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도리
선지자선교회
1980년 8월 29일 금야

 

본문: 요한복음 6:1-15 그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곧 디베랴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인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봄이러라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신대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효가 오천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다  저희가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이 말씀은 사복음에 다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 15절로 20절, 마가복음 6장  34절로 44절, 누가복음 9장 12절로 14절, 요한복음 6장 1절로 14절. 사복음에 다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것은 저기에 기록되지 안했고 또 저기에 기록된것은 저기에  기록되지 안해서 그 사복음에 있는 것을 다 종합해서 보면 자세히 좀 그 형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동시에 된 같은 사건을 꼭같이 기록지 아니한것을 혹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오랜후에 추억해서 기억하니까 추억이 흐리고 그 명확해서  그렇다. 그렇게들 사람들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경기자에게 영감하실때에 그렇게 기록할 필요가 있어서 기록하신 것입니다.

그것을 세밀히 상고해 보면 그렇게 기록할 이유가 있는 것을 우리가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것은 약해놓고 사복음에 기록한것을 종합해서 그때의 그  사실을 순서대로 말한다고 하면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가 심히 많았습니다.

온갖 그 이적 행하신 것과 또 사람마다 자기의 할 수 없는 어려움을 예수님에게  나와 가지고 해결을 받은 그런 역사가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욕망으로  저 생각으로 이렇게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날 동안 말씀을 가르치시고  따라다니는 무리들은 계속해서 따라다니니까 여러 날 굶은 사람도 있고  그랬었습니다. 데베라 바닷가에 언던진 그 빈들판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저 3층에 안들린다는데 언제든지 안들리고 꼭 고쳐야 되네 그것  참 어찌 그럴까 들립니까 들립니까 들리면 손을 드이소. 처음에는 들렸는데 와  지금 또 안들리 갑자기 뭐 변동없었어. 예. 안했는데 그래요. 그것 참  가만있는데 또 들립니까. 가만히 그대로 두는데 안들렸다가 들렸다 그 뭣인가 그  뭐 고장난걸 고쳐야지.)  그때에 가르치다 보니까 날이 저물어졌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말하기를  '선생님 지금 날이 저물어져 가고 있습니다. 이 무리들은 모두 시장해 하고  있는데 여게는 빈들판이니 이들을 해산시켜서 각각 마을로 돌아가서 음식을  먹도록 그렇게 해산을 일찍 시키십시오.'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그라니까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먹을 것을 주어라 말씀했습니다. 제 제자들이  말하기를 '아 여게는 빈들판이라 음식을 살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또 음식을 저  먼 마을에 가가지고 사온다 할지라도 200데나리온 어치를 사와도 이 무리들에게  조금씩 밖에 안돌아 가겠는데 이 어떻게 합니까?' 그 제자중에 빌립이라는  사람이 말했습니다.

 그라니까 예수님께서 '아 너희들에게 가지고 있는 음식이 얼마나 되느냐  가져오라' 제자들이 가서 조사한 결과 어린 아이 하나가 보리떡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이것을 내놔서 그것을 가지고 안드레가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이 어린 아이가 보리떡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를 이것을 주님에게  갖다드리라고 하면서 내놨습니다. '어떻게 주님의 능력의 은혜를 가한다  할지라도 이 무리들에게 얼마 돌아가겠습니까? 시장이나 면하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흩어보내자 이렇게 말했고 빌립은 이백 데나리온 어치를 사도  조금씩 밖에는 돌아기지 않겠다 이렇게 말했고 안드레는 여게 오병이어가 있는데  주님이 여게 축사하시고 주의 은혜를 가한다 할지라도 이거이 뭐 이 많은  사람에게 무엇이 돌아갈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음식을 받으시고 이 무리들은 다 모두 앉게 해라 앉히라. 그때에 제자들이 백  명씩도 앉히고 오십 명도 앉히고 그렇게 앉혔습니다. 그후 예수님이 그 떡을  가지시고 축사를 하시고 떼어주라 나눠주라 했습니다.

 그래 제자들에게 주면서 나눠주라 하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받아가지고  나눠줍니다. 그저 떡이든지 고기든지 먹고 싶은대로 줘라 모두 흡족히 먹고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은 부스러기를 하나도 버리지 말고 그것을 다 주어라 주 모으니까  열두 바구니에 찼습니다. 그때에 거기 있는 모든 무리들이 별별 모양으로  예수님을 따라 왔지마는 이 떡을 먹고 난 다음에는 그들이 놀래 말하기를 이는  참으로 하늘에서 온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의 선지자로다. 그들이 하나님이  보낸 하나님의 선지자로 다 인정을 했습니다.

