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3:35
예수로 말미암아 얻은 다섯 가지
1986. 9. 24. 새벽 (수)
본문:사도행전 3장 14절∼16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언제든지 신앙은 체계적입니다. 신앙은 체계적이라 그말은 무슨 생물이든지 생물은 그 본체가 있고 또 지체가 있습니다. 모든 지체가 다 본체에 붙어 있어야 지체도 살고 본체도 또 본체노릇을 합니다. 아무리 장사의 팔이라도 팔을 끊어 놓으면 그 팔은 송장이지 장사의 팔노릇을 못합니다. 또 아무리 명철한 그 사람일지라도 두뇌라든지 신경이라든지 그런 것이 다 본체에 붙어 있어야 되지 두뇌를 두뇌대로 그 뇌를 잘라내고 또 신경을 신경대로 잘라내면 그는 잘려나간 것도 죽고 본체도 본체노릇을 못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은 체계적이라 하는 말은 예수님 믿는 도리, 예수 믿는 도리도 꼭 생명 가진 자의 몸과 같습니다. 이 도리 중에 하나는 예를 들면 눈이 되고, 한 도리는 귀가 되고, 한 도리는 발이 되고, 손이 되고, 또 각 내장이 되는 것처럼 이렇게 모든 진리가 연결돼 있어야 한 진리 한 진리도 능력으로 역사할 수가 있고 또 모든 진리가 합해져 있어야, 연결돼 있어야 그 본체인 자기의 신앙도, 신앙의 그 본체도, 신앙의 전체도 살아서 역사하지 이 진리 이 성구는 믿고 또 저 성구는 믿지 안하고 그래도 그것이 헛일입니다.
거기에 효력이 있는 것은 실제로 이 효력이 있는 것 있고 실지의 효력이 아니고 그 무슨 풍채나 보고 되는 그런 효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장사의 그 손이 보이니까 장사의 그 손이 썩 나와 있으니까 ‘저거 아무것이 손이다.’ 이라면 그 사람을 두려워 떠는 사람이 그 손을 보고 ‘저 아무것이가 저게 와서 지금 손을 내밀고 있구나’ 그 효력도 있습니다. 겁을 내서, 만일 그 손의 힘으로써 한번 제게 대하면 제가 아주 전멸이 되고 절단이 날 터이니까 사람이 보고 떨고 겁을 낼 수도 있고, 또, 자기가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저게 아무것이 손이다’ 하면은 `그분이 뭐 있으면 든든하다’ 하고서 위로도 되고 다른 사람이 말할 때에, 몸뚱이는 보지 안하고 손만 보고 이거 ‘아무것이 손이 저 지금 보인다’ 이라면 손의 도움을 바라고 그 사람이 안심도 될 수 있고 또 평안도 될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도 ‘야, 네가 아무것이 그 사람을 깔보지 말아라. 그 아무것이가 아무것이에게 속해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냐? 아무것이가 아무 그 실력 있는 자에게 속해 있는데 그 실력 있는 자의 손이 거기 와서 지금 역사하고 있다. 그 사람이 지금, 그 사람의 거게 발걸음이 와서 그 사람이 지금 거게 와 있다.’ 이런 말 하면은 다른 사람이 소문만 듣고 또 한 부분만 보고 놀라기도 하고, 또 원수들은 놀래기도 하고, 또 그 편이 된 사람은 혜택으로 인해서 혜택을 보고 안심도 하고 위로도 되고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의 그 효력은 없습니다. 몰라 그렇지 그 사람의 손이 끊겨서 벌써, 손을 끊어서 손이 거기 와서 끊겨 가지고 거기 와 있는 것이니까 그 끊겨진 그 손이 무슨 효력을 나타내며 끊겨진 그 발이 무슨 효력을 나타내겠습니까? 그저 그것은 선입적 관념과 기존 지식을 인해서 위로도 받고 두려워하기도 이래 하지마는 실상은 아무 실력은 없습니다. 가서 뭐 송장된 팔을 거머쥐면 좀 징그럽기나 하고 더럽기나 했지 그게 무슨 힘이 있겠습니까? 아무 힘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는 도리를 이 성구든지 저 성구든지, 이 교리든지 저 신조든지 자기가 그 부분적으로 믿고 그 전체를 믿지 안할 때에는 꼭 그와 같습니다. 부분적으로 믿으면 본체에 권위, 능력, 그 위풍으로, 위엄과 위엄의 그 바람으로, 위풍의 그 효력을 봅니다. 효력을 보지마는 실제의 그 지체의 효력은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형태나 또 그런 과거에 무슨 그런 실력의 위엄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그 효험을 보기는 보지마는 실제의 그 능력이 와 가지고 할 수 있을 때는 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뭐라고 비유할꼬? 마치 자동차가 가면은 먼지가 일어나는 것처럼, 또 비행기가 가면은 소리가 울리고 들리는 것처럼, 그러나 소리 그거는 아무 힘 없습니다. 또 먼지 그거는 본체가 아니고 그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그 파동이요 또 일어나는 모든 소리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실상을 믿지 않는 거게서 효력이 있습니다. 실상을 믿지 안해도, 처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어서 뭐 병이 낫고, 또 이렇게 처음에 예수 믿으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가정을 애먹이는 귀신들도 쫓겨나가고, 또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네들의 모든 하는 일에도 효력이 오고 이래 하는 것은 그 실상의 능력이 와 가지고 일해서 일하는 그게 아니고 그 능력의 바람에, 그 능력의 광채에, 그 능력의 모든 위엄의 효력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빈약한 효력이 오고 가장 미약한 그런 효력이 옵니다.
