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구원은 겨자씨 구원, 작은 것부터

 

1987. 8. 4. 오후집회 (화)

 

본문:에베소서 1장 17절∼23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오늘에 이 공부하는 가운데에서 전체적으로 하나 깨달을 것은 기독교의 구원은 다 점진적이요 점강적인데, 점점 앞으로 나아가고 점점 강해지고 또 점점 깨끗해지고 점점 온전해지는 이 성장의 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장이라 하는 것은 다른 가식을 거기다 넣으면 그거는 병이 됩니다. 크든지 작든지 그대로 커야 되지 거기에다가 어떤 사람은 만일 팔이 좀 크게 할라고 팔에다가 딴걸 붙여 가지고 크게 되면 그거 병이 됩니다. 또 자기는 뭐 눈이든지 뭐이든지 그런 것도 정상적으로 커 나가도록 해야 되지 그것을 딴것을 붙여 가지고서 키우면 그것이 나중에 가서 고장이 납니다.

요새는 뭐, 뭐라 하는고? 이거 얼굴을 이래 저래 하는 그거는 무슨 뭐라 하노? 성형? 어? 성형외과라 하나? 그런 걸로써도 이래 약품을 가지고 이리저리 이래 해 놓으면 뒤에 가서 화근이 되고 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생명의 도이기 때문에 차차 차차 자라가면서 되는 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기독교의 구원을 자기가 이룰려고 하면서 여러 면으로 보고, 여러 면을 살펴보고 이 면도 자라야 되겠다 저 면도 자라야 되겠다 모든 전면적으로 애를 쓰면 그 사람의 구원이 온전하고 구비한 구원이 되는 줄로 알아도 그것이 안 됩니다. 나중에 가서 그 사람의 구원은 가짜배기가 돼서 다 생명 없는 모든 외식이 되고야 맙니다.

그러기에 여러가지를 시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꼭 지극히 작은 거 하나라도 그것을 바로 시작해서 하면은 하나가 둘되고 둘이 셋되고, 약한 것이 자라서 강하게 되고 그렇게 점차적으로 이렇게 돼 나가는데 돼 나가는 그 모든 것은 다 필연적이라 그런 것을 이번에 많이 말했습니다. 요거 하나를 여러분들이 잃지 안해야 됩니다. 필연적이라 필연성이라.

필연적이라 필연성, 필연적이라 하는 것은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이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는 그런 것을 가리켜서 필연적이라 그렇게 필연성이라 말합니다.

그런고로 무엇이든지 하나만 시작하면 모든 다른 것이 차차로 다 됩니다.

그러기에 이 진리는 그 한 진리를 바로 행하게 되면은 그 한 진리 속에 들어가면 두 가지 진리, 열 가지 진리, 백 가지 진리, 천 가지 진리가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입문은 한 진리를 붙들고 시작할라고 하고 나가 보면은 수많은 진리가 그 속에 다 있어서 수많은 진리를 필연적으로 자기가 접하게 되고 관련하게 되고 구비하도록 되어집니다.

또 여러 수천 수백으로 이 나타난 진리지마는 그 진리를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은, 그 진리 안으로 파고 들어가 보면은 내나 하나입니다. 하나요 그 진리를 또 밖으로 이렇게 찾아서 나가 보면은 모든 진리가 다 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단일성의 진리라 그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독교는 자기가 한 진리라도 거머쥐고 진실함으로 그 진리를 진실한 믿음을 가질 때에는 그 한 진리에서 어데까지든지 자라가고 또 광대해 갈 수가 있습니다. 한 진리라도 진실되게 자기가 자기 구원 도리로 영접해서 믿어 나가면 됩니다. 한 진리라도 진실함을 가지고 믿으면 그 다음에 많은 진리를 다 자기가 깨달을 수도 있고 또 가질 수도 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몇 가지가 합해서 믿음이 된다고 했습니까? 세 가지가 합해 가지고서 믿음이 됩니다. 세 가지가 합해 가지고서 믿음이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세 가지가 합해야 온전한 믿음인데 어떤 사람들은 그 중에 혹 하나 혹 둘 이래 가지고 믿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리 되면 자기는 믿음인 줄 알고 지키는데 그 믿음이 실상은 진짜가 아니고 가짜이기 때문에 자기는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믿으니까 옳으면 하나님이 동행할 줄 알고 분명히 믿는데 동행자는 하나님이 아니고 악령이 그를 붙들고 역사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꾸 믿을수록 그 사람이 탈선돼 나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이래 보든지 그리 안 하면 또 교역자들을 이래 서로 상대해 보든지 이럴 때에, 진실한 믿음으로 출발만 하면 됩니다. 진실한 믿음으로 출발만 하면 필연적으로 그 사람은 예수를 잘 믿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열 가지 스무 가지 뭐 백 가지 모든 것이 구비해서 그 사람은 아주 모든 면이 구비하고 참 원만하다고 이렇게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펴보면 진실한 믿음이 하나도 없는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순전히 마귀로만 자꾸 이리 접해 가지고서 나가는데 그것을 가리켜서 외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외식. 그래서 “거룩한 자는 점점 거룩해지고 더러운 자는 점점 더러워진다”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래서 요번 공부하는 데서 기독교는 모든 구원 이루는 것이 다 필연성이라.

필연성이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도록 돼 가지고 하게 된다. 그러니까 필연성이 어데서부터 시작하는고 하니 진실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거, 아주, 뭐 큰 것부터 하라고 하지 안해요. 지극히 작은 거 하나를 진실되게 할 때에 그 다음에는 차차 차차 큰 것으로 많은 것으로 이렇게, 질도 점점 좋아지고 양도 점점 좋아져서 광대하고 높고 깊은 그런 신앙으로 자라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한 진리라도 진실함의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진실함의 믿음을 가지지 안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지식이 자라가는 것도 진실함의 믿음에서 점점 자라가고, 능력도 진실함의 행함에서 점점 능력이 자라가고, 모든 은혜를 바라는 것도 은혜를 받을 준비하는 것도 은혜 받는 것도 전부 그 진실함에서만 되어지지,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구원은 진실이 씨라 그렇게 할 수 있어. 진실이 씨라.

그래서, 요한계시 3장에 보면은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나타나기를 “나는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거룩하고 진실하사”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빌라델비아 그 교회가 아주 보잘 것 없는 교회이지마는 그 교회가 하나님 앞에 제일 칭찬 받은 교회입니다. 그 일곱 교회 있는 중에 빌라델비아 교회가 제일 하나님 앞에 칭찬을 받은 좋은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된 것은 뭐이냐? 거룩과 진실을 가진 데에서 그렇게 됐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그것은 지저분한 많은 것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자꾸 구별하고 구별하고 자꾸 구별해 가지고서 온전함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거룩이라 말은 모든 못쓸 거 잡된 것을 다 제거한다 그말입니다.

