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심정

 

1988. 10. 19. 밤 (수)

 

본문:누가복음 15장 1절∼7절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

 

여게 바리새인들은 아주 신앙에 독실한 사람들이요 또 서기관은 성경을 잘 알고 성경 가르치는 선생님들입니다. 이들은 믿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잘 믿는 사람으로 자타가 인정을 하고 또 이 서기관은 자기들이 성경을 잘 아는 아주 성경에 능한 성경 선생님들인 줄로 그렇게 자타들이 다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이 하나님 말씀 들으러 오는 것을 영접하고 같이 하나님의 도리를 전하고 그 진진하게 서로 신앙 교제와 전도하는 것을 보고 조롱을 했습니다. 어떻게 저 거룩하다고 하는 선생님이 저 죄인들하고 세리하고 저렇게 마구잡이 교제를 하고 또 먹고 마시는 저런 일을 하느냐 그렇게 말을 했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한 심정이며 또 예수님은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하는 것을 여게 비유로 나타냈습니다.

여기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온 것이나 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거게 대해서 논평한 것이나 이런 것이 우연히 이렇게 만나져서 그런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그때에 된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정하실 때에 이 예정 순서에 들어간 것이 때가 되매 예정하신 그대로 이런 사람들이 있게 됐고 그런 분위기가 생겨지게 됐고 이렇게 그런 형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이루어진 것을 영원 전 하나님의 예정에서 시작되고 또 예정에서 시작된 것이 하나님이 창조로 이런 역사가 존재하게 됐고 또 하나님의 섭리로 이런 모든 운동들과 순서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인 것을 우리는 성경으로 알고 믿습니다.

사람들이 요새도 뭐, 이제 우리 양성원에도 차차 차차 이제 조금 장성해 가고 조금 범위가 넓어져 가는 것 같습니다. 이래 놓으니까 이제 하나씩 둘씩 신학이 자꾸 이제 들쳐 나옵니다. 신학은 몰라 그렇지 수백 신학입니다, 수백 신학. 신학은 수백 신학입니다. 그래서 이 일방적으로 일면만 보고 자꾸 이렇게 말을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도를 방해하는 일들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이요 절대 은혜라, 이걸 가리켜서 궁극적 은혜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은혜는 완전 은혜라, 이래서 완전주의라는 그런 것이 또 일찍부터 나돌고 있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은 완전이니 오늘 뭐 사람이 뭐 열심히 하라 말아라, 행해라 하지 말아라 이렇게 할 것이 없이 중생된 자들은 다 성화가 되기 마련이고 구원이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말을 해 가지고서 미혹을 줍니다.

그거 일방적 지식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서 죽도록 충성하라 하는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의 궁극이 아니냐?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아니냐? 이 모든 것이 합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구원을 완성시키는 그 과정들이요 모든 조건들인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일방적 지식을 가지고 이래 하니 이 학자는 이 구석에 파묻혀 가지고 죽고 저 학자는 저 구석에 파묻혀 죽고 이래 가지고 자꾸 이렇게 하는데 그런 걸 총괄해서 발 아래 밟아야 됩니다. 이런 걸 전부를 다 파악해 가지고 모든 지식을, 전체의 지식을 알아야 되지 전체 지식을 모르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좀 배울 기회는 가졌는데 정신 안 차리면 안 됩니다.

여게 이것도 중요한 것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거게서 나타나서 새리와 죄인들을 훼방하고 ‘주님이 저와같이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영접한다’ 이런 분위기 조성된 것이 이것이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치시기 위해서 영원 전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대로 이 사람들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또 그때에 회집을 했고 또 그때에 죄인들과 세리들이 주님 앞에 나아오게 하셨고 또 그것 보고서 바리새 교인들과 서기관들은 조롱을 하고 훼방을 했고 이게 전부 다 하나님의 절대 예정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 역사입니다.

그것 알고, 예수님께서 그다음에 작정하신 대로 요런 분위기를 조성하시고 그 분위기에 또 당신이 요렇게 잃은 양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잃은 양 비유 말씀하신 것은 이것은 그때에 그 형편 사정을 보고 거게 따라서 적당한 적응으로 잃은 양 비유를 하셨는가? 이것도 만세 전부터 하나님이 딱 예정하신 거게서 그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예수님은 또 요렇게 말씀하셔서 잃은 양 비유를 하시도록 이렇게 딱 돼 가지고 있어 그 순서대로 된 것입니다.

칼빈이 궁극적 구원이라, 칼빈이 말한 것 가운데에 제일 유력한 깨달음은 하나님의 주권을 깨달은 것이 그것이 제일 유력한 깨달음입니다. 주권 깨달으면 또 궁극적 은혜라. 주권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다 구원을 전부 당신이 혼자 주권하지 안하면은 주권이 깨져버리지, 주권 하나만 알면 다 돼요.

이런데, 여게서 모순돼 가지고 지금 모두 뒤죽박죽 해 쌓는 것은 그 지식이 전체 지식이 되지 안하고 총괄 지식이 되지 안하고 다 기형적 지식이기 때문에 이리 저리 모순이 되어서 날뛰고 있는 것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전부 모순이오. 모순이나 신구약 성경은 하나입니다. 단일성의 일체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이 도리를 믿는 데에서 상식으로 말하고, 이제 여게서 잃은 양 찾는 이 비유가 우리에게 구원 이루는 이치를 가르치는 것이요 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들과 계약을 선포하는 계약입니다. 이게 바로 선포하시는 계약이요 또 이것이 구원을 이루는 이치요 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우리 생애 법칙을 가르친 것입니다.

