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2 18:12
외식
1979. 7. 29. 주후
본문: 마태복음 23장 13절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여기 화있을찐저 하는 말씀은 화는 패망인데 이 패망은 전지전능자가, 계약을 선포하신 자가 하나님이 패망시키는 이 패망인 것입니다. 이 패망하게 되는 원인은 외식인데 외식은 바깥 외(外)자, 꾸밀 식(飾)자, 껍데기만 꾸민다. 껍데기 꾸미는 이것 때문에 망하는 것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외식 이것 때문에 실패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외식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사롭게 생각하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이요, 또 오늘 우리들도 멸망의 원인은 이것입니다.
"천국문을 가로막고 자기도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하는 이것은, 천국은 하나님화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덧입는 것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를 전적 책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은 설명을 한다면 심히 범위가 넓습니다.
그러면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가 신앙생활하면서 자기가 하루 신앙생활, 1년 신앙생활, 10년 신앙생활. 이 신앙생활하는 목적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주관하고 자기는 하나님께 주관을 당하는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차차차차 관계가 더 가까워지고 맺어지는 이것을 목적으로 소망으로 해서 모든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인데 이것은 잊어버리고 이것은 제2, 제3으로 두고 거저 신앙생활 의식, 모든 행태,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이 방편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방편이요, 또 모든 지능과 언행심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어서 하나님화 되는 것이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이것이 자기 구원이요, 이것이 천국 들어가는 것인데 이면은 생각지 않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방편인 이것만 주력해서 이것만 되면 다 된다 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신앙 행위를 철저하게 한다할지라도 자기 천국을 이루는 이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 신앙 행위라면 이 행위를 통해서 자기 천국이 이루어져 가는 이것이 없다고 하면 그 행위 전부는 다 외식인 것입니다.
이것을 바리새교인들과 서기관들이 주시하지 안했습니다. 이것을 무심히 지냈습니다. 이것이 자기네들이 근 2000년동안 대대로 멸망받게 된 원인인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처지에서 살든지 자기 목적이 자기 천국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고 또 자기 생활한 그 결과를 평가할 때에 천국이 이루어졌나 안 이루어졌나? 이것으로 평가하면 모든 타락과 속화된 것이 다 수정되고 개량될 수가 있고 회개할 수가 있는 것인데 이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그만 주님의 줄을 놓친 것입니다. 이것 가지고 전부 멸망받았습니다.
우리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좋은 일을 하든지 구역식구를 기를 때에 그 사람이 아무리 주일을 잘 지키고 성경을 열심히 보고 기도를 많이 하고 또 전도를 열심히 하고 연보를 많이 해도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나는, 하나님과 나는 어찌 되느냐? 이것을 생각함이 없으면 다 외식입니다.
껍데기입니다. 그것이 환경과 주위에 따라서 언제 뭐가 될는지 모릅니다.
역사에 보면 참된 신자들을 순교시킬 때에 참된 신자를 박해준 자가 누구냐 전부 외식 신자들입니다. 복음을 무신론자가 가루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이 복음을 가루지 않고 교회 다니는 외식자들이 복음을 가룹니다. 아무리 신앙 행위를 잘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자기 천국을 이루기 위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하는 것이지 이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일을 아무리 지켜도 소용없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아무 소용없습니다. 성경이 무슨 필요 있습니까? 기도가 무슨 필요 있으며 전도가 무슨 필요 있으며 연보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러기에 우리가 첫째로 제일 무서운 이 외식을 벗어나야 하는 것은 자기의 모든 생활이 자기 천국을 이루기 위한 이 목표로 이 소망으로 이것을 위해서 모든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천국이라면 범위가 넓은데 다른 말로 말한다고 하면 자기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사상도 가까워지고 지식도 가까워지고 모든 욕망도 가까워지고 비판이나 평가도 방편도 행동도 그의 인격성도 가까워지는 것, 이것이 천국을 이루는 것인데 이것을 목표로 해서 이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언행심사의 신앙생활이 돼야 되지 이것을 잊어버리고 언행심사의 신앙생활만 한다고 하면 이것은 외식입니다.
불신자의 행동과 이 행동을 비교하면 불신자의 행동은 외식이요, 이 행동은 알맹이 행동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이 신앙 행동과 자기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이 두 가지를 놓고 볼 때는 이것은 꺼풀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알맹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반사 노릇을 열심히 잘한다 할지라도 그 속에 내 소망은 하나님이시오. 내 갈 곳은 하나님께 갈 곳이요. 무궁세계는 하나님의 형상만이 가고 하나님과 가까운 그것만 갈 수 있는 것이니까 자기 전 소망이 이것이라.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심방하고 학생들을 보호하고 수고하고 희생하고, 이렇게 자기 천국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한다면 그 사람은 다 됐습니다. 그것은 어떤 궁지에 빠지더라도 일어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욕망이 되지 못하고 이것이 목표가 되지 못하고 명예를 위했든지 지위를 위했든지 흥미를 위했든지 또 어떤 이웃의 충격을 받았든지 어찌됐든지, 어쨌든지 이 속에 자기 천국을 이루려는 이 욕망에서 하는 이것이 없으면 그것은 생명없는 것은 환경을 따라서 움직일 수밖에 없는 거와같이 그것은 결국은 패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많은 실수가 있을지라도 전 소망이 하늘나라요, 자기 목적이 하늘나라라고 하면 어떤 실수가 있어도 그 사람에게 무슨 충격이 와도 어떤 손해가 가도 보다 큰 여기에 뿌리를 박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떨어지지 않소. 변동되지 않소.
