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한 믿음

 

1986. 7. 15. 화새벽

 

본문:야고보서 2장 14절∼26절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우리가 믿는 것은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믿고 두 종류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는 것은 성경에 기록한 그대로 알고 인정하는 것이 믿는 것이요, 이것이 마음으로 믿는 것이요, 또 알고 인정한 대로 행하는 것이 몸으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순종입니다. 순종. 그러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은 이러한 하나님이라, 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셨고 또 하신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 무엇의 그 은혜를, 축복을, 기적을 계약하셨다 하는 이런 것을 자기가 아는 것이 그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이렇다’ 해도 `뭐 아니다’ 이라면 믿음 아니오. 하나님이 ‘이렇다. 이렇다.' 할 때에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 말씀하신다.’ 이것을 부인하지 안하고 자기가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요, 받아 들인 그 지식을, 그만 받아들이기는 받아들였지마는 받아들인 지식을 그것을 거짓되다 해 버렸으면 믿음을 버린 사람입니다. 받아들인 뒤에 ‘이것은 틀림 없다. 이거는 참이다. 참되다.’ 인정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선포해 놓은 그 지식을 자기가 받아들여서 인정할 때에 그때에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됩니다.

또, 아무리 마음으로 그대로 알고 그대로 참되다 인정을 해도 자기가 실행하여야 할 그때를 당했을 때에 실행하지 안하면 그거는 마음으로는 믿었지마는 몸으로는 믿지 안했기 때문에 헛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요 때라 하는 요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암만 하나님의 말씀하신 그 지식을 알아도 자기가 아는 그것도 마음의 믿음의 시발인데 인정할 때에 마음의 순종이 된 것입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따라서 그대로 순종한 것이 됩니다. 인정할 때에.

또 그러면 그것이 믿음은 믿음입니다마는 온전한 믿음은 아닙니다. 인정은 했는데 그대로 행해야 될 그런 기회가 오기 전에는 그것이 믿음이 돼 가지고 있다가 그대로 지켜 행해야 될 그때가 올 때에 그때에 행하지 안하면 그 사람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실상 없는 그런 믿음 가졌기 때문에 실효를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다가 행할 수 있는 그 현실을 만날 그때에 자기가 행하면 몸까지 순종했기 때문에 그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온전한 믿음.

그런고로,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단계가 바로 아는 것, 그라고 난 다음에 알기는 바로 알아도 인정치 안하면 그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로 알고, 그다음에는 ‘참되다. 이는 틀림 없다. 이대로다.’ 그렇게 확실히 인정을 해야 그 마음의 순종의 믿음이 됩니다.

그래도 사람은 마음과 몸 이 둘을 가진 것이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마음으로는 믿었습니다. 그러나 행할 때에 그때에 행하지 안하면 몸은 순종하지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음으로는 믿었지마는 몸은 믿지 안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온전한 믿음이 아니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여게 22절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믿음이” 하는 요 믿음은 무슨 믿음인고 하니 알고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알고 인정하는 믿음.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이제 행할 때에는 행동이 먼저가 아니고 알고 인정함으로 행하게 되기 때문에 알고 인정하는 그 믿음이 행함과 함께 일한다. 알고 인정하는 그것 때문에 행하게 된다 그말입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그라면 마음 믿음 몸 믿음 두 가지 믿음이 다 된 셈입니다.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제 온전한 믿음은 마음으로 믿고 몸으로 믿고, 마음으로 순종하고 몸으로 순종하고 하는 이 두 가지 순종이 합해야 온전한 믿음이 되지 그렇지 안하면 온전한 믿음이 안 됩니다. 온전한 믿음이라야 그 믿음의 효력이 오지 온전한 믿음이 아니면 믿음의 효력이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결과를 보아서 원인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무를 모르거든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 그 말은 결과로서 그 원인을 알 수 있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믿는 것은 원인인데 몸으로 행하는 것은 결과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으로는 믿는 줄로 이래 아는데 믿지 안하면서 믿는 줄로 아는 이런 거짓부리의 믿음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말씀해 놓은 것은 다 참되다. 나는 이를 틀림 없는 참된 것을 내가 인정한다. 참됨으로 인정한다. 성경에 하나님은 자존자라 하셨는데 자존자인 것을 나는 확실히 인정하다. 전지 전능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도 확실히 인정한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택한 자를 위해서 전부를 기울여 주시는 은혜의 하나님인 것도 나는 확실히 인정한다.’ 그 인정한다 하는데 그게 마음의 믿음인데, 그 믿음이 참 믿음인지 제가 속고서 믿음은 없는데 믿는 줄로 아는 속아서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 있는 줄로 믿지 않는데 믿는 줄로 이렇게 알기 쉽다 그거요. 알기 쉬워.