이런데 혹 이런 것을 하나 오다가다 그런 형편 되니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그렇게 그런 권능을 가지고서 뭐 그런 능력있는 말씀을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 형편이 지나갔다 이렇게만 보고 이것이 전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실물 교제를 가지고서 우리에게 가르친 이 사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도 절대 예정이요, 절대 주권이오.

이러니까, 이런 것을 알면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것도, 죽도록 충성하라, ‘하나님이 중생된 사람이면 다 구원얻기로 다 완전주의, 궁극적 구원이요 완전구원으로 돼 가지고 있는 건데 뭐 죽도록 충성하라고 그런 말을 하고 있느냐?’ 하면 그 사람이 진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것도 하나님의 완전 구원 속에 들어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그 요소에서 빠져나가 버리면 완전 구원이 안 된다 그거요.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이해가 돼요? 그런데 여게 중요한 것은 백 마리 양이 있는데 한 마리를 잊어버리니까 한 마리 그거 찾도록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서 한 마리 찾도록 찾기까지 노력했다, 열심히 노력했다 하는 이것이 여게서 예수님의 그 심정과 당신의 활동을 여게 보이기 있습니다. 당신의 심정은 아흔아홉 마리 있고 한 마리 하는 그까짓 거야 뭐 아흔아홉 마리 있으니까 한 마리 그거야 있으나 없으나 이렇게 여기지 안하고 잃은 양 한 마리에 대한 관심이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아흔아홉 마리에 대한 관심보다도 관심이 더 뜨겁고 크다 하는 요것을 요게서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그러면 잃은 양은 어떤 사람이 잃은 양이냐 하면은 예수 믿다가 낙심한 사람이 잃은 양이 아니고 잃은 양은, 이것도 낙심한 사람만 잃은 양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잃은 그것만이 아니고 잃은 양은 예수님의 양이 됐는데 예수님의 양이 그만 딴 데로 가서 없어진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택한 자들은 예수님의 대속의 피공로로 다 값주고 사서 완전히 주님의 것이 돼서 주님의 양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잃은 양은 택함을 받은 자로서 아직까지 중생되지 못한 그 모든 사람이 다 잃은 양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잃은 양입니다. 믿다가서 낙심해서 돌아간 사람들은 그다음에 잃어버린 드라크마로 거게 말씀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여게서 예수님은 어떤 심정을 가지고 계시느냐? 의인 아흔아홉 사람보다 아직까지 구출하지 못한, 아직까지 이 복음을 그가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주님을 믿지 못함으로 구원을 받지 못한 그 한 사람에게 대한 관심이 아흔아홉 사람에게 대한 관심보다 더 크다, 관심이 더 크고 더 뜨겁다 하는 요것을 요게서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믿는 사람만이 상대하고 안 믿는 사람, 안 믿는 사람은 그 잃어 버린 양인데, 왜 잃어버린 양인가? 주님이 피로 값주고 샀는데 그게 있기는 지금 마귀에게 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잃어버린 양이오. 믿다가 낙심한 자를 잃어버린 양이라고 말한 게 아니고 그거는 잃어버린 드라크마라, 드라크마고 여게는 예수님의 택한 백성이 아직까지 주님을 찾지 못하고 악령의 사망의 감옥 속에 들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주님을 자기의 구주로 알아서 영접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그 모든 사람을 가리켜서 잃어버린 양이라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주님은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이제 이러니까,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 중요하지마는 믿는 모든 사람 그보다도 택한 자로서 아직까지 주님을 찾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대한 관심이 이미 믿는 사람의 모든 전부에 대한 관심보다 그 한 사람의 관심이 크다 하는 요것을 여게서 아는 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첫째 진리입니다.

보면 사람이 자꾸 이렇게 복음을 전해서 안 믿는 사람을 믿도록 이래 전도하는 사람, 전도하는 사람이 전도해 놓고 깨뜨리고 전도해 놓고 깨뜨리고 뭐, 전도해 놓고 뒤에 전도받은 사람이 보면은 그만 그 전도받은 걸 다 내버릴 만치 아주 뭐 엉망 행위를 하고 이런 사람도 하나님이 그 복음 전한 걸 인해서 긍휼히 여기는 걸 볼 수 있고, 만일 그런 큰 실수가 없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이 사람보다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종종 이렇게 봅니다, 우리 가운데서. 그저 밤낮 믿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 믿구로 만들어야 되겠다. 저 사람을 어짜든지 전도해서 회개시켜 예수 믿구로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그 심정을 가진 그 사람, 그 심정을 가진 그것이 자기의 심정입니까? 그 사람의 심정이요? 그 사람의 심정 아닙니다. 요 분명히 지금 양을 찾는 이는 목자인데 목자는 예수님이십니다. 목자는 예수님이시요. 그러면 그렇게 믿지 않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는 그 관심이 바로 예수님의 관심이오. 바로 예수님의 관심. 자기 속에 예수님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것이라.

