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제자


선지자선교회 1984년 5월 13일 주일오전 

 

본문 :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허다한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예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가로되 이 사람이 역사를 시작하고 능히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느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에 먼저 앉아 일만으로서 저 이만을 가지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터이면 저가 아직 멀리 있을  동안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 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지금 신역된 거와 달리 그전에 번역된 것입니다.

소화 전 일본 대정 시대에 번역된 성경입니다.

 구역과 이 개역의 하나 뚜렷이 차이 있는 것은, 보다라는 말이 여기는  있습니다.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치 아니하면' 이렇게 구역에는 이렇게  해놨고, 번역을 하기를 이렇게 해놨고, 개역에는 사랑한다는 말은 없고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렇게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말을 번역했습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안하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그래 놨고, 여기에는 '그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치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이래서, 조금  번역이 다릅니다.

 물론 성경은 한 절만 가지고 결정을 지우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경을 다 종합해  보고 우리가 해석을 하기 때문에 이렇게 번역하나 저렇게 번역하나 다 그 속의  뜻은 성령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바로 깨달을 수 있기는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바로 깨닫지 못하기 쉽습니다.

 그러기에 원문은 구약은 히브리어요 신약은 헬라어로 이렇게 돼 가지고 있는데,  그 원문이라는 원문이 아주 고전어입니다. 지금으로부터 근 이천 년 전의  말이요, 또 지금으로부터 벌써 근 삼천 년 전의 말이기 때문에 그 말들이 아주  미개한 말이요 옛날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원어한 마디를 가지고  번역하는 사람은 여러 가지로 번역을 할 수 있습니다. 비유컨댄 새들은 '짹'  하는 거 그거 하나밖에 없습니다.''짹짹짹짹' 하고, 그저 '짹' 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짹' 하는 그 소리 가운데는 반갑다는 것도 있고, 두렵다는 것도 있고,  원수라는 것도 있고, 무섭다는 것도 있고 또 싫다는 것도 있고 그 한 마디에  많은 뜻이 들어 가지고 있는 거와 같이 이 고전어들은 다 이렇습니다. 이래서  고전어를, 그 뒤에 몇천 년 동안 내려오면서 발달된 그 말들은 한 가지 말 되던  그것을 여러 수십 가지로 나누어서 이럴 때는 이런 말을 쓰고 저럴 때는 저런  말을 쓰고 이래서 아주 한 가지 단어가 몇십 단어로 이렇게 새로 보충된 거라고  할 수도 있고 또 그 말을 해석한 것이라, 분류한 것이라 그렇게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신앙을 주로 하는 사람들은 대개 학문이  뒤떨어집니다. 왜? 그 면에 주력을 하지 안하고 신앙에 주력을 하기 때문에  '학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자연히  신앙은 그렇게 힘쓰지를 아니하고 학문에만 힘쓰는 사람들이 그래도 어학을 많이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성경 번역을 하도록 그렇게 맡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맡습니다. 이러니까 그 어학 공부라는 것은 그  계통이 있어 가지고 그 선생이 그 고전어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한다.' 하면 그  다음 사람들이 대개는 그 뒤 자취를 따라서 자꾸 그렇게 '이 고전어 한 마디  속에는 이런 말이 들어 있다' 이렇게 배워 가지고 자꾸 이래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틀리면 모든 사람들이 다 틀립니다. 그래서 이 번역한 것이 중요한데  옛날 번역한 것은 보면 좀 그 문장적으로는 가치가 적습니다. 지금 번역한 것은  문장. 문리 이런 면으로 보면 그저 살살 이렇게 통해지고 염맥이 있으나 참 성경  번역에 대해서 그 속에 있는 참된 뜻을 이렇게 번역하는 데 대해서는 좀 서투른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서, 지금 그 성경 번역이 이제는 새 번역이라 해 가지고, 뉘든지 성경을 알  수 있도록 한다고 해 가지고 어린 아이들이라도 읽으면 알 수 있도록 하는,  그렇게 깨닫기 쉽게 하는 그 번역을 했는데 그 성경은 이야기 성경이라 그렇게도  말합니다. 그래서 그 성경은 보면 어린 사람들이 보면 그렇지만 하나님의 성경의  그 깊은 뜻은 다 피해서 껍데기 외모 외식으로 흘러간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 말씀을 가지고 동화를 만들어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동화를 만들어서 말하면 아이들이 잘 알아듣는다 해서 요새 세계 주일학교는 다  성경 말씀을 아이들에게 가르칠 때에는 동화로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 가르치니까 성경 말씀을 잘 알아듣는 것 같고, 또 그림을 그려  가지고 하니까 잘 알아듣는 것 같고 그렇게 하지만 그 아이들이 이제 '성경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고 저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성경에 꼭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뜻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이래 가지고 점점 성경이 인간  사상화되고 이 문화화됩니다.

