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행위


선지자선교회 1986년 5월 6일 화 오전집회

 

본문 : 요한계시록 3장 1절∼6절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신앙은 자기 실력의 범위에 따라서 넓은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상적으로 또 소욕적으로나 계획적으로 활동적으로 넓은 분야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잘못하면 이 구석에서 끼어 가지고 일생을 허송하기 쉽고 저 구역에 끼여 가지고 일생을 허송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을 집중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흩어져 있는 그 모든 전 내 인격과 행위와 모든 쌓아 놓은 그 이력을 주 모아서 한테다가, 집합하고 집중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사람들을 보면 뭐 별별 그 함정에 빠져 가지고 일생을 날아가듯이 허송하고 끝마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찬송도 좋은데 찬송은 하나의 소개와 같이 우리의 그 심령을 좀 깨워 주는 그런 좋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찬송은 다 성경을 근거해 가지고 지은 찬송이지만 가사에 중점을 두고 초대 교회에는 그렇게, 찬송을 짓는 사람들이 그런 정신으로 저술했지만 차차차차 세상에 죄악이 관영해 가는 데 따라서 거게도 하나님 중심보다도 자기 중심 자기 기쁘고 좋도록 하려는 꼭 세상이. 노래는 유흥적인, 물론 음악에도 그 속에 철학이 있지만 대개는 그렇게 나가는 것처럼 찬송도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찬송을 주력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신앙이 체계적이 되지 못하고 어덴간가 치우쳐서 감정 신앙, 마지막에는 자기의 주관 신앙으로 삐뚤어지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 정신도 모아야 되겠고 사상도 모아야 되겠고 자기의 모든 소망 소욕도 모아야 되겠고 자기 계획도 모아서 점점 모아서 집합시키기를 힘써야 됩니다.

그러는 데에는 어디로 모을 것인가? 첫째 하나님의 이 문서 계시인 이 성경 말씀으로 집합시키고 집중시키기를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다가 이 성경 말씀에서 집합시키고 집중시킨 것은 그것은 일차적으로 세상에 여게 저게 흩어져 있는 것을 모으는 데에 지나지 못합니다. 여게서 성령의 감동으로 집합을 시켜야 됩니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집합을 시키면 이제 거게서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한 분이신 고분과 자기와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감이라면 어떤 게 영감인가? 성신의 은혜라면 어떤 게 성신의 은혜인가? 자기가 자기 주관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알고 깨닫고 믿을라고 애를 쓰면 자기 주관이라는 고개턱 너머 객관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객관 역사가 시작되면 무슨 역사가 시작되는가? 첫째로 문서 계시인 이 성경 말씀을 자기가 깨닫는 그 강도가 주관성을 넘어서 객관성으로 깨닫는 깨달음이 생겨지고 또 믿어지는 믿음이 생겨지고 거게 또 소욕이 생겨지고 자기가 그렇게 실행하고 싶은 그 모든 계획이나 모든 실행하는 그런 면에 있어서 자기의 주관력을 초월한 그 객관의 능력이 와 가지고 자기를 변화시킵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물론 자기 몸이 뜨거워지더라 또 방언이 나오더라 뭣이 보이지 않던 것이 주관주의로 탈선됩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서 불건전한 신비주의라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저 성령의 은혜는 우리에게 깨닫게 하는 그 깨달음. 믿어지게 하는 그 믿음 거게 대한 소욕하는 그 모든 소망, 또 그 말씀대로 행하고저 하는 그 담력 이런 그 은혜가 강령적으로 성령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나가지 안하고 어떤 사람들이, 영감도 오고 마귀 감화도 옵니다. 영감 오면 감화가 물러가는 것 아니오. 어떤 사람이 그래서 '마고 일장에 도고 일장이라 도고 일장에 마고 일장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한 길 오면 마귀의 유혹 한 길 온다 그 대단히 적절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을 체계적으로 은혜를 받아 가지지 못하고 이리저리 치우쳐서 기형적인 그 깨달음의 은혜나 믿음의 은혜나 소망의 은혜나 용감의 은혜가 그 체계적으로 오지 안하고 기형적으로 오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체계적으로 온다 말은 간단하고 말해서 우리 사람이 세 살 먹는 아이라면 세 살 먹는 아이는 세 살 먹는 아이대로 이목구비 수족이나 내 장이나 또 그의 그 심령이나 그 모든 것에 성장율이 다 기형을 이루지 안하고 적당하게 모든 것이 다 고루 고루 이렇게 자라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체계적이라 말하고 기형이라 말하는 것은 마치 귀면 귀만 커다랗고 몸은 조그만하고 또 몸은 크고 팔다리는 짤막하게 조그만하고 그라면 그거 다 병신 그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깨달음도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이래서. 그 방언파니 지시파니 또 뭐 신유파니 이래 쌓는데 그런 이름을 가지는 것만큼 그것이 불리합니다. 방언은 어떤 게 방언이냐? 방언은 전하는 자에게 전하는 능력이 오는 것이 그것이 방언의 해입니다. 옛날 사도 시대에 사도행전 2장에는 한 나라 말로 전했는데 들려지기는 여러 나라 사람들에게 각각 제 나라 방언으로 들려져서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전하는 데에 성령의 능력이 와 가지고 전달되는 것이 인간에게 제재받지 안하고 인간을 초월하는 그런 능력이 와 가지고 전하게도 하고 또 들어서 깨닫게도 하는 그것이 방언 역사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방언 역사는 어떤 건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리를 전하는 데에 잘 알아듣도록 전하고 또 전할 때에 지식으로 전해지는 그 지식의 꺼풀 속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능력이 전해지도록 그렇게 되는 것이 방언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요, 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자기 지식을 초월해서 들어 깨닫는 그 은혜를 가지는 것이 그것이 방언 은혜를 가진 것입니다. 요것이 건전한 방언의 은혜입니다.

뭐 이해 가지고 데데데데데데데데 이라는 것이 그것이 방언 은혜 아닙니다.

그거는 그렇게 할라고 하면 너무 사람들이 자기의 주관이 강하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좀 주관성을 떠나서 객관성을 영접하도록 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지도하는 사람들이 다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다 보면 나중에 가서 자기가 이성을 잃을 만치, 자기 주관을 잃을 만치 주관이 흔들려질 때에 그때에 객관성의 이 진리를 넣어 줄 수도 있다 해서 그렇게 움직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보면 그것이 고치지 못할 그 주관성이 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그것도 일종의 불전전한 신비주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거 그거는 뭐 하기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하고 싶으면 뭣이든지 자기가 아는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자꾸 무슨 말이든지 자꾸 빨리 주 대십시오, 빨리 자꾸 주 대면 혀가 따라가지 못할 만치 주 대게 되면 자기 마음은 앞에 가고 혀는 따라가지 못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느끼는 그런 단계가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그 말의 뜻에 표현은 다 될 수 없는 그 속도가 되어질 때에 나중에 가서는 그만 마음으로 가지고 다다다다다다 이렇게 하게 되는데, 그러면 나중에 가서 얼마 안 가서 그 사람에게, 그게 아니면 기도가 아니라 이래서 중심을 그렇게 정확지 않는 혼돈 혼잡되는 그런 단계에 나아가야만 자기가 기도에 들어갔고 은혜를 받았다고 이렇게 아주 참 얼토당토 안 한 이런 탈선의 길을 걷게 됩니다.

그래서, 일 만 마디 방언보다도 한 댓 마디 깨닫는 게 낫다고 성경에 말했고 또 방언을 말할 때에 본인이 그것을 뭐인지 모르면 방언이 아니라고도 말했고 또 다른 사람이 번역할 수 있는 그 방언이 아니면 듣는 사람들에게 다 오랑캐가 된다고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행전에 보면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 가지고 복음을 전할 때에 고때에 모두 성령이 임하고 방언 역사가 일어났고 하나님을 찬미해 섬기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랬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방언 역사가 나타났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을 높여 섬기는 그런 역사가 나타났다 그랬습니다.

그 방언 역사라 말은 설교하니까 인간 힘으로만 전하는 게 아니고 전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힐 이상의 객관 능력이 와 가지고 자기 전하는 데에 역사하셔서 그 객관 역사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설교될 때가 있습니다.

이거는 혹 여기 많은 사람들은 다 대부분이 평신도들이기 때문에 평신도가 거게 대해서 혹 잘못 깨달을까 해서 하나 더 합니다.

본인이 다른 사람에게 심방을 가든지 전도를 가든지 할 때에 기도를 많이 하고 자기가 은혜를 받아 가지고 가서 전하면 전할 때에 자기가 생각한 말은 두 마디인데 세 마디 나옵니다. 또 자기는 생각지 못하였던 정당한 권면이 나가서 자기에게 성령이 자기를 붙들고 전하는 일을 도와 주시는 것을 본인이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방언 역사입니다.

또, 자기가 전하니까 전하는 말씀을 그 사람이 다같이 있는데도 이 사람은 못 알아듣는데 한 사람은 거게 대해서 참 평소보다도 특수히, 그 사람이 알아듣고 깨닫고 거게 대해서 그 말씀대로 그 자신이 조그매씩이라도 변화되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에 그것이 받는 자의 방언 역사요 전하는 자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고, 그것을 가리켜서 '방언을 한다' 하니까 거게도 뭐 데데데데데 그런 소리 하는 것 말한 것 아닙니다. 언제든지 참이 있을 때는 거짓이 있고 죄와 의는 동행합니다. 영감과 악령의 감화는 늘 동행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리 기울어지면 요것 되고 조리 기울어지면 조것 됩니다.

