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3:33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
1986. 10. 12. 주일오후
본문:사도행전 3장 16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예수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는 도입니다. 세상 것은 이런 것 저런 것 다 여러가지 자료들이 필요하지마는 예수교는 믿음만 필요로 합니다.
이유는, 우리가 상대하는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이시며 또 전지 전능의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모든 존재의 대주재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어떤 존재라도, 물질이나 사람이나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종류의 존재가 있다 할지라도 그런 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우리가 있기도 전에 벌써 다 지으셨고 또 그분이 운영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지식이 넓고 깊다 할지라도 그분의 지으신 것과 하신 일을 다 알 자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많고 풍성하고 충만한 것을 우리를 구원하신 이 구원을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접하고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어떤 이런 행동 저런 행동 행동도 당신이 사람 외에 모든 것의 그 움직임을 당신이 주권하고 계십니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택한 자들의 행동도 그분의 단일 주권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만드신 목적이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창조 속에 있으면서 하나님 당신을 바로 알고 당신을 바로 믿고 당신에게 바로 피동되는 것이면 다입니다. 그 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이것이면 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다른 이종교에는 뭐 이런 거 저런 거 필요한 요소들 있지마는 기독교는 당신 알고 당신 인정하고 당신에게 복종하면 그것으로서 다입니다.
사람들은 이 기독교를 믿음으로만 된다고 하는 것을 허무하게 생각하나 제가 허무하기 때문에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이분은 완전자이시요 전지 전능자시요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서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당신을 알고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에게 복종하는 거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원수가 뭐이 원수냐? 당신을 잘못 아는 것이 원수요, 또 당신보다 크게 높게 알고 관계 맺는 것이 원수요, 다음에는 당신에게 거스리는 것이 원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못나도 좋고 약해도 좋고 관계 없습니다. 그것은 뭐 얼마든지 당신이 인간 중에 제일 못난 자를 인간 중에 제일 잘난 자로 당장에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습니다. 총명을 자랑하지마는 총명을 지으신 이가 그분이십니다.
인간 중에 제일 저능의 사람을 제일 좋은 지능의 사람으로 당장 만들 수 있습니다.
다만 그저 요는, 당신을 바로 알고 당신을 믿어 주고, 당신을 믿어 주고 당신을 인정하고, 당신에게, 힘이 많든지 적든지 있는 대로 그에게 피동되는 요것만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바로 알고 당신을 믿고 당신의 움직임에 따라서 움직이는 그것이면 그것을 붙들고 우주와 영계의 모든 것을 통치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당신이 완전자인고로 기독교는 다른 것이 필요 없고 믿음만이 필요있다 하는 것입니다.
오전에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이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믿음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나왔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나면서 앉은뱅이 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배우지 안했는데 뭣을 그렇게 논리적인 복잡한 순서를 알았겠는가? 녜, 그 사람은 모릅니다. 모르나, 베드로는 알았고 또 베드로의 전한 데에서 베드로에게 영감한 그 영감이 그에게 건너가서, 논리적인 그 순서는 모를지라도 그 믿음을 그가 받아 가지고서 그 믿음을 가지고 믿은 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도 믿음이 행동까지 하는 데에는 일곱가지 순서를 거치는 것인데 이것을 몰라도 믿으면 거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릴 때 말이지 차차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야 합니다. 자라갈수록이 그 믿음이 아는 그 지성을 갖추지 안한 믿음이면 그 믿음을 하나님이 듣지 안하시고 지성적인 믿음을 하나님이 요구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과 덕, 믿음 위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한다 하는 그말은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서 믿는 것이요 덕은 사람에게 대해서 행동하는 것이요 지식을 더한다는 말은 이런 것이 다 믿음도 지성적이어야 되고 덕도 지성적이어야 된다, 하나님의 지식적인 믿음이요 덕이라야 되지 그저 자기 주관 믿음 그런 거 가지고는 인정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음은 처음에는 그저 자기 주관 행동에서 어떤 충격으로서든지, 믿을 때에 하나님이 그것도 들어서 그에게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갈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믿으니까 헛되지 안하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거게 응답해 주시는 그 역사로 인해서 ‘아, 믿으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차차 보여서 알려 주고 길러갑니다.
그러나, 차차 그 자라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그 도수와 그 정도를 자기가 따라서 이렇게 점점 자라가야 되지 자라가지 안하고 게을리 하고 망령을 부리면 거게서 중단해 가지고서 죽을 때까지도 그래 있다가 그대로 죽고 구원은, 건설구원은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차차 자기가 ‘하나님은 나를 중생시키셨다’ 하는 것을 알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뭘로 중생시켰느냐?’ 하는 그걸, `대속과 영감과 진리로 나를 중생시켰다’ 하는 것을 알리실 때는 우리가 또 알아야 됩니다.
