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08:20
우리의 바라는 것은
1986. 12. 19. 새벽 (금)
본문:고린도후서 4장 16절∼5장 7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은 날로 새로와진다. 이 겉사람은 우리의 이 육의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첫째 아담에게 받은 사람은 하루 살면 그만치 늙고 또 일 년 살면 그만치 늙습니다. 그래 가지고 마지막에는 죽습니다. 그러나 속은 날로 새로와진다 한 그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을 받은 그 사람은 점점 깨끗해지고 점점 온전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 생활할 때에 여러가지 어려움을 당하는데 어려움 당하는 그것은 그 어려움을 통해서 우리가 이루어지고 얻어지는 것은 어떤 것이 이루어지는가?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아주 환난의 경한 것이, 가벼울 경자 경한 것이, 아주 가벼운 그런 환난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 이렇게 신앙 생활할 때에 땅위에서 어려움 당하는 것을 사람들은 다 싫어하지마는 어려움 당하는 그것으로서 없어질 것은 자꾸 없어지고 영원한 것으로 바꾸어 가지게 됩니다.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면 없어질 땅의 소망은 차차 더 없어지고 하늘의 소망은 점점 더 견고해지고 첫째 아담에게 속한 자기 생각, 자기 뜻, 자기 욕심, 자기 주장, 자기 지식, 자기 소원 그런 것은 차차 차차 거짓되고 잘못된 것인 걸 알기 때문에 이런 건 차차 차차 제거돼지고 참 영원히 가도 없어지지 안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전한 그런 것이 우리 속에 이루어집니다.
그러기에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돌아본다 말은 우리가 뭣을 가치로 삼느냐, 뭣을 상대로 삼느냐, 뭣을 우리가 가치로 삼느냐? 땅위에 환난당함으로 곤란당하는 거, 환난을 당함으로 없어지는 거, 환난을 당할 때에 그 환난의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그런 것들은, 그것이 환난만 만나도 병들고 또 상하고 없어지는 그런 것들은 마지막 죽을 때는 다 없어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때에 그것이 없어질 그런 것들은 장차 다 없어질 것들이요 환난을 당해도 없어지지 안하고 환난을 당할수록이 더 그것이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고 온전해지는 그런 것은 다 영원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우리가 가치로 여기는 것은, ‘그런 것은 돌보지 안한다, 그런 건 생각지 않는다.’ 또 `우리가 그런 것을 생각한다. 중요하게 여긴다.’ 그런 것을 말해서 돌아본다 이랬습니다.
가치로 여기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는 거, 안 믿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와 같은 그런 것들은 다 보이는 것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는 이 세상의 과학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과학적으로 확실하다’ 과학은 저희들이 확실한 줄 알고 있습니다. 과학은 확실한 줄 알고 있지마는 떠들어 쌓아도 확실하다고 하는 그 과학은 잠시 잠깐 후면은 없어질 것들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면 보이지 않는 건 뭐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뭐인가?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계약으로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것인데 이것은 영원합니다.
사람들은 ‘눈으로 봤나? 현미경으로 봤나?’ 보이는 것만 위주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없어질 것들만 다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뭐이냐?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약으로 선포해 놓으신 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거는 영원합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가 내것 삼는 방편이 무엇입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계약으로 선포해 놓은 그것을 내것 삼는 방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사실을 믿을 때에 믿는 자의 것이 되고 믿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 한다 하는 자요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자에게 그 약속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위주를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다 무시합니다. 그러기에 이 세상에서 똑똑다고 하는 모든 과학자들은, 또 안 믿는 모든 불신자들은 보이는 것만을 위주로 해서 보이지 않는 것은 가치로 여기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보이는 것은 육안으로 보이는 것, 또 자기의 이성 판단으로 보이는 것, 자기 주관으로 보이는 것 이런 것만 가치로 여기고 확실하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것만을 위주로 해 가지고서 사람들이 삽니다.
