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집


선지자선교회 1982년 2월 14일 주전

 

본문 : 고후 5:1-7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앞으로는 이충이고 삼충이고 의자 있는 데는 가운데 줄은 여섯 사람, 양쪽  가줄은 넓은 데는 일곱 사람, 기둥 있는 데는 여섯 사람 그래, 그런 것도 잘  질서를 맞춰서 그래 앉으면 좋겠습니다. 다섯 사람 앉은 데도 있고, 저 삼층도  그렇게 앉도록 합시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질서 정연하게 하는 것이 자기를  만드는 데에 매우 유익합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의 구원의 근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는 믿음이  아직 굳세지 못한 그런 사람들은 들을 때에 단번에는 이해가 안 될런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해가 될 때까지는 아직까지 그 신앙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은 신앙일 것입니다. 견고치 못해서 때를 따라 흔들리고 때를 따라  열매 맺는 그런 신앙이 안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잘 생각하고, 또 앞으로는 할 수 있으면, 다른 목사님들이 그런  것을 권유해 주는 말을 더러 들었습니다. 저녁으로 모여서 철야할 때에 한 번  들은 그 설교를 잘 이해 못 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녹음으로 다시 한번 듣고 두번  듣고 하는 데에서 믿는 도리를 확실히 알고 그 신앙이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다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도 거기에 대해서 그렇다고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앞으로는 주일날 밤도 자유로 철야 할 사람은 아랫층에서  남반은 신관 여반은 구관, 또 수요일밤 금요일밤 일 주간에 세 밤을 자유로  그것은 철야할 분들은 와서 철야를 하도록, 금요일날은 인도하는 분이 있을  것이고 주일날 밤과 수요일 밤은 인도하는 분이 아직까지 작정은 안 줬습니다.

그러나 녹음 테이프로 전에 배운 것을 한번 다시 재독하게 혹은 삼독하게 돼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도 많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는 불을 피워서  담요 한 장이면 되고 또 담요 한 장 아니고 옷만 따시게 입고 와도 그냥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리 아시고,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 가지고  성경적으로 된 것이어야 구원이 되지 천하 사람들이 다 공통돼서 주장하는  그대로 돼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능가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 구원에 대해서 헛되이 안심하고 있는 자들을 가리켜서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짓는 집과 같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예배드릴 때는 제일 중요한 것이 자기 전인격을 구속하신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이것이고 바칠 때에 하나님이 그 인격을 다 기울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상관을 가져  주시는 것입니다.

 그게 제일 중요하고,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계나 물질계의 모든 것을  주실 때에 그것을 직접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그것을 만들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 말씀을 받아 가지고 행하면 실상이 되고, 행하면  자기가 만져보고 귀로 눈으로 접촉해 보고 누려 보기까지, 누리기까지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배드릴 때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은 신령한 것과 이 세상 것을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니 이것을 받아서 그대로 하면 그 실상의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들어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써도,  공산주의자들이 죽자껏 애쓰지 마는 하나님 앞에는 적이 되는 것처럼  그러합니다. 구원에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 시간에 감동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하는  그 증거는 이미 여러분들이 도를 다 알고 있으면서 행치 아니할 때에 강조하는  그 설교가 되겠고 또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강조하는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깨닫게 하려는 것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가르치기  때문에 잘 알아 들을 수 있도록 조용 조용히 가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어떻게 가르치든 가르치는 도리를 자기가 바로 알고, 거기에서 또  깨닫고, 또 확신을 하고, 그렇다 안 그렇다 하는 데에서 그렇다는 것을 확신을  하고, 그다음에는 소원을 하고, 그다음에는 이를 수 있는 능력까지를 이 예배  시간에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헛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이요 은혜를  받는 일입니다.

