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20:14
우리의 집
본문 : 고후 5:1-10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며칠 전에 우리 동역자 어떤 목사님이 말하는 데에 제가 하나 들은 것 있습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복음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전의 복음이 있고 그 후의 복음이 있다' 그런 말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과연 그러합니다.
'예수님을 믿되 죽음 이편의 것을 소망하고 그것에 관한 설교가 있고 죽음을 통과해 죽음 너머 있는 그 소망을 가르치는 복음이 있다' 그런 말 하는 것을 제가 듣고 과연 그러하다 하는 것을 다시 한번 또 생각했습니다.
오전에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세상에서 우리의 처소를 가지고 사는 것처럼 무궁세계에서도 자기가 만든 처소를 가지고 삽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집을 만들었고, 또 자기의 성을 만들었고, 자기의 활동 무대를 만들었고, 자기가 일으켜 놓은 그런 것들을 만들어 또 그 안에서 살고, 자기의 소유를 가지고 살고 이렇게 모두 살고 있는 각각 사람마다 그 처소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분은 평양 있을 때에 자기 집에서 나서 가지고 30리까지는 자기 소유만 밟아 다녔지 남의 소유는 하나도 끼어 있지 않았다' 그런 말 들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부자입니다.
자기가 자기의 소유로 자기를 든든케 해서 자기를 안보하는 것이면 자기 소유는 자기를 안보하는 자기의 처소 자기 집과 같습니다. 또 자기가 일으켜 놓은 그 이력, 그 이력을 자기 안보의 처소로 삼아 그 이력 속에서 평안하게 삽니다. 또 자기가 현재에 활동하고 있는 활동으로 자기 안보의 처소를 삼아 그 활동 속에서 삽니다. 또 자기가 어떤 물건으로 만들어 가지고 그 물건 안에 자기는 삽니다.
좋은 울장을 만들고, 또 그다음에 집을 만들고, 또 집 안에 침소를 만들고, 또 침소 안에 침대를 만들고, 그래 가지고 침대 위에 그 침구를 또 만들고 침구 속에 딱 드러누워서 사람이 그렇게 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처소요 자기 집인데, 여기에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는 이 말은 우리의 장막집, 우리라고 말하는 그 우리는 누구를 말하는가? 그것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우리의 주격이 되는 영 새사람 나를 말합니다. 새사람 자기.
자기를 말하고 또 거기에 말한 집은 마음의 힘 몸의 힘 그것이, 마음의 힘으로 된 집이요 처소요, 몸의 힘으로 된 집이요 처소요, 또 자기가 행동하는 그 행동 자기 행함이라는 그 행함 속에서 자기가 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처소 집, 또 자기가 해 놓은 그 모든 이력, 또 자기가 마련해 놓은 자기 소유, 이런 것을 여기에 가리켜서 땅에 있는 장막이라, 집이라, 처소라 그랬습니다.
그런데 땅에 있는 것은 어떤 것인고 하니 무너질 것이라 했습니다.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면" 이것은 다 언젠가 다 무너질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마음이 남보다 뛰어난 그 마음의 힘을 가지고 몸의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 무너지고 그 사람의 행동도 이력도 모든 소유도 다 무너지는 날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장막집이라고 말한 것은 옮길 수 있다는 뜻을 하나 두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무너지기 전에 옮기면 됩니다. 무너지기 전에 옮겨 영원한 처소로 바꾸면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내가 무너질 장막집 안에 거하고, 무너질 장막집만 상대하고 이것만 수축하고 수리하고 넓히고 또 든든케 하고 하는 이 어리석은 자가 아닌가?' 하는 것을 스스로 판단해 봐야 할 것입니다.
안 믿을 때의 모든 집은 다 무너질 집이요, 믿음이 아닌 어떤 사람의 그 안 믿는 사람 믿는 사람 믿음으로 짓지 않은 그 모든 집은 다 무너질 집들이요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어진 영원한 집 처소가 있다" 이랬습니다. 그거는 뭐인고 하니 영은 주격이요 영이 마음을 입고, 영과 마음은 몸의 힘을 입고, 영과 마음과 몸의 힘은 행위를 입고, 영과 마음과 몸과 행위는 자기의 해 놓은 일을 입고, 영과 마음과 몸과 행위와 자기의 이력은 자기가 마련한 그 소유 속에서 활동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열해질 것 멸망할 이 무너질 것이 있고 무너지지 않고 영영한 것이 있으니 영영한 그것은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2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덧입는다 말은 옷을 입었는데 그 위에 하나 덧촉워서 입으면 그것이 덧입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덧입는다" 자기가 마음의 힘을 주격이 입고 있는데 그 마음의 힘, 일반적으로 자연적으로 되어 있는 마음의 힘 그것은 앞으로 다 빠져버립니다. 멸해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의 마음의 힘이 강해도 다 멸해집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힘이 "하늘에서 오는 걸 덧입는다" 하늘에서 영감과 진리가 올 때에 영감의 힘 진리의 힘을 그 마음의 힘이 덧 입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영감받은 마음으로 진리대로의 마음으로 마음의 힘이 영감 힘 진리 힘이 될 때에 그 마음은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덮어서 입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다 더 가해서 입게 된 것입니다.
