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2 18:14
외식
1984. 6. 6. 수새
본문 : 마태복음23장 1절∼12절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이 23장에 외식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외식인가 하는 것을 이 23장에서 보면 대략 알 수 있습니다. 또 깊이 기도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과 그 제자들에게 외식에 빠지지 아니하도록 이렇게 교훈하시면서 외식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서기관들은 당시에 성경을 가르치는 그런 사람들을 총칭합니다. 그때 일반적으로 서기관이라고 그렇게 직책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아는 그런 사람에게 한해서 하는 말이 아니고, 서기관이라 말은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요 성경을 기록하는 사람들인데, 사본을 기록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뿐만 아니라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다 대표해서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다 성경을 가르칠 그런 권세를 가졌고, 또 그런 의무를 맡았고. 가르치는 그런 입장에 있는 자들이며, 또 이 일 면만 가진 게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입장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당시에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열심히 믿는 그 열심이 나쁜 게 아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이 외식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고 또 듣는 그 무리들과 제자들이 외식에 빠지지 않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하는 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라 하는 말입니다. 율법은 신약과 구약, 신구약은 전부 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이오. 또 이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예언이요, 하나님의 교훈이요, 또 하나님의 명령이요 곧 영생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말은 하나님의 율법을 그들이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할 일이라 그말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 지성법과 지공법이 있는데 이 지성법과 지공법을 우리가 어떻게 범해서, 어떤 법을 범해서 그 어떤 법을 범함으로 인한 어떤 정죄를 받았고 어떤 형을 예수님이 받으심으로써 이 법을 범한 정죄와 그 사망에서 우리를 대속하셨는가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신구약 성경 법칙입니다. 또 이 신구약 성경 법칙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법을 범한 것을 이 법대로 심판받아서 형을 받으심으로 이 모든 정죄와 사망과 이 원수된 것을 다 멸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러면 십자가에 죽으심은 일 면은 형을 받아 죽으셨지마는 일 면은 우리에게 칭의와 화친을 주시기 위해서 어떤 복종을 했느냐 하는 복종하신 그 법칙을 우리에게 알린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법을 어긴 정죄를 대신 형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사죄를 입혀서 대속하셨고, 또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이 신구약 성경 법칙인데 이 법은 문서로 되어 있는 이 법만이 아니고 이 문서 안에 하나님의 그 영감이 내재하셔 가지고 가르치고 있는 세밀한 법은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입니다. 지성법이라 말은 가장 깨끗하고 물이나 모든 존재에게 대해서 하나도 하후하박이 없는 공평된 그 자유법을 가리켜서 지공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지성과 지공법을 예수님께서 대신 행하시는데 그 행하시는 데에 다 바친 것이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죽으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성 지공법을 범한 그 모든 문제를 당신이 죽어 형을 받으심으로 다 멸했고 해결을 지웠고, 또 이 지성 지공법을 복종하되 복종하는 것으로 끝을 마쳤기 때문에 복종한 것이 되어져서 우리에게 또 대속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 앞에 의가 되는 데는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다 만족을 해서 거기에 거리낌이 없이 완전히 이행을 해야 하나님 앞에서 지공법과 지성법에서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이루었다고 말했고, 거기 내리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의 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인간의 그 행위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의 그 요구에 만족을 못 이룹니다. 다 정죄받고 말지 인간의 행위로써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전부 율법인데 이 율법을 지키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무엇 때문에 지키는가? 이 율법을 예수님이 다 지켜서 우리에게 이루어 주신 이 의를 우리가 입었으니 이 의를 벗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를 이룬다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라 자기가 아무리 행위를 의롭게 해도 정죄받아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죄의 종과 사망의 종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는 지성 지공법이 아무리 정죄할라 해도 정죄할 수 없도록 완전 행위, 지성 지공법의 그 욕구에 하나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히 그 욕구를 다 응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우리는 사죄와 화친을 입은 사람들인데, 입은 이 대속을 우리가 벗지 않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벗지 않느냐? 