지 안하니까 평소에 할라 해야 누가 그걸 만들어 줍니까? 이러니까 어디 있든 어떻든 간에 주님과 주를 위해서 주님과 주를 위할라면 소유가 절단나고, 자기의 모든 일들이 다 깨어지고 자기의 모든 행위가 다 절단나고, 명예가 모든 지위가 다 절단나고, 자기 생명까지 절단나고 주님과 주님을 사랑할라 하면 이 모든 것이 솔빡 절단나고 주님 사랑하고 주님 계명 지키는 것만 남아 있을 수 있는 그런 역경이 왔으면 좋겠다, 그런 때가 왔으면 좋겠다 해서 그런 시기를 노려서 '주님 아무래도 늙어 죽고 병들어 죽거나 그래 하지말고 주를 위하고 주님의 계명을 위해서 이 전부를 솔빡 바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사람들이 기도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런 기회가 닥치는 것을 어떤 사람이 주석하기를 순교당할 수 있는 그런 기회 닥친 것은 마치 장사군이 대목장 만난 거와같이 대목장 만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솔빡, 일 년내 헛일 하다가 솔빡 수입 보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럴 때 참 이제까지 평생 동안 잘못 지냈던 거 그때에 솔빡 대수입을 해서 완전히 성공한다. 그렇게 말한 사람은 박 교장이 그렇게 말했답디다.
그 봉사가 문고리 잡기라. 봉사가 문고리 잔기라. 이거 문이 어딘지 몰라서 더듬더듬하면서 자꾸 찾아다녀도 여기에도 보니까 벽이고 여기에도 보니까 벽이고 그래 벽인데 이제 어째 가다 보니까 문고리가 잡혔다 말이오 문고리가 잡혔으니까 그만 문고리를 열고 그만 훅 뛰어 들어가는 거와 마찬가지로 봉사 문고리 잡은 것이다. 이러니까 평생 구별하지 못해 가지고 자기 위함인지 주를 위함인지 더듬더듬해 가지고 우상 생활만 이와 같이 하고 있었는데 마침 주를 위해서 순교할 수 있는 그런 그 기회가 오니까 이제는 됐다. 봉사 문고리 잡았다. 이제는 들어가기만 하면 된다. 이제는 이 주워 주의 계명을 위해서 순교만 당하면 이제 성공된다 하고 그래 그런 기회를 놓지 말라고 그것은 장사꾼 대목장이라 봉사가 찾아 돌아다니다가 문고리 잡았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노리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걸 잘 여러분들이 뒤에 돌아가서라도 내가 모든 생활은 믿음 그게 돈이지만 돈 뭉텅이가 아니라 믿음 뭉텅이라. 믿음 뭉텅이. 믿음 지키다가 보니까 그게 생겼고, 그게 믿음 뭉텅이라, 믿음 지키다 보니까 생겼고, 또 있는 것을 믿음 지키다 보니까 없어질 뻔했는데 믿음 지킴으로 그것이 다시 계속돼서 존재하게 됐고, 이러니까 순전히 믿음으로 인해서 그게 생겨졌기 때문에 믿음 뭉텅이. 자기도 자기 모든 것도 믿음 뭉텅이를 내가 만들고 있는가, 나를 위한 우상 뭉텅이를 만들고 있는가 다시 말하면 내 주관과 나를 사랑하고 나를 위주로 나를 위주로 중심으로 하고 내 주관대로 내 힘대로 해서 하는 거 전부이 멸망할 우상 뭉텅이를 만들고 있는가? 그러면 그 사람은 죽으나 사나 항상 그거 위하다가 죽습니다. 죽을 때도 그거 위해서 죽고, 항상 죽을 때 원통해서 우는 것도 그거 처해서 울고, 마음에 죽는 것이 아까운 것도 그거 위해서 아까와서 울고, 이 전부가 다 그 몽텅이 놀음이요. 그 뭉텅이 놀음. 이제 믿음을 만든 사람은 전체는 믿음 뭉텅이요 믿음 놀음입니다.
