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에게 주신 큰 구원


선지자선교회 1989년 5월 7일 주새

 

본문 :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오늘 공과도 4공과 그대로 가르칩니다.

 본문은 '에베소서 6장 3절'  제목은 '우리들에게 주신 큰 구원'  요절은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개 복 주시되' 하는 것이  요절입니다.

 큰 구원 첫째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 둘째로는 '우리들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죽지도 쇠하지도 아니할 부활받을 우리들', 셋째는 '영원토록 영생을  받아 가진 우리들', 넷째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 화평을 이루는 제사장직 가진  우리들', 다섯째는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충만케 해 줄 선지자직을 가진  우리들', 여섯째는 창조주의 단일 통치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는 왕직을 가진  우리들'  '이 여섯 가지 받은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면서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복받는 유일한 법칙입니다' 학생들에게는 이 이상 해석을  해 주는 것은 지난 주일에 간단하게 한번 허락을 했습니다. 이제는 학생들에게  해석을 하다 보면 외나 강령되는 그 은혜를 그만 오히려 지엽적인 은혜로 이렇게  바꾸어서 말하기 쉬우니까 이 공과 본문대로 그대로 학생들에게 깊이 인식시켜서  속에 박혀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이 복음으로 자기가, 이 복음으로, 이 도리 말이요, 이  도리로 자기가 은혜받은 것만치 학생들에게 전달할 수 있고 또 자기가 된 것만치  전달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안 된 것을 학생들에게 암만 말해도 되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공과를 자기가 실행해서 거게저 체험의 은혜를 받고  그 경험의 은혜를 받고 체험의 은혜라 말은 이 말씀대로 행하면 자기 몸에  증거가 있습니다. 체험이라 말은 자기 몸에 증거가 있다 말이오. 이 말씀대로  실행하면 자기 몸에 증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암만 말하고 뭐 이 일을  알리도록 하기 위해서 아무리 글을 써 가지고 책을 많이 만들어 그걸 자기가 다  읽었다 할지라도 안 됩니다. 요 기독교는 꼭 실행으로써 되어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해 놨기 때문에 자기가 행하는 것 외에 다른 방편으로 이 도리를  자기가 깨닫고 이 도리가 나타내는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항해서 하나님을 밀어내고 자기가 하려는 것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요렇게 딱  선포하시고 작정하시고 요렇게 계약에 선포를 해 놨기 때문에 아무도 이를  가감을 못 합니다.

 어제 아침에도, 믿음은 소망하는 것들을 실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외부의  말이고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실상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했을 때도  '천지야 이루어지라' 이라니까 됐습니다. 또 땅으로 모든 땅에 속한, 지금 우리가  알지 그때는 아무것도 없을 때인데 '땅에 속한 식물들이 나라' 하니까 그대로  났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신 그 말씀은 곧 그 말씀이 실상입니다.

 그러기에 요 실상을 자기가 받는 데는 믿음으로만 받는다, 믿음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사는 요 세 가지를 말했습니다. 그 외에는 받는 방편이 없습니다.

 이래서 자기가, 성경에 보면 '목자가 앞서 가면 양떼가 뒤에 따라 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복음 l0장에 보면은. '목자가 앞서 가면은 양떼가 뒤에 따라온다'  양이 목자보다 앞서 가는 일은 하나님께서 절대 없는 것뿐 아니라 절대 안  되도록 그렇게 선포해 놨습니다.

 하나님이 선포해 놓으신 그 계약은 하나님이 그렇게 딱 정했기 때문에 선포해  놓으신 그것이 변동될 때에는 하나님이 변동되는 것이요 하나님이 범죄하는  것이요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딱 한번  말씀하시면 그대로 되고 또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이 곧 말씀이나 실상이나  하나입니다. 말씀이 실상이요 실상이 말씀으로 나타났습니다. 실상이 말씀으로  나타난 것이지 말씀으로 실상을 만드는 것 아니오.

