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피난처

 

1984. 3. 4. 주일오후

 

본문: 누가복음 15장 3절-7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 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울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선지자선교회  이 비유에서 우리에게 있는 확신을, 확신을 약화시키는 유혹이 여기에서 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들에 두고' 이랬으니까  이거는 내나 잃어버린 양이나 찾은 양이나 그 빈 들판에 둔 것으로 그렇게 보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들에 뒀다 했으나 다른 데서는 양의 우리에 들지 안한 양이  있으니 양의 우리에 다 모아 들여야 되겠다 그렇게 말씀했고, 또 일반적으로 양을  칠 때에 양을 한 군데 모아 놓을 때는 반드시 거기에 목자와 목부가 그 양을  지켜서 다른 이리가 와서 해하지 못하도록 해 놓고 양을 찾으러 다니는 것입니다.

양을 많이 기르는 그 지대에는 양을 해하는 이리가 많기 때문에 언제든지 목자가  맹수를 방어할 수 있는 그런 모든 기구를 차려 가지고 지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들에 두고' 이래 했으나 '목자의 보호 안에 두고'하는 그 사실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는 이 말씀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그런 이것은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도록 만드는 데에 해당된 말씀이라  또 그렇게 오해하기 쉽겠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주님이 늘 회개를  재촉하시고, 또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지  안해서 그들에게 종이라고 말하지 안했고 회개하라고 말한 것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지마는 그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그 회개할 것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말했고, 또 회개한 사람도 이것은 회개했지마는 저것을 또  회개 안한 사람 있고 이러기 때문에 하나씩 둘씩 회개하는 그 모든 회개하는  것을 가리켜서 여기에 말한 것이지 '죄인 하나의' 하는 이 말을 잘못 깨닫고 이는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으러 돌아오도록 전도하는 데에 기뻐한다 그렇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그것도 회개지마는서도 우리 믿는 사람이 주님이 부르실  때까지 우리 회개는 계속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 잘못 해석하는 그  미혹을 벗어나야만 될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하는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이 절대의 은혜와 보호를 입어야  구원이 되어지는 것인데 여기에는 정확 무오한 호리도 위반하면 안 되는 그 정확  무오한 법칙이 있기 때문에 그 법칙에 딱 들어맞아야 하나님이 와서 역사 하실  수가 있습니다. 삐뚤어지면 안 됩니다. 사울왕이 사무엘 선지자로 '네가 그 아각  왕국을 치라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죽여라'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사울왕이 다  죽이고 그저 짐승 약간 몇 마리 남겨 놓고 아각 왕만 남겨 두었습니다. 이러니까,  자기로서는 너무 생각보다 참 지나치게 하나님 말씀에 복종 완성을 이루었다고  아주 자신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사무엘을 만나 가지고서 '사무엘이여  나로 인해서 하나님 앞에 큰 축복을 받으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이렇게  완전히 이루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하나님의 뜻을 다 순종치 안하고 에누리를 했기 때문에, 그를 버려서 평생 왕  되지 못 하게 했기 때문에 왕위를 가졌지마는서도 왕위로 인해서 그는 평생  패망을 당하게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에누리하지 안하고 확신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지금 덧붙여서 하는 말입니다.

 오늘 오전에 증거한 대로,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뿐이다 하는 것을 오전에  말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멸망 가운데에 환난 중에 있으면서 피난하는 그  방편, 피난하는 그 길이 무엇이냐 하는 그 길도 하나뿐인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그 기쁨이 있는데 그  기쁨도 하나이니 그 기쁨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피난처에 대해서  말씀했고, 피난 길, 피난 방편에 대해서 말씀을 했고, 기독자들이 이렇게 악의  세력이 강하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아무도 빼앗아갈 수 없는 그런 기쁨과  평강을 하나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요것을 오후에 다시 한 번 더 알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피난처가 하나뿐이라 하는 그 말씀은 성경 어데다가 근거를 하고서  그와같이 말씀하는가?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요 아흔 아홉 마리 양, 두고 온 그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여기에는 들이라고 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절대 보호를 받고 있는 의인이라고 그  다음에 해석을 해 놨습니다.

 베드로 후서 3장에 '모든 체질이 불에 타서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이렇게 모든 것이 불타고 체질이  드러나고 불심판이 이르지마는 우리는 의에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  보도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의가 있는 곳에는 멸망이 못 가는 것입니다.

의가 있는 곳에는 멸망이 못 갑니다. 의는 멸망을 멸망시키지를 못합니다. 그래  '하나님의 의가 복음이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인은 멸할 아무 세력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의가 있는 그 가정도 아무리 원수가 많아도 멸하지 못하고  또 의가 있는 그 사업도 멸하지 못합니다. 의가 있는 그 단체도 멸하지 못합니다.