그래서 그게 뭐이냐? 주님을 미워하는 자라 말입니다. 그렇게 그 우상 뭉텅이 만드는 그것이 곧 주님 미워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위하는 그것이 주님 미워하는 것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자기 위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요. 또 자기 주관 자기 지능으로 자기를 위해서 뭐 만들어 놓는 그것이 우상이요. 또 그것을 아껴서 하나님 보다 그것을 아껴서 그게 뭐 털끝만치라도 상할까 싶어서 그거 위주로 하는 그것이 내나 주님 미워하는 것이요. 할 수 없어서 그러니까 그거 좋도록만 해서 그것을 중심으로 해서 그것을 따라서 그거 좋고 하자고 하는 대로 그것을 따라서 내가 움직여지는 그것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라. 그게 뭐이냐? 자손의 삼사 대까지 삐뚤어진 값을 받는다. 죄의 값을 받는다 그말은 삐뚤어진 값을 받는다 그말입니다.
그러고 6절에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내나 계명 지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성령님의 감화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피가, 주님의 피공로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요. 또 영감이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요 진리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내게 오셨으니 곧 예수님의 대속이 곧 내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요, 영감이 내게 나타나신 하나님이요 진리가 내게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뭐이냐?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 하나님의 사랑 뭉텅이입니다.
영감이 하나님의 사랑 뭉텅이입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이 하나님의 사랑 뭉텅이입니다. 요것도 여러분들이 깊이 가서 묵상을 하고 새기면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딴게 아니요. 신구약 성경 말씀 준 이것이 전부 하나님의 사랑이요, 사랑 뭉텅이요. 이게 사랑 뭉텅이입니다. 그 말씀을 내가 받고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어. 그 말씀과 동행하고 보니까 하나님과 동행했어. 하나님의 사랑과 동행했어. 내가 그 말씀을 내가 힘입어 살고 보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살았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뭐이냐? 우리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이, 또 영감이요, 진리입니다. 그러면 영감이 하나님이냐? 영감이 하나님 아니요. 진리가 하나님 아니요, 예수님의 대속이, 이 대속이 하나님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은 주님의 세 가지 대속이요, 하나님은 영감이요. 하나님은 진리요.
진리는 하나님이라 그렇게는 말을 못 합니다. 그게 대해서 조금 여러분들이 구별할 수 있으면 구별하면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주님의 대속 이 세 가지와 영감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게 주님과 동행하는 것인가? 그 영감과 진리와 주의 대속의 공로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하는 게 어떤 게 주님을 위함인가? 세 가지 대속을 위함이 주님 위함이요. 영감 위함이 주님 위함이요, 진리 위함이 주님 위함이요. 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계명을 알기 쉽도록 신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지키는 것이 하나님 계명 지키는 거라. 신구약 성경 말씀 지키는 게 뭐 지키는 거냐?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사는 것이요, 그것이 영감대로 사는 것이요 그게 진리대로 사는 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소속한 것은 천 대까지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우리는 너무 눈이 근시자기 때문에 멀리 모릅니다. 보기에 대번에 십 년 망했다 이십 년 망했다고 망했다고 보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예수 믿으면서 아무것도 없이 그렇게 불쌍하게 죽었지만, 그 나사로는 보니까 죽을 때까지 불쌍하게 죽었으니까 형편없는 가련한 사람이지만 그 세상뿐이라면 그렇지만 그 사람이 아브라함의 품속에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속에 있으면서 가장 그 홍포 입은 부자에게 나타나 가지고 그와 정 반대 인물을 말할 때에 나사로를 그렇게 들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분이 세상 마지막 죽을 때까지 불행스러운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그렇게 무궁세계에서 행복스럽고 영광스러운 사람이 되리라고는 생각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십 년 이십 년 해도 이십 년 너머 또 세월이 있고 또 내가 죽는 그 시간까지 해도 그 시간 아니야. 그 너머 또 무궁이 또 있습니다.
