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다

 

1987. 5. 7. 새벽집회 (목)

 

본문:요한복음 9장 1절∼41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저희가 전에 소경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그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이에 저희가 소경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이제 오늘은 좀 주님이 흐뭇하고 좋아하시겠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걸 알아요. 주님이 기뻐하시겠어. 찬송 인도하는 분도 너 잘한다 하실 것이고, 피아노 치는 이도 너 잘한다 하실 것이고, 찬송 부르는 우리들도 너거 잘한다 이래. 오늘 아침에 은혜 주실 것이라. 당신 기쁘시게 하면 다라요. 뭐 있습니까?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만 힘쓰면 되지요.

여게서 여러분들이 집에 가서 돌아가서 연구하면 될 터인데 이제 연구에 대해서 연구의 그 어려운 길만 제가 증거해 주겠습니다.

그래 여게 한 가지 단단히 기억할 것은 이 말씀을 이렇게 깨닫느냐 저렇게 깨닫느냐 하는 그 말은 요새 말로 하면 요한복음 9장에 대한 교리와 신조를 이런 교리와 신조를 취하겠느냐 저런 교리와 신조를 취하겠느냐?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이렇게 깨닫고 증거하고 저렇게 깨닫고 증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증거하는데 우리가 그 증거를 배우고 알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다대수의 의사와 견해를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 아닙니다.

신학자들은 신학을 자랑하는 것은 ‘어떤 박사는 이렇게 말하고 어떤 박사는 저렇게 말하고’ 열 박사 말 들은 사람은 한 박사 말 아는 사람보다 더 유명하고 백 박사 그 깨달음의 견해를 아는 사람은 그만치 유명하고, 이래서 김현봉 목사님이 어떤 학자의 그 주석을 보고서 ‘이 주석은 죽은 자가 썼다’ 이렇게 말해 놨다 말이요,  살아 있는데. 그러니까 그 주석 낸 사람이 산 사람을 죽었다고 하고 이제 ‘죽은 자의 주석이라’ 이렇게 말을 하니 분개해 가지고 그때 서로 좀 완력이 있고 갈라졌습니다.

‘어떻게 그 주석을 그렇게 말합니까?’ ‘이것은 이 사람은 이렇게 깨닫고 저 사람은 저렇게 깨달았다 많은 깨달은 사람의 깨달음만 소개해 놨지 나는 이렇게 깨닫는다 한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냐? 나는 이렇게 살겠다, 나는 이렇게 알고 걸어가겠다 하는 그것이 없으니까 모든 사람이 깨달은 것만 소개해 놓으니까 그거 책뿐이지 산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책 보따리지 그것은 산 사람은 아니라.’ 그 말이 기묘한 말이요 능력 있는 말이요 깊은 깨달음의 말입니다. 신학은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또 나는, 한국 말만 아는데 나는 일본 말도 안다, 나는 저 미국말도 안다, 나는 뭐 저 독일어도 안다, 어데도 안다. 말을 여러 나라 말을 하면은 어학을 여러가지 알면은 실력 있는 신학자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신학자는 많은 사람들의 견해를 아는 것, 또 많은 어학을 아는 것 그것을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좋은데 우리 나라에서 ‘단일 신학교를 세우자. 신학교 질이 낮아 안 됐다. 질이 낮아 안 됐다. 이러니까 질을 향상시키자. 향상 시키는 데에는 신학교를 신학교로 둘 게 아니라 신학대학을 해서 대학 위에 신학교 있는 것으로서 신학대학을 해야 된다.’ ‘그러면 질을 높이면 뭘 높이는 것이냐?’ ‘세상 지식을 높이는 것이 신학 질을 높이는 것이라.' 요렇게 된 것이 얼마 전에 한국에서 단일 신학교 세우자는 그 견해였습니다. 틀립니까? 안 틀려. 틀리면 네 정신이 빠져 틀려.

신학의 질을 올리는 것은 성경을 좀 더 익숙히 성경 본문 그대로 다 알아야 되겠고, 더 질을 올리는 것은 성경 본문을 그대로 외우도록 하는 것이 질을 올리는 것이고, 또 더 질을 올리는 것은 그 성경 가운데 체계적인 도리를 연구해서 바른 교리와 신조를 빚어낼 수 있도록 되는 것이 더 질을 올리는 것이고, 더 올리는 것은 신학생들이 성령의 충만한 사람들이 되어지도록 하는 것이 더 올리는 것이지 세상으로 끌어내루는 것이 더 올리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박사들이 말하고 유명한 사람들이 말해도 그 소리를 그 아예 귀넘어 듣지 뭐 자극 있게 듣지를 안합니다. 왜? ‘서울 남대문은 사람들이 많이 통과한다.’ ‘남대문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통과하면 그 문터박은 뭘로 했겠노? 하마 다 닳았겠다.’ 문터박은 보면 오래, 옛날집 오래 되면 문터박이 반들반들 닳아 있습니다. 안 그렇습디까? 요새는 집이 모두 새로 개옥이 됐는데 옛날 집 문턱 반들반들하게 닳아 있는 것 본 사람 손 들어 봐요. 봤어요, 그러면 옛날 사람들이로구만. 요새 사람들 그거 몰라요.

이러니까 ‘그 무슨 나무로 해서 견뎠을까?’ 하나가 있다가 `아니다, 그거는 박달나무다. 박날나무 문터박이다.’ ‘그래? 그 참, 네 말이 옳겠다. 그렇겠다.' 하나가 있다가, 박달나무보다 대추나무가 더 여물거든. ‘아니다, 너는 보지도 못한 게 공연히 그런 소리 하네. 남대문 문터박은 대추나무다, 대추나무. 발가이 안 그렇더냐?’ ‘아이구, 박달나무보다는 대추나무가 여물지. 이러니까 네 말이 맞다.’ 이라는데, 거기 있다가 말하기를 ‘남대문은 문터박이 없다’ 이라니까 순전히 거짓말쟁이라고 모둡니다. 그래 가지고 대추나무로 문터박 돼 있다 말한 게 일등 됐어. 대추나무라 이래 가지고 모든 사람이 찬성하고 ‘저거는 아무것도 모르는 게 문터박이 없다니? 문 쳐놓고 문터박 없는 데가 어데 있겠노?’ 이래도 그 안 사람이 실지로 본 사람이 박달나무니 대추나무니 많은 사람들이 그리 따라간다고 의심이 나겠습니까 따라나겠습니까? 실상을 본 사람은 요동치 않습니다.

