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믿는 것은 실행에 있다

 

1988. 4. 23. 토새벽

 

본문 : 히브리서 12장 14절-17절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돌아보아 하나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있는가  두려워하고 또 쓴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러움을  입을까 두려워하고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지난밤 하나님의 종의 증거에서 예수 믿는 길을 또 더 확실히 배웠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도인데 십자가의 원수의 길도 있고 십자가의 도도 있는데  십자가의 도는 울면서 시작해 가지고 웃음으로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고 십자가의  원수의 길은 웃고 기뻐하면서 시작해 가지고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이것이.

십자가의 원수의 길입니다.

 지난밤에 들었지요? 이해를 했어요, 지난밤에? 십자가의 길과 십자가의 원수의  길을 아주 좋은 것을 증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체험의 도라 경험의 도라. 제가 실행해서 경험하고 체험해  보는 데서 깨닫지 그 전에는 못 깨달아요.

 며칠 전에 여기서는 또 말하기를 비유로써 마치 식물을 먹으면 그 식물이  영양이 돼 가지고 비로소 피와 살과 뼈가 되어지는 것인데 식물이 먹어서 영양이  되는 데까지의 과정에는 그 식물이 형언 못 할만치 세분되어야 된다. 아주  세분되어 가지고서 영양이 되지 그것이 그렇게 아주 가늘게 그렇게 형언 못 할  만치 세분이 되기 전에는 영양이 되지 못한다. 그거는 되지 못하고 도로 몸에  피해가 된다 하는 것을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 주시는 책은, 말씀은 입에는 꿀같이 다나 배에는 쓰다  하는 그것이 곧 실행할라고 할 때에는 고난이 있다 하는 것을,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했는데 엊저녁에 말씀이나 꼭 같은 말씀이오.

 가루 치는 것을 보면, 제가 거기 대해 조금 알았는데 가루를 치는데 그 치는  채가 있어요. 가루 치는 채가 있는데 그 채가 뭐 육십반 그 위에 자꾸 채가  올라가져서 팔십 반 또 백반 백 이십 반 이백 사십 반 이런데 벌써 백 이십반,  하면은 아주 가는 아주 보드라운 가루입니다. 가루. 이백 사십 반 되면은 그거는  물에 타면 뭘 아무 덩어리가 하나 덩어리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참 사람이 형언  못할 만치 그렇게 아주 세분된 거, 가늘 세자 가루 분자, 세분된 것입니다.

그것도 그대로 영양은 안 돼요.

 그놈이 형언 못 할 만치 아주 세분돼 가지고서 거기에서 짜이 나와서 아무 뭐  건더기라고는 하나도 없이 돼져야 그게 비로소 몸에 영양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도 우리가 들으면 이 말씀은 음식과 같고 이  음식이 내 인격에 피와 살이 돼서, 육체의 피와 살이 되는 게 아니라 인격의  피와 살이 돼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에 하나님의 모형, 하나님의 모형의  피와 살이 돼, 이건 비유입니다. 피와 살이 돼가지고서 되도록 영양이 될라고  하면은 굉장히 세분이 돼야 된다. 이 세분되는 것은 자기가 말씀을 듣고 실행을  할라고 이렇게 하면 인간의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만치 그렇게 구비하고  세밀하고 참 상상도 못 했던 것이 다시 깨달아지고 알아진다. 그런 자기의  깨달음과 알음과 그것을 통해 가지고서 비로소 이 진리의 말씀이 하나님의  형상인 인격의 양식이 되어진다, 영양이 되어진다.

 그러기 때문에, 실행한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고 난 다음에 설교를  아무리 네가 세밀히 한다 해도 그 설교 세밀히 하는 것은 그것은 채로 말하면 뭐  자갈 치는 채, 주먹덩이만한 자같이 쑥쑥 빠져나가는 자갈 치는 채만한 그렇지  엉근 그 분해지, 이거 비유를 모르면 이거 백지 공연한 말인데. 알겠어요?  이 집 지을 때 보면 자갈 칠 때는 이 솔방울 같은 것도 그게 들어갑니다. 엉근  채로 치는 것은 이 주먹덩이 갈은 것도 들어가요. 그러나 이거 이렇츰 큰 돌은  못 들어가요. 그런 엉근 채와 같은 그런 정도의 분해라.

 성경 말씀을 읽고 저 사람이 아주 그 사람은 뭘 세밀히 분해해 가지고서 이래  해석한다 이라면서 그 뭐 하나님 말씀을 그렇게 자꾸 쪼개고 뭐 쓸데없이 말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그 분해가 이 엉근 채 이런 정도라.

 그것을 그 사람이 듣고서 깨달아 가지고 자기가 실행을 할라고 애를 쓰면은 한  번 시작했다가 또 헛일하고 두번 헛일하고 자꾸 조금씩 조금씩 이래 가지고서  실행을 하는 가운데 정말 실행을 해서 실행하는게 소화되는 건데, 음식 먹고  소화되는 것처럼 진리를 듣고서 읽고서 소화되는 것인데 실행을 하면은 거기에  자기가 세분되어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 깨달아짐이 말이오.

 아무리 세밀히 설교한 그 사람의 설교보다도 비교 못 할 만치 그렇게 세밀하게  깨달아지는 깨달음이 있다, 자기 에게.

 깨달음이 있는 그 사람은 자기가 깨달음 있는 것을 아주 세밀히 설교하는 사람  그 사람의 설교하는 정도로 깨달아 가지고는 자지에게 영양이 안 됩니다. 실행을  할라 하면은 그 이상으로 깨달아진다 발이오. 깨달아지니까, 실행한 사람은 그  설교를 또 한 번 하고 또 실행하고 애를 쓸라고 하면은 애를 써보면 또 거기  깨달아지는 게 있고 자꾸 이래서 그 사람이 실행을 하면서 증거를 할라고 하면은  또 증거하고 또 증거하고 또 같은 증거를 뭐 녹음기에 녹음을 한다면 한 마디도  틀리지 안하는 그 말을 또 하고 또 하고 또 하고 자꾸 또 합니다.

 또 하는 그거는 그 사람이 깨닫기는 깨달아진 것이 있어서 이것을 다 알아야  구원을 이루겠는데 이것을 전할라 하니까 잘 전해지지 안하니 속담에 뭐 꿀먹은  벙어리, 꿀먹은 벙어리가 이거 참 달기는 달고 좋은데 이거 말을 못 하니까 뭐  벙얼거리고 자꾸 달다고 하지마는 그걸 발표 못 하는 것처럼 한가지라.