 우리가 우리 구원 이루는 것은 우리가 만드는 것 하나도 없습니다. 당신이  만들어 놓으신 것을 그것을 우리가 그저 공으로 받는 것이오. 공으로 받는데 받는  방편은 뭐이냐? 믿음이라. 믿음이 뭐인데?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고  당신이 계약으로 이렇게 선포하신 이것을 자기가 알고 인정해고 그만 그 실상을  자기가 받아 누리는 이것으로서 누리면 됩니다.

 받아 누리면 되고 받아 누리면 자기가 확실히 알아질 것이오. 받아 누리면  실상을 자기가 접하게 되고, 실상을 활용하게 되고, 실상의 혜택도 자기가 입게 될  것이고, 실상으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모든 이루어짐을 자기가 체험하게 됩니다.

 이래서, 공과를 읽고 행하는 가운데서 체험을, '체험의 지식을 가지고' 하는 체험  지식이라 말은 자기 몸에 증거받는다 그 말이오. 자기 몸에 사람이 자기 몸에  무슨 문둥병이 들었다가 나았으면 누가 뭐 나았다 안 나았다 말할 것 없이 나은  걸 자기가 체험할 수 있지 않습니까?  혈루증 나은 여인이 혈루증 나은 것은 자기가 뭐 옷 벗고 보지 안해도 그만  나은 것을 자기가 몸으로 알았습니다. 체험이라 말은 말씀대로 이와 같이  인정하고, 계약을, 선포해 놓으신 이 계약을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행하면  몸에 증거가 나타난다 그 말이오.

 체험이라 말은 몸에 나타나서 환하게 알게 된다 그 말이오. 또 경험이라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그대로 하면 자기가 경영하는, 모든 경영하는 접하는 모든 일의  순서, 활동의 순서 일의 순서 그것은 자기 몸 밖에 있는 모든 일들을 자기가  토해서 알게 된다 그 말이오. 체험이라 말은 자기 몸에 증거받는 것이고 경험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경영하는 이런 모든 역사에서 자기가 환하게 증거를 받는다 그  말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체험을 받고 경험을 받아 가지고 전하면 그 학생에게 이 도와  경험과 체험의 그 결과가 같이 전해지고 자기가 말로만 전하게 되면은 말만  전해지지 그 실상은 전해지지를 않습니다. 내가 실상을 이루어 말과 실상을  가지고 전할 때에 말과 실상이 전해지고 말과 실상을 가지지 안하고 말만 전할  때에는 말만 전해지니까 그 실상이 이루어지지 안하니 하나님의 도를 들어도 그  사람 몸에 변화가 없지 그 사람의 모든 생활에 변화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말로 가지고 자꾸 이렇게 말만하면 다 되는 줄 아는 이 사람을 암말도  하지 안하고 자꾸 목회 나가라 합니다. 목회를 하라 합니다. 목회를 하라 하는  이유는 네가 남의 등불의 그 빛에 네가 밝은 듯이 하고 있지마는 네 자체는 빛이  없기 때문에 네가 혼자 가서 해 봐야 그 빛이 있다 없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자기가 가서 하니까 뭐 불한당 모양으로 다른 사람이 해 놓은 것 전부  제가 한 양으로 하면 되는데 단독 목회를 딱 나가 놓으면은 제가 한 것이라야  그게 나타나지 다른 사람이 와 해 줍니까?  이러니까 '이라면 안 되겠구나 안 되겠구나' 해 가지고 거게서 비로소 자기는  체험하게 되고 경험하게 되고 그라고 나니까 교인들이 또 그만침 되어지고  이러기 때문에 이 사람은 부득이 체험하고 경험하는 그것이 뚜렷이 나타나는  그런 길을 걸어가도록 해야 되겠다 해 가지고 다 모두 엔간이 되면은 목회를  단독 목회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l0장에 보면은 '목자가 앞서 가면 양떼가 뒤에 따라온다'  이랬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앞서 가지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가라고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그게 가지지 아니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체험하고 경험하는 그 지식을 가지고 양떼들을 가르치면 자기  체험하고 경험한 것이 그대로 다 가는 것은 아니지마는,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이라' 하는 것은 목자가, 목자가 좋은 것을 자기가 행해 가지고 있으면 좋은  것도, 그게 뭐 목자가 가진 백 프로가 다 가는 것이 아니고 많이 가면 한 십분지  일이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은, 십분지 일이 가면 많이 가는 것이오. 좋은 것은  십분지 일이 가면 많이 가는 것입니다. 나쁜 것을 고치는 것은 그것도 역연  십분지 일이 고쳐지면 다행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것은 목자가 하나 하면 그 양떼에게는 한 십 배나 나쁜  것이 돼집니다. 좋은 것은 목자가 열 하면 양떼에게 하나가 미쳐가게 되는, 그런  프로수를 우리가 정할 수는 없지마는 대략 말하면 그런 것입니다. 이러니까 목자  된 대로 양떼 된다 그 말이오.