그러나 이거 아닌 땅의 어떤 것에 욕망하고 어떤 자기 취미 자기 주관에서 일어나는 불같은 열심이오, 운동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다 외식입니다. 언제 변해질지, 떨어질지 모릅니다. 명예를 위해서 권세를 위해서 다른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을 위해서 자기의 어떤 다른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면 그 사람은 그것이 변동되면 그 결과의 신앙생활은 다 변동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욕망과 이것을 목표를 삼아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사람은 자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상해져도 없어져도 어떤 변동이 있어도 그 사람의 신앙 행위는 요동치를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생각을 계속 깨우쳐야 되겠습니다. 누구하고 만나서 서로 의논하는데도 또 천국을 적어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방편이가, 천국문을 닫는 방편이가? 아무리 좋은 수입이 오고 큰 것이 자기에게 와도 이로 인해서 내가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인가, 이것이 천국에서 후퇴하는 것인가? 아무리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궂은 일이 있어도 언제나 이 천국을 욕망하고 목표하는 이것을 비추어서 여기 가까이 가는 것이냐 멀어지는 것이냐 하는 이것을 우리는 구별해가지고 하지 않으면 어떤 열심있는 신앙생활이라도 다 외식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맡은 식구를 교훈받을 때에 그의 욕망과 그의 목표를 천국으로 정해줘야 합니다. 이것을 그에게 주지 못하고 거저 이 신앙 의식, 이것만 그에게 준다고 한다면 알맹이 없기 때문에 껍데기 그거는 썩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다스리는 가정도 그렇습니다.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도 그렇습니다. 이 천국을 그에게 주어서 천국을 그가 욕심을 내도록 제 소망으로, 제 욕망으로 가지도록 천국에 들어가는 것, 주님과 자기와 가까워지는 이것을 목표로 하는 이것을 그에게 들려줘야 되고 잡혀줘야 되지 이것이 없는 신앙생활은 다 이것은 외식이요, 이것은 다 허공을 치는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현재나 미래나 모든 것에 우리는 천국을 놓고서 비판하고 평가하고 경영해야 합니다. 만일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잊어버리고 방편에만 주력한다면 그 사람은 자기 구원도 이루어지지 안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의 구원이 안 이루어지면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의 구원은 안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로 신앙 계통이 있는 것인데 자기 구원이 이루어져야 나중에 속한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자기 구원 이루어지지 안하고 자기에게 속한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가 자기 구원을 이루지 않으면 자기는 자기에게 속한 모든 사람의 구원의 문을 닫고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벌써 그 사람이 이전 믿었든지 오래 믿었든지 어리든지 장성하든지 자기가 예수 믿는 것은 아무 목표 없이 거저 다른 사람이 가니까 따라가고 자기가 예수 믿는 사람이니까 주일 지키고 성경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연보하고 이것이 예수 믿는 것이니까 한다 그것은 다 생명이 없는 신앙입니다. 알맹이 없는 외식 신앙입니다.
오늘 믿어도 '예수를 뭐하려고 믿는지?' '천국 가기 위해서' '천국이라니?' 대주재이신 이분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천국을 얻는 것입니다.
이분은 완전자시오, 주권자시오, 대주재시오, 창조자시오,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이시오, 영원토록 만왕의 왕인 이분인데 이분과 자기와의 관계를 신앙 행위에서 하나씩 둘씩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정비할 것을 정비해서 이분과의 관계를 해결 짓는 이 지극히 큰 사실, 이것을 하나 잡았으면 그 사람은 심히 어려울지라도 생명 있는 신앙이요, 알곡이 되어있는 신앙인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예수 믿는 모든 생활은 다 외식이요 껍데기입니다.
우리 주일학교 반사들도 보면 주일학교가 9시 30분에 마쳐지니까 그 학생들을 데려다 주고 오려고 하면 벌써 10시 한 10분, 20분, 30분 그렇게 시간이 늦고 급하니까 달음질을 쳐가지고 땀을 뻘뻘 흘리고 옵니다. 그래 오면 예배드릴 때 무슨 예배를 드리겠습니까? 이 예배는 신앙생활하는 생활의 종자입니다. 예배 행위가 잘못되면 그 행위 전체는 잘못됩니다. 종자가 콩이면 콩으로 자라갈 것이고 팥이면 팥으로 자라가는 것처럼 예배 행위가 잘못되면 그 사람의 행위 전부가 잘못되는 것으로서 계속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못하면 '나는 이거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렇게 땀을 흘리고 했으니까 예배에 늦게 참석해도 이것은 값어치 있는 일을 했다.'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것이 외식입니다.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그다음에 보니까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한 자는 자기에게 속한 사람의 모든 구원을 다 가로막습니다. 자기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기에게 속한 그다음 사람은 자기 배나 구원이 안 이루어집니다. 자기가 한 점짜리 죄인이 된다면 그다음 사람은 두 점짜리 죄인이 됩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니까 어렵다 그거요. 그러나 성경이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반사들은 연구를 해서 사람 구원하는 일도 해야 되지 또 미아가 나지 않도록 아무 사고 나지 않도록, 유괴가 없도록 해야 되지. 이러니까 데려다 주기도 해야 되지. 또 전도도 해야 되지. 예배도 참석해야 되지. 이러니까 모든 면을 연구를 해가지고 자기의 역량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그 귀중의 순위를 자기가 알아서 '다른 사람을 인도하는 것보다도 자기 구원을 바로 이루어야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가 있지 자기 구원이루어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가 없다. 이러니까 지금 내 역량으로서 안되니 아무 그 아이는 데려오는 것을 그만 내비두고 예배를 참석해야겠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전도를 못하게 되니 연구를 해가지고 '아무래도 예배 참석하고는 안되겠습니다.' 안되면 안 되면 둘 중에서 어느 것을 내놔야 됩니다.