 인간의 방언이라 하는 그까짓 거는 아주 자갈 치는 채만치도 못합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서 그렇게 그저 대충만 무더기만 이렇게 알도록 해 놨지,  또 내나, 구약은 히브리어고 신약은 헬라어로 이렇게 기록한 것인데 원어 아는  사람들은 원어를 가지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협박을 줍니다. ‘원어에는 이렇다’  실은 원어로 말하면 옛날 고전어이기 때문에 아주미개 어입니다. 아주 미개어.

미개어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발표한다는 것이 너무도 부자유합니다.

 이러니까 그 원어 아는 사람이 ‘원어에는 여기는 이렇게 말한다, 저기는  저렇게 말한다.’ 그거 한 마디 새는 한 마디 짹 하는 거 가지고서 모든 말 다  해. 옛날 처음에는 문 열어라 뭐 하는 거문에 대해서는 하나요. ‘문’ 하면,  ‘문’ 하면 열어라, 닫아라, 조금 열어라, 빨쭘하게 열어라, 반만 열어라, 아주  꼭 닫아라, 그만 그냥, 문을 왜 닫지 않느냐? 이 전부 거기 대해서 한 스무  가지나 이렇게,  지금은 분류된 그 단어가 생겨졌지마는 서도 처음에는 ‘문’ 하나뿐이라  말이오. ‘문’ 하나. 그렇게 옛날에는 분류되지를 안했어. 차차 차차자꾸 이거  살아나가면서 ‘요렇게 하나 말을 표시해야 되겠다’ 그래가지고 자꾸 하나씩  둘씩 단어가 생겨진 거라 말이오. 단어가 생겨진 것인데, 그와 마찬가지라, 이거  원어가.

 이러니까, ‘원어에 대해서 이렇다’ 이라면 말 안 해도 ‘너는 그러면 원어를  가지고 그렇게. 해석을 하면은 그 원어에 누가 그 해석한 누구의 주장의 사전을  봤느냐? 어느 사람의 사전을 봤느냐?’ 그러면 그 사전에 대해서 실은 수십  종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뭐 책에 나온 거는 사람이 그렇게 몰라요. 수십 종류  아니라 수십 종 수백 종도 더 돼요. 이러니까, 이 사람은 이 사전을 본 사람은  그 원어가 그것뿐인 줄 알고 이래 말하지만 그 원어는 에를 들면 원어가 이  예배당만 합니다. 비유컨대 이 예배당만, 한 마디가 한 단어가 예배당만한  범위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거기에 대해서 그걸 예배당, ‘서부교회  예배당이라’ 이라면 저 구석도 서부교회 예배당, ‘이층이라’ 저것도 이층  저것도 이층 저것도 이층 이것도 이층 여기에도 이층 다 이층이니까 이층이라  하는 범위가 많으니까 그 이층을 말하는데 저쪽 구석을 말하는지 이쪽 구석을  말하는지 어데를 말하는지 그저 모르는데 그 말해 놓은 사전 보고 요거면 다라고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실은 그 단어에 대한 한쪽 구석 ‘동쪽 구석’ ‘서쪽  구석’ ‘남쪽 구석’ ‘저 구석’ ‘가운데’ 이렇게 그 말하는 것이라 말이오.

 그러면, 그 사람 말하는 것은 이만한 단어니까 그 범위 속에 있으니까 이쪽을  두고 사용했는지 저쪽을 사용했는지 저쪽을 어느 쪽을 사용했는지 그걸 모른다  그거요.

 그런데, 그게 전부인 줄 알고 이렇게 ‘이거 보라, 이거 그런 게 아니고 이거  원어에는 이 사전에 이렇다.’ 이렇게 말한다 말이오. 그래 말해서 나는 알말도  안 하기는 안 해도 속으로 ‘네가 아직까지 수건을 벗지 못해서 말이다. 너는 그  원어 그 원어를 그렇게 해석하는데 다른 사람은 또 저 구석을 말한다. 정반대다.

이러기 때문에 원어 그거 가지고서 성경을 깨달을라 해 가지고 안 된다, 그거  고전어이기 때문에.

 그걸 자꾸 읽고 자기가 또 성경을 읽으면은 이 성구가 저 성구를 증거하고 저  성구가 이 성구를 증거해서 자꾸 읽는 가운데서 온 성경이 도통이 돼 가지고  도통이 되면은 거기 대한 내용의 진리를 똑똑히 알게 된다.

 진리를 알게 되면은 그러면 또 그가 진리를 알고 이런 말이다 알고 난 다음에  실행을 할라고 하면은 그 말에 대해서는 수십 배 분류가 됩니다. 가루가 돼서.

아주 세분, 가는 가루처럼 그렇게 분류가 된다 말이오.

 이래 돼서 그걸 자기가 행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지는 게 많아. 그러기 때문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했다 그거요.

 이러니까, 자기 깨달아진 게 다르다 그거요.

 이런데, 제가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나는 그 원어를 몰라요. 영어도 몰라요.

에이 비도 잘 몰라요. 이라는데 뭐 몸이라는 데 대해서 싹스란 말이 있고  쏘오마란 말이 있는데 그 싹스는 부패성을 가리켜 말했고 쏘오마는 몸을 가리켜  말했다 이래 가지고 고려신학교 가니까 그걸 육체니 뭐 이렇게 이거 말하는 것은  육체라 말하는 것은 그거 싹스라 이래 가지고서 그래 해석을 해요.

 그거는 어데서 나왔느냐 하면은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 하는 거기에 대해서 육체에 대한 그 원어가 싹스인데 그거는 부패성을  가리켜 말한다.

 그거 나는 성경 보고 그저 성경만 보고 깨달아 놓으니까 내가 깨달음과 원어  학자들이 깨달음과 달라 가지고서 뭐 고신에 가니까 막 몰려 대는데 그거 그것도  중요한 교리인데 그것도 몰려대지 또 예수님이 ‘마음은 원이로되 육체가  약하도다’하는 그것도 그만 이리 돼지 이래놓으니까 나 깨달은 거는 전부  반대로 막 정죄를 받는데 견디지를 못하겠어, 이거  이래서, 그래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이거 도무지 어떻게 이리됩니까?  그거 좀 나에게. 알려 주옵소서. 이라니까 내게 말하기를 너 그러면 그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 하는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된  데 대해서 육신 그거 원어를 네가 한 번 찾아봐라.

 그래 내가 저, OOO 목사 왔어요? 손 들어 봐. 네. 그때 고려신학교 학생으로  있을 때인데 내가 원어를 모르니까 내가 그거 ‘너 지금, 원어 공부하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그 육신이 원어가 뭐인지 너  찾아보면 알 수 있나 하니까 ‘예, 알 수 있습니다.’ 찾아보더니마는  ‘싹스입니다’ 거기서 내가 힌트를 얻었어. 싹스.

