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19:54
우리의 소망
1987. 12. 9. 새벽 (수)
본문: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서 주님에게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 들어갑니다. 이러니까 베드로가 소리를 질러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아 올리시고 말씀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같이 배에까지 갔습니다.
여게 물 위로 걸어가다가 물에 빠진 그 이유를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그러면 믿음 적은 것이 그것이 물 위로 걸어가는 데에 끝까지 걸어가지 못하고 처음에 걸어가기 시작하다가 그만 중단했고, 그러니까 물 위로 걸어간 것이 그 믿음의 힘으로 갔다 그렇게 말했고, 또 ‘왜 의심하였느냐?’ 하는 것은 빠진 것은 의심했기 때문에 빠졌다 그렇게 여게 예수님이 그에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간 것은 믿음으로 걸어갔고 또 걸어가다가 물에 빠진 것은 의심으로 인해서 빠졌습니다.
그러면 물 위로 걸어갔으면 ‘믿음으로 걸어갔다’ 하니까, 믿음으로 걸어갔다 그 믿음으로 걸어가면 물 위로 걸어간 것은 그 큰 능력으로 걸어갔는데 물 위로 걸어가게 한 그 믿음이 걸어갔다 했는데 우리가 잘못하면 믿음을 우리가, 우리가 믿는다는 그 믿음, 믿음 그것이 무슨 힘이 있는 줄로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믿음은 아무 힘이 없습니다. 믿음 자체는 아무 힘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는 것은 우리 할 일인데 믿을 때에 그 역사하는 힘은 뭣인가? 그 역사하는 힘은 곧 주님의 피의 역사요, 또 하나님의 역사요, 진리의 역사입니다. 피공로의 역사와 하나님의 역사 진리의 역사인데 여기에 ‘물 위로 걸어오라’ 이럴 때에 그 베드로가 주님이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시니 걸어갈 수 있다는 그것을 믿는 그 믿음은, 그러면 그렇게 믿을 때에 그렇게 믿는 믿음으로 걸어갔으니까 그때에 믿음으로 물 위에 걸어간 그 능력은 무슨 능력인가? 그것 내나 예수님의 능력이요 진리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라 하신 그 주님이 베드로가 믿고 걸어갈 때에 물 위로 걸어가도록 한 그 능력은 베드로에게 있는 그 믿음이라는 인적 요소 그것이 무슨 힘 있는 게 아니고 인적 요소 그게 신적 요소를 바라보기 때문에 물 위로 걸어가게 한 그 능력은 순전히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그 물에 빠져 들어갈 때에 손을 내밀어 붙잡으시면서 일으키니까 그가 빠져 들어가다가 물 위에 올라서 가지고서 같이 물 위로 걸어가게 했으니 그 물 위로 걸어가게 한 그거는 누군가? 베드로가 걸어간 게 아니고 베드로를 걸어가게 하신 이는 곧 주님의 능력이 손으로 붙잡아 일으키시고 걸어갔습니다.
그러면 빠지는 것을 손으로 붙잡아서 물 위로 걸어가게 한 그 능력은 뭐이며 또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할 때에 걸어가게 된 그 능력은 뭐이냐? 그거 내나 같은 능력입니다. 볼 수 없게 역사하신 능력이요 볼 수 있게 역사하는 능력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늘 이렇게 하신 그 모든 것은 당신이 신인양성일위로 오셔서 인성을 입고 사람의 눈에 보도록 이렇게 되는 그것은 그 제한이 있습니다.