 거기있는 무리들은 다 이렇게 선지자로 인정을 하고 이 소문이 들리고 또  무리들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이분을 우리나라의 왕으로 세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겠다해서 예수님을 억지로 유대 나라의 왕으로 세울려고 했습니다.

 그때는 로마의 식민지로 압제받고 있는 그 독립 못하고 있는 때인데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내용을 아시고 피해서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 고것이 여게 본문에 기록한 사복음대로의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구원얻는 길을 가르치는 하나의 형식 계시입니다. 형식 계시가  이제 또 문서 계시로 우리에게 기록되가지고 전해온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예수님은 보리떡 다섯덩어리와 물고기 두마리로 이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는  권능을 베푸신 주님이시라 이렇게 만 간단하게 생각하고 이 역사적인 이 형식이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것을 모르고 그저 지나가기가 아 쉽습니다.

 이면으로 구원도리를 가르치신 것이 있고 저면으로 가르치신 것이 있고 여러  면으로 있는데 그 중에 몇 가지만을 요사이 늘 증거해 나옵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리를 듣고 아는 것으로만 구원 되는것 아니고 듣고 실행을 해야 구원이 되지  실행하기 전에는 구원은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도리를 읽고 배워서  자기가 안 것이 행하면 겸손과 구원이 이루어지고 행하지 아니하고 이 지식을  가지고 있을때에는 이 지식은 자기를 교만케 만들고 이 지식은 자기를 정죄하는  율법이 됩니다. 듣고 행하면 복음이 되고 듣고 행하지 아니하고 지식으로만  가지고 있으면 자기를 정죄하는 율법이 됩니다. 행하면 겸손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행하지 아니하면 교만한 강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잘 안들으면 모릅니다. 여게서 간추려서 세 가지를 금지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주님이 이 계시에서 세 가지 금지하신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금한 것을 배워서 우리가 이것을 금해야 하고 또 세 가지  우리에게 권하신 이 명령을 우리가 지켜서 행하여야 이 도리가 자기에게 복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알아쉽도록 하기 위해서 금한 것 세 가지는 사랑을 버린 것을 금했고 믿음  버린것을 금했고 또 우쭐해서 왕권을 취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주님이 명령하신  것은 주님이 자기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피동 되어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무리를 사랑하고 두 가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고 한가지는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 위하여 마련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형제를 위해서 주께 받힌 것입니다. 이것 세  가지입니다.

 세 가지 금하시고 세 가지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간추려 말하면 이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있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서 온 사람이 사나이  수만 해도 한 오천쯤 됐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신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이 보내서 분명히 온 사람들입니다. 주님과 자기들을 찾아서 온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날은 저물어가고 그들은 다 시장해서 곤고함을 당하고 있고 그  곤고함을 묵살할라고 해도 날은 저물어져가지 앞으로 점점 더 곤란하게 될  것이지 또 저희들이 무엇을 가지고 도울려고 한다고 해도 이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그만 값으로 산 그 떡이 있어도 안 될 터인데 또 자기네들에게는 그만한  것을 가진것도 없습니다. 또 빈들판입니다. 이러니까 거기 대해서 아무런 책임을  질 수가 없는 형편이요. 없는 처지요. 또 없는 자신들입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주님을 모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무리들이 있습니다.

아무나 따나 모든 사람을 다 망라해서 전인류 전부가 다가 아니고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무리에게 뿐이지 이  무리외에도 사람이 수억도 넘지만은 그 사람 다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에  주님을 모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서 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게서 생각해야 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고 자기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있습니다. 보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보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다 모두 다 자기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그런  모든 어려움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서는 알기 쉽게 하나 형식 계시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하나 하나님이 예정하셔 가지고 계시로 사용하셨지마는  어쨌든지 그들은 배고파 어렵든지 사건에 어렵든지 뭐 신체상이나 무엇이나 아  어려움은 다 한가지인데 어려움 중에 아마 최고로 어려운 것은 배고픈 어려움일  것입니다. 이 어려움을 다 당하고 있는 사람들인것은 틀림없습니다. 주님을 모신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은 다 어려움을 가진 사람들이요. 또 이  사람들은 분명히 그 어려움을 다 만족히 면했습니다. 다 배가 불렀습니다.