 그래 가지고서 그래 내가 고려신학교 다닐 때에 마구 외쳐 버렸어. ‘싹스가  부패성이 아니다’ 그 해석이 많이 나왔는데 그거 틀리면 뭐 성경해석이 다  삐뚤어진다 말이오.

 ‘싹스라고 원어가 돼 가지고 있는 원어에 싹스가 부패성이 아니다’ 그것도  어떤 학자의 그 사람의 그 견해의 사전을 보고서 다 그렇게 말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이 쓰는 거, 요새 보면 보배는 숨어 있고 뭐 보배도 아닌 사람들이 자꾸  쓰지 못할 그거는 자꾸 저서를 해 가지고 내놓기 때문에 서적이 꽉 찼습니다.

 그래 인제 그걸 보니까 ‘그거 뭐꼬 그라면?’ ‘그 원어가 싹스입니다’ 그래  내가 그 학생들 있는 데 말했습니다. 학생들이 거기 많이 있는데  ‘여러분들이 이 싹스는 부패성이라 이거 고려신학교 안에서는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모든 전부 싹스는 부패성이라고 이렇게 해석을 해가지고  이렇게 하고 있는데 그러면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러면  예수님께서 부패성이 돼 가지고서 그렇다는 그말이냐?’ 이걸 말하니까 이거 참  기가 차거든. 고만 그때에 그거는 딱 끊쳐지고서 다시 고거 그만 들어간  모양이라. 전부 교수들에게 다 들어가고 원어학자들에게 들어간 모양이라.

 이라니까, 고 다음에는 싹스는 부패성이라 하는 고 해석이 그만 당장 중단되고  그 다음에 고려신학교에 ‘싹스는 부패성이다. 또 쏘오마는 몸이다.’ 하는 그  주장, 한 학자의 원어학자가 보고서 이래 해석하고 저래 해석하고 그 사람은 또,  그 사람은 그래 해석했기 때문에 내나 원어에 대한 싹스에 대한 저 한쪽  귀태기만 보고서 그 성경에 보고서 이것은 싹스인갑다 이래 가지고 해석한 거라  말이오.

 그래서, 그거 학자들이 다르다. 그래 내가 고때 생각하고 무슨 말 하면 혹 그말  내가 별로 안 써요. 안 쓰나 ‘그러면 자기가 지금 보는 원어사전은 그 사전이  누가 발행한 것이냐?’ 그러면 그것도 모르는 사람도 있고 그거, ‘그런데  정반대인 사람도 있다. 이러기 때문에 원어라 하는 것은 이렇게 범위가 넓다.’  고전어이기 때문에 옛날 미개어라 말이오. 고전어라 말은 옛날. 말이기 때문에  미개어라 말이오. 암만 그래도 그뒤에 자꾸 필요해서 자꾸 거기에 대한 고 한  가지에 대한 단어가 많이 생겨진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은 고신에 ‘싹스가 부괘성이 아니라’ 하는 그것은 통통  무식쟁이 백 목사가 발견해 가지고서 고려 진영에 ‘싹스가 부패성이 아니라’  하는 것을 그걸 시정했습니다. OOO 목사 내가 그때 물은 거 알아요? 기억해요?  내가 똑똑히 그때 했기 때문에 기억을 할 저라.

 이래서, 여러분들이 어짜든지 그거 꾀를 부리지 말고 그저 신앙은 진실입니다.

진실이 아니고 꾀나 수단이나 그거는 전부 복술이오.

 자기가 성경을 아무리 세밀히 해석을 한다 할지라도 그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인 그 인격에 양식은 안 된다. 아무리 세밀해도. 그걸 듣고서 실행을 할라고  하면은 아주 마치 이십 사반 채로 가지고서 쳐놓은 그런 보드라운 가루라도 가루  그게 그대로 이 육체에 영양이 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소화라 하는 그 과정을  통해 가지고서는 채 그런 걸로 가지고서 형언할 수 없는 그렇게 세분이 돼  가지고서 그거 영양이 돼진다.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됩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모르겠어? 이분.

모르겠어요?’ 그거 그래 놓으니까 이거 그거 모를란지 몰라, 그래서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실행하는 가운데에서 깨달아진 그것을 설교를 할라 하면은  암만 설교를 해도 못 알아듣는다 그거야. 이러니까 또 설교하고 또 설교하고  설교한다는 것이 내나 같은 설교만 장하고 있습니다. 해도 이 사람은 또 새로  설교할 것이 있고 자꾸 해야 되겠고, 다른 사람은 그만 설교 한 번 하면 ‘이거  한 번 설교 했는데 두 번할라 하니까 들은 말이고’ 이러니 재미없다. 이거  사람들이 은혜 못 받겠다.’ 이런데 이 사람은 아무래도 또 가르쳐야 되겠는데  또 모를 것이기 때문에 또 가르쳐야 되겠고 또 가르쳐야 되겠고 자꾸 가르치는  게 가르쳐, 봤자 녹음기로 녹음해도 장 그말이오. 그말이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자꾸 그래 하느냐? 자기는 깨달아서 알아지는 것을,  영감을 받아서 실행하는 가운데 깨달아져 알아지는 그걸 인간의 말로써 발표를  할라, 해도 발표를 못 하니까 자꾸 그 말을 하는데 그 발표는 하고 알려 주기는  알려 줘야 되는데 말 할라 해도 그 말은 이 인간의 단어라 하는 것은 이거 뭐  엉근 채 한가지요. 그거 그렇게 아무리 뭐 세밀히 분류해 가지고서 발표했다  할지라도 엉근 채 한 가지라, 이러기 때문에, 그거 가지고는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를 못 해.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실행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진 그 깨달음을  인간의 방언으로서는 표시를 못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하는 것이 말에 있지 않고’하는 것은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있는 여기에 있지 아니하고 그속에 세분된 성령의  감화로 되기를 원한다 하는 그말은 인간의 방언으로 표시할 수 없는 그런  세밀하고 구비한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려주도록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는  그말입니다.

