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2 17:20
옥토에 뿌린 씨-말씀만 사모
본문 : 마13:1-9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공을 하는 사람은 어데까지 성공을 하느냐?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한다. 백은 열에 열 곱한 것이 백이요, 육십의 여섯에 열 곱한 것이 육십이요 삼십은 셋에 열 곱한 것이 삼십입니다.
성경에는 비유도 있고, 또 형용사도 있고, 또 모형적인 것도 있고 예표적으로 한 것도 있고 어쨌든지 사람들에게 가장 깨닫기 쉽고 기억하기 좋고 또 이 말씀을 자기 생활에 늘 기억하기 쉽도록 그렇게 하나님께서 방편을 써서 가르치셨고, 또 예언하는 그 말씀은 사람들이 다른 성경을 믿는 사람에게는 저절로 깨닫도록 그렇게 하셨고 다른 성경을 보지 안하고 그 성경만 보고 제 꾀대로 성경을 사욕대로 보는 사람에게는 넘어지고 깨닫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방어하는 것이 말세 예언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면 결실이 백 배 된다. 인간의 수는, 인간의 수는 열입니다. 인간은 열 하면 그 다음에 또 열 하나 열둘, 이십 하면 또 이십하나 이렇게 열을 그 단위로 해 가지고서 만수로 했는데, 그러기에 백 배는 인간의 수에 만을 가하면 백이 됩니다. 또 육십은 성경에 마귀의 수를 육이라고 했습니다. 한번 세면 육, 열 번 세면 육십, 백번 헤아리면 육백, 이래서 육백육십육이라 하는 건데. 여섯을 곱을, 여섯을 만수를 하면, 여섯을 인간 만수를 하면 육십입니다. 또 하나님은 일곱 수를 취할 때도 있고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셋을 말할 때도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는 셋은 하나님 수인데 하나님 수에 인간의 만수를 곱하면 삼십이 됩니다.
이렇게 백 배, 육식 배, 삼십 배로 표시한 것은 사람으로서 인간면에 대해서, 인간을 때해서 인간 상대에 온전을 이룰 수 있다. 만수, 온전을 이룰 수 있다.
인인 관계에 온전을 이룰 수 있다.
자기가 어떤 사람에게 원수가 되는 일을 하고 그만 그 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풀 수가 없겠습니다, 아무리 풀려고 할 지라도. 만일 자기가 잘못됐다 하면 잘못된 걸 느낀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없어졌으니까 해석을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요 백 배가 결실을 할 수 있는 이 길을 걸어가면 그 사람이 죽었든지 그 사람이야 내게 대해서 곡해를 하고 어떻게 하고 있든지간에 자기로서는 이다음에 인인 관계가 나타날 때에 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온전한 행위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에게 대해서 미안하고 머리 숙이고 부끄러움이 있고 사과하지 자기는 그런 것이 없도록 다 해결을 지울 수 있다.
인인 관계에 온전을 이룰 수 있다.
또 마귀 관계에도 온전을 이룰 수 있다. 그러면 마귀 관계는 마귀는 참 우리를 꼬우기를 굉장히 꼬우는데, 말세가 되면 저의 때가 얼마 남지 아니한 걸 아는고로 있는 지능을 다해서 우리 믿는 사람들을 미혹 시키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미혹시키려고 하든지간에 그에게 대해서 하나도 굽어진 거나 꺾어진 거나 침노받은 것이나 그에게 대해서 조금도 잘못한 게 없이 다 온전한 의로 가지고 그 모든 것을 이겨서 하나 유혹도 받지 않는다. 마귀에게 대해서도 완전한 행위를 이룰 수가 있다.
