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3:52
옛사람
1987. 2. 3. 새벽 (화)
본문:고린도후서 5장 8절∼10절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게는 우리라는 것과, 또 “담대하여” 하는 이 담대와, 또 원하는 것,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쓴다는 거, 주를 기쁘시게 하는 거,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이 보응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줄 압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이 대속하신 은혜를 말할 때는 대개는 우리입니다. 우리라고 그렇게 공동체인 이 복수를 썼고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는 내라는 그런 단수의 그 개체의 책임을 나타내서 많이 기록했습니다. 주기도문에도 보면 항상 우리라고 주님이 발표를 해서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것은 우리 개체가 아니고 택함을 입은 그 전체가 다 대속의 공로를 입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여러 교리와 신조를 서로 일치되지 못한 그런 신앙들을 가지고 있지마는 실은 교회는 단일 교회라 한 교회라 그렇게 다 우리가 알고 있기를 공통 지식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는 그런 거는 아니지마는 그래도 대개 보면은 예수님의 대속을 입는 데에는 우리라고 하는 이 공동체를 언제든지 말을 했고 예수님의 대속 밖에 있는 그런 일들을 말할 때에는 그는 옛사람을 들어서 말할 때에는 내라는 것을 다 말을 했습니다. 우리라 말은 전혀 쓰지 안했습니다. 대속 안에서도 자기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서는 개인인 그 개체의 단수를 붙일 때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를 입은 사람들이라면 다 하나요 전체가 다 합해 가지고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또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한 지체입니다. 우리가 이 타락한 그 이후 원죄는 언제든지 그 내라는 것이 원죄입니다. 자기 개체성 또 자기 중심 위주 본위 이런 것은 다 그것이 개인입니다. 개체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렇게 쓸 때도 있지마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랄 때도 있기는 있지마는 될 수 있는 대로는 자꾸 우리가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자기 사욕 자기 본위라는 이 개인이라는 개체라는 이것을 우리 습성에서 자꾸 이것을 거둬서 없애는 것이 좋습니다.
없애는 것이 좋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도 다 하나가 되어 받는 것이요 또 우리가 되는 것도 다 하나가 되어서 되는 것이요 또 우리가 원하는 것도 이 하나되어서 공동체로 모든 것이 되기를 원하는 그것이 돼서, 의무와 책임에는 그러하지마는 될 수 있는 대로 소원하는 것은 우리 공동체인 이 단일 교회가 돼 가지고 원하는 그것이 되어야만 되는 그런 것을 우리 이 생활에서 자꾸 연습을 해서 그 습관과 습성을 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이 개체로만 되는 재미가 있고, 내가 뭘 해야 재미 있고 내게 뭐 어떻다 해야 되고 내것이라야 되고 자꾸 나 개체 나라는 것을 자꾸 쓸 그때는 그것이 좋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대속 밖에 있는 옛사람으로 돌아가 가지고 되는 것인데 우리는 자기와 자기를 참 얼마나 구별하기가 어려운지, 자기가 하나 같으면 좋은데 자기가 둘입니다.
둘인데 대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된 이 교회, 택함을 입은 자 중에 하나인 자기가 우리인 것을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좋은데, 그때는 안심하고 우리는 새사람 참사람 자기로 이렇게 안심하고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내라는 것이 나타나서 말을 한다든지 또 생각이라든지 소원이라든지 욕심이라든지 내 개체인 내가 나타날 때에는 조심해서 심사해 보면 대개는 옛사람 자기입니다.
옛사람 자기 그거는 참자기도 아니요 자기 아닌 자기요 거짓된 자기요 자기를 죽인 자기요 그거는 아주 자기 아닌 딴 자요 원수입니다.
우리가 중생되고 난 다음에도 내라는 이 개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와 같이 그렇게 무아주의로 간다는 건 아니고 내라는 것이 언제든지 뚜렷하나 나는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이 공동 속에 들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지체요 한 부분이요 한 분자요 한 세포요 이것이 합해지지 안하면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지 못하는, 하나님의 이 대속에 곧은 공동 은혜이기 때문에 이 공동 은혜를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도 공동 은혜요, 대속도 공동 은혜요, 주도 공동 은혜요, 또 우리의 소망도 다 공동 은혜입니다.
