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3:27
예수님의 피와 살
1981. 3. 11. 밤 (수)
본문:요한복음 5장 52절∼59절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서로 다투어 가로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제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육체의 이스라엘인 유대인들에게 가르치셨을 때에 그 유대인들이 서로 수근거리기를 ‘어떻게 이 사람이 제 살을 우리에게 먹도록 해 주겠느냐? 또 어떻게 이 사람의 살을 우리가 먹을 수 있겠느냐?’ 말이 아니라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도리어 훼방했습니다.
그것을 주님이 아시고 다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내 살을 먹지 아니하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들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그 속에 생명이 있고 또 영생하느니라. 그런고로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썩을 양식이 아니고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이미 영생을 가졌고 또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가 주는 내 살과 피인 이 떡과 음료는 너희 선조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만나를 먹은 것이나 또 역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신 그 양식과 음료와 같지 않다.’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증거는 어데 있느냐? 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증거는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 순전히 아버지로 인해서만 살지 내가 내 뜻대로 나로 인해서 사는 일도 없고, 어떤 인물을 인해서 사는 일도 없고, 어떤 영광이나 권세나 무슨 쾌락이나 물질이나 그런 것을 인하여 살지도 않고 생명을 위하여 살지도 않고 내 언행심사는 아버지로 인하여서만 내 언행심사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이 증거라.’ 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말하지 안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었고, 아버지가 생각지 아니하는 생각은 한번도 생각한 일이 없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예수님으로 통하여 나타나는 그 일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땅위에서 행동하신 그 모든 행동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가 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자는 그는 인간이지마는 땅위에 살 때에 아무것으로 인해서도 살지 안하고 예수님으로 인하여서만 살아 예수님이 자기 안에 주가 되어 가지고 주님이 말씀하는 그 말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오고, 주님이 생각하시는 그 생각만 그 사람을 통해서 나오고, 주님의 뜻만 나오고, 주님이 움직이시는 그대로 그 사람은 움직여, 보기는 그 사람 사람이 하는 일 같지마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고 순전히 하나님이시며 우리 구주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그 일이 되어 그 사람의 하는 일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그 사람이 하는 일은 다 영원히 있을 완전한 일이요 영원 불변의 일이요 다 영생의 일이 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하신 이 사실은 그 영광과 가치가 너무도 큽니다. 지극히 큽니다.
예수님의, 인성은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지마는 피조물이 피조물로 살지 아니하고 피조물이지마는 순전히 창조주가 행동하시는, 창조주가 행동하시는 그 행동을 피조물이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은 피조물이지마는 창조주가 하시는 그 일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은 전체가 전지의 움직임이요, 전능의 움직임이요, 완전의 움직임이요, 영원 불변의 움직임이요, 그 움직임은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난 창조적인 완전적인 움직임인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움직이심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정죄받지를 아니했습니다.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지성법과 지공법이 예수님의 삼십삼 년 사 개월 동안 생애하신 것을 아무리 이렇게 비판하고 판단하고 아주 고등 지혜를 가진 악령이 예수님의 생애를 아무리 송사하고 시비하고 저주하려고 해도 털끝만치도 지성법과 지공법에 걸릴 것이 없는 완전한 행위를 하신 것이 예수님의 인성이십니다.
이런데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하는 이 말씀은 어떻게 큰 말씀인지 참 우리로서는 측량 못할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니 예수님은 완전자신데, 예수님은 불변자신데, 예수님은 그 인성이 신성과 하나돼 가지고, 하나돼 가지고 순전히 신성 생활이요 인성 생활이요, 인성 생활이나 순전히 신성 생활인 이 완전 생애를 하신 것이 예수님이신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완전으로 인하여 살리라 하는 말씀이니 이 말씀은 우리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완전 생애를 할 수가 있다. 완전 생애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이 아무리 정죄하려 해도 정죄할 수 없는 완전한 언행심사의 생활을 할 수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어떻게 큰지 이것을 여러분들이 듣는데 그 큼의 양에 대해서 조금 어느 정도 느끼는지 모르겠습니다.
