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2 00:52
옛사람-새사람
1987. 7. 13. 새벽 <월>
본문:로마서 6장 5절∼9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내가 선교사를 많이는 못 봐도 고신에 있을 때에 오는 사람들을 많이, 많다 할 수는 없지마는 그래도 여러 사람을 접해 봤습니다. 또 고신에 올 뿐만 아니고 각 기관에서 외국, 대개는 미국 사람, 뭐 호주니 그런 데 있는 사람들 청해 가지고 부흥 강사로 청해 가지고 그렇게 부흥회하는 것도 많이 봤습니다.
봤는데, 옛사람 새사람 이것을 가지고서 설교하는 사람은 내가 미국 사람으로서 하는 것은 이 사람이 처음입니다. 내가 어제 그랬더니 거게 있는 사람이 그 학교에 교장은 참 아주 더 설교를 잘한답니다. 이 사람은 뭐 거기다 대면 그런데, 그 사람은 옛사람 뭐 새사람 하는 거게 대해서도 잘하는지는 몰라도, 잘한다 하는데.
그래서 그 신앙 사상이 그렇게만 들어가면 실수해도 일어설 수 있고 또 아무리 일어서서 자라가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넘어져도 일어설 수 있고 끝까지 넘어져서 탈선돼 나가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구별하지 못하고 신앙 생활은 그것은 아무리 잘나간다고 해도 어느 때인가 넘어지기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어제 우리는 생전 그것을 하지 못하고 또 인제 통역하는 것을 그것을 우리 교회서는 뭐 그렇게 한 일이 없고 그전에는 내가 일어서서 할 때니까, 강단에 강단만 이래 있기 때문에 책상 하나 갖다 놓고 이래 하면 됐는데 어제는 둘이 한테 이래 마주 곁에 서야, 붙어 서야 말 소리가 들리고 어째 됐는가 그래 해야 된다 하는데 그 붙어 서구로 할 수 있어야지, 내 의자는 양쪽에 이래 해 놔서. 거게는 그래도 좀 뚱뚱한 사람이 두 사람이 들어갈 수가 없어.
이래서 나는 옆에 이래 나란히 옆에 놓은 걸 또 좀 강대상을 가까이 놓으라 했더니마는 말소리가 뭐 전연히 들리지 안하고 찍해야 들리기를 저쪽에서 소리해 가지고 저쪽에서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가 겨우 들리고 이라니까, 통역하는 게 듣지 안하니 그 언제 들려 올 때에 오고 난 다음에 할라 하니까 늦지 이래서 어제 욕을 봤다고서 하는 말 들었습니다.
어쨌든지 그래 윤곽만 들으면 되는데, 어제는 그분이 대단히 보니까 믿음의 사람이고 또 옛사람 죽이고 새사람으로 사는 일에 많이 힘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뭐 모든 것을 볼 때.
그래서 마음에 좀 늘, 여게 있으면서 미국에 있는 많은 신학교들에 대한 그런 사람들을 이래 봅니다. 거게서 공부하고 온 사람도 보고 또 거게 속한 모든 교수들이 와 가지고 이래 하는 것도 들어보고 이라면 참, 신학교도 다 그래요.
처음에는 진리로 시작했다가 나중에 가면 하나님의 지식인 진리는 차차 멀어지고 그 학자들이 말한 그 말을 자꾸 더 강조하게 돼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학자들마다 제가 알고 있는 그 학설을 주장할라고 애를 쓰고 또 그 학설을 공부하도록, 딴거 공부할 여가 없이 그것만 공부하도록 자꾸 이래 숙제를 내서 이래 하니까, 시험쳐서 낙제하면 안 되니까, 그거 할라고 하다 보니까, 하나님 말씀을 어떤 사람은 신학을 그 신학 사 년을 공부하는 데에 신구약 성경 말씀은 몇 장도 못 봤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거 공부할라 하니까. 그래 가지고 사람들 다 죽여버려요.