무궁이 있기 때문에 뭐 성패를 단편 조부라운 기한 가지고 성했다 패했다 그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거는 소경들이 다 논평하는 말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근본부터 우리는 판이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 법칙은 뭐인가? 우리의 생의 법칙은 간단하게 말해서 주님 사랑하고 그 계명 지키는 것입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그 대형의 사죄, 칭의, 화친 요 세 가지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주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이 세 가지를 입고 사는 것이 주님의 사랑을 입고 사는 것이요, 요 세 가지를 소유한 것이 주님의 사랑을 소유한 것이요, 이 세 가지의 전부 자기 것을 만들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것 만든 것이요, 영감을 자기 것 만들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것 만든 것이오, 진리를 자기 것 만들었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것 만든 것입니다.
이래서 주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우리 택자들의 생의 법칙이니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뭐이 나타나는가? 기적과 축복이 나타납니다. 기적과 축복 이래서 두 사람이 우리 믿는 사람들도 안 믿는 사람이 될 때는, 믿는 사람들도 새사람으로 살지 안하고 옛사람으로 살면 뭘로 사는가? 옛사람으로 살면 근검 절약과 이 과학으로 삽니다. 근검 절약과 과학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부지런한 것도 자기요, 또 아끼는 것도 자기요, 조심하는 것도 자기요 그렇게 모두 다 절제하는 것도 자기야 전부 자기라 근검절약은 자기 힘이라 말입니다. 자기 힘, 자기 지능, 자기의 모든 행위 그 자기 자체, 자기 실력 자기 기능 자기 행위 전부이 똘똘 뭉쳐서 근검 절약이라 그렇게 한 말로 표시를 해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안 믿는 사람들은 전부이 자기로 살고 있습니다.
자기요, 자기의 실력으로 살고 있어. 자기의 지능으로 살고 있습니다. 또 과학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물질의 이치에 맞춰 산다 말인데 그거는 무슨 말인고 하니 물질의 혜택으로 산다 그말입니다. 물질의 혜택 과학으로 사는 거는 물질의 혜택으로 삽니다. 과학으로 살면 물질의 혜택을 입습니다.
물질의 혜택으로 사는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뭘로 사는가? 그와 정반대입니다.
기적으로 산다는 말은 근검 절약은 자기 지능으로 사는데, 기적으로 산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지능으로 산다 그말입니다. 기적으로 산다는 말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지능으로 산다 말이오. 지능으로. 지능으로 산다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과학으로 산다 말은 물질의 혜택으로 사는데, 물질의 효과, 물질의 효과로 산다 말인데, 그 과학으로 사는데. 물질의 혜택으로 사는데 우리의 무엇의 혜택으로 삽니까? 뭣의 혜택으로 사요? 하나님의 혜택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축복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자기 힘으로 사느냐 하나님의 돕는 하나님의 능력의 은혜로 사느냐? 또 이 물질의 모든 그 효력으로 살고 있느냐 하나님이 나를 도와 주시는 은혜의 축복으로 살고 있느냐? 이 둘 이거 중에 이게 아니면 저거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자기가 깨달아서 확실히 확신을 가져야 됩니다.
확신을 가져서 아무쪼록 그게 이치를 따져 가지고 자기에게 확고하게 깨달아져서 이거는 손으로 내가 이 종을 만진 거보다도, 만지기는 만졌는데 이거는 내가 만진 걸 모르요. 이거 만졌다 하지만 혹 손 신경도 그렇기 때문에 나는 만졌다고 했는데 뒤에 보니까 안 만진 것도 있어. 이렇지만 우리가 진리를 잡는 것은 이 손으로 이거 잡는 거보다 더 확고합니다. 더 확고하게 그렇게 확고하게 됐기 때문에 마지막에 죽을 아주 위급에 가 가지고 변동이 되지 안합니다. 그렇게 잡힌 사람이 마지막에 죽을 때 가 가지고 그 번동이 안 되기 때문에 세상을 다 이기고 자유롭게 걸어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믿음을 우리가 자꾸 평소에 만들어야 됩니다. 만드는데, 사 건에서 만들고, 모든 물질에서 만들고, 또 자기의 인성에서 만들고, 온갖 죄악에서 만들고, 자꾸 그래 하면 여기서도 믿음 지키고 자꾸 그래 만들어 보면 자꾸 믿음이 쌓여지고 믿음이 커지고 자꾸 그래 가지고 모두가 다 믿음 뭉텅이뿐이라.