자기가 생명과 소유와 몸을 다 바쳐 살 그 길을 알았는데, 바쳐 살 만한 길을 확정짓고 알았는데 그 길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말한다고 끌려가겠습니까? 끌려가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 들을 때에 ‘그것은 그렇게도 말하니 내가 또 한 마디 들었다.’ 작정하지 마십시오. 하지말고 그저 들으면 들은 대로 ‘아, 믿습니다.' 이 따위 소리하지 말고, 이따위 소리 욕한다 말이요, 욕하는 말이오.

그런 밉상스러운 짓 하지말고, 들었으면 ‘보자 이게 맞나 안 맞나?’ 안 맞다 싶으면 아무리 목사가 박사가 또 존재 없지마는 백 목사가 해도 ‘아니다’ 집어던져 버리십시오. 또 이건지 저건지 아니라고도 못 하겠고 그거라고도 못 하겠고 이 길을 이 도리를 내가 취하나 안 취하나, 이 도리를 내가 걸어갈 길로 내가 정하나 안 정하나? 내가 정하면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걸어가야 될 길인데 그렇게 바쳐서 걸어갈 만한 가치가 있는 걸음이요 정확한 길이냐? 예수 믿는 사람이 정확한 길이 예수 안에 있다는 거는 확실히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는 믿는데 어떻게 걸어가야 되나, 어떻게 믿어야 되느냐, 어떻게 바라봐야 되느냐, 어떻게 의지하고 맡겨야 되느냐, 어떻게 순종해야 되느냐,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하는 게 문제라 말이오.

이러니까 ‘나는 그렇게는 작정을 못 하겠다. 에이고 그러면 집어던지자.’ 자기가 집어던질 수 있소? 안 됩니다. 밥을 굶어서라도 단정을 지우십시오.

‘과연 이 길은 내 몸과 생명을 바칠 만한 길이다. 아니다. 내 모든 좋아하는 것 다 싹 끊어버려서 지금 무엇이든지 말하면 청산하겠습니다. 끊어버리겠습니다.

바치라면 바치겠습니다. 생명 바치라면 바치겠습니다. 아멘올소이다.’ 하는 이 교리를 우리가 작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똑똑히 모르면 알기까지 과제를 삼아놓고, 왜? 내가 잘못 가면 망하는데 내 전부를 바쳐서 살아야 될 길이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받아들일 수 있어요? 내가 길을 가는데 내가 가는 데 잘못 가면 죽는 길도 있고 사는 길도 있고 사는 길은 한 길뿐이고 죽는 길은 꽉 찼으니까 아무 길이나따나 택해 가지고 걸어가는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소? 그런 바보가 어디 있겠소? ○○○씨, 어떤 길이라도 가면 되는가? 안 돼. 그럴 것 아니라? 자기가 잘못 가면 죽는데. 이와 마찬가지라.

우리가 길을 지금 안내받는 것입니다. 이 길로 가나 저 길로 가나? 이 깨달음을 따라가느냐 저 깨달음을 따라가느냐? 이 깨달음을 내가 내 깨달음으로 정하느냐 저 깨달음을 내 깨달음으로 정하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왜? 죽느냐 사느냐 문제기 때문에 아무나따나 정할 수가 없다 그말이오.

확정이 안 되면 전심 전력 기울여 가지고, 바른 길은 하나뿐입니다. 둘은 없어.

하나뿐이라. 하나뿐인데 이 바른 깨달음을 버리면 자기는 망하는 것이고ㅡ머리 빠뜩 들고 들어. 그래 들으면 안 돼. 그래 들어가지고 속에 들어갈 줄 알아? 안 들어가? 마음 목숨 힘 뜻 다해서 들을라고 애를 써야 되고 또 확정 안 되면 다해서 연구해야 되고, 연구해서 양사방 물어야 돼요.

제가 예수 믿으면 제사 안 지내야 된다 하기 때문에 제사를 이제까지 대대로 선영을 섬겨 나오던 그 제사를 그만 말 수 있어요? 이래서 제사를 지내야 되나 안 지내나 이걸 똑똑히 알고 확정을 해야 되지 아무나따나 다른 사람이 한다고 그렇게 할 수는 없어.

이래 가지고 한학자한테는 다 만났어. 한학자라 하는 큰 유명한 한학자는 만나 가지고 ‘우리 나라의 역사가 어찌 됩니까? 제사의 역사가 어찌됩니까?’ 양사방 물었어. 물으니까 아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

주공이 제리를, 제사 제도를 먼저 냈는데, 당나라에서 냈는데 그 제도를 우리 나라에 끌고 오는 사람은 안회현씨라는 그 선생님이 끌고 왔어.

왔는데 고려 말년에 고려장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다 망하겠으니 전부 삼강오륜은 다 절난나 버렸고 부귀로 물질 제일주의로 부가 제일이다 이렇게 정치가들이 이 정치 이념을 이래 세웠으니까 돈 위주로 하니까 삼강오륜이 다 떨어져서 고려장 하는 것이 고려 시대에 그게 생겨졌어.

이러니까 다 고려장 당하니 자식 키워봤자 나도 고려장 당할 터이니까 자식 키울 사람이 있어야지? 후원할 사람이 없어. 나라가 망하는 거라. 일시 부자는 됐어요.

그래서 고려장 제도 나올 때 그때에 고려에 경제가 상당히 풍부했습니다.

이랬지마는 나라가 망해.

- 이것을 암만 고칠라 해 봤자 벌써 대대로 이게 관념이 있어 가지고 이렇게 해 놨으니 이 제사가 헛일이라 하는 것을 아무리 증거할래야 할 수가 없어. - 이래서 안회현 선생이 중국에서 그렇게,  귀덕을 하다가 나라가 안 되니까 귀작을 하다가 귀작을 하다가 안 되니까  귀부 정치로 이렇게 하다가 나라가 그렇게 망하게 된 삼강오륜이 절단나고 난 다음에 그때에 주공이 제사 제도를 내 가지고 그것을 방어하고 그때 거게서 구출했다 말이오. 이래서 그 안회현 선생이 역사 공부를 하다가 그것을 보고 ‘이 제도를 우리 나라도 끌어와야 되겠다.’ 그분이 우리 나라에 끌어왔어요.

끌어와 가지고 그때 처음에는 ‘왕은 제어천 하고’ 임금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고, `공후백작은 제어삼모하고’ 삼대 제사를 지내고, ‘서민은 숙소어 제어부모하라’ 자기 방에서 당대 제사만 지낸다 이래 가지고 제사 지내는 제도를 내 가지고 이라니까 가속도로 퍼져 나갔어요.