“모든 것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다 녹아지리니” “이 모든 것이 이렇게 불에 타서 풀어지고 녹아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그 준비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그렇게 말했는데 거룩이라는 그것은 모든 못쓸 것을 자꾸 제거하는 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말하고 또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가 마련한 것 가지고, 마련한 것 가지고서 온전을 건설해 나가는 것을 가리켜서 경건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는 요 필연성이라.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을 붓고 불을 때면 물이 뜨거워지는 거 그거 뭐입니까? 그게 다 필연성입니다. 물 붓고 불 때면 뜨거워지는 것 필연성입니다. 또 사람이 점점 나이가 많아가면은 어찌 됩니까? 죽는 그것도 다 필연성인 것입니다. 그거는 면할 수 없는 그 순서라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의 구원은, 기독자의 구원은 다 필연성의 것이라 하는 요것을 여러분들이 하나 굳게 잡으면 아주 힘이 됩니다. 다른 거 못 가져도 이거라도 하나 가져 가십시오.

거짓부리를 하나 하면 그 하나 거짓부리를 하게 되면은 둘 거짓부리 하게 되고 셋 거짓부리 하게 되고 점점 거짓부리 하게 됩니다. 외식도 필연성입니다. 그것도 외식하고 나서는 그것을 그만 이번만 하고 말지 싶으지마는서도 외식하면 자꾸 외식이 자꾸 외식으로 큰 외식으로 자꾸 그와같이 부패에 나아가게 되는 것이오.

또 지식도 필연성이라. 이래서 필연성이라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ㅡ그 뭘 자기네끼리 뭘 소근거리고 있어? 저 집사님 연세 얼마라요? 연세 얼마입니까? 알지 않아, 몇 살? 팔십? 나이가 몇살이라, 나이가? 칠십여섯? 칠십일곱이면 인제 엔간히 시험차릴 때가 됐는데 좀 인제 거석해. 집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오늘도 또 실수 한번 했어. 하나님 말씀 듣는데 자꾸 둘이 얘기만 자꾸 하고 있으면 어짜는고? 자세히 들어.

그래, 우리는 이 기독자의 구원은 모든 것이 다 필연성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도 하나 지으면 둘 짓고 자꾸 이렇게 돼. 그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불의하다” 자꾸 그렇게 말했어. 또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하는 그말은 의롭다 그말인데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지극히 큰 데도 충성되다” 그렇게 그거는 의를 가리켜 말합니다. 인간의 의는 충성이 의지 가치가 의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이 사람에게는 의가 돼도 저 사람에게는 의가 안 됩니다. 이 사람에게는 한 냥중만 해도 의가 되지마는 저 사람에게는 백 냥중을 가져도 의가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백열 냥중을 가져야 될 사람이 백 냥중 가졌으면 의가 아니고 죄가 됩니다. 그러면 전력을 다 기울여도 한 냥중밖에 못 가질 사람은 한 냥중만 가져도 의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의는 그 행위의 가치를 가지고서 의라 불의라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의 충성 여하를 보고서, 충성을 가지고서 의라 불의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심판받는 심판은 하나님의 공심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공심판은 충성으로 보지 안하고 실지의 실존의 가치로 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작은 것이라도 아무리 충성해도 작은 것은 작은 것이고 적은 것은 적은 것이지 충성했다고 작은 것을 크게 보지 않습니다.

그거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하는 심판이고 우리가 받을 심판은 그리스도의 심판이니 사심판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대속하신 성도들을 보고 당신이 어떻게 인정하시느냐 하는 인정에 따라서 모든 심판이 되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있는 힘을 다하면 그 사람은 됐고 아무리 그 사람이 위대한 일을 했다 할지라도 있는 힘 다하지 안하고 남궈 놓고 조그매만 했으면 그 사람은 불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의롭게 보이나 불의하게 보이나 하는 그것은 아무도 다른 사람은 모릅니다.

자기만 압니다.

그러면 목회를 하는 것도 그 교회의 교인의 수가 자꾸 늘어나가고 이렇게 하면은 그 목회 잘한 것 아닙니다. 또 그 교인들의 신앙이 잘 자라간다고 목회 잘한 것 아닙니다. 목회를 자기가 잘했는지 안했는지 하는 것은 다른 사람 아무도 모릅니다. 껍데기 양을 보고 질을 보고 그런 것밖에는 안 보는데 그런 것만 보고는 그게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보니까 옛날 보이던 사람 하나 안 보인다. ○○○목사님? 어데 있어? 어데? 딸 시집 보냈어? 안 보이는데. 어데 있노? 어데? 보자 보자, 머리 들어 봐.

딱 요라고 있는 저거로구나. 거기에 딱 숨어 가지고서 그래 앉았구나.

그래, 이 필연성이기 때문에 그저 크고 작은 것이 필요 없고, 다른 거 말하다 말았지요? 그러면 목회 잘하고 못하는 건 다른 사람은 몰라요. 칭찬 받을란지 책망 받을란지 다른 사람은 모르지마는 자기는 압니다. 아무도 몰라요. 결과의 그 양을 보고도 모르고 질을 보고도 모르고 아무도 모릅니다. 자기만 알아요. 그 목회를 잘했는지 못했는지 하나님 앞에 상을 받을란지 이제 책망을 받을란지 그것은 제삼자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결과의 양을 봐도 모르고, ‘질이 참 좋다’ 그렇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양이 많아진다’ 그것도 되는 것 아니고 꼭 자기만 압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자기만 알다니? 자기만 알다니 무슨 말이야? 우리 ○목사님 한번 또, 미국 목사 ○목사님 물어볼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아는데 어떻게 해서 다른 사람이 모르고 자기만 알아, 그래? 양도 봐도 보이지도 안하고 결과도 뭐뭐 질도 봐도 보이지 안하고 그런데 자기만 알 수 있어. 자기 목회하는 것을 주님이 칭찬하실란지 책망하실란지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알아요. 어찌 그럴꼬? 슬그머니 앉았어도 다 속으로 보고 앉았기야 앉았구만. 하와이 교회 잘 돼요? 녜, 자기만 알아. 자기만 아는 것은 자기만, 자기가 충성하는지 안 하는지, 자기가 있는 힘을 다 했는지 안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자기만 알아.

다른 사람은 이렇게 목회의 질도 좋고 양도 좋고 이렇게 교회가 부흥되니까 ‘참 저 사람은 상급 많이 받을 것이고 주님이 칭찬하시겠다’ 이렇게 해도 저는 저를 알아. ‘내가 더할 수 없게 충성을 했나? 내가 충성하지 안하고 내가 외식으로 껍데기로 게을하고 찌꺼기나 하나님 앞에 바치고 그렇게 했나?’ 자기는 안다 그거요. 녜, 그건 조금 외로 나간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모든 것이 다 필연성이라. 이러기 때문에 좋은 것도 필연성이요 나쁜 것도 필연성입니다. 이거는 안 될래야 안 될 수 없도록 죄도 자라가고 의도 자라가고 자라가기 때문에 생기면 차차 차차 자라가게 마련이라.