보이는 것이 많으면 많은 사람, 보이는 것이 크면 큰 사람, 또 보이는 것이 구비하면 구비한 사람, 보이는 그런 것들이 다 강하고 크고 풍성하면 그 사람은 그렇게 강하고 크고 풍성한 사람으로 가치로 인정을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아주 무시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인데?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입니다. 계약은 무시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사람들은 보이는 것은 이 세계에서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을 하나 상대한다고 하면 ‘너는 그것이 너에게 좋다고 생각하고 보배로 가치로 여기고 있는데 그것은 반드시 없어진다. 보이는 것은 잠깐 후면 그런 것은 다 없어진다.
그것이 많은 너는 없어질 때에 없어질 것이 많으니까 고통이 많겠고 그것으로 인해서 영광을 많이 누리고 모든 사람에게 가치로 인정받아 대우받고 있는 너희 것은 잠시 후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너는 심한 고통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봅니다. 그게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보이는 것, 보이는 것, 또 하나님의 이 약속을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하나님의 약속을 떠나서 노벨상을 받은 사람들은 아주 그 사람들은 참 영광 있고 권위 있습니다.
내가 지난밤에도 저녁 식사를 하면서 테레비가 보고 싶어서 테레비를 틀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하면서. 보자, 세상이 어떤고 보자 하고서 테레비를 트니까 그때 마침 이 모든 기술에 대해서, 과학 기술에 대해서 아주 참 찬란한 말들을 하고 있는 걸 봤습니다.
이래서, 이 기술 경쟁이라. 강대국이 되는 것도 영토가 많고, 거기서는 그런 말이 없지마는 내가 보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영토가 넓어 강대국 되는 것도 아니고 돈이 많아야 강대국 되는 것도 아니다. 기술이 많으면 강대국이 된다. 기술이 앞서고 기술이 제일 높으면은 제일 높은 나라 되고 기술이 많으면 제일 부자되고 기술이 강하면 세계 모든 기술을 능가할 수 있는 그 기술을 가지면 강한 나라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기술 개발, 이 기술 개발하는 데에 아낌없이 투자를 하고 한다는 그것을 한참 보면서 내가 생각하기를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과연 그러하다 하는 것으로서 이를 다 찬성을, 보는 사람마다 찬성할 것이다. 보는 사람마다 찬성할 것이다.
그래, 기술이 있어서 모든, 기술이라 말하면 과학이라 말입니다. 과학 발달이 많이 된 그 나라가, 지역이, 개인이 부요해진다. 이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을 할 터인데 나는 이 성경을 생각할 때에 ‘그게 다 보이는 것들이다, 보이는 것들이다.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다 그것 다 보고서 그것을 보고서 그것만 위주를 하고 있는데 그들이 보지 못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의 계약이다.’ 아무리 과학으로 모든 것을 다 구비해 놨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거게 대해서 당신이 주는 것을 주지 안하면은 다 그것은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아무리 그런 거 구비해도 그 지역에 하나님께서 저주나 징계를 내리면 그 과학이 하나님의 이 저주를 뚫고 올라가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노아 홍수 때에 그때도 과학이 없는 게 아니고 기술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때도 기술이 제일이라 과학이 제일이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이는 것으로 다 치우쳐지고 말았는데 노아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미구에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그는 세상이 무시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준해서 움직였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무시하고 저희들의 주관과 저희들의 이성이 감각할 수 있는 이런 모든 보이는 것들만을 상대해서 살았었는데 하나님이 당신이 홍수 심판을 내리니까 그들이 뭐 이런 거 저런 거 지저분하게 유리하고 필요한 걸 말했지마는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이기고 홍수 심판을 꿰뚫고 위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다 그 아래서 멸망을 받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무식한 거 같았지마는 ‘하나님의 약속은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우주보다 크고 가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이루어져 창조된 것인데 하나님의 약속은 이 창조된 모든 것보다 크니 모든 우주와 영계를 창조한 그 능력을 가진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러기 때문에 노아는 그 약속을 크게 가치로 여겼고 모든 사람들은 보이는 그것을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그 두 편의 생활은 갈라졌습니다.