그러면, 자기가 마음으로 그 믿는 믿음이 그게 원인인데,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 실상인지 거짓부리인지 그것을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꾸 따져가서 실상 믿음을 가져야 되지 실상이 아닌 거짓부리 믿음을 가지면 마음만 좋지 실상을 닥칠 때에는 다 헛일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네 마음의 믿음이 참 있는지 없는지 보자 하는 그 시험하는 실상을 닥치면 뚝 떨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세상에서는 시험하는데 떨어지지마는 그 믿음 가지고 만일 시험을 치르지 안했으니까 떨어졌다는 표가 없지마는 영원 무궁세계에 하나님의 심판 너머에서 판정받아 가지고 무궁한 하늘나라의 것을 다 그대로 보응받는, 그대로 보상받는 그럴 때에 가면 하나님이 시험 안 했었기 때문에 모르느냐? 안 했던지 했던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전지자시니까 모르시겠습니까? 이러니까 자기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가 보니까 실상 없는 믿음이라, 하나님의 심판에서 다 낙제가 돼 버리고 무궁세계에 보상을 받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 나라에 가 가지고 가난한 사람으로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자기가 ‘내가 마음으로 참으로 믿나 안 믿나?’ 하는 그것을 따져 볼 때에는 그저, 만물보다 거짓된 것이 뭐이라 했습니까? 사람의 마음이라 이래. 아주 거짓돼요. 이 거짓된 마음에게 속기 쉽다 말이오.

그래서 자기는 마음으로 믿는 줄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마음으로 확실히 믿는지 안 믿는지 공연히 내가 내 마음에게 속아서 마음으로 믿지 안하면서 믿는 줄로 이래 알고 있는 이 속는 실상 없는 거짓부리 믿음으로 내 마음에게 내가 속아 가지고서 이렇게 믿음 있는 줄로 이래 알고 있다가 하나님의 심판에 가면은 믿음 없는 걸로 확실히 드러나니까 그때 가서야 준비도 할 수도 없고 회개할 수도 없는데 그만 무궁세계는 믿음 없는 사람의 취급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거 기가 막히는 일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네가 네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 실상인지 실상 아닌지, 참 알곡의 믿음인지 거짓부리 쭉정이 믿음인지 네가 시험해 봐라. 그러면 그것을 시험하는 데는 뭘로 가지고 시험할 수가 있습니까? 그걸 시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시험해 보도록 현실을 주실 때에 현실에서 행해야 할 그 현실을 당했을 때에 행하기 싫어 안 하든지 두려워, 환경을 두려워서 행하지 안하든지, 행할 용기가 안 나서 안 하든지, 어려움을 겪으면서라도 행해야 되는 그런 참 가치성을 몰라서 행하지 안하든지 어쨌든지 행하지 안했으면 그것은 ‘내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은 거짓부리다.’ 왜? 결과가 맺지 안하는 것 보니까, 결과가 없는 것 보니까 아니라 그거요.

만일 사과나무라면 사과를 틀림없이 맺는 것인데 나는 사과나무인 줄 알고 잘 가꿨는데 나중에 보니까 배가 열립니다. 그러면 그 사과나무 아니라는 증거라 그말이오. 나는 믿는 줄 알았는데 현실을 당할 때 보니까 그대로 행하지 안하고 하나님 말씀에 정반대되는 그런 행동을 했기 때문에 나는 마음의 행함이 그게 있다는 말이 거짓부리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를 살펴서 자기의 마음으로 믿는 그 믿음이 실상이냐 실상 아니냐 하는 그것은 행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닥쳤을 때에 행해지지 안하면 그것은 자기 믿음이 거짓부리라 하는 것을 그때사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시험 준비를 할 때에, 집에서 가정 교사를 데리고 공부를 합니다. 공부를 하는데 앞으로 실상의 시험은 학교 가서 치르지마는 가정에서 선생이 그 준비하는 예비 시험을 치른다 그거요. 치르는데 예비 시험을 치러 보면은, 그대로 맞아서 합격이 됐거든.