또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나, 섬기는 것이나, 사랑하는 것이나, 높이는 것이나, 또 의지하는 것이나, 바라보는 것이나, 순종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대해서 어떤 면이라도 온전을 이룰 수 있다. 사람이 이런 일이 될 수 없는 일이지마는 옥토에 뿌린 씨만 되면 모든 면이 온전해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 될 수 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옥토에 뿌린 씨는 어떻게 되면 옥토에 뿌린 씨가 되느냐? 아주 비유로 해서 우리가 간단하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옥토에 뿌린 씨는 그저 해석을 이런 면 저런 면 방어하는 면, 또 그렇게 해야 되는 면 그런 것을 강조하려고 하니까 해설이 길고 또 복잡하지, 그저 옥토에 뿌린 씨만 되면, 그 실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 뭣이냐? 여게 길바닥, 돌밭, 덤불밑 세 가지를 말했는데 그 마음을 세 가지애게 빼앗기지 안하고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도만 자기 마음에 가득 찼으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듣고 그 말씀을 어떤 말씀이든지 한 말씀을 새김질하면서 그 말씀대로 자기가 살려고 계획을 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고, 그 말씀대로 말도 하고, 자기 성품도 가지고, 또 행동도 하고 그 말씀대로 물질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나, 또 환경 어떤 형편에 사건에 대해서나 어데 대하든지 이 말씀을 생각하고 이 말씀에 순종을 하는 이 말씀대로 하려고 하면 그 한 말씀을 인해서 모든 말씀이 따라 일어납니다.
그물이 뭐 천 고라도 벼릿줄만 들면 그 그물은 다 딸려 올라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어느 말씀을 잡아도 그 말씀을 잡고 놓지만 안하면 자기에게는 그 말씀이 하나님의 수많은 말씀 중에 자기에게는 그 말씀이 벼릿줄이 됩니다. 벼릿줄이라 말은 그물을 이래 얽어 놓고 그 위에 제일 큰 줄을 이래 하나 쭉 이래 놔서 모두 그 줄에 매달렸기 때문에 그 줄만 들면 이런 모든 자잔하게 만들어 놓은 그물은 다 들려 올라갑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느 말씀이든지 자기가 그 한 말씀을 놓지 안하고 그 한 말씀을 잡고 생각하고 또 그 말씀대로 살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원하고 노력하고 그 말씀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하고, 성품도 쓰고, 그 말씀대로 하려고 하면 그러다가 보면 그 말씀이 그다음에 또 연결된 말씀을 또 우리에게 알려 주고 알려 줘서 한 말씀이라도 잡고 놓지 아니하고 그 말씀대로 자기가 실행하려고 하면 모든 말씀이 다 자기에게 붙들려서 들려올라오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기는 여러 말씀을 알아야 됩니다. 모든 성경 말씀을 다 알아야 되지마는 실은 어느 말씀이라도 좋습니다. 어느 말씀 이라도 그 한 말씀을 붙들고 놓지 아니하고 내 마음에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주장만 하고 있고 내 마음을 이 세상 지식에게 뺏겨서 세상 지식이 내 마음을 주장하지 못하게, 또 자기의 옛사람, 자기. 자기의 사욕이나 주관이나 하는 자기가 자기를 주관하지 못하도록, 자기가 자기 마음을 주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를 주관하고, 공부하는 학생이라도 하나님 말씀이 자기 마음을 주관하고 이 말씀을 따라 공부에게 대해서 처리합니다. 이 말씀이 시키시는 대로 공부를 하기 때문에 공부 할 때에는 하고 안 할 때에는 안 하고 잘 때는 자고, 그 공부를 하나 '이 공부를 이렇게 네가 열심히 공부하고 보배로 여겨서 공부하니 이 공부가 너를 어느 정도 차지하고 있느냐 보자' 하나님이 시험하십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백 세에 이삭을 낳으니까 이삭을 사랑하니까 '네가 보자 이삭을 어느 정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고 네가 소망하고 있느냐?' 하는 걸 하나님이 시험할 때에 '잡아서 번제로 드려라' 이랬습니다. 번제로 드리라 할 때 '예' 하고서 번제로 턱 드리려고 한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제야 내가 너를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걸 내가 알았다.' 마음대로 이삭에게 축복하고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부도 그러하고 사업도 그러합니다. '네가 어떻게 하는고 보자.' 사업에 애착을 붙이지 안하고 사업에 성의를 들이지 안하고 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사업에 성의를 들이고 애착을 가지고 조심을 하고 그 사업을 하되 어느 정도 해야 됩니까? 있는 정성을 다해서 하라 했어.