우리 현실에서 하나님이 현실을 주시는 대로 그 현실에 해당되는 율법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 입은 대속을 벗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입은 대속을 벗지 않을려고 하는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사람이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이 은혜 아래로 옮긴 사람이요 그 사람이 종에서 자유한 자리로 옮겨진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율법을 이래 주신 것이 이 율법이 우리에게 '우리가 어떤 법을 범해서 어떤 형을 받았던가! 예수님이, 어떤 법을 범한 것을, 어떤 형을 받아서 어떻게 다 사죄가 되었는가!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어떤 법을, 대신 행하셔 가지고 우리에게 칭의를 입혀 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요. 여기에서,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대속으로 구원을 입혀 주셨으니, 대속을 입혀 주셨으니 우리가 우리 닥친 현실에서 어떻게 행하는 것이 이 대속을 벗지 안하고 입혀 주신 이 대속을 입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율법은 우리에게 세 가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두 가지 대속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 우리가 또 이 입혀 주신 대속을 어떻게 하면 벗지 일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알려 주는 세 가지 역사를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하는 그 말은 하나님의 이 율법을, 율법을 가르치도록 세웠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어떻게 하면 외식이 되어지는가? 외식이 되어지는 것은 우리가 가르치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의 간판이나 그 사람에게다가 중점을 두면, 우리가 교훈을 받는 데에 외식이 되고 맙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어떻게 구비하고 위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율법되는 것은 아니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요 다른 말로 말하면 진리요 과거의 이력을 말하면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능력이요, 이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이 될 수 없고 진리가 될 수 없고 또 이렇게 독자적 전능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전하는 사람과 그 진리의 가치를 우리가 바로 평가해서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칠려고 하는 것이지, 인간의 어떤 철학이나 뭐 과학이나 인간들의 경험이나 체험들의 어떤 그런 인간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법칙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치라고 한 것이기 때문에 가르침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의 법칙이냐, 하나님의 예언이냐, 하나님의 약속이냐, 하나님의 명령이냐 거기에다가 가치를 두고서 우리가 받아야 되지 거기에다 가치를 두지 안하고 사람에게 가치를 두어서 사람 가치를 그보다도 크게 여기는 그것은 다 외식의 죄에 말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그것을 말합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는 보지 말라 그 말은 그 사람들을 보지말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명령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예언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교훈이 나오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느냐? 그거냐 아니냐 거기에서 평가하고 비판해서 그것을 받도록 해야 되지, 그거와 그 사람의 어떤 그 위대한 행위, 어떻게 구비한 명예, 간판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외부이기 때문에, 그 외부도 필요하지마는 외부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외부와 속에 알맹이와를 구별해 가지고서 그렇게 너희들이 들을 때 들어야 되고 받아야 되지 그것을 혼합하면 안 되고 잘못하면 꺼꾸로 해서 그 사람의 능란한 지식이나 능란한 수사학이나, 수사나 또 능란한 명예나 간판이나 그 어떤 인물이나 뭐이든지 너희들이 하나님의 도를 들을 때에 하나님의 그 율법과 그 사람과를 구별해라. 구별해서, 그 사람이 어떻게 더럽다 할지라도 거기에서 율법이 나왔으면 너는 율법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 나왔으면 명령을 받아야 된다. 하나님의 예언이 나왔으면 예언-예언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것이 그에게 대해서 예언이 되는 것입니다. 또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한 이치를 내놨는데, 그 이치를 우리에게 내놨는데 그 이치에는 책임이 있어서 반드시 정죄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가르쳐 놓은 것이 율법이요 또 계약이라고 말하면 하나님은 다 이 말씀하신 것이 계약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기에서는 서로 뒤에 계산하는 계산이 있다. 그리고 바로 이 말씀은 복음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게 하는 복음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네가 벗지 안하려고 율법을 지키면 그 벗지 않는 은혜 아래 있는 사람이 되고, 지켜서 의를 이루려고 네가 지키면 너는 율법 아래에서 스스로 정죄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영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뭐 사람이 그 사람이 어데까지 좋다 할지라도 영생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율법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예언 될 수 없고 하나님의 계약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복음 될 수 없으니 이 말씀과 사람과의 구별을 똑똑히 해서 가치를 바로 평가해 가지고서 받아라 하는 것을 그것을 말합니다. 그와 반대로 그 사람이 어데까지 나빴다 할지라도 그에게서 이 율법이 전해지고 복음이 전해지고 진리가 전해지고 예언이 전해지고 영생이 전해지면 그 전해지는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떻게 나쁘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서 이 귀하고 좋은 것을 거두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받을 때는 꼭 요 표준으로 받아야 합니다.
