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직분과 자타 구원

 

1989. 1. 6. 금새.

 

본문: 고후 4:1-6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1절에 '이러하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사람이 낙심되지 않는 것, 이 신앙 생활에 낙심되지 아니하는 그것이  제가 '무슨 결심이 있고 각오가 있어서 의지가 굳어서 그런 것 아니고, 우리가  옳은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않고 옳은 일에 신앙 의지가 굳건히 이렇게 계속되는  것은 이것은 스스로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자기의 신앙 계속이 되는 그것이 속에 의지로 이제 신앙  계속이 되는 것인데, 신앙 계속되는 그것이 자기의 힘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불쌍히 여겨서 은헤를 베푸셔서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그 사람의  태도는 하나님 앞에는 감사해야 하겠고, 또 사람 앞에는 자기 것이 아닌데 자기  것으로 다른 사람은 알기 때문에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서 겸손해야  되겠고, 또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나와 같이 긍휼을  베풀어 주시면 그렇게 신앙 생활이 조석으로 휘떡거리지 않고 굳건한 그런 신앙  생활을 가질 수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자기에게나 남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대하여야 하는 것을 여게 가르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직분을 받았다' 말은 사도직인데 사도직은 직분 중에 제일 큰 직분이나 우리는 그  직분의 양이 다르지 질은 같습니다. 모두 이 직분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 생명의  도를 전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시키는 이 직책, 그러면 자기는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어 주는, 구원을 이루어 주는 데는 제 구원이 안 되면 안 됩니다.

 자기 구원을 이루고 다른 사람의 구원 이루는 자타의 구원 이루는 이것이  우리의 직책입니다. 자타의 구원을 이루는 이것이 우리의 직분인데, 우리의  직분인데 그러면 이 구원 이루는 것은 어떤 게 구원 이루는 것인가? 구원 이루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형상, 4절에 보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말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습니다. 형상이 왜 없느냐? 없는 것은 희미해서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것은 하나님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완전이 어떻게 형상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상이 있으면 벌써 형상 속에 파묻혔습니다. 형상이 있으면, 벌써  형상이 있으면 그 형상이라는 윤곽과 그 모든 형체와 종류 속에 있습니다. 형상이  있으면. 형상이라는 거 첫째. 하나님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형상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면 무엇이 구원인고 하니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을 우리가 덧입기를 지금 애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을 근본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이렇게 창세기  1장에 말씀했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 말은 하나님은 형상이 없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 곧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니 그거는 뭐인가? 우리가  심령으로 볼 수 있고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현상은  뭐인가? 하나님의 완전성, 또 불변성, 참 단일성, 전지성, 전능성, 사랑성, 진실성,  의성 그 하나님의 인격을, 인격의, 인격이 뭐이냐? 하나님의 인격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속성이 하나님의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속성을 우리가  공부할 때에 우리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그 공통성 없는 속성을 네 가지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스스로 계시는 거, 또 하나님은 완전하신 거, 영원 불변하신  거, 또 그분은 단일성의 하나님이십니다. 지식도 가졌고 지혜도 가졌고 사랑도  가졌고 진실도 가졌고 거룩도 가졌고 의도 가졌고 주권도 가진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라. 우리 사람의 각양 성품 모양으로 하나님의 속성인데 그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형상이라, 또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신성이라, 신성.