예배를 내놔야 되겠소, 인도하는 그 학생을 내놔야겠소? 학생의 구원을 내놓고 예배를 취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신앙 행위, 이 외에 있는 모든 행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가 경제면이나 무슨 사회면이나 직장면이나 어떤 면의 것보다 귀중한 것이 신앙 행위요. 우리의 세상살이 수많은 것보다 귀중한 것이 신앙 행위요. 신앙 행위보다 귀중한 것이 우리가 이루는 자기 구원, 곧 자기 천국입니다.
천국을 팔아가지고 신앙 행위를 가질 수 없고 신앙 행위를 팔아가지고 이 세상을 차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일 신앙 행위보다 이 세상의 무엇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이 외식하는 자요, 화를 받을 행위요, 신앙 행위가 귀중하지만 천국을 잊어버리고 신앙 행위만 치중해서 천국이 이루어지지 않는 신앙 행위만 한다고 하면 그것도 외식이요 다 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혼자 하는 사생활이든지 공생활이든지 그 언행심사의 어떤 행위든지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 하나님과 멀어지면 아무 소용없소. 내 기도가 하나님과 멀어지는 기도라면 그 기도는 필요 없고 내가 성경 공부하는 게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면 필요 없소. 내가 주일 지키는 것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이라면 필요 없소.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므로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고, 이리 되므로 나와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입어서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대로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이 모든 종교 의식이나 방편이나 그게 대한 진리나 영감이나 전도나 설교나 행위나 이런 것이 필요하지 이것이 아니라면 이런 것들은 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성령이 오셨고 이것을 위해서 성경을 주셨고 이것을 위해서 주일을 주셨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종교 생활의 그 방편을 주셨고 이것을 위해서 시간도 주셨고 생명도 주셨고 이 세상살이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데 바리새교인들은 이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가까워지느냐, 멀어지느냐? 하나님이 나를 더 자유 하시느냐, 내가 내게 대해서 자유 하느냐? 내 행동은 어찌 되느냐? 나는 자유를 뺏기고 하나님께 자유 하느냐, 나는 권세를 뺏기고 하나님은 내게 대해서 권세를 가지느냐? 나는 나를 완전히 뺏겼고 하나님은 나를 완전히 차지하느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찌 되느냐? 이면을 그분들이 생각하지 안했기 때문에 지체하지 않고 얼마든지 타락해 나갔습니다.
오늘도 전도 위주로, 연보 위주로, 성경 위주로, 주일 지키는 위주로, 기도 위주로, 자기 천국이 어찌되느냐 하는 이 목표 이 욕망 여기 대한 심사의 평가, 이것이 없이 하는 신앙생활은 전도에 불이 붙어나가도 다 외식으로 패망, 기도에 불이 붙어나가도 주일 지키는데 연보에 전도에 어떤 데 불이 붙어나가도 이것은 다 외식이기 때문에 그 결과는 패망되고 맙니다.
이것이 일조일석(一朝一夕)에 안될지라도 자문자답으로 자꾸 이렇게 해야 됩니다.
'내가 뭐하려고 예수 믿나?' 자꾸 자문하고 '내가 뭐하려고 예수 믿나? 집사하려고' 그것도 썩었다. '내가 뭐하려고 예수 믿나? 목사 되려고' 그것도 썩었다. '내가 뭐하려고 예수 믿나?' 사랑하는 가족에게 신임받기 위해서 그것도 썩었다. '내가 뭐하려고 예수 믿나? 사업 잘 하려고' 그것도 썩었다. '내가 예수 뭐하려고 믿나? 부자 되려고' 그것도 썩었다. '내가 지금 뭐하려고 예수 믿나? 병 나으려고' 그것도 썩었다.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제일 처음에 전파하실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다." 첫째 전파에 천국을 주시기 위해서, 천국을 얻을 자가 이제 너희의 종전 모든 것은 다 고쳐서 천국차지 해라. 말씀했습니다. '내가 뭐하려고 참는가? 천국 때문에' '내가 뭐하려고 땀 흘리는가? 천국 때문에' '뭐하려고 기도하는가? 천국 때문에' 이것을 알맹이로 목표로 욕망으로 가지지 않는, 이것이 알맹이가 되지지 않는, 자기의 모든 신앙생활 속에 이것이 알맹이가 되어 있지 않으면 이것이 욕망의 목표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은 다 외식입니다.
천국이란, 하나님 때문에, '내가 뭐하려고 행위를 고치나? 하나님 때문에' '내가 뭐하려고 벌벌 떨면서 나를 쳐서 복종시키고 나를 절제를 시키고 나를 꺾고 뽑는가?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이 어쩌려고? 내 소망의 전부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 필요는 하나님께 있고 내 전부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것이 자기 신앙의 근본 욕망, 목표 이것이 되어 있어야 이 사람의 신앙이 알맹이 있는 신앙이요 생명있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 외식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이렇게 하니 아, 집사를 보니까 이러니까 나도 집사 따라가야지, 장로가 이러니까 나도 장로 따라가야지. 목사가 이러니까 나도 목사 따라가야지. 온 교계에 교회들이 다 이러니까 나도 교계 따라가야지. 다 그래하는데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앞에서 환영을 받고 칭찬을 받아서 신앙의 한 표본으로 보여준 것은 한 형식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뒤를 따라가니까 자기 뒤에 사람은 앞에 사람 뒷꼭지보고 그다음 사람은 그앞에 사람 뒷꼭지 보고 예수님은 하나도 보지 못하고 앞에 사람 뒷꼭지만 보고 여러 수천 명, 수만 명이 이래 뭉쳐도 예수님은 보지도 못하고 다 뒷꼭지만 보고 '이 안에 예수님이 있다.' 사람만 보고 따라갑니다. 이럴 때에 삭개오는 암만 봐야 사람만 보이지 예수님은 보지 못하니까 '이게 틀렸다.' 집어던져두고 앞으로 달음질해서 예수님께서 오시는 그 길을 앞질러 가서 뽕나무에 올라가서 자기가 예수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을 볼 게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야 되겠다해서 가가지고 예수님을 보려고 하는 그것보고 예수 믿어. "삭개오야 내려오라." 그게 있는 모든 사람보다 삭개오를 환영했습니다. "오늘 밤에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너희 집에 천국이 왔다" 했어.