그러기에, 그런 사람들이 제가 전도해 놓고 박살내고 전도해 놓고 박살내고 하는 그런 사람이 만일 그렇게 전도하고, 무능하게 전도해도 자꾸 전도하고 그 일을 계속하고 자기가 전도해 놓은 것을 다른 사람이 오해할 만치 그렇게 박살내지 안하고 그저 근근히 예수 믿는 신앙 행위를 한다고 하면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동행은 항상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같이 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특별히 은혜 주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대개 건강합니다. 대개 건강하요. 그런 사람의 심령에 또 평강이 늘 계속합니다.

이래서 그것을 여게서 우리가 깨닫고, 찾으면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어깨에 메고 돌아온다. 이것은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건 예수님이 어깨에 메고 돌아오지 않습니까? 그 찾은 양을 귀중히 여겨서 찾은 양을 위해서 자기의 노력이나 희생이나 그런 게 생각되지 안하고서 찾은 양, 한 사람이 예수 믿게 될 때에 그 믿는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의 수고나 모든 것이나 아끼지 안하고 뭐 그때는, 자존심도 아끼지 안하고 교만도 아끼지 안하고 무슨 자기의 이해 문제 그런 것도 생각지 안하고 자기가 평소에 생각지 못할 만치 그 사람이 얻은 양 하나를 위해서 자기의 마음이나 몸이나 정신이나 자기의 물질이나 아낌없이 기울여지고 투자되는 그것을 볼 것입니다.

여러분들 그런 느낌을 많이 가졌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바로 그것이 주님과 동행이오. 껍데기는 내지마는 내 속에 주님이 내주하셔 가지고서 내 안에 내주하셔 가지고서 나를 통해서 그 역사를 하고 있는 것이오. 그게 주님과 동행입니다. 이 심정을 가진 것이 주님이 자기 안에 계셔서 자기 심정이 아니라 주님의 심정이오.

자기 마음 안에 주님이 계셔서 주님과 자기와의 마음으로 동행합니다. 또 그럴 때에 자기의 모든 것이 아껴지지 안하고 투자하고 싶고 그를 위해서 봉사하고 싶고 뭐 수고도 쩔뚝쩔뚝하면서도 그것도 생각지 안하고 그를 위해서 있는 전부를 기울여서 분발돼지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많이 겪었을 것입니다. 그게 뭐이냐? 그것이 네가 아니다. 껍데기는 네지마는서도, 껍데기는 네지마는 껍데기는 네나 네가 아니고 그 속에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그 사람이 주님하고 동행하는 사람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성전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지체요 그것이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과 동행인 것입니다.

어깨에 메고 와서 모든 이웃 사람과 벗들을 불러 가지고서, 벗들을 불러 가지고 ‘야, 오너라. 내가 잃은 양을 찾았다. 같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자.’ 하면서 부른다 하는 요 비유가 뭐인가? 요것은 자기가 잃은 양을 찾아서 구원했을 때에 그때에 자기에게 솟아오르는 그 기쁨은 다른 사람이 좋아할지도 안 할지도 모르면서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기뻐하는 그 기쁨이, 이 기쁨은 다른 사람도 기뻐할 것이라,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고 모든 사람이 내게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라 하는 것이 믿어진다 그말이오. 그런 경험 있습니까? 그런 경험이 있어요? 이거 자기가 실지로 느끼지 못하고 이래 하면 이거 다 헛돼.

한 양을 찾아 가지고 자기의 아낌없이 어깨에 메고 온다. 자기 것을 투자해, 자기 것을 다 투자하고 희생하면서 그저 아까운 줄도 모르고 어찌 됐든간에 그것만 구원하기 위해서 뭐 앞뒤도 모르고 전후도 모르고 뒤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만 구원하기 위해서 내 전력이 기울여지는 그것이 네가 아니라 네 속에 주님이 계셔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이 하시는 것이요, 그게 주님과 동행이오.

그라면서, 누가 다른 사람 기뻐할지 모르는데 기쁘고 좋아서 벙긋벙긋하며 그 기뻐하는 것 보면 다른 사람이 보고 저거 미쳤나? 뭐이 저거 나한테 뭐 내가 기뻐할 게 뭐 있다고 나를 보고 뭐 기쁘고 즐거워 벙긋거려 쌓고 저래 쌓는가? 다른 사람이 미쳤다고 할 만치 기쁘나 제 속에는 기쁨이 충만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기뻐하리라 하는 것이 믿어지고 제 기쁨이 모든 사람의 기쁨이 되리라 하는 그 기쁨을 점령하게 됩니다. 기쁨을 가지게 됩니다.