하나님의 신성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신성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인격성을 우리에게 있도록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면 우리  사람이 가진 그 인격성은 천군들도 천사들도 가지지 못하고 사람들만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구원은 어떤 것이 우리 구원인고 하니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점점 갖추어 가지는 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날마다 입으려고 애를 써서 하나님은  원형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모형, 하나님은 원형이라면 모형, 이 종  이것은 이거는 원형이 되겠습니다. 이 종이 원형이 되겠습니다. 모형이라면 이  종을 보고 이 종과 같이 만든 그것은 종의 모양으로 된 모형이 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원형적이요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모형적입니다. 그러면 그게 하나님을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격을 닮은 인격,  그러면 하나님의 그 신격이 하나님의 형상인데 그 신격이, 그 형상이 그 뭐인가?  곧 하나님의 속성이라,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간다, '너희를 부르신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니 그리스도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익 형상이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신성 인격성,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도 있고 인성도 가졌습니다. 신인양성이시기  때문에 다 가졌는데 예수님이 가지신 그 형상을 우리가 가지려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예수님의 가지신 그 열두 가지 속성을 우리가 가져서  우리에게는 못쓸 속성이 있는데 그 속성을 자꾸 하나님의 속성으로 바꾸어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바꾸어 가지는 것이 뭐인가? 첫째로 하나님과 우리와 인격성이  그 속성이 그는 원형이요 우리는 모형만 돼 가지고 있지마는 같은 것이 있으니  뭐인가? 첫째는 지식성, 지성입니다. 지식성. 그러면 지식성을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닮으려고 우리가 애를 쓰는 것은 뭐인고 하니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가  닮으려고 하면 하나님의 지식이 어데 있는지 우리가 모르니 어찌 닮겠는가?  이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지식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이래서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이기 때문에 이 지식으로 내 지식을 삼으면  지식면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신격성과 내 인격성에 지성에 대해서는 같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하나님의 지혜성을 우리가 가져서 하나님의 지혜성을 우리  지혜성으로 가지면 지혜성이라는 하나님의 신격성을 우리 인격성에 가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로 자기 지혜를 삼으면 삼은 것만치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혜는 뭐이 지혜인가?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와 감화 감동이  지혜입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 이러니까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으로 네 지식을  삼으려고 애를 써서 지식을 완전히 바꿨으면 지식면에는 하나님의 그 신격성을  내가 닮은 인격성을 내가 가진 것이 되겠습니다. 또 성신의 감화로 지혜성,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내 사랑으로 가져서, 땅위에 인간의 사랑은 뭐 혈육  사랑 또 동류 사랑 정욕 사랑, 이거 모두 이것은 내 새끼니 사랑한다, 내 아버지니  사랑한다, 내 친척이니 나와 성받이가 같으니 사랑한다 그런 것은 다 혈육  사랑입니다. 피가 같다 이렇기 때문에 피로 말미암은 사랑 그 혈육 사랑이고, 또  자꾸 만나니까 서로 친해져서 사랑해집니다. 사람이 친해 가지고 한솥에 밥을 일  년 먹어 다르고 이 년 먹어 다르고 자꾸 다른 그런 것이 뭐이냐 하면 동무의  동류의, 유가 같기 때문에 동류의 사랑이요, 또 정욕의 사랑은 뭐 보나 안 보나  짐승들도 암컷은 수컷을 사랑하고 수컷은 암컷을 사랑하는 이성 정욕의 그 사랑.

부부라 하는 것은 그것이 정욕 사랑이 다른 데는 관련이 없고 거게만 관련 있지  그런데 정욕 사랑도 남자나 여자나 이렇게 다른 데 만일 관련이 있으면 크것이  한 군데만 집결되지 않습니다.

 이래서 그 정욕 사랑으로 하나되고 또 동휴 사랑으로 하나가 되고, 동류  사랑으로 같이 자주 지내서 하나가 되고 그 다음에는 혈육 사랑 으로, 내외간이라  하는 것은 아무리 친해도 돌아누우면 남이라 이럽니다. 그러나 그 혈육의 사랑이  되는 때가 있으니까 아내의 피와 남편의 피가 합해 가지고 자손이 하나 나게  되면 그것이 거물장이라, 이러니까 그만치 걸렸기 때문에 그 관계성이 두꺼워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런 건 다 땅의 사랑이라 이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래서, 배암의  사랑이 있고 땅의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람을 모두 사람들이 원하고 있고 가치로  삼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사랑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가지려고 애를 쓰고 또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이것을 사람들에게 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뭐이 하나님의 사랑인가? 진리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영감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내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영감대로 행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죄 없이 하는 것이 의롭게 하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그 사람과 친밀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 이래 가지고 땅의 것을 소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어쨌든지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하나님으로만 향해서 가서 하나님에게만  가까와지고 하나님과 연결되도록만 하려 하는 그것이 이제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  사랑을 가지니까 이 사랑을 저희들이 싫다고 마다고 자꾸 도망을 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이 나한테 편지하기를 백 목사 사랑 없는 것을 말을 하는 것을  들어서 제가 많은 참 깨달음을 가지고 했습니다. 제가 사랑이 없는 것은 뭐이  없느냐? 정욕적인 사랑, 동류적인 사랑, 혈육적인 사랑 그 사랑을 제가 껍데기로  가지고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면 잘 이해가 될 터인데 이 겉어머리 이  사랑을 제가 가지지 못하니까 사람들은 다 싫어하는 것입니다.