그래서, 예수님 당시에도 장로들의 그 유전, 장로들의 그 유전을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고 예수님께서 “너희들이 사람의 유전은 잘 지키면서 하나님 말씀 지키지 않는다” 하는 그것을 예수님이 말씀한 거와 같이 아주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말에 ‘신학 사 년에 자기가 신학교 들어갈 때의 그 믿음을 뺏기지 안하고 영감을 뺏기지 안하고 나오면 그 배운 것이 거기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성공을 할 수 있고 신학 사 년에 입학할 때에 가졌던 영감과 성경 지식을 다 빼앗기고 인간 지식과 바꾸어서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은 망한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에도 본과생은 별과생보다 어학을 공부할라 하니까 과목이 많고, 또 본과생 아니라도 자기가 비중을 두기를 그 모든 신학자들이 깨달아 가지고 가르치는 그것을 성경보다 비중을 높게 가치를 높게 이래 두고서 거게다가 주력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또 어학에다 주력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러니까 사람은 유한하니까 같은 사람으로서 어데다가 자기가 배움의 비중을 두느냐? 하나님 말씀과 그보다도 성령의 감화 감동의 영감에다가 비중을 많이 두고서 거게다가 기울이는 사람과 다른 데 기울이는 사람이 아주 차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학교 다닐 때도 보면 평소에도 설교 딱 떨어지면 차차 다 가 버립니다. 나중에 보면은 있는 학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보면은, 저 기도하다가 나중에 보면은 하나도 없고, 저는 이미 밥이 됐다고서 이래 종을 치고 이라면은 또 다음 시간이 있기 때문에 참 그때는 할 수 없이 기도도 옳게 다 못 하고 갔고 다른 사람들은 설교 딱 떨어지면 얼마 있다가 가 버립니다. 그 사람은 인제 공부하기 위해서 갑니다.
또 그라고 시험 칠 때가 되면은 새벽기도도 안 나옵니다. 이라면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깨우러 이거 모두 강사들과 교수들이 양사방 방에 다니며 깨우고 뭐 이렇게 해도 중간에 들려 가지고서 나오고, 나와도 그만 거기 가서 앉았지마는 공부에 마음이 있지 하나님 상대하는 예배에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라다가 그만 시간 되면 설교 마치면 그만 가서 공부합니다. 인제 이불 밑에 전구를 넣어 놓고서 푹 들러 쓰고 그라니까 불이 안 보이니까 등화관제 모양으로 그래 가지고도 하고 이런 사람들은 나와 가지고서 목회를 못 했어. 그러기에 본과생 쳐놓고 목회를 바로 해서 교회를 부흥시키는 사람이 별로이 없습니다.
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차차 차차 학교가 처음에는 영감과 진리로 시작하지마는 나중에 가면은 인간 지식만 소부락이 모여 가지고 있고 지식주의 지식 위주로서 이렇게 하지 영감이라 하는 것은 참 보기가 드물고 영감보다 그 생명은 더 귀한 것인데 그 생명 역사에는 아주 희귀해서 별로이 그만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데도 생명에 대해서 말씀한다는 것이 참 귀중한 일이고, 또 어제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를 들고 말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도개요서는 저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 생활하는 거게서 나온 건데 웨스트민스터는 저 영국에 있는 것인데 그 이름을 따다가서 미국에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라고 그 이름을 따다 그래 해 그렇지 미국에 그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리 신조를 말한 것 아닙니다.
왜 내가 이말 하는고 하니 잘못 들으면 ‘커브넌트 신학교도 내나 미국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그 신학교의 교리와 신조를 갖다가 가르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쉬울 것이라서 내가 말을 합니다. 그것은 미국에 있는 학교가 아니고 영국에 있는 가르침의 단체의 말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다 이 개혁교는 어데 있든지, 그 영국이 교리와 신조를 바로 가지고 신앙 생활 바로 한 적이 많습니다. 그 영국이 전도받기는 한 지금으로부터 한 칠백 몇십 년밖에는 안 됐는데 그때에 그 신앙을 아주 잘해서 세계가 다 영국 영토가 되고서 그렇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고 그라다가 영국도 차차 차차 이제 타락이 되고 타락이 되니까 영국과 모든 데서 청교도들 쫓아내서 쫓겨나서 미국으로 가 가지고 했기 때문에 그 신앙이니까 내나 그때에 들은 그 선조들이 들은 교리와 신조를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요새 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인데 오늘 아침에는 이것이 생각이 나 가지고서 이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하나뿐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뿐 아니고 옛사람으로 된 자기가 있고 또 새사람으로 된 자기가 있습니다. 옛사람으로 된 자기도 있고 새사람으로 된 자기도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옛사람 자기로 살기도 쉽고 또 새사람 자기로 살기도 쉽습니다.