소유도 믿음 뭉텅이. 그 사람은, 돈은 돈이 아니라 주님에게 순종 뭉텅이라.
순종함으로 돈이 왔고, 또 그거 쓸 때도 순종함으로 썼고. 그거 보수도 그거 수호도 순종으로 수호됐고 전부 순종 뭉텅이라. 일도 그렇고, 그 사람은 저 사람은 믿음 뭉텅이라. 믿음 아니면 벌써 죽었을 건데 지금 믿음으로 죽음에서 살아나왔고, 믿음으로 행동했고 전부니까 전부 보니까 그 사람이 사람도 믿음 뭉텅이요. 일도 믿음 뭉텅이요, 행위도 믿음 뭉텅이요, 소유도 물질도 믿음 뭉텅이라. 믿음 뭉텅이가 안 되면 모든 것은 자기 뭉텅 이입니다. 믿음 뭉텅이 아니면 자기 뭉텅이요. 자기 뭉텅이는 그것이 자기를 위하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말로 말해서 우상 뭉텅이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따라합시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기적과 축복으로! 베풀어 주리라! 기독자는! 주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만! 자기의 전생애를 삼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주시는 기적과 축복으로만 산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이걸 우리가 자꾸 살아 보면, 뭐 살아 보면 현실 현실에서 느껴집니다.
누구든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이 호들갑쟁이라 할지라도 오르고 그 사람을 미친 사람이라 할 겁니다. 그 사람은 입에 기적 축복뿐이오. 아. 이것도 기적이다. 이것도 기적이다. 거짓말하는 사람입니까? 아니야.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 하니까 살라 할 때는 '도무지 이거는 아니야 이래 되는데 말씀대로 사니까 그것이 돼졌고, 말씀대로 살고 나니까 전부 자기의 전생애가. 이스라엘만 하나님의 기적과 축복으로 사는 게 아니라 오늘 신령한 이스라엘은 더욱 더 기적과 축복으로만 삽니다. 기적과 축복으로 살지 안하고 이거는 기적도 축복도 아니고 과학으로 살았다면 그거는 죄입니다. 바로.
언제든지 하나의 현실에서 과학과 이 하나님의 법칙과 이렇게 대립을 시키도록 이래 해 주십니다. 언제는 일치했다가 대립을 시켜 주고 이래 해 주고 이러니까 우리는 항상 주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킴으로 세상 것은 눈물을 흘리면서 내놨더만 또 있고, 눈물을 흘리며 내 놨는데 또 그게 내게 또 도로 왔고 눈물을 흘리면서 다 포기했는데 또 도로 왔고, 이 전부 믿음이라는 구멍을 통해 가지고 다 온거뿐입니다. 믿음이라는 구멍을 통해가지고 왔지 믿음이라는 구멍을 통해 가지고 오지 안한 것도 하나도 없어. 보존도 믿음이라는 구멍을 통해 가지고 전부이 그 보존이 다 왔고 그런고로 신앙은 체험이라. 신앙은 체험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살면 아마 그렇게 사는 사람은 자기가 눈을 뜨고 성경을 몰라서 우연이라고 보는 거. 마귀 그놈이 우연이라 하면 우연이 없습니다. 우연이 어디 있습니까 우연이 없는 것입니다. 뭐 닥치면 이거 우연이라 그리 돼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되게 될 때가 돼서 그래됐다 우연이라.