 '일곱 별과 일곱 금촛대의 비밀이라' 하는 것은 잘 알기 쉬운 게 아니고 알기  어려운 것이 있다, 알기 어려운 것이 뭐이냐 하면은 목자의 나쁜 것은 양떼는 십  배나 더 나쁜 것을 하게 되고 목자의 좋은 것은 양떼가 잘 따라 해 봤자 십분지  일 정도 따라 한다. 그러기 때문에 실은 그 원인은 나쁘고 좋은 것은 전부  목자에게 다 근거되어 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을 합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 아들.' 이것도 우리가,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됐고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됐는 이것을 뭘로  가지고 알아야 되느냐 하면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알아야 됩니다.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아는데 하나님의 이 크신 것을 예를 들어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무슨 부자만치 큰 하나님으로 알면은 자기는 부자의 아들이, 됐으니까  그만큼 자기는 혜택을 입어서 그만한 자신이 있을 것이요, 또 아버지가 그 일국의  제일 으뜸이 되는 그 아버지를 자기가 모시고 자기의 아버지 됐다는 것을 알  때는 그 일국에 제일 권세 있고 부강한 자의 아들이 되는 자기가 실지로 자부를  가지고 있게 됩니다.

 이래서, 아버지의 크심이 자기가 인정되면 인정되는 것만치 아들에게는 그만한  자신감과 그만한 자체인 것을 자기가 알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아버지는 예를 들면은 세상 아버지는 자기는 아버지가 주먹덩이만한데 자기는  아버지가 지금 지구 땅덩어리만치 그렇게 크다고 지내치게 그 과대평가를 해서  그래 아는 그것은 실상은 맞지 안하지마는 그래도 자기 주관적인 평안을 가지게  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단순하기 때문에 천하에 자기 아버지가 제일 권리 있고 제일 큰  줄 알기 때문에 뭐 아버지면 다라 이렇게 생각하고 사니까 그 아이들은 세상에  무슨 전쟁이 났다 뭐 났다, '암만 나도 우리 아버지면 된다' 아버지가 천하에 제일  유일의 권세가 있는 아버지로 아는 그 아이는 그 지식을 가지고 그렇게 평안을  누립니다. 그 평안을 가리켜서 주관적 평안이라 그랍니다. 실상은 그렇지  안하지마는 자기는 그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 주관적으로서는 그런 아버지  아들이라는 자부심과 그런 자신감을, 행복감 위대감을, 자기가 가지게 됩니다.

그러나 실상이 그렇지 않기 때문에 실지를 당해 보니까 이렇츰 큰 줄 알았는데  아버지의 그 권한이 아주 그렇게 작은 줄을 몰랐고 그라면 그때 가서 낙망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식을 키울 때에 한 서너 살까지는 저거 아버지가 제일인 줄  알고 어머니 아버지면 뭐 세상에 못 할 것 없다. 이렇게 다 알고 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평안을 가졌다가 차차 차차 그게 커서 사회를 접해 보니까 아버지가  너무도 제한된 게 많고 권력 부족한 것 부족한 점이 많으니까 그만 이렇게  나가다가는 차차 차차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지는 것입니다. 떨어지면 그렇게  자신감이 자꾸 줄어져 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어떠하심을 그걸 크심을 자기가 알고  인정하는 것만치 자기는 행복되어지고 위대해집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크심을  알므로 자기는 점점 커지게 되고 아버지의 성결하심을 알므로 자기는 점점  성결해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신데 그 아버지의 크심을 우리가 뭘로 가지고 알  것이냐? 신구약 성경 가지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의 크심을 가르쳐  주는 것이 두 가지 방편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두 가지 방편으로 가르쳐 주시요.