이래서, 우리의 내라는 주체는 어떤 게 내라는 주체인가? 우리는 영육으로 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영은 곧 내 개인인 곧 주격이요 주체요, 주격이요 또 우리의 심신은 소유격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구속 받은 사람들이 이제 중생된 사람들이 내라고 하면은 그 나는 곧 중생된 영이 말하는 것이요, 또 그러기에 내 마음이니 내 몸이니 내 뜻이니 하는 그런 것은, 모두 나 할 일이니 내 의무니 책임이니 하는 것은 주격된 중생된 영이 주격이 돼 가지고 하는 것인데 원죄로 타락한 후에는 심신에 주격은 없습니다. 거게는 내라는 것은 죽어버렸고 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나는 죽고 심신 그것이 주격이 돼 가지고 하는 건데 심신은 주격 노릇을 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영육을 지으실 때에 영은 주격이고 심신은 피소유격으로 지어 놨기 때문에 영이 죽었으니까 그거는 주인 없는 물건이오. 주인 없는 그 심신인데 주인 없는 심신이니까 우리의 영을 죽인 악령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의 심신을 어떻게 만들었느냐? 심신을 영에게 속한, 영의 것이 되어 있는 그 심신을 영을 죽여버리고 나니까, 악령이 들어서 영을 죽이고 나니까, 영을 죽인 거는 악령이 들어서 육을 범죄케 해 가지고 육이 범죄함으로써 육의 주격인 주격 책임에서 영이 정죄받아 가지고 단번에 죽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을 죽여 버렸어요. 주인을 죽여 버렸으니까 이제는 주인 없는 이 심신인데 이 심신을 ‘내가 주인이다’ 하고서 이 악령 이놈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 그 심신을 주격을 만들었어. 심신을 주격해서 마음 제가 주인이고 또 몸도 제 주인으로 이렇게 오해를 하도록 이렇게 해 가지고, 안 믿는 사람들이 내라, 내라 하는 거, 안 믿는 사람들이 내라 내라 하는 그것은 정상적인 사람의 자기가 아닙니다. 그거는 악령이 들어서 그 악성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심신의 그 본질과 본성을 악성을 만들었다 말은 악령에게 속한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마음과 모든 마음의 각 요소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악성이라 하는 것은 악령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악령에게 피동되어서 악령의 것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 심신을 점령해서 심신이 악령에 피동되어 가지고 있는 그것이 곧 악성입니다.
악령과 악성이 들어 가지고 한 가지 두 가지 행동한 그것은 악이 한 번 하고 두 번 한 그것을 가리켜서 연습이라는 익힐 습(習)자 연습인데 악령에 따라서 악성된 이것과 악령과 악성 이 둘이 들어서 이렇게 그 주장대로 그 위주대로 한 가지 두 가지 행동한 그것이 곧 악행이요, 두 번 하면 그게 또 악습이요, 세 번 열 번 하면 자꾸 악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타락한 후에는 사람은 주격이 없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자기네들은 내라고 하고 뭐 내가 어떻고 내가 대통령 하고 내가 뭐 하고 이렇게 떠들어 쌓지마는 그건 성경을 몰라서 모든 이종교에서 자기라는 거 내라는 거 이래 말하나 그거는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그게 자기인 줄 알지마는 순전히 중생되기 전에는 그 심신이 사는 것이 악령이 사는 것이요 악성이 사는 것이오. 그러니까 그 모든 본받는 것은 악습을 본받아서 선조의 악습으로부터 주욱 나왔기 때문에 그것이 다 가풍이요 풍속이요 다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켜서 “육체의 생각은” 말한 것입니다. 육체의 생각이라는 그것은, 육체의 생각이라는 그 말은, 우리의 심신이라는 육이 뭐 잘못돼서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는 것은 엄밀히 구별해서 말하면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또 “육체의 소원은” “육체의 욕심은” 육체의 욕심이라,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소원이라 이래 말하는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악령의 소원이요 악령의 생각이요 악령의 욕심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육체로 되어 있는 그것은 그 자체가 되어 있는 것이면 그것은 죽어야 되는 것이고 다시 새로 죽여 가지고 그라면 새로 다시 창조하는 개조가 되든지 해야 되는데 우리의 그 육체의 생각이라는 옛사람이라는 그것은 심신은 변동되지 안하고 심신은 그대로 있습니다. 