고려장 당할 영감들이 있다가 이제 그뭐 제사 제도가 나오니까 뭐 이거는 옛날부터 있는데 이거 자꾸 얘기를 해 가지고 ‘저거 아버지가 죽었는데 효자 못 하고 나니까 뒤에 귀신이 와 가지고 막 이래 망친다’ 이래 가지고 조상 단지도 생기고 가속도로 제사가 늘어나갔어. 이러니까 고려장 제도가 완전히 전폐되고 말았다 말이오. 전폐되고 말았어. 이제 이러니까 고려장을 막기 위해서 제사가 생겼다는 것을 역사로 근거를 똑똑히 알고 난 다음에는 그래 나는 그때 가서 제사를 안 지냈어.

우리 집안이 많아서 제사 지낼 때 가면 제사 지내러 오는 사람들이 한 사십여 명 돼요. 사십여 명 돼 가지고 이래 모두 한목 뚤뚤 뭉치며 제사 지내는데 제사 안 지낸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이래서, 마구 그걸 인제 배워 놨으니까 마구 열변을 토했어. 역사를 들이 대면서 ‘이렇고 저렇고 이이렇고 이러니 이러니까 이거는 우리가 고려장 안 할 사람이고 부모를 섬길 사람이니까 산 부모를 섬기고 부모는 잘 안장만 하면 되는 것인데 죽은 부모에게 이 제사 지내는 건 다 헛된 일이다.’ 그래 가지고 그때 좀 싸움이 났어요. 뭐 많지마는 그래도 ‘저놈 예수 믿는다고 제사 안 지낸다’ 욕하지는 못해. 역사가 빤히 있으니까.

그라고 나서 보니까 그뭐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모두. 그러기 때문에 불망지일로 부모 죽은 날 잊어버리지 안하는 그런 성의로 가지고 하는 것이지 부모의 혼령이 와서 제사 음식 먹겠다고 지내는 그거는 다 미신이다. 그거는 다 없어야 된다.

이래 놓으니까 그때 한창은 대학 좀 간 사람들은 좀 지성인이라고 자랑하기 위해서 ‘그 제사지내는 건 다 헛된 일이다. 그거는 폐해야 된다.’ 대학 갔다 오면 제사 안 지낼라 해요. 이랬는데 지금은 또 ‘그거는 조상을 숭배하는 제도기 때문에 먹어 그런 게 아니라 부모를 잊어버리지 안한 그런 제도로 하는 것이다’ 해 가지고 요새 또 제사가 늘어나가고 있다 말이오.

뭣이든지 자기가 어떻게 일생을 살 길인데 아무나따나 그 길을 갈 수 있겠소?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 이래도 듣고 저래도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벌써 이래도 저래도 자기 행동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사람이고 이 도는 내가 걸어갈 길을, 사느냐 죽느냐 하는 이 길에 생사가 있고 영원 멸망과 성공이 있는 이 가치성을 두고서 들을라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자기가 모르면 어데든지 연구해 가지고 여게도 묻고 저게도 묻고 또 성경을 여게도 들춰보고 저게도 들춰보고 자기가 실지로 생활도 해 보고 그럴 때에 성신의 감화가 ‘내가 요렇게 생활 할 때 성신의 감화가 오나 저렇게 생활 할 때 성신의 감화가 오나?’ 성신의 감화는 눈에 보입니까? 안 보여도 성신의 감화는 양심보다 더 깨끗한 것을 알면은 그만 됩니다. 자기 양심으로 실컷 생각해서 요게 옳다 싶었는데 성신의 감화가 오면 그것보다도 초월한 깨끗하고 완전한 정확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 알려 줍니다.

이래서 우리가 더듬을 때에 옳은 길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성신의 감화요.

옳은 길인 줄 알아도 행할 용기가 없는데 성신의 감화가 오면은 ‘이 옳은 길이니 생명 바쳐도 문제 없다.’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부가해 주는 것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기에게 계시는 영감이 계시니까 영감에게 물어.

이래서 성경에는 “너희들은 사람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다. 너희 안에 기름부음이 너를 옳고 바르고 참되게 가르치나니 그대로 거하라.” 그대로 행하라. “그대로 거하라” 그 말씀이 성경에 있어요? 어데? 27절? 요한일서 2장 27절이래요. 나는 성경 모르면 저 우리 ○○○선생한테 물어요. 성경 잘 알아.

성경 절수 어데 있나 하면 물어요? 그런데 성경 절수는 잘 아는데 단점이 있어.

내가 여게도 우사를 시키겠어. 단점이 뭐이냐 하면은 계속성이 없어. 날래.

이런데 그래도 좀 이상한 것은 편집실에서 뭐, 뭐 타이프 치나? 뭣해? 타자 쳐? 타자 치는데 뭐 빠짝 마르도록 쳐요, 어짜든지 계속해서. 거기 들어는 변동 없는 것 보니까 끈기가 있어. 이래서 이 좀 인내성 없다 하는 그걸 차차 차차 지금 벗어가고 있어. 제가 끈기성 있게 하니까 내 머리에 ‘인내성이 없다’ 하는 그게 차차차 사라지지 말로 가지고 아무리 할수록이 `이놈아 너는 더 인내력이 없다.

없다.’ 이럴 건데, 행함은 행함으로 시정해 나가고 인정받아야 되지 입술로만 인정받아? 가라지인지 곡식인지 언제 보면 알아야 돼요? ○○○집사? 결실에 봐서 알아야 돼요. 그러면 행한 결과를 봐서 알아.

이러니까 여게서 교리와 신조를 경솔히 작정하지 마십시오. ‘이거냐 저거냐 어느 것이냐?’ 왜? 내 영원 무궁에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여게 달린 이 길인데 아무 길이라도 택해요? 안 돼. 그럴 수 없어. 이 말이 맞아요 안 맞아요? 이래도 저래도 이 해석도 저 해석도 아무나따나 다 들으면 돼요 영원 무궁에 생사화복 흥망성쇠가 달렸으니 ‘우리가 영생 얻는데 죽기는 뭐 죽어?’ 심신의 기능이 죽어서 이를 갈면서 지옥에 가서 탈 수도 있습니다! 어제도 어떤 분 와 가지고 ‘이 몸하고 영하고 같이 가야 되지 이 고기덩어리 기능만 가 가지고 됩니까?’ 희로애락은 고기덩어리 껍데기가 하는 게 아니고 속에 심신의 기능이 희로애락을 하고 있어요. 맞아요? 그거 맞아요? 껍데기가 해요 속에 알맹이가 하고 있어요? 알맹이가 하고 있어. 껍데기는 이거 발표해.