의가 있는 나라도 멸하지 못합니다. 의가 있는 지방은 멸망 받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말세에 이렇게 땅 위에 온갖 환난을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은 이  환난을 피해서 의로 옮겨서라는 말입니다.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의 나라로  들어가서 잠깐 숨어라. 땅에 있는 모든 자들을 하나님께서 죄악을 멸하실 때인데,  땅에는 멸망이 가득 찼는데 이의가 있는 곳은 멸망이 없다' 하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약을 확고하게 잡아야 됩니다. 이  말세에 모든 온갖 종류의 환난과 멸망이 오나 의는 멸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피난할 곳은 그 의가 거하는 그 곳 곧 의는 다 하나님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에게 들어 갈려면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가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를 피난처로 삼는  데는 자기가 의가 있어야 들어가지 의가 없으면 들어가지 못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피난처는 하나뿐이라. 의가 거하는 여호와 안밖에는 우리의 피난처가 없다  하는 이것을 우리가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의는 무엇이 의인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말합니다. 대속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드렸기 때문에  다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대신 형벌 받으심으로, 대형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고, 우리가 행하지 못한 것을 대신 행함으로써,  대행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칭의를 주셨고, 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주님이 대신 원수의 그 모든 형을 받고 대신 화친을 이루어서 하나님과 화친된  이 대속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입혀 주신 대속은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사죄와 칭의와 화친 이 세 가지 대속인데 이 세 가지 대속을 입지  안하면 여호와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합니다. 전지전능 완전하신 그 하나님 안에  들어가는 데는 이 의를 가진 자라야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피난처는 여호와, 곧 하나님 한분뿐이시라. 여호와라 말은  계약을 선포해 놓으시고 계약대로 이행하시는 하나님이시라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호와는 우리 선조 때에, 아주 신앙적으로 유치하고 미개한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와로 나타났습니다. 계약을 선포해 놓으시고 계약 이행하는 나는  하나님이다 그렇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흑암 중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이라 했고, 그 다음에는 여호와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 예수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내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떤 위치를 가지고 있든지 요의를 벗지  안하고, 의를 벗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그것이 여호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그늘 안에 있는 것이요 지존자로 거처를 삼아 가지고서 그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자기 현실에 어떤 그 현실을 만나든지 자기는 의를 벗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해할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해하지 못합니다. 의를  벗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해는 못 하고 전부 모든 피조물이 의를 입고 있는  그자를 위해서 있습니다. 의를 벗지 안한 자는 죽음이 와도 그 사람을 위하기만  했지 해하지 못하고, 칼날이 와도 위하기만 했지 해하지 못하고 기근이나 적신이  와도. 적신이 와도 위하기만 하지 해하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의를 입은 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그 피난처에 머무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이 땅 위에  어떤 것이 와도 해하지는 못합니다. 도와서 유익만 끼치지 해하지는 못합니다. 이  말씀도 처음으로 들쓰면 그게 무슨 말인가 이해를 못 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의를 입고 의를 벗지 안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의를 벗지 안하고 있는 그 사람을 만일 죽였다 합시다. 죽였으면 의를  벗지 안하려고 입고 있다가 죽었으니까 해를 당한 줄 압니까? 해 안 당했소. 그  사람이 수명이 끝날 시간이 아니면 죽일 수 없고, 수명 끝날 시간이 되었으면  의를 벗지 안함을 인해서 죽였으면 이미 죽음으로 끝날 참 무용의 아무 쓸모없는  그 죽음을 순교로써 아주 보배로운 죽음을 맺는 것입니다. 사람의 생애는 사는게  반쪽 죽는게 반쪽인데, 일반 기독자들은 다 사는 거 반쪽만을 이용을 하고,  죽음을 폐물 이용으로 자기에게 유익되게 이용하는 사람은 순교뿐입니다. 그러면,  순생과 순교, 순교만이 그 죽음이라는 폐물을 자기의 일생에 반 가치를 가진  보배로 이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있기 때문에 그를 해 하지  못합니다. 의를 가진 자를 해하려고 할 때에 이것 잘 안 들으면 몰라요. 이것을  아무래도 믿어야 되겠는데 안 믿으면 헛일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 가지고 '너의 오빠가 어데 있느냐 네 오라비가 어데 있느냐?' '네, 여기다가  묻어 놨습니다.' 주님이 '돌을 굴려 옮겨 놔라.' '벌써 죽은 지가 나흘이 넘어서  냄새가 나는데 그 흉한 것을 옮겨 놓으면 어떻게 합니까?' 주님이 말했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했느냐?' 그럴때에 마르다가  회개를 하고 돌을 옮겨 놨습니다. 그래 주님이 나사로를 부를 때에 죽은 나사로가  살아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한 형식을 가지고서 보이는 계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이렇게 하면 된다고 계약해 놓은 그 말씀은 뭐 약한 것이  강해진다는 말씀이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씀이나, 죽은 것이 살아 난다는  말씀이나 또 패전자가 승리한다는 말씀이나, 모든 원수를 다 정복한다는 말씀이나  천한 자가 존귀하게 된다는 말씀이나 무슨 말씀이든지 주님이 한번 말씀해  놓으신 이 말씀을 사실로 인정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은 역사합니다.

그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땅을 바라보도다.' 모든 만물이  불타고 다 멸망받는 여기에도 의가 있는 데에는 멸망이 못 옵니다. 노아 홍수  때도 그 배 안에 구원이 있은 것은 의인이 있었기 때문에 그 배는 구원  얻었습니다. 그 배는 멸망시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런고로 의는 멸망하지 안한다.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아니하려고 온갖 방비를 하는데 그 방비하는 방편이 다  세상적인 방비는 전부 헛일입니다. 이 멸망을 피하고 자기를 해 하는 모든 해를  방어하는 것은 하나님이 법칙을 하나로만 똑 내놨습니다. 여러 가지를 내지  아니하고 하나만 딱 내놨기 때문에 이 하나인 하나님이 정하신 이 법칙을 지켜서  이 법칙으로 모든 오는 해를 방어하고 모든 사망을 방어하고 이래야 되지 다른  방편을 가지고서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업도, 이 사업이  넘어지는데 내가 이 사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안하는  사람은 그 사람만, 골 빠졌지 멸망받고 헛일입니다. 사업도 '아, 피난처는 여호와  뿐이시라더라 여호와의 피난을 받으려면 의인이 되어야 된다 하더라' 이러니까,  이 사업 무너지는데 주님의 대속의 이 사죄를 벗지 안하려고, 사죄를 입을라고  칭의를 입을라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하려고 이 하는 일이 얼마나 미련하고  뚱딴지같은 일입니까? 그래도, 만에 하나도 착오가 없습니다. 하나도 틀림이  없습니다. 자기가 어떤 그 아주 이 세상 사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어떤 어려운  입장이든지 닥쳤습니다. 어려운 입장이 닥쳤으면 그 때에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는  이 의 '의라야 이 모든 환난에서 피난할 수 있다. 나를 해하는 모든 이 해를  방어할 수 있다.' 이 의를 새로 입고 의를 벗지 안하고 있으면 자기에게 그  재산을 벗어야 피난이 되면 하나님이 벗겨 줍니다. 그 사업을 일으켜서 자기에게  유익이 되면 일으켜 주십니다. 그 직장을 자기가 더 올라가야 유익하면 올려  줍니다. 그 직장에서 벗어나야 유익하면 벗어나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분을  믿어야 됩니다.

 그러기에, 오전에도 말한 대로 피난처는 하나뿐입니다.