 그게 나중에 가서 뭐이냐 하면은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내가 전한 말이 말에 있지 안하고 능력에 있기를 원한다.’ 하는 능력에 있기를  원한다 그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을 영감으로 이제 감동돼  가지고서 영감으로 감동받은 사람이 이것이제 인격에, 새사람의 인격에 영양이  돼 가지고서 새사람이 강건해지는 그 영양의 효력으로서 건강되기를 원한다  거기에까지 한 그 설교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이라는데 이 설교를 하면서 꼭 테이프만 해 가지고 고대로만 자꾸하니까 생명  없는 녹음기기 때문에 앵무새 한가지라. 속에 아무것도 없어  그래 하도 답답해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 교회 목사는 자기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소리를 그래 노트만 보고 읽는다고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그걸 한 번 질문을 해서 한 번 코를 납작 누를라고 해도 또 그럴 수는 없고,   그거 오래 전 OOO교회서 어떤 사람이 말해. 그분이 죽어 버렸어요. OOO씨 남편  O집사라고 그 사람이 일본서 명치 대학을 나왔는가 그때 나온 사람이오. 아주  지성인입니다. 그래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말을 노트만 보고 읽어 주니 어떻게  양식이 될 수가 있겠는가?’ 그런 말을 하는 걸 내가 들었어요. 암말도 안 하고  이래 해도.

 이렇게, 내가 오늘 아침에 지금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무리 성경을 보고  해석하고 모든 다른 학자들이 본 것을 다 이렇게 보고 이래 한다해도 이거면  다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라고서 자기가 그대로 실행을 할라고 하면은 그  실행을 하면은 실행을 통해서 영양이 되기 때문에, 영양이 되기 때문에 실행을  하는 가운데서 분류되고 분석되고 깨달아지는 것은 한이 없어.

 그러기 때문에, 깨달아진 그것은 인간의 이 만들어 놓은 방언 가지고는 인간의  말 가지고는 발표를 못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말로 발표하는 그 발표에 내재적 영감이 성령님이 감동시켜  가지고서 그 사람에게 깨달아지도록 할라고 자꾸 같은 말하는 가운데서  깨달아질까 이래서 말하기를 이 말하는데 말만 다가 아니고 여기서 자기가  마음을 쓰면 성령이 와서 깨닫게 해 주시는 그 깨달음을 받도록 성령의 감화를  받도록 노력을 하고 자꾸 이렇게 말하는 것이라.

 이런데, 그 말이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모른다 그거야. 그러고, 왜 성경  말씀대로, 못 알아들으면 귀가 어두워. 귀가 어두우면 심령이 그만치 어두워.

어두우면 그뭐 구원은 바로 이루지 못해. 그러기 때문에 행하는 사람보고도 저  껍데기 행하는 사람 고 속에 좀 들어간 사람 달라.

 이렇게 자기가 이 증거를 할 때에 이 말만 듣지 말고 이 증거하는 가운데에서  성령이 오셔 가지고서 자기에게 깨닫게 해 주는 그 세분 된 그 깨달음을 자기가  받도록 해라.

 성령이라야 우리에게 그 내부의 분말된, 아주 가루된 분말된, 그 해석을,  말하자면 콩은 한 개인데 분말이 되면 수천 개도 돼지지 안해요? 아주 되게  분말하면 수만 개도 될 수 있다 말이오. 콩 한 개가 수만 개로 그 분말이 된다  말이오. 그거 이해가 돼요?   콩 한 개를 갈면 수십 개가 됐다가서 나중에 수천 개가 됐다가 그게 되게 분말  많이 하면 수만 개도 돼요. 그렇지 안해요, 분말되면,  그렇게 된다고 해 그게 영양 되는 거 아니라 말이오. 그게 그보다 더 세밀히  분말되는 소화, 가 돼 가지고 영양이 되는 그 과정에는 더 세밀히 분말이 돼야  된다 그거야.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이렇게 자기가 전하고 듣고 하는  가운데에서 영감을 받아서 깨닫는 것과 영감 안 받고 깨닫는 것이 달라요.

 이러니까, 영감 받아 깨닫는데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 말씀대로  지킨다고 성경 말씀대로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그런 게 아니라 구약 성경 말씀대로 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어. 성경  말씀 지키느라고 못 박았어.

 그 사람들이 그러기 때문에 외식자라 말했는데 껍데기 그 단어로 그 증거한  문서 계시만 받아 가지고 그들이 거석했지 문서 계시 속에 은밀계시인 영감을  그들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영감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명 지킨다는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됐다 그거야.

 그래 그들이 문서 계시를 받으면서 실행을 할라고 애를 쓰는 사람들은 그때도  영감 계시를 받았다 그거요. 영감 계시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야인 줄  알았어.

 그러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보고서 그대로 지켜 행한다고 하는 사람이 그  사람이 암만 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되는 건 아니다. 행한다고 믿음 되는  것은 아니다.

 행하는 것이 믿음이 되는 데는, 행하는 것이 믿음이 되는 데에는 자기가 영감이  동참해서 성령이 옳다 인정을 받아서 행해야 그게 믿음이 되는 것이지 성령이  인정하지 안한, 이분도 조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그거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무슨 구원이 되겠어? 그러니까 공연히 교만하지 말고 깨달아야 돼요.

 그래 인제, 성령이 동참을 해야 돼. 자기가 행하는 데 성령이 옳다 인정을 해야  된다. 그걸 가리켜 성령의 인침이라 한다.

 인정을 해야 되는 것인데 성령의 인정은 자기가 실행할라고 애를 쓰면 이렇게  자기가 깨달아지고 깨달아지고 자꾸 분류돼 가지고서 자기 그 인격에 영양이  될라고 하는 그 과정에는 그 성령이 깨달아진 그 세밀한 그런 깨달음을 가지고서  이제 성령이 됐다 찬성을 하고 동의를 하고 말이지 이렇게. 인정을 하고 해야만  비로소 거기에서 새사람의 양식이 되고 영양이 된다 그것을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상해. 오늘부터는 말이요 이 성조가 우리 예배당 위에까지  와서 웁니다. 위에까지 와서. 모두 아마 그럴 거라. 좀 아마 하나님이 차차 차차  좀 성화를 시켜 주는 거 같애.

 이제, 그렇게 우리가 성경 말씀을 듣고 깨닫고 고대로 실행할라고 하는  가운데에서, 실행할라 하면은 그만 영양이 됩니까? 아니오. 실행할라고 하는  데에서 그것이 다 자기 주관적인 노력으로서 이렇게 하다가 자꾸 실행을 할라  하면은 요게 틀렸다, 실행할라 하다 보니까 요게 틀렸다 저게 틀렸다 이래 자꾸  고쳐 나가니까, 오랫동안 실행을 할라고 애를 써 가지고서 고쳐 나가니까 고쳐  나가는 가운데서 깨달아지는 게 많아. 자꾸 깨달아진다 말이오.