기쁨 가지는 그것도 제 기쁨이 아니오. 주님이 자기 속에 와 가지고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이 자기 속에 와서 역사했기 때문에 독사와 시랑이 같은, 다른 사람 망하는 거나 좋아하고 복받으면 배가 아픈 그런 흉측한 살인자가 어찌 그리 다른 사람이 구원얻는데 기쁘고 즐거운가? 저만 기쁠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품습니다. 뭐 기뻐해 쌓으니까 ‘이 사람 자네 왜 그래 웃어 쌓고 기뻐 쌓노? 이 미쳤나, 이거? 요새 정신병이 걸렸나 미쳤는가보다.’ 미쳤는갑다 할 만치 그 기쁘고 즐거움이 다른 사람에게 토하게 됩니다. 품어 내게 돼. 그것도 주님이 그 속에 내주하셔서 주님의 기쁨에 자기가 그게 나타내고 있고 같이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 여게서 세 가지, 자기 같으나 자기 속에 자기 아닌 주님이 계셔서 주님과 자기와 하나가 된 이 비밀을 여게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소원의 비밀, 소원의 비밀. 하나를 전도, 사람을 전도하기 위해서 마음이 간절해서 산다싱은 언제 그 무인지경인데 보니까 사람이 간 그 발자욱이 있어서 발자욱이 있는 것 보니까 발자욱 찾아가면 여기 사람 있을 것 아니겠는가 해 가지고 발자욱을 찾아 갈라고 시작해 보니까 어떻게 높은 산이고 길이 없고 험한 데든지 발자욱만 보고 자꾸 이래 자꾸 찾아 가다 보니까 막 손으로 그러니까 손이 전부 다 이거 다 벗겨져서 피가 나오고 이라는데 가니까 단지 그 산맥에 한 집이 있더래요. 한 집 있어. 한 집이 있는데 식구가 서이 살아. 서이 사는데 거기 가서 복음을 전했어. 복음을 전하고 그 사람들이 그래 믿기로 작정하고, 복음을 전하고 그래 온 것을 자기 일생의 전기에다 그걸 써 놨읍디다. 그때에 그 발자욱이 있으니까 여게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이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복음을 전했겠나? 복음을 전하지 못했으니까 이 사람 하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아무래도 찾아 가지 안하면 여기 다 그만 이 사람 복음 못 듣고 죽을 것 아니가? 그 마음이 자꾸 불이 타 가지고서 된 줄도 가파른 줄도 모르고 가다 보니까 뭐 그만 밤은 거석하니까 뭐 먹지도 못하고 이래 가지고 자꾸 기어 올라가고 이래 가지고서 그 이튿날 가서 찾았는데 이 손에 피가 다 터지고 이라는데 그래 가지고 그 사람을 만나 가지고서 만난, 그 만나고 나니까 기뻐서, 만나고 나니까 그 사람을 전도해서 그 사람이 이래 복음을 듣고 믿기로 작정한 그 기쁨, 찾아 갈 때에 그 간절한 간절함, 만나 가지고서 기쁜 그 기쁨.

그것이 자기의 일생 동안 사는 가운데에 기쁨 중에 큰 기쁨이 됐기 때문에 내가 여게서 갈 때에 간절한 그 심정을 기록해 놨고 또 그 세 사람 만나 가지고서 전도한 그 기쁨을 기록해 놓고, 그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주님의 심정입니다. 그게 주님과 동행입니다. 여게 그것을 지금 여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잃어버린 양, 이렇게 주님이 사죄 잉 화친의, 대형 대화친으로써 이와같이 지금 생명의 도를 완전히 이 대속을 설정해 놨는데 대속을 지금 택한 자는 이 대속의 소식을 들어야, 이 복음을 들어야 믿겠는데 이거 듣지 못하고 죽으면 안 되니 이 산골에 이와같이 가는 데는 이 복음을 들었겠나? 이러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 찾아가야 되겠다. 그래 찾아가고 싶어서 그걸 뭐 참 고난을 무릅쓰고 그렇게 어려움을 겪어서 찾아가게 된 그 심정이 그것이 예수님이 자기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서 예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만나니까 기쁜 것도 그러했어.

이러니까 여게서 안타까운, 마음에 구원을 얻지 못하고 멸망 가운데 빠져 있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운 그 마음, 또 이렇게 하나 얻고 보니까 자기의 있는 것 이런 저런 것을 아낌 없이 막 아낌없이 투자가 되는 이거, 투자되는 요 사람, 안타까와지는 요 사람, 또 얻고 나니까 기뻐 즐거워서 기뻐 즐거운 그 사람 요 세 가지 사람 나타났는데, 세 가지 사람. 요것이 주님과 동행이라, 요것이 자기가 주님과 동행한 것이요 요것이 주님이 자기 안에 내주하셔 가지고 역사했다는 요것을 깨닫는 요것이 요게서 제일 중요합니다. 알겠습니까? 우리가 다 그런 경험 있지요. 유별스럽게 ‘이거 아무래도 이 사람을 복음을 전해야 되지 안 전하면 안 되겠다. 이거 안 전하면 이 복음 듣지 못하면 멸망하겠다.’ 하는 그 구원 얻지 못하고 멸망 가운데 거게서 빠져 있는 거게 대해서 안타까와 하는 그런 심정을 더러 겪어 봤어, 경험해 봤습니까? 그런 심정이 여러분들 속에 있을 때가 있었습니까? 또 얻어 놓으니까, 얻어 놓으니까, 얻어봤자 그거 뭐 돈도 나오는 것도 아니고 지위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까짓 거 얻어봤자 뭐 이용물도 되지도 안하고 뭐 그거 아무 덕볼 것도 하나도 없는데 얻어 놓으니까 그렇게 기뻐서 자기의 모든 걸 아낌없이 이와같이 지금 마구 어깨에 메고 아듬고 좋아서 이렇게 투자하는 것, 또, 얻은 그 기쁨에 대해서 기뻐서 그 이웃 다른 사람까지 다 기뻐, 그 사람 뭐 내 양 찾았는데 그 사람이 기뻐할 게 뭐 있겠소? 내 양 찾았는데, ‘하, 이거 찾았네.