 피난처는 하나뿐인데 그걸 이 성경 어데다 근거 하느냐? '의인 아흔 아홉 사람'  이거는 하나님의 보호를 입고 있는 자입니다. 의인은 인간의 행동이 하나 둘  의로운 그런 것을 가리켜서 의라고 말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서' 이 의를 입는 걸 말합니다. 이 의는 세상이 예수님의 사죄를 벗으라고,  벗고 죄를 입으라고 해도 죽었으면 죽었지 죄를 다시 입지 않습니다. 죄를 입지  안하고 죄 없는 자로 있는 이것이 사죄를 입고 있는 사람이요,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 의를 그대로 보수하고 있는  것이 이것이 의를 입은 사람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배반해서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어떤 그 주장이나 세력에게 끌려가라고 해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습니다.

하나님을 자기가 모시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친밀한 그 친교를 벗지 안하고  그대로 삽니다. 그러면 그것이 의인입니다. 의인은 멸하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이 진동하고 난리와 난리가 난다고 해도 하나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하지 안해야 됩니다. 두려워 할 것이 없습니다.

겁낼게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쳐들어온다고 해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의는  멸하지 못합니다.

 지나간 그 6·25를 지나고 난 다음에 거창 지방에서 교역자 회의를 모였는데  모이니까 그 모든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 나온 간증을 많이 합디다. 하는데 그  성질은 꼭 같습니다. 죽음에서 살아 나온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기를 '의를 벗으라  의를 내놔라' 의를 내놓으라고 했는데 의를 내놓지 아니한 그것을 인해서 죽음이  됐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다 살아났습니다. 여기에도 거기에 참석한 사람 한 분  아마 있을 것입니다. ○뭐교? ○집사라고 여기에 있습니다. 인민군들이 와 가지고  담배를 피울라고 불을 달라 하니까 불을 안 줬습니다. '왜 불 못 주느냐?' '아,  담배 피우는 불 심부름은, 담배 피우는 것은 죄기 때문에 담배 피우는 불  심부름은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이 군인이 아추  마음에 노발했습니다. '그러면 네가 안 주겠느냐?' 총을 대도 안 준다고 하니까  '가자' 저 구덩이로 가 가지고 구덩이 속에 갖다 놓고서 이래도, 총을 겨누면서  '이래도 네가 불을 안 주겠나?' '못 줍니다. 생명을 자기가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내가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불은 주지 못합니다.' 이라니까 그 군인이 거기에서  총을 놓고 참, 크게 탄식을 하면서 '나도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신앙을 갖지 못해서 이 꼴이 됐습니다.' 하면서 아주 칭찬하고 존경을 하고  나중에 자기 집까지 데려다가 주더라고. 뭐 그 전부 6·25때는 그런 기적의  이야기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도 그 다리오 왕이 하나님의 이 구속의 은총을 벗어  놓으라고 하루 종일 사정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도리를 벗어 놓지  안한 그것이. 하나님의 도리를 벗지 안한 그것이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에 묶여  들어갔습니다. 묶여 들어간 것이 되었습니다. 사자 구덩이에 묶여 들어간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기서 상하지 아니하고 그 이튿날 굴에서 나오게 되었으므로  다니엘의 원수는 완전히 다 소탕을 해 버렸습니다. 소탕하고, 다니엘이 살아 있는  동안에 다니엘을 해 할라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의는  멸망하지 못한다 모든 피조물은 의를 망치지 못한다 사탄도 의를 망치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 의를 가지셨기 때문에 이 의를 이것을 양보하라고 오만  방편과 수단을 다 썼지마는서도 예수님께서 의를 양보하지 아니하시니까,  아니하시고 그만 양보하라고 여러 가지로 고문과 고행을 하다가, 예수님이  양보하지 안하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럼으로 인해서 사망도 사탄도 완전히  예수님의 의에게 정복을 당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의는  멸망시키지 못한다.' 요걸 꼭 잡읍시다. 자기의 가정에서도 '아, 의는 멸망시키지  못한다 우리가정에 의만 있으면 멸망은 못 온다. 또 내가 하는 이 사업에 죄가  섞여 있지 안하고, 불의가 섞여 있지 안하고 하나님과 대립되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이 사업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직장도 내가 의를  버리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이 직장은 나를 해하지 못한다.' 만일 의를 벗지  안하고 입고 있으므로 그 직장에서, 의 때문에 그 직장에서 쫓겨 나오게 되면  어떤 것입니까? 쫓겨 나오게 되면, 그 의 때문에. 그 직장에서 그 사람이 망할  터인데 그 의 때문에 그 직장에서 망하지 안하고 그 직장에서 구출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알기도 쉼고 기억하기도 쉽지마는 믿기는 어렵습니다.

어데서든지 의는 승리한다. 의는 망하지 못한다. 의는 피해를 보지 않는다 의는  전능자의 보호를 입는다, 의는 모든 피조물이 다 의를 위해서 협조하지 의를  해하는 피조물은 없다 요 단정지워야 됩니다. 마귀도 의는 해하지 못합니다.