그러면 옛사람 자기로 살던 이것은 뭐 대대로 우리 선조 타락 이후부터 옛사람으로 살던 생활이 계속해 내려왔고 새사람 생활은 말도 듣지도 못하고 그렇게 죽은 자손들이 많습니다. 이 새사람으로 사는 이 도리를 듣기 전에 죽은 사람들은 다 그 사람은 다 지옥 갔습니다. 우리 선조지마는 지옥 갔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대대로 옛사람으로 살던 피를 받고, 교훈을 받고, 유전을 받고 이래 살았기 때문에 옛사람으로 사는 생활은 내 생활같이 익숙하고 자기 생활로 인정이 돼지고 새사람으로 사는 생활은 자기 생활 아닌 남의 생활하는 것같이 어색하고 이거는 믿어지지도 안하고 또 살라 하면 살아지지도 안하고 그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옛사람과 새사람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그 구별을 잘 못 하고 또 옛사람의 행위와 새사람의 행위를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성경에는 뚜렷이 말해 놨지마는 어렵습니다.
또 그것도 어려울 뿐 아니라 옛사람과 새사람을 잘 모르니까 옛사람과 새사람이 바꾸어질 때에, 옛사람으로 살다가 새사람으로 바꾸어지고 또 새사람으로 산다고 시작했다가 옛사람으로 바꾸어지는 것이 이것이 번개같이 바꾸어집니다.
그 바꾸어지는 시간이 뭐 우리 이사 가는 거 모양으로 이것도 옮기고 저것도 옮겨 가지고 되는 것 아니고, 고거는 자기 마음 속에 있는데 아주 옛사람은 악령 악성 악습이기 때문에 요것도 아주 번개보다 빠릅니다. 또 새사람으로 옮기는 것도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이 새사람이기 때문에 또 이렇게 옮기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니까, 말 한 마디 속에 처음에는 새사람으로 시작했다가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것도 있고 또 말 한 마디 옛사람으로 시작했다가 또 깨달아 가지고서 한 마디 가운데서 새사람으로 돌아가는 일도 있고 이렇게 바꾸어지는 것이 빠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깨어 있으라” 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신 차려 있으라 말도 되는데 깨어 있으라는 것은 산 사람이 깨어 있는 것과 자고 있는 것 둘인데, 깨어 있는 것은 산 사람이 산 행동하는 것이 깨어 있는 사람이고 산 사람이 자는 것은 생명은 있어서 살기는 살아 있지마는 행동은 죽은 행동이라. 그러니까 암만 옆의 사람이 와도 모르지, 저 죽인다 해도 모르지, 무슨 말도 해도 가늘게 말하면 들리지도 안하지 순전히 숨만 붙어 있지 송장과 꼭 같은 그것이 자는 자 아닙니까? 이래서, 새사람과 옛사람을 구별하기가 어렵고 새사람의 행동과 옛사람의 행동을 구별하기가 어렵고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새사람은 속에서 뭐이 주장하며 옛사람은 그 속에서 뭐이 주장하는가? 이것은 더 보이지 안하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래서 “옛사람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과 같이 죽고” 그말은 예수님이 우리가 옛사람으로 살아서 멸망받기 때문에 옛사람으로 산 댓가를 그 형벌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고, 또 새사람으로 살지 못한 그 생활을 대신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또 옛사람으로 하나님과 원수된 것을 다시 새사람으로 하나님과 화친하는 이 화친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새사람은 어떤 사람인고 하니 죄에서 완전히 해방된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공심판에 통과한 의로운 사람이요, 또 하나님과 화친된 하나님의 자녀인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을 입어서 예수님의 것이 된 사람은, 예수님의 것이 된 사람은 새사람이요 예수님의 것이 아니고 자기 것으로 사는 것은 옛사람이요, 또 예수님에게만 복종하는, 예수님의 종이 돼서 예수님의 종이 된 자로 예수님의 종이 된 것이 새사람이요 예수님의 종 노릇하는 것이 새사람이요, 또 마귀가 자기 속에, 자기 속에 악령과 자기 중심, 악령과 자기 중심인 악성과 자기가 자기 중심으로 살아나온 그 모든 자기 중심의 버릇, 습성, 악습. 그것이 자기 속에 있는 것은 그것은 옛사람입니다. 그게 옛사람이요. 옛사람이요, 새사람은 어떤 것이 새사람인가? 