 저희들에게 말하는 것이 다 그것이 내딴에는 다 진리대로라고 말도 하고 상대도  하고, 또 내딴에는 영감대로로 뭐 말하고 상대하지, 이거 모두 다 우리 공회는  지금 한창 뿌숴지는 판입니다. 뿌숴지는 게 뭐이 부숴지는가? 전부가 다 사랑  없다고 부숴집니다. 사랑 없다고. '세상 모두 사랑 없어' 하는 그 찬송을 지은 사람  있는데 그 찬송을 내가 뜻을 볼 때에는 전부 땅에 속한 사랑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금은 '사랑' '사랑' 해서 사랑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 사랑으로 인해서  전체가 다 죽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이것을 참 우리가 가져야 되는데, 이러기 때문에 부부간도  그렇습니다. 부부간도 내가 여기 부산 와 가지고 내 아내에게 말하기를 '여보  자기는 사모라는 말을 듣지 않도록 사모라는 이름을 가지지 마시오. 다른 사람이  그러면 사모 사모 할 터이니까 사모라는 말을 듣기 전에 다른 이름을 가집시다.'  그 다른 이름은 뭐이냐? '권찰이라는 이름을 가지십시오' 왜? '사모라는 이름을  가지면 다른 사람들이, 사모니까 그만 사모는 으례히 교역자를 높이면 사모  높이기 때문에 그 사모를 높이니까 높이는 것 가지고는 백해무익이지 유익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러면 공연히 우쭐 하기만 하고 자꾸 안 되니까, 또 그 사모  그게 그것이 사모 노릇 하는 그거 가지고는 아무 거석이 없고 하니까 인간  구원하는 권찰 노릇을 하도록 권찰직을 가집시다.'  이렇게 가지는데 권찰직 가지고 사모직 가지고 이러려 하니까 사모직은 영광이  있고 대우가 있고 좋고 달콤하고 이 권찰직은 다른 사람이 알아 주지 않고 모두  다 권찰이니까 그뭐 아무 표가 없다 말이오. 같이 앉아서, '같이 어데 심방 가면  한데 뒤에 붙어 앉으면 사모라고 그걸 알 터이니까 아예 사모라는 말일랑 하지  말고 권찰님이라 하고, 붙을 때는 한 자리나 두 자리나 뛰워 가지고 이래 가지고  이거 다 권찰 중에 하나로 이렇게 알도록 그렇게 합시다.'  내가 그걸 제일 처음에 선포하고 이래 가지고 이래 하고 아는 사람들에게 자꾸  모르는 사람들 오는데 '사모 사모 이름을 부르지 말고 권찰님 권찰님 이래  부르십시오' 내가 이렇게 말했다 말이오. 이렇게 말했는데도 다른 사람도 그러면  해치는 것인 줄 알고 또 그러면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줄 알고 이래 가지고 이래  하다가 그래 근근히 이래 권찰직을 해 가지고 구역장이 좀 이래 되고 난  다음에는 또 이거 사모 생활이 또 그리워서 또 사모 이름을 또 대우받으려 하고  또 이러다가 또 그래 가지고 나중에 '야 권찰직 하기 싫거든 말아라' 권찰직을  뺏들어서 구역을 꼭 세 번 했다가 세 번 내가 깨뜨렸습니다. 세 번 한 거  그했는데 처음에 한 것을 깨뜨려 가지고 누구를 줬느냐 하면 여게 OOO을  깨뜨려 가지고 OOO씨를 줬고, 그 다음에 한 것을 내가, 두번째인가 세번째인가  했다 말이오. 지금 나증에 가서는 기어코라도 목적대로 돌아갔어. 이제 나는 할멈  귀때기도 잘 못 보요. 왜? 내가 전화하면 하루 전화하는데 아이들 말로 거석하면  집구석에 안 있어. 전화하면 집에 없습니다. 장 돌아다니고, 장 돌아다녀서,  국민학교 문턱에도 안 들어갔는데 이 도시 오면 도시에 다 대학 졸업한  사람들이고 다 이래 지성 인들이니까 그뭐 사람축에 가겠소? 이래도 지금 권찰에  그 호수가, 했다가 다 다른 사람 줘 버리고, 그거 권찰 하기 싫고 딴거 하고  싶으니까. 그러면 그거 치워 버려라. 치워 버려라. 이래 가지고 다 줘서 이러고  그래 나중에 그러면 권찰직이 이제 그런 줄 알고 뭐 딴거 이 거저거 아무 소용  없다. 인간, 주님이 원하시는 인간 구원하고 가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비로소  깨달아져서 느껴져서 시작한 지가 얼마 안 됐어. 얼마 안 됐는데 지금 몇등이지,  OOO조사? 구등. 구등이라. 구등인데 사례가 상당히 많이 나갑니다. 팔등보다는  작지마는 십등보다는 많습니다. 이래서 우리 교회도 다 활동비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뭐 중이 고기맛을 보고 난 다음에는 벽에 빈대를 안 남군다  하더니마는 이제 이 맛을 보고 나니까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자꾸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녀서 그 무식한 사람이, 우리 교회서 구등 이라면 상당히 많습니다. 식구가  상당히 많은 거라. 여기 모두 다 유력한 사람 모두 대학 졸업한 사람도 그렇게 저  밑에 쑥 떨어져 있소. 내외 달려들어도 떨어져 있소. 그런데 그 사람들 다 '분구를  해서' 해도 분 구해도 다 기본수를 남궈 놨기 때문에 다 그 수는 다 거게 들어  있어.