그러고 성신의 감화가 오면 거게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생겨지더라' 성신의 감화가 오면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그에게 생겨지고 하나님의 크심을 알게 되고 그의 진실하심과 정확하심을 점점 자기가 깨달아 알게 되고 그분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분을 그래서 믿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복종하는 그런 은혜가 점점 이루어져 갑니다. 그것이 성령의 은혜입니다.

몸이 뜨거워지니 하는 그런 것은 아직까지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고 그저 물론그러합니다. 성신의 감화가 오면 뜨거워집니다. 아무리 겨울에 눈 속에 가서라도 기도하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추운 줄도 모르고 무릎을 꿇고 밤새껏 앉았어도 자기를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서 땅에서 뜨지는 안하지만 무릎에 부담이 안 가기 때문에 아픈 줄 모르고 피곤한 줄 모르고 이렇게 기도하고, 기도하고 나면 주변에 있는 그 눈이 녹습니다. 그 몸에서 뜨거운 열이 나와서.

그런 것은 성신의 감화가 오니까 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니 거게 따라서 몸도 뜨거워지고 그렇게 필연적으로 그래 되는 것이지 뜨거워지는 그것은 성신의 은혜가 아닙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하는 그것이 성신의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것이 이렇게 사이비하게 탈선되기 쉬우니까 잘 배워서 탈선되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기도를 해도, 그만 이 분이 좀 남아서 이 분 동안에 본문 읽지 안하고 할라 하는 것이 좀 많이 지나왔습니다. 그 사람이 산에 기도하러 가든지 금식 기도를 하려 하든지 무슨 기도를 집에서 작정을 하든지 기도할 때에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하나 단단히 두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 목적을 거머쥐고 기도하는 사람은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요 또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 목적과 자기 소욕이 참된 것인지 거짓된 것이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기도할 때에 자기의 모든 그 생활 분야를 다 포기하고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합을 시키라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집합을 시켜서 하나님 말씀에 내가 잠겨 가지고 하나님 말씀과 나와 하나돼 가지고, 말씀과 나와 하나가 이래 돼 가지고 거게서 자신이 말씀화돼집니다. 말씀과 틀린 것이 자꾸 말씀을 따라서 말씀화되어지면 되어진 것만치 자기의 생각도 발라지고 뜻도 발라지고 소욕도 발라지고 비판도 발라지고 평가도 발라집니다. 그 발라지는 것이 하나님 말씀을 따라서 발라집니다.

발라지고 나면, 처음에 '이 일은 죽어도 이루어져야 됩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결사작인 기도하러 갔었는데 나중에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가 가지고 말씀과 자기와 일치가 차차 되어져 가는 가운데에, 내가 이제 기도했던 것을 주님이 안 들어 주셨으니 불평을 했었는데 안 들어 주심을 감사합니다. 안 들어 주신 것은 만일 주님이 들어 주셨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주님의 사랑은 내 강퍅한 나에게 제재받지 안하고 나를 초월해서 능동적인 사랑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양육하신다.

내가 만일 구하는 대로 내가 욕심낸 대로 이루어졌더라면 큰일 날 뻔했는데 주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지 아니하신 데 대해서 감사합니다. 하는 사람이 되어서 기도의 목적이 변해 버립니다.

이래서, 기도하러 갔다가 그거 깨닫고 난 다음에는 주님 부끄럽고 미안합니다.

이제는 내 주관대로 사욕대로 육체의 소욕대로 하지 않도록 해 주옵소서 하고 그 기도의 장소에서 뒤로 물러나오는 그것이 뭐 거의 태반입니다.

이런 사람은 기도하는 그 방식을 바로 배워 가지고 바로 한 사람이지만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기도하러 가 가지고, 분명히 옆에서 보면 그 사람이 기도할라는 그 제목은 잘못된 것인데, 자기 사욕이요 자기 주관인데 기도하러 갔습니다. 가 가지고 보름을 기도했습니다. 보름을 기도하면 자꾸 그것만 생각합니다. 이제 자기 목적한 그것만. '아무래도 이거는 돼야 되겠는데요. 아무래도 이거는 해 줘야 되겠습니다.' 자꾸 한 보름 동안 되풀이해서 그것만 자꾸 생각하고 보니까 인제 그것이 처음에는 흙뭉텅이 같은 것이, 흙뭉텅이 같은 사욕이 나중 에는 이 무쇠 쇠덩이같이 야물어집니다. 무쇠 쇠덩이같이. 야물어져 가지고 뭐 그것은 누가 말해도 그거 변화나 회개나 하지를 않습니다.

그런 것이 성경을 모르고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이, 대개 그걸 가리켜서 신앙의 뭐 마목이라 할까요 신앙의 암이라 할까요. 인제 그것이 한 개 두 개 되면 그 사람은 그게 들어서 주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떤 욕심 하나 절대 불변의 욕심 그 주관 불변의 주관 그놈이 들어 가지고 그 사람을 주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는 그게 옳은 줄 알고 그렇게 해 나가는데 그것이 틀렸지만 틀린 걸 모릅니다. 모르고 그 주관대로 강하게 이렇게 나가기 때문에 제 삼자가, 바로 깨달은 삼자가 볼 때에 틀린 것을 알지 본인은 모릅니다.

그것이 나중에 가서 커 나가면 이단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이단이 됩니다.

이단이라는 것은 자기가 틀린 줄 알고 틀린 말하는 것은 이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좌를 짓는 것이고 강퍅이지 이단은 아닙니다. 틀렸는데 자기는 틀린 줄을 모르고 꼭 옳은 줄 알고 그렇게 강하게, 주장돼 나가는 그것이 다 이단인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 생겼는가? 기도에서 성장했는데 자기의 주관 소생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까지도 그놈을 둬 두고 이것을 중심해 가지고 이것을 이룰라고 자꾸 이놈을 키웁니다. 마치 조개 속에 모래알 넣어 놓으면 조개 전 진액을 모래알 이놈에게 자꾸 감아 가지고 이거, 아프니까 이거 자꾸 가룰라고 하기 위해 한 것이 그게 나중에 진주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소욕 하나 그것을 자꾸 키우고 키우고 키워 가지고 그리 된 그것이 나중에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됐다가 좀 이 세상 지식이 구비한 사람은 그것이 이단자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자의 요소는 어떤 것이 이단자의 요소냐? 이단자의 요소는 자기 인기를 끌라고 하는 그것이 이단자의 요소입니다. 그것이 이단자가 많이 되고 적게 되는 것이 차이가 있어서 사람들이 대번에 식별을 못해 그렇지 벌써 설교든지 목회든지 할 때에 자기 인기를 위해서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 끌어붙일 자기 인기 집중으로 하는 그것이 원죄요 그것이 삯군이요 그것이 이리요 절도요 강도요, 목회자에 대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그것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전 사상이나 주의나 모든 것을 그저 다 포기하고 성경 말씀으로 집합해야 됩니다. 무조건 성경 말씀으로 들어가서 나를 부인하고 성경 말씀대로의 내가 될라고, 성경 말씀을 딿는 내 마음이 되고 성경 말씀을 딿는 내 정신이 되고 내 주장이 되고 내 욕심이 되고 성경을 딿습니다. 성경을 따르면 성경은 성령의 역사를 소개하는 소개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성경 말씀대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성문 의지인데 성문 의지는 간략합니다. 신구약 66권이 이게 성문 의지 아닙니까? 성문 의지인데 이 성문 의지 속에는 하나님의 영감의 은밀 의지가 있습니다. 그 은밀 의지는 참 심히 세밀하고 복잡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이 성문 의지에서만 머물고 은혜에 속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자기를 정죄하고 맙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 교인과 서기관들과 제사장들이 그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그들이 공연히 세상법 가지고 못 박은 거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예수님이 성경을 위반한다고 해 가지고 성경으로 정죄해 가지고 다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이 문서 계시 인도를 받아 가지고, 진실 되게 '문서 계시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은 영감 계시에 나아갔습니다. 영감 계시를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에 다 알았습니다. 시므온이나 안나나 이런 사람들은 다 벌써 강보에 싸인 예수님을 보고 찬양을 했고 메시야로 알았습니다. 또 그 들판에서 목동 초군으로 목동 생활하는 그 무식하고 노무자들 중에도 말단 노무자들인데 그들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면 고위층에 있는 사람들은 다 영접지 못했느냐? 아닙니다. 사가랴는 대제사장이지만 그분도 예수님을 자기의 구주로 영접했고, 예수님의 앞잡이로 온 세례 요한의 아버지입니다. 영접했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을 보고 지식적으로 신구약 성경을 보고 율법적으로 법리적으로 이렇게 지켜 행하고 이 성경 말씀에서 자기가 변화되어서 자기를 초월한 이 무인격성인 이 성경 도리로서 자기가 변화되어 생존 신격자이신 그 영감을 영접하는 이 일을 하지 안하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율법적이요 또 인본적인 것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자꾸 이런 말을 듣고 이제는 눈을 떠서 '저 사람은 예수를 믿지만 인본주의다 신본주의다 또 유물주의다 저 사람은 도덕주의다 정치주의다 세상주의다' 주의라 말은 그 사람의 모든 지식 중에 그 지식이 제일으뜸이 되고 주장돼 가지고 있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에 주의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구별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처음에 해방되기 전에 그때 우리 조선 교회가 아주 신신학 속에 파묻혔고 하나님의 종들은 다 망명도 하고 또 감옥에도 갇혔고, 또 다니면서 전하는 사람 있었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예 피해서 가까이 가지도 안할라 하고 이렇게 해서, 아주 참 그저 지체 안 하고 저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진가를 식별하지 못할 그런 암흑 속에 있다가 해방으로서 다시 빛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해방 후에는 그때에 한창 '이 길이 옳으냐 저 길이 옳으냐' 그렇게 많이 사람들이, 너무 믿었던 게 다 헛일이니까. 그때 인도하던 그 인도를 받아서 믿던 그 모든 교회들이 다 헛일이니까 '이제 우리가 헛일했다. 이제는 바로 믿어야 되겠다.' 해 가지고 진가를 구별하는 그런 일이 심했습니다. 이래서 강단에서 의례히 설교하면 이 진가를 구별하는 설교들이 많이 나와서 그럴 때는 뭐 인본주의니 신본주의니 하는 말이 어떻게 많이 퍼져서 강단에 꽉 찼었습니다.