와서 기뻐하세.’ 이거 오라고 이래 쌓으면 다른 사람이 있다가 ‘양 찾으면 제 양 찾았지 뭐 제 양 찾았는데 그렇게 큰 것같이 떠들어 쌓네. 그 사람 좀 돈 사람이다, 아마.’ 이렇게 할 만치, 그렇지 않겠소? 이렇게 얻었을 때에 내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그런 것을 겪었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 안에 주님이 오셔 가지고서 내주해 가지고서 역사하시는 그 주님이시라 하는 요것을 요게서 우리가 발견하고 그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놓치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주님을 잊어버리지 말아요. 그 주님을 괄시하면 안 돼요. 그 내나 주님이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다 그렇게 모두 다 이래 동행하는 것이지 제 욕심대로 하, 주님 나와 동행하옵소서 뭐 이래 가지고서 기도하면 주님 나와 동행하옵소서 어데든지 동행하옵소서 막 떠들어 쌓는 그거는 거짓말쟁이오. 그 생각지도 안하고 속에 깊이 느끼지도 안하고 하는 거라.

이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서 아흔아홉 마리 양에 대한 관심보다도 한 양의 관심이 더 크게 기울어졌던 그 심정, 또 그것을 찾아 가지고서 만나고 나니까 자기의 모든 것의 희생 투자에 대해서, 그거는 뭐 끝이 없어. 그때 제가 할 수만 있으면 뭐이든지 다 할 거라, 이거. 그 심정. 또 그라고 나니까 기뻐 즐거워 못 견디는 그 심정.

그것이 바로 주님이시요, 그것이 네가 아니라 주님이라. 그것이 네가 아니고 주님이라. 그러니까 너는 주님이 내주해 역사하시는 것이 너를 통해서 나타나고 계시는 것을 우리에게 여게 비유로 가르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항상 주님과 동행할라면은 그 심정이 계속되는 게 주님과 동행이요, 그 아낌 없는 희생의 투자가, 자기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사랑하는 어린 걸 위해서 희생하고 난 다음에 아이구 희생했다, 따지자. 계산 따지자. 계산 따집니까? 희생을 할수록이 못 한 것 같고 할수록이 또 뭐 미진한 게 없는가, 또 미진한가 자꾸 이렇게 되어지는 그것이 주님이 우리들과 동행하는 그 동행의 심정이라는 것입니다. 요거 아마 반사들은 많이 느꼈을 것이고, 그 주님이시요. 주님을 놓치 말고 동행해야 돼.

그거 주님이, 제가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자기 안에 계셔 가지고서 그 주님이 속에서 역사하고 계시는데 그러면 그것이 놓치지 안하고 계속될 때는 주님이 자기 안에 내치 내주하셔 가지고서 동행하고 있는 거라, 동행하는 것.

그것을 여게서 말씀하고 또 이제 성경을 여러분들이 기록해 찾을라면 사도행전 1장 8절에 보면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얻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을 하시고 그 자리에서 주님이 승천하셨어.

요 말씀이 사람으로 말하면 유언이오. 주님이 지상에 계실 때에 최종으로, 최종으로 제자들에게 부탁한 말씀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서 내 증인되어다고, 이 복음을 전해다고 하는 그것이 주님의 최종 유언의 소원의 말씀입니다.

또 마태복음 10장 42절에는 보면은 그런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제자 이름이 뭐입니까? 예수 믿는 사람,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라고, 전도하는 사람이라고, 제자 중 소자 하나, 전도한다 해도 그까짓 거 뭐 전도도 뭐 옳게 하지 안한 것 그거 가리켜서 소자라 말한 것이오. 좀 더 좀 뚜렷이 유력히 전도하면 하지마는서도 예수를 전한다 하지마는서도 예수 전하는 중에, 예수를 전하는 중에 제일 못 전하고 제일 둔하게 전하고 아무것도 아니게 전하고 해도 저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전한다 하는 그 뜻에서 그 사람 대접한 것은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단코 내가 상을 잃지 않겠다 말씀을 하신 것이오.

그러면 주님께서 복음 전하는 자를 얼마나 소원하시며 복음 전하는 자를 얼마나 당신이 기뻐하셔서 후대하는 것을 여게 볼 수 있습니다. 제자의 이름으로 했어.

제자의 이름이라, 제자의 이름이라 말은 아, 저거 예수 전하는 자다, 제자 이름이라 말은 예수 전하는 자, 예수 제자라 말이요, 예수 전도자라 말이요, 예수 전도자.

제자라 말은 여게 예수를 전하는 자라. 예수를 전하는 자 중에 소자지마는 예수를 전하기 때문에, 예수를 전하는 그것 때문에 자기가 대접한 것이라면 냉수 한 그릇 대접한 것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겠다. 그러면 전도하는 것을 당신이 얼마나 기뻐하시며 얼마나 후대하고 계십니까? 지금은 그런 맛이 없어요. 시골에서는 참 재미가 있어요. 시골에서 저는 혹 이래 있으면은 시골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지는 안하지마는서도, 와서 그 사람이 어데 가서 예수를 전하더라,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하더라 하는 그런 소리를 들었으면 나는 그 사람을 만나기까지는 찾고 돌아다닙니다. 아, 저 개바위에 와 가지고 어떤 사람이 예수 믿으라고 전하는 사람이 있더란다 하면 그 사람 찾아 가요. 찾아 가다 찾아 가다 못 찾으면 할 수 없지마는서도 어데든지 자꾸 묻고 ‘혹 그런 사람 여기 지나가지 안했느냐?’ `그 사람 여게서 가 가지고 동리 나갔는데,’ ‘여기 나간 사람 그 사람 어데 갔노?' `그 사람이 저 아래 개울물을 건너 가든데.’ 또 따라가요, 또. 찾으면 기어코 모셔다가, 우리 집에 모셔다가 재우고 그래 대접을 해야 만족이 되고 기뻤습니다. 여기 와서는 그만 썩어 버렸어. 여기 와서는 그만 그런 게 없어져 버려. 이 사람들이 너무 많아 놓으니까 귀한 줄도 모르고 그만 그래 버려.