 언제 어떤 사람이 시대에 따른, 이 시대가 근시대가 됐으니까 모든 걸 근시대의  거석으로 이렇게 모두 운동을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설교도 그렇게 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마귀의 역사요 다  패망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은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지었기 때문에 인간  문화라 하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셔서 내놨는데, 이 하나님이 이 시대를 따라서  문화를 따라서 발달되고 진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종교는  다 진화성을 가지고 있지만 기독교는 진화성을 가지고 있지 안하고 보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종교는 처음과 끝을 맞추면, 지금과 원시  종교와 비교하면 아주 판이하게 딴것이 돼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창세기에  있는 그 만물관이나 요한계시록에 있는 만물관이나 변함이 없이 꼭 같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은 이 세대를 따라갈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이  세대를 고쳐서. 이 세대는 자꾸 변해지나 변치 않는 하나님을 따라서 자기가  속화되지 안하고 부패되지 안해야 거기 생명이 있는 것이지 세상을 따라서 자꾸  속화돼 가면 건설구원은 못 이루는 것입니다. 또 그러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  시대를 따라가지 않고 변치 않는 진리로 이 세대의, 자꾸 부패해 나가고 타락해  나가고 속화돼 나가고 점점 죄악화되어 나가는 그 세상을, 그것을, 타락의 길을  가로막고. 모든 속화의 길을 가로막고. 사람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고 향상케  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천주교와 이 개혁교와 그 개혁 역사를 사람들이 좀 알면 또 칼빈  루터가 개혁하기 이전의 그 신앙가들의 교리와 신조를 알면 그렇게 무책임한  일을 안하지만 그것은, 그만 그것도 속화 돼 가지고 다 사람들이 한 말씀에다  거기에다가, 예를 들면 무슨 소고기국을 끓이는 사람이 소고기국 한 그릇을 갔다  놔 놓고 물은 한 몇 십 드럼을 넣어 끓이니까 그만 싱거워져서 아무 맛이 없는  거와 같이, 이렇게 한 진리를 저거 말을 많이 엮어서 혼잡해서 한 절을 몇십  권을 만들어 내놨습니다. 이러니까, 거기에 있는 그 진리가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이래서, 이 천주교와 개혁교에서 합동 번역하는 이것을 그들이 돈을 가지고  '우리가 돈을 많이 댈 터이니까 합동 번역하자' 이래 가지고 합동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돈이 없는 게 아닙니다. 성서공회에 돈이 많은데 성서공회의 위원들이  주님만 바라보는 것으로 해야 되는데 잘못하면 돈을 탐하는 삯군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뿐 아니라 무슨 직책이든지 주님만 바라보는 것으로 하지 않으면  절도와 강도들이 되기 쉽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천주교로 더불어 합동 번역을  할려고 하는 것은 심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합동 번역하기 전에 성경을 많이 사도록 말했고 합동  번역하기 전의 성경을 우리는 사겠고 거기에 보조를 해서 돈을 내지만 천주교와  이렇게 합동 번역하는 그 성서 공회의 출판에 대해서는 우리는 한 푼도 돕지  않겠다, 그래서 우리는 돕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성경을 자꾸 그렇게 하므로  성경에 있는 참뜻을 아주 모르게 자꾸 어둡게 이렇게 만듭니다.