또 그 다음에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이러므로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행하고 지키라 말은 위에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는 고 말씀과 연결이 돼야 됩니다. 행하고 지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원수가 말하든지 뭘 말하든지 하나님의 율법을 말했고, 예언을 말했고, 또 교훈을 말했고, 약속을 말했고, 명령을 말했고, 복음을 말했고, 영생을 말했으면 너는 지켜야 된다.
그런데, 아무리 그 사람이 십 년 동안은 잘 지켜서 순전히 참 이 모세의 자리라 말은 모세는 하나의 율법을 표시하기 위해서 말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뭐 모세 오경만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신구약 성경 율법을 다 말하는 것인데, 우리에게는 다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어떠한 사람이 잘한다 할지라도 이렇게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나온 이제 말한 대로 그것을 전하느냐 안 전하느냐 네가 먼저 구별하고, 전하면 너는 지키고 행해야 된다 그말입니다, 전하면 지키고 행해야 된다. 아무리 십 년 동안은 꼭 고것만 전하다가 단 한 마디를 전하지 안할 때에는 너는 그거는 그대로 복종하지 말고, 네가 혹 전하는 사람보다 뒤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전하는 사람이 네가 이해 못 하는 것을 전하는지 모르는 것이니 네가,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계약이요, 복음이요, 영생이 아니라고 네가 인정될 때에는 그것을 행하지 말고 네 연구의 과제로 네 숙제로 남겨 둬라. 왜? 그것을 한 십 년 동안 배운 게 있기 때문에 고 한 마디에서 딱 배척을 할 것이 아니고 네가 모르는, 네가 미치지 못하는, 이해하지 못하는 혹 하나님의, 율법인지 예언인지 은혜인지 명령인지 모르니까 네가 숙제로 두고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 보면, 명심하고 있으면 얼마 안가서, 아, 그것은 예언이 아니고 그것은 하나의 실수로서 마귀의 말을 했다.
인간의 말을 했다. 인간의 지식을 말했다. 그러면 그것은, 네가 그때에 확실히 알고 나면 그것은 네가 저버릴 것이고, 또 실수한 것이기 때문에 그로서 네가 심판자가 되지 말고. 너는 배우는 자이기 때문에 심판자로서 정죄하지 말고 이러니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네가 기도해서 그런 실수가 되지 안하도록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서 내가 하나님의 도를 담대히 전하도록' 담대히 전한다 말은 솔직하게 바로 전하도록 위해서 기도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본받지 말라' 요것이 이제 말씀하신 대로 그 행위와 진리를 혼합시키지 말라. 네가 배우는 입장에 있어서는 진리냐 하는 그것만 네가 받을 일이지, 그 사람의 행위는 받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행위로써, 인간의 행위는 날아가는 먼지 같은 것인데 인간의 그 행위로 영생이 되고 제약이 되고 권위가 되고, 이런 그 진리를 네가 거기에서 진리의 권위와 가치를 네가 감소시키지 말아라, 우리가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본받지 말라 저희는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말만하고 행치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 위에 지우되'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 위에 지운다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율법의 이 말씀, 하나님의 영감의 말씀. 진리의 말씀, 예언의 말씀, 명령의 말씀, 계약의 말씀, 영생의 말씀을 고대로 전한다 할지라도 무거운 짐을 그에게 지우는 그 일이 되는 것도 있고, 또 그 사람에게 아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나는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 짐을 지라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교훈을 가르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대로 지켜서 이 말씀을 전할 때에는 당신이 지켰기 때문에 말씀을 지키신 그 영감의, 성령의 지극히 큰 권능과 같이 이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전해서 받는 사람이 무거운 짐이 되지 안하고 아주 가벼운 짐과 쉬운 멍에가 됩니다. 이 멍에는 제가 메고 가는 게 아니라 이 멍에에 달려가고 이 짐을 제가 지고 가는 게 아니라 이 짐에 달려 가지고서 갑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전할 때에 이 말씀과 능력과 이 생명을 같이 전했기 때문에, 왜 같이 전했는가? 당신이 이 말을 무시하고서, 말만하고 이 말을 무시해서 이 말씀에게. 당신이 무시하고 지키지 아니해서 이 말씀과 함께 온 성령을 거역하고 이 능력을 거역하고 이 껍데기 말씀만 전했다면은 무거운 짐을 지워 준 게 될 터인데. 이 지극히 큰 능력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과 능력과 감화와 지혜와 생명을 당신이 같이 영접해 가지고서 당신이 영접한 이 율법을 전하기 때문에 그 율법은 쉬운, 가벼운 짐이 되고 쉬운 멍에가 된 것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워서 다른 사람에게 어깨 위에 지운다 그 말은 우리가 말씀을 전할 때에 전하는 사람이 자기가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안하고 자기가 그 말씀에 대한, 말씀과 함께 온 성령의 그 능력을 영접해서 자기가 성령과 진리와 그 생명을, 계약을. 