이러나 요새는 인본주의 신본주의 말을 일 년 내내 가도 한 마디도 듣지 못하기 쉽습니다. 이게 없어졌습니다. 인본주의니 신본주의니 뭐 도덕주의니 정치주의니 윤리주의니 사회주의니 또 세상주의니 지상 현실주의니 하는 이런 것이 그만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져서 참, 없어졌으니까, 아가서에 말하기를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해가 기울어지니까 그림자가 없어집니다. 전부 해가 있을 때에 뭐 음지 양지가 있고 또 어두운 거 밝은 것이 있지만 해가 딱 넘어가고 나니까 전부 어두움뿐이니까 네나 내나 꼭 같은데, 그래서 그런 암흑 시대가 오는 걸 가리켜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그랬습니다.

그럴 때는 유향의 작은 산과 몰약산으로 가라 이랬는데 유향의 작은 산이라 말은 그때는 단체 행동은 안 되니까 아예 개인 행동으로 네가, 나다나엘이 무화과 나무 밑에서 그 암흑 시대에 주님을 찾고 진실히 교제했기 때문에 나다나엘이 가니까 '이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라. 간교함이 없다, 간사함이 없다.' 이랄 때에 '나를 어찌 알았습니까?'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나한테 기도할 때 내가 보지 안했느냐?' 이렇게 말했어.

그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모든 걸 구별을 했지만 지금은 그만 깜깜하게 어두운 때가 돼 놔서 그런 소리 다 없습니다. 누가 인본주의니 신본주의를 말하면 막 목사들이 지금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저놈 놔 죽여라 이랄 것이오. 소리 없는 총이 있으면 놔 죽이라 이랄 것이오. 왜? 인본주의니 신본주의 이래 쌓아니까, 신본주의는 그래 안 합니다. 인본주의가 제 인본주의가 드러날 터이니까 저놈 때문에 내가 목회 못 하겠다 해 가지고 인본주의가 총 파 죽이라고 할 것이오.

도덕주의니 정치주의니 유물주의니 세상주의니 지상 현실주의니 이래 쌓으면 환하게 자기가 들나 버리니까.

이래 가지고 나중에 다 죽임을 받는 것이 선지자들이 죽임받는 것입니다. 죽이고 난 다음에는 잔치하면서 그놈 미워하는 놈 죽었으니까 잘됐다 하고 그까짓 놈 장사도 지내지 마라 하면서 그 시체를 거리에다가 뻐들트려 놔서 사홀 반 동안 있다가서 이제 생명이 돌아와 가지고 하늘로 올라갔다 했습니다. 요한계시록 11장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저 한 마디도 빠주지 말고 이번에 들은 것을 가서 녹음해 가지고 자꾸 들으십시오. 듣고. 그만 잊어버리니까. 요새는 이 녹음기가 있어 놔서 참 좋습니다. 모두, 내가 오늘 아침에 어떤 목사님 보니까 여기 '뭐 응문에 뭐 요만한 걸 찼어요. 요만한 걸 차서 여기 내가 나는. 못 봤어요. 모르니까. '그게 뭐이냐?' 물으니까 웃으면서 '이거 녹음기입니다.' '고게 녹음이 뭐 다 되나?' 녹음기를 딱 응문에 딱 차고 돌아다니요. 차고 돌아다니면서 요래 가지고 뭐 요래 양쪽에다 딱 꽂아 다니면서 길을 가도 그라고 일을 해도 하고, 이게 사는 길입니다. 자꾸 그래서 말씀을 접하면 마귀는 죽습니다. 마귀가 말씀한테 놀래서 그 놈이 달아나지 그 뭐 아무리 세상 과학 다 들어대야 그거는 제것이오.

이제 이라다 보니까 이제 사데 교회에 대해서 제가 증거할라 했던 걸 증거를 그만 못 하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3장 1절, 제가 읽었습니까? 예, 그라면 1절에서부터 내려가면서 간단하게 해석하겠습니다. 거기 대해서 여러분들이 연결을 시켜 가지고 체계적으로 연구를 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뭣을 상징해서 이렇게 말씀해 놓은 것인가 그것만 깨달으면 알게 됩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러면 이 편지하는 이는 누가 편지하는고 하니 우리를 대속하신 주님이 당신의 피로 값주고 산 교회를 사랑하시고 애끼고 잘 기르시기 위해서 편지하는 것입니다.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러면 사자에게 편지한다 그 말은 그 교회를 책임맡은 책임자에게 알린다 그 말입니다. 이 일곱 교회는 신약 교회 전부를 가리켜서 일곱 교회로 이렇게 표시했습니다. 하나님은 일곱의 그 수를 당신이 늘 쓰시는 만수로 쓰셨습니다. 일곱 교회,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일곱 천사 이렇게 뭐 일곱 수를 많이 썼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하나님의 일곱 영은 성령님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이랬는데 왜 일곱 영이라고 표시가 됐는가? 성령님이 이 쿄회에 대해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면을 다 책임지고 모든 면이 완전하고 구비한 교회가 되어지도록 이 일을 책임지고 나선 이 성령을 가리켜서 일곱 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일곱 영이라는 거는 성령을 말했는데 일곱 숫자를 붙인 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그 천 각도나 만 각도나 천 면 만 면 모든 전면 그 전면을 완전케 하는 이 구원 역사, 예수님이 완성해 놓은 그 구원을 그 성도들에게 완전히 입혀서 성도들이 그 구원을, 완성된 구원을 입어서 성도들 하나 하나가 다 완성된 성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책임을 가지고 나선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업에 대해서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다 이랬어. 보증으로 성령. 우리 구원에 기업의 완성을 보증하는 성령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그것을 가리켜서 일곱 영이라고 말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신 데, 성령님은 하나님이시요, 어떤 교파에서는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그 존재의 선후를 찾는 그런 교파도 있고 또 상중하로 구별하는 그런 교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성경대로가 아니고 잘못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는 한 하나님이요 한 하나님이 위로 서이요 본체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무한하신 분을 유한한 어떤 것을 가지고 삼위일체는 이렇다 그렇게는 말해야 안 맞습니다. 안 맞지만 저는 깨달은 대로는 그렇게 깨닫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사람이 남편도 되고 호주도 되고 또 아버지도 되고, 그러면 한 사람이지만 그 직위는 달라.

'아버지' 할 때에 이 사람이 '와야' '내 남편 여보' 할 때에 '예 여게 있소' 또 '이 집에 호주가 누구냐?' 이라니까 또 호주로 나서고 각각 모두다 맡은 직분이 다르다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지만 그렇다 그거요. 그와 같은 것이라 이라면 사람 말로는 다 표시할 수 없는 그 신비한 무한성이 다르기 때문에 유한의 말로는 그렇게 정확한 표시를 못 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기도하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태양, 거게서 나오는 빛, 거게서 나오는 따뜻한 열기, 뭐 그런 것으로도 비유하는데 그것도 다 모두 그저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라 하는 내나 하나라는 것을 지금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 무한을 유한 가지고 무슨 유한한 거 요거 같은 것이 이 무한하신 하나님이라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성령님은 맡은 직분이 달라 그렇지 내가 한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한 하나님이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신데, 우리의 대속을 책임진 하나님을 가리켜서 성자라 이렇게 말하고 또 성자가 대속해 놓은 것을 우리에게 다 구원 완료를 시키는, 구원 완료, 우리에게 구원 완료를 시키는 그 역사를 맡은 그 하나님을 가리켜서 성령님이라 이렇게 말하는데 또 그러면 그러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는 성령님의 은혜를 입어 가지고 십자가에서 승리했습니다.

에베소 1장에 보면 지극히 큰 능력이 예수님을 붙들어서 죽으심의 성공, 죽는 일, 예수님은 죽는 일 성공했소. 또 부활도 성공했소. 그러면 예수님의 성공함같이 우리도 그렇게 죽어야 성공이고 그렇게 부활해야 우리도 성공입니다.