또 자기의 몸의 힘도 몸의 힘 그대로 있으면 다 무너질 장막이지마는 몸의 힘이 영감에 접선돼서 이제는 영감화되어 영감대로의 몸의 힘이 되고 진리대로의 몸의 힘이 되면 그 힘은 영생이요 아무도 죽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마음과 몸의 힘을 무너질 것을 무너지지 않을 하늘에서 오는 것을 덧입기 위해서 그 몸이 산산히 쪼개져도 영감을 배반치 않고 진리를 배반치 않고, 고문과 고형을 당해도 자기의 마음의 힘이 변질되지 않고 영감대로의 마음 진리대로의 그 마음으로 계속해서 나가는 것은 이 덧입고 하늘에서 오는 이 집을 벗지 않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행동도 그와 같습니다. 자기 행동이 천하 사람이 다 인정하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그 행동이 영감을 입어 영감대로의 진리대로의 행동이 아니면 그 행동은 천하 인간이 다 추앙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멸해집니다. 반드시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진리대로 된 행동 영감대로 된 행동이라면 그 행동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영원히 자기가 그 마음의 몸의 행동의 그 처소를 중생된 영이 입고 하늘나라에서 그 가운데서 살면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 놓은 이력도 그러합니다. 자기가 가진 소유도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이것 무엇이든지 하늘에서 오는 것을 덧입지 않으면, 더 겹쳐서 입지 않으면, 진리와 영감의 은혜를, 진리와 영감의 이 능력을, 진리와 영감의 성질, 본질과 본성을 입지 아니하면 그 마음의 힘도, 몸의 힘도, 행위도, 소유도, 해 놓은 모든 역사도 다 파괴당하고 다 불타고 다 정죄받아서 멸망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크게 우리가 깨닫고 믿을 것은 '우리의 처소는 무너질 것과 무너지지 않을 이 두 가지가 있다'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제가 오늘은 증거할 때에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다는 이 말씀을 증거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 말씀부터 증거해야 된다는 것을 느껴서 이 말씀을 증거하게 된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천지는 없애려면 없앨 수 있다 그말입니다. 이 우주는 없애려면 없앨 수 있다 그말이오.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없애려면 없앨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야 인간이나 이십세기의 과학 그까짓 거야 엿새 동안에 만든 것 억억억억만분지 일 그 뿌스러기 하나 가지고 뿌스러기에서 뿌스러기 건너가는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큰소리 떠들어 쌓지마는 그게 그래 가려 하면 억만 년 가도 못 갑니다. 그래 건너가려 하면.
이러나 창조주는 우주 이까짓 거는 없애려면 없앨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조주도 당신이 말씀해 놓은 이 말씀은 없애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없애려면 없앨 수 있지마는 하나님께서 선포해 놓은 이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없애지를 못합니다. 이런 권위있는 절대성 가진 이 말씀인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이것을 믿어야,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지 예수 믿으면서 뭐 행위나 조금 회개해서 고치고 성품이나 고치고 그까짓 것 가지고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도 있고 유교에도 있고 망할 이종교에도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얻는 구원입니다. 첫째는 인정하는 것이오. 둘째는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너질 장막집과 영원한 집 하늘의 집이 있다. 하늘의 집이라 말은 저 위에 높은 데 있다 그말 아니오. 가치적으로 제일, 그 이상이 없는 가치, 권위적으로 그 이상이 없는 권위, 깨끗으로 말하면 그 이상 깨끗이 없는, 옳고 바르고 참된 것으로 말하면 그 이상이 없는, 가치적으로 권위적으로 제일 이상이 없이 높이 되는 지극히 존귀한 것을 가리켜서 하늘이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 처소가 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두 가지 집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아주 영광된 그 행위를 해 놓은 그 집 안에 들어 앉았으니까 먼데서 찾아오는 사람도 존경하고 옆에 있는 사람도 존경하고, 어떤 사람은 아주 잔인한 무서운 그런 행위 속에 들어 있으니까 아는 사람도 저주 모르는 사람도 저주, 모든 사람이 미워하고 욕하고, 그러면 그 속에 들어앉았는 제가 평안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이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너질 장막, 무너질 집들을 모두 다 짓고 살고 죽는 날까지 좀 더 자기 기반을 든든하게, 자기 환경을 든든하게, 자기를 위하는 인성을, 인성으로, 사람으로 성을 쌓고, 돈으로 성을 쌓고, 자기의 실력으로 성을 쌓고, 자기의 옳은 덕행으로 성을 쌓고, 명예로 성을 쌓고 이렇게 하려고, 이종교를 창설한 사람들은 조금 철학적 지식이 있어서 이것 좋은 빌딩만 짓고 있으려 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심으로 성을 쌓아서, 인심으로 집을 지어 가지고 인심 속에 들어 앉으려고, 사람들이 존경하는 명예집 속에 들어 앉으려고, 사람들이 알든지 모르든지 감화 감동을 받을 수 있는 도덕의 덕으로 집을 짓고 그 속에 들어앉으려고, 모두 다 인간은 자기의 처소를 지식나름대로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크게 말하면 인생에게는 불택자에게는 무너질 장막집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은 중생된 자들에게는 무너질 장막집이 이것이 무너지기 전에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 완전 영원 불변의 이 처소가 오는데 그 처소를 무너질 처소에다가 입혀 놓으면 무너질 처소가 이제 무너지지 아니할 영원 완전의 처소로 화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성화라 영화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두 가지 처소가 있다. 자기가 거처할, 처소라 말은 자기가 거처할 자기 있을 곳인데, 자기가 있을 곳이 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집을 지었다는 것이 바늘로 가지고 집을 지어서 '바늘에 꼭꼭 찔려서 요래도 조래도, 공산주의자들이 형을 줄 때에 판자 하꼬를, 상자를 만들어 놓고 상자에다가 못을 총총 박아서 꼿꼿하게 세워 놓으니까 앉으니 전부 바늘이 꽉꽉꽉 찌르지, 요래도 찔리지 조래도 찔리니까 요 꼼짝 못하고 요래 가지고 요러면 요게 꼭 찌르고 조라면 조게 꼭 찌르고, 그 바늘 집 속에 들어앉은 그런 형을 줬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처소가 이런 죄 저런 죄로 지어 가지고 참 불안 속에 사는 사람도 있고, 평안한 속에, 안심하고 누가 올지라도 '그 사람이 오면 나를 칭찬하고 대우하고 위해 주지' 하는 그런 안심된 평안한 처소를 마련해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고 존영한 처소를 마련해 가지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사람은 다 처소를 마련해 가지고 처소에서 거처하기 마련인데 그것을 위해서 죽는 날까지 좀 더 든든하게, 좀 더 화려하게, 좀 더 편리하게 자기 처소를 마련하려고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처소는 인간이 모르는 지식 위에 하나님의 지식이 선포한 것이 있으니 인간의 처소에는 무너질 장막집 같은 처소가 있고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영원성 완전성의 처소가 있다.