입술은 발표하는데 이거 없으면 속에 알맹이가 발표해. 발표하는 게 알맹이가 말하는 그게 지옥에는 그렇게 다 알 수가 있어.

슬픔은, 슬픔은 속에 마음에서 슬퍼하면 마음에 슬픈 그것이 입으로 나오고 입으로도 말 안 해도 피부로도 나와요.

이러니까 우리가 안 믿을 때는 영은 죽어서 움직이지 안해도 우리가 얼마든지 희로애락을 말하지 안했어요? 이러니까 영은 하늘나라 가서 심신의 기능만 지옥 갔으면 거기 가서 뭐 부르짖어요 어째요? 그거는 지금, 지금 깨달음이 통일되지 안하고 있어요. 이게 나가면 시비가 많을 것이라. 시비를 얼마든지 해 봐요.

얼마든지 해. 그러면 옳은 것이 나올 것이라. 이것도 잘못하면 죽는데 아무나따나 그럴 수는 없어.

이러니까 내가 ‘이거는 내 교리다. 이거는 내 신조다.’ 그러면 자기 교리요 신조라면은 그 교리와 신조는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칠 그 깨달음을 자기 교리로 삼아야 됩니까, 신조로 삼아야 됩니까? 뭐 자기는 그거는 그거고 나는 내고 자기에 상관, 자기와 그거와는 상관이 없는 그런 것 아무거나따나 교리와 신조로 삼아야 됩니까? 교리와 신조는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보다도 가치가 큽니까 작습니까? 어떻소? 커. 커. 이런 줄을 알고 예수를 믿어요. 아무나따나 그래서는 안 돼.

이 교리대로 나가다가 이 교리대로 할라고 하면은 생명이 끊쳐지게 되면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 교리를 버릴 겁니까? 생명을 던져서 그 교리를 지킬 겁니까? 생명이냐 교리냐? 소유냐 교리냐ㅡ교리라 말은 깨달음이라 말이오.ㅡ교리냐? 자기 몸뚱이냐 교리냐? 이 둘 중에 하나를 취해야 될 때에는 어떤 것을 취해야 됩니까? 교리를 취해야 되는데 그럴 때에 그 모든 것보다 가치와 중량이 커서 그런 것을 다 버릴지라도 나는 교리를 버릴 수 없다는 요것을 자기 교리로 삼으십시오. 삼으십시오.

공연한 말이요? 저거 세상에서 인간 말 가지고 아무리 떠들어 쌓아도 요걸 모르기 때문에, 모르기 때문에 생명 바칠 때 되면 교리 다 집어던져 버려.

평소에는 교리 신조를 뭐 어떻다 어떻다 막 설교도 부흥회도 하고 야단을 지겨도 딱 현실에 당면해서 하나님이 ‘이놈아 너, 네가 얼마나 거짓부리 놈인 줄 알아라.

너 교리가 뭐이지?’ ‘나는 이렇게 이렇게 믿습니다.' 돈하고 딱 맞서서 돈을 가질라면 자기 교리를 던져야 되고 교리를 잡을라면ㅡ○장로님? ○장로님 그래 가지고 목사되면 큰일 난다. 이 ct4“장로더러 내가 ○목사 자꾸 이렇게 하는데 그 목사 될 것 같애. 목사 돼도 따글따글한 목사 돼야 돼.

봐요, 주님께서. 보자 돈하고 비중 달아봅니다. 비중 달아보니까 돈보다 교리를 중하게 여기거든. 또 비중 답니다. 나중에 가서는 최종으로 생명하고 교리하고 비중을 답니다. 이라니까 생명을 던져도 교리를 놓지 못하거든. 그것이 “아버지의 말씀은 영생인 것을 내가 안다” 누가 그랬지요? 누가 그랬어요? 예수님이 그랬어. 예수님은 이렇게 교리를, 아버지의 말씀을 이렇게 영생인 걸 알았기 때문에 땅위에 이 썩을 것 두고 갈 것 없어질 것 아무것이라도 여게와 비중을 겨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길 걸어갔습니다. 여게서도 그렇게 작정하십시오.

똑똑히 작정이 안 되면은, 이게 지금 돈벌이보다도 급하고, 밥먹는 것보다도 급하고, 올바른 교리는 금생과 내세에 영원에 성공이요 영과 육이 성공하는 것이요 이 잘못된 것은 금생 내세 영육이 다 실패라. 이러니까 뭣보다 이게 더 급하지 않습니까? 전심전력 생명 다해서 행하는 것보다도 올바른 교리를 자기가 잡는 데에 전심전력 기울여야 됩니다. 기울이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그 교리가 자기 생명보다 귀한 줄 알아도 그게 실상에는 안 돼서 안 죽기 위해서 교리와 신조를 버리는 그런 일이 한번 두번 있으나 회개하고 회개해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깨달아 가진 자기 교리와 신조는 생명보다 귀한 것을 깨닫고 생명과 소유와 몸을 넉넉히 바쳐서 그 이상으로 평가하고 가진 그 교리가 자기에게 영생입니다.

바로 그것이 교리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은 교리입니다. 하나님은 진리입니다.

그와 동행이 하나님과 동행이요 그를 모신 것이 하나님 모신 것이요 그 교리 신조가 자기 것 된 것은 하나님이 자기 하나님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깊이를 알고 해야 되지 이래도 저래도 되는 것 아닙니다. 알겠습니까?

날 때부터 소경된 자가 이 소경이 눈 떴는데, 소경이 눈 떴는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모든 기적은 이것을 가리켜서 과거에는 기적이라고 번역하다가 지금은 표적이라고 번역합니다. 표적이라는 것은 실상이 아니고 실상을 증거하는 것이 표적입니다. 알겠습니까? 성경에 있는 모든, 기적이라 하면은 초인간의 역사를 가리켜서 초자연의 역사를 가리켜서 기적이라고 말하고 표적이라는 것은 이 초인간의 역사인데 이 역사, 이 역사는 사람들이 보기 어렵고 잡기 어려운 그 신령한 면에 속해 있고 또 앞으로 완전 영원 불멸의 것 그 고귀한 것으로 되어 있는 그것을 가치 적은 이 자연에 소속한 것들을 가지고 인용해서 증거를 해서 나나타는 것이기 때문에 표적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서 나면서 눈먼 자에 대한 표적이 나왔으니 이 눈먼 자를 통해서 ‘나면서 눈멀었다. 너는 날 때부터 원죄와 본죄로써 완전히 죽은 자라.