그러기 때문에 누가 말하기를 ‘도고일장에 마고일장이라’ 도가 한 길 자라면은 마귀의 역사도 한 길 자란다 그렇게 누가 그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아주 깨달은 말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 기독자들은 그저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서 이렇게 덤비지 말고 꼭 진실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여기에도 이리 저리 이리 하고 저리 하고 해 가지고서 사람들에게 간판을 가져야 되겠다. 다른 사람이 알아줘야 되겠다. 또 이런 면으로 저런 면으로 광문다학으로 널리 듣고 많은 소리를 듣고 또 많이 독서를 해서 그렇게 알아야 된다 이렇게 하는 그 식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식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식은 “지극히 작은 것 바로 되면 지극히 큰 것까지 바로 된다” 요렇게 지금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그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식입니다.

이러니까 여기에저게 여러가지를 할라고 하지 말고 “네가 많은 일로 분주하였으나 혹은 몇 가지 하나만 해도 족하다” 하는 것은 어짜든지 그 하나에서라도 진실만 되면 됩니다. 이러니까 요 방식을 취하지 안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나중에 보면 그만 시기가 지나가 놓으면 이제 이상하게도, 처음에는 그래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너무 자기 실력보다 간판이 커져 놓으면 나중에 그게 우상이 돼 버리고 맙니다.

과거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을 못 했습니다. 서기관이라면 성경 잘 아는 사람들이요 또 제사장이라 하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 역할 하고 있는 것이 제사장이었는데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를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를 못했어.

영접하지 못한 그 이유가 어데 있는가? 자기들은 벌써, 왜 그렇게 영접하지 못했을까? 예수님이 참 옳은 선지자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들이 알았습니다. 또 예수님의 교훈이 그것이 옳은 교훈이라는 걸 몰랐을까? 알았습니다. 그랬는데 왜 그래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고 나중에 예수님을 배척하게 됐습니까? 어째 그랬지요? 고정 관념과 선입관념이라 하는 거 그것은 없는 사람이 있어야? 다 있는데. 그거 없는 사람 있어요? 그거 없는 사람 있습니까? 없는 사람 하나도 없어요. 많고 적고뿐이지 다 있어요.

다 있는데 그것 가지고서 그런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실제보다, 실제로 자기가 자라갈라고 하지 안하고 그만 껍데기 외식으로서 껍데기가 커졌습니다. 실력 없는 지위를 가졌고 실력 없는 간판을 가졌고 그만 실지의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커져버렸어.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커져 놓으니까 그만 그게 날아갔다 그거요.

조그만한 서숙알, 서숙알 그것도 바람이 불어도 안 날아가고 알곡은 찰찰 처지고서 다 쭉정이만 날아가 버립니다. 이런데 어북 크다란 콩깍데기 이거는 큰데도 알맹이 없이 쭉정이는 다 날아가 버립니다.

작은 것이 비어도, 말하자면 그 뭐라 할꼬? 그 형태에 비해서 가볍기 때문에 날아가고 또 큰 것도 그 형태에 비하면은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가벼우니까 날아가 버리는 것입니다.

이래서, 외식으로 자라가는 것은 그것은 다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로 자라가는데,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커지면은 그것은 위험합니다. 알맹이보다 껍데기가 커지면 날아가기 쉽습니다. 날아가기 쉽소.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커지면,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커지면 그것은 또 고장나기 쉽습니다. 껍데기보다 알맹이가 커지면 안 자라고 속에 크니까 툭 그만 터져서 갈라져 버리요, 그만. 갈라져 버리면 그거 또 구실 못 해.

알맹이하고 껍데기하고 꼭 같이 자라나가야 되는 것인데 그 같이 자라나가는 방법은 진실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뭐 유력한 사람 되기도 쉽고, 권능 있는 자 되기도 쉽고, 하나님 기뻐하는 사람 되기도 쉽고, 또 위대한 교역자 되기도 쉽고, 이거 그래 모두 되기 쉬운 것은 뭐이냐 하면은 이거는 저절로 된다 그거요, 저절로. 저절로. 필연적이라 하는 거는 뭐 할라 하는 게 아니라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고 저절로 되는 거라.

저절로 되는 것.

저절로 되기 때문에 기독자는 무엇이 제일 중요합니까? 저절로 돼 나가. 어? 진실은 커도 진실이 있고 작아도 진실이 있는데 뭐, 만일 이만한 것이 요맨만한 진실이 있으면 어때요? 껍데기는 이렇츰 큰게 속에 진실은 요만치만 있으면 그거 어찌 돼요? 그거 다 망하고 날아갑니다. 그저 자기 형태대로 진실하면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요 필연성으로 자라간다는 요것을 굳게 잡고 언제든지,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 제일 중요한 것이냐? 자, 큰 데서 시작해야 됩니까 여러 군데서 시작해야 됩니까? 큰 데서 시작해야 됩니까 여러 군데서 시작해야 됩니까 작은 데서 시작해야 됩니까 어째야 됩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작은 데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여러 군데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까 한 군데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까? 한 군데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지금 자꾸 이래 말해도 무슨 말인지 지금 못 알아듣고 벌로 듣고 대답하기 쉬워.

여러 군데서 시작한 거, 이것도 한번 해 보자. 이것도 한번 여기 시작해서 이것도 해야 되겠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양사방 여러 군데서 시작해 가지고서 할라는 사람이 있고, 자기 구원 이루는 구원을 여러 군데서 시작해 가지고 구원을 이룰라 하는 사람이 있고, 또 큰 것부터 추럼추럼 해 가지고서 구원 이룰라 하는 사람이 있고,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시작하는데 작은 거 하나를 시작해 가지고서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가지고서 구원을 이룰라고 하는 사람 있고 이래 한 셋 종류가 있다고 하면은 큰 데서 차지하는 것도 다 실패 여러 군데서 할라 하는 것도 실패.

이제 이 말을 여러분들이 듣고 난 다음에는 여러분들이 자기를 볼 게 아니라 “남을 보아 깨달아라” “남을 보아 깨달아라” 사람은 “남을 보아서 깨달아라” 그러니까 우리가 다른 사람을 논평하기 위해서, 논평 심판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이렇게 이 비판하고 평가하는 거 못씁니다. 자기가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그것을, 심판적으로 한다 말은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서 ‘요 사람은 요런 사람이라’ 딱 정하는 그것이 심판적으로 모든 사람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이니까 그런 일은 우리가 하면 안 됩니다. 그거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리로 하기 때문에 그 월권 행위기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그러나 자기가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기 위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른 관계를 하기 위해서, 그러면 이것을 위해서는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모두 다 봐야 됩니다. 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이런 저런 사람 모든 사람을 보라고 그래 말한 데가 어데 있습니다. 보라고 말한 데가 어데 있어? 우리 성경 제일 잘 아는, 뭐 물으면 다 알아요. 절수도 뭐, 신구약 성경 물으면 다 압니다. 물으면 어데어데 다 알아. 우리 ○○○목사님이 어데든지 말하면 어데 하면 다 알고 있어. 참 좋은 그 실력을 가졌습니다.