만족히 면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발견해야 됩니다. 자기는 뭐 그 사람에게 어려움이 있는 걸 분명히  알기는 알지만은 영적 어려움이나 육적 어려움이나 사건적 어려움이나 그 인격적  어려움이나 어떤 문제적인 그런 어려움이나 그 모든 인질과 인성이 허무해서  그런 어려움이나 무엇인가 어려움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 사람들인데  우리는 이 제자들과 같이 생각하기 쉽습니다. 인간을 망치는 그 역사들은 점점  강해지는 그것이 우리 눈에 보여 집니다. 아 저 사람이 저런 어려움을 만났는데  앞으로 가면 갈수록 더 어려워지지 뭐 해결될만한 그런 아무런 것이 보여지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다 우리에게 옵니다. 그 문제들을 가진 사람들이 다  우리에게 옵니다. 이런데 환경은 빈들판이니까 안 됐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환경이나 모든 처지나 형편들이 그것을 해결해 줄만한 그런 모든 형편과  현실이 배경이 안되어 있고 또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지고 해결해 줄라고 해봤자  그것 가지고 되지도 안하고 이러니까 그 어려움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고 또  그것 하나를 한다고 해봐도 온 세상에 지금 태평양에 참 돌하나 던지기고  낙동강물에 소금 한 주먹 던지기지 그까짓거 해봤자 되지도 안하고 힘도 없고  환경도 이치에 맞들 안하고 또 점점 세상은 악화되어 나가고 있고 자신의 힘은  없고 이러니까 우리는 필연적으로 할 길이 그것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모든  사람이 다 그런데 저 혼자 무슨 선을 행했다고 사랑을 행했다고 뭐 동정을  하겠다고 그 사람을 책임져서 한번 좀 봉사를 해 보겠다고 희생을 해 보겠다고  해봤자 아무리 계산을 대봐도 안되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할라고 나섰다가 다  낙망하고 다 제 짐을 제가 지고 가도록 제 일을 제가 행하도록 다 각자 자기  부담으로 이렇게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처지요. 우리들의 실력이요.

또 세상이요. 또 죄악이 관영해가는 이 시대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제자들이 그  어려움을 어려운 줄 알고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마는서도 안되니까 아무리  해봐도 안되니까 자기네들로서는 해산해서 보냅시다하는 그것을 주장했던 거와  같이 우리들도 이렇게 되어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처음에 약간 시작하다가 그만  낙망해 버리고 다 포기해서 처음에는 무엇을 할 것 같이 날뛰었지만은 얼마  안가서 다 자포자기하고 안됐다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이  모든 말씀은 하나의 이상적인 꿈을 꾼 것이지 실행은 될 수없는 일이다 해서  거의가 다 낙심하고 모두 다 제일 제 하는 것으로서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는  사람들을 상대하는 것처럼 그런 일반적인 사람으로 다 돌아가고야 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인 것을 여게서 기르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이 이렇게 주님에게  간청한 것은 주님이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거부했습니다. 기뻐하지  아니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하나님이 내게 붙여준 사람인줄 내가 분명히  알아도 그 사람에게 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면 해결해 주고  싶지만은 우리 자체의 실력이 모자라고 뭐 모든 경제면이나 활동면이나  사건면이나 지능면이나 아 도덕면이나 무슨 감화면이나 어떤면이라도 우리  자체에게 힘이 없고 또 환경을 둘러보면은 형편이 불가능한 그 환경이 되어있고  또 악에 세력은 점점 강해져서 내가 하나하면 부수는 악의 세력이 열이나  스물이나 와서 부딪히고 그 사람을 하나 바로 지도하라고 보면 깨와서  넘어트리는 것은 오히려 3배, 4배, 5배, 십배이라고 있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이 다 그만 이일을 시작했다가서 낙망하고 그만되는대로 그저 세월에게  맡겨서 자기 하는 일 자기가 해서 그저 경험 체험해서 스스로 어떻게 되도록  이렇게 하고 우리가 졌던 그 짐을 벗어놓는 그 일을 하기 쉽습니다.

 빌립이 생각한 것처럼 이것을 이 문제를 해결해 줄라하면은 이 내게 오는 이  사람들의 경제문제를 해결해 줄라고 해도 경제가 얼마만큼 있어도 이기 불가능한  일인데 또 이들에게 이 모든 난제 해결을 해줄라고 한다고 해도 내게 무슨 큰  권세나 있든지 무엇이 있어도 될까 말까 한데 또 이들을 무슨 사람을 개과천선을  시킨다고 하더라해도 이것도 무슨 내게 갖다가 어떤 큰 능력이나 있어야 될  터인데 그런 것도 없을 뿐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한다 며는 참 자기에게 없는  어느 정도의 얼마만이면 그런 그 힘이 있어야 해결 할 터인데 그것도 없지.