 이러니까 이제는 인간 구원하는 것만이 제 일이라고 이렇게 깨달아 졌기 때문에  뭐 찾으면 항상 전화하면 집에 없어. 심방 갔어. 나하고 접촉을 하는 사람들은  접촉하고 나면 나중에 그만, 그러니까 내가 그러합니다. 내게 필요한 일꾼들은  전부 다 주님이 다 뺏들어 가 버렸고 이제 나는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 여게  OOO권사님이라든지 뭐 OOO, OOO권사님들 이거 OOO이니 이런 사람들 내  몸종이오. 몸종이라. 이거 입에 혀같이 이래 내가 움직이던 사람들인데 이거 자꾸  나를 접촉하는 가운데에 '이것보다 이게 좋다, 이것보다 이게 좋다' 좋은 걸 자꾸  보인 것은 뭐이냐 하면 '예수님의 피 운동, 인간 구원 운동 그게 좋다' 이러니까  뭐 밤낮으로 거기 있어 가 마음이야 내게 있지마는 심부름 하나를 못 시켜.

심부름 하나를 시킬 수가 없다 그말이오.

 또 그러고 그 사람들이 전에는 나를 잘 받들어 섬기고 이랬는데 이래 놓으니까  거게 가서 자꾸 거석해 놓으니까 어떨 때는 혹 뭐 먹고 싶은 게 있어 가지고  누구한테 전화를 할까 이래서, 이제 그전에는 뭐 그럴 때 있으면 OOO한테  전화해도 떨컥 해 오고 뭐 또 OOO, OOO 뭐 OOO 이런 분들한테 하면  떨컥떨컥 해 오고 이러다가 그거 나중에 그만 차차차 없어서, 또 OOO권찰님한테  또 이래 전화하면, 그거 내가 그래요. '나 보리밥 먹고 싶다' 하면 보리밥  가져와요. 이래도 해 보고 자꾸 이래 버 쌓았는데 이제 다 그만 주님께 다 뺏겨  버렸어. 다 뺏겨서 그만 이제 인간 구원에 다 가버리니까 이걸 할 도리가 없어.

 이래서, 내게 필요한 사람은 주님에게 다 뺏겼다. 이 교회적으로도 내게 필요한  남자들은 다 뺏겼다. 뺏기기를 벌써 요긴한 것을 남자만 해도 한 오륙십 명  되니까 두 내외면 백여 명을 제일 요긴한 일꾼들을 다 뺏겨 버리고 나니까 여기  뭐 있어야지? 이러니까 중간반에서 실컷 이래 길러 가지고 그만 주님에게 다  뺏겨서 전부 교역자로 다 나가 버리니까 여기 할 게 없어. 일꾼이 없어.

 이래서, 뭐 지금은 내가 암만 말한다 해도 우리집에 아내도 안 듣고, 또 지금  말해서 내가 '왜 너희 나를 이래 좀 대접도 안 하고 이까짓 걸로 하노?' 이러면서  아마 OOO권사님이나 OOO권사님이나 OOO권사님이나 이래도 '아이구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고 말은 했지, 말은 했지 가 보면 집에 없거든, 내가 가 볼  시간도 없고 가 보면 집에 없어. 전화하면 집에 없어.