남에게 쓰여지는 그 부하에서 종노릇 하는 사람도 그 주인을 섬기기를 있는 충성을 다해서 섬기라 이랬습니다. 다해서 섬기나 실은 그 사람이 그것을 인해서 그것을 섬기고 그것에게 끌려서 그것에게 소망을 두고 그것에게 끌리고 그것에 속해 가지고 그런 게 아니고 하나님에게 주님에게 속해 가지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주님이 맡기신 책임을 감당하기 위해서 그 일들을 할 때에 네가 죽도록 해라.
'상전에게 복종할 때에 그 상전 위에 하늘의 상전이 있으니 하늘의 상전이 그 상전에게 명하고 그 상전이 너에게 명한 것이기 때문에 그 계통에서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선한 충성을 다해라' 선한 충성을 다해라. 하나님 중심인 충성을 다해라 그말이오. '선한 충성을 다해라' 하나님 중심인 충성을 다해라.
그러니까 우리 믿는 사람들이 세상 일을 하는데 자기의 의무나 책임이나 지위나 본분을 행할 때에 어느 정도 해야 되느냐? '그까짓 거야 뭐 세상 일에 두고 갈 일이니까 아무나따나 해도 되지 않는가?' 그런 게 아니라. '있는 충성을 다해라.
하나님 중심으로 그 일을 충성을 다해라.' 결사적으로 하라 말입니다.
믿는 사람은 뭣이든지 결사적입니다. 결사적인데 왜 그 결사가 무엇으로 인해서 결사냐? 그 결사가 주님으로 인한 결사요. 주를 위한 결사요. 주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결사요.
이렇게 하면 되지마는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길바닥이 방해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돌밭이 방해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덤불이 방해해서 이 세 가지 때문에 하나님 말씀의 결과를 맺지를 못한 그렇게 하면 헛일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지배하고 나는 하나님 말씀에게 지배받는 이 지배로 우리가 따라서 하면 인인대, 인인대도 또 마귀에 대해서도 하나님께 대해서도, 이러니까 모든 만물이 절로 따라갑니다. 모든 데 대해서 완전한 행위를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네가 마음을 세상 지식이 네 마음을 주장하든지, 네가 너를 주장하든지, 세상에 어떤 그 어려운 사건들이 물질들이 네 마음을 주장하든지 하면 헛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너를 주장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네 마음에 각 부분을 주장하게 되고, 네 몸을 주장하게 되고, 그러면 네 행동을 주장하게 되니 필연적으로 너는 인인 관계나 악령이 하는 악령 관계나 하나님 관계가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할 수 없도록 만만한 온전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간단하지마는 우리는 그걸 연습해야 됩니다. 내 마음에, 내가 주님의 말씀을 잡는 게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자꾸 사모하면, 사모하게 되면 '너희들에게는 환상을 보는 것보다' 변화산에서 모세를 봤고 엘리야를 봤고 예수님을 봤고 이렇게 본 일이 있고 또 소리를 들은 음성 들은 일이 있었지마는 그것보다 더 확실하고 권위 있는 것이 너희들에게 있으니 그 뭐라 했습니다.
말씀.
'더 확실한 하나님의 이 계시해 주신 말씀이 너희들에게 있으니 이 말씀을 너희들이 사모해라' 얼마나 사모해야 되느냐? '너희 마음에 새벽별이 떠오르도록' 샛별이. '새벽별이 떠오르도록까지 네가 사모하는 것이 가하니라' 새벽별은 무엇이 새벽별인가 하니 이 말씀을 자꾸 사모하게 되면 처음에는 제가 이 말씀을 자꾸 사모하고 생각했지마는 생각하다 보면 나중에 이 말씀이 자기를 주관하게 되고 자기는 이 말씀에게 복종하게 되고 이 말씀은 자기에게 자기보다 권위 있어 이 말씀이 자기를 주관하고 자기는 이 말씀에 속하게 되는 그 일이 시작됩니다. 그 일이 시작되면 그것이 뭣이냐? 새벽별이라.
새벽별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곧 새사람입니다. 그것이 영감,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 참 새사람 자기가 나오는 것이니 새벽별이 나면, 새벽 별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 무엇이 나옵니까? 뭣이지요? 새벽별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그다음에 따라서 나오는 것은 뭣입니까? 햇빛. 새벽별이 동에서 떠오르고 난 다음에 한 두서너 시간 있으면 아침해가 동에서 둥 떠올라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네가 자꾸 이 말씀을 자꾸, 처음에는 네가 이 말씀을 네가 세상 지식을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네가 '내게 어찌 되노? 내가 내게 어떻게 해야 나를 행복되게 하고 유익되게 하고 평안하게 할까?' 네가 네게 대해서 너를 생각할 수도 있고, 세상 재물이나 사건이나 그런 것을 생각할 수도 있고, 네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도 있다.