이런데, 그때도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서 그렇게 하도록 협조해 가지고 그와같이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이 누군가? 내나 성령입니다. 말을 하자면 대속한 그 대속을 성령님이 우리에게 이제 실제로 실상의 그 구원이 되도록 적용시키는 그 역사를 책임진 그 하나님이 성령님이라 이렇게 말하나 한 하나님이십니다. 여게서 잘못하면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과'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말은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라 말인데 '하나님의 영' 이라 말인데 일곱 영 이라는 그 일곱 숫자를 붙인 것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그 대속을 나에게 구속으로 입혀 주실, 구속으로 입혀 주실, 대속은 대신한 것을 말하고 대속한 것을 우리에게 적용시켜서 하는 것을 가리켜서 구속이라 이렇게 나눠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같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이 대속하신 이 대속을 우리에게 완전히 입히시는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나타나신 성령님이라 해서, '하나님의 영'이랄 건데 '하나님의 일곱 영' 하는 일곱이라 하는 숫자를 넣어 놨습니다. 일곱 이라는 거 빼놓으면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인데 일곱 숫자를 넣어 놓으니까 하나님이 일곱 영 됐습니다. 일곱 영이라 하는 것은 그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영'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영이 이 사데 교회를 구원할라고, 이 성령님이 사데 교회에 모든 것이 구비하고 온전해서 부족함이 없는 이런 큰 역사를 할라고 성령님이 오셨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는 이 계약을 거머쥐고 얼마나 울어야 되고 얼마나 간구를 해야 되고 얼마나 노력을 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택함을 입은 성도들을 위해서 전부를 기울여서 이래 하도록 이렇게 된 그 근거가 뭐이냐? 그 근거 그 뿌리가 뭐이냐? 무슨 이유로 무슨 원인으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이 피조물인 이 사데 교회 교인들을 위해서 이 전적 와 가지고 책임을 지고 전부를 기울여서 이 완성을 할라고 그렇게 왔는가? 온 이유가 있습니다.

이유가 있는 것은 뒤에 혹 시간 있으면 증거할란지 모르나 로마서 1장 16절로 17절에' 보면 바울이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유대인에게요 헬라인에게요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데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렇게 거뜩거뜩 이래 말해 놨습니다.

그러면 로마서 3장 10절에는 보면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는데 여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내나 이것도 하나님이 말씀했고 로마서 3장 10절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그 3장 10절에 의인 없다 하는 그 소리는 무슨 소리며 여게 또 의인이라는 그 의인있다고 의인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고 의인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것은 뭐인가? 한 성경에 이렇게 모순되다 이래 가지고 시비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로마서 3장 10절에 의인이 없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는 인간에게 의인은 하나도 없는 걸 말하심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이 없이는 의인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여게 의인은? 하는 것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는데 하나님의 의는 어떤 게 하나님의 의이냐? 하나님의 의는 신인양성일위가 하나님이 제일 골치 아프게 근심 걱정하고 제일 미워하고 노여워하는 거 세 가지를 해결한 것이 하나님에게 일차적으로 기쁨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입니다.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것이 어떤 게 노여워하시는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이 피조물을 만드시기 전에 '이거 피조물을 만들어 놓으면 멸망하는 탈선길이 세 길이 있는데 이 세 길 탈선 구멍을 막아야 될 터인데' 해서 그 탈선 구멍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목적이 그 구멍 막는 목적입니다. 범위가 넓어서 다 잘 모르나 이제 그만큼만 알고 계십시오.

피조물이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그것이 하나님의 제일 노여워하는 것이요 근심하는 것입니다. 왜? 법만 어기면 그것은 삐뚤어져, 하나님 법은 진리요 정확하기 때문에 그 법을 어기면 삐뚤어졌다 말이오. 삐뚤어지면 망하는 거 아닙니까? 삐뚤어진 게 뭐 됩니까? 죄라는 별명이 뭐입니까? 죄라는 별명이 뭐입니까? 삐뚤어진 거. 죄라 말은 삐뚤어진 것이라 그 말입니다. 이랬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삐뚤어진 이게 문제라 그 말이오. 그 삐뚤어진 값은 사형입니다. 영원한 사망입니다.

또 하나는 피조물이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야 될 터인데 피조물이 제 중심으로 제 위주로 '모든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됐다' 하는 그게 뭐입니까, 그게? 그 죄 이름이 뭐입니까? 그 죄 이름이 뭐입니까? 원죄. 하나님은 완전자시이기 때문에 자기 중심 자기 위주라야 되지만 우리는 만물보다 거짓된 불완전한 것이, 다 유한한 것들이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이기 때문에 틀렸다 그거요.

이래서 이 피조물들이 영원히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만 살면 다 영생해서 당신 창조해 놓은 것이 다 성공이 되고 참 좋겠는데 이것들이 지금 제 중심 제 위주로 나가는, 제가 능동자가 돼 가지고 제가 주권자가 돼 가지고 날뛰는 이것이 제일 걱정이요 노여워하는 것이요 낭파입니다. 고 죄, 노여워하는 고 죄, 하나는 하나님하고 한 덩어리 되어 살아야 될 터인데 요 간교한 창기 모양으로, 창기 모양으로 말이오. 아담 하와가 창기 모양으로, 하나님하고 짝돼 가지고 살 것이 그 간부가 오니까 그만 이 뱀 이놈이 좋아서 그만 뱀하고 한 덩어리가 돼 버리고 하나님 배반했습니다. 마귀하고 한 덩어리가 되고 하나님 배반했소.

요것이 하나님의 노여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세 가지인데 하나님의 진노 세 가지를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이 노를 다 풀었습니다. 한 사람으로서 우리를 대신할라 하면 한 사람밖에 안 되는데 한 사람과 무한하신 하나님과 이 신인양성이 일위가 돼 가지고, 일위가 돼 가지고 하나님의 세 가지 큰 진노를 다 풀고 해결을 지워서 하나님의 진노를 완전히 도말해서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서 없앴는데 거게 대해서 잠깐, 여러분들이 좀 신앙생활을 깊이 할라고 하거든 '신인양성일위라? 어떻게 무한하신 하나님하고 유한한 인성하고, 예수님의 인성은 유한성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오.

제가 여수 애양원 교회 가 가지고 그때는 그런 말하면 안 돼서 속에 감추어 놓고 그저 이라다가 설마 여게서 문둥이 모인 데니까 여게는 뭐 다른 데 안 나가지 싶어서 그 말 한번 벗다가 야단 한번 내가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인성을 피조물이라 이래 놨더니만 그만 당회의 장로들이 예수님을 피조물이라 한다고 마구 이래 가지고 막 들썩거리면서 막 일어나 가지고 뭐 뿔뿔이 나가고 어짜고 이라는데 그래도 뭐 진리니까 어짭니까? 그래서, 그래 증거했지요? 증거 했더니만 거게 있는 목사가 또 이 말을 가지고 또 어디 내가 있던 방에 또 거게 수뇌 목사님한테 갔습니다. 가 가지고, 세상에 예수님의 인성을 피조물이라 한다고 이라니까 또 그래 또 이단이라고 한참 또 들썩거렸습니다.? 덜썩거리 다가서 인제 지금은 또 그거는 없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났으니까 피조물이지 뭐 창조주라 말이오. 어디? 예수님의 인성이 피조물이라는 게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저 뒤에,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저 대답을 잘 못 하는구만.

신인양성일위라. 신성은 하나님을 가리켜 말하고 인성은 사람을 가리켜 말하는데, 온전한 사람이요 온전한 하나님이신데 온전한 사람과 하나님이 어떻게 돼 가지고 한 격위와 한 직책을 맡았을까? 거게 대해서 연구하면 도성 인신이 얼마나 큰 사랑이며 얼마나 큰 회생이며 얼마나 큰 수고였던가? 뭐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은 그것은 소분 지입니다. 그 안에. 그 안에 어떤 사랑으로 어떻게 해 가지고 어떻게 해 그래 됐는가 이것을 궁구하고, 어떤 깨달은 사람들은 다 구불기도 하고 감사해서 못 견뎌서 참 죽올똥 살똥 모르고 이제 이 주님 위해서는 자기가 천만 번 죽어도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감히 주님의 이 사랑을 사모하기에도 감당 못 합니다. 어떻게 입으로 부르겠습니까? 어떻게 찬양하겠습니까? 어떻게 이 분을 위해서 수고하고 죽는다는 이런 그 영광스러운 일을 어찌 할 수 있겠습니까? 놀래기 때문에 베드로도 십자가에 못 박으니까 꺼꾸로 못 박아 달라고 간청한 그것이 전설대로 말하면 그런 아마 깨달음에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래서, 이 세 가지 노를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라 이 노를 다 도말하고 노여움을 완전히 소멸시켜 버렸으니 이것은 예수님이 대형으로 사죄를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죄의 값으로 죽는 이 죽음을 인성과 신성이 한 격위를 이루어서 양성 일위가 이 죽음의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요 한 사람이신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이 고난당하신 이 고난은 우리의 수많은 택자들을 대속하고도 무한히 남음이 있습니다. 무한히 남음이 있습니다. 암만 많아도 우리는 유한하지만 그는 무한합니다. 무한히 남음이 있습니다. 이래서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의 의 중에 하나요.

하나는, 우리를 행복되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심판에 걸리지 안 하는 데에는, 하나님 심판은 전지하신 하나님이 입법하신 그 입법을 가지고 심판하기 때문에 전지의 그 입법의 요구를 다 완전히 만족히 이행해야 하나님이 율법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래야 하나님께서 '의 롭다. 이는 모든 율법을 완전히 이행한 자다.

하는 그게 되는데 신인양성일위가 우리를 대신 행해 가지고 대행으로서 우리에게 칭의를 주신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 중에 또 하나입니다.

또, 그 다음에는 원수되고 마귀하고 한덩어리된 이 불목 원수된 것을 화목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신인양성일위가 화친의 화목의 제물이 되셔서 화목을 위하여, 당신이 화목을 위하여, 화목을 못 하도록 최후까지 마귀가 방해하고 모든 피조물들이 다 방해하고,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에 다 방해할 때에 예수님이 마지막 죽으심으로써 이 화목으로 죽었습니다. 화목의 제물로 죽었으니까 그 이상 더 할 수가 없어. 다 완성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원수 된 것을 이 화목의 제물이 되셔 가지고 신인 화합을 시켜서 우리는 신인양성일위는 안 되고 뭣 됩니까? 신인양성 뭐 돼요? 일행. 이 동거 동행. 일행까지 되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만족하신 의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의인된 것입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이 의를, 이 의의 공로를 설정했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의로 인해서 이 공로를 믿는 자들은 다 의인입니다.