율법을, 예언을 이렇게 예언으로 자기가 영접해서 -이 말씀을 영접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율법으로만 영접하고 어떤 사람은 또 하나의 제약으로만 영접하고, 예언으로만 영접하고, 교훈으로만 영접하고, 또 어떤 사람은 복음으로만 영접하고, 어떤 사람은 생명으로만 영접합니다. 복음으로만 영접한다 말은 여기는 참 공짜배기로 아주 구원 얻는다 그렇게 해 가지고 그렇게만 받는 사람이 있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우리가 다 받는 사람인데, 사람에게 듣든지 읽든지 하는 것은 다 이 말씀을 받는 건데. 이 말씀을 자기가 율법으로만 받았으면 율법으로 만 다른 사람에게 전하게 되고, 또 자기가 복음으로만 받았으면 복음으로만 전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들은 복음으로만 자기가 받아 가지고 예수 믿는 것은 공짜배기로 구원 얻는다 이렇게만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거기에서 배우면 예수 믿는 것은 순전히 공으로 구원 얻기 때문에 율법과는 상관이 없으니까 그 사람은 낭만심을 가지고 나중에 가서 보면 풀과 짚으로 집을 지어서, 이 율법이 우리를 다 해부하고 치료하고 이라는 것인데. 율법은 자기가, 율법으로는 받지 안했기 때문에 율법은 전하지 안하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 있고, 또 그 사람이 영생으로만 받아 가지고서 영생으로만 전하고 율법으로 전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율법으로 전하고, 율법 제일 밑에 기초가 뭐이냐 하면은 율법입니다. 율법으로 전하고, 또 그 다음에는 명령으로 전하고, 그 다음에는 예언으로 전하고, 그 다음에는 약속으로 전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 영생으로 전하고 복음으로 전하는 것이 이것이 전부 다 예수님의 대속 안에서 전할 때에 비로소 이것이 바로 돼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이 일부분만 전해서 속에, 말하자면 이 말씀만 전하고 성령의 감화와 능력은 자기가 부인했기 때문에, 자기가 전하는 자체가 이 말씀을 하나의 지식으로만 들었으면 지식으로만 전하고, 또 율법으로만 받았으면 율법으로만 전하고, 이 말씀과 함께 성령의 은혜와 능력과 이렇게 구비해서, 자기가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았느냐? 받고 자기가 어떻게 이 말씀을 상대하느냐? 이 말씀이 자기에게 와가지고서 어떤 역사를 이루었느냐? 이룬 그대로 전하면 두 가지가 이루었으면 두 가지가 전해지고, 세 가지 이루었으면 세 가지 전해지고, 한 가지 이루었으면 한 가지 전해지고,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 아무런 실행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전하지 안하고 제가 외식하는 자로서 이 복음의 속에 지극히 큰 능력은 자기가 부인하고서 이 껍데기 이 말씀만 전하니까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그에게 감당치 못할 것을 전하고 있다. 이 지극히 큰 능력이라야 하나님 말씀을 감당하지 그리 안하면 감당하지 못하는 것인데, 자기가 지극히 큰 능력은 자기가 벌써 부인해 버렸고, 지극히 큰 능력을 부인한 자가 이제 이 어려운 율법만 전하기 때문에 그는 절대 행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거는 무거운 짐을 묶어서 어깨에 지운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 같은 사람이 설교를 하는데도, 그 설교의 말씀은 녹음 테이프와 같이 꼭 같이 된다 할지라도 그 속에 전해지는 능력은 다릅니다. 전해지는 능력은 다른 것이 전해지는 능력은 전하는 그 사람에게 그 능력이 와 가지고 그 능력을 영접해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 대해서 어떻게 한 것만치 그 다음의 사람에게 전해지지 그 이상은 전해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요한복음 10장에 '앞서 가면 양무리들이 뒤에 따라 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앞서 가지 않고는 자기보다 나은 밑에 그 제자나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지우며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 말은 무슨 말을 말하는 것인고 하니 자기는 이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의 이 말씀에 대해서 자기는 이 말씀과 능력을 같이 받아서 이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만 되는 이 면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하나도 없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말하는 것은 이 말씀은 외모요 그 안에는 이 말씀이 제약이 되어 있고, 예언이 되어 있고, 약속이 되어 있고, 소망이 되어 있고, 다 생명이 되어 있는데, 이거는 복음이 되어 있는 말씀이니까 자기가 받은 대로 전하지 받지 안한 것은 전할 수가 없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 때 노아 때와 같이, 이스라엘 종말 때와 같이 망하는 그 원인은 외식입니다. 외식에서, 껍데기만 하고 속에 알맹이 없는 외식으로 인해서 다 스스로 자기도 속고 다른 사람도 속여서 멸망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무거운 짐을 지운다 그 말은 내나 율법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그렇게, 가르친다 말 아니오. 율법은 하나도 빠지지 안하고 다 가르쳐야 됩니다.