온 세계가 그렇게 믿는다고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고 해도 우리는 따라갈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뭐 때문에 믿느냐? 천국가기 위해서 믿소. 하늘나라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서, 시민의 실력을 얻기 위해서, 하늘나라 시민의 실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인하여 피동되는 그 능력이 하늘나라의 능력입니다. 자기 구원을 위한 이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일학교 반사들도 이렇게 자기 구원을 이뤄야겠는데 하나님으로 더불어 가까워져야 되겠는데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겠는데 하나님의 모든 것을 자기 것 삼아야 되겠는데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소자 하나에게 조그만 수고를 해도 네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 네가 다른 사람을 해방시키면 내가 너를 해방시켜 주겠다. 네가 남의 과실을 용서하면", 용서란 말은 해방이란 말입니다. 잘못된 데서 해방시키는, 잘못된 데서 벗어나오게 하는, "네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하면 내가 너를 구원하려고 하겠고 네가 다른 사람을 구원하면 내가 너를 구원하겠다." 이 말씀이 있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우리가 학생들을 인도합니다.
숫자 채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숫자에, 학생 구원에, 예수 믿는 사람 만드는 이것이 만일 자기의 움직이는 근본 주체사상이 됐다면 이것은 외식입니다. '뭐 때문에 네가 학생 구원하려고 애를 쓰느냐?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뭣 때문에 그 학생을 어두운 세상에서 구출하려고 하느냐? 주께서 나를 모든 어두움에서 구출해 주시도록 하기 위해서', 내가 이것을 구출하는 것이 당신이 나를 구출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이것을 가지고 해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자기 구원을 생각지 않는 것은 외식입니다. 자기 구원을 등한히 여기고 남의 구원에 주력하면 어찌됩니까? 자기 구원 등한히 여긴 그것이 자기가 애 쓰서 다른 사람의 구원에 대해서 주력한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맺느냐? 네가 네 구원을 등한히 여긴 배나 그 사람은 제 구원은 등한히 여긴 사람 만들고 만다. 헛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이 대주재이신 하나님으로 더불어 나와 가까워지기 위함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께 피동되는 연습을 합니다. 지식도 피동되는 연습, 움직임도 피동되는 연습, 인격도 그 신격에 피동되는 연습. 우리 욕망도 당신의 욕망에게 피동되기 위한 연습.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까운 지구땅덩어리에 있는 이 만경창파를 보면 위험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합니다. 층암절벽 높은데에서 밑을 내려보면 어지럽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이 별과 별 사이에 그 거리는 얼마나 어마어마하며 이 항성과 저 항성의 사이는, 우주의 넓은 그 공간은, 모든 존재들이 그렇게 궤도따라 움직이는 그 운영의 경영은, 명상해보면 땅 위에 있는 우리가 느끼는 그런 것은 참 먼지같은 사소한 것입니다.
이것을 엿새동안 만드시고 지금도 주인이고 이분이 운영하시고 이분의 것이고, 한 이분이 나를 바라보다니 이분이 내게 대해서 욕망을 가지시다니 이분이 나를 더불어 의논하다니 우주의 한 부스러기 중의 부스러기인 지구땅덩어리, 지구땅덩어리 속에도 한 귀때기, 한 귀때기에 잠깐동안 세력을 잡은 그 사람이 나를 권고해도 영광에 영광이라, 존귀라 하는데 이 대주재 이분이 나를 권고하다니 이분이 나와 이런 관계를 가지다니 이분이 나를 더불어 대화하고 담화를 할 수 있다니 이분이 나의 책임자가 되다니 이분이 나의 안보자가 되다니, 이분이 나의 아버지가 되고 나의 주가 되고 내 머리가 되다니 이분의 전부가 내것이 되고 내가 그분의 후사로서 천국 들어가게 됐어.
기독자는 양심을 쓰서 생각해보면 굉장한 자기 행복을 깨닫게 되고 성신의 감동을 받아서 구속받은 자기를 생각해보면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지 아니할 자 없고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지 아니할 자가 하나도 없고 이런 명상 가운데서 양심 가운데서 영감 가운데서 기독자들은 구속받은 자기도 보고 자기 행복도 보고 자기 존영도 보고 자기 미래도 보고 자기 지위도 보고 자기의 자존도 보기 때문에 여기서 감사도 나오고 여기서 겸손도 나오고 여기서 담력도 나오고 여기서 정상적인 비판과 평가도 나오고, 이러니까 악령에게 미혹 받아 가지고서 고요히, 떠날 것인데 오늘 던져질지도 모르는데 유익이 있으나 극히 비약한 길인데, 영광이 있으나 극히 사소한 것인데 이런 것에게 귀중한 현실을 허비하고 미혹이라는 사욕 이놈에게 끌려가지고 허탄한 길을 걷는 이것을 벗어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는 양심이 아니고는 자기를 찾을 수가 없고 영감이 아니고는 자기를 찾을 수가 없고 자기를 찾지 못하면 자기 하나님도 찾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천했지만 예수님의 공로로 천해지지 않게 됐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모든 것보다 이분을 탐할만 해. 모든 것보다 이분을 사귀야 돼. 모든 것 배우는 것보다 이분을 배워야 돼. 모든 것 아는 것보다 이분을 알아야 돼. 모든 관계를 맺는 것보다도 이분과의 관계를 맺어야 돼. 모든 잘못된 것 많지만 이분 관계 잘못된 것 이것부터 정리를 해야 돼. 인생은 이분에게만 욕망을 가졌다면 그 사람은 의인이요. 가장 큰 사람이요, 가장 지혜있는 사람이요.