이러니까 이일은 이만한 힘이 있어도 해결 못 할 터인데 내게에 아무런  힘없으니까 나는 해결할 수 없다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인줄 알고 우리는 어짤수  없는 필연한 일인줄알고 이것을 부끄럽지 않게 이것을 아무런 우리가 무슨  책임회피나 그런 잘못이 없는 것인줄 알고 우리는 당연한줄 알아서 이런 것을 다  벗어버리게 된것입니다. 안드레는 거기 조그만한 것이 있었는데 이것가지고  할라고 해봤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할지라도 이것 가지고는 도무지 이들에게  대해서 시장을 면하거나 배를 불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요 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 할지라도 또 우리에게 약간의 그 경제면이라면  도덕면이라면 지능면이라면 그 회개면이라면 거기 대해서 내가 약간의 노력할 그  자원이 있기는 있지만은 이것과 하나님의 돕는 은혜가 있기는 있다 할지라도  이것 가지고는 불가능하다해서 이 제자들이 다 모조리 그 무리들을 해산해서  보내는 길 밖에는 없다 하는 것으로서 아 제자들도 빌립도 안드레도 이렇게  결론을 지은 것과 같은 이런 결론을 지운 것이 다 우리들의 신앙이요. 우리들의  그 현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제자들과 정반대입니다. 그 무리들을  책임지시고 놓지를 안했습니다. 제자들이 말하는 데데 거기 설득을 당하고  거기에 이연하다고 피동되서 그러면 해산해 보내자 가다가 허기가 자서 뭐  처박히든지 어떻게 되든지 그 뒤는 우리는 보내기만하면 그만이니까 보내자하는  그런 무책임한 그런 일을 하지 안하고 잔디위에 앉히라 하고서 책임을 지워서  책임을 지시고 해결을 줬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제자들과 같이 모든 무리들을  불가능한 것으로 낙망하고 여게서 책임을 벗는 여기에 머물기 쉽습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행위입니다. 이거는 자연인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후에는 우리가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이 예수님과  상관없는 원수된 우리를 책임지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도 남김없이  대해서 우리를 거기서 구출해 주신 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이 됐습니다. 구속을  받은 후부터는 우리는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어떤 이웃관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자가 되었느냐 하면 이웃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하는 이 법칙이 우리의 법칙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이 법칙이 우리 법칙이  됐습니다.

 예수님의 피에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이 법칙이 우리 법칙됐습니다. 눈은 눈을  갚고 이는 이로 갚고 원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사랑한 자는 사랑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당연한 이 법리인데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이것 때문에 영생의 구속을 입은  이것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살수 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웃을 내나 꼭같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거와같이 그러면 내가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위해서 내가 사지에 빠졌을 때에 어떤 어떤기 있을때에 내게 있는 힘을 남겨  두고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여 노력하지 안할 사람 없습니다.

 이와같이 이웃에게 내게 있는 그 모든 면으로 힘이 떨어지기까지 있는 대로  다해서 이웃을 구원하는 이것이 우리에게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인해서 책임이 지워졌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을 입기 전과  다릅니다. .이웃사랑하기를 자가와 같이하라. 이것이 구속입은 우리들에게 주신  사는 법칙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이 짐이 우리에게 지워졌고 또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이 법칙을 우리 법칙으로 삼아서 살게 됐습니다. 이것이  영생하는 법칙입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렸으니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다. 이기 무슨 무슨 특수한 일이라 뭐 기이한 일이라  선한 일이라 독특한 일이 아니라 주님이 나 위해서 원수된 나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셔 가지고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이 법칙의 생명을 받았고 이제도의  생명을 받았고 이 본질 본성에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구원의 본질  본성대로 이 법칙대로 살아야 되는 우리기 때문에 우리는 받은 도가 받은 생명이  받은 법칙이 본질과 본성이 이웃을 위하여 내 모든 것을 다 마지막 생명까지  이것을 주님이 나 위해서 하신 것처럼 내가 하는 것이 이것이 당연한  법리입니다. 당연한 법리.

 이래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함으로 이 모든 것을 다해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구속받은 자의 당연한 생에 법칙입니다. 본질과 본성입니다. 불한당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보고 아 사마리아 사람이 보고 레위 사람도 제사장도 다 버리고  자나 가는 데 그 사람을 자기가 탔던 짐승에게 태우고 자기 위해서 마련했던  치료의 것으로 다 씻어서 깨끗하게 치료했고 또 주막에 맡겨서 자기 위한 노비를  다 거기 다 맡겨 간호하라고 돌아올 때에 부족하면 또 갚겠다고 이 비유도  이것도 구속받은 우리들에게 주신 법칙입니다. 생각에는 어느 사람이 이웃이  되겠느냐. 사마리아 사람이니이다. 너도 그렇게 해라. 구속받은 자들은 이것이  우리의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분담시켜준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에게 분담시켜준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서부교회교인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담시켜주신 사람이요.

