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할 일

 

1986. 12. 27. 새벽 (토)

 

본문:베드로전서 2장 1절∼3절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그러므로” 하는 말은 1장 24절 끝절 다음에부터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이 말은 안 믿는 사람의 전생활은 다 육체 생활입니다. 뭐 과학 생활 하든지, 어떤 사업 생활 하든지, 종교 생활 하든지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의 생활하는 것은 전부 육체 생활입니다. 육체 생활이라 말은 인간의 심신이 주장하는 생활이라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중생될 때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가담되어서 그 사람을 점령하고 그 사람 속에 내주해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오셔서 그 사람을 점령 내주하기 전에는 영은 죽었고 육체는 순전히 악령, 죄, 사망이 주관해서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사람으로만 사는 것을 가리켜서 육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의 구원을 받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그 세상을 모양으로 점령했든지 세상을 뭐 지식으로 권세로 자기의 기술로 활동으로 정치로 모든 부귀 영광으로 무엇으로 점령해서 살든지 그것은 전부가 다 육체 생활이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육체라 말은 고기덩어리라 말 아니오. 고기덩어리라 말이 아니고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으로만 사는 것은 다 육체 생활입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의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육체 생활은 다 끝이 있습니다. “꽃은 떨어지되” 그 모든 영광도 취미도 가치도 또 행복도 생명도 전부 다 그것은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주의 말씀은 영원 무궁하다. 세세토록 있다 말은 영원 무궁하다 말입니다.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너희에게 전한바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그러면 우리가 받은바 신구약 성경 말씀이 곧 이 복음이니라 말씀합니다.

그러면 성경 가운데는 하나님의 의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성경은 능히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을 너희들에게 일으켜 가지고 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 말했습니다.

2장 1절에,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악독이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악독인가? 사람들이 뭐 사납게 하는 그런 것을 조브랍게 악독이라 하는 줄 알지만 그것도 악독은 악독인데 여게 악독이라 말하는 것은 악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사는 것이 악이고 독은 다른 사람도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도록 만드는 것이 독입니다.

땅위에 있는 모든 신구약 성경 이 복음 외에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수많은 지식을 자랑하고 있지마는 그 모든 것은 다 악이요 독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고도 표시를 했습니다.

왜? 세상 모든 지식은 제가 다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게 하는 것들입니다.

불우의 이웃 돕는다, ‘톨스토이니 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주 박애주의자인데 사랑을 주장한 그 사람인데 어떻게 악인가?’ 어떤 자는 돈을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조그만한 가정에서 자기 중심으로, 명예를 가지고 자기 중심으로, 제가 사상을 어떤 것을 하나 창작해 내 가지고 그 사상으로 모든 사람들을 점령해서 모든 사람들이 그 주장한, 박애주의를 주장한 톨스토이 자기를 위주로 살게 하려는 것, 또 석가모니 같은 사람도 자기를 위주로 해서 살게 하려는 것 그것이 다 종류와 방편이 너르고 좁은 것뿐이지 전부 다가 악이요 독입니다.

하나님도 그라면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살게 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자기 중심, 하나님 당신 중심 당신 위주로 살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 됩니다. 인간은 어떤 인간이라도 인간 그 자신 중심, 뭐 어떤 종교 창설자든지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그 종교 창설자 그자 자신의 위주로 중심으로 살게 한 것은 다 악이 됩니다.

이걸 가리켜서 창세기 3장에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됐다” “하나님과 같이 선악을 알기 때문에 그래 못 먹게 했다” 선악을 규정지우는 것이 하나님이 당신 위주 당신 중심으로 살면 선이라 이래 했는데 사람들이 또 사람 그 자체의 중심 위주로 살면 선이요 자체를 버리면 악이라.