하나님의 전지의 지혜 성령의 지혜는 너는 하나도 없기 때문에 네 지혜의 눈은 완전히 소경이라. 너의 마음의 눈은 완전히 소경이라. 심령의 눈은 소경이라.’ 이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본다 함으로 죄가 그저 있다. 너희들이 안다 함으로 멸망한다.” 너희들이 안다는 거는 다 틀렸다. 보지 못하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 함으로 죄가 있다. 너희들의 모든 존재관은 다 틀렸다.

‘나는 모든 존재관에 대해서 나는 모르겠다’ 하면 너에게는 삐뚤어짐이 없을 터인데, 죄가 없을 터인데 ‘이거는 이렇고 이거는 이렇고’ 하기 때문에 다 삐뚤어졌다 그말이오. 맞아요? 맞아요? 이 해석이 맞아요? 생명 바칠 만치 맞아요? 그래, 날 때부터 소경이다. 사람은 날 때부터 죄 중에서 났어. 지혜는 하나님밖에는 없는데 “선생님은 한 분뿐이시니 하늘에계신 너희 아버지시니라” 말씀했는데, 바로 가르치는 이는 하나님 한 분뿐이신데 하나님 한 분에게 배우지를 못했으니까 다 잘못 알지 안해요? 이러니까 날 때부터 소경이라. 날 때부터 지혜의 눈은 깜깜 소경이라. 믿어집니까? 확실해요? 확실히 잡으면 능력 나와요. 여게 대해서 확신 못 가지는 그자는 제까짓 게 천언 만언을 하고 청산유수의 웅변을 토해도 결과는 없어요. 알겠습니까? 결과는 없어.

그런 목회 암만 해 봤자 결과는 없어. 생명은 없어.

가라지와 곡식을 한테 둬 두지마는 결실할 때 보면 알아. 조선 교회가 그렇게 흥왕했지마는 왜정 말년에 보니까 신사참배 그거는 우상숭배라는 것을 환하게 알아서 다 우상숭배라 했지마는 마지막에 감옥에 갇히고 죽을 지경 되니까 다 국가 의식이라 하고서 다 했습니다. 다 변절 다 됐어. 이게 소경이기 때문에 그래.

지혜의 눈이 어두워서, 아직까지 눈을 뜨지 못해서, 그렇게 신사참배 하는 것이 전능자를 배반하고 자기를 죽이는 힘없는 허수아비 같은 것에게 복종하는 것으로 주인을 바꾸는 것이니까, 전능자의 주인 전능자의 아버지를 버리고 전능자의 주님을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거짓말쟁이 일 분도 생명이 제게 권리 없는 그 무능한 자 그자에게로 주인을 바꾸고 구주를 바꾸는 것이 눈이 떠서 그래요 눈이 감겨 그래요? 소경이 돼서 그런 걸 똑똑히 알아요? 그래, 날 때부터 앉은뱅이 이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은 이것은 표적입니다. 날 때부터 눈먼 소경 이것이 일시로 났어요? 영원 전 하나님께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실 때에 요거 예정한 것입니까 안 한 것입니까? 요때 쓸라고 나면서 눈먼 자 나도록 예정돼서 주님이 요렇게 창조해 가지고 소경이 났습니까 저절로 부정모혈로만 났습니까? 누가 만들었어요? 누가 만들었어요? 어데 쓸라고? 거게 쓸라고.

거게 쓸라고 요한복음 9장 기록했는데 그거는 또 어데 쓸라고 기록했어요? 오늘 아침에 쓸라고. 과장이라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무나따나 되는 대로 하는 말이라요? 정확해요? 천지는 변해도 변하지 않는 정확성이 있어요? 정확해요, 정확해.

나면서 눈 멀었으니까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지요.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지요.

실상을 아무것도 보지를 못하지요. 말로 듣기만 듣지. 손으로 만지는 거나 보지 보지는 못해. 손으로 만져보는 거는 보지마는 눈으로 보지는 못해.

이것 모양으로 이와 같이 완전한 지혜가 죽어버렸고 마귀가 들어와 있기 때문에 성령의 지혜 하나님의 지혜와 완전히 연결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실상은 보지 못합니다. 뭣만 보입니까? 모두 다 불탈 것 망할 것만 봅니다. 틀립니까? 불탈 것 망할 것만 봅니다. 또 생애 방편은 자살 방편만 보고 자살 자멸 방편 외에 거는 하나도 참 사는 방편 하나도 못 보고 자살 자멸하는 생활 방편만 봤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너무 과장 아니요? 너무 과장 아니요? 저 ○○○목사님, 박사 아니라도 박사보다 나아요. 어때요? 내가 과장하는 말이요? 정확합니까? 그래도 ‘정확합니다’ 해도 `맞습니다. 정확합니다.’ 거게도 교만 그놈이 들어서 이 도인이 안 됐어. 내가 그래도 대학자가 돼 가지고 뭐, 똑똑히 그라면 ‘맞습니다!’ 뭐 자기고 뭐이고 `맞습니다! 옳습니다! 맞습니다!’ 요렇게 꽉 돼야 생명이 바쳐져. 알겠어? 알겠어요? 지성인들은 그래.

아니야. 그거 못써.

날 때부터 소경이라. 안 보이요. 생명과, 참된 생명과 평강과 영원 불멸, 완전 불변, 참의 것은 하나도 안 보이고 전부 변장시키고 변형시키고 변질시켜서 전부 거짓부리로 만들어 놓은 그것만 알고 보고 있지 참은 보지 못해. 소경이 보는 거로만 보고 있지 참은 보지를 못해. 이것을 여게서 보인 것입니다.

이래서 41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 하니 네 죄가 그저 있느니라” 죄가 그저 있다 말은 뭐이 그저 있다 말이요? 죄가 그저 있다 말은 무슨 말이요? 오, 그래. 맞았어요. 좀 담대히 고함을 질러요. 그것도 “환영하지 않는 자는 반대하는 자요 반대하지 않는 자는 환영하는 자라” 이랬어.

이러니까 그 하는 데도 “죄가 그저 있느니라” 잘못 보고, 잘못 알고, 잘못 생각하고, 잘못 소원하고, 잘못 평가하고, 잘못 비판하고, 잘못 계획하고, 잘못 행동하고, 잘못 살고, 잘못된 인인 관계, 잘못된 사물 관계, 잘못된 신인 관계, 전부 삐둘어진 것만 네가 가지고 있다. “네가 본다 함으로 죄가 그저 있다” 네가 ‘요거다’ 하기 때문에 삐뚤어진 것이 그대로 있다.