합격이 됐으니까 안심이 되지마는 아무도 예비 시험을 치러 주지 안하니까 그 사람이 자기는 다 아는 줄 알았는데 다 아는지 안 아는지 그것을 모르겠다 말이오. 그러니까 공부하는 그 학생이 예비 시험을 치러 주는 그런 선생님이 계셔서 예비 시험을 치러 주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 예비 시험을 치러 주지 않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예비 시험을 있는 것을 좋아하요 없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어떤 걸 좋아하겠습니까? 예비 시험이 있는 것을 좋아할 것이요 없으면 돈을 들여서 밥을 먹이고 월급을 줘 가지고 선생님을 가정 교사를 모셔서 예비 시험을 자꾸 치르도록 이래 가지고서 예비 시험에 통과됐으면 실상 시험에 통과될 희망성이 있고 예비 시험에 통과가 돼도 실상 시험에 혹 떨어질 수가 있다 말이오. 그러면 예비 시험보다 실상 시험은 더 어렵다 그거요.

이러니까 실상 시험에 합격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비 시험을 치를 때에 싫어하지 안하고 괴로워하지 안하고 자꾸 여게서 돼져야 이제 실상 시험에 합격할 수가 있다 해서 예비 시험을 자꾸 원할 거라 그거요.

그러면 우리는 예비 시험이 어떤 게 예비 시험인가?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말씀해 주신 이 사실을 그대로 내가 알고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이것은 내가 그 행함으로 인정하고 안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가정 교사를 데린 거와 마찬가지로 그 현실을 돈을 들여서, 현실 만드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그 현실이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보다 그 현실을 만드는 것은 더 힘든다 그거요. 그 가정 교사를 밥 먹이고 돈 주고 이래 가지고서 가르치게 하는 것, 이것 부모는 저가 공부하는, 공부하는 그것도 힘이 들지마는 그보다 부모가 가정 교사 데려 가지고서 많은 돈을 들여서 공부를 시키는 거는 더 힘이 든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가정 교사를 들여 가지고서 자꾸 예비 시험을 치러 줍니다. 예비 시험을 치르는데 가정 교사로 들이는 것은 뭣이 가정 교사인고 하니 우리에게 자기가 아는 대로 행할, 아는 대로 행할라면 행할 수 있는, 아는 대로 행할라면 행할 수 있는 그 현실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 가정 교사를 만들어 준 것이라 그거요. 비유컨대는 가정 교사를 만들어 주는 것이라.

그러면, 가정 교사 만들어 가지고서 데려 가지고 그 예비 시험을 치르는데 예비 시험에는 번번히 백 점을 맞습니다. 백 점을 맞습니다. 백 점을 맞는데 그라면 그 아이는 이제는 실상 학교에 입학하는 시험이나 다른 무슨 시험을 치든지 시험 칠 때에 그때는 틀림없이 백 점이 됩니까 백 점이 될 수도 혹 있고 혹 백 점이 안 되고 그만, 백 점 만점이라야 합격인데 구십구 점이 돼 가지고서 떨어질 수도 있을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면 예비 시험과 실상 시험에 어느 시험이 더 어렵습니까? 실상 시험이 더 어렵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예비 시험에 잘 치러도 실상 시험에 가 가지고서 혹 낙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뭐 예비 시험에 아주 확 통과할 수 있는 이런 실력을 갖추어 가져도 지금 실상 시험에 가슴이 도곤도곤 떨린다 그말이요, 혹 떨어질까 해서.

그런데 실상 시험은 어떤 것이 실상 시험인고 하니 그 실상 시험은 그것은, 실상 시험도 또 그것이 뭐냐 하면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비 시험 있고 실상 시험 있는데 예비 시험에는 그게 네가 아나 모르나 이렇게 알고 또 읽으라 하니까 잘 압니다. 또 시험 쳐 보니까 또 필기 시험도 있고 읽어보라는 읽는 시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실상 시험도 두 가지라.