그러면 그 처소는 어떻게 마련할 수가 있느냐? 무너질 장막집 같은 이 처소가 무너지기 전에 하늘에서 오는 이 처소로 덧입으면 된다. 겉어머리를 이 하늘에서 오는 처소로 입히면 된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가 뭐이냐? 영감과 진리인데 마음으로 된 처소라면 그 마음의 힘으로 된 처소인데 마음의 기능으로 된 처소라면 마음의 기능이 하늘에서 온 영감 기능 진리 기능, 영감대로의 기능 진리대로의 기능으로 영감화되고 진리화되면 그 기능은 영감과 진리와 연결되어서 그 기능은 영감대로 움직이고 진리대로 움직인 그 마음의 기능이 됐기 때문에 그는 영원히 아무도 해할 이 없고 삼킬 수가 없는 처소가 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 말씀했습니다.
마음의 처소도, 몸의 처소도, 행위의 처소도, 자기 성사의 처소도, 자기 소유의 처소도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덧입혀야 된다. 하늘에서 오는 것으로 그것화시켜야 된다. 성화시켜야 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처소로 "하늘로부터 오는" 2절입니다.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이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오늘 오후에 말하려 하는 것은 한 서너 가지를 말하려 합니다.
무너질 땅에 있는 장막집 이것을 자기가 확신하고 '아' 여기에 대해서 어누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런 말이 있다'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것을 확실히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천태만상입니다.
천태만상으로, 이 말 듣고 '그럴리가 없는데 쓸데없는 말 한다.' 그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도 영원 전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간 이 설교가 나타날 때에 이 설교에 대해서 '거짓말 많이 한다.' 그렇게 말하도록 그것으로 예정돼 가지고 예정된 그대로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으로 그 영원히 어떻게 멸망할 것을 그 결과를 또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한 가지는 하늘에 있는 처소와 땅에 있는 처소를 믿느냐 안 믿느냐? 믿느냐 안 믿느냐 그것을 무엇을 보고 알겠느냐? '나도 믿습니다.' 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다 믿는다 할 것입니다. 믿는지 안 믿는지 그 증거가 뭐이냐? 믿고 안 믿는 증거가 뭐이냐? 믿고 안 믿는 증거 첫째는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이 탄식과 간절 사모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위에 이 두 처소를 인정하고 아니하는 그 결과입니다.
열매를 보아서 나무를 안다고 말씀하신 대로 탄식과 간절한 사모가 있으면 이 두 장막에 대한 것을 믿는 증거요 이런 탄식과 간절이 없으면 이 두 가지 장막을 믿는다 해도 거짓말입니다.
자기가 믿는지 안 믿는지 자기를 시험해서 확정 지워야 될 것입니다. 그 말을 들었는데 그래도 여기에 대해서 썩을장막 무너질 장막 여기에만 소망붙이고 이것만이 있다고 인정하고, 이것만 마련하려고 애를 쓰고, 이것 뿌숴지면 손해인 줄 알고, 이것 마련하면 든든한 줄 알고, 이것을 누가 와 가지고 자기 있는 벽을 메로 가지고 뚜드려서 부수니까 왜 내 집을 부수느냐고 분을 내는 것 그것은 자기 집인 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런데 이 하늘의 처소를 누가 와 가지고, 마귀가 와 가지고, 친한 친구가 와 가지고, 친근한 가족이 와 가지고 이 하늘에 있는 처소를 무너트립니다. 그 마음이 영감받은 마음 진리받은 마음을 가져서 처소하려 하니까 영감받은 마음을 바짝 뿌숴서 영감받은 마음을 물욕의 마음으로 진리대로의 마음을 불법의 마음으로 완전히 깨뜨려도 거기 대해서는 넘넙하게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게 뭐이냐? 믿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믿음에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서 확정을 지워라" 있다 없다. 믿는다 안 믿는다 네가 확정을 지우고 살아라 하는 것을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째는 이 탄식과 간절한 사모가 있는지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3절에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벗은 자라 말은 입지 아니한 그대로라 말입니다. 입지 아니한 그대로. 입지 아니한 그대로.
하늘나라에 갔을 때에 그 마음의 힘이나 몸의 힘이 죄악을 입었던 것은 싹 벗겨버리니까 죄악에 감동되고, 죄악에 연습하고, 죄악의 기능으로, 죄악의 연성으로 된 것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싹 씻어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는 그것은 다 벗겨버립니다. 죄악은 가져가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 마음과 몸의 힘이 죄짓는 데는, 사기 협잡하는 데는, 춤 추는 데는, 노는 데는, 땅에 있는 모든 예술과 그런 걸로 재미있고 사람들 웃기고 연극하는 데는 아주 능란했지마는 그것은 싹 벗겨버립니다.'. 그것은 다 홀딱 벗겨버리요. 왜? 그것은 마귀의 것이요, 사망의 것이요, 죄악의 것이기 때문에 홀딱 벗겨버립니다.