“네가 보지 못하였으면 죄가 없었으리라” ‘나는 지금 아는 것이 틀렸다. 나는 바른 것을 모르고 있다. 옳은 것 바른 것을 나는 모르고 있다.’ 그러면 너는 삐뚤어진 것, 옳고 바른 걸, ‘나는 이 보고 아는 것이 다 세상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이 다 이게 진짜는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진짜는, 생명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생은 보지 못하고 죽을 생명 그것만 가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다 가짜요 거짓부리요, 없어질 것들이요, 저주 아래 있는 것이요, 멸망할 것들이요, 다 불탈 것이요 허무한 것들이라. 나는 참을 보지 못했다. 나는 지금 참을 보지 못했다.’ 하면 너는 거짓된 것을 인정하지 안하기 때문에 너는 삐뚤어진 것이 없는 사람이라. 옳은 것도 없고 삐뚤어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이러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자를 내가 보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 ‘나는 바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아는 거는 다 삐뚤어졌다. 나는 바로 아는 것이 없다.’ 자기의 아는 것을 다 부정하는 그자를 주님께서 온전한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주님이십니다. 알겠습니까? 맞습니까? 이 교리에 생명을 바칠 만해요? ○○○목사님? 바칠 만해요? 인제 저거는 서부교회 와 가지고 더러 혼이 나서 막 이제 똑똑하구만. ‘예’ 눈이 똥그래 가지고 듣는데, 들으면, 여러분들, 겨자씨, 나중에 가서 나무 돼. 모든 새들이 깃들여. 뽑혀 나가면 날람날람 주워먹으면 그 겨자씨는 몇십 개라도 종조리 새가 다 주워먹어요. 이렇지마는 이 커 놓으면 그것들이 다 깃들인다, 그들이 다 네 은택으로 산다 그말이오. 네게 소속해서 너 아니면 죽겠다고 너 아니면 죽어. 네 은택으로 살아. 네게 소속해 살아. 이런 비밀이 있어, 이런 비밀이. 이게 예수 믿는 도야. 강하고 담대해요. 인제 그만하고.

그러면 ‘이 소경이 뉘 죄로 이래 됐습니까 부모 죄입니까 자신의 죄입니까?’ 이래 말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저것도 아니라 이랬어. 이러니까 인간들이 저거 마음대로 삐뚤어진 관도 저거 마음대로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저거딴에는 신학자들 뭐 성경학자 서기관 바리새 교인 제사장 뭐 그래 가지고 ‘야, 이거 참 예수님이 골치 앓을 수 있는 높은 질문 하나 있다.’ 하면서 저거딴에는 아주 큰 질문 가지고 ‘이거는 뉘 죄니이까? 부모 죄니이까 자기의 죄이니까?’ 요래 물었는데 그 묻는 것도 저절로 물은 게 아니라 영원 전부터 예정된 거라.

인간들이 죄관, 인간들이 삐뚤어진 관은 다 틀렸다 그말이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라니까 너거 부모 죄라 제 죄라 하는 거 다 틀렸어. 너거의 삐뚤어진 관은 다 틀렸다. 삐뚤어진 관은 다 틀렸어. 죄관은 다 틀렸어.

요것을 우리에게 계시해서 알리기 위해서 영원 전 예정하신 것이 때가 되니까 당신이 혼자의 주권의 능력으로 창조해 가지고 성취해서 요 날 때부터 눈먼 소경이 나와 여게 앉았습니다. 맞습니까? 우연입니까 하나님의 계획적입니까? 절대 계획적입니까? 절대 예정적입니까? 믿으십시오. 절대 예정적입니다. 절대 계획적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의 도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그 소경을 고치느라고 침을 땅에다 뱉아 가지고 진흙을 이겨 가지고 눈에 발라줍니다. 이거 뭐 눈뜨는 방편이 돼요? 눈뜨는 방편이 돼요? 눈 띄워 준다 하더니마는 물로 이겨도 좋을 건데 더럽구로 침을 뱉아 가지고 틱틱 뱉아 가지고 진흙 떡 이겨 가지고 두두룩하게 실컷 발라 주니까 자, 그거 낫을 방편이요 뭐이요? 물에 넣어도 붇지 안할 방편이라. 역사에 없는 방편이라.

그 이치에 합당한 방편이 아니라. 주님이 눈 띄워 주시는 것이 인간 의사의 견해에 긍정될 만한 방편이 아니라. 긍정될 만한 방편이 아니라.

이라니까 ‘에, 눈 띄워 준다 하더니마는 진흙 이겨 가지고 눈에 바르니까 무겁기만 무겁고 더 어둡구먼.’ 휙 떼내버렸으면 안 돼. 이분이 눈뜨게 해 주실라고 진흙 이겨 가지고 바르니까 떡 대고 있으면서 발라 가지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고 오너라’ 여게도 물이 있는데 하필 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야 되나요? 이라니까 두말도 안 하고 씻으러 다른 사람이 이래 인도해 갔는지 작대기로 더듬어 갔는지 모르겠어요. 작대기로 아마 더듬어 가도 가기는 갈 거라.

가니까 ‘어데 가노?’ `눈 띄워 주는 이가 진흙 바르고 가서 씻고 오면 본다 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눈 뜰라고 간다.’ ‘이 등신 자식, 이 바보 자식, 실로암 못에 가서 눈뜬다. 그거 순 궤변쟁이, 말도 아닌, 진흙 발라 가지고 눈뜬 데가 어데 있더노? 진흙이 약이가?’ 뭐 별별 조롱했지마는 조롱할 때 그때 안 갔더라면 헛일이라. 여러 사람이 말해도 그거 듣지 안해요. 안 듣고 갔어.

요거 갔어야 되지 가다가 옆에 사람들이 뭐 여게 기록은 안 됐지마는 ‘저 사람 저거 눈에다 왜 벌건 진흙을 저래 발라 가지고 있노? 시커먼 진흙을 발라 가지고 있노?’ ‘예수란 사람이 그 진흙 발라 눈 띄워 준다고 그랬단다.’ ‘에, 미친놈의 소리.' 으례히 거기도 사람이 많이 따라다녔습니다. 많이 따라다녔으니까 이래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별짓 다 하네. 보자, 그라면 눈뜨는가 보자.’ 하는 사람도 있고 별별 사람 다 있었을 것이요.

그 가는 데도 ‘야, 이 소경아. 네가 참 소경이 돼 가지고 그만치 망하고 또 더 망할라 하나? 뭐한다고 그런 소리 듣고 또 꺼덕꺼덕 실로암 못에 가느냐?’ 별별 소리 다 했지마는 예수님 시키는 대로 순종했어. 순종했어. 실로암 못에 가라 하든지 뭐 어짜라든지 시키는 대로 순종했어.