실상 시험이 두 가지인데, 실상 시험은 뭣으로 두 가지가 되는고 하니 우리가 믿음을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뭘 주는고 하니 기적과 축복을 줍니다.

기적과 축복을 주는 것. 기적과 축복을 주는데, 그러면 기적과 축복 주는 그것이 실상 시험의 초보입니다.

실상 시험의 초보인데, 그러면 기적과 축복을 받았으니까 요 면에 대해서는 기적과 축복을 받았으니 이야말로 이거 완전하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은 바울이 말하기를 자기가 뭐 기적과 축복면을 본다든지 또 어떤 면을 본다든지 볼 때에 자기는 ‘하나도 잘못됨이 없다. 마음에 자책할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 그때에 하나님이 옳다 인정해 주실란지 안 주실란지 나는 모르겠다.’ 이라니까 지금 실상 시험을 치르기 전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거와 마찬가지로 항상 바울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두려움을 가지고서 지냈습니다. 그러니까 심판 앞에 갈 때까지는 옳다 싶은 것도 행여나 거게 틀린 것이 있는가 있는가 자꾸 이렇게 살펴 가지고서 고치고자 하는 그런 사람이 됐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실상 시험에 마지막 시험은 뭐인고 하니 마지막 시험은 그리스도의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 그것이 이제 마지막 시험인데 그리스도의 심판에 너는 지금 믿음이 오십점이다, 육십점이다, 팔십점이다, 구십점이다, 백점이다 그 정확하게 자기의 믿음이 몇 점이라 하는 것을 판정해 가지고 그대로 이제 영원 무궁의 보응을 주십니다. 영원 무궁의 보응을 주십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믿음, 믿음의 시험 있는 것은 ‘네가 하나님의 신구약 성경에 말씀해 놓으신 그 모든 내용들을 네가 알고 인정하느냐?’ 하는 그것이 첫째 시험이 되겠습니다. 알고 인정하면 ‘또 네가 행하느냐, 행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현실을 줘 가지고 또 행하고 안 행하는 것도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합니다.

행하지마는, 또 그 실상 시험에 이제 도달해야 되겠는데 실상 시험에 도달하는 데는 몇 가지가 실상 시험입니까? 실상 시험의 초보가 뭐입니까? 실상 시험의 초보가 뭐요? 기적과 축복이 실상 시험의 초보가 되겠습니다. 또 실상 시험의 이제 종결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심판. 그러면 이제 우리는 다 끝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가 자기의 믿음이 참 이거, 자기의 믿음이 바르냐 가짜냐 하는 그것을 자꾸 자기가 자기를 살펴야 되지, 이러기에 성경에 말하기를 “스스로 삼가” “스스로 자기를 살펴” 또 “스스로 자기를 건축하라, 자기를 세워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내가 마음으로 믿는다 하는 것이 참 진짜인가 가짜인가 그것을 알아보고 싶은 사람은 그 마음으로 알고 인정하는 것을 실행을 해 볼 수 있는 그 실행할 수 있는 그런 기회 만나기를 자꾸 기다립니다. 그런 기회 만나기를 원합니다.

그런 기회를 만나기를 원하고, 또 그런 기회를 만나 가지고 자기가 실행을 했습니다. 실행했는데 그 실행까지 했지마는 그래도 이것이 진짜인가 가짜인가 모르겠다 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 진가를 지금 알아볼라고 하는 데에는, 알아보고자 하는 사람은 뭘로써 진가를 알아 보겠습니까, 자기가? 진가를 알아 보고 싶은 마음은 있겠지요. 그러면 진가를 알아보는 데에는 뭘로 가지고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것을 알아볼까? 뭘로 가지고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아보겠습니까? 뭐? 안경쟁이 너 말해 봐. 저거 공부 잘한다더니만 알기는 잘 아네. 그래. 기적과 축복.

이제 암만 내가 실행하기는 했지마는 반드시 실행한 그것이 참되다면은 그 결과는, 실행의 결과는 기적과 축복인데 기적과 축복이 있어야 안심하지 기적과 축복이 있기 전에는 안심을 못 하겠다 말이오.