세상 사람은 노아를 보고서 조롱하고 훼방하고 불쌍하고 가련하게 참 속는 자로 알았고 노아는 하나님의 계약을 의심없이 믿기 때문에 그들이 지금 분발하고 가치로 여겨서 다 대우하고 부러워하고 하는 그런 것이 다 속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온 세상이 노아의 여덟 식구를 조롱하고 멸시 천대하고 무가치하게 보고 있는 그 상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노아는 일백이십 년 동안을 피곤한 줄 모르고 조그마치도 그는 낙망이나 절망이나 비겁이나 자기의 열등감을 가지지를 아니하고 기쁘고 즐거워하고 모든 그 세상 사람을 부러워하지 안하고 도리어 불쌍하고 가련해서 견디지 못한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노아는 그들이 보기에 불쌍하고 가련하고 그들은 노아가 보고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그것은 왜 그들이 노아를 그렇게 여겼던가? 여긴 것은 보이는 그것만 위주로 했지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하고 보니까 그들은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정반대로 노아는 왜 그들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그렇게 보고 자기는 행복되다고 여겼던가? 그것은 하나님의 이 계약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것이 일차 홍수 심판 된 것인데 우리에게 형식 계시로, 역사 계시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은 보이는 이것을 위주로 가치로 중하게 확실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약속은 허무하게 여기는 그자는 다 멸망하고, 하나님의 이 약속의 한 마디가 없는 가운데서 우주를 만들 수도 있는 그런 능력이 있는 말씀인 것을 믿고 그 계약 가치로, 계약 위주로, 계약 권위로, ‘계약만이 앞으로 그대로 이루어지고 남아 있지 그 계약에 없어진다는 그 모든 것은 없어진다.’ 계약을 믿으니 세상 사람 하는 것이 무가치하고 불쌍하고 가련했고 계약을 믿으니 자기의 생애가 가치 있고 행복된 그것을 느끼면서 피곤치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때는 옵니다. 마지막에 홍수 때가 오고 보니까 그들은 다 헛일했고 노아는 그는 우주를 다 차지해서 하나님 후사가 됐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겉과 속의 알맹이가 있다. 겉의 것은 차차 차차 쇠해지고 낡아지지마는 속의 것은 점점 새로와진다. 속의 것은 이것은 다 새사람에게 속한 것인데 하나님의 계약에 속한 것입니다. 이러기에 보이는 이런 것들은 차차 없어지지마는 하나님의 계약은 점점 견고해지고 점점 온전함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환난을 주시는 것은 뭣 때문에? 보이는 것 의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8.15 해방에 이북에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서 그렇게 모두 다 박해하기 때문에 이북에서 월남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 월남한 사람인가? 월남한 사람은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사람들이 제일 월남을 많이 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사람은 그들의 모든 정치와 가치로 여기는 것이 자기와의 지식이 다르고 가치가 다르고 소망이 다르기 때문에 여게는 살 곳이 못 된다 하고서 다 월남을 했습니다. 그러나 거게 있는 사람들은 안 믿는 사람들은 뭐 조금 정치가 달라진 것뿐이지 뭐 별게 없기 때문에 거게서 살았습니다.