율법의 까다로운 말씀을 다 가르친다고서 무거운 짐을 지웠다고 그렇게 모두 다 주석들에 해석을 해 놨는데 그게 아닙니다. 여기 무거운 짐을 묶어서 어깨에 지웠다 그 말은 아주 율법의 그 무슨 세밀한 것이나 모든 것을 다 말했다는, 그 말 한 것 잘했습니다. 그게 아니고 능력을 주지 안하고 인간이 할 수 없는 이 부담만 줬기 때문에 그는 무거운 짐을 지워서 감당 못 할 일을 했다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쉬운 것을 말해도 자기가 행하게 하는 이 능력을 자기가 영접해서 이 능력을 받으려고 애를 써서 이 능력을 받아 자기도 이 받은 능력을 가지고 전하고, 또 자기가 능력을 받지 못해서 안타까울 때에는 내가 이 능력을 받지 못해서 이렇다는 것으로 간증을 해 가지고서 나는 능력 받지 못하고 지금 이와 같이 이러니까 모두 다 여기서 능력을 받아서 행할 수 있도록 하자 하는 그것으로서 간증적으로 하는, -그러기에 설교는 대개가 간증입니다. 설교는 대개가 간증이요 또 다 같이 이렇게 받는 설교이지 설교하는 사람은 자기는 전하는 입장에 있고 자기가 이 도를 받는 입장에 같이 있지 안하면 그 사람은 벌써 얼마 안가서 시험에 들어 가지고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의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고저 하려 하나니' 사람들에게 보이고저 하기 때문에 또 이것도 외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행위는 은밀한 가운데 보시는 꼭 주님만을 상대해서 주님이 보시는, 주님이 보시고, 주님에게 보이기 위해서. 주님이 보시도록, 주님이 보시고 계시는 이것을 깨닫고, 주님이 보고 계신다 하는 것을 자기가 알고 또 주님에게 보이려고 이렇게 하고, 주님이 보고 계신다 하는 이것을 자기가 생각해서, 주님을 상대해서 주님이 자기의 행위를 보고 계시는 것과, 또 주님이 보시기에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이렇게 보이려고 하는 것과 또 보시는 것과 이것이 다 주님을 상대해서 이래 하는 것이 알맹이입니다.