크게 말하면 네 가지다. 세상에 속한 그 세상 모든 인간들의 말 그걸 생각하든지, 그리 안 하면 네가 너를 생각하든지, 네가 세상 재물이나 세상 사건들이나 그런 걸 생각하든지,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든지, 크게 나누면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님 말씀을 생각을 해라.
자꾸 생각하면 처음에는 네가 주인공이 돼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생각 하지마는 자꾸 생각을 하면 하나님 말씀이 네 주인공이 되고 너를 붙들고 너를 주장하게 되고 그 말씀이 너를 주장해서 그 말씀이 하라는 것 하고, 하지 말라는 것 못 하고, 암만 하고 싶어도 그 말씀이 금하니 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돼서 그 말씀이 너를 주장하게 된다. 그게 뭣이냐? 샛별이 떠오른다 샛별이 떠오른 그것은 그것이 곧 영감이 떠오른 것이요 진리가 떠오른 것이요 영감과 진리로 중생된 새사람, 영감과 진리로 중생된 새사람이 네 속에 머리를 들고 일어서는 것이니 그러고 나면, 중생된 새사람이 너를 주관하게 되면 조금 있으면 너를 대속하신 만유의 주 하나님이신 주님이 너를 주장하게 된다.
너를, 말씀을 자꾸 생각하고 딴것이 들어오면 물리치고 말씀을 생각하게 되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너를 찾게 된다. 너를 찾아서 너를 만나기까지, 너를 만나기까지 네가 사모해야 된다. 너만 만나면 너와 하나님은 한덩어리다.
한덩어리기 때문에 너만 만나게 되면, 네가 새사람만 만나게 되면 하나님은 절로 만나게 된다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 세 가지에게 뺏기지 안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에게 뺏기지 안해야 되지 이 세 가지에게 뺏기면 헛일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살필 수 있어요. '나는 내가 하루 스물네 시간 일하면 무엇이 나를 제일 많이 차지하고 있느냐?' 그 사람이 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고 자는데 밤에 잘 때에 꿈이 안 꾸이고 주 안에서 평안하게 이렇게 자면 자기 마음을 하나님이 주관하고 자기를 하나님이 주관하고 있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되고, 잘 때에 세상 재물의 꿈이 꾸이면 '내 마음을 이놈이 주관하고 있구나.' 또 자기가 안된 그런 걸 또 생각을 하면 또 '그게 주관하고 있구나.' 그렇게 그것도 참고로, 꼭 절대 맞는 건 아니지마는 참고로 삼아 가지고, 어쨌든지 꿈에든지 생시든지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이 주관하게 되면 벌써 새사람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 말씀이 주관하는 그 동시에 잊어버린 새사람을 찾았고 새사람 찾으면 이제 주님이, 주님을 찾아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뭣 때문에 사람들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기를 잊어버리느냐? 자기를 잊어버리는 이유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잊어버렸다. 그러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차지하기 위해서 네가 새사람 너를 잊어버리고 새사람 너를 내어 주고 네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차지했으면 얼마나 차지했느냐? 가치를 논하면 '온 천하를 차지하고도 자기 중생된 새사람 자기를 잊어버렸으면 자기는 손해갔다' 자기 잊어버리면 그다음에 무궁세계에 자기의 수족이 되고 자기의 기능이 될 모든 자기를 다 빼앗기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빼앗기는 것은 뭘 말하느냐 하면 시간 시간 닥치는 그 시간에서 그 현실에서 자기의 수족을 만들고, 자기의 기능을 만들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만들고 할 수 있는 것인데, 자기 만들수 있는 것인데 자기 만들 수 있는 것인데 자기를 마귀와 이 세상에게 다 뺏겨버려서 나중에 부활은 하지마는 바보 부활해, 불구자 부활해.
목욕탕에 가도, 나는 요번에 좀 불구같이 그래 됐었는데 지금도 말이지.