가장 실력있는 사람입니다. 온세계가 눌러도 깨지지 안 할 사람입니다. 온 세계가 미혹 받아도 미혹받지 안할 사람이오. 왜? 이보다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 행위 안에는 이것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있어야 외식이 아니고 알맹이 있는 알곡 있는 신앙입니다.
자기 실력에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서 자기대로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을 보고 그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찾아보고 하나님의 영원전 목적, 예정, 창조, 그리스도의 구속.
얼마나 크고 얼마나 광대하고 얼마나 높고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우리가 감사하고 기뻐하고 자존심을 가져야 할는지 얼마나 노력을 해야 될는지 이분은 모든 것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고 이분 외에 어떤 좋은 것 있어도 그것을 만드신 분이고 이분 외에 어떻게 두려운 것 있어도 그걸 만드신 분이고 오늘이라도 그것을 멸하려면 멸하고 그대로 두려면 두고 하시는 분이십니다.
기독자가 이분을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고 아는 가운데서 소망하고 경영하고 움직여야 되지. 이분은 연구하지 안 하고 이분은 모르고 이분에게 무식하고 이분에 대해서 소망이 없이 이분이 어떤 분인 줄 모르고 이분을 잊어버리고 어떤 신앙생활 했든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분을 잊어버리면 전체는 자기에게 우상이 되고 맙니다. 자기를 멸망시킬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어떤 큰 것이라도 이분 없이 그분을 보면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좋은 것이라도 이분 없이 그걸 봤으면 그것은 우상이 됩니다. 어떻게 두려운 것이라도 이분 없이 그것을 봤으면 그것은 우상이 되고 맙니다. 어떤 필요한 것이라도 이분 없이 그것만 이제 필요하다고 욕망했으면 우상이 됩니다.
내가 땅위에 좋아하고 두려워하고 기뻐하고 내게 필요한 그 모든 것이 막바로 이분이 만든 것이오, 이분의 것이오. 이분의 주권에 매여 있는 것이오. 그것을 보고 좋아할 줄 알고 두려워할 줄 알고 가까이 할 줄 알고 필요할 줄 알고 탐할 줄 알고 위해서 관계를 바로 가지려고 할 줄 알고 그것의 근원인 이분을 잊어버리고 사는 그 모든 행동은 다 껍데기 행동이요, 다 외식하는 행동입니다. 다 화를 자처하는 행동입니다.
15절에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천국 문을 가로막았다가 자기는 천국 문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구원하려고 해서 교회만 나오면 구원이 되는 줄로 알고 있지만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니까 그 사람은 자기 배로 천국에 안들어가는 사람 됩니다.
그러기에 기독자의 걸음은 전 걸음이 천국을 목표로 하고 천국을 향해서 한 문, 한 문, 한 순서, 한 순서, 한 단계, 한 단계를 현실이라는 이 현실을 통해서 문들을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문들을 열고 의로운 나라로 들어간다." 이렇게 자기가 들어가야 그다음 사람이 들어오지 자기가 들어가지 안하고는 아무리 육지로 바다로 돌아다니며 인간구원에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자기 배나 천국을 반대하고 등지는 사람이 되지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이 되는 것만치 그다음 사람을 사람되게 할 수 있는 것이고 또 할 수 있는 그런 자격을 가진 사람이지 자기는 들어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암만해야 그 사람이 천국 안 들어갈 뿐 아니라 네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된다. 목사가 천국 안 들어가면 장로는 배나 안 들어가고 장로가 안 들어가면 집사는 배나 안 들어가고 성직자가 안 들어가면 평신도는 배나 안 들어가고, 이렇게 하늘나라가 위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인데 자기가 들어가지 안하고 그다음 사람 암만해야 이것은 헛일이지. "먼저 네 눈에 있는 들보를 빼고 다음에 자세히 보고 네 형제 눈에 있는 티를 뽑아라." 먼저 네 인생 행위를 네 눈에 해결지은 것만치 너를 인해서 다른 사람들도 해결 지워 줄 수 있다. 네가 충분히 이룬 것만치 다음 사람도 이룰 수 있다. 네가 사람이 된 것만치 그다음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천국 방편은 네가 앞서 가야 그 뒤에 따라오지 네가 앞서가지 안하고 그 뒤에 오는 사람을 아무리 가라고 해봐야 그것은 헛일이다. "네 배나 지옥의 자식이 된다"하는 이것이 하늘나라 법칙인데 자기 구원은 이루지 안하고 다른 사람의 구원을 이루려고, 자기는 회개할 것을 회개하지 안하고 다른 사람 회개할 것을 염려하고 자기는 사람되지 안하고 다른 사람은 사람되기를 노력하고 자기는 믿음가지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은 믿음가지기를 원하고 이것이 다 외식이란 것입니다. 아무리 천인 만인의 구원이 커도 그 사람의 구원은 껍데기요, 내 구원은 알맹이요 내 구원 생각지 안하고 다른 사람 구원 생각하는 그것은 다 껍데기 행위, 화받을 행위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의 구원은 이웃과 자기라면, 이웃 구원은 껍데기요 자기 구원은 알맹이라. 이런데 자기 구원은 생각지 안하고 자기가 사람 될 것,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것, 하나님과 관계 해결되는 것, 이거는 생각지 안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 구원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다 알맹이 없는 외식 전도라.