그러면, 알맹이가 있으나 껍데기가 없으면 이것도 또 안 됩니다. 그 알맹이를 하는 그 알맹이가 자기는 사람에게 보이려는 그것보다 그분에게 보이려고 그분을 상대해서 한 그것이 사람에게까지 보여지는 그 결과까지 맺어져야 이제 꺼풀이 생긴 것이고 속에 알맹이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도 속에 근육과 골수가 있지마는서도 피부가 없으면 그 사람의 신체는 절단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만을 상대해서 '뭐 하나님만 보시면 됐지. 또 하나님에게만 보이기 위해서 하지.' 하나님만 상대하고 사람에게 비추어 나오지 않게 하는 것은 껍데기가 없기 때문에. 외모가 없기 때문에 그것도 죽고 망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힘써 믿음 지키라' 그 말은 하나님을 상대하라, '믿음에 덕을 더해라.' 덕을 더하라 말은 사람에게까지 나오는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에 덕을 더하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고저 하여 하나니' 우리는 여기에 대한 외식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행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일라고 하면은 그거는 보여 봤자 효력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보이도록 해야 되고 또 사람이 보는 줄만 알면 그것도 소경입니다. 하나님이 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를 행할 때에는 '하나님이 보시나 안 보시나?' 하나님에게 합격이 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의를 행할 것이요, 의를 행할 때에는 하나님을 상대해서 의를 행할 것이요, 또 자기가 죄를 제어하는 것도 사람이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보시는. 하나님이 보시는 그 하나님의 눈을 상대해서 자기가 모든 삐뚤어진 그런 일을 제어해야 그 사람이 알맹이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잘못을 행할 때에 사람의 눈은 자기가 상대할 줄 알고 하나님의 눈을 상대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아무리 사람의 눈을 상대해서 잘 지혜롭게 맞춰 나간다 할지라도 그거는 생명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에 죽은 시체라는 것이 확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의를 행할 때도 하나님을 상대해서, 또 죄를 우리가 제어하는 것도 사람 상대보다 하나님을 상대해서.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눈, 귀, 입 그것만 상대하고 하나님을 상대하지 않는 그것이 다 외식입니다. 사람의 말하는 소리, 사람의 보는 것, 또 사람이 듣는 것 그런 것은 중하게 여기고, 은밀한 가운데서, 그분은 못 들으심이 없고 못 보시는 것이 없고 그분이 말 안 하시는 것이 없는데 우리가 귀가 어두워 못 듣지. 그런데 그분을 상대하지 안하고 자꾸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이것이 외식입니다. 이것이 들어서 말세에 망해 나가는 것입니다. 요대로 23장을 가서 죽 해석을 하면 그 밑에 외식이라는 것이 다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세에 이스라엘 종교 말년에 멸망한 것이 외식으로 말미암았습니다. 밑에 내려가면 성전 말하는 것도 성전은 뭐 미석으로 만들고 웅장하게 만든 그 모든 제도나 조직이라는 그것보다도 그 안에 하나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나 안 계시나 그거는 생각지 안하고, 법궤가 다 같은 법궤지마는서도 하나님이 안 계실 때에는 그 법궤를 이방인들이 끌고 가 가지고서 모욕을 줘도 모욕을 줬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영접했을 때에는 그 법궤를 이방인들이 가져갔지마는 저거가 자꾸 재앙이 내리니까 그 법궤를 도로 돌려 줬고, 법궤가 넘어가니까 '이 법궤 자빠지는데 이 법궤를 손을 내가 대어서 이걸 바로 세워야 되지 내가 손 안 대면 넘어가겠다' 하고 손을 댔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거 뭐이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들이 제가 뭐 위험하게 여기지만 전지자요 전능이요 이러기 때문에 그분의 하는 일을 그렇게 네가 들어서 뭐 하겠다는 그런 생각 가지지 말고 그저 너는 그를 모시고 그를 떠나지 안하고 그분에게 복종하는 이 경계를 넘지 안해야 되지 거기에 넘어가는 것이 전부 참람이요 가증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내리 보면, 시간이 있으면 할 건데 뒤에 흑 그라면 여기에 대해서 계속해서 여기서 하면 그것이 설교록에 나갈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꾀를 써서 목회하는 사람, 꾀를 써서 목회하는 그런 사람은 자기 속이는 것뿐이지 아무것도 소용없습니다. 어제 내가 ○○○목사님이 설교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하는 가운데서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암만 해도 안 된다. 이거는 신적 요소 가지고 해야 되고.' 그래 말하는 것은 아니지마는 '신적 요소를 가지고 해야 되지 인적 요소 가지고는 안 된다' 하는 고 말을 하나 했을 때에 내가 그 '○○○목사님의 복음이라' 내가 그걸 생각했소. 그게 ○○○목사님의 복음입니다. 고걸 절실히 느끼고 거기에 입각해 가지고서 목회하면 됩니다.