마귀가 의를 멸하려고 하지마는 의를 벗지 안하면 마귀가 의를 멸하려고 하는 그  노력은 결과적으로 의를 위해서 저는 이용만 당하고 영원히 종만 되었지 해하지  못합니다. 의는 해하지 못합니다. 요걸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의는 해할 자가  없다, 의는 전능자의 보호가 있다. 의를 지키는 자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그를  위하기만 하지 해할 자는 하나도 없다 마귀도 해하지 못한다, 의를 지키고 있으면  죄도 해하지 못합니다. 의를 입고 있으면 죄가 천하 죄가 다 달려들어도 그 죄가  그 사람을 해하지 못하고 천하 죄가 다 달려듦으로써 그 의를 벗지 안한 그  사람을 그 죄가 위하고 유익되게만 하지 해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요것 믿어야  됩니다. 온 천하 죄, 온 천하 악, 온 천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악령, 온천하의  악의 세력 그 전부가 똘똘 뭉쳐 가지고 그 사람에게 어떻게 공격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의만 벗지 안하면 그 모든 것이 그의 것이 됐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리해서 존귀하게 된 것이요 방편을 가지고  존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런 성구를 그저 듣고 지나갈 것이 아니라 '아, 입으로써  말하는 것으로 다 되었다' 그런 망령을 부리지 말고, 그런 패역과 교만을 부리지  말고, 내가, 의는 해할 자가 없다, 의는 산다, 의는 승리한다 의는 평안하다, 의는  영광스럽다, 의는 존귀하다, 의는 성장한다, 의는 해할 자가 없다, 의는 여호와의  피난처 속에 있다. 전능자의 그늘 아래 있다 의는 해할 자 없다 요걸 꼭 잡고,  그러면, 내가 의를 놓지 안하고 의를 벗지 안하고 입고 있을라고. 우리가 기도  제목 가운데 제일 처음에 있는 것이. 의를 자은 자로 살자 하는 것 아닙니까?  의를 입은 자로 살자. 그 의는 열 가지를 말했는데 의를 입은 자로 사는것, 요  의만 벗지 안하고 요 의를 입고 있으면 뭐 그 사람이 나를 훼방을 하고 나를  빗고 깎고, 나를 항상 위해서 참소를 하고, 내게 대해서 모략중상을 하고. 뭐  어떻게 발등치기를 하고 해를 하고 하는데 우리의 싸우는 방법은 따로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서 이리저리 하는 것은 마귀의 방법이요 이것은 사망의 방법이기  때문에 지는 것이지, 어쨌든지 원수가 많을수록 이 의를 똑똑히 입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똑똑히 입고 이 의의 혹은 구멍이라도 떨어진 데가 있는가 하는  고걸 살펴 가지고 떨어진 구멍이 있으면 그것을 단단히 집을 것이요 다시 의를  입을 것이요. 의를 벗지 안하고 의를 입고 있으면 천인 만인의 천 가지 만 가지의  해가 우리를 해하지 못합니다. 그 모든 것은 나의 면류관이요 영광이요  존귀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이 오는 그것은 의를 가진  자를 칭찬과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기 위해서 그런 것들이 다 오는 것이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읍시다. 전능하신 아버지를 믿읍시다. 이 약속을  선포해 놓으신 전능하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럴 때에 '아, 주님이  말씀은 이래 놨지마는서도 이 일까지 되겠느냐?' 거기에서 전능자를 배척하는  것도 되고, 거기에서 전능자를 참말로 모시는 것도 되고, 전능자를 다른 사람에게  증거하는 것도 되고, 그럴 때에 그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전능자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전능자의 영광이 나를 통해서 드러날 때에 전능자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나도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이것도 그저 지나갈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매일 우리는 외우는 것 중에 하나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요절 중에  하나가 되어야 됩니다. 우리의 피난은 의 안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이요, 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의 속으로만 들어가면 우리를 멸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의 피난처는 여호와이신데. 우리의 피난처는 예수 그리스도신데,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대속하신  의를 주셨습니다. 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게 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과실을 많이  맺는다.' 대속 안에 있으면 말입니다. 주여 주여 암만 해야 소용없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벗지 안하고 대속을 입고 있으면 그것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요  여호와 안에 있는 것이요 전능자 보호 안에 있는 것이요 전능자로 피난처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우리의 피난처, 우리의 은신처는 하나님뿐이신데 이  안에 들어가는 데는 우리가 의를 입고야 들어가지 의를 입지 안하면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의는 우리의 갑옷입니다.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  뭐입니까? 하나님의 전신 갑주가 곧 하나님의 의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팔지 않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을 가진 이 화친을 버리지 안하고 이 화친을  입고,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 피동을 입고, 하나님이 사죄해 주신 이 사죄를  입고, 입는 이것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 입은 것입니다. 해할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요것을 단단해 기억하고  그 다음에 둘째, 우리의 피난처. 피난처. 우리가 급하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6·25같은 그런 것이 오면 다 당황해서 곁길 걸을 거라 그말이오. 지금이라도  6·25같은 것이 오면은 곁길 걸을 것이라 그말이오. 6·25때 보니까 참 거창은  신앙이 좋았습니다. 거창에 거기서도 몇몇 교회들은 6·25 때에 이 피난처를 바로  마련하려고, 다 하나님으로 피난처를 삼을라고 이랬지마는 그렇지 안하고  인간적으로 날뛴 사람은 6·25 지나가고 난 다음에 참 머리를 들지 못할 만한  그런 수치스러운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도 그만 뻔뻔스럽게 또 지나고 나니까  모른체 하고 고만 다 이래 가지고 하지마는 그 뭐 6·25때에 그들 앞에서 행동한  것과 말한 것 모든 언행심사 한 그것은 그게 어찌 하나님 앞에 가면 안  드러나겠습니까?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전능자를 믿습니다. 그분을 믿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입혀  주신 이 의 이것을 가리켜서 흰 두루마기라, 흰 두루마기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고 있다가 그  대속을 더럽힌 자, 대속을 더럽힌 자는 대속을 자꾸 빨아 가지고 똑똑히 대속을  입고 있어라 그말이오. 대속을 입고 있으면 아무도 해할 자가 없어.

 둘째로는 우리가 환난을 만났을 때에 어디로 가야 피난할 건가? 피난길을 여기  말했습니다. 피난길, 피난 방법. 그러면, 지금이라도 6·25같은 그런 전쟁이 나면은  우리가 어디로 피난을 갈까? 어떤 방편을 사용할까 하는 피난의 유일한 방법,  하나님께서 피난 방편으로, 방법으로 정해 놓은 거는 하나뿐이라. 피난방법,  피난방법, 피난방법은 회개입니다. 이 비유에 양이 목자를 떠나는 것은 죄  가운데에 빠져 들어가는 것을 말하고, 또 거기에서 양이 목자와 함께 양 우리로  돌아오는 것은 세상에서 회개하는 것을 여기에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회개가 그것이 피난하는 유일의 방편이라 하는 것은 본문 어데를  가지고서 말하는고 하니, 양이 목자를 떠날 때에는. 일 대 일로, 저하고 이리하고  상대하고, 저하고 덤불하고 상대하고. 저하고 그 모든 냇물 강물하고 상대하고,  저하고 이리하고 상대하고 이렇게 자기와 모든 자기의 대적과 모든 험한 것을  직접 상대했지마는 목자에게로 돌아갈 때에는 목자가 여기에 어깨에 메고 아듬고  어깨에 메고 이래간다 이래 했습니다. 메고 이래 가는데 그래도 그 양은 목자에게  메여가니까, 목자가 메고 가니까 제가 없는데 그 양은 그걸 모르니까 이리 보면  날뛰었을 것이고 이리한테 물릴까 싶어서 겁이 나 호독거렸을 것이오. 덤불 보면  찍힐까 싶어서 염려를 했을 것이오. 했지마는 목자가 어깨에 메고 가는데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회개하는 걸음은 전능자의 보호를 입는다 그말입니다.