이라는데, 월남하는 사람들이 거게서 못 견뎌서 월남을 하면서 자기가 돈 위주로 살고 모든 부동산 위주로 뭐 땅에 있는 그런 걸로 살았던 것은 그때에 그것이 자기에게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았었습니다. 이래 가지고 넘어오면서는 ‘주님이여, 이제는 내가 살려 주시면 돈 위해서 살지 않겠습니다. 내가 부동산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과수원 위해 살지 않겠습니다.’ 제가 고려신학교에 다닐 때에 그때 불쌍한 청년이 하나 거기 공부하고 있었는데 무지 무능해. 무능한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때 더러 도와 줍디다. 도와 주는데 그래 도와 주면서 ○○○목사님이 나한테 말하기를 ‘저 사람이 평양에서 제일 갑부의 아들이다. 그뭐 농장도 어마어마한 갑부의 아들이다.’ 그래서 내가 있다가서 ‘갑부의 아들이니까 아마 잘 살았으니까 고생을 하겠다. 갑부 아들이니까 지금 너희들이 돈 몇푼 준 것이 거기 가서 뒤에 가서 큰 효력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너거가 돕나, 그 사람이 너무도 헛된 걸 가지고서 그렇게 의지하고 살다가 갑자기 낭파당했으니까 불쌍하고 가련해서 돕나, 뒤에 갚아 줌을 바라고 돕나?’ 내가 그런 말로 그들에게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계약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께 소망 뒀으면 뭐 공산주의가 오거나 말거나 상관이 없을 터인데 보이는 가장 제재 많이 받고 한계를 많이 받아서 꼼짝 못 하고 요동 못 하는 것이, 가장 불편하고 불리하고, 불편하고 불리하고 너무도 가치가 사용에 제한이 많은 그런 것들을 취하고, 그거 보면 징그러워 던질 터이니까 그런 것들을 취하고, 어데 가도 좋고, 죽음에도 좋고, 죽음 너머도 좋고, 심판에도 좋고, 무궁세계에도 좋고, 어데든지 자유적으로 얼마든지 가치 있는 그런 것은 그들이 가치로 삼지를 안하는 그것 때문에 그렇다 하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헛일이라고 말하는 그런 얘기가 있었습니다.
이 월남할 때에 자기네들이 모든 것을 정평 정가하는 그 정신을 차리도록 하기 위해서 어려움을 줍니다. 사람이 죽을 경우가 되면은 정신이 옵니다. 이래서 이 믿는 사람들 오늘도 6.25 같은 것이 와 가지고서 큰 환난이 오면은 여러분들의 정신이 거의 발라질 것입니다. 가치 있다 없다, 중요하다 중요치 않다, 내가 이것은 꼭 잡아야 되겠다 잡지 안해야 되겠다, 뭣이 요긴하고 필요 없다 하는 그런 것이 다 정상화되지마는 그만 이렇게 환난이 없고 평안해지면은 전부 땅에 속해서 다 땅으로 속화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잠시 잠깐 동안 어려움을 주는 그것은 영원한 그 영광가 존귀 그것을 마련하도록, 잠시 잠깐 어려움을 주는 것은 이 속는 일을 그만 하고 말도록 하기 위해서.
그러면 환난은 뭐이냐? 환난은 앞으로 없어질 그런 것들이 우리 눈에 똑똑히 보이도록 그런 것들이 다 참 가치 없다 이렇게 보여지고 우리가 가치 없게 보는 것이 그것이 참 가치 있다는 것을 정상적으로 평가하고 정상적으로 비판하는 이런 사람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이 보이는 것은 잠깐이라, 보이는 것은 이 세상에 첫째 아담에게 속한 모든 안 믿는 사람들이 가치로 삼고 있는 그런 모든 것을 가리켜서 이제 보이는 것들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지 않는 것은 신령한 것인데 곧 뭐이냐? 그 신령한 것이 뭐인가? 하나님의 계약대로 된 그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요것을 아는 사람이 지혜 있는 사람입니다.
땅위에 세상 모든 학자들이 이거는 옳다 옳다, 이거는 귀하다, 모든 학자들의 그 책을 내가 어제 우리 ○○○선생하고 얘기를 하는 가운데에서, 도서실이 어데 제일 많이 있다 했지? 도시 이름. 빌라델비아라 했나 뭐라 했노? 그뭐 신학이 좋은 신학이 여러 개 있다면서? 거게 서적이 제일 많대요. 많은데 그 서적이 몇십만 권 된다 하더나? 얼마라지? 몇십만 권 돼.
몇십만 권 되는데 그걸 척 가서 앉아 가지고서 ‘이게 참 보배다’ 이래 가지고서 이걸 저는 자꾸 지금 그걸 얻어 가겠다고서 ‘자, 내가 이제 천 권을 독서했다, 만 권을 독서했다, 내가 십만 권을 독서했다, 여게 있는 것을 다 독서했다. 이제는 떡 내가 이만치 독서했으니까 참 나는 위대하고 크다.’ 이렇게 평가하고 그것으로 큰 수익을 얻은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것은, 물론 신학 서적이니까, 신학 서적이니까 거게서 사람들이 성경 보고 깨달은 것이니까 좋은 것도 있기는 있겠지마는 그것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다 없어질 것들이오.