문둥이도 그 사람들이 이래 다니면서 전도한다는, 예수 믿고 전도한다는 말 들으면은, 제가 그 문둥이로 유명하기 때문에. 문둥이를 찾아다녀요, 찾아다니면 그 골짝이 얼마 안 되니까 ‘문둥이 여기 여기 왔다 갔나?’ 이라면 ‘문둥이 오전에 보니 저 아무 면에 거 있든데.’ 또 물어보면 오후에는 ‘그 문둥이 아무데 오후에는 어데 있던데.' 문둥이를 만나기까지 찾아 가요, 찾아 가. 찾아 가 가지고서 기어코라도 그 문둥이를 모셔다가 우리 집에 갖다 놓고 대접을 하고 이래 놓으니까 내가 문둥이 집사가 돼 가지고서 문둥이로 참 유명했어요.

한국에 문둥이라고는 백 집사, 백영희 집사라 하는 걸 모르는 문둥이가 없었는데 지금은 그만 그 길이 막혀져서 이 여기 와 놓으니까 그 만나보지도 못하니까, 외나 재미 있는 거는 정말로 서부교회 와 가지고 재미 있는 거는 다 내버려 버렸어. 여기 ○○○ 저거 아버지도 나하고 둘이 저 어데 갔다 오다가 또 다리거리 가니까 ‘야야, 다리거리에 여기 우리 친구 있나 가 보자.’ 가 보니까 그 문둥이들이 다리 밑에 거게서 서인가 있어. 거게서 찬송하고 기도하고 이래 가지고 뭐 이래 말씀 가르치고 자꾸 이라니까 ○○○씨가 얼마나 그만 감동을 받았든지 ‘아이고, 집사님 나 문둥이 교회 세울랍니다.’ ‘문둥이 교회 세울라 하면 밥도 먹여 살려야 되는데 네까짓 게 재산도 없는데?’ ‘아, 내게 있는 재산 다 팔지요.' 논 다 팔아 가지고서 세운 것이 그 무슨 교회고 지금? ○○교회 원장으로 지내면서 그래, 평생 그 사람 한 거 그거 하나 귀한 것 했어.

그것도 내 마음이 아니고 주님이 내 안에 오셔 가지고서 그렇게 하셨는데 지금은 그 마음이 없어. 그 마음이 없고 뭐 이거 만날 뭐 교리니 신조니 이래 쌓아 봤자 소용도 없는 놈의 백지 신학이니 뭐이니 그런 것 때문에 지금 하다가 보니까 언제 그랄 여가 없어.

자, 한번 따라해요.

신학은! 시찰만 하는 정도로 족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배우고 복종해야 된다! 신학으로! 목회하는 것이 아니고!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으로 목회한다! 착각하고 있어.

신학으로 목회하는 줄 알고.

언제 누가 전화가 왔는데 그라더래요. ‘그러니까 뭐 양성원에 졸업해 봤자 그 학생들이 뭐 이 신학을 그래 모르고 이렇기 때문에 그 신학뭐 수준이 낮다든가모르기 때문에 목회 나가 봤자,’ 그러면 신학 박사는 목회 나가 얼마나 잘하노, 잘하기를? 가는 곳마다 교인 떨어뜨리기만 떨어뜨렸지 뭐 유익해? 이거 아무것도 모르는 조사들 이래도 그 목회하면 지금 없는 데서 유를 창조해 나가는데, 자꾸 해 나가는데.

여러분들이 신학이 목회하는 줄 알면 헛일이오. 신학은 목회 못 해. 신학은 시찰하는 정도로 족하다. 시찰이 무슨 말이요? 신학은 많은 사람이 신학을 말했으면 그거 한번 살펴 보고 ‘그거 틀렸다. 옳다.’ 그 시찰할라면 시찰하고 안 할라면 안 하고 시찰하는 정도로 족하지 이용 가치는 하나도 없어. 이용은 그 필요가 없어. 성경 말씀은 배우고 거게 복종해야 돼.

그 목회는 뭘로 하요? 목회는 신학으로 할라요? 신학으로 할라 하기 때문에 신학자 쳐 놓고 목회 잘하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신학교에 다닐 때도 본과 신학생들 목회 나가야 다 쫓겨 돌아다니지 하나도 목회하는 사람 없어요. 별과 학생들이 목회하지. 뭐 그 말이야 다 뭐 내가 ○○신학교에 있을 때에 뭐 여러 수천 번 외쳤기 때문에 다 알지, 뭐.

이 양성원 학생들이 신학이 그게 목회할 줄 알아, 신학은 목회하는데 여러분들에게 하나도 도움이 없습니다. 목회할 때 신학 가지고 날뛰면 교인들 다 달아나 버려, 다.

다 듣기 싫어해. 성경 가르쳐야 돼, 성경.