자기 안에 우리를 대속하신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피와 성령과 진리로 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계시는 것이 그것이 새사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계셔서 우리의 주인이 되고 내 안에 내가 되고 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이것이 새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됐으니까 이제는 내 이 모든 지체가, 내 지체가 내 눈이나 손이나 발이나 내 지체가 내 지체가 아니고 예수님의 지체된 것이 이것이 새사람이요, 또 내 몸뚱이가 내 몸뚱이가 아니고 예수님의 몸이 되어 있는 이것이 새사람이요, 또 내가 이 세상 이 모든 땅에 있다가 없어질 거 이런 것들을 위해서 사는 내가 내가 아니고 모든 하나님과 인간과, 인간과 인간과 그 사이에 화친을 일으키는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 그것이 새사람이요, 또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옳은 도리를 전달해서 이 도리를 받아 가지고서 이 도리로 살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하는 이 선지자 노릇하는 것이 그것이 새사람이요, 이래서 모든 움직임이나 사람들을 대해서 움직이는 것을 평하는 것이나 모두 하나님 한 분의 단일 통치,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그때에 통일될 때에 그리스도가 왕이 되시는데 그리스도의 그 왕국의 통치를 지금 하고 그 통치에 따라서 그 통치와 하나되고 그 통치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 새사람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전부 다 영생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새사람이요, 그 새사람의 생활의 뭐이 새사람의 생활인고 하니 이 신구약 성경 법칙에 하지 말라는 것은 안 하는 것이 그것이 새사람의 생활이요 하라는 것은 하는 그것이 새사람의 생활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옛사람과 새사람을 똑똑히 알아야 되겠고 그걸 모르면, 요새 늘 말하기를 “너희에게도 싸움이 있으니 곧 너희가 네게 대해서 들은 바요 안 바라” 그 싸움은 무슨 싸움이라고 했습니까? 그 싸움은 무슨 싸움이라고 배웠지요? 뭐라 하노? 안 들려. 그 싸움이 무슨 싸움이지요? 누구하고 누구하고 싸우는 싸움이지? 너 똑똑히 말해 봐. 대내전은 대내전인데 그 뭐하고 싸워, 그라면? 자기하고 자기 아닌 것하고, 자기 아닌 거는 뭐인데? 그러면 그래 말해야지.
옛사람하고 새사람하고 싸우는 싸움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을 자기 아닌 것과 자기와 이래. 옛사람은 자기 아닌 자기입니다. 옛사람은 그놈이 뭐 한 놈인고 하니 참 나를 죽인 그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원수인 자기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라고 이렇게 많이 말해도 여러분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것은 왜 그런고 하니 하루 종일 스물네 시간이라고 하면은 그저 새사람 생각은 한번 기도할 때나 한번 뻐뜩 생각하고 항상 옛사람 그놈이 전체를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자기요. 옛사람을 죽이는 소리를 하면은 그만 분을 냅니다. 새사람을 살리는 소리를 하면은 그거는 자기와 상관없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꾸 우리가 늘 제일 중요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마음 가운데 생각하고 잊어버리지 않고 자기 마음 가운데 모시는 게 중요하다. 마치 생명이 속에 들어 있으면 그 사람의 이목구비 수족이 다 살아서 움직일 수 있고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은 그 사람의 이목구비 수족을 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은 죽고 만다. 생명 떠나면 썩는다. 생명이 들어오면 썩었던 것도 차차 차차 소생이 돼서 치료가 된다.
그러면 우리의 생명은 누가 우리 생명이라 했습니까? 큰 소리로 해 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을 자꾸 사모할 때에는 내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자꾸 내가 새로와지고 깨끗해지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주님을 잊어버리고 뭘 생각하면 자꾸 죽습니까? 옛사람은 한 말로 말하면은, 세 가지로 말하지 말고 옛사람을 한 말로 말하면 어떤 사람입니까? 아니야. 옛사람이 몇 가지가 합해서 옛사람이라 했지요? 손가락으로? 이건 다 세 가지 아네, 세 가지. 세 가지인데 세 가지가 뭐입니까? 세 가지를 한 마디로 말하면 뭐입니까? 악이요, 악. 악.
악은 뭐이 악입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또 자기 욕심, 이제는 예수님의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중심, 예수님 위주, 예수님 욕심, 예수님 소원, 예수님의 뜻, 예수님의 기쁨 전부 이거 가지고 사는 게 새사람으로 사는 것인데, 그러면 예수님이 대속해 줬기 때문에 그걸로 살면은 우리가 곤란합니까 좋습니까? 그걸로 살면, 자기 중심 이놈 죽여버리고 예수님 중심으로 이래 살면 기쁩니까 고통이 옵니까? 예? 이것도 안 살아 보니까 모르는 거라.