첫째 아담에게 받은 우리 심신은 그대로 있는데 다만 거게 주인이, 그 관할하고 주관하는 주인이 그놈이 악령이기 때문에 악령만 쫓아내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치 비유컨대 어떤 베쪼가리에 물을 들여 놨다가 염색한 그 색깔을 탈색만 해 버리면 원단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이 심신은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심신 자체는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심신 자체 그거는 마치 이 흙과 돌과 같은 것이지 그것은 그게 자체가 더러운 것이라 그거는 없애버릴 것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심신이 성화되는 것은 이것은 악령이 이 심신을 주장하고 이 심신은 악령 그것이 제 주인인 줄 알고 그것이 악령에게 피동되어서 악령에게 물들어 가지고 감염돼 가지고 악성된 그것이 자기인 줄 알고 이래 있으나 그것을 완전히 탈색해 버려 버리면 그런 것이 없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 줄 압니다. 내라 하면 그 주인인 줄 알고 이래 말하지마는 타락한 후에는 사람은 내가 죽어 버렸습니다.
내가 죽고 내가 없습니다. 내가 죽고 내가 없습니다.
그거는 왜? 나는 죽었기 때문에 있기는 있지마는 그것이 기능적으로는 아무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영이라 하는 것은 그는 저 혼자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또 그것이 다른 어떤 것에게 피동될 수 없는 그런 존재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하나님의 모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것은 독립성은 가지지를 못합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에게 피동으로서만 그 영은 움직일 수 있는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니까 존재는 하고 있기는 있지마는 기능적으로서는 완전히 마비됐어.
완전히, 전혀 기능적으로서는 전혀 없습니다.
왜? 그것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전용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그거는 피동되지 못하니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의 그 모든 영은 존재하기는 존재하지마는 그것은 기능적으로는 전연히 마비되어 있고, 그러기 때문에 “죄와 허물로 너희는 죽었던 자라” 하는 네라는 그 말은 심신이 죽은 것이 아니고 다만 죄와 허물로 그 영이 죽었고, 영이 죽었고 심신은 이 악령 악성에게 이렇게 감염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염된 그것을 탈색만 하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벗으라. 벗고 입으면 된다.” 그렇게 성경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자기가 둘이라 이래, 자기가 둘이라 이랬는데 로마서 7장에는 이제 “내가 원치 안하는 거” 원은 자기 소원 아닙니까, 원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안하는 것을 하는 것은” 원치 안하는 것을 하는 자가 있는데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는 그자는 내가 아니고 그것은 내 속에 죄라”고 똑똑히 거기서는 밝혀서 자기인 줄 아는 그 자기가 자기가 아니고 자기 아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자인 것을 밝혀서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될 것은 타락한 후에는 나는 죽었던 것입니다. 타락한 후에는 나는 죽었던 것인데 죽었으면 왜 중생되기 전에 내가 있느냐? 내가 그거는 내가 아니고 그거 영만이 내 주인이요 내인데 주격인데 내가 아니고 그거는 악령이 와 가지고 영을 죽여버리고 제가 나와 가지고, 마치 어리석은 여자에게 남편을 죽여버리고 제가 남편 입었던 옷 입고 모두 다 이래 가지고 가장하니까 저거 남편 죽인 자니까 원수인 간부지마는 이게 무식해서 구별을 못 하니까 내나 전날 그 남편인 줄 알고 이래 자꾸 사귀고 영접하는 것 모양으로 꼭 그와 같은 격입니다.