 이치는 모르고 분위기 속에서 공연히 흥분이 돼 가지고 아무리 떠들어 봤자 그  분위기 지나가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은 자기의 현실을  당할 때에 실지로 거기에서 말씀대로 살아야 구원이 되는 것이지 감동만 가지고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꼭 행함을 통해야 구원이 됩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흥분이 되든지 기분이 좋든지 어쨌든지 들은 그 말씀대로  실상으로 살려고 할 때에는 대개는 적적한 곳이요, 외로운 것이요, 어려운 때요,  답답하고 막막한 때입니다. 그때는 무슨 흥분이나 기분이나 좋게 움직여 주는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만 가졌다가는 실상으로 행하는 그런 현실을 당할 때에는  이렇게 든 기분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만 기분으로 살던 사람은 다 죽어버립니다.

흥분 가지고 힘을 삼았던 사람은 그때는 흥분이 없는 때이기 때문에 아주 삶은  채소와 같이 그만 시들어지고 넘어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리 우리가 걸어 갈 이치를 배우고 요 이치를 고요히  생각할 때에, 말 없이 눈감고 고요히 생각할 때에 '아, 그 진리가 그러하다. 이  진리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때문에 책임을 지시고 내가 이렇게 행하려고 할  때에는 도우신다.'  이럴 때에 고요히 눈 감고 생각할 때에 속에서 이 진리를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또 하나님이 도우실 것을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또 이 진리대로 실상을  만들어 가질 소망을 생각할 때에 힘이 납니다.

 이래서 자기 혼자 아무도 없는 데서 말씀을 새김질 하다가도 갑자기 '주여!'  이게 나옵니다. '주여! 이제 결사적으로 하겠습니다.' 이게 속에서 나옵니다.

아무도 없는데.

 이 힘이라야, 악의 세력에게 붙들려서 감옥에 가서 갇혀 앉았습니다. 갇혀  앉았지만 그들이 내 마음은 묶지 못합니다. 내 마음으로 진리를 생각하고  새김질하고 이럴 때 감옥에서 '주여!' 고함이 나옵니다. 이럴 때에 빌립보  옥중에 지진이 나서 옥문이 열렸고 그날 밤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주여, 눈이 빠져도 주를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내가 진리대로의 사람  하나님 같은 하나님의 신성 같은 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박해가 오는 이 박해  기쁩니다. 이 박해를 받는다 해서 하나님 형상을 내가 저버리지 않겠고, 진리를  저버리지 않겠고, 이것이 내 몸이 다 절단나도 하나님의 형상과 진리를 저버리지  않고 이대로 통과하여 빼이는 눈도, 끊긴 팔도 전부가 다 하나님대로 진리대로의  것으로 이 현실을 통과케 해 주시옵소서, 주여!' 이럴 때에 세상을 이깁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것은 흥분에 있는 것 아닙니다.

 엘리야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라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은 나 하나만  남았습니다.' 해도 그는 항상 패전하고 돌아다녔습니다. 마지막에 세미한 음성을  들었을 그때에 이방도,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들도 다  점령하고 승리를 했습니다.

 이런 말은 번번히 하면 시간이 자꾸 많이 가는데 여러분들이 이렇게 기억하고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이런 말은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만 증거하면 됩니다.

지금 간단하게 증거하겠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 여기에  장막집 이꼴, 하늘에 있는 집이라 그렇게 두 집을 말씀을 했습니다.

 장막집이라는 것은 옮기는 집입니다. 장막집은 항상 거기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그 당시 이스라엘이 목축업을 할 때의 형편인데 오늘 이 골짝에 장막치고  짐승을 먹이다가 내일은 또 이 장막을 뜯어 저 골짝에 가서 치고 이렇게 뜯어  옳기는 집이 장막집입니다.

 그런데 그다음에 2절에 보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그다음에는 집을 처소라고 그렇게  해석을 해서 내놨습니다.