벗기고 마음의 힘 몸의 힘이 그대로 갔는데 이것이 진리와 영감의 능력을 하나도 입지 못했으니까 그 마음은 진리의 힘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는 영감과 진리대로만 그 마음과 몸의 힘이 움직이지 달리는 꼼짝 못하고 움직이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뭐, 그 사람의 머리는 뇌는 있지마는 공부를 안 해 놓으니까 바보요.
뇌는 꼭 같이 타고 나서 그 뇌이지마는 공부를 안 해 놓으니까 기역자가 나오니 압니까? 에이비시가 있으니 압니까? 과학이 있으니 압니까?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뇌는 그대로 있지마는 이것이 땅에 있는 지식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는 것처럼 진리와 영감의 능력을 입지 못했으니까 그 마음의 힘과 몸의 힘이 그대로 있으니 하늘나라 가서는 아무것도 못해.
땅에 오면 죄짓는 것 일등으로 하고 세상 욕심 내는 데는, 사욕 대로 사는 데는 일등이지마는 이것은 다 홀딱 벗겨버려 가지고 하늘나라 보내니까 하늘나라는 그런 게 용납 못하니까. 하늘에 있는 영감과 진리의 그 지능을 입지 못했으니까 발가벗어 있는 것입니다.
그 행위는, 행위는 했지마는 그 행위가 불의의 행위이기 때문에 다 제거해 버렸으니까 '너는 이런 땅에서 행동을 한 자다' 하는 것이 나타나지 마는 그 행동이 하늘나라에 가서는 쓸모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거는 쓸모는 없고 '이런 행동을 했다' 하는 것은 그 날에 벌거벗은 자와 같이 부끄러움만 돼져버리지 그 행동이 하나도 쓰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을 땅에서 할 때에 진리와 영감대로의 행동하는 그 행동이니까 그 행동은 하늘나라 가서도 행동을 그대로 씁니다. 그 행동을 하늘나라서 영원히 써먹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아니하려 함이라"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땅위에서 자기가 엄동설한에 추운데 방 한 칸도 없이 볼볼 떨고 있으면 추워서 못 견디겠지요.
다른 사람은 모든 사람들이 신용을 해 신임을 해서 모든 사람들이 옹호하고 인정하고 다 인간들이 인간 관계를 가지려 하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은 도무지 불신임이라. 그 사람이 근방에 올까 설설 피해 오니까 설설 달아나.
사람의 협조와 옹호가 하나도 없으면 제가 어떻게 살 것이오? 다른 사람은 돈이 있으니까 어데든지 척 가면 되는데 일전 한푼 없으니까 들어갈 데가 없어.
잠깐 있는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땅위의 이것도 곤란하고 편리하고, 존영하고 천한 줄 알진대는 무궁세계의 것은 어떨 것인가? 이것이 믿음있는 사람들은 탄식이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4절에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몸을 입고, 마음을 입고, 행위를 입고, 이력을 입고, 자기의 소유를 입고, 자기 공간이나 이런 것들을 입고 사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짐진 것같이" 있어 갈수록 자꾸 무겁다 그말이오. 있어 갈수록 자꾸 눌려.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벗고자 함이 아니요" 그러면 우리가 세상에 속한 마음의 힘, 몸의 힘, 모든 행위, 모든 세상 일, 세상에 있는 소유 이것을 '이까짓 거야 아무 소용없다. 이까짓 게 아무 소용없다. 집어던져 버려라. 내버려라.' "벗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버리고자 함이 아니라. 이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뿐이라면 무너지고 다 썩어지고 없어질 것들이지 마는 그게 없으면 하늘의 것을 덧입지를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벗기 전에 하늘의 것을 덧입어서, 그 마음을 영감 마음 진리 마음, 영감화 진리화, 그 행위를, 행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 행위를, 행위를 진리화 행위, 진리 행위 영감 행위, 자기가 사탕 장사를 해도 '사탕 장사 그까짓 거야' 멸시하고 천대하고 사탕 장사를 버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탕 장사 그것이 진리대로의 사탕 장사 했고 영감대로의 사탕 장사 해서 그로 말미암아 사람도 변화됐고 자기는 거기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사귀어졌고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달했고, 이 사람은 사탕 장사, 천인 만인이 전도를 해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전도를 부인했는데 이 사탕 장사에게 가서 사탕 한 개 살 때에 그 사람의 하는 그 사탕 장사에 감화를 받아 가지고 '하, 이게 땅에 이런 사람이 있나? 이게 참 의인이로구나.' 공으로 줘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영감된 그 사람과 진리화된 그 권능에 그 사람이 변화됐다 말이오.
이렇게 우리의 믿기 전 마음도 귀하고, 힘도 귀하고, 땅에 있는 행동도 귀하고, 땅에 있는 이력도 귀하고, 땅에 있는 모든 소유도 귀합니다. 이대로 있으면 죽을 것이요, 썩을것이요, 약한 것이요, 욕된 것이지마는 이것이 없으면 하늘의 것을 입지를 못합니다.