이래서 중생되지 안한 사람들은 자기는 죽고 없습니다. 그러면 왜 자기가 죽고 없어? 자기가 지금 행사는 합니다. 행사는 하는데 자기는 죽고 없는데 행사하는 것은 심신의 주격인 그거는 심신의 주격은 영은 죽어버렸고 그 악령이 와 가지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중생됐지마는 우리 생활에 있어서 나와 나를 이 잘 구별하지 못하면, 나는 얼마든지 자라야 되겠고, 나는 행복돼야 되겠고, 나는 또 영광스러워져야 되겠고, 존귀해야 되겠고, 모든 존재에게 다 대우를 받고 환영을 받아야 될 그 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스스로 건설해서 가라” 이렇게 말했고, 이런데, 이 내라는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나는 하나뿐인데, 참 나는 하나뿐인데 나 아닌 그 거짓부리 그놈이 내라고 가장을 해 가지고 나타났는데 그놈은 어떤 놈이냐? 옛날 나를 죽였던 원수입니다. 내가 아닌 나, 원수인 나, 거짓된 나 그놈이 있는데 그놈을 중생되고 난 다음에도 자기인 줄 알고 이렇게 영접해 가지고 그놈 하자 하는 대로, 그놈 위주로, 그놈 본위로, 그놈의 중심으로서, 그게 자기 중심 자기를 사랑하는 것인 줄 알고 자기를 죽인 자기 아닌 원수 그것을 자기가 사랑하고 위하고 이렇게 하는, 완전히 자기 심신이 생활하는 그 생활이 심신을 유익되게 하는 생활인 줄 아는 그 생활이 심신을 완전히 자멸하는 그런 생활하기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야 되는데 참 자기는, 둘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아닌 자기가 하나 있고 참 자기가 하나 있고 둘인데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참 자기가 주격이 되면은 그 주격은 자기를 행복되게 심신을 어데까지나 자기로서는 하는 데까지 책임을 지고 행복되게 하고 자기 아닌 원수 그놈이 자기가 됐을 때에는 자기 심신을 꾀워, 전부 꾀우는 것이오. 전부 꾀워 가지고 심신을 아주 멸망시키는 그 일만 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 자기 아닌 자기 그놈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이 심신이 움직일 때에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 제일 중요하냐 하면은 그러면 심신이 움직여서 일만 하면 되는 줄 알고, 또 무슨 이렇게 하나님의 이 성경 법대로만 살면, 성경 법칙대로만 살면 되는 줄로 알지마는 성경 법칙대로 살면 그 사람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거 전부 자살 행위입니다. 그것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율법 아래 있는 자는 그 율법을 행하는 것이 ‘나는 요 법대로 삽니다’ 하고서 자꾸 하니까 그 법을 제가 완전히 다 행했으면 하지만 다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요 법대로 산다고 주장하고 사는 그 자체가 법에게 정죄받아 가지고 자살하는 행위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나와 나를 잘 구별해 가지고 이놈은 참 내가 아닌 원수인 이놈이다 하고 물리치고 참 자기인 자기가 나서 가지고 사는 그 생활은 다 복된 생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나와 나를 구별하는 이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중생된 영인 심신의 주격이 되는 나, 나는 어떤 건가? 심신의 주격이 된 나는 어떤 나인가? 그 나는 곧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나면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나면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이 외부적으로 대외 관계로 말하면 대외 관계로 말할 때에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서 행복되기를 원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서 그 움직이는 그것을 원하는, 거게 피동되기를 원할 때에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게서 그렇지 안하고 개체로 해 가지고 다른 사람의 행복과 내 행복이 다르고 다른 사람의 소원과 내 소원이 다르고 다른 사람의 성공과 내 성공이 달리 생각할 때는 그때는 잘 깊이 파서 보면은 그것은 나 아닌 나 그놈이 들어와 가지고 우리를 괴롭히는 그런 유혹하는 그런 데에 있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잘 구별하지 못하면 신앙 생활 한다고 해도 말씀대로만 살면 되는 줄 알아도 아닙니다. 말씀대로 살고 성경대로 살아도 성경대로 사는 것을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법 아래서 사는 거 있고 은혜 아래서 사는 거 있고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는데 법 아래서 사는 그것은 내나 옛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벗고 법 아래 살기 때문에 법 아래 사는 것은 그것은 다 자살 행위요 자기를 정죄하는 것이 되고야 맙니다. 자체도 다르고 그거는 다른데, 은혜 아래서 산다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은혜 아래 산다 말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아래에서 산다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아래에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나는 어떤 내가 참 내인가? 예수님의 이 대형으로써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 받은 나, 죄에 대해서 자유하는 나, 마귀에 대해서 자유하는 나, 사망에 대해서 자유하는 나 이 내가 내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망에 자유하지 못하고 사망에 종될 때는 나는 아닙니다, 그거는. 참 나는 아니고, 영이 함께 그렇게 사망에 종되는 그걸 안 합니다. 영은 그때는 뭐이냐 하면은 영육이 분리돼 가지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안하고 원치 안하는 것을 한다. 그러기 때문에 내 지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그러면 그럴 때는 영과 육이 합할 때에는 하나님 중심이 있지마는 영과 이 육체가 분리될 때에는 그것은 딴것인 것입니다.