석가모니의 말한 그 사상을 가지고 살면 선이고 석가모니의 사상을 배반하면은 다 악이라, 또 마호멧트는 또 마호멧트의 사상을 가지고 살면 선이요 그리 안 하면 악이라, 공자는 공자의 사상으로 살면 선이요 사상을 떠나서 살면 악이라 이랬는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 중심 당신 위주로 사는 것을 선이라, 생명이라 이렇게 하고 사람은 그렇게 못 하게 했는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은 그 자체가 완전자요, 영원 불변자요, 또 생명이시요 이렇지마는 인간은 하나님같이 완전자, 영원 불변자, 완전 생명인 자가 있다고 하면 그도 자기 중심으로 그이 중심으로 살아야 되지 그 중심으로 살지 안하면 악이 되겠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온전치 못한 것이 그렇게 하기 때문에 다 그것이 악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악독과” 이 악독이라면 무슨 사람들이 조그만한 범위에서 때리고 사람을 상하게 하면 악독인 줄로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가장 작은 악입니다. 아주 소범위로서 그 점령하는 것이고 제일 대종교를 창설한 그자는 악 중에는 대악입니다.

“악독과 모든 궤휼” 그러니 다른 사람을, 인간에게는 영원을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있는데 이걸 모르기 때문에 모두 다 꾀우는 것이오. “모든 궤휼과” “외식과” 다시 말하면 이것이 다 껍데기 생활이라 그말이오. “외식과” “시기와” 이래 가지고 이 시기가 뭐이 시기냐 하면은 하나님이 이렇게 하나님의 도를 증거하니까 마귀란 놈이 이래 가지고 하나님처럼 제가 해 가지고 그렇게 할라 하는 그것이 인간 속에 들어가 가지고 인간들의 크고 작은 자의 모든 행위가 다 이런 행위입니다.

“모든 비방” 모두 허는 거, 옳은 것을 허는 걸 말합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도를 허는 것만 허는 것이지 다른 것은 다 그것이 다 뭐 이래 허나 저래 허나 다 허는 뭉텅이들이기 때문에 하나입니다.

“말을 버리고 갓난 아이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그말은 이거는 하나의 비유입니다. 젖이라 말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사모하라 그말입니다. 복음을 사모하라 그말입니다.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구원에 이르도록” “순전한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너희들이 젖을 먹으면 아이가 자라는 것처럼 이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가 자꾸 읽고 듣고 연구하고 지켜 행하면 네가 자라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

“말미암아 너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이렇게 해 가지고서 해 보니까 어린 아이가 그것이 아무것도 모르지마는 어머니가 자꾸 젖을 먹이는데 그 먹어보니까 맛이 있으니까 맛있는 줄도 모르지마는 자꾸 젖을 먹고 먹고 하니까 자라니까 나중에 자라고 나니 검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와서 젖을 먹이면은 검은 것만 보면은 좋다고 웃읍니다. 또 흰 옷을 입고서 그라면 흰 옷만 와도 좋아합니다.

그거는 뭐이냐? 자기에게 좋는 것이 자꾸 오고 또 나중에 조금 차차 커 가 보니까, 몸이 찝찝하게 오줌 싼 데도 그가 오면은 좋아지고, 추울 때도 그가 오면 더워지고, 또 배고픈 것도 모르지만 어짠지 배고플 때도 그가 오면 좋아지고 이러니까 차차 차차 자라가면서 이제 어머니 좋은 줄 아는 것처럼 너희가 이 복음을 자꾸 사모하면 너희가 그 속에 일곱 가지 그 구원이 자라게 되니 자라게 되면 너희가 자꾸 그와 같이 하리라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아침에 이 말씀을 봉독한 이유는 거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많이 들어도 이 말씀을 자기가 그만 듣고 잊어버리고 또 기억하고 있어도 행하지 안하고 그러면 헛일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듣고 기억하고 행하면 한번 듣고 행한 사람이 수천 번 듣고 행하지 안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가 길을 지나가면서 이사야 53장을 읽고 지나가는 것을 성령이 빌립을 ‘쫓아가거라. 가서 저 수레에 가서 네가 그 말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라,’ 가니까 그 에디오피아 내시가 가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갑니다. 지금 성경 이런 성경이 아니고 그때는 가죽에다가 써 가지고 하기 때문에 성경 이 한 장이라면 짐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짐을 거기다가 실어 가지고 그걸 가죽을 성경을 읽으면서 이래 갑니다. 그래 갈 때에 마차를 세우니까 서서 ‘네가 읽는 그 성경이 뭐인지 아느냐?’ ‘내가 가르쳐 주는 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느냐?' 그것이 예수님의 이 구세주 대속주를 가리킨 것을 말할 때에 그가 즉시 믿고서 ‘나를 세례를 줄 수 없느냐?’ 그래 거기서 세례를 줬습니다.