 이거 틀렸다, 자꾸 그게 워이냐 하면 좁은 길이라. 이것도 이거 틀렸다 이건  아니다. 또 고 속에 알맹이를 거머쥐고 또 들어가니까 알맹이 그것도 또 보니까  이거 아니다. 이거다.

 자꾸 껍데기는 추려내고 추려내고 추려내고 자꾸 알맹이로 들어가고 들어가고  들어가 가지고서 추려내서 그거, 이제, 추려내고 추려내다가 나중에 하나님하고  딱 들어맞는 고게 생명길이라 말이오. 생명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생명길이라는 거는 하나님하고 접선되는 고것이 생명길입니다.

 이 넓은 길은 이거 어떤 유력한 목사님의 주석이 있는데 저게 보니까 넓은 길은  이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모르고 그저 인간 생각대로만 살고 있는 그게 넓은  길이라’ 성경 말씀은 불택자에게 한 말씀 아니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이 성경 말씀이라. 그 성경의 교훈은 택자 믿는 자들에게 하는 교훈이지  불택자에게 하는 교훈이 아니라.

 그래 넓은 길은 그 길이 아니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이 넓은 길은 자기  주관 자율 이거 타락한 인간의 부패성 이 모든 육체의 생각 이거가지고서 믿는  것이 넓은 길인데 이걸 자꾸 좁은 길을 찾으라는 건 찾기 어렵다는 건 자꾸  이렇게 자기가 깨닫고 깨닫고 자꾸 이라면은 ‘이것도 아니다’ 이라는  가운데에서 나중에 자기가 다 부인되고, 자기가 다 부인되고 하나님과 탁  들어맞는 연결이 됐을 때에 비로소 그게 생명입니다.

 생명길로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피동되는  요것이 되어지는 데에는 찾기가 어렵다, 찾는 사람이 적다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누구든지 듣고 읽고 한 것을 실행할라고 시작을 하면은 그게  영양되느냐? 그거 소화가 될라고 하면은 그놈이 힘이 들어서 처음에는  벙얼벙얼해 가지고서 나중에 벙얼벙얼해도 전부이 똥오줌으로 배설물이 다 되고  그 속에 영양이라 하는 것은 참 그 아무리 뭐 몇백 배 이렇게 현미경으로 본다  할지라도 그 뭉텅이만 보지 세분되어 있는 개체는 보이지 안할 만치 그만치  세밀하게 나눠지지 안하면 안 돼, 그거는 하나님의 성신의 역사라.

 그래서, 성경 가운데는 문서 계시가 있고 문서 계시 속에는 성령의 은밀 계시가  있어서 문서 계시는 이거는 육십 육 권이지마는 그걸 성령이 내재해 가지고  가르쳐 주시는 은밀 계시를 말하면은 온 세상에도 다 기록하면은 둘 곳이 없다  이만치 양이 많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도리를 듣고 실행을 할려고 애를 쓰는 그  사람이 아시면, 실행 할라고 애를 쓰는 가운데서 경험해서 체험해서 알아지는  그것이 아니면 성경은 절대 모릅니다. 이거 몰라. 그러가 때문에, 세례 문답에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에 제일 좋은 방법을 뭐라고 말했지 저 OOO조사님. 아는  대로 실행하는 그것이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에 제일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기록해 가지고서 그 학습 문답 가르칠 때에 그걸 제가 기록해 가지고 가르치라고  해서 다 연습을 할 거라 그 말이오.

 이렇게, 하나님의 도는 그렇게 때문에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는 물리치십니다. ‘이거 나는 모릅니다. 주님이 알려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당신으로 전부를 삼아서 알려 달라고 하는 그자에게, 또 듣고  행할라고 애쓰는 자에게 이 자에게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자기 세상에 학자들  지식 그거 가지고 주 뭉쳐 가지고 ‘이거라’하고서 그거가지고 또 자랑하고  이거 알았으니까 이거 자기는 이만치 위대하다 하고 이거 가지고 뭐 될 줄 아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참 도에는 거리가 천리 만리 멉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 있고 통달한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한 말씀이 그 말씀이라.

 이러니까, 여기 지금 12장 14절로부터 하는 것을 이것을 이렇게 벌써 아마  일주간도 넘었었는데 이래도 이걸 모르기 때문에 가르칠 것을 오늘에도 말하다  못 가르쳤어.

 이러니까, 그렇게 뭐 그럴 게 없다고서. 자기가 아무리 좁게 ‘이거, 아니다.’  이러니까 ‘ 주님이여, 내가 그 아는 가운데에서 이거 내가 범위가 넓어서 이래  가지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니까’  ‘이 길?’ 누가 있다가 ‘그 길 아니다. 그거 탈선이다.’ ‘이 길 그라면?’  이 길도 아니다.’ 이 길 떼 버리고 또 나중에 요만치 좁아집니다. 그라면  이라면 주님 만날까 주님 접촉할까 하니까 안 돼. 이거 또 ‘이거 ‘이게  아니다. 또 틀렸다. 이것도 틀렸다.’  깎고 깎고 삣고 삣으니까 마지막에 이 점과 점 사이에 예를 들면은 여기 공 한  개 있고 여기 공 한 개 있고 공이 있습니다. 공과 공 그 사이에 제일 가까운  선은, 아주 명주실 가는 실 가지고서 지금 재는데. 이 공과 그 공 사이에 제일  가까운 선은 몇 개나 되겠습니까? 몇 개나 되겠소? 저 O 조사 어데 갔노? 한 개?  맞아요? 이거 재면 여기 저 이래도 공과 공 사이 재면은 다 둘이 이래 잴 수  있고 재는데 제일 가까운 것은 하나입니다. 그런 거 아니겠소? 제일 가까운 것은  하나라.

 이거 이래 떡 재 가지고 왔는데 보고서 ‘이거 틀렸다. 이건 길다, 또 이거는  요거보다는 조금 짧지만 또 그래 아니다 아니다.’ 나중에 가서 제일 가까운  선은 하나뿐이라는 것은 진리라. 그거 변하지 못해.

 그 제일 가까운 선은 고게 뭐이냐 하면은 먼, 재어 가지고 먼 거 다 제거해  버리고 다 제거해 버리고 제일 가까운 그것이 좁은 길이라 말이오. 알겠어요?  좁은 길.

 그 찾고 찾아 가까워 가지고 고래야 ‘생명으로 인도한다.’ 그 길이라야,  생명은 뭐이 생명이라요? 생명은 뭐이 생명이요? 하나님과 연결이 생명. 이것도  다 아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은 지금 듣고 나니까 이거 참 고기가 물 속에  있으니까 뭐인지 모르고 하고 있는데 이거 딴 데 가서 뭐, 여기 딴 데 가서  자기네들이 들어 보면 말이 통하지를 안해. 무슨 말인지 몰라.

