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


선지자선교회 1982년 2월 28일 주전

 

본문 : 딤후 1:3-14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붙일 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이종교에서 말하는 모든 그 종교의 소망이나 또 모든 사상가들 모든 철학가들이  말을 하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은 근거가 다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 근원이  사람이 되어 사람으로 인하여 시발된 것들입니다. 성경은 그를 평가하기를  무너질 장막집이라 그렇게 말씀 했습니다. 그것은 다 폐하여 없어질 것들이요  영원한 형벌로 바꾸어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원이 자기로 인하여 시발됨이 아니고 어떤 인류로 인하여  시발됨도 아니고 영계나 우주에 어떤 피조물로 인하여 시발됨도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으로 인하여 시발된 구원인데 이 구원은 존재케 된 순위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영원 자존하셨고 그다음 순위로 우리의 구원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는 오후에 증거하기로 하고,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한 구원이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인데 은혜로 주시는 이 구원을  받는 우리들의 태도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몇 가지 여기에 기록한  것을 그대로 증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다는 아닙니다. 몇 가지를 여기에  본문에 기록한 대로 그것을 한번 더 성경을 본 그 위에 증거하려고 합니다.

 1장 3절에 보면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에는 청결함과 양심으로 섬겨야  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자기를 청결케 하고 자기  양심을 가꾸어 기르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저런  일들도 있지마는 하나님을 섬기는 태도로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를 정결케  하는 것, 자기 신앙양심을 꺾지 않고 신앙양심을 잘 가꾸어 이로써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섬기는 자의 태도인 것입니다.

 둘째로 4절에 보면, 내가 너를 보고자 하는 것은 네 눈물을 인하여  생각함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은혜를 자기가 깨달아 이  은혜에 지극히 크신 분이 더러운 나 위해서 하나도 아낌없이 다 투자해서 나를  구원해 주신 이 사랑을 생각하여 강퍅한 우리 마음이라도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또 이러하신 주님 앞에 은혜입고 내가 내 자신을 깨끗게 못한 것과  형제에 대해서 내가 너무 각박하게 한 이 일에 대한 원통함의 이 눈물도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물이 없는 이 마음으로 주를 대하는 것은 이것은 참 있을 수  없는 그 강퍅한 우리의 어두운 마음인 것입니다.

 셋째로 5절에 보면, 네 외조모 로이스의 마음 안에 있던 그 믿음이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그 믿음이 유전되어서 있었고 그 믿음이 너에게 있는 것을 내가  확신한다 했습니다.

 제삼자가 볼 때에 그 조모의 안에서 역사하던 그 믿음이 그 딸 디모데의  어머니에게 전달이 되었고 어머니 유니게 속에 역사하던 그 믿음이 그 아들  디모데 속에 역사하고 있는 것을 제삼자가 볼 때에 환하게 보여져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성자의 배후에는 성자 아버지가 있다는 것보다도 대개는 보면 그 배후에는  성모인 그 어머니가 있습니다. 성녀의 배후에도 보면 성모인 어머니가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그 배후를 더듬어 보면 다 믿음의 어머니들이 있었고 믿음의 그  할머니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신앙은 남반을 통하여 계대되는 것보다도 여반을 통하여  직계적으로 계대가 잘되고 남반을 통한 믿음의 계대는 가족적이 아니고  전체적으로, 그 남자의 신앙은 전교계에, 전세계에, 전시대에 크게 번져  유전되고 상속돼 나갔고 솔직한 직계 그 계통에는 다 여인들의 그 신앙을 통해서  전해졌습니다.

 "네 외조모 로이스 안에 있던 신앙이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신앙이 있었고 그  신앙이 디모데 너에게 전달해서 그 믿음을 네가 받아 가지고 믿는 것을 내가  확신한다" 말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어머니도 되어 있고, 할머니도 되어 있고, 또 남의 어머니도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신앙 하나가 바로 되면 거기에 소속한 모든 자녀들의  신앙이 바로 되어지고 나 하나가 신앙이 잘못 되면 아무리 내가 늙어서 죽을 때  후회를 해도 내 잘못된 신앙이 그들에게 유전된다는 이 무서운 말, 나 하나만  바로 하면 그다음에 자손들은 다 바로 되겠다는 참 간단하고 쉬운 기쁜 말,  우리가 하려고 하면 가장 좋은 쉬운 방편이요 또 우리가 이 책임을 생각할 때에  우리 하나가 잘못되면 기막히는 일입니다.