그 한 말씀 듣고, 메시야라는 걸 한 말씀 듣고, 모든 성경은 다 구주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한 말 딱 듣고 난 다음에 가서 성경을 보니까 자꾸 풀려서 그 사람은 에디오피아 내시는 다시 만나지 안하고 그 한 말씀 거머쥐고 흔연히 떠났다 했습니다. 이 한 말씀으로 만족하다 하고 그 말씀 한 말씀 가지고서 떠나서 자기가 성경을 자꾸 읽어보니까 자꾸 그 속에 들었다 말이오.

이래 가지고 그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하나님 말씀은 자꾸 사모하는 데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과 같은 것인데 아무리 뭐 이 복음 외의 거는 미국도 소련도 일본도 한국도 어데든지 그것은 크고 작은 것은 다 그것은 없어지고 멸망으로 들어가고 맙니다. 다만 이 구원만입니다.

지난밤에도 요새 며칠 늘 말하기를 ‘우리 할 일은 하나뿐이다. 우리 할 일은 하나뿐이다.’ 뭐? 구원 이루는 거 이 외에는 할 일이 없다. 구원은 하나라면 하나고 곧 구원이라면 자기 구원, 남의 구원 이 두 가지 구원이 우리 할 일입니다.

이것만이 할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은 어짜고? 구원 이루는 것이 하나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구원 이루는 것이 제일 사랑을 뜨겁게 가지는 자요, 구원 이루는 것이 자기를 행복되게 하는 것이요, 구원 이루는 것이 다른 사람을 가장 봉사하고 돕는 일이요, 구원 이루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구원.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이것이 우리 할 일입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 이뤘습니다.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 된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사람만으로도 안 되고 하나님만으로도 안 되는 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돼 가지고라야 이룰 수 있는 이 구원,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되어서 구원을 이루면은 어떻게 이루는가? 전부 다 바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된 이 양성일위이신 이분이 있는 것 다 바쳐서, 소유도 다 바쳤고, 존귀와 영광도 다 바쳤고, 지위와 권세도 다 바쳐서 이 구원이 반쪼가리가 이루어졌습니다.

또 이 구원을 죽음으로 반쪼가리 이루어진 이 구원, 나머지기 반쪼가리는 하나님이 영원히 피조물로 살아나는, 하나님이 피조물로 사는 이 한없는 천한 욕된, 이보다 더 천해짐이 없고 욕됨이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만 큰 걸로 생각하고, 우리 위해서 큰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부활은 아주 부활했으니까 좋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꼭 같은 고생이요, 꼭 같은 희생이요, 꼭 같은 사랑이요, 꼭 같이 하시기 어렵고 못 할 일인 것입니다.

예를 들면은 아주 존귀한, 존귀한 대왕이 어떤 자를 사랑해서 그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그 사람을 구원할라고 하면은 네가 똥구덩이 속에 구더기로 너는 구더기가 돼야 된다.’ 똥구덩이의 구더기된 것보다도 하나님이 사람되어 온 거는 말할 수 없는 차이 있습니다.

또 ‘네가 똥구덩이의 구더기가 돼 가지고 죽어야 될 뿐 아니라 죽어 가지고도 구원 반밖에 못 이룬다. 너는 영원히 똥구덩이에서, 대왕이 똥구덩이에 구더기가 돼 가지고서 영원히 똥구덩이에서 살아야 구원을 이룬다.’ 대왕이 똥구덩이에서 구더기로 영원히 사는 그것과 신인양성일위이신 하나님이 사람되어서 영원히 사는 것과 그는 말할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 사활의 대속으로 일곱 가지 구원을 이루신 것은 이렇게 큰 사랑의 희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을 이루었는데 예수님의 사활로 우리에게 구원 이루어 주신 이 구원이 몇 가지입니까? 손으로 가리켜 보십시오. 점잖은 사람들도 가리켜 봐요.

뭐 점잖기는 다 오늘이라도 안 믿으면 다 지옥 가고 말 것인데. 지옥은 뭐 영은 안 가요. 영은 안 가지마는 이 심신의 기능은 다 지옥 가 버려, 잘못 믿으면.