마귀는 우리에게 모든 닥친 모든 만 가지 일을 우연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일이 있지 않느냐?' 그라지만 자기가 자기를 아는 대로 자기에게 대해서는 자기는 그것이 분명히 상상도 못 했는데 그래 됐다. 또 자기는 거기 대해서 아무런 동정하고 노력하지 않는데 그게 됐다. 자기는 이랬는데 이게 됐다. 이러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자기가 자기에게 모든 오는 것이 전부이 기적이요 축복으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라 말이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다 거짓말하대요. 거짓말이라 하는 것은 몰라 거짓말이라 하지 참 거짓말이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가 아이에게 대해서 하루 열 두 번 거짓말한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뽀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이지만 그 아이를 진정 사랑해서 그 아이의 심정과 형편과 사정을 똑똑히 관심을 가지고 보는 사람은 그 아이의 울음 하나도 공연히 우는 게 아니고 웃는 거 하나도 공연히 웃는 게 아니고 전부 하나 하나가 저 속에 그 인격의 주관이 있어 가지고 한다는 것을 어머니가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어머니는 말하지만 이해 못 하는 사람은 마구 통으로 보니까 다 거짓말한 다 이렇게 말한다 그거요.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믿음의 눈을 떠 가지고 보면 전체를 주님께서 나의 전부는 기적으로 나를 보호하고 있다 이것도 기적이요 저것도 기적이 그 다 기적이다. 뭐 이 사람에게 관한 것 저 사람에게 관한 것 다 기적이라. 이렇게 자꾸 이것이 경험과 체험에 쌓인 사람은 자기가 어떤 온 세상의 어려움을 닥친다 할지라도 오늘까지 나를 지켜 주시고, 오늘까지 나와 동행해 주시고. 오늘까지 나를 기적으로 인도하시고 기적으로 보호하신 그 분의 기적이 한이 없고 제한이 없으니까 이것도 당신이 이루어 주시리라 하고 안심하고 든든히 나아가면서 눈앞에 다 파괴가 다 됐다 할지라 도 눈으로 보이는 파괴로써 끝난 게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파괴가 무궁 세계의 성공으로 어떻게 나타날란지도 모른다.
이라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앙을 세상이 어떻게 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초월한 신앙을 어떻게 그 사람을 꺾겠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좀 신앙으로 살아서 신앙의 경험과 체험을 좀 누려보고 겪어 봅시다. 그래서 '뭐 천인 만인이 부인해도 나는 부인할 수 없다. 나는 확실히 경험했다. 체험했다. 내게는 확실하다. 주님이 이렇게 했는데 어찌 내가 부인할 수 있느냐?' 그러기 때문에, 왜정 말년 때에 거창읍에서 장로 쳐 놓고는 신사 참배 이긴 장로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다 졌습니다. 뭐 전부 다 졌습니다.
○장로가 위대하다 했지만 그분도 졌고, 뭐 ○장로니 전부 다 졌습니다. 그때 유기도 장로라 하는 한 분이 이겼습니다. 아주 그 한 분이 이겼는데, 그분에 가 가지고 나중에 고문과 고행을 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라고 하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주님이 내가 벌써 칠십이 다 되기까지 내가 살 때에 주님이 한 번도 나를 모른다 소리 안 하셨고, 내게 대해서 당신이 하나도 간섭 안 하지 안하시고 간섭해서 전부이 기적으로만 나를 오늘까지 살려 주셔서 기적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내가 내 목숨 하나 때문에 그분을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배반 못 합니다. 그분 말이 '평생 기적으로 나와 동행해 주셨는데 그분을 내가 배반 어찌 하겠소? 할 수 없습니다. 못 합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자유대로 뭐 할대로 그만 내 생명을, 나라의 권세가 있으니까 나라의 국권을 가지고 생명이든지 어떤 처형이든지 형벌을 가하든지 할지라도 나는 이제까지 나를 한 번도 내 몰라라 하고 내게 대해서 무관심하고 내 몰라라 하고 간섭 안 하지 안하셨고 내게 대해서 낱낱이 챙겨서 동행해 주셨는데 그분을 내가 어떻게 버리겠소? 하는 그거 가지고 그분 하나 그 ○○읍 교회서는 주남선 목사님하고 그분하고 둘이 신사 참배 안 하고 이겼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은 얼마든지 주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어떻게 세밀히 사랑하는 가. 내게 대해서 등한히 하는가, 내게 어떻게 어느 정도로 간섭하고 어느 정도로 세밀하고 어느 정도로 큰 초자연의 능력 가지고 나를 보호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지금 알 때입니다. 자꾸 알아 나가서 이 확신을 가져 있으면 세상이 어떻게 온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세상이 나를 어떻게 하리요 하는 그 신앙 가진 사람은 세상이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믿음 없이 세상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