그러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그 지식이 들어서 무슨 일을 하는 줄로 그렇게 알기 쉽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어제 그것만 해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인데, 옛날은 만나를 가지고서 하나님이 하늘에서 만나를 먹였는데 오늘은 우리 손으로 농사지어 가지고 하느냐? 그때 만나 먹인 거와 오늘에 농사짓는 거와 꼭 사람 손 대지 안하고 순전히 하나님 혼자 하는 것을 공짜배기로 우리가 은혜로 받아 먹고 있다는 고걸 이해를 해야 됩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 제가 하는 것같이 내 지식이 하는 것같이, 내가 하는 것같이, 인간 제가 하는 것같이 하지마는 실상은 하나님 혼자 하시는 요것을 자기가 구별하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하나님 혼자 하시는 일은 인간 제가 해서 되는 것같이 되는 고 방편을 통해서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 모르는 사람은 외식으로 고만 넘어가 버려서 짚과 풀과 나무로 짓는 집이 돼 버리고 말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아무리 제가 고등 지식을 가지고서 능란한 수사를 가지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실은 보니까 하나님이 혼자 하시는데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것뿐이지. 거기에 도운 일은 안 하고 가로막은 것뿐이다 요것을 확실히 깨닫고 자기가 해야 자기는 거기에서 외식을 벗어나서, 거기에서 잘못된 그것을 다시 벗어나서 앞으로 바로 옳게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월급을 줘서 박봉이지마는 사람을 세워 놓고 등록을 해라 이래 가지고 등록 등록해서 자꾸 이래 모두 권유하고 이래 가지고서 육천 명이라 하는 이 사람들이 등록을 하고 그래도 그 사람이 혹 빠질 때도 있겠지마는 여기에서나 어데서나 기도하게 되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한 말이 아니라 말이오. 하나님이 하신 말이기 때문에.
백 목사 하는 그까짓 거 천 마디 만 마디 하는 것 다 부인해 버려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라면 그게 문제라 그거요.
그런고로, 이제 우리가 이 기도회를 작정하고 이래 하는 그것을 다른 지교회서도, '뭐, 그거는 백 목사 목회는 백 목사 목회대로 그대로 하지 뭐' 하는 그 사람이 제가 양심을 써 가지고 보면, 고렇게 생각이 들어가면 반드시 설교가 은혜가 없을 것이요 고렇게 생각이 되면 교인들이 떨어져 내려갈 것이요 교회가 내려갈 것이요, 이제 이 공회를 우리가 소중히 여기고 또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그 은혜의 기관을 소중히, 백 목사 귀중히 여기는 것 아니오.
백 목사 귀중히 여기기 때문에 백 목사는 지금 그게 손해요. 귀중히 여기는 것은 백 목사를 죽이는 일이 돼. '너희들은 나에게 사망을 가지고 향하고 나는 너희에게 생명으로 향한다'는 그것입니다. 이러나 그러면 설교가 잘 될 것이고.
교회가 부흥이 될 것이고. 자기 마음이 안정이 될 것이고, 그게 삐뚤어지면 설교도 잘 안 되고 교회도 부흥이 잘 안 될 것입니다. 왜? 그것이 뭐이냐? 하나님은 주권자고 그렇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백 목사나 우리 총공회는 사람이 모인 것인데, 하나님이 하셔서 한 것이지마는, 그게 무슨 권능이 있어 그런 게 아니라 그 제 자체가 변질이 됐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변질적인 상대가 되고, 그 자체가 바로 원질로, 원질로 이렇게 성화됐으면 하나님이 하시는 그 역사를 귀중히 여겨서 자기가 존대하게 되고 그와 대립이 되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그것도 잘 알아서, 어제 우리 발표하는 것 보니까 이적 나타난 것, 표적 나타난 것이 얼마라 했지요? ○○○목사, 얼마지? 백 육십 다섯 건인데 이 백 육십 다섯 건에 대해서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아, 하나님이 하셨으니' 놀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나타내셨기 때문에 한 마디 한 마디, 성경이 내나 하나님 말씀이지마는 그 성경을 그대로 우리가 모를 때 소개해서 때문에 더 확신을 가지고서 담대히 세상을 발아래 밟을 수 있는 그런 능력을 받는 사람은 또 받을 것이고 하니까 내나 한자리에 있지마는 다릅니다. 박 영기조사님이 늘 말하기를 '한자리에 진흙 덩어리하고 초 덩어리 둘이 있으니까 다 같은 태양과 공기와 꼭 그 자리에 쐬우지마는 진흙 덩어리는 땐땐하이 굳어져서 여물어지고 초 덩어리는 물신물신하이 녹아져 버리고 만다.' 한자리에서 꼭 그와 같아. 히브리서 6장에 보면 고 한밭에 심어졌지마는 한밭에 심어지고 같은 우로를 받지마는서도 가시 종자는 가시가 나고, 곡식, 채소는 채소가 된다고 한 그게 내나 박 영기 조사님의 비유한 거와 꼭 같은 성질의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한 집회에, 뭐 그게 저거가, 본인들이 알 것이오.