이것이 없어지기 전에 이것에다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하나님화 진리화되면, 이렇게 성화되고 변화되면 이것은 영원히 자기가 그 속에서 그것을 이용하고 사용하고 살 수 있는 영원한 처소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니" 그러기에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염세주의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세상을 무시하는 게 아닙니다. 세상을 더럽다 안 합니다. 묘한 세상 주시고 아름다운 세상 줬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이 세상 이것은 이대로는 장막, 무너질 장막집이지마는 이것이 하늘의 처소가 와서 덧입기만 하면 영원한 처소, 영원히 자기가 그 속에서 그것 가지고 타고 다니고 사용하고 그것 속에서 편히 쉬고 하는 이것이 마련되기 때문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요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됩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요" 왜 믿는 사람이 땅위에 있는 물질을 무시 합니까? 그 물질이 아니면 무궁세계의 물질을 마련하지 못합니다. 그것으로써 무궁세계의 것을 마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덧입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목부가 풀을 한짐 베다가 왔으니까 뿌리를 끊었으니 그 풀로는 생명이 끊어졌습니다. 생명이 끊어졌지마는 그것을 건강한 산 소가 어겅어겅 씹어먹고 나니까 조금 있다가 보니까 그 소의 피가 됐습니다. 소의 피가 되고 소의 기름이 됐습니다. 산 소의 피와 기름이 됐어.
죽은 풀이 풀보다 높은 승격, 높은 위치에 있는 소의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모든 저주 아래 있는 것, 사망 아래에 있는 것, 멸망할 걸로 되어 있는 이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면 산 게 됩니다.
생명에게 삼킨바 되다니? 하나님과 진리에게 삼킨바 되어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되니까 이게 살아났습니다. 이게 살아났어. 영감과 진리와 연결이 되니까 영생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문제로 마음이 눌리기를 얼마나 눌리느냐? "무거운 짐진 것같이 눌린다" 오후에 둘째로는 이것입니다.
탄식과 간절한 사모가 있느냐? 장막집과 영원한 처소를 믿으면 믿는 것만치 자기에게 탄식과 간절한 사모가 있을 것이고 믿는 것만치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점점 이 사실에 눌려져서, 이 사실에 눌려져서 죽자껏 밤낮 해도 모자라고 모자라고 해서 마음에 갈급과 원통과 노력은 다 여기에 있어 이 마음이 점점 무거워지고 심해지고 더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이 없는 믿음, '믿으면 구원 얻지' 해 놓고 젊을 때는 열심히 믿더니만 나이가 많아지니까 차차 믿음이 식어집니다. 그것은 기본구원만 있는 사람이지 건설구원은 없는 불행한 사람이오. 하나님이 그렇게 예정해 놨소.
그것 봐서, 늙어가면서 믿음이 점점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되지 않는 그자는 하늘나라 가면 벌거벗고 있을 자요, 벌거벗고 있을 자.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자는 그 공력을 불로 시험할 때에 공력 이 불타면 구원을 얻었으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과 같다" 화끈 화끈하고 부끄럽고 뜨겁다 그말이지요.
하늘에는 차이가 없습니까? 하늘에는 땅위에 있는 것으로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땅위에 잠깐 지나가는 가난이 서럽거든 무궁세계의 가난을 이것으로 잡아라. 땅에 있는 모든 존귀와 영광이 부럽고 영광스럽다 싶거든 영원무궁한 것을 잡아라! 이것은 돈 없어도 되고, 지식 없어도 되고, 못나도 되고, 병신도 되고 자기만 다 바치면 되어지는 것이니까 만들어라, 마련해라.
가장 귀한 것을 가장 쉬운 것으로 마련할 수 있도록 다 했는데 믿음이 없어 못 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못합니다. 땅에 있는 무너질 장막집과 영원한 처소가 하늘에 있는 이 사실을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없어지지 않는 이런 절대적인 이 말씀을 했지마는 인간이 자기 강퍅에, 자기 완패에, 자기 사욕에, 자기의 더러운 주관에 여기에 파묻혀서, 여러분들이 가졌으면 뭘 가졌습니까? 땅에 있는 지식 다 폐해집니다. 부귀 영광도 다 폐해집니다. 권세도 폐해집니다. 일국의 권세를 잡아봤자 지구 땅덩어리, 우주 안에 조그만한 보스래기 중에 보스래기라는 이 지구, 지구 중에 한 모때기 모때기 모때기, 미국도 모때기요.
이것을 잠깐 동안 권세잡은 것도 부러워하고 크다고 하거든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이 너의 것이 될 수가 있다. 네가 그리스도의 것만 되면 이 모든 건 너의 것이 된다." 이 말씀이 과장한 말입니까? 천지는 없어져도 획 하나도 가감이 없는 절대적인 말씀입니다. 이걸 믿을 때에 믿는 사람의 행위가 나오는 것입니다.
장막집과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스스로 네가 판단해 보라. 믿는지 안 믿는지 너를 판단해 보라. 너를 시험해 봐라.
이로 인해서 장막집 이것은 눈에 보이는 이것은 인정을 하고 하늘에서 오는 처소를 인정하지 않는 이것을 네가 발견하여 네게 탄식이 되느냐? 이것 위해서는 노력하고 영원한 처소에 대해서는 노력도 간절한 사모도 없는 데 대해서 네가 탄식이 나오느냐? 이 탄식으로 인해서 바꾸어진 간절한 딴 사모가, 새 사모가, 새 간절이 생겨졌느냐?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이 마음이 시간이 가면 흐려지는 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에 더 뜨거워지고 간절해지고 탄식되어지고 마음이 눌려지고 기가 막혀서 어쩔 줄을 모르고, 그 날을 생각하니까 벗고 그 날에 될 걸 생각하니까 네게 근심 걱정되는 것과 마음이 쓰여지는 것이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점점 더하여지느냐? 그러면 네가 장막집과 하늘의 처소를 인정하는 것이고 그게 없으면 인정하지 않는데 네가 스스로 속는 것이다. 너는 믿지 않는 자이니 안 믿는 자에게 무엇이 되겠느냐? 스스로 속는 것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키면 산 것이 됩니다. 그와 같습니다. 우리가 식상에 한 생선이 굽혀서 뜯겨서 올려 놨을지라도 그것을 내가 먹으면 그것이 내 산 피가 됩니다. 내 산 살이 됩니다. 우리의 썩어 저주 아래 있는 것, 사망 아래 있는 것, 다 멸망할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해서 생명이신 진리와 영감에게 삼키워서 진리의 것이 되면 생명의 것이 되면 그게 영생화되는 것입니다.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곧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일을 이루도록 이 일이 성사가 되고 성취가 되도록 하나님이 역사를 하시고, 이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오.