역사에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일생 동안 사는 가운데에 털끝만한 것도 완전 생애는 없습니다. 털끝만한 그 부분적인 완전도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완전이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도 없습니다. 불변의 것도 없습니다. 이런데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완전 생애를 할 수 있다. 영원 불변 생애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생애와 꼭 같은 생애를 할 수 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그 생애를 주장해 가지고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생애이기 때문에 그는 완전 생애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남반에 혹 이 말씀에 대해서 이해가 되는지? 이는 참 지극히 큰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같이 아버지로 인하여 살아 예수님은 완전자가 됐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을 만족케 했습니다. 하나님의 지성법과 지공법이 털끝만치도 정죄할 것이 없는 완전 생애로 승리를 했습니다.
이 완전 생애로 승리하신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그 사람의 생애를 완전히 주장해서 사람의 보기에는 그 사람이 살지마는 실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완전자의 생애가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사람으로서 어떻게 완전이 될 수 있느냐? 완전 생애가 될 수 있느냐? “나로 인하여 살리라” 완전으로 인하여 살리라. 완전 생애 완전한 언행심사가 될 수 있겠느냐? 네, 사람으로서는 될 수 없습니다. 없는데 예수님이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사람이 예수님의 피와 살로 자기의 양식을 삼아 먹는 자는 이 생애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시는 자는 완전 생애를 할 수 있다. 완전 행동을 할 수가 있다. 그러면 완전 행동하니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완전한 사람이 아니면 완전한 행동을 할 수가 없는 건데 그 완전한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돼서 그 사람으로 완전한 행동하는 게 아니라 완전한 사람이 돼도 인간은 유한한데 완전자가 그 사람을 통해서 역사했기 때문에 그 역사가 완전하고 완전자가 붙들고 완전을 역사할 수 있는 그 기관처럼 도구처럼 된 자이기 때문에 그 사람도 완전자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비밀입니다.
이종교에는 이런 계약이 없습니다. 이런 능력이 없습니다. 이런 말들을 한 것이 없습니다. 여게 종교 통일이니 다 종교는 일반이니 하는 그 사람들은 그는 기독교의 진수를 몰라 그렇습니다. 기독교를 몰라서 그런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하나는 살았고 하나는 죽은 것과 같은 이렇게 생명과 사망과 다른 것과 같이 이렇게 다른 것을 기독자 자신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그 모든 신앙 생애가 다 이 완전을 향하여 가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행심사가 완전치 못할 때는 반드시 주님의 피와 살을 먹지 아니한 다른 힘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을 먹어 주님의 피로 말미암은 힘, 우리가 양식을 먹으면 힘을 얻습니다. 양식을 안 먹으면 힘이 없어 기진해집니다. 우리가 언행심사를 할 때에 돈을 먹고 돈으로 말미암아 얻은 힘이든지, 권세를 먹고 권세로 말미암아 얻은 힘이든지, 어떤 행락을 먹고 그로 인하여 얻은 힘이든지, 자기의 욕심을 채워서 욕심을 먹고 얻은 힘이든지 그 어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무엇으로 인해서 얻은 그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늙습니다. 그 힘은 시간이 가면은 쇠해집니다. 또 그 힘은 죽습니다. 그 힘은 얼마 안 가서 쇠잔해집니다.
자기가 ‘나는 도덕을 위해서 살겠다’ 하여 도덕을 양식 삼아서 도덕을 먹어서 도덕으로 인하여서 힘을 얻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사람이 도덕으로 인해서 얻은 힘은 피곤해질 것이요 쇠잔해질 것이요 마지막에는 그 도덕의 힘은 죽어지고 맙니다.
그 사람이 ‘나는 민족을 위해 살겠다, 애국으로 살겠다, 나는 인류를 사랑하는 이 박애로 살겠다.’ 그런 것을 인하여서 자기가 얻은 힘은 그 힘이, 그 힘들도 종류에 따라서 강약이 다소는 있지마는 마지막에는 그 힘이 다 죽어버리고 맙니다. 그 사람이 마지막에 죽을 때는 그 힘이 죽습니다. 그 힘이 죽음을 초월하지를 못합니다. 그 힘이 죽음 너머 없습니다. 그 힘이 부활할 때 그 힘이 있는 것 아닙니다. 그 힘이 영원한 세계에 그 힘이 살지를 못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공적을 베풀면 그 공적은 영원히 있다고 철학자들이 그렇게 해석을 했지마는 그것은 어리석은 소리입니다. 인간의 공적은 인간의 역사가 있을 때에 있고 인간의 역사가 없으면 없어집니다.