 집은 우리가 거처하는 곳이오. 또 처소는 자기가 살고 있는 곳입니다. 처소는  넓은 범위를 말하고 집은 그 좁은 범위를 말합니다. '그 사람의 처소가 어데지?'  '그 사람은 부산이라,' '그 사람은 처소는 어데지?' '서울이라.' '그 사람의  처소는 어데지?' '대신동이라.' '그 사람의 집은 어데지?' 담장 안에 있는 자기  집을 말할 것입니다. 집보다 더 좁은 것은 자기 거처하는 방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집이 있다 이것을 말씀합니다. 한 가지는 뜯어  옮겨질 집이 있고 하나는 영원한 집이 있다. 뜯어 옮겨질 집은 사람으로 통하여  만들어진 집이요 영원한 집은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에 있는 집이다 그렇게 그것을 표시한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집 영원한 집" 이 하늘은 이 공간적으로 땅 하늘 이것을 말한  것이 아니고 평가적으로 하늘을 말한 것입니다. 이 하늘은 평가적으로,  가치적으로 제일, 그 이상이 없는, 높고, 가치적으로 높고, 권위적으로 높고,  영광적으로 높고, 편리적으로 높고, 행복적으로 높은, 가치적으로 높은 이것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이상 집은 없다 그말입니다.

이 이상 집은 없다 이 이상 처소는 없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우리가 원한다" 이 말은 최고, 지상의 처소,  그 이상 없는 지상의 처소, 지고의 처소 그 처소를 입은 위에다가 더 포개서  입기를 원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집과 처소는 어떤 것을 가리키셨는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과 처소는 어떤 것을 가리켰는가 하는 데 대해서 거기에 우리라고 하는 우리는  중생된 영 주격을 말합니다.

 중생된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것이요 흙으로 만든 것 아닙니다. 흙으로  만든 것은 짐승같이 우리의 마음 몸 이것은 흙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짐승은 그  본능, 그 생명, 그 몸 그것이 흙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들도 흙으로 만들어진  것은 육입니다. 영은 흙으로 만들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당신이 직접 만드신 것이 우리의 영입니다. 영은 주격이요 이 육은 영의  소유물과 같이 영에게 소유되어 있는 소유격 위치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집이 있다" 하는 이 우리는 중생된 영들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어떤 집에 살고 있는가? 중생된 영은 자기 마음의 그 기능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 집 속에 살고 있습니다. 마음 집은 몸으로 되어 있는 몸  집에 살고 있습니다. 몸 집은 자기의 행위 집 속에 살고 있습니다. 행위 집 속에  살고 있습니다. 행위 집은 모든 자기의 해 놓은 일들, 해 놓은 것들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또 자기의 해 놓은 일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이나  물건이나 그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나 자기 사회 속에 살고 있고 자기  국가 속에 이 지구 땅덩어리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가리켜서 집이라  처소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땅에 있는 집 땅에 있는 처소는 이거는 다 장막집들이요 장막으로 되어  있는 처소다 그말은 인간이 부정모혈로 나 가지고 안 믿을 때의 사람, 또 믿은  후에도 아직까지 성화되지 못한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장막집입니다.

 중생된 영이 그 마음을 입고 있지마는 그 마음 그것은 장막집이라 잠시 후면  옮겨질 집이요 그 마음에 성화가 된 것은 영원히 벗지 아니하고 입을 집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 이대로 가지면 이것은 옮겨질 것들이라.

이것을 하늘로 옮겨야 되고 하늘의 것을 덧입어서 하늘의 것으로, 마음은 제  마음인데, 마음은 제 마음인데 제 마음 그대로 가지면 이것은 다 뿌숴질  마음들이다. 마음의 형체는 부활할 때 하늘나라 가지마는 마음 속에 기능은 다  뿌숴진다.

 그 마음을, 마음 집을 하늘에서 오는 집을 덧입는다. 그러면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덧입어서 그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화돼 가지고, 하나님의  마음화되는 것, 그것은 성신에 감화된 마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은 제 마음인데 이제 하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영감을 입어 그 영감으로 성화된 마음 그 마음은 영원한 집이 줬습니다.