찌불떵찌불떵, 암만 이래 옳게 걸어도 찌불떵찌불떵 자꾸 이래요, 기운이 없어.
그런데 목욕탕에 가 보면 그래도 뭐 뚱뚱하기는 내가 어북 중간 뚱뚱이는 되는데 힘이 없어 놓으니까 찌불떵찌불떵해. 아주 빼빼 마른 사람들도 젊은 사람 보면 힘이 있으니까 그저 '봐라' 하고서 냉탕에 들어갈 대 훌쩍 뛰어서 냉탕에 풍덩 들어가고 이런다 그거요. 나는 힘이 없고 그 사람은 힘이 있어서.
나는 그래 생각합니다. 내가 부활할 때에 그 기능이라는 것을 내가 그렇게 느끼지 못하니까 '네가 살덩이는 있어도 힘이 없으면 그런 것 봐라' 또 나보다 더한 사람 있습니다. 어떤 사람 보면 아주 뚱뚱한데 그 사람은 뭘 걸어갈 때 옳게 걸어가지 못하고 손으로 짚고 이래 걸어가. 꽃마을 그 기도실에서 보면 아침으로 보면 작대기 짚고 쩔룩쩔룩하면서 간신히 넘어가는데 보면 몸뚱이는 뚱뚱합니다. 그래 나는 그걸 볼 때 마다 부활을 연상합니다. '이다음에 부활할 때에 몸은 뚱뚱하게 부활 하지마는 속에 기능은 하나도 없어서 아무데도 쓸모 없다. 저 사람이 무슨 쓸모가 있겠노?' 그와 마찬가지로 부활하지마는 현실 현실에서 자기의 기능을 마련해야 될 터인데 기능을 누구에게 뺏겼습니다.
세상에게 뺏겼고, 재물에게 뺏겼고, 옛사람 자기에게 뺏겼고, 세상 모든 지식에게 뺏겼고, 그래 이 세 놈한데 다 뺏겼어.
이러니까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만 내 마음을 차지하고 다른 것 차지하지 못하게 하나님 말씀을 내가 사모해서 그 말씀하나를 딱 주인공이 돼서 말씀이 나를 딱 사로잡게 되면 그다음에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 자기가 썩 나와서 자기를 주관하게 됩니다. 자기가 나와서 주관하게 되면 그다음에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주님이 자기를 주관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요걸 원수로 삼아야 되겠습니다. 내가 말씀을 사모하고 할라 하는데 물질 그놈이 나를 자꾸 내 마음을 끌면 물질 그놈이 원수입니다.
그게 원수인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이 말씀을 사모하려고 하니까 사건이 자꾸 내 마음을 끌면 그게 원수인 알아야 되고 원수인데 원수는 버려야 됩니다. 원수를 대항해서 복수해 가지고는 못 이기기 때문에 원수는 버려야 돼.
또 내가 말씀을 사모할 때 어떤 사람이 그리 되면 사람 그게 원수라. 그게 원수라. 원수인 줄 알고 버려야 됩니다. 원수인 줄 모르면 헛일이라.
또 자기가 무슨 세상 지식이나 무엇이 그런 게 자꾸 말씀올 사모하려 하니까 그게 들어 방해하면 그게 원수인 줄 알고 버려야 돼.
이러니까 예수 믿는 것은 일단 너도 부인하고 이 세상도 부인하고 일단 부인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 말씀이 나를 주관하고 나서 그리고 나서 이 세상을 하나씩 둘씩 접촉해 가지고 차지해서 그것을 점령해야 되지 내가 그에게 점령당하면 전부 사망뿐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것이 참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기 마음은 뭣이 차지하고 있느냐? 내가 사람들을 만날 때 그래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것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물으면 묻는 사람에게 나는 반문합니다 자기가 계산을 해 봐라. 하루 종일 자기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자가 뭣인지 그것을, 자기 마음을 제일 많이 차지하는 것이 뭣 둘째로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뭣, 셋째로 많이 차지는 것이 뭣 넷째로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이 뭐, 그것을 네가 그저 구별해라.' 구별해 봐서 첫째로 많이 차지하는 그것이 네가 제일 원수로 삼가서 때려잡아야 하고, 둘째로 많이 차지하는 그것을 둘째로 네가 원수로 삼아서 때려잡아야 되고, 셋째로 너를 많이 차지한 것을 네가 원수로 알아서 잡아야 된다. 그놈을 잡으면 고기가 많다.