나는 주님모신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이 무리들을 보내주셨고 내가 어데 집회를  가면은 고거는 일시적으로 그때에 내게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 보내주신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게 칙임지운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탔던 짐승도 그 환자를 태워야 되겠고 나 위해 예비했던  모든 치료재도 써야 되겠고 나 위해서 마련했던 모든 세상 생애의 것도 다  받혀야 되겠고 또 그래도 내게 남은 것 있으면 다시 바쳐야 될 이것이 내게  의무요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에게 된 의무가 각각 분담된 줄 압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우리들은 구속받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생애와  법칙과 본질과 본성과 우리의 본질과 본성과 사명이 다릅니다. 이래서 이  제자들과 빌립과 안드레가 그렇게 말해서 해산해 보내자 하는 그것은  저희들로서는 당연한 말입니다. 저희들로서는 저희들 단독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말에 보면 그들과 그들이 아주 빈약한 식물이지만은 그것과  주님과 이 셋이 합했을 때에는 충족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안 믿는 사람들과 꼭 같은 우리로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주님을 모신 나에게 무진장의 주님이 계시는 이 주님을 모신  나에게 그 무진장의 주님의 것이 나를 통해서 얼마든지 충만히 나타날 수 있는  이것이 우리 기독자들인데 이것을 주라고 이것을 주게 하실려고 하나님께서는  보내주신 그 무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한 사람. 어떤 사람에게는 열 사람. 어떤  사람에게는 백 사람. 어떤 사람은 천 사람, 만 사람. 분명히 그 숫자가  있습니다. 있는데 우리가 무진장의 무진장의 그 창고와 같은 저수지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돕는 은혜 이 은혜를 생각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보내신 그 사람과 나와 이 모든 배경인 환경인 이 세상과  방해하는 악의 세력들과 이것만 우리가 계산해 가지고 낙망하고 회피하고  하면서도 이거는 지당한 일이요. 우리가 죄짓는 일이 아니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이 아니요. 하나님을 거역하는 일이 아니요. 불의를 불법을 행하는 일이  아니요.

 이것은 우리로서 지당한 일이 되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현실을 이대로 처리하는  우리들이 되는 이것을 경계해서 이것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아니하고 우리가  분명히 할 수 있는 책임을 회피한 것이요. 하나님이 구하라고 하나님이 구할  것을 주시고 구하라고 하신 것인데 고장은 제자들뿐입니다. 고장은 다른데  하나도 없습니다. 제자들입니다. 보내신 하나님도 잘못 보낸 것 아니고 또 거기  대해서 넉넉하고도 남은 것이 열 두 바구니나 되는 넉넉히 해결 짓고 남음이  충만한 그만한 자원을 가지시기도 하신 하나님입니다.

 또 거기에 아주 얼마 안된 그 약소한 자원인 식물이지 마는서도 그것도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그만한 자원도 해도 되고 또 하나님도 넉넉히 주실  하나님도 계시고 또 보내신 그분이 하실 그분이라. 넉넉히 먹일 그분이 보냈고  이러니까 거기서 재자들만 자기 할 일을 했으면 하나님 영광 받고 그 모든  무리들이 하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과 예수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을 알아서  그들이 다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고 하나님을 따른 사람도 다 영광을  돌리고 존대히 존대하고 예수교라 하는 이 교회가 이렇게 다 존귀함을 받을 수  있는 있는데 제자들만이 자기네들이 할일을 하지 아니하고 해서 이일을 낭파가  됐던 것입니다.

 그 흠점은 제자들뿐입니다. 그럼 제자들이 어떻게 계산해서 그렇게 됐던가?  제자들이 계산은 딱 들어맞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구속의 빛을 예수님의  사랑의 빛을 예수님의 구속을 입지 안했으면 계산이 딱 맞습니다. 또 하나님의  돕는 은혜 우리의 근원이 포도나무가 되는 하나님이 없으면 계산에 맞습니다.

 그러나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이렇게 회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구속을 입었기  때문에 회피를 못합니다. 무책임한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모지란다는 것이 그것이 다 불신죄지. 그것이 다 불신의 죄지. 그것이 정당사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누구냐? 이것이 예수믿는 사람이지만은  예수님의 구속을 벗어 버렸고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고 안믿을  때와 꼭같이 자기 단독과 모든 사람의 단독과의 인간과 인간대 인간과 인간대  죽은 송장과 송장대 이러니까 거기는 사망 역사외에는 아무것도 있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을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전부의 전부가 되신 우리의 배경이 되시는 은혜의 주님을  잊어버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에게 창설된 사랑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관계가 맺어진 보배로운 이 믿음 이 두가지를 이 제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주님이 거부했습니다. 주님이 용납지  안했습니다. 인정치 안했습니다.