 그래 좀 내가 좀 야단을 쳐요. 자꾸 그래 돌아다녀 병이 나 가지고 일찍 뒈지지  말고 좀 아끼라고 OOO권사님에게 내가 야단을 쳐도 못 앉았어. 자꾸 찾는 데가  있으니까. 그래 내가 또 어떨 때는 그말 합니다. '내가 자기네들한테 큰소리 할 수  있다' 왜, '나를 안 만났으면 지금 할마이 노릇 한다고, 할머니 노릇 한다고 아이들  두터 업고 안고 이래 가지고 그게 할 일인 줄 알고 돌아다니면서 그러다가  나중에 좀 있으면 누가 와 보고 '아무도 없다' 또 옆에 보니까 나이가 많으면  송장내가 납니다. 그래요. 나니까, 송장내가 나니까 누가 오겠어요? 다 가고  하나도 붙지도 않아요.

 이런데 이놈의 송장들을 막 뜯어먹으려고 자꾸 달려들어 가지고 이러니까  송장이 막 돌세가 났어. 이래 가지고 아파서 드러누웠어도 자꾸 와 가지고 자꾸  옆에서 거석해 대. '아이 지금 뭐 어찌 됩니까 뭐 어찌 됩니까? 좀 한번 가  주십시오' 자꾸 이러니까 그중에 제일 OOO권사님은 마음이 약하니 자꾸 못 견뎌  자꾸 끌려다닌다 그거요. 그래 그런 송장을 미인보다도 더 좋아서 막 젊은 꽃같은  청년들이 자꾸 와서 우 하니까 그래 만들어 놨으니까 내가 자기네들에게  손해보인게 뭐꼬? 내가 큰소리 합니다. 지금은 큰소리 하지만 또 인제 하늘나라  가면 더 '과연 사랑했구나'그게 사랑이지.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외 형상 속성을  닮는 것은 사랑성을 닮아. 진실성을 닮아. 이렇게 해서 자꾸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직분을 받은 것은 인간 구원하는 직분을 받은  것입니다. 내가 그 OOO집사도 이 전도도 심방도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인제  차차차 조금 거석해 보니까, 이러면 보면, 아직까지 가지는 않아. '내가 여기서  이것만 하고 있으면 되나? 이거 아무것도 한 것 없어.' 탄식해. '아무것도 한 것도  없고 그저 뭐 밥이나 해 주고 이럴까?' 속으로, 말은 안 해도 말이지. 심방도  전도도 못 해서 지금 구역을 키우지 못한 그게 탄식이라. 또 와서 보면 뭐  음식이나 하는 거 연구나 좀 하고 앉았는가 보면 연구 안 하고, 집에서는  모르지만. 오면 성경 들고 앉았어. 이것이 뭐이냐? 하늘의 사랑으로서 하는 그게  점점 배어 들어가서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이 직분이라는 인간을 구원하는 직분, 이 직분, 인간을 구원하는 직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진리태로 사는 것이요 영감대로 사는 것이요 사죄로 사는  것이요 칭의로 사는 것이요 화친으로 사는 것이요 하나님을 향한 생활 하는  그것이 인간을 구원하는 직책이라. 입으로 그래 하고 자기가 그렇게 살고. 이것이  다시 다른 말로 하면 신앙 행위라 말이오. 자기 신앙 행위 잘하는 것이 남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자기 신앙 행위 잘하는 것이 남을 구원하는 것이라.