자, 모든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봐라, 남을 보아서 깨닫도록 살펴봐라 하는 그게 어데 있어요? 어데 있어? 빌립보 2장 어데 또? 해 봐. 에이고, 그거는 안 됐구만.

성경을 다 알아도 절수만 잘 알고 그저 외우기만 하지. 저 ○조사? “우리에게” “우리에게” 그래. “우리에게 허다한 간증자들이 있으니” 허다한 간증자들을 뭐라 하요? 구름같이 둘러 있다 했소? 그 안개 끼일 때 말이요, 안개가 자욱하면 우리를 폭 싸고 있지 않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저 사람 저 사람 이 구름 같은 수많은 사람들을 봐라.

심판적으로 보라 말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의4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가 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기 위해서, 자기가 구원을 배우기 위해서 그렇게 모든 사람을 보라고 했다 말이오. 그거 확실하지? 그러니까 이 사람 저 사람 보라고 하는 건데 그것을 남을 봐 가지고서 우리가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볼 때에, 보자 저 사람은 큰 것만 찾아 돌아다니면서 아주, 일본 말로 야마가끼라 하는 게 있는데 공부를 하면 저 만당만 제일 절정되는 것만 덜펑덜펑 그렇게 공부하면은 그 사람 백점 맞아요. 그 공부할 때 시험 공부 한다고 오래 꼼꼼하게 하는 그 사람은 백 점 못 맞는데 하루밤에만 이거 좀 머리만 두리 떠 가지고서 하면은 그만 다 받아.

그런 거와 마찬가지로 저 사람은 어찌 됐던간에 위에 제일 거튼거튼 제일 큰 것만 지금 거두고 다닌다. 그거 볼 수 있어요. 저 사람은 큰 것만 거두고 다닌다.

또 저 사람은 또 여러가지를 지금 거두고 돌아다닌다. 여기에 저게 분주하게 이거 저거 여러가지를 거두고 돌아다닌다. 또 저 사람은 큰 것도 여러가지도 아무것도 하지 안하고서 저 사람은 게을을 부리고 있다. 그렇게 볼 수 있어요.

자, 우리 ○목사님은 여러분들이 어찌 보입니까? ○목사님은 어째 보이요? ○○○목사님은 어째 보이요? 다른 사람이 ○○○목사를 볼 때 말이오. 어째 보입니까? 큰 것만 찾고 돌아다니는지, 여기에 저게 골고루 구비해야 된다고서 여러 것을 찾고 돌아다니는지, 게을을 부리고 있는지, 하나만을 잡고 요게서 시작해 가지고서 내가 진실로 잡아 나가겠다고 하나만을 붙들고 거기에서 커 나가고 있는지? ○목사님 자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그 너이 중에 어느 거라? 저 부산 있을 때에는 좀 게을하기는 게을하지마는 하나만 가지고 좀 진실로 자라갈라고 애를 썼는데 요새는 서울 가 가지고, 내가 똑똑히는 모르지마는 이것 저것 여러가지를 찾고 다니는 것 같애. 여러가지를 찾고 다니고 또 큰 것만 찾고 다니고.

이러니까 그걸 소위 가리켜서 뭐라 합니까? 그거 이름이 뭐입니까, 그라고 다니는 것이? 뭐? 허영? 그것의 이름은 외식입니다. 허영도 되고 외식도 되는데 그라면 안 돼요. 꼭 성공하는 사람은 요거라야 됩니다.

큰 것도 자기는 보지 말고 많은 것도 보지 말고 ‘기독교 구원은 필연적이라더라’ 이러니까 꼭 지극히 작은 거, 자, 큰 거 하기가 쉬워요 작은 거 하기가 쉬워요? 작은 게 하기 쉬워. 작은 게 하기가 쉬워, 작은 거 하기가. 작은 거 하기가 쉬워. 작은 거 하기가 쉬운데 그러니까 하나만 하는 데는 큰 걸 잡아야 돼요 작은 걸 잡아야 돼요. 작은 걸 잡아야 돼요, 작은 거. 큰 거 잡으면 내가 힘에 버거워서 안 되거든. 아예 제일 작은 거 홀가분하게 할 수 있는 거 제일 작은 거 그걸 하나 딱 잡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는 물샐틈 없이 진실히 합니다.

진실히 하다니? 그거 진실히 하다니? 몇 가지로 진실해 해요? 손가락으로, 몇 가지로 진실히 해요? 몇 가지로 진실히 해야 돼요, 몇 가지로? 여기에는 몇 가지로 진실히? 이 세 가지로 진실히 해야 돼. 거기에 대해서 진실히 해야 돼.

똑똑히, 요것을 똑똑히 알라고 바로 알라고 어찌 됐든간에, 뭐 다른 거 냅두고 요거 하나를 바로 알고 옳게 알고 또 깊이 알고 바로 알라고 애를 쓰고, 바로 알라고 애를 쓰고 또 그것을 자꾸 따지고 따져 가지고서 자기가 진실된, 거기에 대해서 고거 믿을라고 애를 써요, 인정할라고. 인정할라고 애를 쓰고 이제는 그 다음에 남은 것은 그대로 실행을 할라고 애를 써요. 고거 하나 실행할라고 애를 써요.

그거 하나 실행할라고 애를 쓰면은, 그거 하나 실행할려고 애를 쓰면은 마지막에는 그거 하나 실행할라고 할 때에 얼마나 어려움이 오지요? 저 목사님이지? 어데, 경주에서 왔습니까? 저 목사님. 어데서 오셨지? 예, 어데서 오셨지요? ○○교회? 아니가, 내가 어데, 여기에 자주 다니는데 목사님 똑 얼굴 같아서 내가 목사님인 줄 알았는데.

자기가 제일 작은 거 그거 하나를 자기가 바로 알라고, 그걸 바로 알라고 애를 씁니다. 바로 알라고 애를 써서 거기에 대해서는 ‘요거는 옳다, 요거야 틀림 없다, 요거는 바로 알았다.’ 그거 하나에 잘못됨이 없이 그것을 참 온전히 바로 알았어요. 그걸 바로 알았습니다. 그거 하나를 바로 알았어.