그러면 그 미약한 효력이 오면, 미약한 효력이 와서 무슨 일 하는가? 썩어지고 없어질 일을 합니다. 썩어지고 없어질 일,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 속한 자연 은총의 것이 된다 말입니다.
육신의 병이 암만 나아도, 육신의 병이 암만 그거 나아도 나은 그 병은 마지막에 그 육신은 죽을 것이지 육신의 병이 나음으로 그거는 껍데기요 속에 실상은 뭐이냐 하면은, 육신의 병이라면 그거 다 마음과 고기덩어리가 합한 그 심신이 합해서 육인데 그 나으면 마음도 좋을 것이고, 또 몸도 또 편리할 것이고, 또 자기 경제에 사업이나 그런 것이 잘되면 모든 것에 자원도 편리할 것이고, 또 좋은 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썩음에 속했고 죽음에 속했고 없어짐에 속했습니다.
인제 그런 것이 영생하는 그 마음의 기능이, 비로소 구원을 얻어야, 그 마음과 그 몸의 기능이 썩지 않을 것으로 영생할 그 기능으로 이렇게 성화가 돼야 그게 참 알맹이를 얻은 것입니다.
또 자기가 이 모든 없어질 물질이나 이 지위나 권세나 그런 것 얻은 그것은 그것이 예수 믿으면 효력을 봐서 된 것입니다마는 그것은 아주 실상이 와서 역사하는 것보다도 실상의 그 능력의 위엄과 그 광채와 빛이 와 가지고 그런 효력을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만으로서 있으면 자기가 아무리 수많은 물질을 얻었다 할지라도 그 물질은 다 썩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그 물질을 그렇게 얻어 가지고 그 능력이 오면은 그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사용하는, 하나님의 영감대로 의롭게 사용하는 그 사용이 되면 그것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이 되는 것입니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하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자기가 예수 믿어서 보물을 얻었다 할지라도 얻은 보물을 그대로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아직까지 그것은 썩을 보물입니다. 그 보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게 거룩하게 바로 그것을 사용이 될 때에 그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없어질 것들을 얻는 그것은 하나님의 지극히 큰 능력의 위엄과, 지극히 큰 능력의 그 바람과, 지극히 큰 능력의 그 빛이 그 일을 이루었고 실상이 와서 이룬 것은 아닙니다. 실상이 이룬 것은 실상이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없어지지 안하고 영원이 됩니다.
그뭐 그런 것을 잘 비유가 잘 안 되지마는 언제, 이 정권 말년에 경주에 거짓부리 어떤 청년이 하나 와 가지고 자기가 이 대통령 양아들이라고 그래 말하니까, 와 가지고 서장한테 군수한테 전화하기를 수고한다 하고서 나는 이 대통령 양아들이라 하는 것을 그걸 슬며시 소개를 하니까 그만 그날 경주 시내가 마구 뒤집어졌더랍니다. 또 지금은 그때 요량하면 지금 건국이 오래 됐고 해서 다를 때입니다.
그래 서장이 와 가지고 무릎을 꿇고 와서 발발 떨면서 와서 뭘 존대를 하고 대우를 하고 그뭐 그때 한창 일이 났는데, 그래 서장이라 군수라 하는 사람들이 와 가지고 이 귀하신 분이 어떻게 여게까지 왕림을 하셨느냐고서 이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 사람이 양아들이 아니고 지나가고 나 보니까 아주 거짓부리라.