그러면 그 결과는 어찌 되느냐? 그는 네 배나 알맹이 없는 쭉정이 된다. 네가 네 구원은 생각지 안하고 남의 구원만 생각하는 자가 됐으면 그 사람은 어떤 자 되느냐? 제 구원을 배나 생각지 안하고 다른 사람 구원만 생각하는 그런 자가 되어진다.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화를 받았다.
사람들을 전도해서 모이게 하는 이것보다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찌되느냐? 이것을 생각하고 하늘나라 이루기 위해서 전도가 필요 있지 하늘나라는 생각지 안하고 사람들을 모으는 데에만 노력을 하니 나면서 앉은뱅이를 메어다가 와가지고 구걸하니 메어다가 놓은 사람하고 서로 갈라먹기 하는, 교인들 주어모아 가지고 연보 내니까 연보가지고 집 한 채 사고 또 두 채 사고 예배당 한 칸 늘고 두 칸 늘고, 이것만 생각하지 앉은뱅이가 성전에 들어가지 못한 그게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안했어. 병신노릇 더 많이 해서 오고 가고 하는 사람들에게 구제 더 많이 얻으면 부(富)가 많다고, 하나님의 형상의 천국을 이루는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이면은 생각지 아니하고 더 불신자보다 처세에 능한 수단을 써가지고 남의 덕을 보고 남을 착취하고 남을 이용하고 세상 수입이나 많으면 그것이나 배당하는 이런 욕망의 교회가 말세에 될 것을 보여주는 것이 사도행전 3장에 나면서 앉은뱅이 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먼저 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은 되지 않습니다. 자기가 먼저 되고야 다른 사람이 되지 자기가 되지 않으면, 자기가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 구원을 이루려고 애를 안 씁니다. 내가 암만해도, 내가 내 구원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을 통해서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만들어지고 되는 것이지 자기가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애쓰지 않으면 그 사람을 통해서는 자기 구원을 이루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절대 생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신앙 행위가 구비하다고 할지라도 신앙 행위 욕망의 목표가 이 하나님 이것이 없으면 전부 알맹이 없는 쭉정이 뿐이오, 아무 소용없습니다.
성경을 몇 백 독해도 소용없소. 대부흥사가 되도 아무 소용없소. 다 화를 일으킬 것뿐입니다. 제가 잘못되면 그다음의 사람들은 배나 잘못되고 제가 바로 되면 그다음 사람이 자기만치 바로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보다 좀 못하게 바로 되든지 그렇지. 자기 되는 것이 없이 그다음에는 되는 것이 없는 것을 여기에 말씀합니다.
16절에 "화있을찐저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 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기를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은 이로 맹세함이니라." 이렇게 보이는 면에 치중하고 보이지 않는 면은 무시합니다. 보이는 것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알맹이입니다. 보이지 않는 알맹이가 바로 되고 보이는 껍데기가 있어야 되지 보이는 껍데기만 있고 알맹이는 없고 껍데기에만 치중해서 이것의 가치만 알고 알맹이 가치는 모르는 그 사상이나 생애나 경영이나 노력은 다 화를 받고야 마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외부에 물질 그거는 보이는 것이요. 보이는 물질 속에는 보이지 않는 이치가 있습니다. 그 물질보다 이치가 커요. 모든 물질이 껍데기라면 그 물질 속에 신령한 알맹이가 있습니다. 신령한 알맹이는 무엇입니까? 조물주와의 관련이요. 인간들이 보이는 물질와의 관계, 물질과의 형태, 물질대로의 움직임. 이 보이는 피조물. 이것만 중요시하지 이것의 알맹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무시합니다.
성전 안에는 번쩍번쩍한 금이 있으니까 금은 귀하지만 이 금보다 성전이라.
성전이란 집보다 지은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 이렇게 자꾸 껍데기보다 알맹이, 알맹이 그것 속에 또 알맹이, 이것을 갖추어서 여기에 치중해서 여기에 중점을 두지 안하고 자꾸 알맹이보다 껍데기 겉껍데기보다 더 겉겉껍데기 이렇게만 치중해 나가기 때문에 외식이다. 이러기 때문에 화를 받는다.
금도 제물도 그 까짓게 큰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큰 것인데 이제 겉어머리에 나타난 이것만 큰 것으로 보지 그것이 하나님과의 어떤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는 이것을 무시하기 때문에 그것이 다 외식이요 이런 것은 다 절단납니다. 만일 세계를 움직이는 큰 움직임이 있습니다.
움직임 그것만 볼 게 아니라 그것만 큰 게 아니라 그 움직임 속에 보이지 않는, 이 움직임이 하나님과의 관련이 어떻게 되겠느냐? 이게 큰 데 이것을 볼 줄 모르고 보이는 움직이는 이것만 치중하기 때문에 이것이 알맹이 없는 껍데기다. 외식이다.