하나는 신구약 성경 말씀 가지고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어떠하신 분이라, 크신  분이라, 그분은 진실한 분이라, 완전한 분이라, 능하신 분이라 하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성경이 가르치고 난 다음에는 또 뭘로 가르쳐 주느냐? 성경이  가르쳐 준다 말은 특별 계시로 가르쳐 준다는 말이오. 또 특별 계지로 가르쳐  주는 거 그 외에 또 하나 가르쳐 주는 거 있으니까 그거는 뭐이냐 하면 자연  계시입니다. 자연 계시. 이 세상에 보면 개미 아버지 가진 아들도 있고, 또 이런  무슨 호랑이 아버지 가진 아들도 있고, 또 코끼리 아버지 가진 아들도 있고, 또 뭐  동회장 아버지 가진 아들도 있고, 또 대통령 아버지를 가진 아들도 있고 뭐  세상에 아버지가 보니까 주르르 세상 자연 계시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걸  보니까 자손 계시를 보니까 아버지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종류가 얼마나 많고 종류마다 그 권한이 다 다릅니다.

 이런데 거게서 자꾸 연구하니까 '그러면 우리 아버지는 동장만 하나? 사장만  하나?' 자꾸 이렇게 성경에 가르친 아버지를 찾아 가지고 비교를 해 봅니다.

비교를 해 보면은 땅에는 그런 게 없어. 땅위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분이  있습니까? 이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가운데서 자기가 자꾸 커지고, 자기에게  확신이 생겨지고, 담력과 자부심이 자꾸 생겨지고, 자기에게 점점 그 확신과  권위가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이라는 것은 특별 계시 자연  계시 두 가지 계시로, 계시라 말은 우리는 모든 걸 똑똑히 모릅니다. 아는 게  하나도 없소. 실은 자기대로의 아는 것이지 아는 게 하나도 없어. 다만 신구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다, 하나님이 열어 보여 주신다, 계시라  말은 하나님이 열어 보여 주신다 말인데 하나님이 열어 보여 주시는 그 방편이  둘이 있어. 하나는 특별 계시고 하나는 일반 계시 자연 계시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배워야 되겠고, 신구약 성경에서 배우게 되면은  그것은 자기가 보지 못한 거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그저 하나의 논리에 그치고  실감이 없습니다. 실감 없는 것은 이 자연 계시를 자기가 보고 자연 계시에서  배우면 실감이 생겨집니다. 또 자연 계시만 가지고 하는 사람들은 특별 계시인  근본을 모르기 때문에 뿌럭지가 없습니다.

 세상에 만물 박사가 아무리 만물에 대해서 아주 통달한 것같이 떠들어 쌓아도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 무에서 만물을 존재케 한 그 원인을 모르면은 그 하는  말이 전부 반거짓말이요 허무한 말이요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신앙 생활도 모든 조건 조건이 다 특별 계시에서 자기는  배우고 또 자기는 자연 계시에서 배우고, 자연 계시에서 배워서 모르는 것은 특별  계시 가면은 똑똑히 알려 주시고 특별 계시에서 배워서, 모르는 것은 자연 계시에  가면은 잘 알게 됩니다. 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라 하는 이 사실에 있어서는  세상에서 아들 중에는 어떤 아들이 제일 행복되냐? 아들을 쭉 끌어대서 자꾸  이래 볼 때에 자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된 것이 얼마나 행복되다는 것을  자기가 깨닫게 됩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또 우리는 벌써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은 언제 가졌느냐? 중생될 때에 그때 영생 가졌습니다. 이  중생될 때에 영생 가졌다는 이것도 아주 이것이 그렇게, 들으니까 쉬운 말  같지마는 딴데 나가 보면은 또 그것을 인정하지 안하니까 달라진다 그 말이오.