신학은 성경이 아니야. 성경 보고 그 사람들이 깨달은 그거는 저는 그리 깨달았으면, 그 깨달은 것 보고 또 깨달은 것 배우고 깨달은 것 보고 또 그 사람 깨달은 것 또 깨달은 것 공부하고 깨달은 것 공부하고 자꾸 그라면은 내가 저 먼저 말하기를 잣대를 끊는 데, 잣대를 딱 하나 내 주는데 잣대를 가지고서 끊은 거, 한번 끊은 거 그거 가지고 또 같이 끊고 또 그다음에 끊은 것 가지고 끊고 자꾸 백 번만 끊으면 그 길이가 같습니까 다릅니까? 아주 달라져 버려. 잣대 처음 잣대 그것 가지고서 백 번을 끊으면 그 길이가 같아요 달라요? 같아요.

성경만 깨달아 가지고 성경만 자꾸 이래 하면은 성경만 배우면 언제든지 여게서도 성경 배우고 그다음에도 성경 배우고 자꾸 성경만 배우면은 몇천 년 가도 관계 없는데 그러기 때문에 미국 나라에서 무디 선생이 성경 학교는 속화가 안 돼요.

성경 학교는 변질이 없어. 성경 학교는 오늘까지 그대로요 신학은 변질 안 된 신학교는 하나도 없습니다. 내가 할 게 아니라 자기네들이 다 알고 있지 안해? 다 미국 갔다 온 사람들, 다. 미국 갔다 온 사람 다 알고 있지 안해? 여게 미국 갔다 온 사람 그뭐 누가 있노? 누가 있나? ○○○ 어데 있어? 미국에 신학교 쳐 놓고 처음 세울 때와 꼭 같이 그와 같이 지금 이십 년 삼십 년 계속해 나가는 신학교가 있나 없나? 없어, 하나도 없어. 성경 가르치는 거는 장 성경 그것만 가르치기 때문에 성경 잘 못 가르쳐도 또 그 다음 사람이 또 성경 보고, 성경 보고 성경 가르치고 성경 배우고, 목회는 뭣 가지고 해요? 뭣 가지고 해요? 뭣 가지고 합니까? 진리는 성경 말씀이라.

주님의 대속의 공로하고 영감하고 진리하고 서이로 목회할라 하는 사람은 목회 부흥이라.

설교하는데 이 피와 성령과 진리가 같이 하지 안하면 안 된다. 이 사람이 목회를 하지. 어느 신학자가 뭐라 해? 그 신학자 뭐라 하니 설교 하는데 이 신학자가 뭐라 하니까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따위 소리는 아무도 듣기 싫어해. 성경 말씀에 있다 하는 그거는 듣지, 성경 말씀에 이렇게 했다 이렇게 하는 거는 들어도 어느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말했다 그 소리는 듣기 싫어해요. 여러분들 듣기 좋아요? 성경 말씀을 듣기 좋아해요 신학자 말 듣기 좋아해요? 알지도 못하고. 이제 밑천을 자꾸 내가 가만히 있었지만 인제 뭐 뒤비기를 나 혼자 그 ○○신학교 있을 때도 막 뒤볐는데 내 입이 벌어지면 그거 뭐 바싹 깨져버려. 왜? 다 알고 환하게 다 알고 있는데 뭐 요동할 건가?

이래서, 마태복음 10장 42절에는 ‘내 제자의 이름으로’ 그걸 똑똑히 말했어. `내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찬물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것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내 제자의 이름으로’ 무슨 소리라? 예수님의 제자라고,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제자는 전도자지 뭐입니까? 그 사람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복음을, 제자라 말은 복음 전한다 말이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대접한 것은 냉수 한 그릇 대접이라도 결단코 하늘나라에서 상을 잃지 않는다. 이만치 당신이 복음 전하는 것을 후대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 장로님들 있지마는서도 예수 믿으라고 전하지를 못해. 입이 안 벌어져. 주일학교 반사 하라 하면 안 하는 분, 주일학교 반사 안 하는 장로님들 회개하십시오. 입에 예수 믿으시오 하는 소리 입에 안 나오면 그게 뭐이냐? 그게 무슨 증거야? 아이, 예수 믿어야 됩니다. 예수를 안 믿는데 예수를 믿어야 되겠고 예수 믿구로 해야 되겠다는 안타까움이 없으면 그 속에 뭐 없는 증거요? 뭐 없는 증거라? 대답을 크게 해. 주님이 없는 증거라.

또 한 사람 예수 믿구로 하는데 예수 믿게 되니까 거게 대해서 자기의 모든 자본을 투자하는데 아깝지 아니하는 그런 투자하는 그런 마음이 없고 사람 전도하는데 인색한 마음이 들고 자기 위신 떨어질까, 조그매라도 명예 떨어질까, ‘내가 뭐 전도하려고 수치스럽게 그래’ 그리 되면은 그 속에 주님 계셔요 안 계셔요? 안 계셔.

자, 사람 하나가 예수님을 믿는, 그 하나가 예수 믿기로 인해서, 예수 믿는 그 일로 인해서 기쁘고 즐거운 그 마음이 속에 없으면 예수님이 속에 계셔요 안 계셔요? 안 계셔.

따라합시다.

깡통! 빈깡통! 빈깡통!주님 없는 빈깡통! 이거 알아야 돼요, 알아야.