일곱 가지인데 일곱 가지 이 구원은 이것은 첫째가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세 가지 해방과 자유를 준 구원입니다. 또 둘째로는 예수님이 또 죽으심으로써 우리에게 두 가지 구원을 준 하나님의 의와 완전한 화친의 생명, 신인 화친의 생명 이 두 가지를 주신 구원입니다.

다시 또 양성일위가, 그 영광스러운 왕이 어떤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네가 구원할라면은 네가 똥구덩이에 구더기가 돼 가지고 구원을 위해서 죽어야 네가 구원 얻는다.’ 죽고 나니까 ‘이것 가지고는 네가 네 사랑하는 자를 구원에 해방만 시켰지 그를 구원으로 가지고 살지는 못하게 한다. 살도록 할라 하면 네가 대신 똥구덩이 이제, 똥구덩이 구더기로 돼 가지고 영원히 살아야 이제 네 사랑하는 자를 이 구원을 가지고 살게 한다.’ 할 때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부활로써 두 가지 구원 주신 것은 부활로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대신 영감으로 영생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는 영감 생활, 하나님을 향하는 진리 생활 이걸 가지고서 하나님을 향한 영생의 두 생활을 한 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은 우리에게 일곱 가지를 줬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활로 대속하신 일곱 가지 구원은 내것이 됐습니다. 이 택자들의 것이 됐습니다.

택자들의 것이 됐는고로 다섯 가지 구원으로써 완전히 하나님의 공심판, 하나님의 화친, 또 이 모든 세 가지 죄 마귀 사망에게서 해방의 자유 이것 받았지마는, 받았지만 우리가 받은 그거 가지고 살지는 못합니다. 살 것이 있어야, 이거 받기는 받아 놨지만 살 자가 없기 때문에. 살 자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다시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셨다” 베드로전서 1장 3절 이하에 말씀을 해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할 일은 뭐이냐? 구원 외에는 할 일이 없다. 구원만이 우리의 할 일이다. 우리는 구원 외에는 우리 할 일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분야에서 어떤 생활을 하든지 생활하는 그 전부를 다 구원을 위해서 하면은 못 할 일 없습니다. 성경에 하지 말라고 금하는 일 외에는 다 할 수 있습니다. 다 할 수 있는데 모든 일을 하되 거기에서 우리가 구원을 이룹니다.

구원 이룬다 말은 일곱 가지 대속 받은 생활을 그 속에서 한다 말입니다. 일곱 가지 대속 받은 생활을 그 속에서 합니다. 자기 현실 속에서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그 공부하는 속에서 공부하는 전생활을 일곱 가지 대속 생활 합니다. 또 사업하는 사람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녀 낳고 가정 이루고 사는 사람은 가정 모든 생활 전부를 일곱 가지 대속 생활을 그 속에서 합니다.

일곱 가지 대속 생활하다니? 뭐인가? 그것은 자기 그 생활에서 죄의 종 되지 않는 거, 죄의 종 되지 않는 거, 죄짓지 않는 것, 마귀의 종이 되지 않는 것, 또 사망의 종이 되지 않는 것, 그러면 이 세 가지 종되지 않는 것인데 종되지 않는다는 말은 뭐 안 하는 것이 종되지 않는 것입니까? 사망의 종되지 않는 것이 뭐이며, 죄의 종되지 않는 것이 뭐이며, 마귀의 종되지 않는 것이 뭐입니까? 종되지 않는 것을 성경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죄에 종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범죄하지 않는 것을, 죄를 범하는 자는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요 사망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어떤 생활하든지, 공부를 하든지, 정치를 하든지, 과학을 하든지, 가정 생활하든지, 남의 밑에 종질하든지 어데서 하든지 이 죄를 범하지 않는 그것이 이 세 가지 자유 생활입니다.

또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수많은 전지자의 입법해 놓은 그 입법을 범하지 않는 것이 예수님의 입법을 완전히 이행해서 우리에게 준 하나님의 의를 보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어떤 환경이 어떻게 돼도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입혀주신 하나님의 의를 벗지 안하고 사는 것입니다.

또 어떤 환경에서라도 하나님과 이렇게 화친된, 하나님과 화친된 하나님과 이 친밀된 이 친밀을 끊지 안하고 사는 것이 그것이 완전한 생명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요 다섯 가지는 마련한 기본구원이오. 마련한 구원이오. 이제 여섯째 일곱째 이것이 비로소 이 구원을 가지고 살아난 자로, 중생돼 가지고 이 구원을 가지고, 이 구원을 가지고 다시 살아나서 사는 그것이 이것이 중생 생활입니다.