 이러니까 자꾸 그만 그 눈이 뜨니까 이걸 바로 하지 않고 그만 그 욕심이 나  가지고, 하늘의 욕심이 나 가지고 자꾸 욕심이 변화가 돼 버리니까 사람의 직책이  변화된다 말이오. 그래서 그것도 잘 해 나가면 되는데 이거 그만 잘 해 나가지  않고 넘어서 엉뚱하게 해 나가니까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래,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귀한  직분을 받아 가지고 자기가 그 직분에서 낙심하지 않고 변하지 않고 그대로  굳세게 나가는 그것은 뭐이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그것으로 되는 것이지  제 스스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면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나된 것이 내가 나된 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되게  하셨다' 그분은 평생 동안 다른 사람이 따라가기 어려운 그런 신앙에 힘있는  걸음을 걸어가면서 그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긍휼히, 불쌍히 여기셔서 그렇게 해  줬다는 이것을 항상 기억하기 때문에 약한 자 보면 '아이구 저 사람도 나같이  주님께서 은혜 주시면 저 사람도 될 것 아닙니까?' 동행을 했지 교만한 일이  없었고, 자기를 나타내서 교만하고 다른 사람을 멸지한 일이 없었다 말이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돼 가지고 내 스스로 돼 가지고 내 스스로 한 것 같으면 자랑할  것이 있지마는 받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긍휼하심을 작게 입었으면 작게 낙심하지 않고  긍휼하심을 많이 입었으면 많이 낙심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낙심을 하나도 안  해요. 많이 입었으면 낙심 하나도 안 하고 조끄매 입었으면 낙심 조그매 안 하고  이러니까 이게 전부 하나님의 은혜로 이와같이 됐다는 요것을 기억하는 여게  나가아지 못하면 뭣 됩니까? 교만한 자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물리침 받아  버려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만나기 쉽습니다. 하나님 만나기 쉬워요. 그러면 우리가  '내 구원을 잘 못 이루면 다른 사람이 나 보고 구원 이루지 못하겠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구원을 잘 이루어야 되겠다. 본이 돼야 되겠다. 또 다른 사람의  구원이 잘 이루도록 우리가 그저 말이나 기도로나 어쨌든지 협력을 해야 되겠다'  고게 뭐입니까? 고게 무엇이오? 그게 주님이 자기에게 고 직분 주신 것이오. 직분  주신 것이오. 그러면 그렇게 자기 마음에 들도록 하는 그게 주님이 지금 시키는  거라. 그럴 때에는 주님은 '이래라' 할 때 나는 '예', '저래라' 할 때 '예' 당신이  시키는 대로 이러기 때문에 주님은 나에게 원동이 되고 나는 거게 피동이 되니까  주님은 나를 거머쥐고 이러고 나는 거기 따라서 이러고 주님하고 나하고  연결이라 말이오. 주님하고 나하고 동행이라 그거요. 그게 주님과 동행이라.

별스러운 주님으로 딴데서 찾으려고 하지 말고 그게 내나 주님이시오. 주님하고  나하고 동행이라.

 그런데 그것을 내가 스스로 마음인 줄 알고, 자타의 구원을 위하는 그 마음이 곧  주님이 나에게 주신 마음이요 고것을 내가 고대로 가지는 것이 주님하고 나하고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을 내가 괄시하지 않는 것이요, 주님이 나한테 그 직책 주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그게 내나 주님 배척이라 그 말이오. 그것을, 자타의 구원을  무시하는 것이 주님을 무시하는 것이오. 자타의 구원에는 생각 안 하고 엉뚱한  짓만 지금 돈벌이나 엉뚱한 짓만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주님 배척한 것이라.

 그래 가지고 이렇게 하면저 그 마음에, 그 마음이 차차 더 강해져. 이래 가지고  '어라 내가 이 세상에 모든 부귀 영화 있지마는 다 치워 버리고 나는 남은 여생은  여기다가 바쳐서 주님을 위해서 사는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바치겠다' 하는  그것이 주님이, 모든 것보다 주님이 좋기 때문에 주님하고 동행하려 하는 것이라,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생활이 껍데기로 보면 모르는 사람들은 뭐 그뭐 영광 있다  하지마는 이 권찰이나 뭐이든지 해 보려면 참, OOO조사가 말하기를, 비가  오니까 둥구나무에 앉아 가지고 이래 말하기를, 둥구 나무가 시골에 가면 커다란  둥구나무가 속이 썩어서 거기 들어가면 비를 피할 수 있습니다. 떡 앉아 그러기를  '둥구나무야 둥구나무야 네가 교역자 노릇을 얼마나 했기에 이거 이래 속이  썩었노?' 속 썩는 것으로 되는 거라. 이런 말 하면 저 지금 권찰들은 좀, 권찰  노롯 한 사람들은 좀 알아듣지마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별별 억울한 소리도  있고 별별 다 있지.

 이렇게, 그거 그걸 그래도 벗어버리지 않고 그거 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인데,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인데 주님하고 동행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주님 배척해도 나는 주님하고 동행한다' 그게 뭐이냐?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것만치 내가 됐지 내 스스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그걸 깨달으니까 이것 또 머리  들지 못하겠어.