신구약 성경에 있는 그 계약 요것만 남아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 사람들이 하나를 막 태산같이 불궈 가지고 이래 놓으니까, 그래 내가 그말 했어. 그래 내가 비유를 그때 뭘 들었던고? 예를 들어 미원을 말이요, 맛있는 미원 내가 들던가? 미원 비유 들던가? 미원을 한 봉지를 그걸 한 그릇에 타면은 아주 그 맛이 있겠습니다. 그걸 여러 도라무깡에 타면 또 맛이 없습니다.
또 그걸 낙동강에다 뿌리면 맛이 더 없습니다. 아무 뭐 탔는가 싶으지 않소.
이랬는데,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 요 하나를, 사람들이 생각해 가지고서 사람들이 해 놓은 말은 그뭐뭐 낙동강같이 그렇게 많습니다. 이러니까 속에 외나 진짜는 양이 적은데 인간들이 보태 놓은 말이 많기 때문에 그거는 싱거워서 먹지를 못한다. 이러니까 이제 그런 것 그것을 가지고서 신학자들은 어학 자랑이고 많이 독서한 그것이고 인간들이 이 사람은 이렇게 했다, 저 사람은 저렇게 했다 하는 그런 것을 많은 것이기 때문에 머리를 그놈이 다 점령해 버리고 맙니다.
그저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지 않는 요것을 해석하는 것이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지 않는 요것이 뭐인가 요것을 바로 아는 것이 요게 참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뭐인가 하는 거 요거 아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
이러니까, 보이지 않는 것은 뭐이냐?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계약입니다. 계약 속에 있는 것입니다. 요 계약 속에 있는 것은 이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자꾸 그 교수마다 이런 거 저런 걸 가르치는데 거기서 학점을 받을라 하면 교수 가르치는 것을 내가 기억을 해야 그래도 학점을 받을 것이고 그 학점 받을라 하면 그놈 기억할라 하면 놀 시간 없이 전부 거기다가 시간에다 그놈만 다 집어 넣어 놓으니까 자기도 그 가치 없는 줄 알았지마는 학점 따기 위해 가지고서 이렇게 자꾸 하다 보면은 나중에 몇 해 지나고 나니까, 몇 해 지나고 나니까 그놈만 속에 들었지 그만 외나 성경 진리도 멀어져 버렸지, 또 영감도 멀어져 버렸지, 신앙은 멀어져 버렸지 이놈만 머리에 꽉 차 가지고 있다 말이오.
이래 나와 놓으니까 그런 거는 아무것도 없는데 이 공부하고 나온 사람들이 나와 가지고서 그걸 말할라 하니까 교인들은 하나도 안 듣지 자기는 있는 거 그것밖에 없지, 그러니까 자꾸 ‘너거가 몰라 그렇지 이 보배를 모른다’고 암만 보배 해 봤자 계약 위주로 사는 사람들은 그게 가치 없는 것인 줄 알기 때문에 교인들은 이해 안 하고 자기는 혼자 좋다고 쌓고 자꾸 이래 쌓고 이러니까 그 사이가 서로 결렬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래서, 그런 독서하는 그런 것은 그저 나 할 일이 아니고 그들이 가르치는 데에 거튼거튼하게 그 사람들 교리와 신조와 사상이 뭐인가 그런 걸 간추려서 강령적으로만 자꾸 그것만 가지고 내가 주력하는 것은 언제든지 성경 잊어버리지 안할라고 성경을 자꾸 읽고 성경 공부하는 거 성경의 뜻을 깨닫는 거 또 이거 이것저것 비교해 가지고서 요거는 오십점짜리 요거는 백점짜리면 오십점짜리는 집어 던지고 백점짜리.
그래 가지고 내가 마지막 결론 말은 그랬습니다. 옳은 것은 하나뿐이다. 뭣이든지 옳은 거는 하나뿐입니다. 옳은 것은 뭣이든지 논리에도 옳은 논리는 하나뿐이요.