또 그 다음에 ‘하나님이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서 대속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신 섭리가 있었다’ 또 그 다음에 ‘섭리보다 앞서 하나님이 내 구원을 위해서 없는 가운데서 모든 걸 창조하셨다’ 또 그보다 앞서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 그보다 앞서 ‘하나님 홀로 존재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당신과 꼭 같은 형상을 이루기 위해서 목적을 정하셨다, 하나님은 영원히 자존하신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이래서 우리 믿음은 본인이 모르든지 알든지 무슨 이종교에서 말한 믿음과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고, 단순히 인간끼리 이렇게 서로 믿고 안 믿는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믿음은 본인이 알든지 모르든지 저 태초, 영원 전부터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거게서 뿌리박아 움터 가지고서 그렇게 자라나온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움터 가지고 예정에서 자랐고, 창조에서 자랐고, 하나님의 섭리에서 자랐고, 대속에서 자랐고, 중생에서 자랐고, 또 이제는 자기의 중생된 그 영육 속에서 자라다가 우리의 비로소 심신을 통해서 발효합니다.
심신을 통해서 그때 나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몰라도 그렇게 나와서 그 믿음이라야 하나님이 응해지는 응을 하시지 그 믿음 아닌 거, 이 세상에서 별별 잡된 믿음도 있는데 그 믿음에 하나님이 응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믿음에 응하는 것이니 그것이 다 하나님의 예정적이요 하나님의 또 그 율법으로 나타난 법적이요 하나님의 계약적이요 이렇게 그 줄기의 유래가 있어 가지고서 되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이 점점 그 지성적인 믿음, 아는 믿음 되기를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이래서 차차 차차 알아가고, 또 우리 믿음이 연약할 때에 자라는 것은 저 믿음의 유래를 상고 때부터 영원 전부터 거게서부터 우리가 유래를 생각해 내려오면서 연구해 내려오면서 이렇게 할 때에 우리 믿음이 장성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의 장성은 어데 있느냐? 그 믿음의 장성이 기독자의 장성인 것입니다. 또 기독자들의 능력이 뭐이 능력인가?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그 믿음이 능력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능력이면 능력의 그 실상은 무엇인가? 그것이 곧 사죄 칭의 화친 영감 진리 이 다섯 가지가 내부에 실상인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아주 인간의 지식 안에 범위 내에 있는 게 아니고 인간의 지식을 무한히 초월해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세상 기존되어 있는 그 지식을 가지고 ‘그러면 이와같은 것이냐? 저런 것이냐? 무엇이냐?’ 온 천하 지식을 다 끌어대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게는 없습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순전히 거기에, 타락한 인류 너머, 인류 밖에, 그 범위 밖에, 마귀의 지식을 초월한 거게 있는 그 지식이기 때문에 세상 지식을 자본으로 삼아 가지고 그것으로 무엇을 사색하고 궁구해 갈라 해 가지고는 헛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만 이 방법은 알고, “내 말에 거하면” 알고 행하면, 자신이 그만치 성화되고, 성화된 것만치 또 새로 알고, 새로 안 그것은 자기가 칼날 앞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어떤 세상 부귀 영광을 다 준다는 그 앞에서도 그 진리는 요동치 안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그 행하는 거는 그 사람이 되어 있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된 것은 믿음을 지킴으로 객관의 그 능력을 힘입어 가지고서 지음을 받은 존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음이 자라가는 것은 그 믿음의 유래를 우리가 연구하고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우리의 믿음이 이것이 가짜냐 진짜냐, 인본의 믿음이냐 하나님께로부터 온 이 선물의 믿음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궁구할 때에도 우리의 믿음의 족보, 믿음의 그 유래, 믿음의 그 근원부터 내려온 연장된 그 순서를 우리가 생각할 때에 우리의 믿음은 건전해지고 또 잡탱이들이 다 제거되어지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성경에 “믿음의 연단이라” 하는 말을 많이 읽어 봅니다. 믿음의 연단이라는 것은, 이 믿음이 연단받는다 말은 순전히 하나님의 목적에서부터 움터 가지고 나온 그 순진한 믿음에, 인간들에게 와 가지고서, 일호 이호 삼호 사호 오호까지는 거게는 잡것이 없지마는 그 육호에서부터 인간의 그 심신 속에 믿음이 내주하는데 육호에 내주하는 그 육호에서부터 수많은 잡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잡된 것들이 많이 있는데 그 잡된 것의 믿음은 암만 믿어봤자 하나님이 거게 응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 어릴 때는 응하는 것은 그거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그렇지마는 믿음이 틀렸을 때에 하나님이 응하지 않습니다. 또 믿음이 잘못된 믿음이 되었을 때에 그런 것은 다 깨어 버립니다.