하늘로서 온 영원한 집이 줬습니다. 그는 뿌숴지지 않습니다. 영영합니다.

 영감대로 진리대로 된 마음의 집을 말하고, 또 그 몸의 기능도 몸의 그 기능  그대로 있는 몸의 기능은 그 사람이 세계에 제일 일등 뭐 기술자든지, 묘기를  가지고 있든지, 힘을 가지고 있든지, 장사든지, 세계를 주먹에 거머쥐고  다스리는 대정치가든지 어떤 몸이라 할지라도 그 몸은 장막집이다. 그 몸은  무너질 집이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했습니다. 무너질 집이다. 다 깨질 몸의  기능들이다.

 그 기능이 현실에서 "하늘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의 그 힘을 받아  가지고 그 몸의 힘이 하나님과 연결된 힘이 되고 진리와 연결되어서 하나님과  진리로만 움직이는 그 힘이 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영원한 집을 덧입은 집이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행위가 그것이 그대로 있는 행위는 다 무너질  행위다. 천하 인간이 다 찬성을 해서 노벨상을 주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다  그것은 무너진다. 다 그거는 깨뜨려진다. 다만 하늘에서 온 처소를 덧입어야  된다.

 영감과 진리가 자기에게 왔을 때에 영감과 진리를 입어 영감대로 진리대로의  행위 그것은 하늘의 집이 됐다. 하늘의 행위가 됐다. 하늘의 처소가 줬다. 그는  영영히 살고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행위 집, 행위 처소 무너질 것, 하늘에서  내려온 걸 덧입어서 영원한 행위 집, 영원한 처소 집 이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그다음에 자기가 만들어 놓은 조성, 성사해 놓은, 성공해 놓은 성공의 집, 성공  처소, 사람들은 성공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살고 있는데 이  세상 성공 성사 위대한 일들이많지마는 암만 위대해도 그것은 무너질 집이요  무너질 처소다. 그 성공은 조만간에 다 깨어지고 없어진다.

 그러나 하늘에서 온 그 성사 집, 성공 집, 성공 성사의 처소, 영감과 진리대로  성사하고 성공해 놓은 그 일은 하늘의 처소로 덧입었기 때문에 그는 하늘의  것이다. 지극히 높은 것이요 지극히 큰 것이다. 그는 무너뜨리고 깨뜨릴 자가  없다. 그는 반석 위에 지은 집이다. 그는 하나님으로 진리로 인해서 지상의,  지고의, 지귀의, 지능의 것으로 되어진 성사이기 때문에 그는 영원한 집이다.

 자기의 가진 소유의 집, 소유의 처소, 그 소유도 하나님과 진리를 거스려 가진  그 모든 것 다 없어진다. 그것 가지고 심판이나 받아서 벌이나 받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자기가 그 나라에 제일 갑부를 가지고, 그 나라에 제일 큰 지위를  가지고, 세계에 많은 영토를 가지고 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무너진다.

무너진다. 오나시스가 그가 아주 좋은 처소를 가졌지마는 그가 죽는 동시에 다  무너졌습니다. 다 없어졌습니다. 무너진다. 무너질 장막이요, 무너질 장막인데  무너지기 전에 뜯어 옮길 수 있다. 썩을것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꿀 수 있다.