이것이 두 가지 구원입니다.

그러면 어데서든지 이거 하는 것이라. 이것을 잃지 안하고, 이 일곱 가지 구원을 잃지 안하고, 이 구원을 입혀 주셨으니까 이 구원을 입고, 이 구원을 입고 사는 것이, 이 구원을 어데서든지 입고 사는 것이 이것이 이 복음을 사모하는 것이요 이 구원을 사모하는 것이오.

또 입고 사니까 이 구원을 입었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라. 나는 이 구원을 입었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라. 주님이 일곱 가지 대속으로 나를 샀고 일곱 가지 대속이 내것 됐으니까 나는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그런고로 갈라디아서에 말하기를 그렇게 말했습니다. 갈아디아서 2장에,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나는 있는데 예수님이 대신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내가 대신 죽었고 예수님이 다시 사람으로 살았기 때문에 내가 산 것이라 그말이오.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고 있는 것은” 지금 살고 있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니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내가 행위로 말미암아 우리의 온전이 있는 것 아닙니다. 주님이 일곱 가지 대속을 주셨으니 이 대속으로 완전된 것이 이 대속만 벗지 안하면 됩니다.

이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 뭐인가? 이 내 남은 이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 사는 것이 벗지 않는 것이오. 주님의 것이 사니까 껍데기는 내가 살지마는, 껍데기는 내가 사는 것 같지마는 내 몸뚱이 안에 마음이, 마음 안에 영이, 영 안에 일곱 가지 대속이, 일곱 가지 대속 안에 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그 속에 살아 계셔 가지고 그분이 산 역사를 내게 주신 일곱 가지 구원을 통해서 나타내고 일곱 가지 구원이 나를 주장하고 내 영을 주장하고 내 마음을 주장하고 내 몸을 주장해 가지고서 내 주위 환경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지금 말하는 것은 이 일곱 가지 대속의 구원을 뭐 설교 암만 들어도 그것만 잘되는 것 아니고 한 번만 듣고 가도 잘될 수 있습니다.

그거 뭐이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나를 대신해 가지고 나를 줬기 때문에 사활의 대속은 내것, 나는 뭐입니까? 나는 주님의 것. 그러면 지금 사는 것은 내가 나를 주장해 삽니까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해서 사십니까? 주님이 내 안에서 나를 주장해서 삽니다.

그러면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데 주님이 뭘로 사십니까? 일곱 가지 대속으로 사십니다. 그 대속은 뭘로 삽니까? 대속은 내 영으로 삽니다. 영은 뭘로 삽니까? 내 마음으로 삽니다. 내 마음은 뭘로? 내 고기덩어리로 삽니다. 내 고기덩어리는 모든 사물 속에서 이 예수님의 일곱 가지 대속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구원인 것입니다.

이것은 자꾸, 오늘 아침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베드로전서 2장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사모하는 것.

이러니까 ‘나는 이런 이런 죄로 멸망을 받았다. 예수님 없으면 다 인간은 이렇게 멸망을 받은 것이다. 이런 멸망에서 예수님의 대속으로 나를 구원해 주셨다.

예수님의 부활로 나로 하여금 이 구원으로 살게 하셨다.’ 이 사실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 일곱 가지 구원 받은 이 구원을 자꾸 생각하면서 ‘나는 일곱 가지 대속 받은 자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제는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주관해 산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 이제 내 마음대로 살지 못한다. 나는 주님의 것이니까 주님 마음대로 하고 주님이 대속해 주신 것만 내것이다.’ 이렇게 자꾸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하면서 차차 능숙해지면은 그 속에 한 걸음 들어가서 더 구비하게 생각하고, 더 깊이 생각하고, 더 세밀히 생각하고, 넓게 생각하고, 더 정확하게 자꾸 진실되게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에서 자기 속에 하나님이 와서 역사하는 걸 제가 알 것이라 그말이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주님의 이 대속으로 사활의 대속을 자꾸 생각하니까 죄가 멀어집니다. 사활의 대속을 생각하니까 죄가 멀어집니다.