 제가 지금으로부터 한 삼십 한 팔년쯤, 삼십 한 팔구년쯤 됐는데, 그때 제가  고려신학교에 다녔었는데 그때 고려신학교에 영생을 전부 앞으로 하나님께  영생을 받을 것으로 그렇게 다 알고 교리를 알았고 세계의 교리가, 뭐  고려신학교뿐 아니라 세세의 모든 조직신학의 교리가 다 영생을 이거 받을 걸로  이렇게 알았지 영생을 지금 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를 안했었습니다.

 그랬는데 그때 오종덕 목사님이 어떤 장례식에서 그런 말 한번 했습니다. 할  때에 '우리는 지금 영생을 가졌다. 죽는 것이 아니다.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이  죽는 것은 이 방에 있다가 저 방으로 가는 것, 또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이제  헌옷을 내 주는 것은 헌옷 내 주면 뒤에 새 옷으로 완전히 바꾸어 주기 때문에  바꿔입기 위해서 그런 것이지 우리가 죽는 것은 아니다.' 하는 그 말을 그때  장례식 때에 오종덕 목사님이 처음으로 말했습니다. 고려신학교에서 처음으로  말하는데 그래서 그것을 모두 다 사람들은 많은 논단이 그때 학생들이 있었고,  영생을 이미 가졌다는 것을 내가 고려신학교 와 보니까 학생들이 그것을 하나도  믿지 안했습니다. 하나도 믿지도 안하고 뭐 교수들도 다 믿지 안하고 이랬는데  지금은 이제 영생을 가졌다는 것을 또 우리 진영에 말하지 앞으로 가면 '다  부활하면 영생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현재 영생을 가진 이 사실을 믿는 그  진영이 많지를 안합니다.

 우리가 이 총공회라는, 이 총공회라는 것이 왜 그래 되느냐? 장로교에서 같이  있을 수 없어, 장로교에 같이 있으니까 그들과 대립이 돼서 장로교에서 우리를  틀렸다고 쫓아내서 나온, 그 쫓겨나온 그 원인인 장로교 교리와 다른 그 교리와  행정 이 두 가지 때문에 이제 쫓겨나온 그것이 곧 총공회기 때문에 총공회라는  것은 장로교의 교리와 신조와 같은 것도 있지마는 장로교의 교리와 신조와 다른  것 때문에 이렇게 쫓겨나온 것이요, 다르다 하는 그 다른 점을 책임지고, 책임지고  내 이름을 가진, 우리 총공회는 요렇게 요런 교리와 신조와 행정을 가졌다 하는  것을 말을 하고 그 다른 교리와 신조에 책임을 진 그 명패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제 총공회를 이렇게 말한 것은 뭐이냐 하면은 일반 장로교  교리와 신조와 다른 그것을 우리가 슬그머니 다른 것 가지고 뒤에 어떤 기회에  가 가지고 '아이구, 우리는 뭐 또 그리 된다 저리 된다.' 그렇게 하지 안하고 자기  이름에 똑똑히 나는 요런 교리, 요런 신조, 요런 행정을 가졌다는 것을 명패를  가지는 것이 총공회라는 그 이름인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영생을 가졌다. 그러기 때문에 영생을 가진 그 영은 다시는  범죄하지 않는다. 범죄하면 또 죽지 않습니까? 영생을 가졌다는 말이나 다시  범죄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같은 말인데 한국 교회도 이 OO노회는 한국에서  제일 큰 노회였습니다. 지금은 또 다른 노회도 있지마는 전국에 제일 큰 노회가  OO노회인데, OO노회인데 그 노회에서 저를 정죄를 했습니다.

 '이 백영희 목사라 하는 사람은 중생된 영은 절대 범죄하지 않는다고 이렇게  주장한다.' 이래 가지고 그 노회적으로 결의를 해 가지고 거게 대한 그 촬요,  결의한 촬요라면은 그 결의한 결의문이 다 그때 낸 건데 그것을 내가 지금  가지고 있습니다.