회개하는 걸음은, 회개하는 걸음은 전능자의 어깨 위에 메여 간다, 전능자의  보호를 입고 간다.

 그러기에 자기가 예수님 없이 이 세상에 만 가지를 닥칠 때에 두려워하고  떨리던 그런 것을 회개의 궤도에만 딱 올라서면, 회개의 궤도에 올라서서 자기는  회개의 노선에만 올라섰으면 전능자가 자기를 아듬고 이렇게 보듬고 가는 그  보호를 입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다 하는 것을 여기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전쟁이나면은 두려워하는 거. 또 자기에게 뭐 재산이 파탄되는 그런 일을  닥치면 두려워하는 거. 또 자기에게 모든 인인 관계에서 원수가 되어서 큰 낭파가  될 일을 닥쳤으면 두려워하는 것 세상에 두려워할 그런 낭파될 만한 어려운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것이 하나님을 떠나서 저 혼자 세상에서 살 때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회개하는 그 회개로 살 때 와가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걸 자꾸 우리가 믿어야 돼  양이 목자에게 이렇게 아듬겨서 가지 않습니까? 가니까, 저기 보니까 이리가  이리가 옆에 있습니다. 이리를 보면 양이 놀래지 않았겠습니까? 놀래야 되지요.

놀래는 것은, 목자에게 아듬기지 안하고 이리 만났으면 저는 당장 고만 잡아먹혀  버립니다. 잡아먹히요. 이렇지마는서도 이 목자가 아듬고 있기 때문에, 양이  목자가 아듬고 있다는 이 사실을 자기가 알았다면 그 이리를 보고 조롱을 할  것입니다. '아나 내 다리 뜯어 먹어라 아나 내 앞다리 먹어라 아나, 내 머리  먹어라.' 그렇게 조롱하지, 기쁘고 즐거워 평안하고 조롱하지 두렵겠습니까?  몰라서 두려워한다 그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개는 그 걸음은 전능자의  그 능력의 보호를 입는 길이기 때문에, 그 보호를 입는 행위라, 회개한 그 회개는  하나님의 전능의 보호를 입는 행위라.

 이러니까, 전능의 은혜를 입는 방편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능자가 자기를 지키고  보호하고 계시니 예수님 없이 어렵던 그 일을 내가 회개만 하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기 때문에 그런 것을 두려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 없는데,  왜 사람이 회개를 하면서도 두려움을 가지고 회개를 하면서 또 염려를 가지느냐?  내가 이거 회개하다가는 가정이 파탄되겠다 내가 회개하다가는 내가 직장이  절단되겠다. 내가 이 회개 하다가는 사업이 절단 나겠다, 내가 이것을 회개하면  이런 인인 관계 다 끊어지면 나는 신세 간다, 왜 두려워하느냐? 왜 두려워하느냐?  회개하는 여기에 보니까 회개해서 양이 목자의 우리로 돌아가는 데는 목자의  어깨에 메여가지고 가는데, 이게 회개인데, 회개라는 것은 전능자의 어깨에 메여  가지고서 그 피난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들어가는 것인데 왜 두려워하는가?  우리 믿는 사람들이 자기가 하나씩 둘씩 회개를 하면서, 회개를 하면서도 '내가  이 일을 회개를 하다가는 큰일 나겠다' 회개하기를 두려워하고 회개하기를  두려워하고. 또 회개하면서 두려워하고, 이 회개하면 그 결과가 큰일나겠다  싶어서 두려워하고, 회개를 하려고 하면서 두려워하고 회개하고 두려워하고,  회개의 결과를 인해서 두려워하고 하는데. 그 두려움은 실상 자기에게 두려워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옴으로 두려움이 되는 것 인가, 그 두려워하는 것은 회개를  했는데 두려움이 오는가, 그 두려움은 누가 주는 것인가 그것 한번 알아보십시오.

자기가 회개하려고 애를 쓰고 회개하고 이랬는데 두려움이 옵니다. 그 두려움이  오는 것은 누가 그 두려움을 줍니까? 그것 한번 누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한번  대답해 봐. ○○○씨, 자기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자기 속에 있는 부패성! 너를  부인하라 하는 부인하라는 그 자기!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 그 놈이 꼬아  가지고 '너거 회개하면 큰일난다' 하면서 두려워하는 것이지 실상은 해가 하나도  안 온다 그말이오. 자기를 부인하고 믿어야 됩니다! '야, 내가 하나님 말씀대로  회개하다가는 모든 것이 박살나겠다.' 이렇게 자기 속에 생각도 그러고 모든  사람도 그러고 '그라면 안 된다. 이거 큰일난다' 이렇게 할 때에, 하나님 말씀은  '회개하는 자에게는 전능자의 어깨에 메여 가지고 간다.' 요 말씀을 믿음으로써  모든 것이 두렵다 안 된다 낭파된다 해도 고때에 그것을 부인하고 하나님 말씀을  탁 믿는 그것이 회개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게 참 회개요. 회개하는  자에게는 절대로 실패나 낭패나 그런 해가 오지를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어떤 경제적 피난이나 국제적 피난이나 공산주의 독침 앞에?  피난이나 무슨 피난이든지 우리에게 해가 오는 원수의 해가 오는 그 모든  어려움이 있을 때에 '피난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요것을 가지는 사람도  권능자요, 요거 가지는 사람들이 다 세상을 다 이긴자요. 이 사람들이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이 사람들이 다 세상을 다 발 아래 밟습니다. 뭐 땅 위의  것을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로 들으면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그렇게  하는 데에, 왜정 말년에 죽이려고 이렇게 마구 위협을 하고 이렇게 하는데 그때에  다 그렇게 승리하고 나오는 것 그것, 하나님이 주신 것이지 사람이 하지를  못합니다. 제가 저번에도 말했지마는서도 아주 앞으로 보면 위가 커다랗고  영웅이라. 밑이 쭉 빨고 이렇게 쭉 삼각으로 생겼지 옆으로 보면 또 밑에가 넓고  위에가, 삼각으로 생겨. 잘났소. 잘난 사람들 전부 왜정 말년에 일본 사람들의  종이 종이 돼가지고 하라하는 대로 다 했습니다. 지금생각하면 쉽지마는 그렇게  쉬운게 아니요 이러기 때문에 지금 믿어야 합니다. 피난의 방법은 회개뿐이다.