사활의 대속을 자꾸 생각하니까 마음의 눈이, 신령한 눈이 밝아집니다. 신령한 눈이 밝아지니까 온 세상이 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는 것을,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것을 보여집니다.

온 세상이 떠들어도 이거는 죽음 아래 있는 거, 이것을 우리 구원을 위해서 잡아먹고 이용하는 것이지 이것이 이대로는 생명이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이럴 때에 모든 것이 다 정평 정가하게 되는고로 모든 피조물의 전부보다 창조주 보이지 않는 그분이 더 크고, 그분이 크고 난 다음에는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 그다음으로 크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 땅에 있은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 모든 것이 이 구원을 가진 자의 것이 된다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자꾸 그라니까 ‘이상하다’ 이제 자기가 `내가 이 죄로 말미암아 가정을 망쳤다. 내가 이 죄로 말미암아 살림살이를 망쳤다.

이러기 대문에 이 죄를 범하지 안할란다.’ 아무리, 그런 말이 있어. 자기 술먹는 자가 술로 가지고 다 살림살이 패가하기 때문에 술 안 먹을라고 결심도 하고 오만 것 다 하고 요게다가 ‘나는 술먹으면 개자식이다’ 요렇게 써 가지고 해도 안 돼. 또 노름하는 자가 이 도박하는 거 가지고 살림 망친 자가 이 손가락 이놈 가지고서 도박하기 때문에 손가락을 끊어도 안 돼. 팔을 끊어도 안 돼요. 자기가 음행으로 범죄, 음행으로 망한 것은 그걸 안 할라고 암만 결심을 해도 안 돼요. 금식해도 안 돼요. 아무리 해도 안 돼요.

안 되는데 되는 법은 뭐이냐? 일곱 가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자꾸 사모해.

자꾸 생각해, 젖 먹는 거 모양으로. 자꾸 사모하고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제는 나는 내것으로 살면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주님의 것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주님의 대속이 내것 될라면 내가 주님의 것 돼야 되고 주님의 것 된다면 이제 내가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주께서 사시는 요게 돼야 된다.’ 요 세 가지를 ‘주님의 대속은 내것이다. 나는 주님의 것이다. 이제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신다.’ 요 세 가지만 자꾸 생각하니까 죄가 멀어집니다. 요 세 가지만 자꾸 생각하니까 세상이 뭣이라 하는 걸 정평 정가하게 됩니다. 이러기에 내 소망이 전부 이 대속에 있고 땅위에 있지 않습니다. 그거는 모두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과 같은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됩니다.

자꾸 이렇게 이 사모하니까 이상하게도 눈이 밝아져서 모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더 확실히 보여지고 또 이 세상이 뭐라는 게 확실히 보여지고 ‘세상이 사람을 멸망케 하는 마귀의 이 모든 그물 속에 전체 사람이 있는데, 우글거리고 있는데 그게 다 삼키는 사자와 같다. 마귀가 다 붙들어 가지고 이와같이 하고 있는 것이라. 전부 죄악의 구덩이다. 사망 구덩이다.’ 하는 걸 자꾸 보여지게 됩니다.

이러니까 이제 모든 육체는 잠깐이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지 않는, 보이는 이 모든 것은 보이지 않는 데서 나왔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고, 보이는 것은 또 없어질 것들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자꾸 보이는 껍데기에서 자꾸 찾아 들어갑니다. 찾아 들어가서 심령이 밝아집니다. 과거와 지식이 달라지고 자꾸 비판이 달라집니다. 이라니까 하나님의 지식으로 내 지식되고 인간의 지식은 다 속이고 속는 지식이라 하기 때문에 이거 다 마귀의 음행의 포도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게 돼요.