육체를 입으시고 이와같이 이렇기 때문에 육체로 하시는 일은 여게 있으면 저게 없고 저게 있으면 여게 없고, 육체의 형체를 가졌을 때에는 제한이 있지만 육체의 형체를 떠나서 부활하신 후에는 신령한 인성도 가졌고 신성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신성은 신성 그대로 인성도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 가지고서 가졌기 때문에 그때는 볼 수 없게 역사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4장에 “너희들이 나 하는 일도 할 뿐만 아니라 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 그거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께로 감이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한된 인성을 입고 있는 그 인성이 이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가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모든 제한을 초월한 그런 인성으로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인성도 계시지 안하는 곳이 없고 못 가는 데가 없고 뭐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리라도 얼마든지 다닐 수 있지만 예수님이 인성을 가졌을 때에는 인성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신인양성의 주님이 신인양성으로 부활하셔 가지고서 부활하신 몸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셨는데 신령한 신인양성일위의 주님으로 계시기 때문에 지금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들과 함께 한다”고 하는 그 거처는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모든 시공을 초월한 그런 신령한 인성과 신성이 돼 가지고서 계셔서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같이 계신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러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신인양성일위이신 주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데에 어느 정도의 효력 있게 계시느냐 하면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이제 이 권세를 가지고 너희들이 복음 운동하는 데는 내가 항상 같이 있을 것이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여게 제자들이 처음에 배 타고 건너갈 때에는 순풍으로 순풍 아주 잘 건너갔지마는 가다가 그들이 풍랑 일어나 가지고 가지 못하게 되는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하나의 이런 역사적인 형식을 계시 기관으로 써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때에 그들이 어떻게 물 위에 걸어갔던가? 그것은 그들이 볼 수 없는 영이신 주님이, 영이신 주님이 그들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거는 그들이 영접했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면서 “문 열라 내가 너에게 들어가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는 요 말씀 그대로의 그때에 주님이 그들 마음에 들어서 계셨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인정했습니다. ‘주님이 가라 했으니 우리가 갈 수 있다. 주님이 가라 하셨다. 또 주님의 말씀이 가라 하셨다.’ 이럴 때에 그는 주님이 그들의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그 심령 속에서 영으로 역사할 수 있었고 진리로 역사할 수 있었는데 그들이 영도 잊어버리고 진리도 잊어버렸으니까 영과 진리는 일할 수 없어서 거게는 방해되는 모든 풍랑이 방해한다 말은 세상 모든 역사들, 이 세상에 이런 것 저런 것 세력들이 방해를 해서 가지 못했는데 방해할수록 그들은 주님을 모셔서 주님이 자기들을 가게 해 주신다는 주님의 그 돕는 능력으로 된다는, 주님을 잊어버렸고 또 진리를 잊어버렸으니까 그들에게는 초자연의 역사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모든 피조물의 방해를 받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시 거게서 고통당하고 있다가서 ‘안심하라 내로라’ 할 때에 그때에 그들은 유령이라고 말했는데 유령에게서 소리가 나오면 더 놀랄 터인데 그때 그들이 ‘안심하라 내로라 두려워 말아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자기들 감각 속에 들어올 때에 그 진리가 역사할 수 있었고 그때 주님을 저희들이 감각 속에 믿음으로써 바라보고 영접했을 때에 그 능력이 저들 속에 역사해서 돌변됐습니다.
모든 절망과 공포에서 싸여 있던 순전히 인간뿐인 그들 속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의 객관의 역사가 와 가지고서 그 심령에 평강을 주기를 베드로는 지금 물에 빠지면 죽는 줄 아는 것은 어부니까 잘 상식적으로 아는 사람인데 거게서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그런 용기를 생겨 가지고서 ‘걸어오라’ 할 때에 걸어오라 하니까 물 위에 턱 내려서니까 됐습니다.
내려서니까 내려설 수 있는 용기를 누가 줬느냐? 내려설 수 있는 용기를 준 것이 그것이 주님과 주의 말씀이 줬고, 또 내려섰을 때에 그것 물 위로 떠벅떠벅 걸어가게 한 그 능력이 뭣이냐? 그 능력이 내나 주님과 그 말씀의 능력이 역사했고 그다음에 빠질 때에 또 부르짖으니까 손으로 잡아낸 내나 그 능력도 그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곧 ‘물 위로 걸어오라’ 할 때에 믿는 그 능력만 못합니다. 왜 못하느냐? 그것은 예수님이 그때 부활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육체의 손이 붙잡지 안하면 안 되는데 이제 그들이 마음에 믿음으로 영접할 때에는 그 붙잡지 안하는, 제한을 받지 안하는 무제한으로써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죽은 나사로를 “네가 믿으면 하나님 영광을 보리라” 하는 그때 믿는 것은 믿으면 우리가 잘못하면 나사로가 죽은 것을 마르다가 믿으니까 믿은 그 믿음 자체라는 그것이 무슨 뭣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때는 누가 했느냐? 아버지의 영이 했으니까 성령이 했고 곧 주님이 하셨고 말씀이 했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가 죽은 나사로를 살려냈습니다. 살려낸 능력은 그 능력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뭐 믿는 것은 뭣 믿느냐?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그 약속을 믿으면 믿는 대로 되는 그것은 그 약속을 믿을 때에 역사하는 그 역사는 삼위일체의 하나님과 그 진리의 그 능력이 와 가지고서 모든 일을 우리가 믿는 대로 다 역사해서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도록 하고 명상하고 실행하는 가운데서 자기의 경험의 힘, 체험의 힘, 실력을 가지고 가르쳐야 그들이 살아납니다.
또 지하철 공사 위해 기도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이것 잊지 말고 자기와 자기에게 소속한 모든 관련된 미래를 위해서 기도해야 우리 힘으로 통과할 수 없는 그런 일을 그 능력을 힘입어서 통과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도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도와 달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힘으로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이 와 가지고서 나를 도와 주실 것을 자꾸 지금 예약하는 것이고 또 내가 간구할 때 허락하는 것은 하나님이 해 주시겠다 이렇게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릅니다.