모든 멸망을 피하는 길은 회개뿐이다. 자기의 피하는 은신처, 안락처, 은신처,  안락처 참 피난처 그런 평안한 곳은 여호와 하나님뿐이다. 그것은 의를 입으면  거기 들어갈 수 있다. 의에는 평강뿐이고 해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피난처는 하나님뿐이신데 의를 입으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 자기가  환난을, 환난에서 피난가는 피난길은 뭐이냐? 피난길은 회개다. 다시 말하면 네가  의를 입지 못한 것을 자꾸 의를 갖추어 입으라. 하나님의 의를 입으라.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을 네가 자꾸 입고 입고 또 입고해서 네가 볼 때에 흠 없이,  예수님의 대속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인데, 이 갑주를 입었는데 여기 구멍이  뚫렸거든 어서 예수님의 피공로로, 사죄의 공로 칭의 공로, 화친의 공로로,  믿음으로 또 때워라! 때워라. 믿음으로 때워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가지 배웠습니다. 이것을 앞으로  환난이 와도, 하나는 의를 입은 것, 의를 입고 있으면 해할 자가 없습니다. 의를  입고 있으면 해할 자가 없어. 회개는 뭐이요? 회개는 의를 지금 입지 못한 것을  의를 입는 것이고, 의를 입었는데 구멍이 났다 말이오. 구멍 때우는게 회개요.

구멍 때우는 것, 이 면을 때우고 저 면을 때워서 구멍이 없어. 그게 뭐이냐?  하나님의 전신 갑주라. 지금 우리 남한에 있는 교회들이 진부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고, 또 피난의 방편을 불신자와  같이 모두 다 물질 가지고 피난하는 방편으로 삼고 인간의 그 이십세기의 과학,  이십 세기의 문화 가지고서 피난의 그 방편을 삼습니다. 피난의 방편, 물질,  인간의 그 모든 지식. 다시 말하면 유물주의 인본주의, 유물주의, 인본주의 이 두  가지를 가지고서 피난을 삼을라고 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저 언제  한번 꽝 해 가지고 유물주의가 홍수 속에. 인본주의가 홍수 속에 다 침몰되고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그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이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이 의인이라야 된다는 이런 사람이 있으면 그런  사람을 높이 들어서, 노아 여덟 식구로 온 천하를 정죄해서, 심판해서 정죄하고  하나님 후사로 높이 들어서. 아, 하나님을 정말로 바라보고 의지하는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높이 들지 안했습니까? 노아 홍수에 뭣이 섰습니까? 서기를?  베드로후서 3장에 그때는 물의 넘침으로 온 세상을 멸망시켰지마는서도 이제는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멸망할 때까지, 불로 멸하기 위해서 보존해 두셨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어깁니까? 왜 이 말씀을 우리가 에누리를  합니까? 뭘 보고 안심을 합니까? 어디를 의지합니까? 의지할 것 없소. 의지할 것  없습니다. 바라볼 것 없습니다. 나를 맡아 달라고 맡길 데 없습니다. 내가 지도  받을 데가 없습니다. 가르침 받을 데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의 주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미련한 것 같고 어리석은 것 같지마는서도 슬기롭습니다. 이게  슬기로운 일이오. 그러므로, 우리가 두 가지 기억합니다. 피난길은 회개인 것,  회개는 뭐인가? 회개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거라. 하나님의 의를 손 하나 끼고 난  다음에 또 발 끼고 다리 끼고, 오른 손은 끼고 왼손 안 꼈으면 왼손 끼는 그게  회개라. 이게 몸뚱이는 입었지마는 투구를 쓰지 안했으면 투구 쓰는 그것이  회개라. 하나님이 전신 갑주를 자꾸 입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배웠고, 셋째는 그러면, 우리가 참 인간의 행복은, 뭐 피난하면  뭐합니까? 또 우리가 피난을 잘 갔으면 뭐합니까? 잘 간 것도 피난한 것도 뭐  그거 쾌락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철학에서도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쾌락이라  했습니다. 기쁨 없으면 소용없소. 암만 피난해서 안 죽었지마는서도 뭐 기쁨  없으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쾌락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고 즐거움이 없고 재미가 없으면 못 살아. 사람이 밥 먹고 옷 입고 안  죽고 살았다고 해서 그것이 산 것입니까? 기쁨 없으면 죽은 자요. 재미없으면  죽은 자요 쾌락 없으면 죽은 자요. 이러기 때문에, 불신자들도 그들도 통계를  맞취 말하기를 '인간의 최고의 행복은 쾌락에 있다.' 또 교회도 역연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말씀하시기를 우리에게 제일 행복은 기쁨이라, 기쁨이라. '너희들은 항상  기뻐하라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쁨 죽음에서도 기쁨, 생명에서도 기쁨  환난 중에도 기쁨, 감옥에서도 기쁨. 이 말을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옥중에서 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땅 위에 피조물 이런 거 저런 것으로써 기뻐지는 그런  기쁨도 있지마는서도 그것은 땅에 속한 기쁨인데 죽은 기쁨입니다. 다 썩은  기쁨이요. 그것은 저주 아래 있는 기쁨입니다. 암만 천하의 쾌락을 다 가졌어도  그 사람들이 얼마 안가서 그 쾌락은 슬픔으로 바꾸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사람들 단체에 보면 말이지요, 기쁘다고 즐겁다고, 안 되면 술도 한잔 먹고  기뻐하고, 안 되면 남녀 이성을 모아가지고 기뻐하고 뛰지마는 조금 시야를  넓히고 보는 사람, 조금 눈을 높이 떠 가지고 보는 사람, 그 기쁨과 한없는  비참의 슬픔이 한테 딱 들어붙어 있는에 어떻게. 일면만 보는 사람이 기뻐하지  양면을 다 보는 사람이 기쁘다고 할 수 있소? 그 하는 것이 참 불쌍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제가 언제 ○○ 여관이라 하는데 거기가 가지고서 앉았으니까 냇가에서. 그 모든  사람들이 모여 가지고서 하루 종일 기쁘다 하면서 춤을 추고 노는데 그걸 보고서  마음이 참 좀 안 됐어서 마음에 조금, 조금 간단한 그런 애통을 제가 한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쁘고 좋은데 몰라서, 마치 우리 안에 있는 도야지가 지금  흥정하러 왔는데 사료주니까 저는 좋다고 터벌 터벌 먹지마는서도 곧 지금  잡혀가서 도살막에 가서 죽을 터인데 그걸 모르는 것처럼 그 기쁘다는 것이, 그  기쁨이 며칠을 가며, 그 기쁨이 가면 몇 해를 가면은 마지막에는 그 기쁨이 다  없어지고 슬픔으로서 다 가슴 치면서 참 마지막 죽을 때에 그들은 다 그게  없어지니까 다 번민 고통, 생명이 끊어지는 게 고통이 아니라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모든 세상의 행복이 다 끊어지니까 그 고통이요. 끊어지니 고통하다가,  그뿐입니까? 죽었다가 부활해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너머 영원한 그 유황불  구렁텅이를 보면 어찌 됩니까? 그걸 알면 그들이 가슴을 치고 울지 기뻐할 리가  없다 말이오. 기뻐할 만한 그런 담력이 없다 말이오. 유황불 구렁텅이를 자기가  갈 것인데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는 기쁨이 있습니다. 여기에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  사람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그다음에 드라크마에 대해서는 '모든  하나님의 사자들이 기뻐하리라.' 그렇게 말했고 또 고다음에 탕자 비유의 회개에  대해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고 이웃 사람을 청해 가지고 또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이랬습니다. 천국에서 기뻐한다 즐거워한다 '내가 내 기쁨' 내 기쁨을, 나만  기뻐하는게 아니라 내 기쁨을,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주님도 기뻐하시고, 천국의  천군 천사들도 기뻐하고, 영계에 있는 모든 영물들도 기뻐하고, 모든 땅 위에  있는 만물들도 기뻐하고 이렇게 내 기쁨을 인해서 모든 전부가 다 기뻐하는 이런  기쁨, 전체 기쁨. 세상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 영원한 기쁨이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 이 기쁨이 여호와로 피난처를 삼고 회개를 피난의 방편으로 삼는 그  결과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입은 그 은신처로 인한 그 결과. 또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그 순서의 방편인 회개. 그 결과는 어찌  되느냐? 그 결과는 여기에 말하기를 한없이 기쁘다 이랬습니다. 한없이 기쁘다,  쾌락이다. 천군 천사, 하나님, 모든 만물이 다 기뻐한다 이렇게 말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쁨을 성경에 이래 놨지마는서도 한 번도 이 기쁨의 맛을  못봤다 그거요. 음식이 여기에 있는데 이 음식을 먹으면 참 달다 이라지마는  입에도 안 찍어 넣어보니까 단 줄을 모른다 그말이오. 단 줄을 모르고 '보니까  쓰겠구만, 보니까 맵겠구만' 하고서 안 찍어 넣어 입에 찍어 넣어서 좀 먹어보라  그말이오.