옳은 진리는 하나뿐이요. 옳은 것은 하나뿐이고 옳은 거 외에 비슷하이 삐뚤어진 거는 천도 만도 억만도 넘습니다.
그러면, 삐뚤어진 걸 공부해 가지고 삐뚤어진 거 알아야 되겠습니까 옳은 것 공부해 가지고 삐뚤어진 게 알아야 되겠습니까? 옳은 거 공부할라 하면 하나만 하면 돼. 옳은 거는 하나뿐이니까. 옳은 거는 하나뿐인데 옳은 거 하나만 공부해 가지고서 옳은 거 외의 거는 천이든이 만이든지 억만이든지 다 틀렸다 그만 도매금으로 이래 버리면 되고 그래 아는 게 있고, 삐뚤어진 거 어데 삐뚤어졌느냐, 요래 삐뚤어지냐 조래 삐뚤어지냐? 삐뚤어진 것을 공부해 가지고 삐뚤어진 걸 아는 거 있고 옳은 거 공부해 가지고 삐뚤어진 거 아는 거 있고 하니까 두 가지 방편이 있는데 옳은 거 공부해 가지고 삐뚤어진 거 아는 것은 몇 가지만 공부하면 됩니까? 하나. 하나인데 그 삐뚤어진 거 얼마나 많겠습니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이것도 말이요, 내가 어제 그말을 했어. 서울 남대문 문터박이, ‘문터박이 뭘로 했느냐?’ ‘나무인데 박달나무로 했다' 이라니까 `나무 중에는 박달나무가 여물지. 그말 같다.’ ‘아니, 소나무다.' `아니다, 박달나무다.' 모든 사람이 박달나무로 인정합니다. 그래 또 한 사람이 있다가서 ‘그런 게 아니다.
대추나무로 했다.’ 나무 중에 대추나무가 제일 여물거든요. 이라니까 ‘아, 그말이 맞다.' 이랬는데 남대문을 가 본 사람은 보니까 문터박이 없어. 문터박이 없다 말이오.
가 본 사람은 저거끼리 막 박달나무라 소나무라 여문나무라 뭐 나왕이라 대추나무라 이래 쌓는데 가 본 사람은 그 소리를 듣고서 암말도 안 하고 ‘너는 모르느냐?’ `나는 남대문 문터박은 없다.' `문 쳐놓고 문터박이 없는 문이 어디 있노? 이 등신아.’ 모든 사람이 등신으로 정죄하지만, 모든 사람이 등신이라고.
‘세상에 문터박이 없다고 하는 사람이 어데 있겠노?’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다 등신이라고 다 정죄하고 이래 버립니다.
그 정죄하고 틀렸다고 한다고 그 사람이 거게 틀렸다는 말에 유혹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유혹을 받습니까 안 받습니까? 안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약을 자기가 실천해서 나간 사람은 천하의 학자들이 다 달라들어도 유혹받지 안하고 ‘저거 모두 다 거짓말이다’ 하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유혹받지 않습니다.
이래서, 요번에 잘 만났어. 지금 젊지 힘있지 이라니까 그런 줄 알면서도 이거 뭐인고 이거 한번 도서실에 가 가지고 파고 들어가서 어짜든지 수십만 권을 한번 자꾸 읽어서 막 한번 해 봐야 되겠다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갈라 하는 건 아니고 그런 생각 좀 가진 거 같고 그런데 좀 눈을 뜨는 거 같기 때문에 내가 딱 잘라서 그만 끊어 버렸다 말이오.
끊어서 거게서 모두 다 가르치는 거하고 여게서 가르치는 거하고 중량을 달아 봐라. 거게서 가르친 거 중량을 달아보고 비판을 해 봐라. 비판을 해 봐서 뭣이든지 보다 낫고 보다 옳은 것만 있으면 그것만 잡고 나머지기 그런 것은 몰라도 좋으니까 옳은 걸 잡고 난 다음에는 옳은 거 아닌 것은 다 틀린 거라.