 "그 부모나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치 아니하면"  하는 것은. 이 번역으로 보면 부모도 사랑하고 형제도 사랑하고 처자도 사랑하고  모두 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나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된다.'  이렇게 이 번역을 했는데, 그 다음 번역은 '이런 것을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 이랬으니까 다른 성경을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하는 그  성구를 보면 공경하라 해 놓고 여기는 미워하라 했으니까 그것은 주님의 계명과  마찰될 때에 그렇다는 그런 걸 말하겠지만 그랄라면 해석하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어렵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 사랑해야 됩니다. 과학도 사랑해야  됩니다. 실은 마귀도 사랑해야 됩니다. 사랑하는데, 마귀보다 더 사랑할 게  많고, 마귀가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그 면에서 우리는 미워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보다라는 말이 아주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는데 보다를  넣으니까, 그 부모 형제자매 처자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말로 번역이 됐고. 보다를  빼 버리니까 그 모든 것을 미워하라는 말로 번역이 됐습니다. 성경을 보고 깊이  해석해서 해석해 나가면 그렇게 되지만 그렇게 해석한다는 것이 그것이 쉽지를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부모도 사랑해야 되고, 처자도 사랑해야 되고, 형제도  사랑해야 되고, 자매도 사랑해야 되고. 이웃도 사랑해야 되고, 원수도 사랑해야  되고, 자기 재산도 자기가 사랑해야 되고 자기 직장도 사랑해야 되고, 또 자기  목숨도 사랑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때문에, 작은 사랑은  큰 사랑에 결말적으로는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하는 그 말은,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말은 모든 것을 미워하라 그말  아닙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라 하는 그 말은 부모고 형제고 자매고 처자고 다,  직장이고 돈이고 다 미워해라 그말 아닙니다. 요렇게 번역해 놓고 사람들을,  '그런 거는 미워하라 이렇게 번역을 해 놓고 '미워하는 이게 하나님의 도이냐?  이게 틀리지 안 했느냐?'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성을 자꾸 헐어서  없애기 위한 한 방편 중의 하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사랑하나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됩니다.

왜 모든 것을 사랑하느냐? 그거 주님이 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부모도  주님이 우리의 부모로 정해 주셨고, 또 형제도, 자매도, 이웃도, 사업도,  직장도, 모든 소유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하나님의 선물인 것을 알고 그것을 알뜰히 잘 간수해야 됩니다. 주신 이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주신 그분을 생각해서 그것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우리는 직장 하나도 가질 때에 그 직장을 주님이 주신 직장인 것인 것을 깨닫고,  주님이 은혜로, 축복으로,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그 직장을, 내가 주님과 관련  없는 것 같으면 그까짓 거 취했다가 버렸다가 뭐 마음대로 하겠지만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 마음에 좀 맞지 안해도 주님이 주신 것이니 주님을 생각하고  그것을 신중히 취급하고, 주님이 이것을 옮기라 버리라 하기 전에는 버리지를  못합니다. 왜? 그거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이 주신  것이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귀중히 취급해서, 어떤 조그만한 직책이라 도 그  직책을 맡았을 때에 주님이 이 직책을 나에게 맡겨 주셨으니 이 직책 잘못하면  주의 이름을 모신 나로 인해서 주님에게 욕이 돌아가고 복음이 가리워지고, 이  직책을 내가 주를 사랑하고 주를 위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님을 높이기  위해서, 나에게 이 직책을 주셨기 때문에 이 직책을 조심 있게 해서 그 직책을  잘 감당함으로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가고 복음이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주님이 주신 것인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디모데전서 4장에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니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거 주시면서, 나를  구속하신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 물건이야 대수롭지 않지만, 그  직장이야 그렇게 뭐 대단한 게 아니지만, 그 사람이 야 대단한 사람이 아니지만  주님이 나에게 붙여 주셨기 때문에 주님이 그 직장을 나에게 줬기 때문에,  주님이 그 물건을 나에게 줬기 때문에,  요새 흔한 이혼, 뭐 어떤 사람이, 요새 결혼은 열흘 결혼이 있다 합니다. '우리  열흘만 계약하고 결혼하자. 열흘 결혼하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또 좋거들랑  새로 연기해서 더 열흘 하든지 한 달 하든지 그래 하자.' 제일 최고의 발달된  결혼이 일 주간 결혼이랍니다. 일 주간 결혼을 약속해 가지고 안 됐으면 서로  나뉘고 또 좀 한 번 더 살맛이 있다 그러면 또 연기해서 일 주간 더 하고,  이렇게 더러워지고 속화되어 가는 이 세상이나, 주님이 자기를 짝지워 주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은 마음에 비위에 뭐, 주님만 아니면 열 번이라도 이혼  더 하고 백 번이라도 이혼 더 할만한 처지라도 주님이 짝지워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생각하고 이혼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주님이 나에게 주셨기 때문에  주님을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고 또 사랑하고 귀중히 취급해서 나에게 주신  주님이 섭섭지 않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는 이것이 성경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요 보다를 넣은 데는 뜻 이 통합니다.