아주 거짓부리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그랬지마는 그만 그 이름을 파니까, 자기가 양아들이라 하니까 그 바람에 그 위엄이 있었더라 그거요.
그래 그때 그 바람이 한참 불었습니다. 제가 그때는 서울에 꼭 한 달에 한번씩 가 가지고, 청량리교회 가 가지고 수고를 했었는데 차에 가니까 뭐 청년들이 찌글찌글 웃으면서 ‘귀하신 분이’ 귀하신 분이라 말을 자꾸 많이 써요. `귀하신 분이' 해 놓고 또 찌글찌글 웃고, 저거끼리. 또 ‘귀하신 분이’ 말해 놓고 또 찌글찌글 웃어요. 그래서 이거 이게 뭐인가? 그래 나중에 물으니까 그 경주에 이 대통령의 가짜 양아들이 와 가지고 양아들이 왔다고 말하는 그 바람에 지금 거게서 경주가 모두 소동이 나고 뭐 하루인가 얼마인가 그래 됐더랍니다.
이것처럼 예수님의 이름은 신구약 성경이 예수님의 다 이름인데, 예수님을 믿되 이 전체를 다 믿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믿고 또 껍데기만 믿고 이래도 효력이 있습니다. 처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믿으면 구원 얻는다 해서 예수를 믿으니까 병도 낫고, 예수를 믿으니까 무슨 작은 병만 낫는 게 아니라 암병도 낫고 그런 병도 낫습니다.
그 사람이 성경적으로 믿지를 아니하고 그저 ‘예수 믿으면 병낫고 구원 얻는단다’ 하는 이런 말만 듣고 그래 믿는 것은 성경대로 믿을라면 참 거리가 멉니다. 감감합니다. 그래만 믿어도 없어질 것들은 이루어지고, 육신의 병도 낫고, 또 그럼으로써 또 귀신도 나가고, 또 이 모든 하는 사업도 잘 되고 그럴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런 것은 그것이 이 성경대로 전체를 이렇게 다 믿지 안하고 어느 한 성구만 믿고, 이 교리만 믿고 다른 교리는 믿지 안하고, 또 그저 껍데기로 ‘예수님의 이름만 믿으면 그렇단다’ 하는 것을 성경대로 어떻게 그 바로 참되게 믿는 그 실상은 자기가 알지 못하고, 실상에는 가까이 가지도 못한 이런 믿음만 가져도 효력이 있다 그 말이오.
이런 믿음만 가져도 효력이 있고 또 하나 개별 개별의 성구만 믿어도 효력이 있습니다. 효력이 있는 그것은 마치 끊겨 있는 팔을 보고서 좋아하기도 하고 놀래기도 하고 의지하기도 하고 하지마는 실상의 효력은 없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어느 한, 이 체계적으로 믿지 안하고 어떤 한 성구를 믿고 이래도 효력은 있으나마 그거는 끊긴 팔을 보고서, 끊긴 팔의 위엄으로, 끊긴 팔의 명예로, 끊긴 팔의 그 과거의 이력으로, 전체 이력으로 인해서 효력이 가는 것이지 실상이 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소한 껍데기 병이나 낫고, 이렇게 뭐 세상 일이나 잘되고, 돈이나 부자나 되고 하는 그런 것이지 그 실상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꼭 같은 전지 전능자가 되어지는, 이 참 완전한 사람이 되어지는, 이는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자기 것으로 상속받아 가지고 통치할 수 있는 그런 실상의 그 권위의 그 실상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오.
내가 이 말하는 것이 이거 뭐 이거 비유한다 해도 다른 걸 비유할 것이 없어 그래 비유하니까 알아듣고자 하는 사람은 약간 알아들을 것이지마는 그리 안 하면 모를 사람은 모를 거라 그거요.
그러면, 그저 예수님의 이름만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구원 얻는다’, 또 ‘예수 믿으면 병 낫는다’, `예수 믿으면 귀신 쫓겨나간다', `예수 믿으면 모든 하는 일에 축복을 받는다’ 하는 그 믿음을 가지는데 그 사람 믿음이 성경대로의 믿는 믿음이 아니고 그저 말만 듣고 이거 참 껍데기 믿음을 가졌다 그 말이오.