'아, 그 교회가 몇 천 명이 모이는 교회라지.' 몇 천 명 모이는 숫자 그것보다도 '보자. 그 교회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어떻게 되어가지고 있느냐? 하나님과의 관련이 어떻게 되어가지고 있느냐' 이것이 큰데 이것은 치중하지 안하고 이면은 두려워 떨면서 여기는 관심을 가지고 모든 것을 바로 하려고 중하게 여기지 안하고 외부에 사람무더기 이것만 크게 여기지. 노아 때는 사람 무더기가 아무리 많았지만 보이지 않는 그분과 잘못되니까 홍수에 전멸되고 말았어. '아, 그 가정은 재물이 있고 권세가 있고 자손이 많고 씩씩하고 행복스럽다' 이것만 볼 줄 알지. 그 가정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찌되느냐? 이것을 너희들이 생각지 않기 때문에 외식자라. 다 망하고 만다.
아합 왕이 왕권을 가졌지. 그러니까 부강하지. 아들이 칠십이나 최고의 학부를 다 나왔지. 이러니까 '아, 그 세력을 누가 당하랴? 저렇게 강하고 튼튼한 저들은 참 견고하고 행복되고 부강하고 영화로운 사람들이다.' 이렇게만 보지. 그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어떻게 되어가지고 있느냐? 눈에 보이는 그것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찌되는가 하는 그게 큰데 그것이 크냐, 어떤 것이 크냐? 금이 크냐 성전이 크냐, 제물이 크냐 제단이 크냐? 하늘이 크냐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이 크냐? 어느 것이 크냐 네가 보는 껍데기 속에는 반드시 껍데기보다 더 가치있고 권위있는 알맹이가 있는데 그것은 찾지도 안하고 만날 껍데기에서 껍데기만 보고 살기 때문에 바리새 교인들이 멸망을 받았으니 이것을 우리가 회개를 해야됩니다. 우리는 껍데기에서 알맹이를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습니다. 보이는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 있는 것들입니다. 신령한 눈을, 신령한 지혜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껍데기 육안으로 보이는 것, 이 시공세계에 있는 것, 이것으로서 그치지만 우리는 이것을 꿰뚫는 지혜를 받았소.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오. 세상 안에 심판과 무궁세계가 있소. 그 껍데기, 그 가죽을 보니까 그 현실 속에는 하나님과의 관련이 그 속에 들었습니다. 그게 큽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하나님과 관련이 잘못됐으면 그까짓 거 소용없소.
아무리 사람이 숫자가 많아도 그보다 더 큰 것이 하나님과 관련 있는 그것이요.
이러기에 그들이 성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생각지 안하고 '아, 성전은 돌로 지었는데 이 가운데는 금이 제일 귀한 것이니까 그거 중에는, 물질 중에는 금이 제일 귀한 것이니까 이 금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 거기에 있는 물질은 성전이라는 그것 때문에 커졌어. 성전이라는 집이 왜 큽니까? 성전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큽니다.
그러므로 진실은 껍데기를 발견하여 껍데기 속에 껍데기보다 더 큰 알맹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알맹이 안에는 그 알맹이에서 그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까 그걸 발견하고, 이렇게 해서 껍데기는 알맹이를 위해 있고 알맹이는 또 그 안에 있는 더 큰 알맹이를 위해 있고 이렇게 해 나가야 이것이 진실을 찾는 것이며 그 실상을 향하야 가는 것인데 자꾸 여기서 외부로 나오기 때문에 이것은 무한히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망받은 것은 보이는 거기서 그보다 더 큰 것, 그 속에 그것의 원인인 되는 그것의 주재가 되는 이것을 발견해서 평가하지 안하고 취급하지 안하고 상대하지 안하고 자꾸 껍데기로 나와서 껍데기에 취중해 나가기 때문에 그는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껍데기 보기에 초라하고 흠모할만한 것이 없고 모든 사람에게 조롱받고 멸시받고 천대받고 옷 한 벌을 못가지고 옷도 발가벗겨 버리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저주의 사망을 당해도 외부는 참혹하지만 그 속에 하나님과 그와의 관련된 이 관련 이것이 컸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승리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외부에 보이는 이런 것이 어찌 됐나 이것보다도 보이지 않는 이 성경 법칙이 어찌 됐노? 그 법칙에 벗어나야 내가 심판을 벗지. 이 성경 법칙에 걸리지 안하려고 성경 법칙에 어찌 되는가? 법인이 법전을 두고 따지듯이 변호사가 법전을 보고 변호하려고 따지듯이, 성경 법에 어찌 되노? 이것이 더 큰 문제라.
아무리 커도 여기 걸리면 아무 소용없어 그까짓 거. 성경 법전에 맞추고 난 다음에는 여기에는 맞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찌 되나 이 면을 찾아서 들어가는 것이 기독자의 진실한 행위요. 이것이 거룩하고 진실한, 거룩을 붙드는 사람이요, 거룩한 사람이요, 거룩에 종착으로 진실에 도달하는 사람인데 이것을 하지 안하고 자꾸 껍데기로만 나오니 화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23절에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그 인식이요, 또 십일조는 사람을 구원하는 투자입니다. 십일조의 용도는 사람을 구원하는 투자요. 십일조의 본목적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이 인식으로 십일조를 내가지고 이 십일조 쓰는 것은 인간 구원에 씁니다. 우리 교회도 십일조 나오는 것은 인간 구원 외에 다른 데 쓰지 않습니다. 인간 구원에만 씁니다.
이런데 네가 물질은 채소까지도 십일조를 내서 이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이라는 표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내가 표시하는 것으로 십분지 일만 내라 했으니까 이제 십분지 일을 하나님의 것으로 드리고, 그러면 십분지 구는 제가 써도 됩니까? 그건 네가 쓰라.
허락받아가지고 쓰는 것, 십일조를 드리므로 나머지 십의 구가 거룩하여지느니라.