대개는 믿음의 연단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온 믿음이 아니면 그 믿음이 그때 유지되지를 못하고 그 믿음이 그 현실 환경에 피동되어 가지고서 변동되어지고 하나님께로 난 믿음은 그런 게 올수록 더 강하고 빛나고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거게서 믿음의 그 응답이라는 응답이 이루어지고 결실이 있고 또 없고 하는 데에서 그 믿음은 차차 차차, 금을 연단하는 것처럼, 금을 연단하면 잡석과 잡철이 다 타고 순금만 남는 것처럼 이 모든 믿음이 연단돼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선물로, 당신이 믿도록 또 하셔 가지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응해 주시는 그 순진한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후에는, 우리가 잘 아는 것인데 지금, 「그 이름이,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이 역사를 했다” 하는 그 이름에 대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사죄 칭의 화친의 세 역사입니다. 세 가지 역사는 예수님께서 단번에 이루셨습니다. 그 동안에는 이 세 가지 역사를 하셨지마는 해도 아직까지 미결로 되어 있었는데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비로소 이 세 가지 역사는 완성이 됐습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하신 것이 이 완성을 말씀하신 것인데 사죄 완성, 칭의 완성, 화친 완성, 이 세 가지 완성은 예수님이 이것으로 인해서 생명이 바쳐져서 그 전투의 생활이 대형으로 끝났고 대행으로 끝났고 화친으로 끝났을 때에 다시 사탄은 그 뒤에 도전할 것이 아무 도전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왜? 예수님님은 승리로 끝나 버렸기 때문에 그거 영원한 승리가 됐기 때문에 다시 예수님이 무슨, 시험에 들 일이 있는 것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으면 남은 전투가 있지만 그것으로 다 했기 때문에 남은 전투는 없습니다. 완전 승리입니다.
예수님은 도전을 하셨지마는 사탄은 도전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도전한 것은 예수님은 첫째 전투한 그 자연인 범위 속에 예수님이 계시지 안했고 자연인 그 범위를 넘어서 성령으로 잉태해서 초자연 인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사탄에게 도전할 수 있었지마는 사탄은 이거 무슨, 초자연의 존재로 그 사탄 아닌 딴것이 있어 가지고서 도전할 만한 그런 것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제이 아담에게 도전할 존재는 영원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이름은 다섯 가지. 사죄, 사죄는 우리의 죄 지은 거, 우리 범죄한 것은 과거 지은 죄, 현재 지은 죄, 미래 영원히 죄가 있다고 하면은 어떤 죄든지 우리가 범죄할 그 범죄는 다 형으로 받아 가지고서 그 죄를 완전히 없앤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형의 사죄, 또 대행의 칭의, 대행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에 그 지성 지공의 법을 우리가 다 행해야, 법에 완전 이행자라야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이는 완전 의 행한 의인이라’ 하는 통과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피조물로서는 아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행해서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뭣 때문에 타락을 먼저 줘 가지고 타락 가운데 예수님이 이렇게 대속하게 됐느냐? 대속하게 된 거는 우리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무리 한다고 해도, 에덴동산에서 범죄하지 안한다고 해도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 이행할 만한 자가 못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으로서야 이것이 완전 행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를 타락케 하시고 타락한 데에서 당신이 대속하셔서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도 나타내고 하나님의 요구의 그 무한하심도 다 달성해서 우리의 구원을 완전 구원이 되도록 이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의 이름” 이름이라는 것은 그 존재의 행동이 이름에 나타나 있습니다. 또 공로가 그 이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역사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게 간단하게 “예수의 이름이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 “네가 연약한 힘을 가지고서 그 이름을 배반치 하였으므로 너희 앞에 열린 문이 있고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내 새 이름이 너희 위에 기록하게 된다. 너는 성전의 기둥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신 그 이름이 지금 내나 이 이름입니다.
이 이름을, 이름이라고 말했는데 이 이름에 대해서 이제 해석은 사람들이 각각 달리 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제 널리 찾아 보면은 성경에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그 공로를 그 이름이라고 말했고, 또 예수님의 역사를 그 이름이라고 말했고, 예수님의 권위, 그 권위를 가리켜서 이름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이름은 세 가지 역사입니다. 사죄 칭의 화친의 역사요 공로요 또 권위입니다. 이 세 가지를 말하고.