껍데기 믿음을 가졌는데 그래도 그 효력이 있습니다. 껍데기 믿음만 가져도 효력이 있어요. 실상이 아니라도 그 위풍과 그 모든 이름, 그 이름을 가지고 효력이 있어.
그 내가 비유하기를 경주에 이 대통령 양아들 가짜 양아들, 참 진짜 양아들이 아니고, 가짜 양아들이지마는 원청 그때 이 대통령은 다 대통령이고 그때에 정권을 가지고 계시니까 그 양아들이라면, 실상 양아들이라면 참 경주가 뭐 없어질라면 없어지고 있을라면 있어지고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그런 일이기 때문에 실력이 있지마는 그 이름만 가져와도 그렇게 있더라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것은 껍데기 이름만, 그저 ‘예수 믿으면’ 하는 그것도 그게 성경대로 믿어야 되는데, 성경대로 믿는 것은 실상을 믿는 것이고, 그저 말만 듣고 예수 믿는, 성경에 근방에 가지도 안한 그래 믿는 것은 예수의 이름에 그 껍데기, 이 바람만, 소문만 듣고 믿는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와 가지고 ‘우리 편도 되지도 안 하고 우리를 따라다니지도 안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서 귀신을 쫓아내고 있읍디다. 그래 우리가 야단을 쳤습니다. 이놈들 우리를 따라다니지도 안하고 우리 편도 아니면서 예수님 이름을 팔아 가지고 귀신을 쫓아낸다.’고 그렇게 야단을 쳤다고 그라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가 내 이름으로서 귀신 쫓아내는 그런 효력을 보고 나를 반대하지는 안할 것이다. 나를 따르지 안했을지라도 그 사람이 그래도 나를 존경하고 소망하고 가까이 지금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뭐 할라고 나무라느냐? 냅두지.’ 그래 제자들을 나무랬다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거 성경에 있는 이 전부를 다 사실로 믿고, 사실로 ‘이 신구약 성경은 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확 무오한 말씀이요 천지는 변해도 한 성구도 변동이 없다.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전지 전능의 말씀이다. 이 한 말씀도 능치 못함이 없다.’ 이 사실을 자기가 전부 다 믿는 그 믿음을 가지면 팔만 떨어진 것이 아니라 말이오. 팔만 떨어진 팔만 믿는 게 아니고 전체를 체계적으로 믿어.
다 믿으면서, 다 믿는데 믿으면 이제 예수님의, 비유로 말하면 이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실상인데, 예수님의 실상이 우리가 접하기 쉽도록 나타난 것이 신구약 성경인데 예수님의 그 실상, 예수님의 팔이요, 다리요, 눈이요, 코요, 입이요, 뭐 전신 전체인데, 이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의 전체인데 예수님의 전체가 우리에게 한목 나타납니까 어떨 때는 손이 나타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발이 나타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입이 나타날 때도 있고, 그 지체가 나타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요 현실 현실마다 그때에, 요 현실에는 예수님의 지체의 어느 부분이 나타나고 조 현실에는 예수님의 어느 지체의 부분이 나타나고 그렇게 나타날 때에 그 나타나는, 예를 들면 손이 나타나고 발이 나타나고 이렇게 예수님의 지체가 나타날 때에, 그때에 전체를 다 정확 무오하게 신구약 성경에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 무오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지 전능의 말씀으로, 또 이는 가감이 없는 말씀으로 자기가 이 성경 전체를, 예수님의 전체를 확실히 믿는, 확신하는, 확신하는 그 사람이 현실에 나타난 그 진리도 곧 예수님의 그 지체이나 그 지체는 예수님의, 비유컨대 말이오. 지체라비유가 아니고 또 실상입니다.예수님의 지체 중에 손이 나타났는데 그 손을 자기가 나타났을 때에 그 손으로 통해 가지고 그 손에는 예수님의 그 본체와 전체, 예수님의 발도 눈도 입도 그 전체의 그 체계가 그 손 하나 나타났으니까 그 손을 자기가 접하면서 이 손은 예수님의 전신이 왔기 때문에 손을 잡을 때에 예수님의 전신을 잡은 것이고, 손이 자기를 구원할 때에 예수님의 전체가 와 가지고 구원하는 것인 이 사실을 믿는 믿을 때에는 그 전체의 효력이 자기에게 오는 것입니다. 요거 여러분들이, 좀 이거 뭐 간단한 시간이니까 이걸 할라면은 여러 시간 걸려야 될 터인데.