 이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된 게 생명이라 하는 그것도 그렇게 뭐 주석에 짜다라  나와 있고 다 퍼져 자빠진 게 아닙니다. 이거   이렇게 모든 걸 제거하고 좁아지고, 비유컨대는 공과 공 사이에 제일 가까운  선은 하나뿐이라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렇게 다 넓은 선은, 뚱글뚱글한데,  뚱글뚱글한데 여기서 잰 거는 길 거고 차차 차차차 이래 짧아 가지고서 제일  제일 짧아. 요리 좀 거석하니 또 길고 제일 짜른데 거기에가 한가운데라 말이오.

알겠어요?   고거 죄라 말은 요 가까운 요 점을 잡지 못한 것을 가리켜서 죄라 삐뚤어졌다  그래요. 활 쏘는 사람들이 활을 쏘는데 속에 요게 한 가운데 표적해 놓은 그  과녁 고걸 들어 맞추지 못한 걸 죄라, 삐뚤어진 게 죄라는 것인데 이러니까 그게  뭐이냐 하면은 이 다른 비유로 말하면 공과 공사이에 제일 가까운 것은 한  줄뿐이다. 가까운 고것이 내나 의다. 고게 의다. 고게 말하자면 고게 진리다.

 이런 것이니까 이렇게 이 좁은 길, 이렇게 좁은 길이니까 자꾸 거석하면,  그래서 늘 말하기를 진실이라 하는 것은 구별하고 구별하고 수많은 종류 가운데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서 이제 거기에서 더 구별할 것이 없는 완전에 도달한  그것을 거룩이라 한다.

 이러기 때문에, 거룩이라 하는 건 수많은 사이비한 것 가운데에서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 구별하다가 마지막에 완전에 도달한 그것을 거룩이라고 말한다.

 진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은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 둘이 아니고 하나만  되어 있는 고것을 가리켜 진실이라고 말한다.

 이러기 때문에 나는 거룩하고 진실하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거룩을  통해서 진실이 되어지는 것이니까 이게 좁은 길이라, 말이오. 이렇게 사람들이,  일을 해 보면, 일을 해 보면 그 이치에. 맞은 이치는 하나인데 일을 하는 데에  그 사람이 백분지 일을 맞췄으면 백분지 일만 성공되고 백분지 구십 구는 틀려.

또 그 일을 백의 구십이 맞으면은 백의 구십이 맞은 성공이지 백이 맞은 성공은  안 돼요, 뒤에 암만 해도. 또 그 사람이 백의 구십 구가 맞았으면은 그 사람의  해 놓은 제작물은 완전에 하나는 모자란다 말이오.

 이해가 돼요. 이해가 됩니까?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요? 그 백의백이 딱  들어맞을 때에 이리도 저리도 변동할 수 없는 완전이 되어지는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이것이 뭐이냐? 이것이 좁은 길입니다. 이렇게 찾아서 거룩하고  진실한, 거룩을 통해서 진실이 되는데 거룩이라는 것은 수많은 잡탱이 가운데  구별하고 구별하고 가리고 가리고 선별하고 선별해 가지고서 마지막에  ‘요거다’하는 거 고거 참을 딱 잡았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거룩이라 말하고  진실이라 말하는 건 벌써 다 그 과정 선별 과정은 다 치워 버리고 완전 되어  가지고 있는 고것을 말할 때에 진실이라 요렇게 발표하는 것이라.

 이게 자꾸 찾아 들어가는 것이 좁은 길을 가는 것인데 ‘나는 좁은 길 그런  길은 나는 못 가겠다’ 제가 찾을 수 있는 좁은 것도 찾지 안하고 이만하면  됐지, 여기에서 중단하고 말지 더 이상 갈 게 뭐 있느냐? 이만하면 됐지.

이만하면 더 찾을 것 없다.’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거룩을 중단한  사람이라 내가 그렇게 말했다 말이요.

 이러기에, ‘뭐 이렇게 나는 세밀히 하기 싫다. 그러면 이 대충 이만하면  됐지.’ 그게 교만 중에 교만이오. 거룩을 거부하는 사람이오. 그게 영감을  거부하는 사람이오, 엄밀히 말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이오. 반대하는  사람이오.

 자기가 있는 힘대로 자꾸 찾기를 찾기를 자꾸 바로 찾을라고 애를 써 찾으면은  벌써 주님이 찾았으면 떡 대면이 되기 때문에 생명이 되고 만다 말이오.

 이러니까, 우리는 자꾸 이 생명길이 아닌 이 넓은 길을 제하고 좁은 길로 가야  되겠다고 자꾸 이렇게 애를 쓰고 찾아야 되는 건데 중간에 아 피곤하고  괴로우니까 나는 그라기 싫다. 나는 아예 내가 너 정해가지고 그만치 좁은 길을  더 찾을 수 있긴 있지마는 찾지를 뭐 찾는 거 그만하고 이 넓은 길에서 나는  살겠다. 그 사람이 생명에 도달하겠어요 못 도달하겠어요? 말해 봐요. 말해  봐요. 도달할 길이 있어? 그게 교만이라. 교만한 자는 물리치는, 그게 교만이라.

 자꾸 찾아서 이 좁은 길을 찾아 가지고 이건 삐뚤어지지 안했나? 바울이 보면  고린도전서 4장에 말하기를, 모든 사람의 여론도 내가 그거 매우 적은 걸로서  여긴다.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않는다. 내 마음에 자책할 것이 없으니까 됐다가  아니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는 자책할 것이 없지마는 이것도 지금 워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나는 무거운 짐진 거와 같이 ‘이거는 어데가 틀렸는고’ 이래  가지고 항상 연구 중에 있고 항상 힘쓰는 중에 있고 그것이 뭐이냐 하면은  그렇기 때문에 천국나라는 힘쓰는 자에게 준다 했어.

 그러니까, 충성을 의라고 했지 그 완전을 의라고 하지 안했어. 충성은 애쓰는  것이라 말이오. 우리가 애쓰는 것 ‘네가 여간한 힘을 가지고서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그 충성을 보고서 그에게 생명문을 열어 줬어.