신경통이라고 이 신경통이 아파서 이렇게 이래 했는데 신경통이 낫는다는 것, 약을 써서 낫는 게 아니라 집회에 이래 가 가지고서, 몇 해 동안 자꾸 이거 약을 써도 안 되는데 이 신경통이 나았으면 그거 큰 것 아닙니까? 그것도 내나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와서 했다 그말이오. 또 눈이 딱 들어붙어 가지고 있었는데 벌어진 그것도 하나님이 하셨다 그거요. 자기에게 혈루증 병이 있었는데, 그 집회 온 양반. 얼마나, 혈루증 하면 날마다, 몇 해 동안을 고생을 하고 자꾸 애를 먹는데 그게 딱 그쳐졌으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하셨다 그말이오. 아. 고름이 출출 나와 가지고 아무래도 병원에서도 안 되는데 고름이 딱 말랐으니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착수했다 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전능의 능력이 네게 손을 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범하면 망하지.
하나님께 복종하면 흥하지. 이라니까, 같은 자리에 있어도 깨달음은 각각 다른 것입니다.
이러니까, 지금 여기에서도 백 목사 하는 것은 반발하는 사람들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를 죽이는 것이오. ○○○교회가 다른 것은 해도 그전에 주일 학교는 꼭 서부 교회 주일학교 하는 식을 안 따라오겠다고 발을 버퉜습니다. 그걸 몇 번이나 말해도 안 했습니다. 발을 버투고 '나는 내 식대로 한다' 했는데, 그거야 뭐 그래도 좋지마는 고 지극히 적은 쓴 뿌리가 들어 가지고서 나중에 그놈이 자꾸 커 가지고서 마지막에는 저리 따로 나가 버리고 말았다 그거요. 내가 이말 하면 그 친척들이 여기 있기 때문에 은혜로 들으면 다행이지마는 어떻게 들을지 모르는데 여러 대중을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내가 그 말을 안 할 수가 없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옳은 것은 즉시 본받고 따라가야 됩니다.
이러니까, 이 기도회를 작정하고 이래 하는 것이 이것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인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뭐 훌륭해서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이 이 기관에는 나를 세웠기 때문에 나를 통해서 당신이 지금 원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말이오. 이 기도회를, 이거 뭐 구국 기도회니 하는 그런 걸 우리가 하는 거는 아니고, 기도회를 벌써 작정한 것이 몇 해 됐습니다. 하다가 그때, 하고 나서 그때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아주 교회도 많이 부흥이 됐습니다. 그때 부흥된 부흥이 아직까지 회복이 안 됩니다, 장년반은 그때보다 좀 나아지지마는 안됐다 그말이오. 그때 그걸 회복을 못 해요. 그렇게 하다가 고만 내가 병이 나는 그것으로서 그때 그 기도회가 중단돼 가지고서 내려갔었습니다. 또 이래 시작했는데. 시작해서 우리가 모두 기도했는데, 지금도 이거 끝나면 산으로 이렇게 모두, 들로 갈 것 아닙니까? 가는데, 거기에서도 외식을 조심해야 됩니다. 거기 가 가지고, 형식으로만 갈 것이 아니라, 잘못하면 소풍하러도 가고 등산도 가고 운동도 가고. 사람 보기에는 다 같이 가는 것 같지마는 하나님 보실 때에는 뭐 정확하게 판단한다 말이오. 가면 하나님을 만나고 오십시오. 하나님을 못 만나고 오면 자기 양심이라도 만나고 오십시오. 양심을 만나는 것은 자기가 현재 어떤 자라 하는 것을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못 만나면. 영감을 못 만나면 양심을 만나도 만나고 와야 되지 그것도 못 만나고, 양심을 못 만났으면 율법을 만나도 만나고 와야 될 것이라 말이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