 우리가 현실 현실에서 이런 실수, 이런 망령, 이런 냉정, 이런 불신,  이것으로서 주님의 구속을 벗은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이일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찾아서 우리는 회개를 해야겠습니다. 분명히 주님을 모신 제자들을 찾아온  사람들 입니다. 그 오천명이라는 사람은 달리 온것 아니고 제자들이 모시고 있는  그 주님보고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 보고 찾아왔소. '야 예수믿는 제자들이 어디로 가지? 아 그  제자들이 아무데로 가더라' 그 5천명은 예수님을 모신 그 주님을 찾아서 온  사람들이요.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들이요. 목적은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하나님으로 저들의 근본을 전부를 삼는 믿음과 이 두가지의 이 구원의  복음을 이 두가지의 양식을 그들에게 먹여줘서 그들이 만족하고 선지자들을  선지자를 찾도록 선지자를 만나도록 이는 정말로 하늘에서 보낸 선지자로구나  선지자를 알아서 선지자에게 딸토록 이것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것입니다.

 그 공작을 꾸민것도 영원 전 하나님께서 꾸미셨고 또 때가 되매 그런 모든 것을  창조해서 그 무둔 구비한 요소들을 구비하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시요. 거기서 해결을 짓게 하실려고 그 목적으로 그일을 이르키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분명이 범죄를 했습니다. 분명이 주님이  저희들을 사랑하신 그 사랑을 버렸습니다.

 그 사랑에 성질에 정반대되는 사람이였고 주님이 책임지신 그 책임을 짐을 받은  빚진자들이 그 무리에게 대해서 책임진 것을 이저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도 이저버렸고 저들에게 지워진 책임도 이저버렸고 그래가지고 그 무리를  해산시켜 보내자하는 그 망령을 부린 그 죄를 우리가 여기서 요 도리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 도리에서 요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요 두가지 죄를 깨닫고  우리가 요것을 회개해야 되겠습니다. 요것으로 더불어 싸워야겠습니다.

 주님이 내게 보낸 자가 누군가 하는 이것을 우리는 확실히 구별해서 찾아야겠고  이 무리를 우리는 책임져야 합니다. 이래서 내가 위해서 목숨까지 바리야 할  이일 내가 위해서 목숨까지 바리야 할 무리가 있으니 마음을 다하고 생명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책임져야 될 목숨까지를 버려서 내게 있는 나  위해 준비한 모든 것을 이 사마리아 사람같이 다 드려서 이렇게 할 내 이웃을  하나님이 보내신 이웃이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되겠습니다.

 이 이웃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 이웃에게 대해서 이 제자들과 빌립과  안드레와 같은 이 세 가지 방법을 우리가 쓰고 있는 것을 우리의 생애에서  찾아야 되겠습니다. 찾아서 이것을 우리가 회개해야 그 다음 순서가 나옵니다.

요것을 요것을 우리 회개해야 됩니다. 그럴 때에 요것을 고쳐서 회개 했을 때에  능력은 나왔습니다.

 어린 아이는 주님이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피동되서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처럼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고 이러니까 주님의 사랑받아 구속된 자기는 또  자기가 이웃을 위해서 해야되고 요 빚을 그러기에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빚졌다  죽자건 하고도 마지막에 순교할 때에 그도 이제는 관주만 부으면 된다 했습니다.

빚진자라 말은 아직까지 다 못줬다는 그것을 그는 발표했습니다. 이래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신 그대로 우리도 내게 있는 것을 다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어떻게 하신 그대로 나도  이웃을 사랑하는 이 사랑으로 그 아이는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에게 받쳤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이 자기를 사랑한 것처럼 자기 다해서 주님을  사랑했고 주님이 다해서 자기를 사랑한 그 법칙으로 구원 얻었기 때문에 그  법칙을 배반할 수 가 없어. 그 법칙으로 구원얻었기 때문에 주님이 원수인  상관없는 원수인 나를 당신의 모든 것을 다해서 나를 사랑함으로 내가 구원얻은  이 법칙으로 내가 구원얻었기 때문에 나는 그 법칙을 내가 배반할 수 없어. 그  법칙으로 구원얻었기 때문에 나도 그 법칙으로 내가 상관없는 원수를 위하여 내  모든것을 다하여 기울여 원수를 구원하는 그것이 이제 이 생명에 내가 구원받은  이 법칙을 내가 지키는 것이요. 이 구원받은 자에 구원 행위인 것입니다.