“육체의 생각은” “육체의 욕심은” 뭐라 했습니까? “사망이요” 육체의 욕심이 뭐입니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소원, 자기 욕심 그걸로 사는 것이 육신의 생각이요 육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또 “영으로 사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라” 영으로 사는 것은 뭐입니까? 성령으로 사는 것인데 새사람으로 사는 것을 가리켜서 영으로 산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살면 생명과 평강이니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 계명은 무슨 계명이냐? 서로 사랑하라는 이것이 내 계명이라.”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내 계명으로 살아라 주님 중심, 주님 위주로,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형제를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이래 살아라 하는 것은 주님 시키시는 대로 사는 것이요 주님이 형제를 위해서 생명 바쳤기 때문에 주님의 소원하시는 대로 사는 것이 그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렇게 살도록 너희들에게 말하는 것은 근심되도록 하기 위해서 한다고 했습니까, 뭣 때문에 한다 했습니까? “내가 너희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짜라고 말한다 했습니까?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려 함이라” 이러기 때문에 이 새사람으로 사는 생활은 살기 전에는 이 사는 것이 아주 죽는 것으로 보여지고 크게 해롭게 보여집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생활이 살기 전에는 죽는 것으로 보여지고 크게 고통으로 보여집니다. 그 고통으로 보여지나 살고 나면 생명과 평강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사는 이 생활을 살라고 할 때에 ‘나는 죽는다. 이러면 이거는 죽는다. 내가 손해본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는 그것이, 그것이 참 생각입니까 거짓 생각입니까? 참 생각이요 거짓 생각이요, ○○○씨? 거짓 생각이라. ○ 뭐꼬? ○○○씨가? 거짓 생각이라.
그거 좀 말하기가 좀 어려웠지? 내나 예, 그게 거짓 생각이 아니고, 그러면 그게 누구의 생각입니까? 새사람으로 참사람으로 사는 이 생활이 ‘내게 손해간다.
이라면 내가 죽는다. 내가 큰 낭파당한다.’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그것이 바른 평가입니까 삐뚤어진 평가입니까? 이러니까 도를 모르는 거라. 이것이 삐뚤어진 평가가 아니요 바른 평가입니다.
그러면 새사람으로 살면 ‘나는 죽는다. 나는 손해본다. 이래 절단난다.’ 그러면 절단난다 하는 거 그렇게 평가하는 것이 바른 평가입니다. 잘못 평가가 아니오.
그러면 새사람으로 살면 ‘그러면 나는 죽는다’ 하는 그자가 누구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자가 누굽니까? ‘새사람으로 살면 나는 죽는다, 나는 손해본다, 나는 절단난다.’ 그렇게 생각되어지는 그자가 누굽니까? 그러면 옛사람인데 그러면 옛사람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옛사람이 손해갑니까 유익됩니까? 손해갑니다. 옛사람이 죽습니까 삽니까? 그러니까 그놈이 말하니 그놈대로는 그게 옳은 평가요. 저 죽는 길 저 죽는 생활이요.
그러니까 옛사람이 이 새사람으로 살라고 하는 것은 살도록 협조하겠습니까 방해하겠습니까? 얼마나 방해하겠습니까? 얼마나 방해하겠습니까? 땀이 흐를 만치 방해하겠습니까 사람이 불에 들어가 가지고서 안 죽을라고 나올라고 하는 것만치 그만치 방해하겠습니까? 얼마나 방해하겠소? 제가 죽을 판이니까 제딴에 생명 다 걸어놓고 지금 방해하지요. 안 그렇겠소? 우리 안에 이런 적이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옛사람 새사람 요것을 구별하지 안하면 사람은 그 사람 아직 예수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거 내가 어제 뭐, 어제 통역이, 와 가지고 누가 와서 말하기를 ‘어제 통역하는 것 그것 다 취소할 수 없습니까?’ ‘왜?' `영 아주 들리지 안해 우리가 장치를 잘못해서 들리지 안하니까 그저 짐작하고 이렇게 통역을 했지 전연히 말이 안 들리니 안 됐다’고 그런 사람 있어.