 '모든 것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 그보다 나를 더 사랑해야 되지 나보다  그걸 더 사랑하면 안 된다.' 이 말씀으로 보면 '모든 것을 다 사랑해라. 주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사랑해라. 그러나 사랑하지만 주님보다 더  사랑하면 거기에 끌려 가 가지고 주님 배반하게 되기 때문에 안된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가다가, 가끔 가다가 보면 주님을 더 사랑하나 그걸 더  사랑하나, 그 사람을 경성시키기 위해서 비중을 따지게 되는 그런 기회를  주십니다. 그럴 때가 우리에게는 많이 있습니다. 사업도 그러하고, 직장도  그러하고. 또 사람도 그러하고, 가족도 그러하고, 뭐 자기에게 있는 심지어  기술을 배우는, 기능을 배우는 그 지식이나 모든 기능도 그러합니다. 그럴 때는  주님이 보시기에 주님이 그것을 주시는 것이오. 아, 저 머리털 하나 꼼짝거리는  것도 주님이 다 주관하셔 가지고 주시는 것인데 직장을 주님이 안 주시는 직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자기가 주님의 말씀을 어기고 가는. 어기고 가는  그것은 주님이 지어 놓으신 것을 주님을 어겨 죄를 지으면서 죄로 취하도록 하게  하는, 그 허하는 방법이 벌써 틀리기 때문에 틀리는 것입니다. 그것도 주시기는  주님이 주셨습니다.

 이렇게, 이 모든 것을 다 사랑하나 '보자, 네가 그것을 나보다 더 사랑하면,  나중에 차차 차차 그리 되면 그것을 나보다 더 귀중히 여기고 더 사랑하게 되면,  네가 내 법칙에 순종해야 네가 살고 구원이 이루어지고 성공을 하는 것인데 그래  하다 보면 너도 모르게 네가 속화되고 네가 흐려져서 나에게 순종하는 것보다도  그것을 따라서 움직이고, 나에게 마음과 뜻과 성품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  해서 나를 사랑하라고 그런 것들을 펐는데 잘못하면 그것들을 나보다 더 사랑해  가지고 그만 네 마음 성품 뜻, 힘, 목숨 전부가 다 나를 떠나서 거기에 속하게  되면 거기에는 생명이 없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고 절대 능력이 없다. 절대  책임이 없다. 안보도 없다. 완전도 없다. 이러니까, 네가 죽고 망할 것밖에 더  되겠느냐?' 이라기 때문에 종종 주님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시험해서, 이  물건을 가질라고 하면 주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 주님을 버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계명을 버리는 것이 주님을 버리는 것이요, 주님의 계명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주님을 미워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보다 어느 것이냐? 나는 보다라는 말을 설교할 때에 많이  쓰는데, 이 성경에, 새로 개역한 데 보니까 보다라는 말을 쏙 빼 놓으니까 내가  보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저 무슨 소리를 저래 하는고?'  자꾸 이래 조작배기로 만들어서 하는 말로 그렇게 여러 분들이 듣기 쉽지  안했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아무래도 오늘은 이 보다에 대해서 설교를 해야  되겠다 해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보다 나를 더 사랑치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그럴 거 아니겠습니까? 그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치 않으면 결국 그리 끌려 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아주 번역이 알기 쉽게  잘 돼 가지고 있습니다. 요 보다를 쏙 잡아 뺐다 그말이오.

 요한복음 2장에도 보면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뇨' 요것이 원문의  성경인데, 그때에 이적을 행하라고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말하니까 그 이적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는 것이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 행하는 것  아니라 그말이오. 알아듣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는 것이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이 행하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적을, 물로 포도주  만드는 이 일을 해 달라고 이래 할 때에 그때는 예수님이 밝혔다 그말이오.