역사하시고, (○○○목사님, 녹음기 갖다 놨지? 녹음기 틀어놓고 나는 누워 자지. 못써, 안돼. 권능 받아야 되지 그것 뭐 녹음기 그 까짓 것 암만들어봐야 소용없어. 권능을 받아야지.)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보증으로, 이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게 하시고 썩을 장막이 무너지기 전에 영원한 처소로 덧입게 하는 이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시고, 특별히 이 일에 책임을 지우기를 누구에게 책임을 지웠느냐? 성령에게 책임을 지웠다.
성령으로 보증을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보증자, 책임자, 하나님이신 성령이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도록 책임을 지고 우리를 돕습니다.
책임진 자가 우리가 안 되면 그분이 책임집니다. 하나님이신 성령이 이 일을 책임지고 우리에게 이 일을 이루도록 하시니까 얼마나 든든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데 원하면 되지 왜 이 일을 못 한다 말입니까?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하고 성령은 삼위일체 중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중에 한 일위인 성령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셋째로는 이것이 증거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항상 담대하다니? 항상 담대하다니 무엇이 담대해? 공산주의자들이 사람 죽이기를 겁내지 않고 담대함 같은 그런 담대 아니오.
이 담대는 어떤 담대냐? 세상과 세상에 있는 일을 인하여 염려하고 떨고 걱정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원망하고 불만했는데 이제는 땅에 있는 것에 대해서 소망을 다 버렸어. 땅에 있는 이것 가지고 하늘의 것으로 변화시켜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땅에 속한 근심과 걱정 염려 욕심은 다 없어지고 이제는 하늘에 속한 것으로 바꿔진 것을 가리켜서 담대하다.
땅에 것에게는 담대하다. 죽인다 해도, 죽여도 이미 죽는 그 생명을, 이미 죽는 생명을 진리와 영감화되어서 진리와 함께 영감과 함께 죽는 그 생명이라면 그 생명은 영원한 순교요 존영한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래 놓으니까 땅의 것들이 땅의 것을 '안 줄련다 줄련다, 끌어 내릴련다, 뭐 매를 때릴련다.' 매 때리면 더 좋지.
이렇게 영원한 처소와 무너질 장막집이란 것을 확신하고 보니까 이 일이 탄식되고 간절히 사모되고 짐진 것같이 탄식되고, 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키려고 애를 쓰니까 가만히 눈 뜨고 보니까 세상이 하는 일은 어서 땅의 것을 하늘의 것으로 바꾸라고, 더 하늘의 것으로 복되게 하려고, 하나님께 저주받았던 것을 하나님이 기뻐서 가지고 놀만치 즐거워하는 하나님의 선물이 되도록, 환영받는 게 되도록, 전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은 우리의 구원을 좋게 만들고, 영광스럽게 만들고, 가치 있게 만들고, 하나님과 나와 진리와의 가깝게 만드는 중매 노릇이나 하지 손해보이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제 "담대하여" 담대, 이 담대가 있느냐? 이 담대가 없으면 믿지 않는 증거입니다. 믿는 증거는 이 담대가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 몸, 옛사람, 안 믿을 때의 사람과 같은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런 사람으로 되어 있는 그것은 주님과 아직도 대립적이요 상관없는 것인데 이것이 주님과 연결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현실이라는 그 현실을 통해서 '네가 하나님과 진리와 하나될래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과 하나될래 둘 중에 것 될래? 보다 어느 것이냐?' 이렇게 시비가 나는 그 시비를 통해서 '세상보다 나는 하늘나라, 나 보다 주님, 땅의 것보다 영원한 것, 이대로의 것보다도 진리와 영감의 것이 되어지는 것.' 이렇게 시비를 투쟁을 해 가지고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결성을 하기 전에 것들은 주님과 상관없는 것들인 줄 알기 때문에 "몸에 거할 때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이러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눈에 보이는, 눈에 보이는, 안 믿는 사람들이 보고 '저 불행스럽다' 하는 그 불행이 우리 불행이 아니라. 안 믿는 사람들이 보고 '저 행복스럽다' 하는 그 행복이 우리 행복이 아니라. '저거 다니엘 저거 사자구덩이 들어가 뒈지네' 하는 그 죽음이 우리 죽음 아니라. '나는 기도 안 할렵니다.' 하고 살려 나와도 그게 죽음이라. 그들이 죽는다 하지마는 '나는 기도하겠습니다.' 하고 사자구덩이 던져지는 것이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 그게 삶이라.
이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으로 위주를 해서 하지 않고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느냐 안 하느냐, 하나님 인정 하나님 복종이 되느냐 안 되느냐 요것으로 가치를 삼고 요게서 결정을 지운다.