바로 알고 그 다음에 여기에 대해서 내가 시험해서 내가 믿나 안 믿나 그것을 자꾸 따져 가지고서 틀림 없는 진실한 그 믿음을 가지고, 그대로 ‘요거는 확실하다’ 요거는 인정하는, 믿음이 인정 믿음을 말하는데 확실히 자기가 인정을 합니다.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그거 하나를 실행을 할라고 합니다. 그거 하나를 실행을 할라고, 다른 거는 다 냅두고 그거 하나 지금 실행을 할라고 하면은 어떤 애로가 옵니까? 그거 하나 실행할라고 하면은 어떤 애로가 오지요? 어느 정도의 애로가 올란지? 그거 하나 실행할라면, 평소에 그까짓 거야 하기야 뭐 힘들어? 아주 쉬운데 그거 하나를 실행할라고 하면은 그것도 어데까지에 어려움이 오겠습니까? 좀 땀 흘릴 만치 어려움이 옵니까 어데까지 어려움이 옵니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지 안하면 실행할 수 없는 그런 단계가 자꾸 말려오게 됩니다.

이래서 그거 하나 실행할라고 해 보니까 이제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서라야 실행하는 그 단계 있으니까, 하나이지만, 믿음은 하나이지만 그거 하나 하고 나면은 하나의 그 종자의, 이름이 같아도 그거는 제일 작은 종자인데, 겨자씨 종자인데, 제일 작은 것인데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것도 진실하고 믿는 것도 진실하고 행함도 진실하고 그 겨자씨만한 믿음이지마는 그것이 진실이라는 그 종자입니다. 진실이라는 종자 그 종자를 가졌으면 그 진실이라는 종자가 자꾸 커 나갑니다. 커 나가서 나중에 가서는 “나물이 나무가 돼 가지고서 모든 공중에 나는 새들이 깃들이느니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고거 하나 진실이 되면은 자꾸 그 진실이 커 나갑니다. 그거 하나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또 실행하고 그라니까 그것이 필연적으로 자꾸 필연적으로 자라갑니다.

필연적으로 자라가는데, 필연적으로 자라가는데 뭘로 자라갑니까, 필연적으로 자라가는데? 뭘로 자라갑디까, 여러분들이 해 보니까. 필연적으로 자라가는데 뭘로 자라갑니까? ○○○선생? 진실로 자라간다. 녜, 진실로 자라가지요. 또? 믿음으로 자라간다.

믿음으로 자라간다 말도 옳고 진실로 자라간다 말도 옳은데 그러면 그것이 믿음으로 자라간다 진실로 자라간다, 그러면 모두 믿음으로 자라가지요. 믿음으로 자라가는데 믿음으로 자라간다는 말은 해석을 붙여야 되겠어. 믿음으로 자라가다니, 뭘로 자라가? 지식과 인정과 실행으로 자라간다 말 아니요? 그러면 그뭐 하나뿐인데 뭘 지식과 세 가지가 있어? 녜, 믿음으로 자라간다는 말 맞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자라간다는 말이 맞은데 그것을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그냥 얘기한 것은 신앙에 자기 지식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라.

한 진리를 알면, 지식하고 인정하고 실행하고 요 세 가지인데, 한 지식을 알면 지식은 지식으로 자라갑니다. 한 지식을 알면 두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두 지식을 알면 세 지식을 가지게 됩니다. 또 그 하나를 인정하면 둘을 인정하게 되고 둘을 인정하면 또 셋을 인정하게 되고, 하나를 실행하면 그 다음에 둘을 실행하게 되고 둘을 실행하면 셋을 실행하게 되고 자꾸 이렇게 점점 실행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종자를, 종자를 진실한 종자를 가지고서 심어 놓으면은 자꾸 그거 자라기를 진실로 자꾸, 진실의 것으로 자라갑니다. 자라가는데 외식으로 심어 놓으면은 그놈은 종자가 외식이기 때문에 자꾸 자라가는 것도 점점 외식이오.

그거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 허영과 허욕을 가지고서 날뛰는 사람이 그 사람이 자꾸 오늘보다 내일 작아지고, 내일보다 모레 작아지고, 또 젊을 때보다 늙어서 작아지고, 늙을 때보다 죽을 때 작아지고, 또 죽고 나서 다음에 부활할 때 더 작아지고, 부활하고 나서 또 심판대 받을 때면 더 작아지고 자꾸 작아지는 이것이, 아주 불쌍한 가련한 자가 됩니다. 거짓부리로 가지고서 거짓부리 종자를 심어 가지고 사는 사람은, 어? 안 들린다 해? 저 사람들이 말이요, 듣고 있다가 안 들리니까 애가 터져 저러는 것 같으면 참 좋은데 그 공연히 이래 가끔 가다 듣고 있다가 저래 하는지? 들립니까? 암말도 안 한다. 그래, 그래서 여러분들 종자가 진실된 종자도 있고 거짓된 종자도 있고, 어? 기계가 한 대 나갔어? 너무 범위가 넓어 안 그러나? 자, 우리 또 찬송 한번 합시다. 136. 인제 136 하는데 이것도 좀 깨달아야 돼요.

‘언덕을 떠나서’ 언덕은 무슨 언덕입니까? 언덕은 무슨 언덕이지요? 언덕은 자기 주관 옛사람 그놈 떠나는 것입니다. 옛사람 떠나는 것, 또 세상 소망 떠나는 것, 땅에 소망 떠나는 것 또 자기 옛사람 자기 떠나는 것, 이놈만 떠나면 영 좋은데 그걸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주저하고 있어요. ○목사님 뭐하고 있지? 요새 부지런히 힘써? 자, 그라면 136. ‘언덕을 떠나서’ 자기 떠나고 세상 떠나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바다로. 자.


선지자선교회 내 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큰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닷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왜 너 인생은 언제나 거기서 저큰 바닷물을 보그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한번 헤아려 안 보나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많은 사람이 앝은 물 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 보고 맘이 조려서 못 가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창파로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다녀보라

인제 들리는가? 됐어? 우리는 종자는 꼭 자기 힘에 알맞는 거 제일 쉬운 것 택하는 게 좋습니다. 제일 쉬운 거. 이래서 누가복음 16장에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큰 의인이 되는 것은 어데서부터 시작하라 했습니까? 지극히 작은 데서 시작해 가지고 지극히 큰 의인되기 때문에 종자는 크는 종자라면 그 종자는 작은 씨 종자라도 관계 없다 하는 그것을 한번 더 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13장 31절에 “이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여기에 제일 모든 씨 중에 작은 씨라 요렇게 말해. 이 천국은 그게 천국이라.