‘그거야 뭐 들렸거나 말았거나 그거 상관없이 그저 옛사람 새사람 그것만 말하면, 그 사람에게 무슨 은혜 받아 가지고 그럴라 하는 것보다도 그 사람의 신앙 사상이 어떤가 하는 그것을 지금 보기 위해서 그랬는데 그 신앙 사상이 바로 된 걸 알았으면 됐다.’ 내가 그렇게 말하고 말았습니다.
보면은 옛사람이니 새사람이니 하는 거게 대해서는 일 년 내내 가야 강단에 한 마디도 없는 사람 있습니다. 없고 또 옛사람의 생활 이 새사람의 생활, 옛사람은 뭐이며 새사람이 뭐라 하는 그걸 알지도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경에 있기는 있지만 말 안 한다 그말이오.
이래도 어느, 이 서부교회 강단에서만 말하는 게 아니고 몇 군데서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 그래 깨달은 사람 있으니까, 세월이 지나가면은 차차 차차 옳은 것은 자꾸 전파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인제 오랫 동안 좀 얼마 있으면은 옛사람과 새사람이라는 이것이 강단에 가득 차게 될 것이오. 그러나 예수님만 더디 오시면 이게 되는데 예수님 빨리 오시면 다 헛일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우리가 새사람으로 살라고 할 때에는 새사람으로 살라 할 때에 ‘이라면 내가 죽는다, 이라면 내가 손해간다, 큰 낭파당한다.’ 하는 그자가, 그자가 누굽니까? 옛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그 옛사람이 그라면 참말로 새사람으로 살면 옛사람 제가 사는데 그렇게 보인 것입니까 참말로 죽습니까? 참말로 제가 죽기 때문에 죽는다 합니까 죽지도 안하고 제가 사는데 죽는다고 그리 생각합니까? 참 제가 죽기 때문에 죽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제가 사는데 죽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지, 사는데 죽는다고 생각하는, 사는데 백지 제가 몰라서 ‘나는 죽는다’ 이러니까 ‘나 죽는다’ 이러니까 막 못 살구로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 사는데 죽는다고 잘못 알고 그래 하는지 참말로 죽기 때문에 죽는다고 바로 알고 바로 말한 것인지? 바로 알고 바로 말한 것인지 잘못 알고 말한 것인지, 잘못 알고 잘못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러면 바로 알고 바른 말 한 것으로 이렇게 아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예, 그래 말하니까 알기는 아는데 잊어버리지 안해야 돼요. 안 드는 사람도 있네 보니까, 내가. 새로 한번 들어 봐.
‘새사람으로 살면 나 죽는다. 나 손해본다. 나 절단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생각하는 그자가 공연히 잘못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바로 알고 그렇게 생각한 것인지 잘못 알고 그렇게 생각했다고 생각하는 분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바로 알고 바로 생각한 것으로서 아는 분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뻐뜩 들어봐요, 뻐뜩. 눈 똑 뜨고 뻐뜩 들어 봐.
새사람으로 살면 영생으로 사는데 그렇게 저 죽는다고 속는다고 망한다고 이렇게 말해요? 그러면 그자가 누군데? 예? 우리 원수기 때문에 그놈은 우리 좋게, 예수 그리스도로 중생된 새사람 나 좋게 할라 하니까 그놈은 지금 싫을 수밖에 없고 나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면 그놈은 새사람 된 나와 반대니까 그놈은 내 원수입니까 나와 한편입니까? 원수입니다.
내 속에 있는 원수요, 가장 가깝게 있는 원수요, 간보다도 가깝게 있는 원수요, 폐보다도 가까이 있는 원수요, 그러면 내 속에 암병보다도 암병, 암병보다도 더 큰 원수입니다. 암병이 큰 원수입니까 옛사람 그놈이 더 큰 원수입니까? 옛사람 그놈은 일생을 망칩니다.
암병은 들어 가지고 있으면 그래도 암병 들어도 죽을 기한이 안 되면 안 죽습니다, 죽을 때가 돼야 죽지. 죽을 때가 돼야 죽는데 죽을 것이 만일 일 년이 남았다 하면 일 년 남아 있는 동안에 암병 없이 자기는 항상 살 줄 알고 막 꺼뜩거리고 육체의 일만 열심히 일하다가 탁 죽어버리는 것이 복있는 자입니까, 일 년 동안 암병 때문에 이제는 뭐 이제 나는 죽고 나는 살 수는 없는 것을 단정했으니까 땅위에 ‘이 논 좀 사십시요.’ `하이구, 내가 논이 무슨 필요가 있어?’ ‘이 회사 좀 이거 차지하십시오.' `아이구 회사가 내게 무슨 필요 있습니까?’ ‘이 대통령 하십시오.' `아이구, 대통령 내게 무슨 필요 있습니까?' 그 사람이 땅의 것을 포기합니까 안 합니까? 포기하면 그 사람은 소망을 어데다 두겠습니까? 하늘에 둡니다.