 이런데 영원한 소유는 하나님과 진리대로 받은 그것은 그 물질은 없어져도  물질로 인한 것은 남아 있다. 받은 그 물질을, 하나님과 진리대로 받은 소유든지  혹은 어째 어째 오다 가다가 만난 소유든지 어째 된 소유든지 그 소유를  하나님과 진리에게 바쳐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면, 하나님대로 쓰고  진리대로 써서 하나님과 진리에게 보관을 시켰으면, 하나님과 진리에게 보관을  시켰으면 그것은 영원한 자기의 소유가 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좀도  동록도 도적도 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자기의 마음의 처소, 몸의 처소, 행위의 처소, 성사의 처소,  자기의 모든 소유의 처소 이것이 무너질 것 있고 없어질 것 있고,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없어지지 아니할 영원한 것으로, 지고의 지귀의 하늘의 것으로  덧입혀서 영원한 것을 만들 수 있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의 기능으로 자기의 처소를 삼으면, 마음과 몸의 기능으로 자기  처소를 삼으면 진리와 하나님을 얻게 됩니다. 진리와 하나님을 자기가 모시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하나님이 되고 진리가 자기의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효력은 하나님과 진리의 능력을 영원히 쓰게 됩니다. 그 마음은 그  몸은 하나님과 진리의 돕는 능력을 영원히 힘입어 쓰게 됩니다.

 또 행위의 처소, 행위의 처소 이것을 영원한 것으로 덧입어 가지게 되면  거기에는 뭐이 되느냐? 행위의 처소를 자기가 영원한 것으로 덧입어 만들어  가지게 되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인정을  받게 됩니다. '저는 인정할 수 있다. 믿을 수 있다. 그는 손잡을 수 있다. 맡길  수 있다.' 영물들도 인정 하고 땅에 있는 피조물들도 인정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무궁세계에서 무엇을 사용하게 되는가? 모든 피조물들과 하나님이  그것을 신임합니다. 신임을 영원히 써 먹습니다. 행위의 처소 해 놓은 것은  영원히 신임을 써먹게 됩니다. 하나님도 그를 신임합니다. 그러니까 신임을  써먹소. 여기에도 가니까, 내가 갈 때에 그 신임을 가지고 갑니다. 이제까지  행한 행위를 가지고 갑니다. 그러면 그게 그 신임을 하나님에게도 가니까 그게  쓰여집니다. 피조물들에게도 가니까 그 신임이 쓰여집니다.

 또 자기가 땅에서 행위를 하늘의 처소로 바꾸어 가질 때에 한 그 연습, 그  연습, 그 숙달, 연습 그것을 영원히 써먹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행위의  처소가 없는 자는 하늘에 가서 보니까 하늘 행위의 연습을 하나도 안 했습니다.

연습을 안 했어. 연습을 안 하니까 하나도 몰라.

 또 하늘에 가니까 피조물도 인정을 안 해 주지 하나님도 인정을 안 해 주지,  연습 안 한 것이니까 인정해 줘 봤자 실패일 터이니까 또 인정도 안 해 준다  그말이오.

 또 자기가 방위에서 해 놓은 이력, 그게 성사입니다. 해 놓은 이력의 처소,  이력의 집, 자기가 이력 속에 척 들어 앉아서 삽니다. 이력이 자기 처소요. 이  처소는 아주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 놓은 이 공굴집보다 그 처소가 좋습니다.

 이력의 처소를 땅위에서 만들었을 때에는 뭘 수입하느냐? 영광을 수입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의 이력의 처소를 만든 것만치 그 사람에게 영광이 있어. 모든  사람이 칭찬합니다. '그는 과연 귀하다. 위대하다. 참 귀한 사람이다. 깨끗한  사람이다. 그 사람은 정직한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이다.'  자기가 해 놓은 성사의 그 처소는 '그 일한 것 보니까 그것 사기꾼이다.

협잡꾼이다. 아주 그거는 도적이다.' 그것으로써 자기는 영광과 수치를 받게  되기 때문에 하늘에 성사의 처소를 만들면 모든 피조물들에게 영광을 받게  됩니다. 영광의 수입이 됩니다.

 영광의 수입이 되고 무궁세계에는 그 덕을 써 먹습니다. 그 덕을 써먹소. 모든  사람이 인정하고 있는 그 덕을 가지고 일하게 됩니다. 덕을 가지고 일하게 되기  때문에 그 덕은 나타나면 영광이 되어집니다.