이 세 가지, 예수님의 대형으로 사죄라 하는 것을 이것을 우리가 가만히 명상을 하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대형으로 사죄된 것은, 사죄라 말은 죄가 없다 그말입니다. 예수님이 대형을 함으로 사죄가 됐다. 그러면 사죄는 누가 인정하는 사죄인가? 이 사죄는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인정하는 사죄입니다.
우리 사람은 다 공심판을 받아야 되는데 예수님의 대속을 입은 사람들은 공심판을 완전 통과하고 나왔기 때문에 그 다음에, A죄, 무죄, 또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순종한 의, 유죄보다 무죄가 깨끗하고, 무죄보다 의가 깨끗하고, 의보다 하나님과 완전히 친합된 것이 깨끗하고 친합된 그것이 곧 새생명인 생명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명이 제일 깨끗한 것입니다.
이래서 예수님의 사죄는 어떤 사죄냐?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 지성과 지공법, 사람들이 법을 내어놓은 것도 그 법도 수많은 조문들이 있는데 아무리 조문들이 있어도 그 법은 인간 범위를 초월하지를 못했습니다. 인간 범위 내에 있는 것이지 인간 범위를 초월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 당신의 지성 지공의 전지의 그 범위를 완전히 다 밟고 그 범위에 가득 찬 것이 하나님의 입법입니다. 인간의 입법은 인간의 지능 속에 가득 찬 것이 인간의 입법인데 하나님의 입법은 하나님의 전지 전능의 그 범위 속에 가득 찬 것이 하나님의 입법입니다. 하나도 빠진 것이 없어. 이 법에서 우리가 죄 없다 하는 인정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이 인정은 인간의 행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뭐 똑똑하고 그 사람이 의인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을 다 범하지 안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얼마든지 정죄가 됩니다.
이러니까 이렇게 인간으로도 할 수 없고 이거는 전지 전능자만이, 이 법을 범한 것이 없다, 무죄라 말은 이 법을 범한 것이 없다 그말입니다. 또 칭의라 말은 이 법을 완전히 이행했다 하는 그말입니다. 이것은 무한하신 분의 법을 범함이 없고 무한하신 자의 법을 완전히 이행해서 무한 완전자로 더불어 완전한 이 친합, 완전한 화합, 완전한 결합이 된 것이 이것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능력입니다.
이것을 믿을 때에, 내가 행해 그런 게 아니라 예수님이 대신해서, 사죄와 칭의와 화친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것은 우리 대신해서 했기 때문에 그 대신 행하신 이 대속 행위가 나를 위해 행한 내 행위인 것을 자기가 믿을 때에 자기는 죄가 들어서 그를 침노하지 못합니다. 죄가 침노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율법이 그를 정죄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하기 때문에 어떤 피조물이 거게 대해서 그 사이에 끼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자기와 친밀한 연결 속에 어떤 피조물이 와서 사이에 끼어서 벌어뜨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댓가를 내는 것도 아니고 다만 이것은 믿으면 됩니다. ‘당신이 나 대신해서 모든 걸 다 바쳐서 죽기까지 해 가지고서 세 가지 이 대속을 해 주셨으니, 내 대신 죽기까지 대속을 해 주셨으니 그 대속은 내 대신 했기 때문에그 대속을 가져야 내가 살기 때문에그 대속은 나의 것이요, 내 대신 하신 그 대속은 나의 것이요 나는 대속으로 값주고 산 주님의 것이라.’ 이것으로써 댓가를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값이 없어도 사라” 그말 하는 것은, 값이 없다 말은 그 대속이 가치 없다 말이 아니고 우리로서는 대속의 댓가를 낼 만한 그런 것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없어도 값을 내라 그말은 뭐이냐 하면은 자기를 완전히 주의 것인 것을 자기가 믿고 주의 것으로 이제 움직이라 그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우리가 죽었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산 자라”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된 옛사람은 죽고 또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서 피와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향해서 영원히 살아난 요것이 되어집니다. 요것이 되어지는 것이 예수님의 이 사죄 칭의 화친의 대속을 내가 믿는 것이요 입고 있는 것이요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 남은 이 모든 이것은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예수님의 것이니 죄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죄지을 수 없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죄지을 수 없는 것으로 살면 됩니다. 또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의를 행하는 것이 자기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면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뭐 살 수 있습니까? 살면 됩니다. 하나님 법을 어기지 아니하고 살면 되고 하나님 법을 지켜 살면 되고 하나님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자로 살면 됩니다. 살면 됩니다.