그래서 내가 며칠 전에 어떤 사람이 저거 아들이 미국에 제일 좋은 학교 뭐 하버드 대학에 들어갔다고 ‘하버드 대학에 입학이 됐습니다. 이건 참 어려운 건데 막 학교서도 야단이고 야단이 났습니다.’ 이라는데 저거는 좋아서 이라는데 그거 콱 그만 좀 깨뜨릴 수는 없고 내가 있다가 그래 말하기를 ‘그 모든 것이 다 육체요 모든 것이 다 그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 그런 것을 구원을 위해서 이용하면 좋지마는 그것이 구원보다 큰 것은 아니다. 그것이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다 멸망하는 자살 행위가 되고 만다.’ 무엇이 있습니까? 자꾸 여러분들, 다른 수 없어. 사람의 심령의 신령한 눈이 밝아지는 것도, 신령한 힘이 강해지는 것도, 옳고 그른 것을 바로 보는 것도, 가치 있고 가치 없는 것을 보는 것도, 속이고 속는 것을 보는 것도, 참된 인도를 받는 것도, 모든 것을 바로 알고 바로 행하고 바로 만들어서 자기를 영광스럽게 다른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자타를 영광스럽게 존귀하게 행복되게 하는 것이 유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이거는 몇 가지어야 됩니까? 이거 하는 데는 몇 가지 하면 이것이 이루어집니까? 일곱 가지로 어떻게 하면 이루어집니까? 이 일곱 가지를 자꾸 사모하고 자꾸 사모하고 또 일곱 가지대로 해 볼라고. 그러면 하면 되는 거라. 그러니까 세 가지 생각하고 하면 돼요.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 이것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주님이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이 만들어 놓은 사활의 대속 일곱 가지는 누구의 것입니까? 내것. 또 나는? 주님의 것. 또 주님의 것 되면 이제 이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니라” 말씀하신 대로 이제 내가 사는 거는 내 언행심사를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내 언행심사의 모든 이 영육을 주님이 주관하셔서 사는 것 이 세 가지만 자꾸 연습한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 세 가지.

세 가지 중에 첫째는 뭐이요? 말을 해 봐요, 점잖지 말고. 세 가지 중에 첫째가 뭐입니까? 크게 해 봐요. 저 뒤에도 크게 해 봐요, 입으로. 크게 해 봐요. 크게 말해 봐. 왜 말 안 해? 내버릴 거라? 짜다라 소리일랑 하고 싶고, 다른 소리는 다 죽는 소리요. 자기 망치는 소리라.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은, 따라해요.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은!내것! 하나입니다. 또,대속받은 나는!주님의 것!대속받아 가져 주님의 것된 나는 주님이 삽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이 주관해서 삽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요 세 가지.

주님의 것 내것 만드는 것 첫째, 나의 모든 것 주님의 것 만드는 거 둘째, 이제는 주님의 것 내것 삼아 있는 나는 주님이 내 안에서 사시는 것, 요 세 가지만 자꾸 생각해요. 생각하고 요 일을 할라고 애를 쓰고 보니까 이상하게도 됩니다, 이상하게도.

3절에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어린 아이가 자꾸 젖 먹으니까 이거는 멋도 모르고 본능적으로 먹고 싶어 먹었어. 본능적으로 목이 말라 본능적으로, 목 갈한 것도 몰라요. 본능적으로 어짠지 좀 안 됐는데 어머니가 젖꼭지를 물리니까 시원하고 좋습니다. 자꾸 이거 뭐, 그라면 크는 줄도 몰라요. 크는 줄도 모르지만 자꾸 꼴딱꼴딱 삼키고 있으니까 차차 차차 눈이 밝아져 가지고 뭐 어머니가 와서 젖꼭지 물리니까 좋다고 하하 웃습니다. 나중에 가서는, 똑똑히 못 봐요, 눈이 흐름하니까. 어머니가 검은 옷 입고 오면은 막 검은 옷 입은 사람만 가 버리면 막 야단이요, 울고. 또 검은 옷 입은 사람이 오면 좋아합니다. 아이 키우는 부인들 다 그런 것 봤어요? 그래요. 인제 자꾸 젖을 먹으니까 커지니까 알게 돼.

이렇게 자꾸 사모하면 차차 차차 주님도 똑똑히 알게 되고 하나님도 알게 되고, 만물도 알게 되고 모든 것을 다 바로 알아요. 젖먹고 나중에 크고 난 다음에는 모든 걸 다 바로 보고 다 정평 정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와 꼭 같애요.

이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을 한 번만 들어도 가 가지고 자꾸 사모하면 돼. 사모하면 돼요. 사모하면 되는데 몇 가지 사모해야 됩니까, 손가락으로? 일곱 가지 사모해야 되는데, 일곱 가지 사모해야 되는 데 오늘 아침에 배운 것은 일곱 가지를 세 가지로 사모해야 돼요, 세 가지로 사모.