'여인이여' 이 이적을 행하는 데 대해서는 나를 지금 아들로 생각하고 지금  말하고 있는데 내가 아들이 아니다.' 그말이오.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뇨.' 이 이적을 행하는 이는 초자연의 능력을 행하는 것이니 하나님 아버지  아들로 이와같이 하는 것이지, 동정녀 마리아의 아들, 피조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창조주로 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창조주로 하신다는 것을  밝혀서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뇨' 이렇게 처음에 성경이 그렇게  번역돼 있었습니다. 나는 원어를 모르지만 그렇게 그때는 모두 다, 일본말로  번역이나 뭐 한국말로 번역이나 나는 외국말을 모르는데 그런데 번역은 다 그래  됐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차차 차차 개역을 하면서 '여인이여 하는 것은 이거  불효다. 어머니한테 어디 여인이여 그럴 수가 어디 있나? 이거는 이 말이 너무  예수님에게 모순되고 다른 사람에게 욕 얻어먹을 말이니까.' '여인이여' 하는  말을 '여자여'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여자여' 그렇게 번역했습니다. 또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뇨' 하는,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이렇게 권위 있게  말씀하신 것을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요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전부 인본으로, 사람을 근본으로 해 가지고 성경 해석도 하고 성경  번역도 하고, 사람 좋게 하다 보니까 하나님의 도에는 상관이 없이 점점 속화돼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 신앙은 저 버리고 지식만 위주로 해 가지고  나가는 그 지식 위주의 사람들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 개혁 신학교가,  위대한 개혁 신학교가. 아주 위대한 개혁 신학교가 타락하고, 또 타락해서  속화되고, 거기서 또 개혁해 나온 신학교가 또 얼마 지나고는 또 타락해서, 타락  가운데서 이게 타락했다 하고 그 가운데 새움 같은 새움이 나서 가지고 또  개혁하고, 또 개혁해 가지고 얼마 나가면 또 타락합니다. 타락하면 그 속에 새움  같은 참 진리 아는 사람들이 또 개혁을 하고. 이러니까, 개혁하고 나서 좀  있으면 타락하고 타락하고 나면 그 다음에 이제, 타락한 거와 그 속에 진짜와는  영 다르기 때문에 뚜렷한 그 개혁을 하고, 그러기 때문에, 타락에서 개혁이  나오고 개혁에서 타락이 나오고 또 타락에서 개혁이 나오고 이렇게 자꾸 흘러  내려온 것이 교회사요 교리사입니다.

 그것이, 성경 번역하는 학자들이 '여인이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 예수님이  그 말씀하신 것이 뭣 때문에 말씀하셨는지 신앙을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윤리만 알고 도덕만 알았지, 거기에 예수님이 기적을 행하시는 그것은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그때 예수님이 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오. 아들로서 하는, 아들의 위치에서 하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에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니까 '여자여'가 너무 박하다.' '여인이여' 또 '무슨  상관이 있나뇨'가 박하다. 어디 이렇게 하등어를 쓸 수가 있는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렇게 번역을 해야 된다.' 또 나중에 좀 있으면 '여자여' 이랄  게 아니라, 이랄 게 아니라 '어머니여' '어머니여' 그렇게 번역이 돼 가지고  나올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나귀 타고 올라가실 때에 그때에 제자들에게 '아무  외양간에 가 가지고 나귀 새끼가 있으니까 그 나귀를 몰고 오라. ' 이라는  여기에 대해서 신신학에서는 '예수님이 무리하게 남이 길러 놓은 그 나귀 새끼를  그렇게 대번에 대금도 치르지 안하고 그래 몰고 오라고 이래할 리가 있나?  그거는 잘못 됐다. 미리 예약이 있었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신신학  해석들입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이, 털끝만치도 남에게 빚지지 안하고, 부정을  끼치고 안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주님이 남의 외양간에 길러놓은 나귀를  '몰고 오라. 주인이 말하거든 내가 쓴다 해라' 이렇게 말씀하시고 몰고 오게  했느냐? 그것은, 주님이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은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재림하실 것을 예표하는 예상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데에는 이제 모든 만물의 주인이 없습니다. 주인은 당신 한 분이시오. 모든  존재는 주인은 당신이시오. 당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신 것을 나타내는 그  뜻으로써 '가서 몰고 오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모르는. 이 모든  지식에만 위주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도 달리 자꾸 해석이 되고  나온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홍해 바다를 건널 때에도 '그 홍해 바다에 건너오는 것이 홍해  바다가 갈라져 그런 것 아니다. 홍해 바다를 건널 때도 갈라져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에 있지만 그때 그 갈라진 것이 아니다. 그 때에 그 홍해 속에  그렇게 암반이 있어 가지고 암반으로 타고 건너왔다 예수님이 물 위로 오신 것도  암반을 타고 건너왔다.' 어짜든지 인간 이치에 맞도록 해석하는 것이 인본주의의  신학이요 이것을 가리켜서 신신학이라, 새로운 신학이라 이랬습니다.