인간의 역사가 끝나고 난 다음에 조물주가 인간의 그 모든 주장과 행위를 창조주 당신에게 상관이 없기 때문에 당신에게 상관이 없는 것은 당신이 지은 것이 당신의 것으로 먹고 입고 살면서 당신과 상관 없게 한 것은 당신에게 다 그게 절도라 강도라 했습니다. 그것은 모조리 심판에서 정죄해서 유황불 구렁텅이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해서,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해서 생겨진 힘은 늙지 않습니다. 쇠잔해지지 않습니다. 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해서,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해서 한 말은 그 말은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하여 한 말은 정죄받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인해서 생겨진 그 생각은 완전한 생각입니다. 영생입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자에게 주신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형 대행 대화평의 제물이 되셔서 우리에게 이 대속을 주신 이것으로 기본구원 얻어 영생도 가졌고 하나님도 우리 아버지 됐고 하늘나라도 우리 나라가 됐습니다. 이것은 우리 영이 구원을 얻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육은 아직까지 이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심신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이 양식으로 인해서, 양식으로 인해서 생겨진 힘을 가지고 삶으로 의를 이루고 세상 빛을 쌓고 또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으로 인해서 차차 차차 그 사람이 그 심령이 자라고, 그의 사랑이 자라고, 그의 도덕이 자라고, 그의 지능이 자라고, 그의 인격이 자라서 가는 이것이 자기의 부활할 때에 권능입니다.
그런고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지금 여러분들이 아는 사람은 알지마는 무슨 말인지를 모를 것입니다. 이제 첫째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사람은 완전한 생애를 할 수 있다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굳게 잡으십시오. 예수님이 아버지로 인하여 사심같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사람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산다.
예수님은 완전자십니다. 완전자로 인하여 산다는 그말은 예수님의 이 인성이 완전자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 완전한 행위 완전한 사람 되신 것처럼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사람도 신인양성일위이신, 하나님이시요 참사람이신 이분으로, 이 완전자이신 이분으로 인하여 살기 때문에 그 언행심사와 그것으로 인해서 자란 것은 완전자가 되는 요것이 육체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비유.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힘이 나고 자랍니다. 아무것도 없는데 세멘트 바닥에 짐승을 암수 한 쌍을 갖다 넣어놓고 자꾸 식물만 주면 두 마리가 일곱 마리도 되고 나중에 스무 마리도 되고 백 마리도 되고 그 식물이 들어서 그 많은 새가 되지 안했습니까?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양식을 먹으면 자라기도 하고 또 둘이 서이되기도 하고 너이되기도 하고 그렇게 번식이 됩니다.
양식은 먹으면 힘을 얻는 것이요 힘이 있으면 활동하지요. 양식을 먹으면 힘을 얻고 힘이 나면 활동을 합니다. 또 활동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양식을 먹으면 차차 차차 자꾸 자라서 어린아이가 중학생 고등학생 나중에 대학생 어른 이렇게 자꾸 자라가지 않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자, 예수님의 피와 살을 어떻게 하면 우리에게 힘이 생기겠습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을 어떻게 하면 힘이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성만찬 먹을 때와 같이 빵조각을 이렇게 많이 재놓고 ‘이것이 예수님의 살이다’ 자꾸 먹으면서, 먹으면 먹어서 나는 그 힘은 어떤 힘이겠습니까? 죽을 힘입니까 살 힘입니까? 무슨 힘이요? 어떤 힘이겠습니까? 죽을 힘입니다., 죽을 힘이오. 암만 먹어봤자 소용 없소. 포도주를 몇 말 갖다놓고 자꾸 둘러마셔서 아무리 힘 얻어봤자 그것 다 죽을 힘이오. 그것은 하나의 기념하는 표로 우리가 성찬을 먹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데 그분이 영원 전 홀로 계셨습니다. 영원 자존자십니다. 모든 존재는, 영계나 물질계 모든 존재는 그분으로 인하여서 생겼습니다. 그분이 지어서 생겼습니다.
전부 그분으로 인하여 생겼어.