살면 되다니? 어떻게 우리가 살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님의 것이 된 걸 자기가 자기로서는, 나는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으므로서 주님의 것인 것을 깨닫고 주님의 것인 것을 믿을 때에는 그때는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팍 싸기 때문에 아무것도 침노하지 못해. 나만 다만 믿을 때에, 인정할 때에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에서는 이는 주님의 것이 됐기 때문에 주님에게는 죄를 범하는 것이 없고 또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믿을 때에 나는 죄 없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율법을 다 이행하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는 이런 존재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침노하지를 못한 것입니다.
다만 그러나, 내가 믿다가서 의심할 때, 믿다가 의심할 때, 의심하면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 자기 것이 됩니다. 자기 것이 되어지면은 이것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의롭게 되지 자기 것이 되어질 때는 여전히 모든 율법을 어긴 자기요 원죄와 본죄가 있는 자기요 하나님의 이 지성의 율법을 이행할 수 없는 약자요 하나님과 원수된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때에 하나님과 화친한 대속을 입은 자가 되고 믿음을 떠날 때에 당장 자기는 옛사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일서 3장에 “아무도 너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네가 범죄할 때에 마귀 자식이 당장 되고 또 믿음으로 의롭게 될 때에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교체되는 것이, 이렇게 옛사람으로 새사람으로 교체되는 것이 찰나에 되어지기 때문에 하루 동안도 여러 수십 번 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수십 번 교체가 되고 어떤 사람은 몇 번만 교체되고 어떤 사람은 하루 종일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것으로 살고 예수님의 것에서 다시 자기 것으로 되어지는 일이 한 번 있고 두 번 있고 열 번 있고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없이 한 달 나가다가 혹 거석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산다씽 전을 봤는데 산다씽은 한 번도 그가 옛사람으로 돌아가는 일이 없었고 자기 것으로 살지 안했고 주님의 것으로 살았는데 그래 살다가, 미국 천지에 가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이 왔다고서 많은 사람이 와 가지고서 그렇게 착각을 할 만치 그만치 그 사람은 성화됐었습니다.
이랬는데 불란서 파리에 가 보니까 어떻게 그 모든 게 화려하고 찬란하게 이렇게 했기 때문에 파리에 가 가지고서 그거 보다 보니까 예수님을 네 시간 잊어버린 그 암흑 가운데서 그가 회개를 하고 다시는 여생에 그런 일이 없다가 그분이 간 곳이 없습니다. 그래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그는 에녹과 같이 엘리야와 같이 그는 산 채로 승천했다 그분은 도무지 죽은 곳도 없고 아무, 늘 가는 곳이 있었었는데 그 죽은 흔적을 그 뒤에 찾아보지 못했다 하는 것이 오늘까지도, 산다씽 흔적이 여게 있다 하는 그 시체의 흔적은 아직까지 찾아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평생에, 불란서에 가 가지고서 거게서 네 시간 동안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거기 돌아다니며 그거 보다가 보니까 그래 돼서 잊어버렸다고 자기 전기에 기록한 것을 봤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세 가지를 자기가 믿는다는 것이니 믿는다는 것은 이 사실을 알고, 확실히 인정하고, 자기는 그 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 믿는 걸로 사는 것이 뭘로 사는 것인가? 예수님의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값으로 샀기 때문에 예수님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예수님의 성전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지체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으로 사는 것이요 선지자로 사는 것이요 왕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거는 전능입니다. 이거는 전능이요 전지입니다. 이거는 완전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에게 있는 모든 더러운 것은 깨끗하게 할 수가 있고 그에게 해당된 어떤 사명이나 의무나 책임은 완수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을 믿는 것이 이게 믿는 것이오.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은 뭐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인가? 이 세 가지 대속을 받은 사람들을 성령이 책임 맡아 가지고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뭐이 그리스도인데? 그리스도는 제사장 선지자 왕입니다. 우리들을, 예수님의 대속 입은 우리들을 성령이 대속 입은 우리들을 뭐할라고 하느냐? 대속 입은 우리들을 제사장, 창조주와 피조물, 모든 피조물 사이에 그 분야에서, 어떤 사람은 이 분야에서 어떤 사람은 저 분야에서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그 사이에 거리 멀고 다 모순되고 배치되고 마찰되는 그 모든 관계를 조화해 가지고서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가 잘 조화돼 가지고서 화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제사장직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사장을, 성경에 보면 제사장직은 그 직책을 하는 것이 제사장직입니다.
선지직은 뭐이 선지직인가 하면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역사하실 때에, 하나님의 충만한 것을 피조물들에게 줄 때에 물질로 주고 뭘로 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당신의 뜻으로 줬습니다. 당신의 뜻으로 우주 만물도 창조했고 창조된 것에게 당신의 은혜를 주실 때는 당신의 뜻을 피조물들에게 줄 때에 피조물이 그 뜻대로 하면 그 실상이 이루어집니다. 이러기 때문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줄 때에 그 뜻대로 하면은 그 실상은 만들어진다 그말입니다.