 여러분들, 우리가 회개는 자기에게 오는 모든 가해가 다 물러가는 것입니다.

모든 해를 피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보호를 입는  안식처로 들어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이러니까, 제가 여기에 와 가지고 처음에  전도지 박을 때에 '우리가 취미를 바꿉시다. 재미를 바꿉시다.' 하는 그것을  전도지에 기쁜 소식이라고 전도지에 박아 가지고서 거기에서 몇 가지 말했는데  그 전도지가 지금 전국에 퍼졌습니다. 전국에 퍼져서, 이제는 뭐 기쁜 소식이라  하는 것이 전국에 죄졌고, 또 그때에 그 전도지 내용이 다 퍼져 가지고서 전국에  퍼져 가지고 있는데 보니까. 우리가 취미를 바꾸자 하는 것은 땅에 무슨 없어질  그런 취미 그런 기쁨으로 하지 안하고 없어지지 않는 기쁨 취미 세상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 주님 말씀하기를 '너희들이 평안할찌어다. 내가  너희들에게 주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평강과 같지 안한다. 세상이 빼앗지 못하는  평강이다.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지 말고 받아 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회개하는 것은 이것은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것인데 요 회개를  간단하게 네 가지 하면 됩니다. 어떻게? 첫째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한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모르는 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영원자존 하신 분인 것과 그가 유일하신 하나님인 것과 모든 것의 원인인  창조주이신 것과 전지전능 전재자 주권자 주재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신 사랑. 이 하나님의 모르는 것을  우리가 회개하면 거기에서 평강이 나옵니다. 우리가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한  시간을 만나 가지고서 산에 가든지 들어가든지 가가지고서 자꾸 하나님을  배웁니다. 성경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 하나님에 대한 무식을  자기가 하나씩 둘씩 성경으로써 다 깨뜨려가면서 하나님에 대한 유식을 한 지식  배우고 한 지식 배워서 점점 하나님께 대해서 무식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참 올바른 지식을 갖춥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가르쳤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르친 대로 하나님께 배웁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성경을 봐서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자꾸 갖추어가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무식한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참 올바른 유식을 가지는 그 회개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요거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대한 지식을 회개하고. 그 다음에  둘째로는 이 하나님을 바래보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이분이 모든 것 나에게 다  해 줄라 했는데 이분을 소망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이분으로 해결하면 될  터인데 이분으로 해결할 줄 모르고 이분을 바랄 줄 모르고 인간을 바라보고  물질을 바라보고 자기 솜씨를 바라보고 뭐 어떤 세상의 이런 저런 단체 권세를  바라보고 이분을 바라보지 않는 이 죄를 회개해야 됩니다. 이분을 바라볼수록  기쁩니다. 이분을 바라보면 기뻐지고 즐거워지고 평안해지고, 담대해지고, 이분을  또 아는 지식을 갖추면 자꾸 좋아집니다. 담대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신데 누가 어찌 하리요?  어떤 사람이 고고 태산 태산에 올라 가 가지고서 암석 보고 '보자 암석아, 네가  백발이 됐는데 나이가 몇 살이냐?' '제가 한 육천 년 가까이 됐습니다.' '네가 몇  해나 살겠느냐?' '혹 한 육천 년 더 살까 모르겠습니다.' '네 수명이 짧아서 참  불쌍하구나. 네 수명이 짧구나. 나는 영생을 가졌다 네가 바라봐라. 내가 믿는  대속주를 네가 바라보면 만물을 새롭게 날 때 네가 새롭게 되면 너도 영생한다.'  이라니까 그 바위가 쫓아서 기뻐서 '아! 우리의 하나님의 대리 우리 주인이  오셨구나' 하면서 경배를 해. 여러분들 우리는 이 회개의 기쁨. 하나님에게 대한  무식을 회개합시다. 무식을 회개하고, 무식을 유식으로 회개하는 데에 그때에  모든 것이 다 나옵니다. 우리는 거기에서 넓어집니다. 커집니다. 왜 우리가  소인입니까? 이 지식을 회개를 하면, 자 누가 큰 자입니까? 우리는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다 우리 발 아래 두고서 이것들의 주인으로서 이것들이  영원히 바라보는 대상이 되고,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하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 우리인데 왜 우리가 소인입니까? 뭐 한 지방 한 아시아라 뭐 구라파라 뭐  유럽이라 뭐 할 것 없이 우주. 