그분이 요새 모두 사람 지식이 발달된 데 따라서 ‘별과 별 사이는 거리가 얼마나 멀다. 하, 이렇게 먼 별들이 있으니까 우주가 얼마나 넓다, 크다.’ 하는, 사람들이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먼 것은 보고 이 우주가 큰 줄을 아나 이것을 엿새 동안에 지으신 이분이 큰 것은 모릅니다. 이분이 크신 것을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우리에게 암흑을 벗겨서 우리가 이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그 부모가 노력해 가지고서 이 부동산 몇만 평이나 뭐 빌딩이나 몇십 채 줘도 참 감사할 수 있을 터인데, 또 자기가 병들었을 때에 빌딩을 여남은 채 팔아 넣어도 자기 병을 치료해 줬으면 부모의 은혜가 ‘이렇츰 부모가 돈을 애끼지 아니하고 또 많은 돈을 벌어 저축하지 안했더라면 나는 이 병에 꼼짝 없이 죽을 터인데 이렇게 치료해 줬으니 참 감사하다.’ 부모의 은택이 감사할 것입니다.
또 자기가 저 공산 치하에 첩첩에 싸여 가지고서 있는 것을 그 부모가 생명을 내놓고 죽음의 토막을 몇 번이나 거쳐 가지고서 거게서 자기를 구출해 가지고 왔다고 하면 그 부모의 참 생명보다 자기를 사랑한 그 사랑에 대해서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일국의 정권을 가진 어떤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애낌 없이 희생을 해 줬다고 하면, 자기가 어려움 당할 때에 평민이 자기를 구원해도 뭣할 터인데 일국의 대왕이 자기를 구원하기 위해서 진흙밭에 들어가고 그 바다에 빠졌을 때에 생명을 애끼지 않고 뛰어들어 가지고 자기를 구원했다고 하면은 평민이 구원한 것보다 그 왕이 구원했으면 자기에게 대해서 얼마나 그 감격할 것입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좀 미루어 생각해 볼 때에 주님은 없는 가운데서 우주와 영계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지금도 모든 것이 그분의 것입니다. 지금도 개미 한 마리 나고 죽는 것도 흔드는 것도 기는 것도 그분의 혼자의 섭리로 하십니다.
영원히 모든 것에 주인공이시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이분이 어떻게 크고, 어떻게 능하고, 어떻게 존귀하고, 어떻게 영광스러운 분인지 이분을 연구하고, 그분을 우리 지식으로는 자기 주관대로 이렇다 저렇다 그렇게 추측 추론 추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다 탈선입니다. 불교는 전부 인간 대가리에서 이럴 거라 저럴 거라 하나 추측 추론 추상의 하나의 철학입니다.
그것 하나 철학이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이 당신의 지식을 우리에게 줘서 신구약 성경은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획 하나도 없앨 수 없는 이런 권위 있는 중량의 말씀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말해 놨습니다.
이 성경을 가지고 나를 위해서 십자가 못박혀 죽으신,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신 이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이분이 얼마나 큰지, 이분이 어떤 건설을 어떤 창조를 하신 분인지, 이분이 지금 어떤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분인지, 얼마나 존귀한 분인지, 얼마나 능하신 분인지, 얼마나 영광스러운 분인지 이분을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이분을 연구해서 깨달아가고, 이분이 법을 냈는데 그 법은 무한하신 분이 법을 냈기 때문에 그 법도 무한한 법입니다. 무한한 법이 나를 정죄했으니까 우리는 무한한 정죄를 받았으니까 무한한 정죄로서 무한한 그 사망을 우리는 받았던 자들입니다.
이런데 주님이 이 무한한 사망의 벌을 대신 받으시고 무한한 분이 무한한 요구를 하시는 그 요구에 만족을 이루는 무한의 대행을 했습니다. 대행. 무한의 원수를 화목의 제물이 돼 가지고서 무한한 화친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유한한 화친이 아닙니다. 무한한 화친입니다. 우리는 무한한 사죄를 받았습니다. 무한한 칭의를 받았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그 권위, 무한한 존귀, 무한한 영광, 무한한 소유, 무한한 지능, 이분이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고 무한한 희생으로 우리를 무한한 구출해서 우리에게 지극히 큼이 아니라 무한한 소망을 줘서, 우리 이 구원 때문에 우주를 만들었습니다. 영계를 만들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구원 때문에 이것을 보존하고 운영하고 있다고 성경이 말했습니다.