이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비유컨대 예수님의 팔이 끊겨지지 안하지마는 예수님의 그 팔, 끊긴 팔을, 끊긴 팔만 상대하는 사람 있고, 한 시간에 예수님의 팔을 상대하나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끊긴 팔만 이래 붙든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그 팔을 붙드는 동시에 예수님의 전체를 붙드는 사람 있고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그 현실에 나타나신, 이 현실에 나타나신 예수님 진리, 자기 현실에 나타난 영감 도리 말이요, 자기 현실에 나타나서 ‘이래라 저래라’ 성령이 가르치는, 기름 부음이 가르치는 그 가르침은 그게 뭐입니까? 가르침 그것이, 가르침 그것이 예수님의 본체가 나타나 가지고, 본체가 영감으로 나타났고 영감이 진리로 나타났고 진리가 성경 문서로 나타나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들어가면 그거라 말이오.
그러면 그 현실에 영감이 자기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그 현실에 해당되는 도리.
현실에 해당되는 도리라면은 그것은, 그것이 예수님의 뭐입니까? 예수님의 뭐입니까? 예수님의 지체라는 것이 인정이 됩니까? 예수님의 지체 실상입니다.
알겠습니까? 신구약 성경은, 신구약 성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예수님을 나타내고 있는 게 신구약 성경입니다. 신구약 성경인데, 이 신구약 성경 문서, 신구약 성경이 든 이 문서. 문서 속에는 이 속에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말씀이 기록돼 있고, 말씀 속에는 뭐이 있습니까? 이 말씀 속에는 진리입니다, 이 말씀이 진리입니다. 이 진리 속에는 뭐이 있습니까? 영감이 있습니다. 영감이 있습니다. 영감 속에는 뭐입니까? 영감 속에는 곧 막바로 예수님의 본체이십니다. 알겠습니까? 이런데 우리에게 접하기 쉽도록 이랬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내 현실에 나타날 때에 그때에 그 성구 그것은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바로 지체입니다. 지체인데, 예수님의 지체를 자기가 잡되 예수님의, 말이 모순되나 여러분들 알도록 하기 위해서 비유컨대 그 끊긴 팔을, 끊긴 팔을 잡는 사람도 있고 전체에 속한 팔을 잡는 사람도 있다 그거요. 끊긴 팔을 잡는 사람의 그 효력은 본체의 실상이 효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효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끊긴 팔이 무슨 효력이 있어? 끊긴 팔은 죽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본체에 속한 그 팔을 접하면 그 팔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 팔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전체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알겠습니까? 전체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말이오.
이 말하는 것은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알릴라고 이렇게 지금 말하고 있느냐 하면은 예수님의 팔이 끊겨지느냐? 끊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뭘 가르칠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되,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신구약 성경을 다 믿는 건 예수님을 다 믿는 것이고, 신구약 성경에 어느 부분만 믿는 것은 예수님의 전체를 믿는 것이 아니고 한 지체를 믿는 것이고, 그러니 한 성구만 믿고 다른 건 믿지 못하고, 한 성구밖에 모르는 사람은 한 성구만 아니까 한 성구만 믿지 다른 걸 모르니까 못 믿는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믿는 것을 비유컨대는 끊긴 한 팔과 같이 그렇게 믿는 사람 있고 다 같이 그 한 팔을 잡았지마는 전체에 연결된, 한 팔을 잡았는데 전체를 잡은 것이 된 사람도 있고 또 한 팔을 잡았는데 그 팔만 잡았지 그 전체를 잡지 못한 사람도 있고, 또 예수님의 실상의 역사를 접하는 사람도 있고 실상의 역사는 접하지도 안하고 그 소리와 바람과 위엄만 접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 효력도 볼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거는 비유컨대 이와 같다.
조금 이해가 됩니까? 여러분들이 이라면 요 말을, 내가 알아도, 여러분들에게 말을 할라 해도 그 말이 그것이 인간의 뭘로 가지고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에 말이 잘 안 되고 자꾸 이래 해도 그 근방에 빙빙 돌지 그 실상을 집어내지는 못한다 말이오. 그거는 여러분들이 가 가지고 자꾸 기도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았을 때에 생각이 달라진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같은 마음이지마는 성신의 감화가 없을 때에 마음과 성신의 감화가 왔을 때에 마음과 마음이 판이한 것을, 다른 것을 경험해 봤습니까? 성신의 감화가 오기 전에는 예수 믿는 하나 무슨 예를 들면은 죄짓는 것을, 죄짓는 것을 성신의 감화가 오지 안하고 마귀가 왔을 때는 그 죄짓는 것이 참 유일의 취미가 되고 막 소원이 돼서 그 죄를 짓고 싶어서 야단이 되고 소원이 됐던 것이, 그것이 마귀가 떠나가고 나면, 마귀만 떠나가고 나면은 그 소원했던 것이 소원이 없어집니다. 마귀가 떠나가면 그렇게 소원됐던 게 소원이 없어집니다.