그러면 기적과 축복이 자기에게 왔습니다. 그러면 이제 실상 시험에 초보는 인정이 됐습니다. 초보는 합격이 됐지마는 기적과 축복이 왔으니까 이제는 마음 놓고 안심할 수가 있습니까 아직도 안심이 안 됩니까? 안심이 안 됩니다.

그러면 안심은 그리스도의 심판에 가야 안심되기 때문에 기적과 축복이 왔지마는 혹 여게 흠과 점과 주름잡힘이 있을까 문제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에 갈 때까지 ‘혹 흠이 없나, 혹 주름잡힘이 없나, 혹 그뭐 조그만치라도 점이 없나?’ 이래 가지고 살피는 것이 신앙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요것까지만. 그러면 우리가 믿는지 안 믿는지, 마음으로 내가 참 믿는다는 것이, 마음으로 알고 인정한다는 마음으로 믿는다는 마음의 순종 이것이 참 순종인지 순종 아닌지 그것은 무엇을 보아서 압니까? 행함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행함을 보아서 알 수 있는데 주님이 우리를 마음으로 믿는 믿음이 참인지 거짓인지 하는 것을 우리에게 시험하실라고 자주 시험을 치러 볼라고 그래 가정 교사를 데렸는데 가정 교사를 데린 것은 어떤 것이 가정 교사입니까? 저 ○○○씨, 졸며 듣는 거는 소용 없어. 대답만 가지고 되는가, 소용 있는가? 그런 믿음은 다 나중에 현실당하면 뚝뚝 떨어져 버린다 말이오.

딱 이래 가지고 들을 때에 ‘주여, 주님이여, 내가 요와 같이 지금 주님이 나에게 현실을 자꾸 주십시오. 내가 말씀대로 모두 알고 인정하고 있는 이 말씀대로 실행을 하는지 안 하는지 실행할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자꾸 줘서 나를 가정 교사를 들여 가지고 가정 교사와 같이 현실을 줘 가지고 자꾸 시험해 주십시오.’ 이제 닥치면 ‘이제 가정 교사의 예비 시험이 났다. 해 보자.’ 자꾸 이렇게 해서 자기가 스스로, 원인은 결과를 보아서 알고, 원인은 결과를 보아서 알고, 결과는 원인을 보아서 안다 말이오. 말씀대로 그대로 맞나 안 맞나? 되면 나중에 자기가 결과를 맺어 놓고는 이 결과가 성경에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 인정하는 지식대로 들어맞는가 안 맞는가 몰라. 그러니까 원인은 결과에서 살피고 결과는 원인에서 살펴서 요 딱 들어맞아야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자꾸 스스로 자기가 깨우쳐야 됩니다.

이래서, 그리스도의 심판을 우리가 아직까지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심판 앞에 갈 때까지 자꾸 이렇게 심사하고 저렇게 심사하고 여러가지로 심사해 가지고서 온전한 믿음을 우리가 가지지 안하면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서 무슨, 과거에 신사참배가 나 가지고서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 이긴 사람이 몇 사람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 믿는 사람 여기 많았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이 여기 많았지마는서도 신사참배 안 하고 이긴 사람, 이긴 사람은 여게서도 많지 못합니다.

과거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안 하고 이긴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 자기 교역자가 했으면은 다 진 거야, 도매금이라. 대장이 졌는데 뭐 소용 있는가? 그게 다 했기 때문에 다 내비뒀지 안 하면 내비두는가? 자기 믿는, 다니는 교역자가 가 가지고서 신사참배 했으면 그 밑에 무리 그까짓 거야 물을 게 뭐 있는가? 다 하는 것이지. 자기 다니는 교역자도 신사참배 안 하고, 자기가 또, 교역자가 신사참배 해도 신사참배를 자기가 안 하면 자기에게 닥쳐요. 안 하면 자기에게도 닥치는데 해 버렸기 때문에 그거는 다 결정됐으니까 안 닥쳐.

○○○집사님 압니까? 알아듣겠어요? 자기 교역자가 신사참배 했으니까. 그거 다 했으니 그 사람한테 시험할 것 없어. 안 하면 그다음에 차례로 잡아다가 이래 할 수 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없어.

없는데, 별로이 많이 없어요. 없는데 그 사람들은 다 시험에 낙제했다 말이오.

실상 할 때는 다 그만 다 낙제 다 돼 버리고 말았어. 그때 신사참배는 일계명과 이계명 문제입니다.