여게서 우리들이 이 성신의 영감, “옳고 바르고 참되게 너희에게 가르치나니 그대로 행하라” 성령의 인도를 받을 자는 그 방편이 하나는 순종입니다, 순종.

이거나 저거나 순종이라. 그만 순종하는 것이 방편 하나야. 순종하는 것.

인제 또 하나 뭐 있어? 뭣만 있으면 나아요? 뭐 하나 있어? ○○○조사님, 뭐 가지고 눈 떴어? 행하는 것 가지고 눈 떴어? ○○○목사님? 믿음 가지고 눈 떴어? ○○○목사님? 거게 어데 믿음이 있어? 이래도 몰라 놨으니. ○○○선생님? 주님 만난 것으로. 엔간히 됐다.

자, 모두 일등들 다 불러봐야 될 것 같애. ○목사님? 순종. ○○○목사님? 순종.

ct4“““목사님? 허, 지금까지는 다 낙제라. 다 빵점이야, 낙제라 낙제. 인제 이래 놔서 ○○○목사는 또 딴 소리 할란지 몰라. 그거 낙제라 하니까 딴거 답 써보자.

뭐이요? 믿음으로 순종이라. ○목사? 허, 이 봐. 이래 놓으니까 백 목사 가르칠 게 많으니까 골탕을 쥐먹겠어. 한번 가르쳐 놓으면 알면 될 터인데. 거기 뻔히 기록해 있는데 몰라? 저 ○조사님? ct4“조사님이가, 저 ○○○교회? 모르겠고. 확신이고, ○○○? 성경 가지고 대답하면 될 줄 알지마는 성경 학자는 되러다. 깨달아야 되지 그래만 되는가? ○○○선생? 씻고 나았다. 낫고자 하는 소망. 또 저 양산동에 세 주 갔다 왔나 두 주 갔다 왔나? 저 ○집사? 보냄을 받았다. 저 ○선생? 나을 능력이 있다는 것. 참 어렵다. 여게는? 여기도 다 낙제네. 도매금이네. 다 낙제라.

아, 거기 있지 안해요? 진흙 바르고 가 씻으니까 낫지 안해요? 두 가지밖에 더 있어요? 진흙 바르고 씻은 것 두 가지밖에 더 있어요? 이런데 껍데기야. 거기 딴거 뭐 있소? 어데 믿음이 있어? 진흙 바르고 씻으니까 나았지, 믿으나 안 믿으나 주님이, 진흙 바르고   으니까 나았어.

그래, 가서 씻은 것은 순종이고, 가서 씻은 것은 순종이고 그러면 진흙은 뭐일까? 그게 문제라. 요거 잘못 깨달으면 안 돼. 진흙은 뭐일까? 진흙은 뭐라? 주님이 해 주신 것이지. 진흙은 뭐요? 주님이 해 주신 것이지.

진흙 발라 줬으면 진흙 바를 것이고, 그때 가서 눈을 주먹으로 탁 때렸으면 때려서 떴을 것이고, 눈에다 종이로 딱 봉지를 해 가지고 딱 풀로 붙여버렸으면 그래 가지고 씻었으면 떴을 것이고 그거 다 주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일 아니야? 주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것은 진흙 바른 것뿐입니다. 알겠습니까? 주님이 자기에게 해 주신 건 진흙 바른 것뿐이라. 제가 한 것은 시키는 대로 실로암 못에 가서 씻은 것 순종하는 것뿐이라.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건 뭐입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 그거 안 떼 버리고, 진흙 붙여 놓으니까 ‘예, 고맙습니다.’ 하고 ‘가 씻어라' `예' 하고 가 씻고 왔으니 나았어.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그것을 달게 받아요.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을 반대하지 말고 불평하지 말고 ‘이거 가지고 되겠느냐?’ 하지 말고 단마음으로 감사히 받아요.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신 것 감사히 받아요.

주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뭐인데? 진흙을 발라 줘야 감사히 받지.

○○○목사님, 진흙을 발라 줘야 감사히 받지. 그런데 주님이 지금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있는데 해 주시는 것 그거 해 주시는 것 감사히 받고 순종하면 그만 성령받아. 간단해요.

해 주시는 것 받다니? 주님이 뭐 해 주시는데? (현실) 아멘! 따라해. 아멘! 아멘! 우리의 현실은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어떤 현실 줄지라도 주님이 내게 주시는 것이니 나를 살릴라고, 나를 밝게 할라고, 나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가지게 할라고 내 현실은 주님 한 분만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해 주시는 것은 내게 주시는 현실입니다.

현실은 현실이 될 때에는 거게 모든 이용된 요소는 사람도 짐승도 돈도 나라도 사회도 공간도 뭐 시간도 공기도 많은 게 있지마는 그 수많은 것을 종합해 가지고 내 현실로 딱 만들어 주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이해가 됩니까? 이런데 이걸 모르기 때문에 원망 불평이 많지.

이러기 때문에 야고보서 5장에 “네가 원망하지 안해야 심판을 면하리라” 그말이 무슨 말이요? 자기 현실에 ‘이 사람 때문에 저 사람 때문에 요래 잘못 하고 저래 잘못저래 하고 목사가 들어서 자꾸 주일을 지키라 해서 주일 지키다 이래 됐다. 저래 됐다.’ 주일 지키다가 직장이 떨어졌다. 주일 지키다가 징계 처분을 받았다, 주일 지킬라 하다가 폭탄이 와 가지고 다 죽었다. 주일을 안 지키다가 폭탄 맞아 죽었다.

여러분들 연상이 됩니까, 생각이 됩니까? 믿는 사람이 주일 범하다가 폭탄 맞은 것 연상됩니까? 안 되는 사람은 저 무슨 소리인가 이럴 거라.

그래. 자기에게 오는 현실은 주님이 자기를 눈띄워 주기 위해서, 영감받는 사람 영감으로 사는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모르던 완전 영원 불변 참된 것 무궁한 이 생명과 평강과 영광의 충만한 이 세계를 이걸 보고 여게다 가치를 두고 땅의 것을 투자할 수 있는 이 사람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영감의 사람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 현실 만들어 준 것입니다. ‘아멘’ 누가 했노? 속에 아마 깨달아진 모양이라. 옳애.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애. 그래.