신신학인데, 요새는 말할 것 없이 '모두 신 신학이어야 된다. 성경도 근대화  돼야 된다. 시대화 돼야 된다.' 이래서 성경을 고수하는 이것을 고집이라 하고  성경대로 그렇게 해석하는 그 해석하는 것을 '이거는 미개한 해석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때 부산 기독교 방송국에 무슨 직을 담당하고 있었는지, 그분이 와 가지고  제게 대해서 말할 때에, 종종 여기 와서 은혜를 받고 이랬는데, 지금은 오는지  안 오는지 어디로 전근돼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분이 나한테 말하기를 '목사님  설교하시는 것은 꼭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설교한 거와 꼭 그렇습니다. 아주  초대 교회 설교한 거와 같고 요새 지금 설교하는 거와 같이 그렇게 문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것이 은혜된다고 하고 왔는데, 또 그 뒤로는 어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어짜든지 많이 읽어 가지고 거기서 원수가 와 가지고  성경 번역을 아주 한 권을 틀리게 하고 몇 절을 틀리게 하고 몇 십 절을 틀리게  했다 할지라도 성경 전체를 보면 바른 진리를 환하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보지 안하고 어느 단편적으로 몇 절만 보고 사는  사람, 몇 권만 보고 사는 사람. 요런 꾀쟁이들을 다 넘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단들을 많이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단은 정통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단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 이단이 아니면 정통이 정통으로 나타나지를 안하고,  정통된 사람은 점점 정통되고 이단된 사람은 점점 이단돼서 '더러워진 자는 점점  더러워지고 깨끗해진 자는 점점 깨끗해진다.' 말씀한 대로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오전에 이 보다라는 말씀을 우리가 잘 기억하고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대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다 아름다우매 사람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서 모든 것을 대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바로 대하고, 바로 대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기도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하면 그 전부는 다 우리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귀한 선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오. 마귀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존재인  것입니다. 마귀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될 필요한 존재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알지 못해서 그것을 잘못 접촉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마귀에게 손해를 보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진리를 깨달아서 진리대로 그것을 바로 취급을 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으면 마귀는 우리에게 큰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지으신 것은, 디모데전서 4장 4절에 "지으신 것은  "아름다우매 사람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감사함으로 받는다 말은 이것을  하나님께서 지어 주신 것인데 내게 필요 있어 지어 주신 것이다. 아무리  자기에게 불행스럽다 해도 '이거는 왜 내게 이런 것이 있을까? 왜 이런 사건이  내게 봉착됐을까? 왜 내 옆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나, 우리가  껍데기로 할 때에는 우리가 실수를 합니다. 그러나 똑똑히 생각해서 '아,  하나님께서 내게는 이런 것이 있어야 고쳐지겠고, 내게는 이런 것이 있어야  조절이 되겠고, 내게는 이런 것이 있어야 구원이 되겠고, 내게는 이런 것이  있어야 큰 화를 작은 화로 막는 일이 되겠다.' 똑똑히 깨달으면 결과적으로 모든  당면된 것에 대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내게 대해서 이렇게 알뜰히, 심각하게,  넓게, 깊게 관심을 가지시고 취급을 하시고 이렇게 세밀히 간섭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래 깨달아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으니" 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 지느니라" 그 모든 것이 다 구별되고  구별되면 그것이 들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 되어지느니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보다를 이것을 하나 잘 생각해서, 우리가 땅 위에 있는  그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주시지 아니한 것은 없습니다. 