 넷째로 6절에 보면,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로 다시 불일듯 하기 위해서  내가 보고 싶어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속에 하나님의 주시는 이  은혜를 계속 뜨겁게 해야 되겠고 점점 더 뜨거워지게 해야 되겠습니다.

 불이라는 것은 아무리 큰 불이라도 탈 재료인 섶이 없으면 그 불은 꺼집니다.

작은 불이지마는 섶이 많으면 그 불은 큰 불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을 때보다 우리의 노력기 큼에 따라서 그 은혜는 커질 수 있고  아무리 큰 은혜를 받아도 우리의 신앙적 노력이 없으면 섶이 없는 불이 꺼지는  것처럼 받은 은혜가 삭아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이렇게 해야 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참 복있는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미국에 갔다 온 사람들 말을 들으니까 거기는 어떻게 땅이 넓고  사람이 적어서 우리로 말하면 한 백 채나 집을 짓고 몇천 명 살 수 있는 넓은  땅에 겨우 집 한 채 있고 남은 것은 정원이고 그 안에 들어 사는 사람은 그저  두서너 사람 들어 살고 있고, 성같이 울을 해 놓고 집 안에서부터 차를 타고  달아나니 참 사람 만나기가 어려워서 그립다고 그렇게 말합디다.

 여기에서 간 사람들이 포부를 가지고 '내가 거기에 가서 신앙들의 불을 좀  붙여야 되겠다' 하는 그 불붙은 하나님의 종들이 가 가지고는 불을 붙이려고  해야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야지? 무너질 장막이 어떻게 발달되고 필요성을  느꼈든지 무너질 장막집 마련하는 데에 전부 시간 마음 정신 다 기울어지고  보니까, 마음에 불은 붙었지마는 사람을 만날 수가 있어야지요? 만나면 그저  인사하고 난 다음에는 '아이구, 미안합니다. 바빠서' 자기도 또 약속한 시간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불을 붙일래야 불을 붙일 수가  없더라.

 그 사람도 거기에가 가지고 3년이 지나면 불 다 꺼져버리고 그만 그 사람도  썩을 장막에 전부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썩을 장막이 암만 구비해 봤자 그것도 찍해야 송장 위해서 있다가  송장되면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이런데 우리나라는 나가면 얼마든지 사람을 참 지겨울 만치 만납니다. 제가  경험한 대로는 일도 무엇도 만나 가지고 짜증 안 나는 데 사람 만나는 데 제일  짜증나는 실수하기 쉽다. 너무 많이 만나니까. 미국같은 나라서에는 하루 종일  만나려고 애를 쓰고 여러 날 힘을 써도 만나보기 어려운데 하루종일 사람을 자꾸  만나고 만나니까 나중에 사람 만나는 것이 귀찮게 될 만치 그렇게 만날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를 만날 때마다 나에게 믿음의 불을 일으켜 준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내 신앙이 얼마나 뜨거워지고 커지겠습니까? 또 내가 그렇게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의 믿음을 불을 일으켜서 그 믿음을 다문 얼마라도 뜨겁게  간절케 해 주는 이 일을 내가 했다고 하면 하늘나라 가서 볼 때에 주님 앞에  얼마나 그 상이 크겠습니까?  우리는 피차에 사람을 만날 때에 믿음의 이 불을 뜨겁게 해 주는 이 일이  아니면 만날 필요가 없습니다. 사업적으로 만나도 약속적으로 만나도 '나는 오늘  이 형제를 만날 터인데 어떻게 해서 그분의 신앙을 다문 얼마라도 덮혀서 뜨겁게  해 주고 그 신앙을 식히는 이런 죄를 범하지 아니할까?' 하는 이것이 주님의  정하신 이 구원을 받는 자로서의 태도 중에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만날 때에 '오늘 이 사람을 만나서 내가 무슨 수입을, 돈 수입을, 무슨  지위 수입을, 무슨 사업의 수입을 할까?' 이것만 생각하고 '내가 어떻게 하면  이분에게 만나서 땅에 있는 것을 손해보지 아니할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은 다  육신에 속한 사람입니다.