그것이 속량되느니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십분지 일을 드림으로써 십분지 구는 하나님의 것을 자기가 받아가지고 사용하는 것이 되니까 하나님의 것을 도적한 것이 아님이 된다고 성경에 말했소.
이것은 할 줄 알면서, 근채 이런 것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면서 네가 사람은 하나님의 것인 줄을 모르느냐? 이런 것들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이 껍데기라면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은 알맹이다. 어떻게 이것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아서 하나님의 것으로 십일조를 드릴 줄 알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아서 하나님의 것으로 네가 취급하지 않느냐? 네가 인간 대 인간으로만 생각하니 인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든 것이니 인간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요 인간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것인 것보다도 더 하나님의 것이라.
이러기에 물질은 하나님의 것인 것을 인식하는 표시하면서 네가 인간은 하나님의 것인 것을 표시하는 이것은 네가 하지 않느냐? 네가 십일조를 드려가지고, 연보 드려가지고 앞집 사람, 뒷집 사람을 먼데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이 복음 운동을 네가 하면서 이 껍데기 속에 알맹이 복음 운동, 의와 인과 신은 네가 왜 버리느냐? 여기 의라는 말은 공의, 정의를 말합니다. 의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네가 왜 공평을 버리느냐? 네가 근채와 이런 것은 하나님의 것인 줄 알아서 십일조를 내면서 인간은 하나님의 것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요, 너도 하나님의 것이니까 인간과 너와의 관계에 이 공평이라는 것을 네가 버리느냐? 공평을 네가 저버리느냐? 너도 하나님의 것, 그도 하나님의 것이라면 그도 너도 동등이요 다 하나님의 것인데 네가 어찌하여 이웃에게 공평을 내버리고 네 주권으로 네 주체로서 그 모든 것을 소욕적으로 취급을 하느냐? 여기 의라는 것은 공의를, 공평을 말합니다.
"인을 네가 버렸느냐?" 네가 자비를 버렸느냐? 네가 물질 내가지고 인간 구원하는 것은 껍데기요, 네가 자비를 사람에게 이제 투자해야 되는데 이 자비는 네가 버리느냐? 십일조가지고 인간 구원하는데 투자할 줄 알면서 네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 공평과 자비는 버리느냐? 또 신을 버리느냐? 그와 너 사이에 움직이는 모든 움직임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움직이는 이것을 네가 가져야 할 터인데 이것을 버리느냐? 그러면 십일조로서 물질이 하나님의 것을 알고 여기에 치중하면서 사람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는 것, 물질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이 꺼풀 속에는 모든 사람도 하나님의 것이다. 물질이 하나님의 것인 것보다 더욱더 사람은 하나님의 귀중한 것이다. 물질로 인간을 구원하는 이 꺼풀 속에는 의와 인과 신의 구원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버렸도다. 다시 말하면 네 자신으로 인간 구원의 자본을 삼는 이것을 버리고 네 소유로만 가지고 인간 구원에 주력하니 네가 이것이 외식이다. 그렇게 되면 타락하는 길밖에 없어.
네가 인간 구원하는 자는 인간과 네가 동등 가치를 가졌기 때문에 거기는 공평을 길러내야 되고 그 면은 물질보다도 네 인격이 필요하기 때문에 네 인자가 필요하고 거기는 물질보다 네 행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네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는 행위 이것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인데 이 알맹이 없이 물질가지고 인간을 구원하고 물질로만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네 생활은 알맹이가 없기 때문에 시간 가면 썩을 수밖에 없고 이것은 화가 될 수밖에 없다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다음에 내리 읽어보면 이제 위에 이것을 알았으면 그 다음은 연구하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결론으로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요. 무엇이든지 잡았느냐? 네가 생각하느냐? 무엇이든지 봤느냐? 들었느냐? 했거든 거기서 머물지 말고 거기서 그것보다 더 겉껍데기가 되어있는 겉으로 나가지 말고 거기서 머물러 있지도 말고 거기서 그것보다 겉껍데기가 되는 겉으로 나가지 말고 네가 잡았느냐, 보았느냐? 가졌느냐 만났느냐? 거기서도 머물러 있지 말고 그것보다 더 작은 데로 기어나가지 말고 무가치한 데로 지나가지 말고 거기서 그보다 더 큰 것으로 기어들어가라. 안으로 기어들어가라.
이러면 너는 외식이 아니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너는 화대신 복을 받지만 네가 어떤 것을 잡았을지라도 그것을 다로 알고 그것을 근본으로 알고 그것에서 맺어지고 이루어질 거기서 그것에 결과적으로 맺어지고 이루어질 그것의 결과, 그리 밖으로 뻐드려져 나가지는 말아라. 외식으로 자꾸 살아가지 말아라. 거기서 알맹이로 들어가서 그보다 큰 것을 찾아라. 그것의 원인을 찾아라. 그보다 큰 것을 찾아라.
이것을 결론적으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이것이 설교의 목표입니다.
언제든지 껍데기밖에 겉껍데기가 있고 겉껍데기밖에 또 겉겉껍데기가 있고 알맹이 안에 알맹이가 있고 그 알맹이 안에 알맹이가 있어 마지막 최종적인 알맹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에 네가 무엇을 만났든지 그것에서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서 알맹이로 안으로 찾아들어가고 또 그것의 알맹이로 찾아들어가고 들어가서 마지막에 종착이 생명인 하나님께 도달해라. 그래야 복이 되어지지 그렇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가 붙들어서 가졌든지 접촉해서 가졌든지 봐서 가졌든지 가져가졌든지 거기서 알맹이를 찾을 줄 모르고 껍데기로 나가면 결국은 너는 타락하고 화가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