그전에도 늘 그런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우리 현실에 닥친 것은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사건이든지, 죽음이든지, 원수든지, 물질이든지, 큰 낭파든지, 병드는 것이든지  무엇이든지 우리 현실에 관련된 그 모든 요소는 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도  주고, 마귀를 통해서도 주고, 원수를 통해서도 주고 이 자연을 통해서도 주지만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고, 우리 위해서 생명까지 버리신 이  사랑의 주님이 몰라 그런 것도 아니고. 능력 모자라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해  그런 것도 아니고 다 우리에게 필요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주님이  주시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으니 이것을 그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것을 가지고 너를 위해서 취급하려고, 너를 표준해서 너를 중심으로  해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손을 댔다가는 네가 실수한다. 모든 것이 왔을 때에  그것을 주님이 주신 것인데 주를 위해서 그것을 가지고 취급하라고 주신  것이니까 주를 위해서 이렇게 이것을 한다면 어떻게 취급을 해야 되느냐 하는  그것을 네가 생각을 가지면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이 벌써 이렇게 저렇게 취급할  방편을 세밀히 가르쳐 놨기 때문에 그대로 행하면 그 모든 것이 너의 구원이  되고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의를 이루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공연히 세상을 적대시하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또  학문을 적대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고 늘 말하기를 이  학문이 우상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학문 그거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이 제게 와서 역사하도록 할라 하면 제가 그만한 공력이 들어야 될  터인데 그 공력 열 개를 들이면 하나님이 와서 역사하실 수 있는데 무식한  사람은 공력 열을 들이나 자기는 무식한 사람보다 유식 한 그게 있기 때문에  다섯만 들여도 '내 유식 가지고 무식한 사람 공력 다 들이는 것보다도 이것으로  보충이 되지 않느냐?' 이래 가지고 '하나님 은혜를 저 사람은 열 개를 받고 나는  다섯 개만 받아도 내게 있는 지식이나 모든 지위나 권능 가지고 그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대신 이것을 대용품으로 하면 내가 많이 안 받아도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이 동등 결과를 맺을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그것을 하나님 대신으로  해서 우상이 되어 지기 때문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든 지식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하나님과 그 사이를 벌어지게 하는 음녀가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음행케 하는  음행의 포도주도 될 수가 있고, 거기에 취하면 그만 정신을 잊어 버려. 거기에  취하면 하나님 배반하게 되고, 거기에 취하게 되면 하나님 배반하게 되고  그것으로 하나님 대신 삼고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이 말씀에서, 여기에 부모나 형제나 자매나  처자나 이런 걸 말했지만 다른 데는 또 전토나 그런 걸 말했습니다. 다른 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라' 또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 뭐 내가 싫어하는 것이나 좋아하는 것이나  내 현실에 그것이 봉착될 때에는 그것은 사랑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그것을  봉착되도록 그렇게 하신 이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을 주실 때에는 나에게 반드시 유익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주신 것을 허투리 취급하면 안 되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  하는 그걸 기존 지식으로 딱 가지고, 하나님이 이거 주셨다 하는 기존 지식으로  또 가지고, 하나님이 내 구원에 유익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셨다 요것도 기존  지식으로 확고부동하게 딱 가지고, 이것을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이용하면  내게 선물이 되어지고,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취급하지 안하고 인간  생각대로 취급하면 이것이 나를 망치게 하는, 음녀가 되고 음행의 포도주가  된다. 그 물건이 음녀가 되고, 하나님과 나 사이를 벌어뜨려서 나를 꼬아 가지고  그걸로 들어붙어 가지고 하나님 잊어버리게 하는 음녀가 되고. 그 귀한 기능의  지식이 음행의 포도주가 된다. 그 지식이 들어서 나로 하여금 하나님과 차차  멀어지게 만들 고 그만 그것에게 취해 자빠져 가지고 그것이 하라하는 대로 해  가지고. 음행의 포도주에 취해 가지고 멸망을 하고 인간의 정상적인 걸음을 걷지  못하게 된다, 그런 말씀을 우리가 단단히 가지고 취급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런데, 하는데, 첫째로 요게 간단하게 말했습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 좋은  것은 네가 좋으니까 잘못하면 마음이 거기에 끌려 가지고 그만 그게 좋아서.