요거 아주 중요합니다. 요거 요걸 지금 잘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오늘 세계입니다. 이거 뭐 이거 설교록에 나갈 터이니까 나가면 욕도 얻어먹을 것이지마는 욕을 하지마는 실은 깨어서 알아야 됩니다.
나는 어떤 내가 참 내인가? 중생된 영이 주격된 영 내가 내입니다. 중생된 영 내가 내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 나는 어떤가? 중생된 영 나는 내 생명이 무엇인가? 내 생명이 그리스도의 대속이 내 생명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대속을 잊어버릴 때에는, 대속을 잊어버릴 때에는 영이 죽는가? 아니오. 대속을 잊어버릴 때에는 어찌 됩니까? 대속을 자기가, 대속 받은 자기, 그러면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서 해방돼서 자유하는 나- 자기 개체로 말하면 나- 또 하나님의 지성 지공의 모든 전지의 입법을 다 완전히 이행해서 하나님 앞에 공심판을 통과한 나,- 우리는 다 공심판 통과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공심판 받지 않소, 그리스도의 심판만 받지. 통과한 나.--완전자, 자존자, 전지 전능자, 대주재자 이분하고 나하고 완전히 연결된 나.
그러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우리는 전능을 발휘할 수 있는, 전능의 기능 발휘, 전능의 기능 발휘를 하는 우리 자체입니다. 전능의 기능 발휘를 할 수 있는 거, 전지의 기능 발휘를 할 수 있는, 완전 사랑의 아가페 사랑의 기능 발휘를 할 수 있는, 완전 진실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이 심신입니다.
그 안에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셔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고, 우리는 마치 말하면 그리스도의 지체,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돼 가지고 이와 같이 하는 그것이 내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서 진리로 영생 영감으로 영생, 말하면 이 일곱 가지는 펴면 우주와 영계에 가득 찼고 우주와 영계를 다 품 안에 넣어 가지고 이것을 잘, 말하자면 어머니가 자기 잉태된 아이를 어머니가 뱃속에 넣어 놓고 다 이래 품어 가지고 그것을 두루두루 다 잘 길러서 하는 것처럼 이렇게 일곱 가지 예수님의 대속의 이 은총을 입어서 이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돼서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안에 살아 계시고 나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동해지는,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이라 하는 것은 일곱 가지를 이거 사람들이 그냥 단순히 생각해 그렇지 일곱 가지를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면 이 일곱 가지는 영계와 물질계 이 우주를 다 자기 품에 다 품고 이것을 다 기를 수 있습니다. 다 이것을 기를 수 있고 이것을 얼마든지 기를 수 있고, 이러기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곧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말 한 것은 만물 안에 있다 그말은 만물보다 작다 말이 아니고 만물의 중심, 말하자면 만물의 중심이요 우리의 중심은 하나님이시요, 그런데 만물을 충만케 한다 하는 건 만물을 다 포섭해 가지고 모든 것을 기를 수 있다는 그말입니다.
이래서, 나와 나를 구별하기 쉬운데, 자꾸 우리는 그만 내라는 것이 자꾸 습성이 돼 가지고 언제든지 내것이 돼야 좋고 나를 어찌 해야 좋고, 그라면 심지어 영감과 진리의 역사도 자기를 통한 영감과 진리 역사면은 좋고 다른 사람을 통한 영감과 진리의 역사면은 그것은 거게도 영감과 진리 역사에도 시기를 한다 그말이오.