 정말로 주와 복음을 위하여 그 형제의 구원을 위해서 손해보는 것도 우리는  꺼리지 맙시다. 손해본 것 주님이 여러 배 백 배로 갚아 주시겠다고  보증했습니다. 안 갚아 줘도 당신이 우리에게 하신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고  깨달았으니 우리는 있는 대로 다 못 줘서 탈이지 거기에 대해서 옹졸하고 인색할  필요가 없는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너를 만나려는 것은 네게 있는 믿음을 다시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에 '그 믿음에 손해 보일까? 어떻게  하면 그 믿음을 뜨겁게 해 줄까?' 아브라함은 소돔 왕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께  대함을 뜨겁게 해 주기 위해서 수많은 재물이 자기에게 정당성있게 자기  것이지마는 실낱끝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역력히  아시고 다 갚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많이 갚아 주셨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은 내가 의뢰하는 자를 내가 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복음을 위해서 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주님이신 하나님은 이러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다섯째로 7절에 보면, 주님이 믿는 사람들에게 주신 마음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이 두려워하는 그런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세상에 자연  은총의 것 이것이 잘 건설되지 않을까 하는 그 두려움이 세상 사람들의  두려움인데 그 두려움이 우리에게는 없어져야 됩니다.

 세상과 세상에 속한 것을 이것이 잘 안 될까 잘되도록 하기 위한 두려움도  없어져야 되고, 이것이 잘 보존되고 없어지지 않게 하려는 이 두려움도 없어져야  되고, "능력과 근신 함이라" 능력과 근신 함이라. 네게 이미 주신 자연 은총  이것을 하늘의 것으로 바꿔, 썩을 것으로 썩지 않을 것을 바꾸고,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바꾸고, 욕된 것으로 영광스러운 걸 바꾸고, 혈육의 것으로 신령한  것을 바꾸는 이 일에만 쓰라고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에게 와 있으니 이 능력  가지고 무너질 장막집을 하늘의 처소로 덧입는 이 일에만 전심 전력 기울이고 이  일 안 될까 하늘에 속한 근심 하늘에 속한 두려움,  이것으로 바꾸어 가지고 살면 땅에 있는 장막집 같은 그것은 하나님이 적절하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책임맡았으니 세상이 위협을 '너 그리하면  이것 땅에 속한 것 절단 난다.' 위협 줘 봤자 상관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이 없어지는 무너지는 그것을 하늘의 것으로 바꾸어지게 하는 그런  찰나요 그 시점이기 때문에 땅의 것이 무너지는 것이 하늘나라 것으로 바꾸기만  바꾸면 유한한 것을 무한으로 바꾸는 것이니까 없어진다는 거기 대해서 아무  두려움이 없는 것이 우리 믿는 자의 마음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능력과 근신하는 마음이라" 조심하는 것. 무너질  때에 하늘의 것으로 바꾸지 못할까? 또 땅에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을 어리석게  내가 그것 마련하는 데 힘을 기울이는 이런 어리석은 자 될라, 하늘의 것으로  바꾸는 것만 나 할 일이요 이럴 때에 땅의 것은 당신이 여러 배 백 배 적절하게  주신다고 했기 때문에 나 할 일 하나님이 하실 일 분담이 다른데 공연히 헛되이  무거운 짐을 지고 그 어려운 멍에를 메고 헛되이 수고하는 이런 것을 다시  되풀이할까 조심하고 개조받지 못할까 조심하는 이것이 믿는 신자의 마음인  것입니다.

 여섯째로 8절에 보면, 내가 주를 증거하는 것과 이 복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 복음 역사 때문에 뺨을 맞고 조롱을 받고 욕을 얻어먹고 주의  구원을 그들에게 주기 위함을 인해서 맞기도 하고 욕도 천대도 멸시도 받는 여기  주일학교 반사들, 권찰들, 깨달읍시다.