선지자라 하는 것은 어떤 게 선지자이냐?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해서 인간들이 그 전달된 하나님의 뜻을 행하니까 하나님의 그 충만한 은혜의 실상이 와 가지고서 실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게 선지역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제사장역으로 선지역으로 우리를 왕역으로, 왕역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단일 통치, 하나님은 통치를 이중 삼중 두 가지로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는 단일 통치입니다. 단일 통치로 하기 때문에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치될 때에는 다 하나의 통일된 걸 가리켜서 통일 통치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단일 정치, 그 단일 정치 그것을 가지고서 자기가 맡은 그 분야를 하나님의 단일 정치에 다 복종케 해 가지고 하나되게 하는 그것이 왕의 직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나라는 둘이오. 우리 나라는 땅에 있는 한국 나라가 우리 나라요 하늘나라가 우리 나라지마는 우리 정치는 단일 정치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정권 아래에서 이런 것 저런 것 내가 거기 복종하고 하는 것은, 복종하고 있으니까 ‘네가 ○정권 밑에서 통치를 받고 있지 않는냐?’ 아니오. 하나님 앞에 단일 통치를 받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떤 정권자 밑에서 통치를 받고 있어도 그 통치받는 것이 단일 유일하신 하나님 그분의 통치가 그를 통해서 전달해 내려왔을 때에 나는 그 사람을 곧 하나님의 사자요, 하나님의 통치에 전달자요, 하나님이 세우신 기관인 줄 알기 때문에 그 통치에 복종하기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으로 죽도록 복종합니다. 죽도록 충성해 복종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일생 동안 복종하다가도 그분의 통치에 이탈되고 위반된 이질적인 명령이나 통치가 내려올 때에 당장에 거부하고 딱 거부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기독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이 평생 다리오왕에게 순종하고 이렇게 했지마는 그때에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말라는 그 명령을 다리오왕이 했을 때에 그는 하나님의 통치에 위배되기 때문에 그거는 복종하지 안하고 하다가서 사자구덩이에 들어갔고 사자구덩이 들어감으로써 하나님의 믿음의 효력이 나타나 가지고서 그는 원수들을 다 죽여 버렸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성령을 너희의 이 구원에 보증으로 줬다” 너희의 이 기업이 얼마나 큰 기업인데 이 기업을 완성하는 보증자를 누구로 세웠다 했습니까? 보증자를 누구를 세웠다 했소? 성령. “보증으로 성령을 너희에게 주셨느니라”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제사장 선지 왕직 이 세 가지 직을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이것을 얻어 가지고서 이 세 가지 직으로 연단받고 연성해 가지고서 제나름대로 이 세 가지 직을 맡아 가지고서 잘 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역사했으니,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했다 말이오. 그리스도의 영이 역사했다 말은 성령이 역사했다 말입니다.
성령이 역사해 가지고서 이 세 가지 직을 어떤 사람은 연성을 해서 완성을 만든 자 있고 어떤 사람은 이 세 가지 직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자 있습니다. 한 번도, 그 사람의 하는 언행심사는 하나님과 인간과 사이에 모든 이질적으로 벌어뜨리기만 벌어뜨리지, 벌어뜨리는 이것이 뭐이냐?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모든 학문을 가리켜서 음행의 포도주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나 지식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하나님과 결합하게 화합하게 만드는지 제가 그럼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사이가 떨어지게 만드는지 요것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다 심판될 것입니다.