그러면 그때 영감과 진리 역사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났지마는 그 시기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무슨 사람입니까? 그거는 벌써 옛사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것은 중생된 영이 하는 것 아닙니다. 중생된 영이 하는 것 아니고, 벌써 중생된 영이 주격이 돼 가지고, 중생된 영은 주격되고 심신은 소유격이 돼 가지고 영육이 하나돼 가지고 성령의 기관으로서 이렇게 쓰여져서 은혜를 나타냈지마는, 나타내기는 나타냈지마는 그때 그 나타낸 것을, 영감과 진리는 하나인데 저 사람을 통한 영감과 진리는 마음에 시기 나 섭섭하고 저를 통한 영감과 진리의 역사는 좋아하는 이 자랑하는 그거는 뭐냐 하면은 네가 영감과 진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기구로 도구로 쓰이기는 쓰여졌지마는 너는 잊어버렸고 너는 벌써 네 자체는 옛사람으로 돌아갔다 하는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기와 자기를 아주 구별해야 되는데 이걸 구별하지 못하면, 법대로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가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많이 밝혀서 말해 놨습니다. 법 아래 은혜 아래, 또 의를 얻는 것이 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얻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입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많이 말해서 아주 갈라디아서는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그저 예수님의 사활의 일곱 가지 대속을 입은 내기 때문에 어데든지 일곱 가지 사활의 대속으로 사는 그게 내입니다. 일곱 가지 대속이 자기가 되어 있는 그것이 참 자기입니다. 일곱 가지 대속은 이거는 순전히 신적 요소입니다. 신적 요소요. 신적 요소가 인적 요소인 내 속에 들어와 가지고서 주격이 돼 가지고 역사하는 그때가 그것이 참 자기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면 다 실패합니다.
그러기에, 이 모두다 복음 운동 이 구원 운동을 이렇게 한다고 하나마 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원수가 이것을 거머쥐고 그 간판을 가지고 이용을 해 먹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것도, 그것도 어쨌든지 또 유익이 있습니다. 그래도 자꾸 그런 가운데에서 살 것은 살아나고 또 그런 가운데 드러날 거는 드러나고 쇠해질 거는 쇠해지고 죽어질 거는 죽어집니다. 그러나 엄밀한 구원에 들어가면은 자기와 자기를 구별해서 중생된 영이 주격이 되고 중생된 영은 하나님이 주격이 되고 이래 가지고 사는 그것이 아니면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 8장에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하는 그 우리는 그 중생된 영 단체를 말한 것인데 어떻게 중생된 영 단체로 알 수 있는가? “우리까지도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양자될 것 곧 몸의 구속을 기다림이라” 그 양자될 것이니까 양자가 안 됐다 그말이오. 영은 양자가 됐지마는 심신은 양자가 안 됐기 때문에 양자가 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고 그렇게,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라 말은 성령으로, 성령의 역사에, 처음 익었다 말은 완전히 결실해서 결과를 봤다 말입니다. 그러면 중생된 영은 완전히 성령의 결실입니다.
완전히 결실을 봤습니다. 결과를 봤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영은 내라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항상 우리 우리 우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우리를 자꾸 쓸라고 애를 쓰고, 내라는 그게 좋은 줄 알지마는 그 뭐이든지 내가 하면 재미 있는 그거는 뭐입니까? 내라 해야 옹굴지고 재미가 있고 자기 모가치가 아주 되는 것 같고 재미 있고 이런데 그거 안 됩니다.
우리○○○목사님 서울 갔다 조금 달라진 것 말이요, 저 양산동 산에서는○○목사님이 가고 나니까 산이 섭섭해서 뭐 이라는데 서울 가 가지고는 말이오. 양산동에 있던 사람이 아니고 내가 보니까 이제 거기 가서 어떻게 외모를 잘 꾸몄는가 요래 가지고 요래야 좋을까 조래야 좋을까 아주 그때보다 퍽 매꿈해졌다. 그까짓 거 암만 본받아야, 예수님만 보고 이래야 되지 그 면경 들여다 보고 그거 보다 보면은 안 돼.