그리고 이번 교역자회 때에 아주 중요한 것이 많이 됐습니다. 모든, 마귀란 놈이 거머쥐고 장난하는 그런 마귀의 줄이 많이 끊어졌습니다. 많이 끊어졌으니까 하나님이 많이 일할 수 있고 마귀는 낙담을 할 것입니다. 그런 나머지기 그것도 앞으로 교역자회 때에 하나 하나 그걸 심사해 가지고서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귀가 우리를 유혹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세상은 불이 섞인 유리 바다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빠지면 죽습니다.
세상은 빠지면 죽는데 빠지기는 어데 빠지느냐? 미혹에 빠져. 딴데는 빠질 게 없어. 미혹에 빠져. 미혹에 빠져. 미혹에 빠지면 죄가 됩니다. 죄 짓는 모든 죄는 미혹에서 오요. 미혹은 어데서 와? 마귀 그놈에게서 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면 모든 행동에 대해서 그 사람의 마음과 고기덩어리 그것에게 무슨 책임을 지우지만 그까짓 것은 아무 힘없어. 마음과 고기덩어리는 도구 한가지라. 이 칼과 한가지인데 칼 가지고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무 주권 능력이 없어. 이러니까 이 칼 이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은 마귀 그놈에게 붙들리면 굉장한 살해의 행동을 하게 되고 또 이 심신이 성령에게 붙들리면 굉장한 생명 역사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교역자회 때에 그걸 또 거석할 터이니까 거게서, 우리가 성경 거석하는 것도 그것을 요거냐 조거냐 아무나따나 그만 이 성경은 이렇게 해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치는 또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치는 해석할 수가 있는데 아무나따나 해석을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어떤, 녹음을 가지고 왔는데, 녹음을 가지고 와서, 먼데 가 있는 목사입니다.
○○ 가 가지고 있는 목사인데 설교를 했는데 보니까 삼십팔 년 된 환자에게 제가 설교하기를, 제 설교 듣고 하기는 하는데. ‘그는 제일 중한 환자다.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다. 방해하는 자들만 있다.’ 이걸 제가 말했는데 그 설교한 데 보니까 그걸 강조해요.
‘아무것도, 제일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또 아주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이요 방해는 많이 받고 있는 사람인데 이 사람에게 찾아왔다. 그러면 우리가 이걸 가져야 된다.’ 그러니까 ‘나는 무능한 사람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돕는 사람이 없습니다. 방해하는 자가 많습니다.’ 이것을 강조하고 이것을 강하게 가져야 된다 이걸 강조해. 정반대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 가지란 말이 아니라. 그말 하면 생각할 때 그 말이야 맞는 것 같지요. ‘자기 무능한 걸 알아야 되고, 자기는 참으로 세상에 도움이 없는 줄 알아야 되고, 방해하는 것뿐이라 하는 그것을 느끼는 것이 그것이 주님을 모시도록 했다.’ 그렇기야 하지마는 그 실상은 그 성경에 본문 설교는 틀렸다 그말이오.
본문은 그것 부인하라 말이오. 거게는 부인하라 말이오. 네가 돕는 이가 없고 의지할 이가 없고 방해하는 자가 많다 해도 그까짓 것 암만 많아도 상관 없다 부인하라 하는 것인데 그걸 강조하니까 인본주의 설교라 말이오. 그것 인본주의 설교라. 사람이 인본주의 들으면 달콤합니다. 그것 인본주의 설교라.
그러니까 우리가 그것을, 이 아무나따나 성경을 주 끌어맞춰서 해석하는 게 아니고 그게 틀리면 안 됩니다. 그게 심판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런 걸 정확하게 알아야 되는데 그걸 전부, 그러기에 설교할 때 인본주의냐,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또 세상주의냐 천국주의냐? 주의라 말은 그걸 앞세웠느냐 그말이오.
인본주의라 말은 사람을 앞세웠다 말이고 신본주의라 말은 하나님을 앞세웠다 말이고, 주라 말은 제일 주로, 제일 위주로 주를 삼았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에 많은 것을 고쳤습니다. 방청인도 그만 솔아 놓으니까 참석 못 했지마는 아주 중요한 것을 요번에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도 그것 할 것입니다. 요번에는 뭐 교리 신조 그런 것 안 나왔지마는 교리 신조도 이렇게 해석하니까 요리 해야 되나 조리 해야 되나? 성경 해석은 이리도 하고 저리도 할 수 있지마는 같은 이치에서는 할 수 있지마는 이치가 꺼꾸로 돼서는 안 됩니다. 거게서는 부인하라 하는 걸 거게서 인제, 인정하라 하는 것은 자기가 무능한 사람 참 무지 무능하고 돕는 이 없는 그런 참 박절한 세상이라 하는 것을 네가 인정해야 된다는 건 딴데 있다 말이오. 딴데 다른 성구를 인용해야지 거게서는 그것을 부인하라 하는 것인데 그것을 강하게 가져야 된다 하니까 정반대 아닙니까? 그래도 어리석은 사람은 그것 들을 때 ‘그것 참 그럴듯 하다’ 하기 쉽다 그말이오. 그런 설교 자꾸 하면 그것이 안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