이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제 의인된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하는 그 믿음으로 산다 말은 하나님만 두려워하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에게 맡겨 놓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복종하고 참아 기다리는 생활 이런 것이 다 합해서 믿음의 생활입니다.

이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는 그것이 의인 생활입니다.

믿는 게 의인 생활입니다. 믿는다 말은 신구약 성경에 하라는 것은 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는 그것이 믿는 건데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간다' 의인이 믿음 생활 해 보고 나니까, 여러분들 싫은 것을 자꾸 할 수 있습니까 좋은 것을 합니까? 뭐 어떻소? 싫은 것 자꾸 해요? 싫은 건 안 해요. 다 자기 좋은 거라야 자꾸 하지. 이러니까 믿음 생활을 한번 해 보니까 좋거든. 또 하고 또 하고 이제 의인들은 의인 자기 생활, 믿음 생활을 해 보니까 좋아서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합니다. 자꾸 하는데, 그래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의인은 믿음 생활 외에는 안 하고 의인은 믿음으로만 살게 된다 이래 말해 놨습니다.

그래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모든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렇게, 이 복음은 의인 생활 법칙인데 이 복음대로 살면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 능력이라 말은 다이나마이트가 터질 때에 쓰는 고런 말을 써서 고 다이나마이트가 터지는 고런 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저 OOO목사님 사모님, 조 가운데 앉아서 꼬박꼬박 졸고 있네. 그라면 안 돼. 저 OO목사도 탈선될지 몰라요. 그러니까 딱 바로 듣고 이래 가지고 딱 듣고 이래 가지고 뒤에 가서 설교하는 거 보다가 틀렸으면 '여보시오 이거 이렇고 이렇지 않습니까? 혹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라면 처음에는 냈던 바람에 '뭐 그래? 이게 옳지' 이래도 가만히 눈감고 생각하면 '그거 참 그렇다' 그래 혹 내가 잘못해 고친다고 선생님으로 또 한번 올려 줄지도 모르고 이러니까 언제든지 바로 잘 들어야 되지, 혼자 가면 실패해요. 그러기 때문에 이래 이 사람 인(人)자를 둘로 이래 딱 맞춰 놨어. 졸면 안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의인 생활을 하면 구원이 있는데 구원이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준비 구원이 있고 하나는 다이나마이트 구원이 있어. 뒤에 폭탄이 쾅 터지면,그때 그만 일이 나요. 다니엘이 일생 동안 그 동직자들이 말하기를 '저 다니엘은 이 국사에 대해서나 자기 개인 생활에 대해서 티를 잡고 흠을 잡고 탈 잡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고의적으로 그래 만들었지. 그렇게 흠 없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딱딱 믿음 생활을 하는 그것이 구원입니다. 고게 구원이오. 고거는 무슨 구원이냐? 준비 구원입니다.

여러분들, 한 시간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라고 했는데 한 시간을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게 구원입니까 구원 아닙니까? 그게 돈만 합니까 돈만 못 합니까? 돈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거짓말하지 말고.

예, 돈보다 그런 걸 비교 못 하지요. 그것이 준비 구원이라.

그랬는데 다이나마이트 구원은 언제 나왔습니까? 그라니까 끝까지 '너 너거 하나님께 기도하면 사자 구덩이 들어간다.' '그래도 하겠습니다.' 사자 구덩이 집 어넣었다 말이오. 집어넣었으면 마귀가 승리 또 남았습니까 마귀 승리 다 했습니까? 예? 마귀 승리 남았소 마귀 승리 다 했소? 남았어? 마귀 승리 다랬어.

인제 사자 구덩이 집어넣었는데 뭐 다 하지 안했어? 그래 놓고 막 저거끼리 술 먹고 잔치하고 야단이지. 북 장구 뚜드리고 이랬는데, 그게 부활이라. 죽었는데 그 이튿날 아침에 떡 살아나왔다 그 말이오.

그것이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하신 다이나마이트가 터져 버렸어. 이래 놓으니까 그만 온 파사 나라에 하나님 아는 지식과 섬기는 지식이, 신앙이 가뜩 차 버렸습니다. 이래 가지고 다니엘의 하나님을 훼방하면 다 사형까지 받게 돼 버렸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구원이 다 이렇다 그 말이오.

하루 하루 말씀대로 순종 순종해서 살아나가면, 참 이거 다이나마이트 터줄라고 남포 구멍 뚫을 때에 땡 땡 해 봤자 하루 종일 뚫어 봤자 요만한 구멍 한 두 개 뚫거나 그렇습니다. 깨놓은 것은 그저 돌가루 한 옴큼이나 될까. 애가 터져요.

이것이 기독자의 준비 구원이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인이 믿음으로 사는 거라.

의인이 말씀대로 꼬박 꼬박 살아 봐야 아무 회특한 일이 없어.

이런데, 때가 되면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때가 되면 무슨 때가 되는고? 이제 그것은 그 큰 보배로운 영광스러운 성공을 주면 우쭐해 가지고, 그만 즈봉 벗고 돈 닷 돈 찬 거 모양으로 그만 우쫄해서 어짤 줄을 모르고 벌로 날뛰어 가지고 실수하기 쉬울 터이니까 큰 구원 줘도 실수하지 안할 사람이 되져야 되겠고 또 둘째로는 그 큰 구원 준 것을 잘 활용을 해서 효력있게 써 가지고 자타의 구원에 유익이 돼야 되겠고, 또 하나는? 시기가 있는데, 모르드개에게 의가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모르드개의 의를 갚아 주지 안하고 가만히 숨겨 뒀다가 하만이가 모르드개를 오십 척 나무에 달아 죽이려 하는 하필 고 전날 꽝 터져 버렸다 말이오. 고 전날 꽝 터져 가지고 그 이튿날 모르드개를 오십 척 나무에 달 건데 누가 달렸습니까? 누가 달렸소? 하만이가 달렸어.

하나님이 그렇게 적절한 아주 요긴한 고런 시기를 맞출라고 주위 환경에 부지런히 지금 역사해 가지고 고 적당한 적기에 꽝 터지게 하신다 그 말이오.

이것이 조작배기 말이요 성경대로요? 가짜입니까 진짜입니까? 성경대로의 한 말이요 진짜요.

그러기 때문에, 이런 배경, 하나님의 진노 셋을 대형으로 푼 의, 하나님의 율법을 대행으로 푼 의, 또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대화목 제로서 화친을 만든 의. 이래서, 화친 만든 의, 율법 이행 의, 로마서 8장 1절 이하에 보면 육체가 약해서 못 하는 것을 하나님의 독생자를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사 우리의 대신 율법의 요구를 완성했다 이랬어. 또 대형으로 하나님 노를 푼 거, 이 세 가지 의가 이름이 무슨 의입니까? 이 세 가지 의가 무슨 의입니까? 하나님의 의. 이거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도 시시비비의 말들이 많은데 이 하나님의 의는 이렇게 뿌리깊게 이렇게 큰 문제가 해결돼 가지고 의를 이룬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존자 전지 전능자 하나님에게 제일 근심 걱정 다 해결해 줬어 또 소원하는 이 소원 성취 다 이루었어. 이러니까,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셔서 이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의라 이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의를 기뻐하십니다. 그러기에 의라도 노아 홍수 때 모든 사람이 다 죽는데 노아의 여덟 식구는 왜 안 죽었습니까? 뭐이 있어서? 의가 있어서 안 죽었어요.

이 다음에 모든 체질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그 모든 체질이 녹아지고 모든 것이 드러날 터인데 불탈 때에 무엇이 타지 안하고 삽니까? 따라합시다. 의인! 워인! 의인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배경을 가져서 이 배경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곱 영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 말이오.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하는 그렇게 쉽게 '하나님의 일곱 영' 떡 이럴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일곱 영인 그 밑잘미, 그 밑천, 그 배경, 그 근거는 이렇게 무한함입니다. 우리가 그것도 실지로 실감적으로 자꾸 느껴 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 일곱 별을 가지신 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누구입니까?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누가 가졌습니까? 일곱 별을 가졌다 했으니까 손에 볼끈 거머쥐고 있고 또 일곱 영을 뽈끈 쥐고 있고, 일곱 영이라면 하나님인데 이 하나님을 뽈끈 쥐고 있고 또 일곱 별이면 일곱 교회 사자인데 또 뽈끈 쥐고 있고, 누가 쥐었소? 누가 쥐었습니까? 누가 뽈끈 쥐었어요? 누가 뽈끈 쥐었어요? 누가 뽈끈 쥐었어요? 그만 답 못한다. 신인양성일위로 하나님의 진노 셋을 다 당신이 대형으로 다 해결짓고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이 셋을 성취한 분이 인자이기 때문에, 신인양성일위이신 인자이기 때문에 이 성령님을 거머쥐고 이리저리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이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으로 성령님은 주님을 위해서 일한다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을 내가 가서 보내리니 보혜사 성령이 오면 내 것을 가지고 너희들에게 가르치리라, 또 진리 안으로 너희들을 이끌어 들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장중에 잡으신 주님은 이 영원하고 무한한 그 뿌리있는 하나님의 의를 건설한 이 의 때문에 우리에게 이 일곱 영과 일곱 별을, 일곱 사자를, 교회의 사자들을 주님이 장중에 잡으십니다.