그거도 좋게 꾸미기는 꾸며야 돼요. 그러나 그 주를 위해서는 막 이 꾸미고 주를 위해서 어째 주를 위해서는 꼭 해야 될 구찌베니면 구찌베니 발라야 돼요. 주님을 위해 하는 건 좋지마는 잘못하면 우리가 바라는 내가 시선이, 시선이 주님에게 가지 안하고 엉뚱한 데 시선이 기울어지면 볼일 다 봅니다.
나는 여기 교역자들이 서울만 가면은 변해져 버려요. 그 서울이 참 좋기는 좋은 모양이라. 그러니까 누가 말하기를 ‘미국 가 가지고 삼 년 동안 안 변해지면 참 다행이다’ 이라는데, 삼 년 동안 가 가지고 변하지 안하면 참 그거는 다행이다 하니까 어떤 사람은 삼 년 안 넘길라고 애를 써요, 자기가 변해지는 걸 알기 때문에. 서울 가면 변해져. 변해지면 나중에 가서 안 됩니다. 요게서 꼭 있을 때 그 사람 그대로 있어야 되지지 그런 거 변해지면 안 돼요.
얼마나 우리 구원이라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렵고 세밀하고 날카롭고 정확하고 명확하고 깨끗한 것인지, 아무나따나, 예수 믿기보다 쉬운 것 없습니다. 그러나 또 예수 믿기보다도 어려운 거 없습니다.
예수 믿는 건 정말 예수 믿는 것은 하나님 그분이 믿게 하셔야 되지 인간은 천하 인간이 다 달라들어서 뭐 의지 결심 충성 다 해도 이 예수 믿는 구원이라 하는 건 털끝만치도 이루어지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전지자 그분이라야 와 가지고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리 죽자껏 그 애를 써도 그분에게 있지 내게 없는 줄 알고 내가 애쓰는 것은 그분이 나를 살릴라고 애를 쓸 때 주실라고 할 때 받는 것, 당신이 살릴라고 애를 쓸 때에 내가 살려 줌을 받는 것 그것이지 그 이상은 우리 인간에게는 없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 오늘 아침에는 나와 나를 구별하는 거, 그러기 때문에 어데서든지 ‘이거 참 내가 뭐꼬?’ 이라거들랑 `이거는 참 내가 거짓된 내가?’ 이 구별할 때는 간단하게 쉬운 것은 그만 일곱 가지 사활의 예수님의 대속 이걸 생각하면 이 대속을 주장하면 내입니다. 대속을 원하는 것이면 내입니다. 대속으로 인하여 살면 내입니다. 대속을 목적하면 냅니다. 대속을 소망하면 냅니다. 대속의 그 모든 요소에 본질과 본성이면 참 내입니다.
그게 아닌 자기의 개체의 소원이라든지 사욕이라든지 그것이면 벌써 영은 떼내 버렸고 이 심신 이놈이 또 어리석게 악령 악성 악습에게, 자기 중심 자기 위주, 악령은 자기 중심의 영이요, 악성은 자기 중심의 인간성이요, 악습은 자기 중심의 모든 행동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되어졌으면 자기도 모르게 영은 뒷방으로 처박아 놓고서 이게 심신 이게 나가 가지고 날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강단에서 설교할 때도 그때도 어떻게 이 교체되는 것이 민활하고 빠른지, 내나 성령으로 시작해 가지고 마지막에 마칠 때에는, 또 설교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어느녘에 옛사람으로 바뀌어진지 모르겠습니다. 어느녁에 옛사람으로.
이라고 난 다음에 교인들이 어떻게 자기에게 은혜를 받고 어떻게 거석하느냐 하면은 그래 가지고 뭐이 잘못하면 섭섭한 거 좋은 거, 섭섭하고 좋은 그것이 주님이 섭섭하고 좋은 것이 아니고 제가 섭섭하고 좋은 그것이 있다 그거요.
그때는 벌써 옛사람으로 바뀌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그때 그 심신의 기능 구원은 다 헛일이라 그말이오. 이용만 되고 도구만 되고 말았지 자기 성화는 안 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