다 낙제됐는데, 그러면 신사참배 안 하고, 그런 시험 안 닥쳐서 안 하고 간 사람은 하고 간 사람보다 좋습니까 안 좋습니까? 그런 시험을 닥치지 안해서 신사참배 안 하고 간 사람은 그런 시험을 닥쳐 가지고 그만 자복을 하고 그만 굴복을 하고 한 그 사람과 어느 사람이 좋습니까, 두 사람 중에? 그 시험을, 신사참배 시험을 닥쳐서 자기는 그만 ‘아이쿠 참배하겠습니다’ 하고서 굴복한 그 사람과 그런 신사참배를 닥치지 안해서 자기는 신사참배를 안 했다 말이오. 안 하고 간 사람과 그 두 사람 가운데에 어느 사람이 복 됩니까? 자, 그러면 내가 손을 들어 보라 하지. 신사참배 닥치지 안해서 안 하고 간 사람이 복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보십시오. 또 신사참배를 닥쳐서 자기는 안 하고 견디지를 못해서 신사참배 하고 간 사람이 복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손 들어 보십시오. 인제 좀 들었는데, 모르는 사람 손 드십시오. 뭐인지 모르는 사람? 요번에는 다 들어야지, 그러면. 모르는 사람 손 들라 하면.

그런데 그것은 조금 더 따져봐야 되겠습니다. 왜? 분명히, 안 하고 간 사람이 복되다 하는 데는 따져봐야 되겠어. 그 사람이, 안 하고 간 사람에게는 실상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안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인지 아닌지? 그 사람이 복 있다 하는 것은 심판대 앞에 가 봐야 되겠다 말이오. 그리스도 심판대 가 봐야 이제 참 닥쳐도 안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복되지마는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가기 전에는 그게 복되다고 할 수 없다 말이오.

그러나 신사참배에 한 사람이 닥치지 안해서 안 한 사람 보다 복되다 하는 것은 우리가 판정을 할 수 있어. 왜? 뭐이 복됩니까? 왜 복되지요? 신사참배를 닥쳐 가지고서 안 할 수 없어 신사참배를 해 버렸다 말이오. 한 사람 그 사람이 왜 복됩니까? 왜 복되요? ○조사님? 시험에 떨어졌기 때문에 시험 준비하니까 그게 복이 되고, 자기는 또 시험에 떨어진 자기이기 때문에 떨어진 줄 알고 있기 때문에 가 가지고 매를 맞아도 좀 적게 맞는다 그거요. 이게 된 줄 아니까 더 낭파가 되는 거라 말이오.

이래서 “더웁든지 차기를 원한다. 차지도 안 하고 더웁지도 안하기 때문에 미적지근하니까 내 입에서 토하여 내친다” 하는 말씀을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했는데 그게 뭐냐 하면은 그거라. 그러기 때문에 자꾸 자기가 시험을 치러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합격을, 참 실상에 합격되고자 하는 사람은 예비 시험을 자꾸 치르는, 예비 시험을 치러 주는 그런 가정 교사를 원합니까 괴롭다고 가정 교사 데리는 걸 싫어합니까? 원해.

그러니까 이제 자기가 실행하는지 안 하는지 하는 그 실상을 알아보는 그 현실 만나기를 자꾸 원한다. 현실 만나면 그때 힘을 써 가지고 한번 자기 실력을 한번 있는가 한번 테스트 한번 한다 그말이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좀 거기 읽어 봐요. 내일 아침에도 계속할란지 모르니까. 계속 할란지 모른다 그 말은 혹 내가 변할지도 모르지마는 주님이 불러가면 또 못 해. 알겠습니까? 오늘 이렇지마는 내일 아침에는 이게 없을란지 몰라. 6 5와 같은 막 거석이 뭣이 와 가지고서, 그 사람들이 네 시간 만이면 여기 점령한다 하는데, 네 시간 만이면 점령한다고 하는데 오늘 나서면 여기 막 전부 불 바다가 되고 모두 야단이 날 터인데 언제 여게서 이래 모여도 예배당은 날아갈란지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내일 일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할라고 하는데 할런지 모릅니다.’ 하는 그말은 항상 그런 뜻에서 늘 말하고 있다는 걸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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