성령님은 이 크신 성령님을 하나님의 의를 건설한 이 공로로 인해서 예수님에게 이 성령님이 붙들려서 예수님의, 좀 이용물이라 하면 좀 우습지만 예수님의 장중에 잡혀서 예수님이 소원하시는 대로 예수님의 일만 맡아 가지고 이렇게 하도록 이렇게 됐고, 또 교회의 사자, 이 목사들 말이오. 이 목사는 주님이 성령님과 같이 교역자를 장중에 잡으십니다. 성령님은 이 장중에 잡히셨으니 큰 분이 잡히셨고 우리는 천하 아무것도 아닌 것이 이 성령님과 같이 잡혔으니까 동등은 아닌데 동등 대우를 받소. 안 그렇습니까? 주님의 장중에 잡힌 것이 우리 목회자들인 것입니다. 잡힌 거.

그러면 우리를, 이 하나님이 천상 천하에 제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건설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좋았던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네게 준다 이랬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장에 17절 이하에 보면 있습니다.

이렇게, 어떻게 하나님이, 창조주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을 장중에 잡으셨을까? 장중에 잡힌 것이 이것이 영광 없고 천한 일인가? 하나님인 성령님과 같이 천상 천하에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시는 주님의 장중에 잡히셨으니까 우리가 성령님과 같이 하나님의 장중에 잡히신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속하신 그 공로 때문에 하나님 이 우리를 붙들고 일하시지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붙들고 일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장중에 붙들려 가지고 쓰여진다는 이것이 얼마나 존영하다는 이것을 자꾸 깊이깊이 연구하고 생각하면 뭐이 나옵니까? '주여 나 같은 이것을 의인 만들어 가자고 이제 의인 생활하고 의인 구출하는 이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에 나로 하여금 이바지하게 해 주셨으니 참 천만 번 죽어도' 이것 가지고 만족하다 할 수 없고 마지막에는 '주여 천만 번 주의 복음 위해서 죽어도' 나는 뭐입니까?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는 그 결론이 나오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이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졌다 이 말은 여게는 하나님의 세 가지 노를 풀고 세 가지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성취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 가지고 성령님하고 하나님의 사자하고 둘을 한테다 묶어 가지고 붙들어 가지고 이 둘을 짝짜꿍이를 딱 만들어 가지고 성령님과 이제 하나님의 사자들을 둘을 딱 한 뭉텅이 만들어 가지고서 병행을 해서 이 일을 하도록 만드신 것이 여게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라면, 권세 있어요 없어요? 그라면 모든 세계의 박사들 서적을 봐야 되겠소 자꾸 예수님의 피를 양식 삼아서 자꾸 궁구하고 이래야 되겠소 자기 자랑하기 위해서 이 모든 광문 다학이나 하고 이래야 되겠소 뭘 먹어야 되겠소?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있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가지신 이가 가라사대'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과 힘은 자꾸 이렇게 성경대로 생각하고, 생각하고 연구하고 양심을 쓰고 쓰고 공정하게 판단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생각을 하면 막 속에서 불이 나옵니다. 속에서 불이 나와. 이 불이라야 일을 추지. 이 담력이라야 일을 추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여게 행위를 아노니 이랬으니까 여기 사데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신 이 교훈이 기본구원에 관한 말씀입니까 행위구원에 관한 말씀입니까? 행위구원에 관한 말씀이라. 이렇게 자꾸 구별해서, 자꾸 구별하고 구별해서 자꾸 구별해요. 구별해서 자꾸 이래 분석해서 분리하고 이래 분석해 나가며 알게 됩니다.

이런데, 이 세상은 말이오. 마귀란 놈은 뚤뚤 뭉치기를 좋아하고 어찌 됐든 간에 기르면 싫답니다. 나누면 싫대요. '또 구원이면 구원이지 뭐 기본구원 건설구원이니 뭐 그럴 게 뭐 있는가? 예수님의 피면 피지 피에 대해서 뭐 이런 저런 뭐 이렇고 저렇고 뭐 근거가 어떻고 하는 거 그렇게 할 게 뭐 있는가?' 나누면 그만 싫어해.

이래 가지고, 이제 점점 주님의 재림이 오면 무슨 운동이 힘을 쓴다고 해 놨습니까? 예? 하나되는 운동, 하나되는 운동. 하나되는 운동이 힘씁니다. 하나가 돼 가지고, 모든 힘은 다 하나가 돼 가지고 누구하고, 싸워요? 어런 양으로 더불어 싸워요, 요거 알아야 돼요.

뭐 짐승의 머리는 일곱이요 뿔은 열인데 그게 내나 한 짐승이라. 한 짐승인데 위에 겉으머리 나타나기는 이렇지만 저거까리 연극이라. 저거야 모르지. 이런 주의 저런 주의 가지고 이래 다투니까 저거는 각각 다른 줄로 알고 알지 못하지만 성경을 본 사람들은 다 알아. 그놈이나 그놈이나 내나 세상이다. 내나 짐승이다. 내나 하나이다 하나이면서 '우리는 하나 아니다. 우리는 따로 다르다.' 이라는 바람에 그만 거기 넘어가기 쉬워. 하나라. 한 짐승에게 일곱 머리 열 뿔이 있었어. 그거 열 뿔이 다 한덩어러 돼 가지고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워요.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우는데 누가 이긴다 했습니까? 어린 양이 이기고, 또? 네, '진실한 자는 이기리로다'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입고 해도 진실 없으면 못 이깁니다. 진실 없으면 못 이기요. 진실 없으면.

진실을 몇 가지로 배웠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봐요. 이거 모른다 그만 또.

진실을 몇 가지로 배웠어요? 저 가운데 저기는 깜깜하네. 저 어느 교회서 왔어? 떠들기만 떠들고 하는 그런 교회인가배. 쿵창쿵창하면 안 돼. 자꾸 생각해야 되지.

세미한 음성은 생각해야 돼요. 몇 가지 진실? 네, 세 가지 진실. 성경 말씀대로의 지식을 가진 것이 지식 진실이요 또 성경 말씀대로의 행위를 가진 것이 행위 진실이요 또 하나는 뭐입니까? 성경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면 사람 진실 이 세 가지 진실만 되면 이깁니다. 알겠습니까? 이 세 가지 진실은 믿음으로 만들어요. 믿음으로. 믿음으로 만드는데 가을에 만들어야 됩니까 봄에 만들어야 됩니까 밤에 만들어야 됩니까 낮에 만들어야 됩니까 오후에 만들어야 됩니까 언제 만듭니까? 네, 자기 현실에서 만들어야 돼요. 현실에서 만들지 다른 데서는 못 만 듭니다.

이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요 이름에 대한 뜻을 우리가 잘 알아야 됩니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너는 살았다 하는 그런 껍데기 발린 게 아닙니다. '살았다 이름은 가졌으나' 산 자라 그 말입니다. 산 자라.

로마서 6장 11절 하반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너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산 자로 알아라, 산 자인 것을 알아라 그렇게 말씀했소. 여게 살았다 하는 이름이라 말은 산 자라 말이오? 살았다 하는 이름' 너는 산 자라. 산 자라 하는 이 산 자가 되기는 됐는데, 산 자가 되기는 됐는데 죽은 자로다.

'살았다는 이름' 산 자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써 산 자입니다. 하나님의 의로 인해서 의인이요 또 산 자입니다. 의인이요 산 자입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말이오. 예수님 당신 앞에서는 '나는 죄인입니다.' 이렇지만 실은 의인이라. 이러니까 '주여 나는 죄인 왔습니다. 죄인 왔습니다. 또 '주여 나는 의인 왔습니다.' 주님이 뭐 기뻐하지요? 주님 앞에 갈 때에 바울이 그랬어. 디모데전서에 보면 '나를 이렇고 이렇게 이렇게 이런 자로 이렇게 등용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 놓고, 의인된 것부터 실컷 자랑해 놓고 난 다음에 '나는 과거에 이렇던 자입니다.' 그랬다 말이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시요.

'주여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의인입니다. 의인 생활이 내 생활이지. 의인 법칙이 내 법칙이지. 나는 의인입니다. 나는 의인 생활이 내 생활입니다. 나는 의인 사는 생활 내가 합니다.' 이라면서 그 다음에 덧 붙여서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던 죄인인데 나를 이렇게 하나님이 설정하신 이 공로를 입혀서 의인되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이 의를 만드는 데에, 이 의를 만드는 데에 없어질 금이나 은이나 그런 거 가지고 의인 만들지 안하고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만들었다 이랬는데 그것도 속을 알고 말하는지 껍데기 어린 양'의 피로 가지고 했다 하는 그거 그런지 이거 깊이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신인양성일위 돼 가지고, 계약 하나만 어겨도 인간들이 다 죽는 이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이런데 인간들이 원죄와 본죄의 이 수많은 고통을 다 당해서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아무리 알아도 다 몰라요. 그래 가지고 후란시스는 '주님의 죽으심을 좀 나도 맛보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맛보게 해 주옵소서' 이래 가지고 나무에 달려 가지고, 나무에 꺼꾸로 달려 가지고 '맛보게 해 주읍소서' 이라고 나서 그만 거기서 주님의 고난을 인해서 그 감사하고 울면서 이래 하고 내려왔는데. 보니까 손에 구멍이 떨뻑 뚫렸어. 여게도 구멍이 뚫혔고 여게도 구멍이 뚫히고 다리도 구멍이 뚫히고 다 뚫혔어. 그래 가지고 후란시스의 그 몸에는 예수님이 못 박히신 그 흔적이 자기 몸에 그때 앓고, 고통을 당하고 앓았고 그 다음에 나은 흉터가 있다. 나는 그 사람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그런, 책에 기록돼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는 이렇게 해서 흘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찬송을 하는 데에는 그 감사가 마구 솟아나야 되고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예수님이 고난 당하신 것을 보면서 내가 죄에 대해서 분해서 '이제는 내가 죄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나는, 내가 목숨 뭐 몇 번 죽어도 내가 죄 이놈은, 죄 이놈은, 죄 이놈은' 막 죄 이놈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이렇게, 무슨 죄? 몇 가지 죄? 세 가지 죄.