 생명문을 열어 줬다 말은 그 충성이 생명길을 간다 말이오. 있는 전심전력 다  기울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이제 영생을  이루어 간다고서 이렇게 말했는데 다해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된다고  말했는데 그 일이 쉽게 됩니까?   이러니까, 기독자가 구원 이루는 건 하나님이 주시면 되는 건데 주시는 것은  충성된 자에게 주십니다. 있는 걸 다 기울여서도 모자라서 자꾸 충성되게  충성되게 나갈라고 하는 자에게 주고 그자가 좁은 길로 걸어가서,   좁은 길,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길로,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 생명이  아니라. 좁은 길로 걸어가는 것이 지금 생명으로 인도받는 길이야. 그래  가지고서 그게 뭐이냐 하면 하나님과 만나지는 길이라.

 그러니까, 그럴 때 하나님이 단계적으로 인도하면 그 단계에서는 됐고 또 새로  힘쓰면 인정하고, 그러기 때문에 교만한 자는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  준다는 겸손과 교만이 뭐인데? 겸손과 교만은 겸손은 자기를 바로 아는 것이고  교만은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고,  자기를 아는 게 뭐이냐? 자기를 알기 때문에 완전자에게 나아갈라고 자꾸  애쓰고 애쓰고 또 또 이거 여기에서 찾고 찾고 이래 가지고서 이래 나아가는  것이,

 그래, 김현봉 목사님이 OOO 목사님의 주석을 보고 말하기를 ‘이분의 책은  책보따리지 생명이 없다’ 그래 가지고 그때 그게 시비가 났었습니다.

 왜 생명이 없느냐? ‘이분이 이 학자는 이래 해석하고 저 학자는 저래 해석하고  다 해석하는데 자기는 어째 믿는다 하는 그것이 없으니까 자기는 어째 믿는지  모르니까 그 믿는 것을 자기는 믿는 게 없고 이 사람은 이래 믿는다 저래 믿는다  남 따라서 가는 그거뿐이지 나는 이래  믿는다 그게 없으니까 자기의 생명을 증거하지 않는 거 아니냐? 나는 이래  믿는다 하는 거 그걸 말해야 되는 건데 그거 말하지 안하지 또 그게다 껍데기  곁길을 가고 가지 지금 경험과 체험이 깨달음이 없는 그 증거다.’ 그렇게 말해  가지고 그때 이렇게 돼졌습니다. 그분이 알았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그때 그분이 아주 뭐 핫바지 입고 무식하게 이랬지마는 그 당시는  우리 전국에서 그 교회가 제일 컸습니다. 한 천명 모였었는데 그때 서울에서  많이 모이고 부산서도 많이 모여 봤자 한 삼백 명 뭐 이백 명 이랬는데 거기에는  천 명이 모였었습니다. 그래도 거기 있는 교인들은 전부 그 목사님 말하면 순종  다 했어요.

 다 하고 이라니까 모두 말하기를 아현교회는 핫바지쟁이 다 모두 머리 빡빡  깎고 그러니까 거기는 무식한 사람들이라서 그러지, 잘난 사람들은 순종 안 할  것이라 했는데 나중에 그 목사님이 세상 뜨고 보니까 그 속에 나오는데 장관도  나왔고 뭐 국회의원들도 더러 많이 있고 사장들도 많이 있어요. 그 사람들도 그  앞에서는 다 꼼짝 안 하고 복종했어.

 왜? 그게 한해 두해 된 게 아니라. 벌써 수십 년 됐는데 말하면 부인했지마는  세월이 지나가고 보니까 맞고 부인했지만 맞고 이라니까 뭐 수십 년 동안  경험했으니까 그 말하는 게 틀림없기 때문에 그분이 말한 데 대해서는 거부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

 그렇게, 그러니까 목회하기 수월타 하지마는 그게 뭐이냐? 자기가 말한 것은  예언적으로 미리 말한 것은 다 현재사가 되고 현재사가 좀 있으면 과거사가 되기  때문에 환하게 그 결과 알아지니까 자기들이 많이 들어봤고 했기 때문에  맞으니까 안심하고 따라가는 것이라 그거요.

 우리 서부교회도 지금 서부교회는 등신들이라서 다 시키는 대로한다고. 이  권사들이 제일 다 시키는 대로 합니다. 권사들은 지금 뭐 그 사람들이 못나 그런  게 아니오. 왜? 시키는 대로 하기 싫거든 말아라. 왜? 자기네들에게 말하고 하고  보니까 나중에 경험하고 경험하니까 틀림없으니까 안심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당장에 되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목회자가 말을 해도 교인들이 순종 안 하는 것은 들어보니까 헛일  들어 보니까 헛일, 그때는 들었는데 속았고 들었는데 속았고 자꾸 세월이  지나가니까 속아지니까 누가 순종을 합니까, 순종하기를?

 이러니까, 예수 믿는 거는 실행에서 있습니다.

 실행. 실행도 여러 종류 있어요. 그 굵닥굵닥하게 기독교 인본주의, 도덕주의,  또 윤리주러, 혈육주의, 정실주의, 또 정치주의, 공명주의 이 모든, 모두 어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의 이 욕심을 가지고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자꾸 행할라고 하는 가운데서 그것이 차차 차차 벗어집니다.

 여기에 ‘모든 사람으로’ 화목은 쉬워요. 화목은 쉬운데, 화목은 쉬운데  저거끼리 화목하는 거야 참 쉽습니다. 저절로’화목 다 해 가지고 있어요,  저거끼리 화목하는 거. 이 모두 다 저거끼리 화목이야. 저거끼리 화목하는 거  그런 거 쉬워요. 그런데 저거끼리 화목하는 거기서는 옛사람이 자라가고  있습니다.

 고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목하라’ 모든 사람하고 화목할라 할 때에  자기중심 자기 위주의 그놈이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깨어지요. 모든 사람과  화목할라 할 때에 그때 자기중심 저거끼리 저거 동무끼리 화목되는 그것이  깨어진다 그거야.

 또 ‘더불어’ 더불어라 하면 무슨 말이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너만  주관적으로 화목할 게 아니라 네가 그 사람과 화목하는 그게 성공이 아니라 네가  그 사람과 화목하는데 그 사람도 너와 화목할라고 애써 가지고서 그 사람은 네게  대해서 화목할라고 애쓰고 너는 그 사람과 화목할라고 하고 이렇게 쌍방이  화목하는 데에 도달하도록 하라.