이런데 천국은 자라가는 이거, 자라가는 필연성, 산 씨는 땅위에 심어지면은 필연성으로 자라갑니다. 그 밭은 뭘 가리키는고 하니 이 세상 생활을 가리켜 말하는 건데 예수 믿는 사람이 씨만 좋은 거 생명 있는 씨를 붙들고 시작만 하면 자연히 심어지기는, 세상 생활 한다 말이오. 그러니까 생명 있는 도리를 자기가 잡고 신앙 생활만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자라게 된다. 생명 있는 씨는 뭐이냐 하면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다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어짜든지 우리가 신앙 생활 시작할 때에 허영으로 하지 말고, 허영으로 하지 말고, 외식으로 하지 말고, 허욕으로 하지 말고 꼭 진실을 가지고서 하면 됩니다, 진실.

진실 가지고 하면, 하나님의 영감인 이 계시 지식을 우리가 믿는데 그러면 그 사람이 처음에는 이 계시된 문서계시에 제일 행하기 쉬운 거, 행하기 쉬운 거 그 진리를 거머쥐고 자기가 진실한 믿음을 가집니다.

그러면 그 진리를 가지고, 진실한 믿음 가진다 말은 진리를 자기가 어짜든지 그거 하나를 바로 알라고 애를 쓰는, 그거 바로 알라고 애를 쓰는 것이 모든 성경을 다 바로 아는 것이 됩니다. 요거 묘한 이치입니다.

그거 하나를 바로 알라고 하면 모든 성경을 다 바로 아는 것이 되고, 그거 하나를 진실되게 흠 없는 바른 믿음을 가질라고 애를 쓰게 되면은 모든 성경 말씀을 다 믿게 되고, 또 그거 하나를 실행을 할라고, 진실되이 그거 하나를 실행할라고 하다 보면은 모든 성경을 다 실행하게 된다.

이제 이래서 기독교의 구원은 전부 다 이거 필연성이요 다 성장성이다 그것을 가리켜 천국은 겨자씨와 같다. 씨 중에 제일 작은 것이지마는 그것을 밭에다 심어 놓고서 있으니까 차차 차차, 처음에는 그게 자라기 전에는 뭐 새 한 마리가, 아마 겨자씨는 한, 조그만한 새 종조리새 요만한 거, 요만한 거라도 겨자씨로 말하면 스무 개도 먹을 겁니다.

그렇지마는 그것이 자란 뒤에는, 자란 뒤에는 “공중에 나는 새들이” 하니까 상당히 새가 많은 새라. “새들이 와서 깃들이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신앙이라 하는 것을 진실되이 지극히 작은 한 신앙이라도 딱 가지고 그대로 하면은 공중에 나는 새들이 그 가지에 와 가지고서 쉬어 가자 하면서 와 가지고서 모두 야단을 지깁니다.

그런데 그 새가, 그 겨자씨가 자라기 전에는 닥치면 먹어버립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요 진실되이 신앙하지 아니할 때는 원수들이 가득 차는데 그 원수들이 가득 찬 것을 원수 갚는 복수가 뭐이냐 하면은, 너를 삼킬라 하는 원수가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 어떻게 대적할래? “네가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으로 대적하면 그런 것을 다 이긴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제일 지키기 쉬운 거 한 도리를 그걸 하나 잡고서 그것을 바로 알라고 애를 쓰고 바로 인정할라고 애를 쓰고 바로 행할라고 애를 쓰면 그것이 그 진실한 믿음입니다. 진실한 믿음.

제일 쉬운 성구, 또 쉬운 일, 자기로서 쉽게 할 수 있는 거. 큰 데서 시작하지 마.

자기로서 넉넉히 할 수 있는 거기에서 시작해 가지고서 그것을 요 진실되게, 아는 면에, 인정하는 면에, 행하는 면에 그렇게 하게 되면은 나중에 그것이 점점 자라갑니다.

그러면 요 한 성구를 우리가 믿음으로 자라갈라 하면은, 그 믿음은 세 가지 아닙니까? 세 가지. 아는 것, 인정하는 것, 행하는 것. 이 세 가지인데, 그러면 한 성구를 가지고서 자기가 진실되이 믿음을 가지고서 자라가면은 그 한 성구가 그 다음에는 자라가면 뭘로 자라갑니까? 뭘로 자라갑니까? 아까 그거 묻다 말았지? 뭘로 자라갑니까? 믿음으로 자라간다 진실로 자라간다 자꾸 그렇게 대답했지? 아까 누가 믿음으로 자라간다 했노? ○목사님, 믿음으로 자라간다 했지. 또 진실로 자라간다는? ○○○선생이 진실로 자라간다 했지.

그런데 그거는 뭐 그거 진실인데, 그거 진실인데 진실로 자라갈라 해야 뭐 있어야 자라가지. 한 지식 그거 아는 그것뿐인데 그것만 자꾸 더 알아간다 말이요, 그것만? 이제 그것이 하나 알면 둘 알게 되고 둘 알면 서이 알게 되고 자꾸 이래서 그 하나 안 것이 지식으로 자라가게 되고 인정으로 자라가게 되고 또 실행으로 자라가게 되고 자꾸 범위 넓게 그렇게 자라가게 됩니다. 그것도 필연적이오.

그 한 진리를 알면 두 진리는 필연적으로 알게 되고 두 진리를 인정하게 되면은 또 세 진리를 인정하게 되고 행하게 되고 자꾸 그래 가지고서 우리가 자라갑니다.

자라가면 거기에서 뭣을 얻는고 하니 이제는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자꾸 그렇게 진실을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의 지식에다가 자기 지식으로, 자기 지식이 합해 가지고서, 하나님 지식을 가지면 하나님 지식이 자기 지식으로 자라가고 하나님 지식과 자기 지식이 둘이 이래 자라가게 되면은 또 하나님 지식으로 또 자라가기도 하고 자꾸 이렇게 자꾸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을 그걸 자기가 바로 알라고, 바로 알고 인정하고 믿고 그라면은 자기에게 뭣이 나옵니까? 한 진리를 자기가 바로 알라고 애를 쓰고, 바로 인정할라고 애를 쓰고, 바로 실행할라고 애를 써 보니까 거기에 뭐이 나옵니까? 그래 보니까 뭐이 나옵디까? 그래 보니까 뭣이 나옵디까? 뭣이 나옵디까, 그렇게? 한 진리를 알고 그 진리를 어짜든지 연구해 가지고 바로 알라 해서 바로 압니다.

바로 알고 또 그대로 바로 믿을라고 애를 쓰고 행할라고 애를 써서 그 한 진리를 가지고 믿음 생활 할라고, 그 진리를 가지고 믿음 생활 할라고 애를 쓰니까 뭐이 나오는지? 모두 여러분의 체험과 경험에서 뭐이 나옵디까? 어? 다른 진리가 나온다. 어? 사람이 변해진다.