 요 두가지 사람. 고 어린 아이가 받힌 요것은 오늘 구속받은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으며 내가 주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될긴가?  주님이 나를 어떻게 원수된 나를 사랑하셨으니 이 생명의 법칙을 받았으니까  내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그를 구출할긴가?' 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 사랑하는 요 두가지. 요것을 우리가 깨달아 요 사람이 되어 요 동기에서 요  목적에서 요 순진에서 썩인 것이 없이 순전히 요 두가지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한 구속으로 인한 당신의 희생으로 인한 그의 은혜로 인한 명예나 지위나  권세나 부슨 영광이나 승리나 그런 것 보는기 아니고 순전히 주의 피와 살로  인한 요것으로서 고 방법 고 성질대로의 우리가 되어가지고 아이처럼 나 위해서  마련한 것 나 위해서 마련한 것 나 하나에게만 족하지 다른데 여유없는 나 하나  밖에는 쓰기에 더 넘을 것이 없어. 나를 위해서 마련된 것이고 분명히 내것이고  나를 위해서 마련된 것이고 분명히 내것이고 내가 써야하고 나 하나 쓰면 족해  남은기 하나도 없어. 남을것이 하나도 없어. 우리의 가진것은 이것입니다.

 그 아이가 자기 한끼 먹으면 되는 오병이어와 같이 우리는 몸도 내가 다 써야  되고 지능도 내가 다 써야되고 재물도 내게 내가 다 써야되고 오만것 다 생명도  내가 다 써도 남을 것 하나도 없습니다. 나 하나를 위해서 있고 내것이고 또  내게에만 그저 겨우 족하지 남은 여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요.

 이러나 요것을 요 두가지 사랑으로 아무것도 썩인 것 없이 요 두가지 사랑으로  요것을 주님에게 받혔을때에 요것을 두가지 사랑이라도 제가 직접 이웃을  사랑해서 생명을 버린다 돈을 버린다 소용없습니다. 그 아이가 이웃을  사랑함으로 제 도시락을 줬으면 이웃 사람 아이하나 배부르면 아이 하나 먹으면  족했지 무슨 갖다가 가치있습니까? 요것을 일단 주님에게 받혀 주님에게  받혀놓고 주님이 이제 쓰셨습니다. 적지마는서도 요것을 주님에게 다 드려  살든지 죽든지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내가 주님에게 딱 받혀 주님이 쓰고저  하실때에 쓰시고 보관하고 있을때에 보관하시고 다 쓰실라면 다 쓰시고 당신이  때를 따라서 우리엑 영감대로 요렇게 사용하라 저렇게 사용하라 하는 고대로  사용하는 요 지극히 작은것 같지 마는서도 이것은 그에게 해당된것은 천이고  만이고 억만명이라도 먹고 더 남습니다. 여게는 자기에게 해당된 그 무리에게는  많든지 적든지 충족하고 남음이 있는 요것을 가르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제자들과 같이 이렇게 사랑없는 믿음없는 무책임한 요것을  우리가 회개하는 것이 신앙의 첫 발자국입니다. 요것을 회개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피를 입었으면 요걸 요생활을 회개해야 됩니다. 이러고 요 아이와 같이  요렇게 순진하게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니까 야 주님이 어디 먹을 것  있는가 지금 어데 지금 찾아 보라고 하신다. 이러니까 고거 알고 나서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 아이 뭐 그 아이에 대해서 이름이 안나타 있어.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 잊어 버렸어. 자기  잊어 버리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자기만 되가지고 자기 위한것 미약하지  마는서도 고것을 주님의 손에 받혀서 주님이 축사하시고 때어 줄때에는  무한했습니다. 요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두가지 이일. 사랑, 믿음없는 것을  회개를 하고 책임을 질것.

 지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자기에게 미약한 것이지만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하고 당신에게 받힌 요것은 무식해도 병신이라도 늙어서 다  죽어가는 사람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요렇게만 해가지고 받혀진 순전히 요것이  됐을때에 주님은 이것을 가지시고 그때에 찾아온 무리. 그 아이가 있는 그 무리.

아이의 이웃이 된 그 이웃. 제자들의 이웃이 된 이웃. 그 전부에게 충족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요걸 우리가 믿어야 하겠습니다. 요걸 믿어야 합니다.