그러니까 이미 일 년 있다 죽을 사람이 암병 없이 건강하게 막 날뛰다가 죽는 사람이 복이 있소, 암병 때문에 세상에 있는 붙은 거 다 떼 버리고 이제는 하늘나라만 바라보고 준비하다 죽는 사람이 복있습니까? 암병 있는 사람이 복있소 없는 사람이 복있소? 있는 사람이 복있지.
암병 있는 사람보다 더 복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암병 없는 사람이요 있는 사람이요? 암병 없이 건강 가지고, 건강 가지고 세상 위해 살지 안하고 하늘나라를 위해서 준비하고 사는 그 사람이 제일 복있는 사람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러면 암병과 자기 속에 옛사람과 어느 것이 자기에게 더 큰 원수입니까? 옛사람이 더 큰 원수라. 요걸 우리가 알고 살아야 돼요. 어제 그 말씀이 나왔기 때문에 어떻게 좋은지. 그래서 도무지 그것을 보이지 안해.
이러기 때문에 자, 새사람으로 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옳은 성경 해석을, 옳은 가르침을, 옳은 설교를 하는 것을 듣기 싫어하고 대적하는 것은 그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옛사람들이 하는 것이라.
저 죽을 줄 모르고 그 사람이 새사람이 옛사람에게 종이 돼 가지고 옛사람 그놈이 주장하는데 그 사람을 미워해야 돼요, 불쌍히 여겨야 돼요? 불쌍히 여겨야 돼요, 미워할 것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사람이 있을 때에 ‘저 사람은 저렇게 옛사람이 돼 가지고서 주님이 하시는 일은 대적하고 저라는데 나는 저와 같은 사람인데, 주님이 나를 이와 같이 은혜 주셔서 주님편에 서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나도 감사한데 나와 같이 저 사람도 그렇게 만들면 될 터이니까 저 사람도 그렇게 만들어 주십시오.’ 이렇게 간구하지 옳은 것을 제가 대적한다고서 미워하고 대적하고 그럴 수가 있겠소 없겠소? 그럴 수가 없어.
이러기 때문에 이 세계가 다르고 사람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견해가 다르고 평가가 다르기 때문에 이 말을 짐작을 할 수 없는 것이 세상 복잡한 세상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요 배운 것을 빨리 빨리 실행하고 실천해야 됩니다. 지난 주간에도 세 가지 우리가 연습하고 연성하자 이랬는데, 언제든지 사람 이제는 딱 만나면 일호가 뭐이야? 딱 만나면 어째야 돼요? 자기부터 생각지 말고 남부터 먼저 생각하는 그것이 우리가 연습한 것이라 말이오.
‘내가 이라면 기쁘겠나, 내가 이라면 좋겠나 저라면 좋겠나?’ 어떻게 하면 저 사람에게 좋겠나 저 사람에게 해가 되겠나?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지금 피해를 주나? 내 피해보다 다른 사람 피해, 내 유익보다 다른 사람 유익, 나 좋은 것보다 다른 사람 좋은 것, 나 기분 상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 기분 상하는 것, 내가 해되는 것보다 다른 사람 해 이것부터 먼저 생가하는 것이 신사요. 그게 참사람이오. 안 믿는 사람도 논리적으로는 압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대통령도 지금 앞으로 대통령 선거할라고 모두 이라고 있고 있는데 대통령을 어떤 사람 선거해야 돼요? 대통령은 내야 어찌 됐든지 이 한국이라는 이 한국을, 한국 백성을, 한국과 한국 백성을 유익되게 하기 위해서, 한국과 한국 백성을 유익되기 위해서 나는 이를 위해서 완전히 매장이 되고, 이를 위해서 완전히 제물이 되고, 이를 위해서 제물이 될 그 사람을 대통령을 내야 되지, 민족이야 이리 되든지 국가야 어찌 되든지 내 욕심만 달성되면 된다 하는, 내 욕심만 달성하면 된다는 이 사람을 내야 되겠는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해서 이 나라와 이 민족에 유익된다면 내야 뭐 목숨이 달아나고 어찌 돼도 나보다도 이 나라 이 민족을 더 귀중히 여기고 살 수 있는 그 사람을 대통령을 내야 되지 민족과 국가야 어떻게 이용이 되고 어떻게 되든지 나만 잘되겠다 하는 그 사람을 대통령 내서는 안 될 거라 그말이요, 어떤 사람이든지. 알겠습니까? 내 말이 발라요 틀려요? 예? 이게 대통령 운동이요 뭐이요? 이게 옳은 대통령 운동이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모두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게 망할 생각이요 흥할 생각이요? 흥할 생각이라. 이렇게 살면 높이기는 누가 높여 주는고? 하나님이 높여 주시요.