안 믿는 사람들이 보는 대로 행복되다 하는 그것으로 행복을 삼지 않는다. 보는 것으로 인하여 살지 않는다.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 인정 하나님과 결합 이것으로써 살고 죽는 것이 결정이 되는 것이지 땅에 있는 보이는 그대로에 가지고는 결정되지 아니하는 줄 알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
이러기 때문에 범사에 항상 담대하다 세상을 향하여 항상 담대하다. 세상을 향하여 항상 담대한데 하늘에서 오는 처소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는 벌벌 떨기가 일 년 지나니까 더 떨리고, 십 년 지나니까 더 떨리고, 죽을 때가 가까와 오니까 더 떨립니다.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장막집과 영원한 처소를 이대로 믿는 그 증거입니다.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세상적 공포는 없어졌어. 세상적 공포는 없어졌어. 세상적 공포는 없어졌고 세상적에 대해서는 담대만 됐고 하늘나라의 공포는 생겨졌어. 하늘나라의 담대는 없어졌어.
'뭐 하늘나라 있는가 없는가 어찌 되거나 뭐 하늘의 것은 담대하고 땅에 대해서는 벌벌 떨던 자가 이제는 땅에 대해서는 담대하고 땅에 대해서는 공포와 두려움이 없어졌고 하늘에 대해서는 공포와 두려움이 점점 심해져, 이러니까 그 마음이 하늘에 대해서만 분발하지 땅에 대해서는 아무런 그는 힘 쥐일 게 없어.
그저 세상은 나를 돕는 것뿐이라.
"이런고로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이러니까 소망은 땅에 더 살고자 하는 소망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어서 하늘나라의 것을 잘 만들어 가 가지고 잘 만들어 가지고 주님하고 같이 살까?' 있고 싶기는 땅에 있지만 하늘에 가서 있고 싶고, 살기는 땅에서 살지마는 하늘에서 잘 살고 싶고, 땅에서 멸시 천대받는 것은 그것은 눈에 띄이지 않고 하늘에서 멸시 천대받을 그것이 항상 걱정이라.
이래서 몸은 비록 여기에 있고 내가 살기는 여기에 살지마는 내 소망은 무궁세계에 있기 때문에 무궁세계 거기에서 비판하고 평가에서 거기에 좋은 것을 거기에서 계획을 하고 거기에서 모든 것을 다 계획을 세워 가지고 그 계획 세운 것과 계획한 것을 이루기는 이 현실이라는 여기에 와서 이룹니다.
그러기 때문에 소망은 거기에 있고, 계산은 거기에서 대고, 모든 계획은 거기에서 세우고 이루는 것은 요 현실에서 이룹니다. 이러기 때문에 현실은 세상이 나한테 도적맞는 것뿐이오. 현실은 나를 삼키려고 하지마는 현실 현실은 이 현실에서 무궁의 계획을 여기에서 이루니까 현실을 전부 다 삼켰고 다 취했고 뺏들었고 다 내것을 삼는 것이 이 기독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거하든지 떠나든지" 우리가 세상에 있든지 하늘나라 가든지 우리는 일관이라. 세상에 있어도 우리의 기쁨은, 하늘에 가 있어도 우리의 기쁨은 한 가지 기쁨이라. 무슨 기쁨?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그 나라에 가서도 주님을 기쁘시게, 주님을 제일 기쁘시게 하는 자 지금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자존자 완전자를 기쁘시게 하는 내 인격, 참을 기뻐하는 인격, 의를 기뻐하는 인격, 진리를 기뻐하는 인격, 거짓을 기뻐하는 인격, 속이는 것을 기뻐하는 인격, 악한 것을 기뻐하는 인격, 잔인을 기뻐하는 인격 더러운 걸 기뻐하는 인격, 그걸 다 인격 버리고 하나님을 기뻐할 수 있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을 기뻐하는, 사랑을 기뻐하고, 의를 기뻐하고, 진실을 기뻐하고, 거 죽을 기뻐하고, 이렇게 완전을 기뻐하는 이 사람이 자기가 되어,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마귀로 싫어하고, 의인은 볼 때에 기쁘고 죄인은 볼 때에 불쌍하고, 성결은 볼 때에 개운하고 모든 추한 것은 볼 때에 불안하고 이럴 수 있는 자기 변화되기를 원한다 하는 말입니다.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 사람으로 만들 것이오.
죽는 날까지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어서 자기를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세상에 더러운 사람으로 만들어 만들어 가지고 나중에 마지막 죽을 때에 '늙은이 욕심, 노탐, 노탐, 늙은이 욕심, 늙은이 고집, 늙은이 무릎' 제가 택시를 타려고 손을 드니까 머리가 허여니까 안 세워 주고 가 버려. 왜? 늙은이 태우기 싫다는 거라.
이러니 요새는 늙은이는 공차 태워 주라 그러는데 인제 늙은이 차 못 타게 하는 것이라. 암만 택시 잡아봤자 안 태워 줍니다. 툭 지나가 버리고. 저 늙은이 있으면 저거 늙은이 또 차 탈런가 싶어서 공장 간다고 피피 돌려 가지고 공장 간다 하고 이 손 들런지 모르겠습니다. 안 태워 줘.
왜? 늙은이는 떡 차 타고 가면, 가면 하필 저 구석진 데 가지. 가 가지고 백 원이 나왔으면 '아하, 이것 돈이 천상 팔십 원밖에 없는 데 어쩔까요?' 그런 욕심만 가지고 더럽게 그래 놓으니까 그 사람들이 태워 주려 합니까? 이래서 할 수 없어 '이것 늙은이 값을 내야 되겠다.' 택시 탈 때는 타면 언제든지 반은 더 줍니다. 백 원이면 백오십 원, 이백 원이면 삼백 원. 이래 주니까 나를 아는 사람은 턱 세워 줘, 모르는 사람은 그냥 지나가요.