 OO에서도 그렇지, 전국에서도 그렇지, 전국에 신학교마다 '중생된 영을  범죄하지 않는다는 이런 말 할 수가 있느냐?' 하고서 이래 가지고 다 이단으로  정죄했는데 OO교파에서도 정죄했습니다. OO교파에서도 정죄했는데 지금은  그들이 잘못됐다는 것을 후회를 합니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것이 일반 장로교와  다른 교리 때문에 우리가 미움받고 다른 교리 때문에 우리가 정죄를 받고 이렇게  쫓겨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 우리가 총공회에 이 복음과 장로교 복음이 다르다 하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암만 총공회에 소속해도 언제 배신해도 배신할  사람입니다.

 또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안식교 또 루터파 이런 일반 예수교와 장로교  교리가 다르다는 것을 자기가 모르는 사람은 장로교에서 다른 교파로 가게  됩니다. 왜 다른 교파는 너르고 쉽습니다.

 또 예수교라 하는 것은 이것은 일반 종교와 다르다 하는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예수교인이 나중에 가서 개종도 하게 됩니다. 자기 종교를 바꾸게 됩니다. 이제  예수교라는 건, 모든 종교가 세상에는 뭐 여러 수백이 되고 수천이 되지마는  예수교는 그들과 합할 수가 없고 그들과 다른 요것을 아는 사람이라야 끝까지  예수를 믿고, 또 예수교 중에서도 장로교는 요거는 일반 예수교와 다르다는 다른  요 교리와 신조를 아는 사람이라야 끝까지 장로 교인이 되고, 장로 교인에서도  총공회는 이거 교리와 신조가 다르다는 요 다른 점을 아는 사람이 그것이  총공회에 속한 교인이요 교리와 신조를 버리고 변질되지 아니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 가진 것, 영생 가진 것도 이것도 성경이  영생 가졌다 하지마는 영생이라는 것이 없으니까 성경이 가르친 것만 가지고는  자기가 확신이 생겨지지 안하니까 또 자연 계시에서 배웁니다. '그러면 보자. 이제  사람이 므두셀라는 천 세 가까운 이래 살았지마는 천 살을 살면은 천 살 산 지  그 다음 해는 죽지 않느냐? 그러면 자꾸 세상에서 명 해나 사느냐?'  세상 자연 계시에 모든 생명들을 보니까 하루 살다 마는 것도 있고, 사흘 사는  것도 있고, 일 년 사는 것도 있고, 뭐 팔십 년 사는 것도 있고, 최고가 구백,  므두셀라가 몇 살 먹었어? 구백 얼마? 구백육십구 세. 구백육십구 세 똑똑히 알면  그라면 삼십일 세만 더 있으면 천 살 사는구만. '천 년을 살면 어짜노?' 천 년  살아도 그 다음에 또 세월이 있으니까 천 한 해에는 죽겠습니다.

 이런데 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이 영생의 가치도 자꾸 이렇게 자기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 뭐 이만해도, 이만해도 온 천하에 있는 축복 다 똘똘 뭉쳐도  요거 하나의 가치도 비중이 되지를 아니합니다.

 우리는 영생 가진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모르면은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생명이 있고 둘째 아담에게서 받은 생명이  있는데 첫째 아담에게서 받은 생명은 이것은 정죄받아서 죽어가는 생명이오. 하루  살면, 하루 살면 어찌 됐습니까? 하루 살면 하루 살았습니까 하루 죽었읍니까?  하루 살면 하루 죽었소. 자꾸 죽어가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에게 받은  이 생명으로 살면 하루 살면 죽었습니까 영생이 더 됐습니까? 영생으로 커집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 믿은 이후에 사는 것이 영생이 점점 크고 크고 하고  점점 충만해지고 견고해지고 아주 강해지고 굳세지고 어떤 사람은 예수 믿는다  하지마는 영생 받은 영생 가지고, 영생을 가지고 살지 안하고 죽음 가지고, 첫째  아담의 생명으로 살기 때문에 나중에 다 살고 보니까 다 죽어 버렸고 남은 거  없소. 꼭 한 자리서 같이 살지마는 한 사람은 영생 가지고 영생이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은 세 하나도 없어. 이러니까 같은 자리에 있지마는 하나는 들려  올라가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 그 말은, 죽음으로 살았으니까 죽었으니까  그거는 다 지옥 가야 되지 않습니까? 영생하는 것을 영생을 누가 죽이겠소?  이래서, 영생 가졌다.