이래서 성령이 이 그리스도직,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이라 말인데 기름 부음이라 말은 신정 국가에서 제사장 선지 왕직 이 세 가지 직책을 할 때에는 기름을 부어서 가지고 안수해 가지고 세웠습니다.이래서, 그 뒤에 이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직이라 말은 기름 부음 직이라 이거는 알았지마는 그 직이 무슨 직인가? 그뒤에 신정 국가에서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서 세울 것은 제사장을 기름 부어 세워라, 또 선지자를 기름 부어 세워라, 왕을 기름 부어 세워라 하나님이 명령했기 때문에 ‘기름 부음이라는 거는 이 세 가지 직책이로구나’ 하는 것을 신정 국가, 다시 말하면 유대인이 그때 사사 시대로부터 지낼 때에 그때를 말합니다. 거게서 이 세 가지 직책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 직책을 달성하기 위해서, 연성하기 위해서 성령님이 오셨고 또 성령님이 이 진리를 가지고서 이 직책을 만드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진리가 왔습니다. 우리에게 이 신구약 성경은 이 책이 아니고 책 속에 여게, 속에, 글이 있고 글 속에 있는 진리가 있으니 그 진리는 성신의 감동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신의 감동이 나타난 이 성신의 감동은 뭐이냐? 하나님의 뜻이 영감으로 나타났고 영감이 진리로 나타났고 진리가 문서로 나타났고 문서가 책으로 나타나 가지고 우리가 접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이름이라는 것은 진리 영감 사죄 칭의 화친 이 다섯 가지를 가리켜서 이름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름을 믿을 때에” 이 다섯 가지를 자기가 지식할 때에, 그것으로 끝나면 그만이고. 지식하고 이 사실을 인정할 때에, 인정하고 행할 때에, 행하는 게 뭐입니까? 사죄에 대해서 행하는 것은 ‘내가 주님의 것이니 죄지을 수 없다’ 내가 죄짓지 않는다는 거, 내가 이래 가지고 나는 죄 안 짓는다 하는 거는 암만 해야 제가 헛일입니다. 제가 ‘나는 사죄받았기 때문에 죄를 안 짓겠다’ 아무리 제가 죄를 안 짓겠다고 해도 죄 안 지을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대형으로써 사죄받아 값에 팔린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것으로 살 때에 죄를 이길 수 있고, 주님의 것인 것을 알고 믿고 행할 때에 의를 행할 수가 있고, 주님의 것으로 살 때에 하나님과 화친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기도하러 가도 주님의 것인 것을 인정하고 주님의 것인 걸 깨달을 때에 기도가 되고 하나님과 화친이 되지 그전에 내가 주님 사귈라고 암만 해 봤자 저 혼자 주관이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래서, 행하는 것은 뭐이 행하는 것이냐? 우리가 사죄의 것이 되는 거, 칭의의 것이 되는 거, 화친의 것이 되는 거, 다시 말하면 주님의 것이 되어 범죄하지 않는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서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주님의 것이 되어서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되어 사는 거 이것이 믿음이요, 이 일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감 주시는 그 영감으로 사는 것이 그것이 이제 행동하는 것이요, 영감을 받은 것이 아는 것 믿는 것이요 그때에 영감으로 사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요 진리로 사는 것이 행동하는 것이니, 그 이름을 믿는다는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현실에 자기에게 나타난 진리로 살고, 영감으로 살고, 사죄, 예수님의 것이 돼 가지고서 무죄자로 살고, 의를 행하는 의로운 자로 살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자로 사는 이 생활은 전능입니다. 이 생활은 전능이오. 이 생활은 전지요. 이 생활은 완성이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합니다. 이러기에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했다”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에서, 현실에서 진리로 살라고 할 때에, 진리로 살라고 하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이 이름을 믿을라고 하는 것이오. 진리로 살았을 때 이 이름을 믿은 것이오. 내가 영감으로 살라고 하는 것이 이 이름을 믿을라고 하는 것이요 영감으로 살았을 때에 그 이름을 믿은 것이오. 또 사죄로 살라고 할 때에 칭의 화친으로 살라고 할 때에 그 이름을 내가 믿을라고 하는 것이요 사죄 칭의 화친으로 살았을 때에 그 이름을 믿은 것입니다.
이렇게 어떤 현실에서라도 내가 이 다섯 가지를 알고 믿고 요대로 살라고 할 때에 투쟁이 벌어집니다. 살라고 할 때에 인간과 대립도 되고, 정부와 대립도 되고, 사회와 대립도 되고, 온 세계와 대립도 되고, 가족과 대립도 되고, 과학과 대립도 되고, 마귀와 오만 거와 대립이 됩니다. 되나! 요 믿음을 내가 양보치 안하고 요 믿음을 가지면! 모든 피조물은 내 아래 복종하고! 내가 요대로 승리했을 때에 모든 만물은 내것이 되어지고 나는 만물 위에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고 그리스도로 더불어 제사장노릇 하고 선지자노릇 하고 이것이 완전 승리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모두 다 예사로 압니다. 예사로 아는 거는 행해 보지 안한 자가 예사로 알고 귀넘어 듣고 업신여기고 시뻐여깁니다. 시뻐여겨도 네 뿌럭지와 네 생명과 네가 살고 있는 모든 민족과 국가 전부 다 합쳐도 요 먼지 하나도 당하지 못한다! 네 눈이 소경이라 몰라 그렇지 이 사실이 얼마나 근본이 크고 권위있고 실력있다는 것을 그가 몰라 그렇습니다.