그것이 죽는 날까지 탐심으로, 사욕으로, 자기 주관으로, 저만 알고, 그러니까 이래 가지고 상당한 보응을 받아서 죽자껏 돈벌이 했는데 자식에게 마지막 뺏겨 가지고 차비를 얻으려 하면 '집에 있지 뭐 하려고 장 돌아다닙니까?'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또 '아이구, 좀 고기가 먹고 싶다.' '누가 고기 안 먹고 싶은 사람이 어데 있소? 만날 고기 고기 하고. 참 옛날 고려장할 때와 같이 고려장 해야 돼.' 이렇게 천대받아서 사는 인간이 되어지는 것,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원하노라" 세상에 있으면서도 참을 좋아하고, 의를 좋아하고, 옳은 것을 좋아하고, 곧은 걸 좋아하고,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이런 사람 되기를 원하고 하늘나라서도 이 사람으로 되기를 원한다.
"힘쓰노라" "떠나든지 거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그리스도가 심판할 터인데, 우리는 공심판 안 가지만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가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심판이라 말은 제사장 심판, 선지 심판, 왕의 심판을 하는 이 심판장이 그리스도입니다. 이러니까 네가 어느 정도 제사장 실력을 가졌느냐? 어느 정도 선지 실력을 가졌느냐? 어느 정도 왕의 실력을 가졌느냐? 제사장 실력은 네가 피조물의 모든 난제를 거머쥐고 하나님 앞에 해결을 지워서 피조물에게 복이 되고, 피조물이 옳게 바르게 하는 것을 하나님에게 상고해서 하나님에게 상을 받게 하고, 하나님이 피조물들에게 줄 수 없는 것을 잘 교제를 해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다가 피조물들에게 전달해 주고, 하나님도 너 없으면 안 되고 피조물도 너 없으면 안 되는 이 중간에서 중보 역할을 할 수 있는 네 인격을 어느 정도 길렀느냐? 땅위에서 이 일을 해서 어느 정도 길렀느냐? 내가 들으니까 어떤 반사가 어제 학생한테 심방을 갔다가 참 맞아 죽을 뻔했다고. 뭐 왔다 하니까 어떻게 성을 내고 하는지, 아주 도망을 쳐서 왔다고.
그것이 돈 바라고 그렇습니까? 저거 자녀들을 모르니까 안 보내려고 하는 것을 그것 하나 구원하기 위해서 오만 욕 다 얻어먹고 어떤 사람은 여선생들은 뭐 이놈의 가시나니 뭐 어떠니 오만 욕지꺼리 소리를 다 얻어먹고 그래도 가 가지고 그것 구원하려 하는 것, 거기 돈이 생기요 금이 생기요? 아무것도 안 생깁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심정으로서 그것을 구원하려는 그것이라 그말이오, 구원 하려는 것.
그게 뭐이요? 그것이 이 죄인을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구원하려 하는 것이오.
그것 하나가 구원 얻으면 어쩌든지 그 가정에, 노할까 싶어서 가 가지고 그냥 안되니까, 영감이 나오면 '아이고,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눈이 둥그래 가지고 '누고?' '저 아무것이 장 심방 하는 아무것이 아닙니까?' '아버지' 하니까 정이 붙는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아무것아, 여기 너거 선생님 왔다. 선생님이 오셨다, 나오너라.' 이래 가지고 오만 소리 다 하면서 그것을 구원해서 그래 가지고 그 가정을 하나님과 연결시켜 그 가정에 저주받을 것을 하나님 앞에서 다 용서함을 받게 하고 하나님 축복이 그들에게 가도록 하려는 이것이 뭐이냐? 제사장 실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비밀을 몰라서 깜깜해 가지고 이 세상뿐인 줄 알고 죽으면 그만인 줄 알고 이 세상에서 취하면 그것으로 다인 줄 아는 인간을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을 그들에게 알려 줘서 인간의 머리를 열어 줘 인간이 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가지고 금생 내세 영원을 알려 주는 이래 가지고 사람들을 구원하는 이것이 선지 역할이오.
사람들을 아무나따나 제대로의 행동하는 것을 '그러면 안 된다. 이래 살아야 된다. 저래 살아야 된다' 해서 그 사람의 행동을 정비 정돈해서 그것을 맑게 하고 바로 되도록 하는 이것이 다스리는 왕의 권위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권세요.
이것이 제사장권 선지권 왕의 권 이것이 네게 얼마나 연달됐으며, 얼마나 성장됐으며, 네가 세상에서 얼마나 연습했으며, 얼마나 또 이 일을 실천을 해 가지고 만들었느냐 하는 이것을 심판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선악간에' 선은 하나님 중심으로 한 것을 말하고 악은 자기중심으로, '나, 내가정, 내 자녀, 나, 나.' 자기중심으로 하는 그게 악인데, 하나님 중심 절대자 완전 중심이든지 자기 개인 사욕의 중심이든지간에 "그의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받으려 함이라" 거기에서 그때 받을 그때를 생각하면서 땅 위에 모든 생활을 절제하고 존절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 설 때에 그때에 후회할 것이 없도록 살게 하려고 하는 것이 기독자들인 것입니다.
뭣 때문에 기독자들이 세상이 볼 때에 어리석다고 삽니까? 그러기에 십자가의 도는 멸망받을 사람들이 볼 때는 저거 천치 바보 어리석다 하지마는 구원을 얻은 자들이 볼 때는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리석지 맙시다. 우리는 잠시 잠깐 후면 주님 앞에 섭니다.
세상에 있는 이 외모로 취하지 않고, "외모로 취하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고 부른즉 나그네와 행인으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의 나라는 하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밀하십니다. 냉수 한 그릇의 수고도 결단코 없어지지 않습니다.
호리라도 자기에게 잘못된 것은 댓가를 치르기 전에는 결단코 그 옥에서 놓이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지공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의 피를 힘입어서, 참 오늘이라는 이 시간은 얼마나 귀중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