 진리를 깨닫고 보니까 이 면으로도 머리를 좀 들까 해 보니까 머리 못 들고 또  꼬꾸라지지 저 면으로 꼬꾸라지지 이러니까 이제 나중에 가서는 그만 참 자기는  그만 완전히 제물이 되어지는 거게서, 내가 어제도 어떤 사람 말하기를 '그  억울함을 당하고 분함을 당하고' 이러기 때문에 내가 말했어. 내게 나를, 고동은,  고동은 어미를 먹고 그놈이 자랍니다. 다 먹으면 다 자라 버려요.

 이런데 뭐이냐 하면 쪼아 먹는 거, 우리가 그 은사 위치에 있는 것은, 밑에 있는  그 사람이 누구 먹고 살아요? 이 서부교회 교인들은 백 목사 먹고 자라요. 백  목사 쪼아 먹고 자라요. 백 목사 욕해서 자라요. 백 목사 욕해서 자라고 백  목사에게 억울하게 해 자라고 뭐 별별 매장이 오고, 막 헐고 뜯고 뭐, 그럼으로써  자라. 그거 뜯어먹고 자라. 고동 뜯어먹고 자라. 그래 내가 '이제 너를 뜯어먹고  자라니까 네가 안 뜯기려 하면 그거 자라지 않는다. 뜯겨야 자란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사망은 내게 와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에게  역사한다' 너희는 나를 뜯어먹고 나를 죽이는 그 역사하고 나는 너희를 살리는  역사한다. 이것이 복음의 성격을 가리켜서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우리가 이 직분 받은  우리 직분이 뭐인 걸 알아야 되겠고, 우리가 직분은 돈 버는 게 우리 직분 아니오.

이거 이 세상에서 무슨 문화를 하는 것도 직분이 아니오 장사하는 게 직분  아니오. 장사를 해도, 장사 해도 껍데기는 장사이지 속은 이 직분, 또 그 사람이  무슨 학교 공부를 해도 껍데기는 공부를 해도 속에는 이 직분, 자기가 가정  생활을 해도 껍데기는 가정 생활 해도 속에는 이 직분, 이 직분을 잊어버리면  주님하고 떠났습니다. 주님하고 서로 나뉘어 버렸어.

 주님이 이 직분으로 내게 오셔 가지고 나한테 말하는 것이, 그분하고 연애하는  것은 이 직분밖에는 못 해. 이러기 때문에 다리를 질질 끌면서 가 가지고 나서  가지고 심방하고 전도하고 이러고 나면 와 때는 몸은 피곤해도 마음은 기쁘고 또  몸까지 힘이 나. 그게 뭐이냐 하면 이 직분을 하고 이 직분을 자기가 행하기  때문비 이 직분 행하는 것이 주님하고 동행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자타의 구원이라 하는 것이 그 중심이요  소원이요 목적이 아니라면 안 됩니다. 한 자리에 둘이 누워 자는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둔다 그건 뭐인가? 그것도 다 같이 껍데기는 자지마는 한  사람은 이 직분 이것이 자기에게는 목적이고, 뭐 시집 간 것도 이것 때문에 갔고  장가 간 것도 이것 때문에 갔고 또 부부 생활 하는 것도 이것 때문에 하고 이  모든 것 다 이것 때문에 해. 자기 구원 이루기 위해서.

 그래서 고린도전서 7장에 보면 사나이마다 한 여인을 가지도록 하는 것은  너희들이 음행죄로 말미암아 멸망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한다. 그것이 없으면 혼자 사는 것이 좋다 고린도전서 7장 1절 이하에 그거  기록해 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그런 것도 전부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하는, 우리  전생활은 자타의 구원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한 목적, 구원을 위한 동기, 구원을  위하는 방편, 구원을 위하는 노력 이것이 아딕면 전체는 멸망입니다.