또 마귀가 떠나가고 양심이 오면은 또 그 소원하던 게 부끄러워집니다. 또 양심 오니까 부끄러워졌는데 성신의 감화가 오면은 거게 대해서 어찌 됩니까? 거게 대해서 죽을 만치 기가 차집니다. 거게 대해서 또 두려워 떨리기가 기가 찹니다.
그러면 꼭 같은 죄인데 그 죄를 마귀가 왔을 때는 그 죄가 짓고 싶어서, 뭐 배고플 때 밥보다도, 돈 없을 때 돈보다도 그 죄가 그렇게 소욕이 되고 욕심이 나고 그렇게 좋고 뭐 밤이고 낮이고 이것만 소원, 이것만 이루어지면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소원하는 그 죄가, 죄 그놈이 소원이 된다 말이오.
소원이 되는데, 마귀가 떠나가고 나면은 그 소원이 없어져. ‘내가 뭐할라고 소원했나?’ 그렇게 소원이 없습니다. 슬그머니 떨어져 소원이 없어집니다.
소원이 없어지고 그라다가 나중에 양심이 오면은 그게 어찌 됩니까? 그 소원하는 그게 소원이 조금 됩니까 많이 됩니까 도로 소원되던 것이 그것이 싫어집니까? 싫어집니까? 느껴봤습니까? 싫어집니다.
또 영감이 오면 어찌 됩니까? 그렇게 좋아하던 게 영감이 오면 어찌 됩니까? 죽을 지경이라, 지금. 자기가 참, 그것이 자기가 죽음보다도 더 무섭고 싫고 징그럽고 하나님 앞에 죽을 지경으로 두렵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안해요.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것도 껍데기로 믿는 것이 있고, 말하자면 예수 믿는 데에 껍데기로 믿는 믿음이 있고, 그것도 효력은 있습니다. 껍데기로 믿는 믿음이 있고, 또 지체를 톰박톰박 끊어 놔서 끊긴, 끊긴 토막만을 또 믿는 사람도 있고, 이러니까 끊긴 토막으로 믿는 사람은 그 토막으로 믿는 그 효력을 인해서 자기가 전체를 믿는 믿음으로 어서 빨리 자라가야 되겠고 껍데기 이 바람만 보고 믿는 이 사람은 그 본체를 믿는 그 신앙으로 빨리 자라가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 사람에게 제일 보배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사람에게 제일 보배인데 이걸 껍데기로 자꾸 믿기 때문에 안 돼. 실상으로 믿어 봐야 돼요, 자꾸.
자, 여게 나면서 앉은뱅이가 이 모든 일반 사람을 가리킨 것인데 나면서 앉은뱅이가 이로 말미암아 몇 가지 얻었습니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몇 가지 얻었소? 이 다섯 가지 얻었습니다.
영생하는 생명 얻었습니다. 영생하는 생명을, 이 땅위에 예수 믿는 도 외에 영생하는 생명 있습니까?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또 하나는 뭐입니까? 자기가 이 영생하는 생명을 얻어서 영생하는 생명은, 영이 얻은 것 말고. 이 심신의 기능이, 영생하는 그 생명을 심신의 기능이 얻었으면 심신의 기능의 백분의 일이 영생하는 생명을 얻었으면 백분의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사람과 모든 존재에게 봉사하는 것이 주는 것이 제 일입니다.
주는 일 하게 됩니다. 백분의 일이 주는 일 합니다.
만일 백의 백이 새생명 얻어서 완전히 진리와 영감의 것이 돼 버리고 말았으면은 백의 백은 다 주는 것이 되지 누구를 받고 뭐 얻고 거기서 혜택을 보고 거기서 도움을 받고 이용을 할라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이거 여러분들이 뭐 새길라면 얼마나 새겨야 될란지 모르는데 이 껍데기도 지금 이래 소개하는데 이걸 듣고 자기가 자꾸 심신을 기울여서 새겨야 되지 새기지 안하면 소용 없다 말이오.