세 가지 죄에 대해서 마음에 분해서 '이제는 내가 어림도 없습니다.' 이 분한 마음이, 감사한 마음과 분한 마음과 '어서 어서 죄 이놈을 한번 닥쳐 봤으면 좋겠다. 이놈 닥치면 이놈을 참 구워 먹든지 뭐 볶아 먹든지 이놈을 어떻게 해야 되겠다 하는 그 속에 용솟음의 불이 일어나야 돼요. 예수님의 피 찬송에는. 그만 이것도 없이 뭐 지딱지딱 참 피 찬송 하니까 기쁘고 즐겁다 하는 것은 이거 참 좀 그만 잘못하면 껍데기로 흘러나가기 쉽다 그거요.

'살았다 하는 이름 가졌으나' 우리는 이 '살았다'하는 말뿐이 아니라. '너는 살았다' 우리 영은 아주 살았고, 우리 영은 아주 살아서 영원히 변동 못 하는 영으로서 완전히 살았고 우리의 심신의 육은 살았습니다. '너는 산 자라' 산 자면 얼마나 살았습니까? 하나님의 공심판을 다 완전자로 통과됐었습니다. 우리의 심신은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한 산 자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 심신 구원, 이 심신 구원 육의 구원도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심판 공심판을 '통과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심판은, 우리의 이 심신은 다시 정죄 못 합니다. 영도 정죄 못 하고 심신도 정죄를 못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무죄하다. 의롭다. 하나님하고 하나됐다.' 하는 이 세 가지 의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찬성받고 이는 완전자라 하고 이렇게 인정을 하셨는데,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살았다 하는 이름은' 이름이라 말은 산 자라 하는 그 명목을 가졌다 말이오. 하나님의 공심판을 이는 다 통과한 자로 그렇게, 통과한 자 '이는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자라'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완전이라고 다 인정받은 자라 하는 그 이름을 가진 것입니다. 그 이름을.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의인인 것을 깨닫고 이렇게 이 심신의 영육도 하나님 공심판 통과 완전 생명을 얻어서 완전자가 되어진 것입니다. 완전자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죽은 자로다' 이런데, 이는 하나님위 공심판 통과라 이러니까 우리 심신은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형사를 못 보내요.

하나님 공심판에 우리에게 수사를 못 해요. 하나님 공심판에서 천사들을 보내서 '그거 좀 심사 좀 해 가지고 오너라' 심사 못 해요. 우리는 완전자로 통과됐기 때문에 우리 심신도 상관 못 해요. 왜? 예수님이 대신했기 때문에 완전으로서 퉁과됐습니다. 통과됐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도 책을 잡을 수 없는 이런 참 완전한 영육의 이 구원을 얻은 자인데 영은 다시 변동하지 않고 구원 얻었고 우리 이 심신은 구원을 얻은 자이나 이것은 법적으로 구원을 얻었고 대속으로 구원을 얻었고 이러나 실상으로서는 우리가 지금 이 믿어야 구원 얻는데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른다 그 말이오.

인제 이 대속으로 구원은 얻었지만 믿나 안 믿나, 이 대속을 믿나 안 믿나 하는 이 심사를 하는 때가옵니다. 심사를 해요. 그 심사를 하는데 그 심사를 해 가지고 네가 얼마나 믿었으며 얼마나 안 믿었으며 하는 그것을 심사하는 그 심판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심사하는 심판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심판의 이름이 무슨 심판입니까?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은 네가 하나님의 대속 구원 법적 구원 이 구원을 받았는데 네가 이 구원을 잘 보존했나 안 했나 하는 것을 이제 그 시험하는 것이 우리 현실입니다. 우리 현실은 다 그것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시험하는데 '너는 죽은 자로다' 그 말은 이 대형, 대행, 대화친으로써 대속을 입어서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해 놨는데 통과한 자가 이 대속을, '너는 죽은 자로다' 하니까 이 영에게 대해서 하는 말입니까 육에 대해서 한 말입니까? 육에 대해서 한 말입니까 영에 대해서 한 말입니까 똑똑히 구별해요.

육에 대해서 한 말이라는 걸 뭘 보고 알아, 그라면? 예? '네 행위' 말했거든.

'행위'말했기 때문에 행위구원은 육의 구원이지 영의 구원은 다시 중복 없는 완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 행위니까 육에 대해서 한 말이라 그 말이오.

이랬는데 네가, 예수님의 대속의 이 구원은 하나님의 공심판 통과한 완전 구원인데 네가 이 구원을 벗고 있다. '죽은 자로다'이 구원을 벗고 있다. 예수님의 대속의 구원을 벗고 있다. 대속의 구원을 벗고 입은 증거가 뭐입니까? 대속의 구원을 입고 벗은 증거가 뭐입니까? 입고 벗은 증거는 대속의 구원이 제것 됐으면 저는 누구 것 됩니까? 대속의 구원을 내것 삼았으면 나는 당신의 것 됩니다. 내가 내것이요 당신의 것이 아닌 이것은 대속도 내것 내것도 내것 그라면 도둑놈 아니오? 예? 도둑놈 아닙니까? 상점에 가서 상점 물건을 가져오면 내게 있는 돈을 내줘야 되지 돈도 내것 물건도 내것 가져갑니다. 내가 가지고 가면서 '여보, 여보 왜 그라요 왜 남의 물건을 가져가요?' 이라면 '이거 내것 아니오?' '내 거라니 어째 내거라 말이오? 돈 냈소?' 돈 안 냈으면 도둑놈이라. 당장 잡혀가든지 한뺨 맞든지 그런 거라. 떡 가져오면서. 가져가니까 '왜 가져가요?' '내 물건 내가 가져가는데 자기가 무슨 상관이야?' '이게 당신 물건이오? 우리 상점 물건이지.' '돈 안 받았어? 돈 안 줘? 돈 내가 주지 안했어? 돈 안 받았어?' 그만 푹 주그러지며, '아이구 미안합니다.

예, 가져가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이 대속을 벗지 안하고 입고 있는 자는 어떤 자냐? 이제 주님의 대속을 인해서 나는 주님의 것이 됐습니다. 주님의 것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것으로 사는 자.

이제는 내맘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종입니다. 이제는 성경에 말하기를 당신이 당신의 집으로 써먹는답니다. 당신의 성전으로 써먹는답니다. 또 당신의 지체로 사용한답니다. 내맘대로 못 해요. 그분의 자체요. 그분의 몸이오. 그분의 제사장이요 그분의 선지자요 그분의 왕이오.

그분만 딱 보고 짝이 돼 가지고, 그분의 짝이 돼 가지고 세상 꼼짝도 보지도 못하게 해요. 그분만 보고 그분만 보고 좋아해야 되고 그분만 보고 따라야 되고 그분만 상대해야 되고 그분만 의논해야 되고 그분만 소망해야 되고 그분만 믿어야 되고 그분에게 맡겨야 되고 그분만 의지해야 되고 그분만 좋아해야 되고 그분에만 순종해야 되고, 우리 주님 욕심 많습니다. 꼼짝도 못하게 해요.

세상에서 잘난 사람들에게 시집간 사람들, 그 사람들, 요새는 뭐 그렇지도 안해요. 잘난 사람들에게 시집간 사람들 남편이 잘나 놓으니까 그 부인을 저만 보라 하지 뭐 꼼짝도, 산기도도 못 가게 하지 새벽 기도도 못 가게 하지 꼼짝도 못 하는데 거게 매인 데는 가치가 없지만 완전자 이 주님에게 매여 가지고 그와같이 되는 거는 참 행복입니다.

이래서 내가 당신 것 된 것은 당신의 대속은 내것 된 것이오. 당신의 죽음은 내가 죽은 것이요 남아 있는 건 당신의 것이요 이것 믿는 것이 이제 산 자입니다.

이런데 '죽은 자로다' 네가 이거 다 벗고 너는 내나 옛사람, 너는 네대로 있으니까 내 대속은 내 대속대로 있고 너와는 상관이 없다 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너는 깨닫고 다시 일어서서 '너는 일깨워' 너는 다시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새로 이제는 새로운 걸음에 출발해라. '일깨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해라' 남은바 죽게 되다니? 남은 바는 뭐입니까? '남은바 죽게 된 것' 다 죽어 버리고 남은 거 좀 남았습니다. 다 죽고 남은 거 쪼그매 남았는데 남은 거 그거나 죽지 않도록 네가 굳게 해라.