그것 좋은 것이 내 말씀보다도 그게 더 좋고, 내 말씀보다도 그게 너에게 더  권위가 있고, 그것이 나보다도 더 권위가 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내 말씀을  어기고 나를 배반하는 거기에까지 나아가면 나를 따라오지는 못한다, 나를  배우지는 못한다, 내 제자는 되지 못한다, 내가 주는 구원은 이루지 못한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그게 좋을 때는, 그게 좋을 때는 주님보다 그것을 더 좋아해 가지고  실패하는 무서운 일이 있습니다. 또 그것이 아주 싫어서, 아주 나쁘고 싫을  때에는, 싫을 때는 어찌 되느냐? 그게 너무 싫어서, 그게 너무 싫어서 주님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너무 싫어도 잊어버립니다. 너무 그것이 싫어 가지고  주님이 주신 것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거기에 대해서 감사하질 못합니다.

감사하지 못하니까 주님이 주신 거 잊어버리는 것이요, 나중에는 주님의 말씀도  잊어 버려 가지고 실패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거, 좋은 것은 좋아서 그리 쏠려 가지고 그만  실패하고, 나쁘면 나쁜 그것에게 이제 충격 받아 가지고 하나님까지 배반해서  실패하고, 이러니까, 좋은 데 대해서도 그 좋은 것으로서 주님과 주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또 아무리 나빠도 나쁜 그것을 인해서 주님과  주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면 우리는 실패합니다. 좋은 것도 주님이 주신 것이요  나쁜 것도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좋다 나쁘다 이렇게 편벽되게 조부라운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지, 실은 좋고 나쁜 것이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좋고 나쁜 것이 있지만 실은 속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진리를 내가  차지하고 내 구원을 이루는 그 면에 가 가지고 생각하면 좋고 나쁜 게 없습니다.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그것이 내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동등 가치의 결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동둥 결과를 맺을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용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동둥 나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현실이 왔을 때에 꼭 같은, 가치가 같은 현실이 다  세상뿐으로 보면 가치가 다른 현실이지만 세상에서 무궁세계를 이루는 세상과  무궁세계까지를 연결시켜 보면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고 꼭 같은 결과를  가지고 있다. 그것 잘못 이용하면 큰 해의 결과를 맺고 잘 이용하면 큰 구원의  유익의 결과를 맺게 되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좋다 나쁘다 하지 말아라. 꼭 이용  가치가 꼭 같다. 그 결과의 해독의 가치도 꼭 같다. 이해의 가치가 꼭 같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속단으로 가지고 그 아주 유협한, 어리고 좁은 그런 견해를  가지고 그렇게 네 인간대로 견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 전, 돌발한 게 아니라  영원 전 예정해서 해놓은 일이다. 영원 전 예정된 일이다. 하나님의 절대의 그  능력이 들어서 그 일을 힘들여 했다. 이 하나님의 목적 구원을 위해서 그 일을  하셨다. 네 구원 위해서 줬다. 이러기 때문에, 네가 좋다 나쁘다 그렇게 생각지  말고, 다 좋은 것이다. 주님이 주신 것이요 다 좋은 것인데, 네가 바로 알고  취급을 하면 그것이 다 너에게 큰 복이 되고, 그것을 바로 알지 못하고 취급하면  천하 사람들이 다 좋다 하는 것도 너를 망치고, 바로 취급하면 천하 사람들이 다  나쁘다 하는 그것도 네 구원을 이루는 데에 필요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깨닫고 우리는 무엇이든지 이 보다를 잘 씁시다.

이것보다 어느 것이 나으냐? 나으냐? 좋은 것이 올 때에는 이것 보다 뭐이 더  좋으냐? 그래 보다를 써야 되겠습니다. 이것보다. 이것보다 하나님이 더 좋으냐  하나님보다 이것이 더 좋으냐? 좋은 것을 우리는 이 제 비중을 비교해서 보다를  가지고 따져야 되겠습니다. 또 아주 자기에게 나쁜 것이 왔습니다. 나쁜 것이  왔으면 이것이 아주 내기에는 해독되고 나쁜데. 나쁜 이것이 더 나쁘냐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더 나쁘냐? 이 나쁜 이걸 가지고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면  하나님과 진리 버리는 것이 더 나쁘냐 이게 더 나쁘냐? 그 나쁜 게 비교를 하면  하나님과 진리 버리는 것이 더 나쁘기 때문에 나쁜 그걸 눈물 흘리면서  잡습니다. 눈물 흘리면서 잡고 놓지를 아니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렇게 좋은  데도 좋은 것의 비교에 보다를 쓰고. 나쁜 것은 나쁜 것의 비교에 보다를 써야  됩니다. 이게 나쁘지만 하나님과 진리 버리는 거와 그 둘을 비교하면 어느 게 더  나쁘냐? 하나님과 진리 버리는 게 나쁘지 그거 버리는 게 나쁘요? 그러니까 버릴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래서 보다를 똑똑히 기억하고 우리는 이리 저리 치우치지 않고 지혜 있는  사람이 돼서, 참 현실이라는 보배로운 현실을 놓지 맙시다. 아무리 좋아도  주님보다 그걸 좋아했으면 그것은 나에게 사망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쓰고 독하고 나빠도 그것이 주님과 진리 잊어버리는 것보다는 크지 않습니다. 더  나쁘지는 않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현실 생활에서 매일 매일 이제부터 이 보다를 쓰기로 합시다. 딱  결심해요. 이제는 어렵든지 괴롭든지 내 현실에서는 요 보다를 꼭 쓰겠다,  아무리 싫고 나빠도 주님과 진리를 배반하는 것보다는 그게 적습니다. 그게  나쁘다고 해 가지고 우리는 주님과 진리를 버리면 주님과 진리 버린 그 큰  해독은 참 그까짓 거보다는 몇천 배도 더 됩니다. 요거 결심하고 작정하고,  우리는 요대로 결심하고 작정하고 현실 현실에서 요 보다를 가지고 따지면  간단명료하나마 우리는 슬기로운 걸음을 걸어갈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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