 또 우리는 영원히 쇠하지도 늙어지지도 병들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예수님의  부활체로, 예수님이 지금 부활하셔 가지고 부활한 지가 벌써 근 이천 년이 돼서  밤낮으로 우리와 같이 계시지마는 눈에 보입니까 어짭니까? 그 전지 전능자로  지금 부활하셔 가지고 나타내 보일라면 보이고 이 중간에도 또 바울에게도  나타내 보였고 다른 사람에게도 필요할 때는 나타내서 '나는 영육이 있다' 이렇게  보이지마는 '음식 좀 가져오라 먹어보자' 또 안 먹으면 안 먹고 이런 신령한  몸으로, 신령한 몸이라는 신령한 것이라는 것은 시공을 초월한 것이고 모두가 다  이 피조물을 초월한, 피조물의 요소가 아닌 창조주의 완전 요소로 되어진 것을  가리켜서 신령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니까 신실한 몸으로 부활한다, 부활 이것도 자꾸 이것을 자수해서 부활을  알면 부활을 아는 자가 뭣 때문에 죽음에 공포감을 가지겠소?  부활을 아는 자가 이 세상을 떠나서 세상 떠나는 것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예수님은 부활을 아셨기 때문에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였으면,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였으면 내가 이 세상에 있는 걸 기뻐하느냐 십자가 못박혀 죽는 걸  기뻐하느냐?'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들이 나를 사랑하였으면 내가 가는  것을, 가는 것을 기뻐하였으리라'  왜? 나보다 아버지자 크시기 때문에, 더 커지고 더 완전해지기 때문에 이제  너희들이 기뻐하지마는 그걸 육덩이로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십자가에  못박힌다 하니까 너희들이 낙심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있다 그 말이오.

 이 부활, 우리는 이제 부활받을, 신령한 몸으로 부활받을 이 사실을 자꾸 자기가.

알고 믿고 체험을 하고 자꾸 또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된다 그거요.

 그라고 난 다음에 우리가 천직을 받은 것이 있는데 천직 지극히 큰 직업도 없는  실직자 불쌍하지 안해요? 실직자가 불쌍한데 그 직장을 좋은 직장을 가졌으면  모두 우쭐합니다. 그 사람이 쿡 숙여가지고 있다가 아주 보니까 그 파티를 열고  막 이랍니다. 왜 그라는가? 직장이 영전이 됐거든. 그래 놓으니까 좋아서  잔치한다 말이오.

 자, 직장 쳐놓고 하나님이 주신 이 직장이, 우리에게 주신 직장이 몇 가지나  됩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몇 가지? 세 가지라, 세 가지. 뭐?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 제사장직이 뭐인데?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영원토록 화합을  시키는, 화합시키는 그 중보 역할을 하는 중보직이 제사장직이라. 또 선지직은  하나님의 충만은 전부 하나님이 말씀해 주시고 말씀대로 하면 그 충만이 제 것이  되는 것이라. 이러니까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갖다 줘서 피조물에  충만하도록,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의 것이 되어지도록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충만을 피조물들에게 운반해서 갖다 주는 그 직책이니까 얼마나 이 직책이  영광스럽고 존귀한 직책입니까? 왕직은 세상에 정치가 다르니까, 우리나라도 지금  우리나라 엉망이요 엉망. 이런 의회가 정치를 하는지 사법이 하는지 뭐 행정을  하는지 요새는 행정도 죽은 것 한가지고 사법도 죽은 것 한가지고 의회만 날뛰고  지금 있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뭐 경관이 몇십 명이 죽어도 그까짓 거야 죽거나 말거나 하나  데모하던 학생 하나 죽으니까 마흔세 번인가 위령제를 지냈으니까 몇 번이지?  누가 기억하고 있어? 아이 이름이 뭐이지? OOO인가? 몇 번 지냈지? 위령제 몇  번 지냈어? 마흔 몇 번인가 서른 몇 번인가 지냈어. 이러니까 경찰 할 놈이 어데  있을 거라? 이러니까 이 국회에서 지금 이래 하니까 국회 모독이라 모독이라  하지만 국회에서 지금 하는 거 우리가, 우리가 선거해 보냈는데 우리를 의지하고  이용해 가지고 지금 옳지 못한 일 하기 때문에 믿을 수가 없어 지금. 국회 때문에  큰 골치요. 이 행정이 이거 다 바로 되지 못 하니까 이렇다 말이오.