이런데 뚱딴지같이 ‘이거는 누구 때문에 그렇다. 누구 때문에 그렇다.’ 주님이 그 모든 것을 이용하셔 가지고 나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현실을 만들어 주셨는데 이 만드신 주님도 모르고 이 가치의 효력성도 모르고 경솔히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누구 때문에 이렇다. 뭣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하면 너는 심판받는다.

“심판을 받으리라” 정죄받는다 멸망받는다 그말이오. 이걸 깨달아야 돼요.

이러니까 주님이 나에게 만들어 주시는 현실이니 어떤 현실이든지 너는 내 눈을 띄우는 나를 살리는 현실, 내 눈을 띄우는 현실, 나에게 영감으로 충만케 하는 현실, 나의 참사람으로 강건케 하는 현실, 내가 보지 못한 것, 가지지 못한 것, 얻지 못한 것 다 이것을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시기 위한 사랑의 주님의 역사의 현실인 것을 알고 감사히 받아야 돼. 감사히 받아.

감사히 받고, 현실은 감사히 받고 ‘주님이 이 현실 속에는 굉장한 것이 있다. 이 현실을 통해서 내 영원한 구원에 필요한 굉장한 것을 주신다. 뭘 주실란지?’ 그라고 난 다음에 할 것 뭐이요? 그라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그 현실에서 요렇게 하라든지 저렇게 하라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양심써서 깨달아서 ‘요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저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이다.’ 주님의 뜻을 바로 찾아 가지고서 거게서 행해. 그럴 때는 더듬을 게 없어.

어떤 사람이 나한테 묻기를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만 알면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뜻이 뭐인지 몰라서 못 한다.’ 아니야. 그 현실 줄 때는 하나님께서 그 현실에서는 요라는 게 하나님의 뜻이다’ 하는 것을 정확히 똑똑히 가르쳐 줍니다. 어실므실하지 안해. 똑똑히 가르쳐 줘.

거게서는 ‘요게 하나님의 뜻은 뜻인데 그라면 내가 손해가 가겠고 이러니까 여게서 어떻게 비틀 수 없나? 요리 조리 좀 비틀 수 없나? 요렇게 좀 비틀어서 둘러 갈 수 없느냐?’ 자기 현실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는 이것은 아나 모르나 그거 어려운 게 아니오. 실은 양심쓰면 똑똑히 압니다.

그럴 때에 옛사람이 제일 하기 싫은 길이거든, 옛사람이 제일 하기 싫은 길, 저를 중심 위주하여 제일 하기 싫은 그 길이 주님 중심 위주 하면은 원하시는 그 길입니다. 알겠어요? 그대로 순종하면 돼. 그대로 순종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요. 이 방편이야, 이 방편.

자, 이 방편 가지고 안 떨어질까요? 눈이 안 열릴까요? 안 열리겠어요? 그러면 진흙은 자기 현실로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맞아요 안 맞아요? 얼마나 맞아? 생명 바칠 만치 확신이 있어? 생명 바칠 만치 맞아요? 맞아요. 생명 바치면 유익이지 손해 없어요. 알겠습니까? 둘만 하면 떨어져. 둘만 하면 떨어지는데 그 후유증이 있어, 후유증. 뒤가 고통스러웠어. 뒤에 잘못된 증세 있는데 그것을 잘 치료를 돼야 돼요.

오늘 아침에는 뭐 배웠습니까? 교리와 신조는 뭣보다 귀해요? 또 뭣보다 귀해요? 소유보다 귀해요. 또 뭣보다 귀해요? 몸보다 귀해요? 또 뭣보다 귀해요? 생명보다 귀해요. 우리의 남은 여생은 어디다가 바치요? 또 모르네. 우리의 남은 여생은 어데다가 바치요? 내가 깨달은 교리와 신조에 바치지. 이것을 여러분들이 오늘 작정하는 것입니다.

남은 여생은 어디다가 바치요? 여게서 자기가 자기 교리로 신조로 정하는 것은 뭣 하는 것을 정하는 것이라요? 이거 자꾸 핀트가 안 맞아. 여게서 자기 교리와 신조로 확정짓는 것은 뭣을 정하는 것이라요? 예. 자기의 남은 여생을 솔빡 그 길로 바칠 것을 작정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자기 교리와 신조로 작정하는 것은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거게 솔빡 다 바쳐도 손해 없고 바쳐야 되겠다, 바치기를 원하고 원하는 그 길을 작정하는 것이 자기 교리와 신조를 작정하는 것입니다. 맞습니까? 저 뒤에, 맞습니까? 그거 오늘 아침에 다시 한번 새롭게 해서 배웠습니다.

여게서 나면서 눈먼 자, 나면서 눈먼 자는 무슨 눈이 없는 사람이라요? 무슨 지혜의 눈? 그냥 지혜의 눈이라 하면 안 돼요. 성령의 명철한 지혜의 눈이 없는 사람이오. 알겠습니까? 예수 안 믿는 사람들 그 지혜의 눈 다 뜨고 있어요 전부 하나도 못 떴어요? 날 때부터 못 떴어요 중간에 못 떴어요? 날 때부터 못 떴어. 날 때부터 못 떴어.

또 셋째로 하나 배운 것은, 그 많은 사람들이 죄관을 말했는데 ‘이거 부모의 죄입니까 제 죄입니까?’ 죄관을 말했는데 그들이 삐뚤어진 것, ‘이것은 삐뚤어졌다 이거는 옳다,’ 그들이 삐뚤어진 것을 본 그 삐뚤어진 관이 맞았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틀렸다고 했어요? 맞았습니까 틀립니까? 틀렸어, 틀렸어. 세상이 말하는 삐뚤어진 관을 받아들이지 말아요. 여게도 생명 바쳐야 돼.

그라고 난 다음에 소경이 눈 뜬 것은 몇 가지 방편으로 떴어요? 손가락으로? 손가락으로? 두 가지. 하나는? 진흙 이긴 것, 주님이 진흙 이겨서 발라준 것.

주님이 해 주신 거는 둘뿐이오. 진흙 이겨서 발라 준 것, 또 하나 뭐이요? ‘실로암 못에 씻으라’ 이렇게 명령한 것 그 둘밖에 없어. 이 둘이면 눈이 뜹니다. 이 둘이면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됩니다. 이 방편은 실수가 없어. 천인 만인이 다 이 방편 하면 다 떠요. 믿어집니까? 교리로 정했습니까? 교리로 정했습니까? 생명 바칠 교리로 정했습니까? 됐어.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해요, 확정. 확정. 내가 이대로 살라면 앞으로 어떤 그 애로가 있을 것도 알고 확정해요. 뭣뭐 바쳐서 살 것 확정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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