지구 땅덩어리 같은게 얼마나 많습니까?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 있는 것이 다 너희 것이라' 거짓말입니까? 하나님이 거짓말  합니까? 아니요, 믿는 자의 것입니다! 믿는 자의 것! 과장입니까? 아니요! 털끝  만치도 과장이 없습니다. 요걸 믿는 것이, 믿으면 다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고  해. '네 까짓게 조그만 한 오두막 오막살이 집 한채도 못 차지 하는 것이 하늘의  것 땅의 것이 내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다 허영과 모든  미치괭이라. 제가 하나님의 말씀한 걸 믿는다고서 미치팽이는 아닙니다. 제가  잘못 믿어서 미치괭이지.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유식한 사람이 되어지고,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아무리  내가 밥을 입에다 떠 넣어도. 밥이 내 건강 유지가 아니라 밥을 떠 넣어도  하나님이 나에게 복되게 해 주셔야 그 밥이 소화가 돼 가지고서 영양이 되지  내가 먹었지마는서도 도리어 안 먹은 것보다 체해 가지고서 화도 될 수가 있다  그거요.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요, 하나님. 당신이 지은 것 당신이 내게 해 주셔야  되지 안 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바라보지 못한 죄를  회개를 하고 그 분이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따라하면 될 터인데, 시키는 대로  순종하고, 광대함을 바라보면서, 내 주관대로 오늘 성공이 있으면 좋겠다, 오늘  신기한 기적이 나타났으면 좋겠다 하지 말아라. 그것도 맡겨라. 하나님의  전지전능의 사랑의 주를 믿으므로써 '야 오늘 그게 와야 안 되겠느냐?' '어이구,  오고 안 오고 내가 그걸 어찌 내가 그걸 어떤 일이라고 책임을 지고서 와야 된다  안 된다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습니까? 어림도 없습니다. 당신이 주면 되고 안  주면 안 되고, 지금 주면 지금 주고 뒤에 주면 뒤에 주고, 언제라는 시기도  당신에게 맡겨놓고 당신에게 전부다 정권을 다 맡겼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참고  견디는 것. 무식을 유식으로 바꾸는 것, 하나님을 바라지 안하고 딴 것 바라보던  요걸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꾸는 것, 이것에게 피동되고 저것에게  피동피고. 좋은 것에게 피동되고 나쁜 것에게 피동되고 환경에 피동돼 가지고,  어려움만 있어도 그것에게 피동돼 가지고 그만 주일 못 지킵니다. 좀 좋은 것만  있어도 고만 주일 고만 어기고 고만 또 죄짓습니다. 환경과 피조물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그분에게만 피동되고, 참고 견디는 요 네 가지 회개하는 요기에 우리의  행복은 있는 것입니다. 요것이 피난하는 유일한 방법이요. 이래 가지고 그러면,  그래 가면 어디 갈 건가 종착지가 어디인가? 종착지는 하나님의 의를 입는  것입니다. 의인되는 것입니다. 종착은 의인되는 것이라. 의인되는게 뭐인데?  하나님의 의를 입고 벗지 안한 자라. 사죄받고 칭의 받고 하나님과의 화친받은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 있는 자라. 그러면 이것이 영원히 우리의 은신처요 우리의  낙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꾸 이렇게 지내 보내지 말고 또 새김질하고 새김질하고 얼마든지  새김질을 해요. 몇 십 번이든지 그거 다 그저 공장가면서도 새김질하고 또 집에  있으면서 새김질하고 자꾸 새겨 보고 새겨 보고 새겨서 꿈에라도, 무슨 자다가도  6·25같은 환난이 꽝 그러면 퍼뜩 우리의 피난처 주 하나님, 피난하는 방법은  회개, 우리의 기쁨은 거기에 있고 회개 뭐인가? 회개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을  회개하고. 바라보지 아니 한 것을 회개하고, 순종하지 아니한 것을 회개하고, 참고  견디고 거기에 맡겨 놓고 참고 견디지 아니한 것을 회개하고 요것만 하면 다 돼.

다요. 무엇이 우리를 해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능력있는 자를 세상에 보여  주기 위해서 하지마는서도 세상은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 기도에만 대한 게 아니라 모든 면에  대해서, 믿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기독교가 참 어디서나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이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 우리 속에 주관이 부패성 주관 이놈  때문입니다. 걱정도 이놈 때문이요. 이게 우리의 원수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이 아래층에 지금 문을 열어 놔서 아래층으로 갔는지 몰라 이 이층에 저렇게  헐빈하게 비었다 말이오. 그 사람들이 다 귀가 막혀서 뚫리지 안해 못 알아들어.

이 말씀 버리고 세상에 나가 가지고 뭐 어득 거려 쌓아도 저 죽을 자살 행위,  자기 빠져 죽을 함정 파지 딴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만 마지막으로 결론이  그것입니다. 깨닫지 못하면 멸망할 짐승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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