 그런데 하나님 완전자가 행정하는 완전 행정이기 때문에 단일성 가진 그분이  행정하는 행정 이 통일 행정, 단일성 가진 그분이 단일성대로 행정하는 그 행정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그와 같이 하는 그걸 가리켜서 통일성이라 통일 정치라,  단일성의 하는 통일 정치, 이 정치를 우리가 지금 책임지고 운동하고 있어. 이것이  왕직이라. 우리가 접촉하는 것마다 그거와 조물주의 그분과 정치가 같애. 사상이  같애. 욕망이 같애. 소원이 같애 방편이 같애. 얼마나 큰 직이요! 이거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을 이걸 자기가 연구, 성경에 보고 또 인제, 성경은 정확무오  아닙니까? 성경에 깨닫고 자연 계시에 깨닫고 보니까 백지 춤이 추여져 막  우쭐해지고, 이라면 다른 사람이 미쳤다 할 것이기 때문에, 가만히 잔주리고 이래  앉지 그 사실을 알면 땅위에 뭘 부러워해?  뭐, 말은 안 하지마는 세계에 강대국의 수뇌 회의가 있다 뭐 어짤 때 그게  뭐이냐? 그럴 때에, 그럴 때에, 수뇌 회의가 있는데 우리는 뭐이요? 우리는  왕직이라. 이 왕직과 거기다가 비교해 보니까 이 왕직과 거게 비하니 이 왕직과  그와는 왕직은 우주같이 크고 그 세상에 강대국의 제일 수뇌직은 먼지같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걸 그래 알고 하면 다른 사람이 미쳤다 할 것이고 이해를 못할  터이니까 말 안 하고 속으로 잔주리고(?) 속으로만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기독자요.

 그러면 기독자의 행복은 어데서 나옵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의 행복은 어데서  오요, 밖에서 오요 안에서 오요? 세상 사람 모든 사람의 행복은 밖에서 옵니까  안에서 옵니까? 우리 O목사님 한번 대답해 볼까? 밖에서 와. 모든 게 다 밖에서  와. 모든 밖에서 온다 말은 피조물에서 온다 그 말이오. 우리 기독자의 행복은  어데서 와요? 밖에서 옵니까 자기 속에서 나옵니까? 자기 속에서 나와. 자기  속에서 나오다니? 자기 속에 뭐 있는데? 자기 속에 창조주 하나님 계시거든.

그분에게서 나와.

 그래서 오늘 이 공과를 가르칠 때에, 이거 말을 하는 것은 이 반사 선생님들이  확신을 가지고 이와 같이 지금 가르쳐서 그 학생들이 확실히 인정하도록 하라 그  말이오. 여섯 가지 구원.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반사 선생님들은 외우고 실행해서 체험 경험 가지고 가르치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자기 미래를 위해서 잃지 말고 기도해야 됩니다. 또 반사 선생님들은  주의해서 그래 할 것이고, 빨리 가서 학생들을 다 주일학교 예배에 중간반 예배에  참석을 시키도록 해 주십시오.

 자꾸 생각해요. 자꾸 생각해. 이 여섯 가지를 자꾸 생각해. 자꾸 생각하면 그  속에서 거짓이 나오는 게 아니라 실상이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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