 그런 가운데 뭐 있어? ‘나만 화목하면 되지 뭐 그 사랑 화목하든지 말든지  일방적인 화목은 또 쉽다 말이오. 저거 동무끼리 화목 쉽고 그것보다 모든  사람으로 화목할라 하면 쉽고 모든 사람으로 화목할라 하되 자기 주관으로  자기편에서 화목할라하면 그거는 또 쉬워. 그런데 상대방으로 더불어 상대방도  화목하도록 더불어라는 요것을 할라고 하면은 뭐이 깨어지느냐 하면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것과 상대방을 살리는 그 생명 역사가 일어난다 말이오. ‘모든  사람으로’ 할 때 모든 사람과 화목할라 할 때에 그 악이 죽어지고, 모든  사람으로 화목할 때 악이 죽어지고, 더불어 화목할라 할 때에 새사람의 생명이  거기에서 약동되고서 일어난다 그거야. 거기에는 사랑과 생명이 일어난다  말이오. 이러니까, ‘화목하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한다’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라는데 이거 좇으라는 이걸 말하면은 다른  사람들은 우습다 하지마는 그 화평함과 거룩함을 하는 것은 화평과 거룩은 정  상극이오. 상극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거 외부적으로 보면 화평할라 하년 거룩 안  되고 거룩할라 하면 화평 안 되고 이거할라면 저거 안 되고 안 되는 거라.

이런데 실은 참된 화평은 화평할라하면 거룩되고 거룩될라 하면 화평되고 둘이  하나라. 둘이 하나인 그 단계에 들어간다 말이오.

 성경을 연구할 때에 모순점을 연구해 가지고 모순점이 나중에 청치가 되는 데에  들어가야 고 진리가 되는 것이지 그 안에 안 들어가면 안 돼. 화목과 거룩을  하는데 이 톨스토이도 화목 사람이요 또 다 철인들도 화목 사람 공자도 화목  사람이요 뭐 모든 노자도 모두 이거 다 도덕가들도 화목 사람들이라. 다 화목의  사람들이요 또 석가모니도 화목사람들이요 다 화목 사람들인데 그거 가지고는 안  돼.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따라가라 그 말이라.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라가라. 누구 화평을 따라가라 말이요? 누구 화평을 따라가라 말이요? 이거  화평함을 행하라 말이 아니요. 화평함을 네가 행하라 아니고 화평을 좇으라 말은  따라가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어에야 어찌 됐든지 지금, 어떤  화평과 거룩이 있는데 그걸 향해서 네게 따라가라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원어에 뭐라고 해가지고 있어도 뭐 뭐라고 말한대도 요게 맞아요.

 그거는 뭐이냐? 주님이 하신 화평과 거룩 그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 주님의  화평과 거룩. 주님의 화평은 어째 했느냐? 세 가지로 사죄, 칭의, 화친으로써  화평했어. 그 사죄, 칭의, 화친으로 화평한 그것은 거룩이 돼. 그 거룩과 화평은  하나라.

 그래 하는 것은,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하는 일  했는데 화친하는 일을 다 완성을 하고 죽었습니까? 화친하는 데에다가 다  투자하는 것으로 끝이 마쳐졌습니까? 화평이 다 되는 것으로서 완성으로  끝났습니까? 자기가 투자하는 것이 투자가 끝났습니까? 화평 달성으로  끝났습니까? 뭐이요? 여기에 양성원 학생들 달성으로 끝났소? 다 투자로 끝났소?  모르지. 그래. 투자로 끝났어. 투자로 끝나. 투자로 끝났기 때문에 다 화평에 다  기울였기 때문에 나머지키는 그저 다 기울였으니까 그 화평에 대해서 그러면 이  남은 게 있으면 계속할 것이고 이러니까 다 기울인 그것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도 깨달아야 돼요.

 이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냈다 그것은 그걸 다 본 게 아니라 당신의  전부는 화평에 완전히 다 기울여졌기 때문에 그 화평 뭉텅이가 됐어. 사죄  뭉텅이가 칭의 뭉텅이가 됐어.

 이러기 때문에, 기독자들이 하는 노력은 끝이 없어. 끝이 없는데 충성으로 다  해서 그것으로서 다 없어지는 거, 없어지는 것으로 성공이 돼요, 있고 성공이  아니라. 없어지는 것으로 성공 됩니다. 이것도 무슨 말인지 가 가지고 깨달아야  돼.

 없어진 것으로 성공돼요, 없어진 것만이 성공된 것이지 있고 성공되는 건  아니라. 네, 앞으로 계속해서 거석할 것입니다.

 하루 삼십 분 기도 놓지 말아요,  반사들은 공과를 꼭 외우도록 노력을 하고,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잃지 말고 꼭 계속해야 환난을 이깁니다. 그전에 환난  이기지 못해요. 우리 서부교회는 못해도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하겠지마는 오 년  계속이라. 하루 삼십 분 기도를 정해 놓고 하는 것이 오 년 계속이라.

 이 가운데서도 조롱하는 사람 있어. 하루 삼십 분 기도 미래를 위해서  삼십 분 기도 한다 하는 거 그거 뭐 공연히 백지 거석하지 그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래 조롱을 한다 하는데 그게 어리석어. 저는 그렇지 다른 사람 그래  하루 삼십 분 미래를 위해서 기도해.

 그래 진합태산으로 하루 삼십 분씩 그래도 기도한 그것이 티끌모아 태산되는  것으로 그 기도가 주 모여 가지고서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그걸 하고 하나님이  고에게 충성으로 보시고 도와서, 인간의 할 수 없는 그 길을 가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가는 것인데 그것은 다 구해서 당신에게, 필요성으로 구하는 그게  믿음이요 그럴 때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 꼭 기독교는 그러기 때문에 실행 없는  기독교는 다 죽은 기독교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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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9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사도행전 3장 16절/ 861012주새 선지자 2015.12.11
3468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사도행전 3장 16절/ 861012주전 선지자 2015.12.11
3467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사도행전 3장 16절/ 861012주후 선지자 2015.12.11
3466 예수로 난 믿음/ 사도행전 3장 16절/ 860926금새 선지자 2015.12.11
3465 예수님이 하신 세 가지와 결과/ 사도행전 1장 6절-8절/ 860609월새 선지자 2015.12.11
3464 예수님이 오신 목적/ 누가복음 22장 14절-20절/ 890813주새 선지자 2015.12.11
3463 예수님이 오신 목적/ 요한복음 5장 5절-9절/ 1976년 28공과 선지자 2015.12.11
3462 예수님의 화평함을 좇으라/ 히브리서 12장 14절/ 880420수새 선지자 2015.12.11
3461 예수님의 피와 살/ 요한복음 5장 52절-59절/ 810311수야 선지자 2015.12.11
3460 예수님의 탄생/ 누가복음 2장 1절-7절/ 1973. 12. 30. 52공과 선지자 2015.12.11
3459 예수님의 죽음에 연합/ 로마서 6장 5절-11절/ 810723목새 선지자 2015.12.11
3458 예수님의 제자의 뜻과 자세/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800713주후 선지자 2015.12.11
3457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800713주전 선지자 201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