그라니까 뭐 필연적으로 나오는 거 없습디까? 어? 그 믿어보니까 그래 보니까 뭣이 나오지 안해요? 그래 각도가 다 틀리니까.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나옵니다. 알겠습니까?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나옵니다. ‘햐, 이거 참 나는 이런 줄 몰랐는데.’ 보니까 경험의 지식과 체험의 지식이 떡 나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이 세상에 지식이 몇 종류가 있습니까? 손가락으로? 이 세상에 지식이 몇 종류 있습니까? 자, 손가락으로 인제, 대시험이다, 대시험. 지식이 몇 종류 있습니까? 두 가지 지식이라. 그러면 하나님의 지식, 또? 마귀 지식. 인간 지식은 다 마귀 지식이라. 마귀 지식.

그런데 거기에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 마귀 지식 거기에 하나 외에 거 하나 더 있어요. 지식이 세 가지라요, 세 가지. 세 가지. 하나님의 지식은 영감 도리가 하나님의 지식, 마귀의 지식 인간의 지식은 이 세상에 모든 지식이 다 그거 인간 지식 세상 지식 마귀에게서 나온 지식, 그거는 죽은 지식 죽이는 지식.

하나님의 지식은 살리는 지식 산 지식.

그런데 이 두 가지 지식 가운데에서 하나 생기는 지식이 있으니까 그 지식이 뭐입니까? ○장로님? 무슨 지식이지? 언제 여러번 내가 많이 가르쳤었는데, 그전에. 이제 금방 말하지 안했어요, 금방. 자기 지식. 그것을 가리켜서 자기 지식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식 있고 마귀 지식 세상 지식 있는데 그 속에 내 지식이 있습니다, 내 지식. 알겠습니까? 내 지식이 있어요. 내 지식이 있는데 그라면 지식의 실력 가치 중에 제일 큰 지식이 보배 지식이 무슨 지식입니까?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둘째로 보배로운 지식이 내게 필요한 보배로운 지식이 무슨 지식입니까? 자기 지식.

셋째가 무슨 지식입니까? 이 세상의 마귀 지식 세상 지식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하나를 진실되게 믿고 나갈라 하면은 거기에서 차차 차차 나와서,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이 자기와 합해지고 나면은 거기에 체험과 경험이 있다 말이오. 자기 지식이 생겨져.

자기 지식이 생겨지면은, 자기 지식은 여러분들이 자세히 자꾸 연구를 해야 되는데 자기 지식이 생겨지는데 자기 지식을 보면은 그 자기 지식이 들어서 뭘 하고 있습니까? 자기 지식은 들어서, 뭣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 다음에는 자기 지식이 둘째로 필요하고 그 다음에는 세상 지식이라 이렇게 말하는지? 자기 지식이 어떤 데에 필요한지? 자기 지식이 어떤 데에 필요합니까? 녜, 자기 지식은 어떤 데 필요하는고 하니 세상 지식을 부인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자기 지식을 똑똑히 정신차려서 살펴본 사람은 자기 지식이 이 세상 지식도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해 봤고 하나님의 지식도 경험하고 체험해 봤으니까, 경험하고 체험해 보니까 세상 지식은 다 무가치하다. 그거 뭐 한 말로 말하면 다 무가치다. 한 말로 말하면 무익한 지식이다. 아무 소용 없는 지식이다. 그거는 다 사람이 속고 속고 망하는 지식이요 헛일하게만 만드는 지식이다 하는 것을 자기가 경험하게 됩니다.

이래서 젊은 사람들과 노인들이 다른 것이, 솔로몬이 말이요 세계에서 역사에 제일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지마는 그 사람이 젊을 때는 오만 거 다 욕망을 가지고 희망을 가지고 날뛰었지마는 나이가 많고 난 다음에는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모든 이런 번창 저런 번창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줘 가지고서 노고하게 하신 것뿐이라.” 헛수고 하게 하는 것뿐이라 하는 것이 그의 결론이 됐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거는 누구 지식을 가지고 그래 됐습니까? 솔로몬의 자기 지식이라, 자기 지식. 그거는 뭐이냐 하면 영감 지식 진리 지식이라. 경험 지식.

하나님의 지식도 경험해 봤고 또 세상 지식도 경험해 보니까, 체험해 보니까 세상 지식은 다 거짓부리요 헛되고 이제 하나님의 지식은 참되고 참되다는 것을 자꾸 알게 돼요. 이러니까 세상 지식은 우리를 유혹하게 하는 지식이고 또 자기 지식은 이제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을 정평 정가하게 하는 지식이고, 하나님의 지식은 자기를 살리는 지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를 잡아라. 하나를 잡아라. 하나를 잡고서 그것을 진실되게 하면은 종자만 하나, 종자만 하나 진리를 자기가 진실한 믿음으로 그 진리를 가지게 되면은 그 하나만 어데까지든지 커 나갈 수가 있다. 한 진리를 자기가 알고 인정하고 실행하는 그것만 진실되게 하면은 자꾸 자라간다.

이거 내가 말을 많이 했지마는서도 여러분들은 그만 다 벌써 알고 있을 터인데 내가 애가 터져서 자꾸 그라고 있지. 인제 여러분들 귀에 박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지금 자꾸 이래 말하고 있어. 그래 또 내딴에는 또 내대로 또 계산이 있기 때문에 지금 나도 손해 안 보고 내 수지 계산도 맞춰서 하고 있는 거라.

듣기 싫어하든지 졸며 듣든지 말든지 ‘아이구’ 어쨌든지 기독교의 구원은 겨자씨 구원이라, 자라가는 구원이요 필연적인 구원이요 필연성의 구원이라.

이러니까 종자 하나만 잘 가지면 뒤에 가서 어데까지든지 구원이 된다.

그러면 기독자의 구원을, 지극히 큰 구원인데 지극히 큰 구원이 어데서 시작해요? 어데서? 작은 데서? 작은 데서 시작했다 했어요 성경에 뭐라 했어요? 누가복음 16장 몇 절이고? 17절이가? 10절이가? 우리 여기 ○○이 선생한테는 나는 성경 아는 데는 그만 모르면 성경 사전 안 찾고 그만 물으면 그만 딱딱 가르쳐 줍니다.

누가복음 16장 10절에 있대요.

이런데 거기에 보면, “지극히 큰 의를” 그말은 지극히 큰 구원인데 지극히 큰 구원은 어데서 시작한다 했어요? 어데서 시작한다 했어요, 여기 ○○○선생? 어데서 시작한다 했어? 작은 데서? 작은 데서, 너는? 작은 데서. 저 봐. 암만 그래도 말이지, 요새 얼마, 나온지 얼마 안 됐는데 저 아니까. 지극히 작은 데서, 지극히. ‘지극히’를 붙여야 돼요. ‘작은 데서’가 아니고. 지극히 작은. 지극히 작은 건 더 이상 작은 게 없는 것이 지극히 작은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데서 시작해 가지고 지극히 큰 데 올라가는 거라.

요거 여러분들이 얼마나 쉽소? 얼마나 좋소? 요거 꼭 잡으면 이게 복이라.