그러니까 기도하러 가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만일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앉은뱅이가 살아났다. 나았다. 앉은뱅이가 나았다.’ 그러면 병이 나았다. 이거는 살아난 것이니까 고거 하나를 새겨 가지고 한 달도 걸리고 두 달도 걸릴 수가 있고 뭐 며칠도 걸릴 수 있습니다. 이래 깊이 이래 새겨서 느껴야 되지 그리 안 하면 모른다 그거요. 자, 그러면 병신이 나은 거, 병이 나은 거는 원죄와 본죄에서 나아서 죽은 자가 살아난 것 아닙니까? 또 그 다음에 둘째로는 그렇게 뭐이 됐습니까? 주는 자 됐다 말이오, 주는 자.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심신의 기능이 피와 성령과 진리로 전지 전능의 심신의 기능으로, 영생하는 기능으로 완전히 살아나지 안한, 살아나지 안한 그 기능은 그 사람은 아무리 제가 목사노릇 한다 해도 다른 사람에게 기생충이지 절대 도움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난 것만치 봉사하는 자, 구제를 받던 자가, 구걸하던 자가 남을 구제해 줄 수 있는 자가 되어진 것이라 그 말이오.
또 자신이 이제까지 하나님 성전에 출입 못 했지만 하나님 만났다 그 말이오.
성전에 들어가. 그러면 구원에 들어갔다 말이오. 성전에 들어가.
또 넷째로는 뭐입니까? 넷째로는 뭐이요? 그렇게 자기같이 항상 탄식이고 ‘나 같은 팔자가 어데 있느냐? 나 같은 인간이 어데 있느냐?’ 인간 중에 자기가 제일 불행한 사람으로서 그 마음 가운데 항상 불행과 불만과 불평과 낙망과 원망스러운, 그 마음에 불안만 가뜩 찼던 사람이 예수로 말미암아,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 군중 가운데 제일 기쁘고 즐거운 사람 안 됐습니까? 요걸 요렇게 요 현실을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거라 말이오. 그건 하나의 그 형식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도리를 가르쳐 주는 형식 계시라. 그렇게 기쁜 사람이 됐어.
또 그 다음에 다섯째로는 뭣 했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천대받는 사람이 모든 사람에게 제일 존대받아서 인기 집중의 사람이 됐어. 베드로 같은 그런 사람도 그 사람이 천한 사람이지 뭐 어부 가운데 하나니까 천한 사람 아니요? 그러나 세계에서, 우리 개혁 교회서는 그렇지 안하지마는 천주교로 말하면, 천주교 신자가 제일 많습니다. 천주교로 말하면 베드로로서는 그보다 더 존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마리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데 이렇게 그 베드로 같은 사람도 존대받는데 지금 존대받는 것보다도 앞으로는 더 그래.
지금 우리가 제일 인간 중에 누구를 제일 존대합니까? 아브라함을 제일 존대하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이 일반의 서민이요 또 그 사람이 일반 서민으로 살았고 뭐 노동하고 사는 노동자입니다. 그렇게 큰 사람 아니오. 이러나 아브라함은 모든 사람에게 제일 존대해서 모든 인류 가운데 아브라함 모르는 사람 없어. 이렇게 존대하게 됐다 말이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다 그와 같이 다 돼요.
이러니까 예수의 이름으로만 이 다섯 가지가 되고, 자기가 가진 사람은, 자기가 가진 사람은, 예수의 이름을 가진 사람은 ‘아나, 주노라. 받아라.’ 남에게 줘서 남이 다섯 가지를 받을 수 있는 그 사람은 무슨 수입했습니까? 예? 사람 수입했어.