둘째로는 자기에게 있는 잘못된 점, 셋째로 남에게 있는 좋은 점. 잘못된 점은 뭐이 잘못된 점이라고 했지? 잘못된 점은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그게 잘못된 점이라. 또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점은 뭐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좋은 점 장점을 봐야 되는데 다른 사람에게 있는 장점은 뭐이 장점입니까? 그 사람이 또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장점이라 말이오. 알겠소? 쉽지 안해요? 일호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요게 일호, 이호는 뭐이요? 자기에게 나쁜 점이 뭐이요? 자기에게 나쁜 점이 뭐이요?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는 그게 나쁜 점이라. 요걸 벌써 일주간 내 여러 아마 수백 번은 말했는지는 몰라도 수십 번 말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장점은 뭐이지? 그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장점이라. 그게 많은 사람도 있고 하나도 없는 사람, 하나도 없으면 그 사람에게는 볼 게 없어.
하나도 없으면 그 사람에게는 뭣만 있는 사람입니까? 장점만 있는 사람이요 단점 있는 사람이요? 단점만 있는 사람인데 단점만 있는 사람의 단점을 보라 했소 보지 말라 했소? 그건 나 볼 게 아니라. 볼 게 없어. 그거 보면 내가 썩어져.
썩어지고 내가 더러워지고 죽어져요.
이러니까, 우리가 지난 주간에 요 세 가지를 공부했는데 요것도 알기 참 어렵습니다. 만일 신학 박사들에게 가지고서 ‘자기의 단점, 다른 사람에게 장점, 다른 사람에게 장점이 뭐이 장점입니까? 자기의 단점이 뭐이 단점입니까?’ 고거 물어야 모릅니다.
자기 일이 뭐이 자기 일입니까? 자기 일이, 자기가 할 일이 뭐이지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 자기 할 일이라. 자기 할 일 돌아보는 것이 그게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그게 자기 할 일이요 자기의 책임이라.
남의 일은 또 뭐이지? 남의 일은 뭐이지? 그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게 하는 그것이 남의 일이라, 그 사람 일이라. 그러면 우리는 이웃을 대할 때에는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이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는 그 사람을 만들도록 하는 것이 그게 뭐냐 하면은 그 사람 일을 내가 해 주는 거라.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이게 남의 딴 세계기 때문에 도무지 세상과 다르니까 이 사람들이 암만 들어야 몰라. 내가 여기 서부교회 와 가지고서 삼십육년째라, 보니까. 삼십육 년을 계속해서 항상 이런 말씀 가르치는데 아직도 자기네들이 행해서 사람을 바꾸지 안하니까 이거 도무지 몰라요. 이제 들어서 꼭 실행을 해야 됩니다.
종전과 같이 교회 주변을 잘 청소하면서도 덕이 있게 그렇게 하도록 합시다.
또 잠깐 기도하고 권찰회 모입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마십시오.
또 지하철을 위해서 우리 건물이 상하지 안하도록 하나님이 지켜 달라고서 그 기도를 늘 게속해 합시다.
삼십 분 기도 안 한 사람은 슬기 없는 다섯 처녀가 신랑 온다 소리 듣고 난 다음에 막 급해서 야단지겼지마는 헛일했어. 그거 모양으로 그렇게 되기 쉬워요.
이러니까 하루 삼십 분 기도하는 사람은 미리 다 준비해 놨기 때문에 아무 염려없이 신랑만 맞이해. 주님만 맞이하면 돼요. 이러기에 삼십 분 기도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