이러니 이분이 어떤 분으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떻게 희생하시고 구원 구원의 제물이 되시다가 마지막에 십자가 못박혀 죽으심으로써 이 대형 대행 대화친을 완료했습니다. 완료한 그것을 가리켜서 주의 피와 살을 말한 것입니다. 주님의 피와 살로 완료했습니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주님이 피와 살을 어떻게 흘렸는데! 어떻게 찢었는데! 어떤 분이, 어떤 사랑으로, 어떤 계획으로, 어떤 희생으로, 어떤 대속을 했는데! 어떤 이유가 있는데! 이 사실을 자기가 알면 그는 죄를 깔볼 수 있고 ‘죄 네가 어떻게 해도 이제 다시는 죄 네까짓 건 용납하지 않는다. 나는 죄와 원수돼서 죄는 내가 생명을 뺏겨도 죄는 멸하겠다.’ 왜? 주님이 이 일을 위해서 하신 것을 자기가 생각하니 죽어도 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죽어도 불의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죽어도 하나님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은 죄를 멸하는 역사와, 의를 건설하는 역사와,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이 역사로만 살고 싶은 그 소원이 가득 차고 이럴 때에 하나님의 성령과 진리가 도와서 이 생활 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완전자의 행위를 가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예수님의 피와 살에 대한 이 지극한 비밀을 생각지 않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이 피와 살로 말미암아 얻어지지 안한 그 힘은 다 죽을 힘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 하나님의 대속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지극하신 사랑과 그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대속과 영원한 이 소망을 인해서 생겨진 힘, 그 힘으로 한 것이 의지.
그 힘은 거게 멸할 힘이 없고 그 소원에는 썩을 것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안했어.
정죄받을 생각이 하나도 없어. 무슨 생각인데? 영원 자존 완전자의 그의 사랑에 감격한 생각이요, 그분이 소원하시는 그것을 티끌 같은 이것이 모든 것 다 기울여서 그분의 소원대로 살고자 하는 그 생각이요, 죄를 용납지 않고 멸하려는 생각이요, 불의를 용납지 않고 의를 건설하는 생각이요, 창조주 그분을 모시고 그분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존귀케 그분을 인하여 살고자 하는 그 생각이기 때문에 그 생각은 정죄받을 수가 없어. 완전한 생각이라, 그 생각은.
지공법이 심사해도 ‘이 생각은 완전이라.’ 지성법이 그를 심사해도 ‘이는 완전한 생각이라. 지성의 생각이라.’ 이것이 세상이 모르는 기독자에게만 주신 이 구원의 길입니다. 이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그 사람이 의의 힘이 가라앉고, 사랑의 힘이 가라앉고, 죄를 대항하는 힘이 가라앉고, 하나님에 대해서 감격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당신의 말씀에 의지해서 인간을 향하여 사랑과 봉사심이 시들어질 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피와 살에 대한 생각이 중단됐습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에 대해서 자기가 생각한 그 감격이 없었기 때문에 쇠잔해진 것입니다. 벌써 예수님의 피와 살에 굶주렸습니다. 굶주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사모할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오. 우리가 감격할 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이오. 예수님의 피와 살로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사랑의 그 경영과 계획과 우리에게 대속하신 것과 우리의 지극한 소망, 하루밤 나그네 세상에서 영원 무궁을 바라보는, 일시 순간에서 영원을 마련하는 이 소망의 계약을 연구함으로 살 가치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돈만 연구하고 살 그런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류만을 생각하면 존귀한 것 같지마는 아니오. 인류만을 생각하는 그런 가치 없는 인간이 아닙니다. 인류를 탁월한 창조주를 생각하면서 영원 무궁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모시고 모든 피조물을 어깨에 짊어지고 책임지고 피조물을 구출하고 하나님 만족케 할 수 있는, 하나님 밑에 모든 피조물을 다 통솔해서 그들에게 충만히 만족케 할 수 있는 이런 포부 이런 희망에서 사는 것이 기독자입니다.
근시자로 소경되어서 가까이 보고, 성령으로 시작했던 사람이 육체로 마치는, 예수 믿으면서 하늘나라도 모르고 주님도 모르고, 주님보다 나은 것이 세상에 많이 있고 하늘나라보다 좋은 것이 세상이고 그 사람은 아직까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요 성령의 감동을 아직 받지 못하고, 중생을 했다 할지라도 그 심신은 아직까지 땅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 은혜에 나아가는 것은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되고, 성경이 하지 말라는 것을 다 정리하고 하라는 대로만 하면서 기도하면 성신의 감화가 와서 우리 마음을 변화를 시키고 성신의 감동이 와서 우리 행동을 변동시킬 때에 서서히 예수의 피가 무엇이며 살이 무엇이며 우리 믿는 사람들의 소망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아서 자기 속에 불이 붙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주를 위해서 모든 것을 바쳐서 나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