 이것을 인해서 내가 수없이 맞고 지금도 옥에 갇혀 있는 이것을 너희들이  부끄러워 여기지 마라. 부끄러워 여기지 마라 그들이 몰라 그렇지 멸망받는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리석어 속는 자를 구출하기 위해서 주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 멸망 속에 있는 형제가 구원되는 이 구원을 위해서 내가 그들에게 역사할  때에 그들이 알면 감사해서 견디지 못하겠지마는 그들이 몰라서 핍박하고 대적을  할 때에 내가 복수성으로 '핍박하고 대적하니 멸망 가운데 멸망받으려면 받으라'  하고 던지지 않고 그래도 핍박하고 대적해도 몰라 그런 것이니 끝까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박해받는 이 박해가 뭐이 부끄러우냐? 무엇이 부끄러우냐?  부끄러워하지 말고 너희들도 이 복음과 주를 위해서 고난받는 일을 하라 하는  것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했습니다.

 일곱째로 9절과 10절에 보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대로 되는 구원이  아니요 이 구원은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완전의 구원이기 때문에 인간 행위는  암만 해도 이 구원을 얻는 데에는,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근방엔 가지도 못한다.

근방에 가지도 못한다. 죽도록 충성 다해도 이 구원을 이루는 재료로는 만에  하나도 쓸 게 없다.

 다만 우리가 죽도록 충성하는 것은 주님이 혼자 이루어 공으로 거저 주시는 이  구원을 받는 자의 태도로써의 합당한 태도 이것이 죽도록 충성하는 것이다. 이  은혜를 받는 태도에 불과하고 이 은혜를 감사하는 그 감격에 하나의 우리의 그  행동에 불과한 것이지 이 행동 가지고 이루는 구원이 아니다. 이 측량 못할  지극히 큰 구원을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 이루어 주시니 우리는 이 구원을 받는  자로서의 합당한 감사, 받는 자로서의 합당한 성의, 받는 자로서의 합당한  그분에게 대한 모자라지마는 충성, 이것을 우리가 가져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여덟째로 11절로부터 14절까지에, 나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그분을 내가 알고, 내가 바라보는 그분이 어떤 분인 것을 알고, 내가 약하지마는  어리석지마는 그분을 의지함으로 담대히 세상 걸음을 걸어가는 내가 의지하는  그분을 알고, 썩어질 장막 이것을 훌떡 벗을 때에 마귀에게 내 주지 않고 벗을  때에 진리에게 맡기고 영감에 맡기고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에게 맡기는  것으로 끝을 마친 이것을 당신이 그날까지에 잘 만들어서 크고 영화롭게 만들어  하나님으로서 참 만족할 수 있는 것으로, 모든 인간 내 원수까지도 감사하고  기뻐 만족할 수 있는, 만물이 만족할 수 있는 그런 자로 만들어 주실 것을 내가  확신한다.

 이러기 때문에 주와 복음을 위해서 나의 당하는 어려움이나 갇힌 이것은 내가  이것을 오히려 생각지 못하고 마음에 무익한 종이라, 너무 주님은 이러한데 나는  주께 대해서 부족한 것에 대해서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마음이 눌리는  탄식뿐이다 하는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거저 주시는 이 구원을 아는 가운데에서 이 은혜받는 자의 태도로써 합당한  마음의 태세 몸의 태도를 우리는 가지고 당신을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말한 것이 이 구원을 바라보는 자들의 행동 중에 일부분을 본문에 기록한 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축도)  경영은 사람에게 있으나 그 일을 이루시는 이는 오직 주이심을 말씀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든 일을 주님이 합당하게 여기시는 일은 우리는 보잘것  없지마는 주님의 공로를 인하여 성령님께서 맡아 축복하사 성령의 결실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이루어 영원히 주에게 영광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지금부터 천거받은 종들에게 성령으로 깨끗게 해 주시고, 또 오늘 주일부터  다시 새롭게 한 연보 이 방편에 너무 무성의한 것을 자복하옵고 성심 성의를  원하시는 주 앞에 성심을 기울이는 보다 나은 방편이 될까 하여 저들이 본받은  것이오니 주께서 영광되도록 각자의 마음에 감화 감동시켜 주의 구속을  기념하는, 있는 걸 기울여 주님 원하시는 인간 구원에 바쳐 위로 주를 기쁘시게  하고 옆으로 형제를 사랑하여 영생의 구원을 주는 사랑의 사람들로 이 시간도  변화시켜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감화  감동하심이 항상 저희들과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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