 모든 사람이, 무례로 강제로 복종시키는 게 아니라 그 덕을 쓸 때에는, 덕을 쓸  때에는 다른 사람이 자원해서 머리를 숙이고 따라 복종하게 되는 것입니다. 덕을  사용합니다.

 또 자기의 소유의 처소를 마련할 때에는 신령한 소유로 마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 이 소유, 소유의 처소, 자기 가지고 있는 돈이라 합시다. 돈을 마련할 때에  하나님의 진리와 뜻대로 살아 마련을 했고, 또 잘못 마련한 그것이라도 이제  그것을 사용할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했을 때에는 땅에 있는 보배가 하늘의  보배로 옮겨집니다. 바꾸어집니다.

 그러면 그럴 때에 자기는 땅에 있는 소유를 마련할 때에 영감과 진리대로  마련하면 신령한 소유가 마련되어지고 또 마련되어져 있는 그것을 진리와  영감대로 사용하면 또 신령한 소유가 마련되어지는 것입니다.

 신령한 소유가 마련되면 그것은 영원한 소유로 쓰게 됩니다. 그건 영원한  소유로 씁니다. 여기에서 돈 백 원을 하나님의 뜻대로 썼으면 그 백 원이라는  이용 가치는 무궁세계에 영원히 이용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이용합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앞에 있기 때문에, 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탄식은 무슨 탄식이오? 낙망의 탄식이 아닙니다. 이 탄식은 과거와 현재에 이  무궁세계의 이 영원함이 있는데 이걸 모르고 없어질 그것만 보고 살려는 그 모든  형제들과, 자기에게 그것만 보고 살려는 그 부분을 보고 탄식을 합니다. 이  탄식은, 그 탄식은 하늘의 것에 대해서 욕망에 불이 붙는 탄식입니다.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간절히  사모하노니" 땅에 있는 처소 이것 보고 이것 아끼고, 이것 아끼고 이것 언제든지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고, 오늘 무너질지 내일 무너질지 모릅니다. "장막집이  무너지면" 했습니다. 오늘 무너질지 내일 무너질지 모릅니다.

 '나는 학생이니까, 중학생이니까.' 중학생, 우리 주일학교도 보니까 중학생  튼튼한 중학생이 저녁 먹고 나가 가지고, 나가서 그만 죽어서 장례 지냈습니다.

또 튼튼한 청년인데 자기 내외 재미있게 잠을 시작해서 자기 시작했는데 아침에  보니까 하나가 시체돼 있습니다. 모릅니다. 우리 장막이라는 것은 우리가 모든  땅에 있는 처소는 어느 시간에 이것이 무너질런지 모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 우리 모가치가 있습니다.

이것입으면 됩니다.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이렇게 입음은" 이렇게 이것을  벗기 전에 이것이 있을 때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진리와 영감대로의  것을 만들어 입으려고 하는 것은,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진리와 영감대로의 영원한 것으로 성화되고 변화되고 개조되어  영원성으로, 영원성으로 성화된 그것 없이, 영원성으로 성화된 것이 없으니까  땅에 있는 처소는 다 벗어버렸습니다.

 벗어버리니까 하늘에 가 가지고는 영감과 진리대로의 영영성 불변성 영원성  완전성의 것으로 된 것만 거기 있는데 영원성 완전성의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발가벗었어,  영원성과 완전성의 것은 하나도 입지 않고 그 형체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은 가지고 있지마는 영원한 마음은 없어. 영원한 기능은 없어. 불변의  기능은 없어. 완전의 기능은 없어. 완전한 마음은 없어. 하나님의 영감의 마음은  없어. 없으니까 그런 벗은 자들로 나타나지 아니하려고 지금 탄식하면서 애쓰는  것입니다.

 이런 탄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탄식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이런 탄식이 있는  사람은 하늘의 것으로 가난해서 하늘의 것의 빈궁성에서 그 가난성에서 지금  '어떻게 하면 이 가난을 면할까?' 이렇지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으로써 가난해  가지고 '논 한 마지기 더 장만해야 되겠다. 저금통장에 뭐 하나 더 해야 되겠다.