사모하는데 세 가지로.

세 가지. 뭐? 첫째는 뭐? 내것 되는 것. 내것이 아닌데 내것 만든 것. 내것 아닌 것 내것 했으니까 또 나는 줘야지. 나를 줘야지. 물건 살라면 이거 종을 살라면 종을 내것 만들면 내게 있는 돈을 내줘야 되지 안해요? 돈 안 내주면 이거 도로 뺏기요. 알겠습니까?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이 내것 됐으니 나는 주님의 것이 돼야 되는데 주님의 것이 되지 안하고 내나 대속받아 제것을 제것으로 살면은 헛일입니다. 이 대속은 법적으로 우리에게 와 있기 때문에 기본구원은 얻지마는 건설구원은 하나도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내것 삼고 나는 주의 것 삼고 그다음에는 이제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사는 요것이 돼야 돼. 요 세 가지가 돼야 돼.

요 세 가지를 할라고 애를 써요. 세 가지를 잊어버리지 말고, 사모하라 말은 세 가지를 생각하고 세 가지로 사는 노력을 계속해서 하는 가운데에서 주의 인자하심을 조그매씩 맛을 봐. 주의 무한하신 능력을 맛을 봐. 주의 능력이 내게 조그매씩 와 가지고 차차 차차, 오면 내가 뭐이돼요? 내가 새사람으로 자라게 돼요.

새사람으로 자라게 되니까 이제는 차차차 자라게 되니 세상도 알게 되고, 무궁 하늘나라도 알게 되고, 하나님도 알게 되고, 피조물도 알게 되고, 모든 피조물 나는 미국에 뭐 세계 미국 소련에 뭐 제일 수뇌자들이 모인다 뭐 이랬었는데 눈이 떡 밝은 사람은 그래 쌓으면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니까 그런 장난한다, 그런 일 한다.’ 해도 그걸 크게 여깁니까? 온 세계에 이 모든 학문이 가득찬 이 학문을 다 뭉쳐 가지고 평가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한 성구에 억억만분의 일도 당하지 못한다 하는 걸로 정평 딱 하게 된다 그말이오.

‘온 천하를 하나님 말씀을 구원 떠나서 점령하는 것보다도 한 말씀대로 실행해서 요 구원 이루는 것이 더 크고 가치 있다.’ 모든 걸 정평 정가해.

이라면 마귀에게 꼬입니까? 안 꼬이요. 마귀에게 속지 않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다.’ 그러기 때문에 자녀 낳아서 길러도 이 구원으로 관계되지 안하면은 뭐라 했습니까? 젖먹이는 여인에게 화있고 아이 밴 여인에게 화 있어. 밴 것도 화, 젖먹이는 것도 화, 키운 것도 화, 아들딸 보고 벙긋벙긋 좋아하는 것도 화, 전부 화뿐이라. 이 모든 것을 일곱 가지 대속의 구원을 줘서 일곱 가지 대속으로 하나되면 영원히 나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거 외에 딴게 없어, 가치 없어. 오늘이라도 주님이 구름 타고 오면 다 미국도 불타 버리고 일본도 불타고 모두 소련도 불타 버리요, 한국도 불타고.

알겠습니까? 이 구원만 남아 있어요.

“모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리니 너희들이 어떠한 사람이 돼야 하느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나타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이 모든 게 이렇게 불타려니와 의인들은,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하신바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말씀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오늘이 이것이 끝장날란지 내일 끝장날란지 모릅니다. 모든 불의한 자들과 경건한 자들이 아직까지 구별이 안 나 그렇지 이 완전히 구별이 다 완전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 뭐라 했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이제 이 모든 것은 불사르기 위해서 쌓아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경건과 불의가 구별될 때까지만 쌓여 있지 이 공사가 끝나 버리면 이 공사를 위해서 이용당하는 모든 존재는 다 불로 타서 원소로 돌아가 버리고 이제 새로운 모든 피조물들이 생겨져서 만물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맙시다. 이 삼십 분 기도를 놓으면 자기 믿음 지킨 거 한목 툭 털어서 팔아먹고 맙니다. 이 기도를 꼭 해야 앞으로 네 믿음이 있나 없나 하는 것 저울질할 때에 합격이 됩니다. 그 시험을 이기게 됩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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