빠짝 마른 그런 닭을 한 마리 잡아봐야 '그뭐 뼈가지뿐이지 먹을 게 하나도 없어. 살찐 닭은 잡으면 고기가 많다 말이오. 그 모양으로 큰 원수는 잡기만 잡으면 고기가 많다. 아주 네 먹을 것이 않다. 이러니까 네 마음을 많이 차지하고 있는 그놈이 네 원수기 때문에 그놈을 뚜드려 잡아라.
그놈은 잡는 것은 뭣이냐? 그놈을 물리치고 하나님 말씀으로 대신 채워라.
채우면, 내게 물리치면 그놈은 내게서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 말씀이 나를 주관하고 새사람이 나를 주관하고 난 다음에 이제 물리쳤던 그것, 많이 차지한 것 물리친 것 그다음에 그것을 가서 이제 차지하게 되면 먹습니다.
자기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일단 버려라. 버리면 그놈은 죽어버린다. 이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으로 네가 살게 되면 새사람을 만나기 전에 너를 많이 차지하고 있던 그게 네 먹을 양식 중에는 제일 영양이 있고 좋은 양식이다.
그다음에는 그놈을 네가 양식으로 삼아서 먹게 된다.
요것을 꼭 잡고 요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일이 재미가 있을 것이고, 또 근심도 하늘에 근심으로 또 다시 그것이 큰 기쁨을 차지하게 되고 자꾸 이래 바꿔가지마는 하나님 말씀을 실행하지 안하는 사람은 예수 믿는 맛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라도 실행을 해 봐야 알지 실행하지 안하면 맛을 모릅니다. 며칠 전에 저는 식사를 못 해서 여러날 굶었습니다. 그래 먹고는 그거는 살, 수 없는 아주 그렇게 아주 뭐 허무하게 이렇게 지냈는데 엊저녁 아니고 아레 저녁, 엊 저녁에는 지난밤이지? 저 지낸밤에 이렇게 성경을 읽고 있다가 사도행전 12장을 읽으면서 어제 아침에 내가 증거한 그 말씀을 내가, 그전에도 설교도 많이 했지마는 그 말씀을 깨닫고 기쁨이 나서 그날 밤에 눈 하나 조금도 붙이지 안하고 밤새껏 기뻐하다가 또 찬송하다가 또 기도하다가, 마음에 새로운 힘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깨달은 것을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지마는 하나님이 내게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와 가지고서 일해 줄 때까지 내가 나가지 안하니까 그분을 만날 수가 없는 것 또 버리고 나갔기 때문에, 거기까지 나가지 안하고 버리고 딴데로 갔기 때문에 하나님이 당신이 뭐 지켜줄 필요가 없는데? 하나님이 초자연의 능력으로 거게 사자 입을 막을 필요도 없이 아예 다니엘이 사자를 피해버렸는데 뭐 사자 입을 막을 필요가 뭐 있겠소? 그런 일을 우리가 했든지 그러면 하나님이 막아 주실 사자를 만났는데 하나님이 입을 막아 주지 않는 것은 네가 기도하지 안했든지, 피했든지 기도하지 안했든지 그렇지 안하면 네가 네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서 너를 지키시는 것을 네 육안으로 보지 못했지 '기이하다. 이상하다. 어찌 그리 됐을까?' 제가 어제도 어떤 사람 만났는데 6·25 때에 지뢰를 묻어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거게 같이 갔었는데 갑자기 그만 배가 아파서 못 견뎌서 팍 쓰러지고 이러니까 할 수 없어 자기와 같이 가는 세 사람 동행은, 거기서 쓰러져 가지고 배가 아파 막 구불고 있으니까 할 수 없어 가지 못하고 세 사람은 가지 못하고 거기서 인제 배가 아파 구불고 이래 있다가 조금 후에 나아서 가니까 같이 가던 사람이 조금 앞에서 전부 다 죽어 가지고 시체가 돼 가지고서 있더라고. 그래 인제, 다른 모든 사람들은 같이 가는 둘이 있다가 '참 이상해요.이상해요.' 이상해요 하고, 또 그 본인도 있다가 '참 이상하다.하나님이 지켜 주셨던가?' 또 그렇게 생각했다고. 6·25그 어려운 극난에 가는 데는 그런 소리가 뭐 교역자들 만나니 전부 그 소리뿐이라.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고 믿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이렇게 나가서 하나님이 도와야 되는 극단되는 거게까지 나가면 하나님이 도우시는데 거게까지 안 나가기 때문에 도우심을 못 본다 그말이오.