천이나 만이나 다 틀려. 그래 가지고 도매금으로 다 틀렸으니까. 그러면 옳은 거 잡는 것이 제일 주장이요 제일 중한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건건이 옳은 것 그런 거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게서도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 해석이 한정 없지마는 보이지 않는 것은 뭐이 보이지 않는 것인가? 하나님의 계약 가운데 있는 것은 다 보이지 않는 것이라. 사람들이 다 계약 가운데 있는 거 계약을 무시하니까 보이지 안하지.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만이 보입니다.
그것만이 가치라.
그러기 때문에,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있고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데에서 나왔다” 이렇게 평가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사람들은 다 그런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계약을 믿나, 어떻게 하면 계약을 내것 삼느냐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래서, 이걸 알고 세상의 그런 사람들의 하는 흔적의 독서 이런 것을 하는 사람, 요거 알고 독서하는 사람은 인제 독서가 뭐이냐? 독서하면서 ‘요것도 속았다, 요것도 속았다.’ 자꾸 속은 것을 몇 개 말해. 자꾸 ‘요것도 속았다, 요것도,’ 자꾸 속은 걸 본 사람들은 이제 그 사람은 세상 지식을 가진 것이 자기에게 큰 무기가 됩니다. 왜 무기냐? ‘봐라, 아무것이는 이렇게 말했지? 이렇게 말했는데 이것도 이러니까 속았다. 이것 틀렸다. 아무것이는 이렇게 이렇게 속았다.’ 그걸 모르고 틀렸다 하면은 사람들이 안 듣지마는 그 모든 걸 다 말하면서 ‘요거는 요렇게 틀렸다.’ 이 과학자가 참 하나님 믿는 사람이 되면은 ‘너희들이 과학에 이와같이 오묘한 이것이 이렇게 오묘한 것이 어떻게 자연히 생겼느냐? 하나님이 지었다.’ 하나님이 지었다는 것을 깨달은 과학자는 굉장한 신앙을 가지고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부인해 버린, 미국에 있는 칠십이 노벨상 받은 그 과학자 그런 사람들은 참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그거는 부모가 공부시켜 가지고 완전히 죽여 버렸어. 알겠습니까?
이제 앞으로 요거 계속하겠는데 5장 1절에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처소를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그러면 이 장막집이 뭐이며 하늘에서 오는 처소가 뭐이며 땅에서 오는 처소가 뭐이며 또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기를 원한다고 했으니까 죽은 것은 뭣이며 생명은 뭣인가? 요것을 딱 구별해서 알게 되면은 우리가 속지를 않고 헛된 영화를 구하여 서로, 헛된 영광을 구하여 격동하고 투기하지 않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아침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거 요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생각해 보십시오. 보이지 않는 것은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건데 그거는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에 있는 거.
노아 시대에 과학이나 그런 건 다 보였지마는 하나님께서 홍수로 멸한다 하는 그 홍수는 보였습니까 안 보였습니까? 홍수는 보이는 것입니까 안 보이는 것입니까? 노아 홍수 시대에 모든 세상 과학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볼 때에 노아 홍수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믿는 노아에게는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노아에게는 보였습니다.
노아에게는 보이는데 세상이 안 보인다 하는 그것을 노아는 세상 모든 것보다 그걸 더 크게 여겼습니까 세상을 크게 여겼습니까? 어느 걸 크게 여겼습니까? 노아는 보이지 않는 그걸 더 크게 여겼습니까 세상에 보이는 온 세상에 가득찬 그런 걸 크게 여겼습니까? 세상에 있는 그것을 크게 여겼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보이지 않는 그 계약을 크게 여겼다고 아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크게 여겼어. 이 사람이 이게 믿음의 사람이라.
홍수 전에는 저거가 큰소리 했지만 홍수가 턱 오고 보니까 이제 노아가 큰소리 했지 나머지기는 다 매몰되고 다 멸살하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꼭 그때와 같이 하나님이 지금 시험하시고 계시는 오늘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헛된 영광을 구하여 공연히 거게 그 충격받고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 데에 샘을 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