지위 하나 더 올라가야 되겠다.' 하나님과 진리를 어겨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진리대로 살 때에 지위나 소유나 오면 '하나님이 이것 주시는  것이니까, 받은 후에는 하늘의 것으로 옮겨 잘 이용해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잘  성화시켜서 이것을 개조하고 성화시켜야 되겠다.' 여기에만 주력하지 썩은 데에  소망으로 주력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이것을 언제 썩지 아니할 하늘의 장막으로 덧입을까?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무너지기 전에 덧입어야 될 터인데 꺼정어정했다가는 무너지기  전에 덧입지 못할 터인데 덧입게 하는 기회는 한 번밖에 없으니 덧입게 하는 이  기회 한 번 있는데 이 기회를 놓칠까? 마음에 걱정되고 탄식되기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이 짐진 것같이 탄식된다. 왜? 무너질 장막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가졌다 하니 그것도 탄식이요, 무너질 처소  장막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제것이라고 가진 줄 아니 그것도 탄식, 이것을  하늘의 처소로 덧입을 수 있는 기회에 대해서 이렇게 전심이 기울어지지 않고  그런 기회를 불거트린 것을 생각하니 탄식, 이것을 하나도 불거트리지 않고  앞으로는 그 기회 기회마다 하늘의 처소로 빠짐없이 다 덧입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눌려.

 어떻게 눌리는가? "무거운 짐진 것같이 눌린다." 무거운 짐은 질 때는 가벼워도  좀 지내니까 점점 무거워집니다. 질 때는 가벼워도 좀 있으니까 무거워집니다.

(저 반사 선생? 열심히 했지마는 이것 속에 안 들어가면 반사 해 봤자 껍데기고  나중에 가서는 힘이 떨어져.)  무거운 짐은 한 시간 지니까 더 무거워집니다. 두 시간 지니까 아무것도 아닌  게 더 무거워집니다. 점점 무거워집니다. 더 눌립니다. 예수를 한 해 믿으니 더  눌리고, 십 년 믿으니 더 눌리고, 나이가 늙으니 더 눌리고, 죽을 때가 되니까  더 눌리는 이것이 산 예수를 믿는 사람이지! 산 신앙이지!  처음에 믿을 때는 발발 떨고 야단을 지기다가 몇 해 믿고 나니까 퍼드러지고,  나중에 가서 나이가 늙어지니까 뭐 은퇴나 하고 망령이나 부리고, 젊은 사람들  신앙 가지면 '우리도 젊을 때는 저랬다.' 이런 소리나 하고,  이 구원에 대한 갈급성이, 늙어지면 점점 마음이 눌리고 기가 막히고, 과거에  다 넘어뜨리고 파괴된 것도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현재 여기 대해서 주력하지  못하는 것도 기가 막히고, 앞으로 빠짐없이 하늘의 처소로 덧입어야 될 터인데  이것을 생각하니 심신이 눌려서, 심신이 눌리니까 다른 데 힘을 기울일 여가가  없고 마음을 쓸 여가 없고 여기에만 전적으로 기울어져서 눌리는 이것이  정상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짐진 것과 같은 이런 걱정이 있는지? 이런 탄식이 있습니까? 없으면  우리는 참 자는 사람이요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입니다.

 무슨 장막을 가지고 안심하고 삽니까? 무슨 장막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땅에 있는 장막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습니까? 하늘에서 오는 이 장막을 정말로  알고 있습니까? 어느 정도 인정합니까? 어느 정도 갈망이 있습니까?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는 것 아닙니다. 하늘나라는 말에 있는 것  아니오. 권능에 있습니다. 권능에 있소. 진실한 자는 이깁니다. 진실한 자는  성공합니다. 거짓된 자는 다 패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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