요것이 예수교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마다 위대한 일들을 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없는 제자들과 같이 어려움당한 고거와 자기에게 있는 요거와  환경이 빈들판처럼 모든 맞지 않는 환경의 조건들과 악의 세력 깜깜 어두운 악의  세력들과 요 네가지만 합해 가지고 결론을 지우니까 책임을 질수 없고  해산밖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이외에는 계산이 안납니다. 이외에는 계산이  안납니다. 우리는 요 네가지로만 계산하고 살면 우리는 불신자입니다. 우리는  구속을 벗은자들입니다. 여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버리고 우리가 주님을 어떻게 구원을 받았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요것이 되  주님이 날 어떻게 사랑했는가 고대로 나도 주님을 사랑하는 요기 있어야 되겠고  주님이 나를 어떻게 사랑하는 요것을 나도 이 법칙으로 살았으니까 나도  이웃에게 이 법칙으로 해야될 것 아닙니까? 주님이 이 법칙을 했기 때문에 이  법칙가지고 내가 살았으니까 이 법칙으로 살아났으니까 나도 이 법칙으로 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이웃에게 대해서 어떻게 사랑할 것 요라고 난다음에 작든지 많든지  자기에게 있는것 주께 받혀 '내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하고 받혀놓고 주님이  또박또박 현실을 주시면서 현실 현실에 주의 인도를 따라 요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현실 행위요 요것이 내게 보낸 내게 맺겨 주신 이웃을 구원하는  양식을 먹이는 것인줄 알고 현실 현실에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또박또박 하는  요것을 주는 것입니다. 요럴때에 그 미약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은 거기에  해당된거는 다 충족을 줬습니다. 다 배불렀습니다. 그 아이도 배불렀오. 그  아이가 그때에 내지 아니하고 했으면 주님이 요구하는데 내지 아니했고 모든  이웃에게 대해서 냉정스럽고 저만 꼬박꼬박 먹었으면 이 역사가 있을긴데 제가  들어 안했다면은 그 수치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렇게 함으로 저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교입니다. 심으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준다. 그 아이가  배고팠습니까? 그 아이 배불렀고 안먹어도 배불렀을 것이요. 제가 낸 오병이어에  주님이 축사하셔가지고 이렇게 떼줘도 많이 남는다면은 저는 안먹어도  배부르지요. 공중에 뛰오를만치 기뻣을 것입니다. 즐거웠을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참 형언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그길 걷지 안했으면 그 아이의 후회가  뒤에 알고 보면 얼마나 컷겠습니까? 얼마나 추접합니까? 응. 자기도 만족했고  모두 다 만족했습니다. 이렇게 예수교인이 한사람이라도 이렇게 살든지  한가정이라도 이렇게 살든지 고속에 명예위해서 하고 지위위해서 하고  영광위해서 하기 때문에 절 좀 알아주면 열심히 하는 같고 조금만 제게 치이면  주님위해서 했으면 변동될기 뭐입니까? 어. 이런 더러운 잡탱이가 섞겼기 때문에  하나님 재물로 받지 안하는 것이지 요렇게 순진하게 재물되었을 때에 거기는  다니엘로 통해서 다리오 파사나라에 모든 신앙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나라가  놀래고 하는 것처럼 요셉을 통해 애굽나라에 충만한 것처럼 고 한믿음의  사람으로 말미암아 그 지역에는 아 선지자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누구신것과 예수교가 뭐이라는 것과 믿는 사람이 어떻다는 것으로  세상에 빛이 되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리라 할 수 있는  것인데 믿는 사람이 맛잃은 소금처럼 되기 때문에 그렇게 가증스럽고 가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억찌로 임금삼을려고 임금삼을려고 하는것을 주님은 보시고 피해서  따로 산으로 갔습니다. 이와같이 이렇게 사는 믿음있는 그곳에는 예수교를 천대  안합니다. 멸시 안합니다. 반드시 이런 믿음이 있는 돌리에는 믿음있는 교회에는  믿음있는 그 사회에는 믿는 사람을 절대로 멸시 안하고 높입니다. 신임합니다.

그를 세상권세를 줄라합니다. 세상에서 존대시킬려합니다. 그럴때에 믿는  사람들이 영광을 하나님에게 끝까지 돌리고 자기를 숨기지 못하고 이렇게  성령으로 이일하고 난다음에 제가 세상을 탐하고 세상영광, 세상존대 이것을  탐해가지고 슬그머니 세상이 억지로 임금삼을려고 하는 이 대우를 할때에 이  대우에 나아갔다가 다 떨어지고 박살이 되고 맙니다. 응. 이렇게 살고 임금  삼을려할 때에 거기 응하지 안하고 피해서 따로 산으로 가는 요 생활, 처음에  버릴 것 버리고 행할것 행하고 대우할때에 대우받지 안하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요렇게 요 세 가지로 나아갈때에 거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과 평강이 충만한 것이 이것이 예수교인데 요 제자들이 요일을 꼭  방해했던거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이 이 일에 대해서 방해한 것이 얼마나  되는지 요것을 우리는 여기서 찾아서 회개를 합시다. 하나님께서 보내지 아니한  사람을 제가 공연히 맡아가지고 날뛰는 것도 허영주의자요. 어리석은 자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붙였는데 자기가 책임회피하는 것도 이것도 하나님 앞에 진노받을 자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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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98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장 22절-24절/ 1986. 3. 23.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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