죽은 거는 언제 다 죽었습니까? 네? 죽은 거는 언제 다 죽었소 무슨 전쟁에서 죽었소? 어디서 죽었습니까? 다 죽고 조그매만 남아 있다 하는데. 어디서 죽었습니까? 죽은 장소가 어디요? 현실에서 죽었어, 현실에 다 죽었어. 어리석게, 가져가지 못할 돈 지위 명예 이런 것 때문에 현실에서, 요것이 예수님의 대속을 제것 삼고 요것은 예수님의 것으로 예수님의 뜻대로 쓰도록 예수님의 지체로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의 소유로, 예수님의 종으로, 예수님의 제사장으로 예수님의 선지자로 예수님의 왕으로 예수님의 것으로 살면, 예수님의 것으로 살면 죽습니까 삽니까? 영생입니다. 내것으로 살면 죽습니까 삽니까? 그라면 현실에 돈하고 영원한 제 손의 기능, 영원한 제 마음의 기능, 이 기능이 이게 보배 아닙니까? 이 보배인데 이 기능을 돈 받고 팔아먹고, 이 기능을 권세 받고 팔아먹고, 이 기능을 직장받고 팔아먹고, 이 기능을 행락 받고 팔아먹고, 이 기능을 유흥 받고 팔아먹고, 흥미 받고 팔아먹고, 재미 받고 팔아먹고 이 기능을 전부 다 이리저리 다 팔아먹고. 무슨 시장에서 팔았습니까? 현실이라는 시장에서 팔았습니다.

이라면 '현실' 하는 게 아니라 이 자꾸 따라 나오면 '현실!' '요놈을 내가 이제는 현실 시장에서 내가 절대 안 판다! 죽어도 안 판다!' 이게 있어야 돼. '절대 안 판다. 죽어도 안 판다.' 부귀 영화 지위, 권세 그게 무슨 가치 있다고 자기 팔을 팔고 다리를 팔고 눈을 빼 팔고 귀를 빼 팔고 혀를 빼 팔고 자꾸 이래 팔아 가지고 있기는 있지만 무능이라. 이렇게 주님의 것으로 현실을 살아 통과하면 현실에 이제 이 사는 것이 어째 가지고 삽니까? 이미 산 것이 안 죽으면 돼요. 이미 산 것이 안 죽으면 돼요.

안 죽으면 되는데, 이미 산 것이 안 죽으면 되는데 안 죽는 비결이 뭐입니까? 이미 산 것이,산 자의 생활 법칙이 뭐이지요? 신구약 성경 말씀. 이미 대속으로 산 것이 산 자로 살면 돼. 산 자로 살다니? 성경 말씀대로 살면 돼. 성경 말씀대로 성경에 하지 말라는 것 안 하고 하라는 것 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면 돼요.

이러면, 자기가 현실에 말씀대로 살았으면 자기 기능이 뭐하고 한 덩어리됐지요?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현실에서, 현실에서 자기에게 대한 진리 영감 예수님의 대속 이 셋과 다시는 미혹이 없는 완전 결성하는 결성식. 이 현실은 다 결성식입니다. 이 셋과 연결이 돼서 하나가 딱 됐으니까 여기 죽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이는 완전입니다.

이런데 이것을 돈 받고 팔아먹고 지위 받고 팔아먹고. 이거 팔아 가지고, 이거 팔아 가지고 뭐 해서 이거 팔아 가지고 떡 이래 가지고 뭐 날뛰는 거 보면 속으로 말하기를 '야, 이 사람아, 너 팔아 가지고 썩어질 거 그런 거 사 놓고 네가 뭐 잘났다고 부끄러운 줄 모르고 비참한 줄 모르고 날뛰느냐? 죽을 때라야 비참한 거 알겠나?' 그 사람 보면 가련하니까 위해서 기도해야 돼요. 부러워해야 돼요? 부러워할 사람 손들어 봐요. 불쌍하고 가련하니까 위해서 기도할 사람 손들어 봐요. 예. 기도해야 돼요, 기도해야.

'죽게 된 것을' 그러니까, 이제까지 산 때는 다 현실에서 제것으로 살았으니까 다 죽었는데 지금부터 남은 거라도, '죽게 된바 남은 것을 굳게 해서 살리라' 남은 것은 언제까지 것이 남은 것입니까? 앞으로 세상에서 살 동안에 있는 것은 아직까지 죽지 안했어. 남아 있는데 그걸 인제 굳게 해서 살릴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는데 그 죽이는 것은 현실에서 옛사람으로 살면 죽이는 것이고 새사람으로 살면, 의인으로 살면 인제 영원히 산 결성을 했다 이는 완전히 살아 버렸어. 완전히 살려 버렸어. 완전히 살려 버렸다 말이오.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면 '너는 죽었다 이랬는데 그라면 뭐 행위가 어째야 안 죽는다 말입니까? 이거 행위 구원인데. 행위가 어떻게 해야 안 죽는다 말이오? 행위가 어째야 안 죽어? 저 O선생. 행위가 어째야 안 죽어? 온전해? 안 죽어. 단단히 해. '요이 땡' 해 가지고 힘을 써. 그래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보지 못했다' '온전한 행위를 보지 못했다' 온전치 못한 것은 다 죽습니다. 온전한 행위만이 행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온전한 행위는 뭐이 온전한 행위요? 온전한 행위 하기가 힘 듭니까? 아니오.

온전한 행위는 이 현실에서 하나님이 하라는 거 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안 하면 온전이 조그매 만들어졌고 또 그 다음 현실 그 다음 현실 그 다음 현실에 자꾸 하라는 거 하고 하지 말라는 거 안 하고 요라면 온전 행위가 되져요. 그러면 온전 행위는 한목 여러 군데 해야 됩니까 현실에서만 해야 됩니까? 현실에서만 하면 되져요, 현실에서만 하면.

우리는 구원의 표준을 아무나따나 예배당에만 설설 돌아다니면 되고 그저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가지면 되는 줄로 아는 이것이 큰 병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영생을 얻을라면, 영생은 중생된 영이 영생 얻는 걸 말합니까 우리의 심신의 기능이 영생 얻는 걸 말합니까?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없다' 하는 그 영생 그것은 얻었다가 말았다가서 하는 그 영생이니까 심신 기능 영생을 가리켜 말합니다. 영 영생을 가리켜 말한 거 아닙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라면 뭘 다해야 돼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이거 다해서 남은 거 없어. 다해야 돼.

이러니까, 우리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는 전심 전력을 다 기울여야 된다는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 준 표준인데 이 가짜 인간들이 전부 만들어서 '예배당에만 다니면 된다 어짜면 된다' 이래 가지고 아주 건설구원을 이루는 그 정도를 팍 끌어내려 가지고 아주 근방에 가지도 안한 거 가지고 이만하면 합격, 합격 막, 자, 그 합격이, 인간이 됐다 됐다 하는 그 합격이 하나님의 그리스도 심판 합격입니까 가짜 합격입니까? 가짜 합격 그까짓 거 받아 봐야 소용없어.

가짜 합격 이제까지 받은 사람 손들어 봐요. 안 받은 사람 손들어 봐요.

거짓말쟁이. 가짜 합격으로 만날 위로받고 안심하고 자꾸 좋아하고 뭐 기뻐하고 해 놓고. 다 회개해야 돼요. 가짜 합격. 그거 가짜 합격이라. 천인 만인이 말해도 안 돼요.

나는 이적을 행했는데, 나는 귀신을 쫓아냈는데, 능한 일을 했는데, 설교를 많이 했는데, 선지자노릇을 많이 했는데, 뭐라고 했습니까? 불법을 행한 자야 네가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게 말해서 가르쳤지만 너는 불법을 행한 자야 너는 성경 말씀대로 안하지 안했느냐? 불법을 행한 자야 내게서 물러가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구원 얻는 게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뭐라 했습니까? 말하는 자라야? 아는 자? 행하는 자. 요거 알아야 됩니다. 요거면 되지만 이거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만하고 전부 교파가 나뉘고 이 가증스러운 것들이 막 생겨져 가지고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다 불살라서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고 알곡과 쭉정이를 다 나누는 것처럼 그렇게 이제 하십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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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6 온전한 행위/ 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850622토새 선지자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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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4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7절-12절/ 1976년 38공과 선지자 2015.12.12
3533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7절-12 절/ 890125수야 선지자 2015.12.12
3532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8절-12절/ 870419주전 선지자 2015.12.12
3531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9절-12절/ 870419주후 선지자 2015.12.12
3530 온전한 십일조/ 고린도후서 9장 10절/ 810201주후 선지자 2015.12.12
3529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7절-12절/ 810201주전 선지자 2015.12.12
3528 온전한 신앙 생활/ 요한복음 6장 8절-13절/ 850614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2
3527 온전한 사랑/ 요한일서 4장 16절-21절/ 820416금새 선지자 2015.12.12
3526 온전한 사람 온전한 실력/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870112월새 선지자 2015.12.12
3525 온전한 믿음 / 야고보서 2장 14절-26절/ 860715화새 선지자 2015.12.12
3524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 말라기 3장 7절-12절/ 841021주전 선지자 2015.12.12
3523 온전하고 구비한 사람/ 야고보서 1장 2절-4절/ 870121수새 선지자 2015.12.12
3522 온전을 향하여 믿음으로 달음질하기/ 히브리서 12장 1절-2절/ 880708금야 선지자 2015.12.12
3521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사도행전 20장 20절-32절/ 88040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2
3520 옥토에 뿌린 씨-말씀만 사모/ 마태복음 13장 1절-9절/ 830923금새 선지자 2015.12.12
3519 옥토밭과 백 배/ 마태복음 13장 3절-9절/ 880406수야 선지자 2015.12.12
3518 옥토,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 누가복음 17장 5절-6절/ 830330수새 선지자 2015.12.12
3517 옥토, 말씀에 대한 바른 깨달음/ 누가복음 21장 34절-36절/ 830501주후 선지자 2015.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