나가면 당신이 혹 촉망 중에 바빠서 억만에 하나라도 잊어버릴 수 있느냐? 그분은 그런 총명이 없는 분이 아니시라. 그러기 때문에 그 분은 틀림없이 우리가 말씀대로 따라가는데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해야 될 때는 능력이 역사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것을 물리치 때는 물리 치고 하나님께서 또 나를 붙들어야 될 때는 붙들고, 당신이 전지하시기 때문에 조금도 부작용 없이 이렇게 역사를 해 주시는데 우리가 가다가, '이 말씀대로 하면 어려움 당하겠다.' 제자 제 방비 다 해 가지고서 피해서 딴데로 가는데 하나님의 그뭐 능력이 필요가 있는가요? 그러니까 제가 제 방비 다 하고 제 갈길 다 제 자율대로 주관대로 다 사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의 능력의 보호가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능력의 보호를 보지를 못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또 제가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를 봤지마는 보호 속세서 초자연의 능력 속에 살지마는 항상 '이상하다. 기이하다.
이상하다. 참 요번에는 다행이다. 다행이다. 요행이다.' 요행이다 다행이다 이상스럽다 이래 가지고서 그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요행에다 다, 요행에다 다 붙입니다. 다행에다 다 붙입니다. 우연에게 다 붙여버리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러니까 참 답답한 거라. 그럴 때는 나중에 하다 안 되면 하나님께서 한번 똑똑히 알려 줄 때가 있어.
그렇든지 보호해 주시는데 제가 눈이 어두워서 그 천사를 보지 못 했든지 그렇지 않으면 제가 기도를 안 했든지 그렇지 하나님이 우리를 순간도 놓고 계시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거게까지 나아가지 안하고 내가 내 단속 다 해 가지고 내 일 내가 다 하는데 하나님이 뭐 도울 필요가 뭐 있습니까? 죄가 죄 지어 필요할 때는 죄 짓고, 또 간교 필요할 때는 간교하고, 또 이렇게 복술 쓸 때는 복술 쓰고 제가 제 일 다 하는데 하나님이 지켜 주실 때까지 와야 하지? 그러니까 제가 저를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될 거게까지 가지 안하고 가다가 '아이구 이래 하다가는 큰 봉변 당한다' 하고 딴데 제 주장으로 제가 딴길을 걸어갔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겠소? 또 그 일을 뿍뿍 끝까지 걸어간다 할지라도 기도하지 안하면 하나님이 턱 당하구로 냅둔다 말이오. 왜? 그 턱 당하면 그때사 급하게 부르짖어, 하나님 앞에. 어서 나를 도와 달라고 급하게 부르짖어.
그러나 어릴 때는, 어릴 때는 그대로 두면 아무것도 철도 없어 모르기 때문에 아주 죽으니까 헛일이니까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안해도 하나님이 방비도 해 즐시고 모든 걸 섭리해서 이렇게 저렇게 해 주십니다. 어릴 때는 그래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자가 기도하지 않는 것을 하나님이 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들어 주시지 않는 건 왜? 하나님이 지금 그와 같이 만든 것이 당신하고 우리하고 밀접해지기를 원해서 당신과 우리와의 사귀어서 이제 친근해 가지고 당신만 보고 사는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인데 무슨 일을 닥쳐도 뭐 '잘되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하면 차차 그러다 보면 우연으로 돌아가고, 자연으로 돌아가고, 운수로 돌아가고, 요행으로 돌아가고, 다행으로 돌아가고, 그저 이상하다는 것으로 돌아가 버리지 하나님과 친근할 그런 좋은 기회를 만드느라고 힘을 많이 썼는데 당신과 친근이 안 돼진다 그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