이것을 아는 법은 다른 게 없어. ‘나는 학문이 많은데 많은 도서관에 가 가지고서 많은 서적들을 열람해 보면 알겠다’ 안 돼. 이것을 아는 유일한 법칙이 있으니까 이 사실을 아는 데에 아는 유일한 법칙이 뭐입니까? 아는 유일한 법칙이 뭐입니까? 도서실에 가 가지고 서적을 열람하는 것입니까, 세상 학문을 배우는 것입니까, 이제 자기가 자기 현실에서 나타난 진리와 영감대로 행하는 것입니까? 무엇입니까? 모든 것을 구비해 가지고 광문 다학해서 많은 지식을 가지고서 알라 하는 거 하나, 그 다음에는 영감과 진리로 자기 현실에 알아진 그대로 실행을 함으로, 실행함으로 이제 증거받아 알게 되는 요 아는 거 하나, 이호. 그러면 이 아는 데는 일호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이호라고 믿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맞습니다! 이호요! 이호! 믿고 행하지 안한 자가 무엇을 알 것이냐! 네가 교만하고 망령을 부리는 것은 믿고 행하지 안한 연고라! 여러 수억되는 사람이 믿고 행하지 안해서 망령 부리면 하나님이 어느 정도까지 권면하고 참아 기다리지마는 숫자가 많으니까 많은 숫자에 하나님이 피동됩니까? 아니오. 노아 홍수 때에 그때도 수십억입니다. 지금보다 생산이 더 용이하고, 용이하고 더 성장이 용이했는데 수십억이지마는 하나님께서 하나님 믿는 여덟 사람만 남구고 나머지기를 싹 홍수에 멸할 때에 하나님께서 꼼짝이나 했습니까? 하나님이 홍수 내린 거 후회했다 말은 그 뜻에 깊은 뜻이 딴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는 후회가 없소. 하나님이 후회한다면, 하나님께 후회 있으면 죄요 죄 아니요? 후회할 일 했으니까 죄입니까 죄 아닙니까? 범죄한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신성에 비출 때에 그 진리가 비로소 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여러분들, 여게 아는 법은 행함으로만 압니다. 행해 봐야 알지, 행해 봐야. 아무 때라도 다 그래.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때에 그들과 하는 것도 다 생명 내놓은 거야. 생명 안 내놓으면 못 이겨. 그거 뭐 쉽게, 지나간 일이니까 식은 죽먹듯이 다 쉬운 줄로 생각하지만 다 그때 생명 내놨기 때문에 한국에 사람들이 많았지마는 다 패전하고 다 그 속에 머리를 숙이고 굴했던 것입니다.
인민군 앞에서도 다 그랬기 때문에 교회를 예배당을 다 내 주고 그들이 하라 하는 대로 다했고, 그 인민군 총 앞에서 죽음 앞에서 다 그들을 진리대로 다 그대로 대항하고 진리를 지켜 나온 것이 다 생명을, 사선을 초월한 사람들이라. 그 사람이 뭐 간 큰 사람입니까? 아니오. 간 큰 사람 아니오. 이 다섯 가지 믿는 믿음으로 이겼소. 이 다섯 가지를 믿을 때에 이 능력이 이겼습니다.
이러니까 믿은 사람들을, 이긴 사람들을 붙들고 얘기해 봅니다. ‘어째 이겼느냐?’ ‘나는 어째 이겼는지 이긴 줄도 모르고 그들이 와서 무서운 줄도 몰랐고 폭탄 속에 와도 죽을란 것도 그것도 모르고 아무 무서움이 없었고 그래 하거나 말거나 거게 대해서 조금도 염려나 피동이 없었다.’ 뭐? 이 다섯 가지를 잘믿든지 못믿든지 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를 믿는 거, 알고 인정하고 그것으로 사는 거, 그것으로 살면 어떤 강대국의, 강대국의 세력을 이길 수가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알고 믿고 요 다섯 가지로 살면 사는 그 생활이 강하고 큰 강대국의 세력을 이길상합니까 못 이길상합니까 확실히 이기겠습니까? 획실히 이기겠다고 확정되는 사람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확정입니다! 확정이야! 그분이 없는 가운데 만들었는데, 그분이 엿새 동안에 만들었는데 지저분한 먼지같은 그까짓 거야 무슨 힘이 있어! 이는 그 원줄기에 거게서부터 힘인데!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내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하나님께서 이 믿는 자를 요구합니다. 부자를 요구하지 않소. 학식 많은 사람 요구하지 않소. 미남 미녀를 요구하지 않소.
활동가를 요구하지 않소. 이 다섯 가지를 확실히 믿는 자, 이 다섯 가지를 알고 인정하고 요 다섯 가지로 사는 자! 요것만이 하나님께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