 이러니까 그만 우리가 그거 잊어버릴 때는 뭐 잊어버려? 구원 잊어버렸으면 뭐  잊어버리지? OOO조사? 주님 잊어버리고 하나님 잊어버렸어. 구원이 내 속에,  자타의 구원 이걸 생각할 때에 주님 생각하는 거라. 자타의 구원에 지금,  앉아서든지 누워서든지 기도하는 거로든지 뮐로 하든지 구원을, 자기가 이 직책을  하는 그것이 주님하고 동거 동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딴데 별스러운 주님이 아니라. 저 어떤 분 자기 어머니는  저 뭐 삼층에 있대요, 여기 전도지 자꾸가져가니까 '이 할마니가 이 전도지를  내버리나 어쩌나? 이 좀 비정상이로구만.' 욕도 이래 하니까 그래도 자꾸 달라  해서 전하니까 할 수 없어서 이제 돈을 십만 원을 전도지를 박아서, 십만 원이면  얼마고? 십만 원이면 몇장이고, OO이? 십만 원어치 떡 박아 놓으니까 거지가  양식 갖다 팔아다 놓으면 좋은 거 모양으로 막 좋아서 이러더래. 이랬는데 이거  서너 달 지나버리니까 그만 없어져 버려. 자꾸 전하니까. 그게 뭐이냐? 제 힘으로  하는 것 아닙니다. 그게 주님하고 동행이오. 그게 주님 앞에 긍휼하심을 입은 그  증거요 주님과 그만치 밀접하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어쨌든지 우리의 직분은 자타의 구원이라. 이 자타의 구원에 바로  구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라. 자타의 구원을 잊어 버리고 돈  생각하는 것이 주님 배척이라. 자타의 구원으로 충만해지는 것이 그것이 주님하고  동행이 충만해지는 거라. 그러면 자타의 구원에 지금 제일 충만한, 자타의 구원에  대해서 제일 주력하고 있는 사람 그게 뭐이냐 하면 주님하고 동거 동행이 제일  충만해져 있는 사람이라.

 그러면 OOO권사님 그 말 듣고 또 '이러니까 이거 내가 죽어도 자꾸 끌고  가가야 되겠다.' 그래 가지고 그라면 오래 못 견뎌요. 누워서 일해. 누워서 일하면,  자꾸 조절해야 되지 기계에 기름 안 치고 하면 그만 당장에 망그라져 버려.

기름을 쳐서 해야 되지.

 그러면 그래 하니까 그래 하면서 '저거는 뭐이 저런 게 도무지 신앙이 구원이라  하는 것이 저렇게 뭐 그만 헌신짝 버리듯이 저래 버려 버리는가? 헌신짝  버리듯이 저래 버려 버리는가? 좀 뭣이 좀 계속성 이어야 되지, 뭐 저 구원을  저래 헌신짝같이 저래 그만 구원을 버려. 저거는 구원 금방 얻는다 하다가 금방  또 내버리고' 이렇다고. 사람 갚지 않다고. OOO장로님 그런 생각 더러 없습니까?  자기는 안 그러니까 다른 사람 보고 그렇게 멸시 더러 안 해요? 멸시 더러  한대요. 그거 주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우리가 한다 요거 우리가 잊어버리면  안 돼요. 그러니까 이리저리 치우치면 안 돼.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제 거게서 계속해서 고린도후서 4장 고 1절부터 계속해서 나갈 터이니까  집에서 자꾸 읽고 '요거는 무슨 뜻인가?' 자꾸 무슨 뜻인가 자꾸 그래요. 그러면  계속해서, 이번에 교역자회 때는 5장 1절로부터 계속하려고 읽기는 읽으라 해  놓고 나중에 그뭐 그런 거 시비하기 때문에 그런 거 가르칠 여가 없어. 시비하기  때문에. 그래서 인제 모두 말하기를 아이구 정치 그거 다 치워버리고 어쩌든지  그만 성경 배우고 그만 이러도록 그렇게 자꾸 해 달라고 하는데 이제 자연히  차차 차차 그리 돼 가겠어요.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 지난 공과를 어쨌든지 외우고 실천을 해 보면 거기  깨달음이 생겨질 것입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잃지 말고. 은사 위치에 있는  반사든지 부장이든지 목사든지 권찰이든지 또 보조반사든지 원반사든지 자기에게  하나님이 붙여 준 자기의 믿음의 소생 믿음의 자녀 믿음의 자손 믿음의 제자  어쨌든지 그것은 잘 기르십시오.

 그것은 어데다가, 어데서 길러야 돼요? 어데서 길러야 돼요, 저 뒤에? 한번  가리켜 봐요, 어데 길러야 되는고? 이 마음 속에서 길러야 돼. 마음 속에 픔어  놓고 항상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도하는 데서 자라지 딴데서는 자라지를 못해요.

육신의 자녀는 기를 때에 뱃속에서 자라고 이거는 기를 때에는 마음 속에서  길러야지 딴데서는 기르지를 못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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