사람 수입했고, 또 사람 수입뿐입니까? 모든 사람이 막 영광을 돌려서 그 영광을 돌려, 그 영광을 자기가 받으면 안 되기 때문에 ‘왜 우리 개인의 경건과 의로 가지고 된 줄로 알고서 우리를 주목해 보느냐?’ 주목해 보느냐 하는데 그 다음에 보니까 “영화롭게 하였느니라” 하는 거 보면은 영광을, 그 말하지 안해도 저거에게 막 영광을 돌리고 ‘저 무슨 사람이가?’ 이렇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그 영광을 예수님께로 바로 돌리고 자기네들이 받지를 안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모든 인류에게 존영을 받는다 그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거 뭐 얼마나 지금 이걸 새겨야 되는데 여러분들이 새겨서 실상을 만들어야 되는데,
오늘 아침에 증거하는 거는 뭐이냐 하면은 부분적으로만 깨닫고 이 전체, 오늘 이거 앉은뱅이 요 사실에 대해서도 이 전체를 깨달아야 되는데, 어느 한 성구, 한 토막만 깨닫고 전체를 깨닫지 안하니까 떨어진 팔을 상대하는 거, 떨어진 팔은 시체 아니요? 권능 없는 팔, 떨어진 팔을 상대하는 거와 같은 그런 신앙 가진 사람도 있고, 또 이거 껍데기 중에 껍데기 바람을 믿는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게 외식 신앙들이 많고, 외식 신앙과 부분적인 신앙 있으니 부분적인 신앙은 효력이 있지마는 그거는 위풍의 효력이지 실상의 실력의 효력은 가지지 못한다. 부분적인 신앙. 전체의 체계적인 전체의 신앙을 가져야 된다. 또 실상의 신앙이 아니고 껍데기 신앙 외식하는 그 신앙은 위풍의 효력만 보지 실상의 효력은 보지 못한다 하는 그걸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자꾸 나와요, 자꾸 나와서, 뭐 오늘 아침에 또 많이 덜 나왔구만. 여러분들도 애 안 쓰면 나도 힘이 떨어져 애 안 써요. 자꾸 전화도 하고 자꾸 이래 가지고 깨워서 나와야 될 터인데 오늘 아침에는 뭐 모인 사람 얼마 안 돼요. 오늘 아침에 모인 사람은 한, 모르겠어, 한 칠백 될란지 그래요.
자꾸 올라가서 칠백이 팔백 구백 천, 천이 천오백 이천 자꾸 이래 나가면 하나님도 기뻐해서 자꾸 은혜를 주실 것이고 또 나도 힘이 나서 자꾸 더 연구해서 여러분들에게 증거할 거고 이런데 뭐 자꾸 이래 놓으니까 떨어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안해요? 옛날 이스라엘이 모세의 손을 드니까 전쟁을 이기고 손을 놓으면 전쟁에 져.
그러니까 모두 양쪽에서 받쳐 가지고 들고 있지 안했소? 여러분들이 자꾸 이래 자꾸 많이 나오면 나도 힘이 나서 자꾸 이래 돼지고 안 나오고 이라면 나도 힘이 안 나와.
내가 뭐 이 자꾸 새벽기도 지킬라 하지, 지금 한 두 달리고 석 달이고 내가 좀 쉬면 싶어. 두 달이고 석 달이고 가 가지고 어데 가서 좀 조용히 나도 좀 기도나 하고 두서너 달 쉬면 해도 하루 아침을 내가 빼지 안할라고 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 내가 빼면 이게 나오다가 ‘아이구, 목사님 안 나오니까 인제 그만 우리도 안 나가도 되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그 내가 한 며칠만 안 나오면은 여기 뭐 삼분지 일쯤이나 오고 나머지는 안 올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나도 그래 힘을 쓰니 여러분도 좀 힘을 써야 되지.
오늘 아침에 전화로 심방한 사람 손들어 봐요. 새벽기도 나오라고 전화로 심방한 사람 손들어 봐요. 전부 순 게을배기들. 그래 놓으니까 뭐 뭐할 거야? 그라면 여러분들이 힘 안 쓰면 나 혼자 힘쓰면 소용 있습니까? 힘쓰다 안 되니까 나도 주저않는다 그거요.
자꾸 새벽기도 나오라고, 또 그거 전도라. 그 안 믿는 거라, 지금. 껍데기 믿는 거라. 껍데기 믿는 거 부분적으로 믿는 것이기 때문에 그걸 새벽기도 나와서 배워야 옳게 믿지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기도할 때에 말을 또록또록이 하는 사람은 저 멀리 떠나가서 기도를 하도록 하고 여기서 말할 때는 그저 소리는 내서 기도해요. 막 왕왕왕왕왕 소리를 내 기도는 해도 말이 콩팥이라 하는 것 또록또록해 버리면 그만 옆에 사람이 그 소리 때문에 자기 기도 못 하게 됩니다.
또 기도하는 사람도 기도하면 옆에 사람이 뭐라 하니까 자꾸 그게 소리로 시비한다 말이오. 시비하면서 옆에서, 하다 보면은 옆에 사람에게 자기 기도하는 것을 들어봐라, 옆에 사람 들어봐라, 옆에 사람 보고서 설교하는 거와 같은 그게 돼 버리고 기도는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설교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