이만하면 돼요.

이런데 사람들이 전부 큰 데서 힘드는 데 큰 데서 하지 말고 지극히 작은 데서 시작해 가지고서 그 지극히 작은 것을 진실되게 자기가 가지고 한 성구를 진실의 신앙으로만 가지게 되면은 그만 얼마든지 커 나갑니다. 진실의 신앙.

‘지금 뭐, 이제 뭐 그래 할 여가가 있나 뭐. 내가 나이 이렇츰 많이 됐고 또 목사가 됐는데 뭐 지금부터 새로 새삼스럽게 그래 지극히 작은 거 하나를 잡고 해?’ 아니, 안 늦습니다. 지극히 작은 거 하나를 시작해 보십시오. 시작하면 하루 내에, 그 동안에 그 모든 썩은 게 다 죽은 게 다 하루 내에 그런 것이 마구 살아납니다. 마구 살아나서 무성하게 자라게 됩니다. 속성돼 버려.

요것이 천국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요 방법을, 자라가는 데는 요 방법을 떠나 가지고서는 되지를 안해. 그 자라가는 것은 겨자씨로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신자가, 믿는 사람이 타락하고 범죄해서 믿는 사람이 그 타락해 가는 거 믿는 사람이 썩어져 가는 것은 또 어데서 시작했습니까? 어데서 시작합니까? “여인이” 뭐라 했어? 그 뭐라 했노? 무슨 누룩이라 했노? 거기 누룩이라 했어 적은 누룩이라 했어? 지극히는 안 붙었지? 아니, 누룩이 무슨 누룩이라? 그냥 누룩이가? 그냥 누룩이라고 또 그래 놨네. 거기에는 누룩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그 전에는 겨자씨를 말했지? 씨 중에 작은 겨자씨라고 말했지? 그런데 그 누룩 말하는 데 어데, 가루에 적은 누룩 하나 넣으면, 누룩을 넣으면 그렇다는 그런 성구가 어데 없소? 어데? 고린도전서 5장 6절 또 한번 읽어보자고요. 저기 또 성경 박사가 나왔구나. 한번 읽어봐.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그 아주, 작은 누룩, 거기에 그거 말했구만. 작은 누룩.

그 위에 “씨 중에 가장 작은 씨라” 이라는 것은 그 밑에 말을 안 해도 우리가 돌뱅이를 다 이래 해서 그 모두 만들어 놔 그렇지 실은 그 문장의 문리적으로 보면은 그 밑에 작은 누룩이라 하는 그 뜻이 그 안에 다 포함돼 가지고 있습니다.

저 위에 한 군데 말했는데 쭉 내려가며 거기서 작은 거라는 그런 것을 내포한 것은 내포한 그것이 문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교회가 우리 믿는 사람이 썩는 것도 아주 작은 것으로 썩습니다. 큰 걸로 썩는 게 아니고. 지극히 작은 거 가지고서 굉장한 것이 썩습니다. 참 뭐 성자가 지극히 작은 것 가지고 썩고 성녀가 지극히 작은 것 가지고 썩고 아주 뭐 순생하고 순교할 그런 사람들도 지극히 작은 것으로써 썩습니다.

그래서, 언제 명신홍 목사님이, 지금 살아 계시는가 모르기는 모르지마는서도 그 목사님이 언제 집회하는 데 한번 참석을 했는데 그분이 말하기를 ‘사과밭에 이 사과 나무를 누가 다 없애 버립니까?’ 이라니까 `누가 다 없애 버립니까?’ 어떤 사람이 있다가 ‘그 없앨 때는 거도로 없앱니다' 이라니까 `거도로 없애는 게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 속살벌거지 가지고서 없앱니다.’ 그래 말해. 지극히 작은 속살벌거지. 사과나무 파먹는 거 조그만 속살벌거지. 그놈이 들어가서 파먹으면 나중에 그만 사과나무 결국은 그 베어내 버려야지, 열매도 열지도 안하고 그만 안 되니까 베어내 버리니까 ‘사과밭에 사과를 베어내 버리는 건 전부 속살벌거지가 베어내 버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을 다 멸망시키는 것은 죄 아닌 거 같은,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죄 아닌 거 같은 그것이 들어서 성도들을 다 멸망시킵니다 하는 그런 것을 비유로 인용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이, 지극히 작은, 누룩이라고 말하는 것은 죄를 말하는 것이요, 사상을 말하는 것이요, 교훈을 말하는 것이요, 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누룩은 지식을 말하는 것이요, 말을 말하는 것이요, 또 교훈을 말하는 것이요,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생각 그런 것 다 그런 것을 총칭해서 말하는 것인데 여러분들, 어짜든지 이 기독자들이 망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망하지 큰 것으로 망하지 않는다는 거 지극히 작은 것으로 망한다는 거.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가 그 모든 이 관영한 세상 죄악에서 자기의 의를 뺏기지 안하고 더럽히지 안하고 사는 것도 ‘지극히 작은 거기에서 내가 죽는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지극히 작은 그 불의를 단속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그 불의에 손해를 보지 안하고, 지극히 작은 죄를 단속하는 사람은 죄에 손해를 보지 안하고, 또 지극히 큰 의를 원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의에서 시작해 가지고서 그 진실을 가하게 되면은 그 사람은 지극히 큰 의를 가질 수가 있고 지극히 작은 죄를 방어하는 그 진실을 가지게 되면은 그 사람은 많은 죄를 다 방어할 수가 있다 하는 그것을 우리에게 가리켜서 항상 지극히 작은 의 지극히 작은 불의 그것을 들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그만 요것만 하고 맙시다. 어째요? 더 해요? 오늘 오후에 좋은 거 배웠습니다. 오늘 오후에 좋은 거 배웠어요. 학생들이 암만 공부에 욕심을 내는 학생이라도 그만 논다 하면 다 좋아합니다. 인제 오후에는 좀 일찍 마치지요, 그만.

그런데 오후에 공부한 거 요 두 가지 잊어버리지 마십시오. 지극히 작은 것, 지극히 작은 것. 지극히 작은 믿음, 지극히 작은 요 진리를 믿는 믿음, 지극히 작은 믿음에서 출발하고 또 지극히 작은 죄를 방어해서 모든 죄를 방어할 수 있도록 그렇게 지극히 작은 것, 지극히 작은 것.

오후에 공부는 뭣 했어요? 오후 공부는 뭣 했어요? 지극히 작은 것. 뭐 이만하면 많아요. 이만하면 많으니까 오후에는 그만 합시다.

자, 그라면 여기에서 한번 통성으로 각각 기도합시다.

여기에서 작정을 해요. ‘나는 지극히 작은 것 요거 작정하겠다’ 하는, 작은 걸 작정해. 자기가 죄라도 꼭 자기가 시시하게 여기는 그 죄 가지고 자기는 멸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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