그런 마음이 있는 그게 자기가 아니오. 주님이 내주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아무리 그 사람이 목사가 돼도 개인에게 전도는 못 하고 설교는 잘하고 하는 그것은 속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증거요, 계시지 않는 증거. 장로도 그러하고, 이러니까 우리 교회는 정치적으로는 장로가 크지마는 장로가 위에냐 주일학교 반사가 위에냐? 주일학교 반사가 위에라. 이러니까 장로가 이제 성장되면은 반사 되면 이제 클 대로 큰다 이러니까 이 세상에 장로 위신을 그렇츰 깨어 놨으니 이제, 그렇게 하는 것이 장로 위신이 깨진다고 하는 것은 그거는 마귀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각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멸망 가운데 있는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간절한 뜨거운 마음이 없는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이야? 한 사람을 예수 믿게 하는 데 대해서는 아낌없이 투자가 되는 그 마음이 없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야? 한 사람 예수 믿게 해 놓으면 기쁘고 즐거워 못 견디는 그 기쁨이 속에 없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야? 예수 믿는 사람 아니야. 우리 교회서는 그런 말 하면은 이상 안 할 것입니다. 거의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교회와 서부교회와 한테 합해 놓으면 참 이거는 뭐 말로 다 할 수 없이 어마어마 거리 멉니다.

그래, 제자의 이름으로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한 것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는 주님의 그 심정을, 주님이 지금 이런 심정인데 이다음에 우리가 하늘나라 가면은 뭐 별나라요? 내나 그분이 왕이시고 그분이 정치할 것이고 그분이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선포한 그 심정 가지고서 그 나라에서 통치합니다.

그럴 터이니까 그때 갈 때에 좋은 꼴이 있을란가 부끄러운 꼴이 있을란가 미안한 꼴이 있을란가 뭐 평안한 꼴이 있을란가 불안할 건가? 천국의 구원도 구원 얻되 불 가운데 구원 얻은 것 같애. 불에서 나와 구원 얻은 게 아니야. 원어 그거 아는 사람 틀렸어. 불에서 나와 구원 얻은 게 아니라 불 가운데서 구원 얻었어. 여게 원어 안다는 학자들 해도 원어 학자 해도 원어 학자 그 사람들이 이 성경을 한국말로 번역한 그 사람들의 원어만 못합니다. 어림도 없어. 근방에 가지도 못했어. 어데 여기 그렇게 그만 능한 원어 학자가 있어, 있기를? 없어. 신 벗어놓은 데도 못 가.

그 사람들이 다 번역할 때에 ‘불 가운데서’ 그말이 맞지. 나는 원어 몰라도 그 맞아. `불 가운데서' 불 가운데서 구원 얻었으니까 뭐 어째요? 불 가운데 구원 얻었으면 뭣만 있어요? 돈이 있어요 옷 있어요 도복이 있어요 오바가 있어요 뭐 있어요? 뭐 있어요? 뭣만 있어? ○○○집사님 말해 봐요. 불 가운데서 지금, 불 가운데서 구원 얻었으니까 그 사람 뭣만 있어요? 저거 봐. 현실, 자꾸 뭐 생각할 건데. ○○○. 뭐라 하노? 알몸? 생명이 있어. 목숨만 건져, 목숨만.

그 구원은 뭐이냐? 목숨이 죽을 터인데 목숨만 살아났어, 목숨만. 목숨만 남아 있어.

그러니까 구원이 있지. 생명은 끊어지지 안했어. 기본구원은 있지마는서도 소유는 하나도 없어. 불 가운데에서 구원 얻었어. 그러니까 생명 그것만 남아 있어. 불에서 나와서 구원 얻은 게 아니라. 불 가운데서 구원 얻어 가지고서 나왔지. 불 가운데서 구원 얻어 가지고서 나왔어. 그말이 맞아요 불에서 나와 가지고 구원 얻었다는 말이 맞아요? 자, 양성원 학생들 한번 대답해 봐. 저 ○○교회 저 학생 대답해 봐. 불에서 나와 가지고 구원 얻었다 말이야 불 가운데서 구원 얻었다 말이 맞아? 맞아. 원어에 조그만한 물만 먹고 원어 근방, 원어 학자의 근방에 가지도 안한 그 사람들이 이 유력한 원어 학자들이 해 놓은 것, 이제 우리가 말하니까 우리 원어 무식이라고, 원어에는 이런데 무식이 했다고서.이래 가지고서, 아, 또 황충이를 말했더니마는 황충이는 메뚜기인데 원어에는 메뚜기인데 그거 저 황충이라고 그란다고. 메뚜기 같으면 메뚜기라 하지 뭣 때문에 황충이라 했을 거고? 이래 가지고 또 한참 메뚜기를 원어를 모르니까 원어에는 메뚜기인데, 원어만 말하면 그만 꼼짝을 못 해.

이랬는데 그러니까 그때 ○○○목사님이 있다가서 ‘여게는’ 그 몇절이더라, 뭐.

`여게는 황충이 메뚜기 둘 다 말했습니다’ 그래 메뚜기 있고 황충이 둘이 따로 있기 때문에 메뚜기도 말하고 황충이도 말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그러니까 여기 성경에도 그래 돼 가지고 있습니다. 메뚜기도 말하고 황충이도 말하고, 그러면 메뚜기가 황충이고 황충이가 메뚜기 아니라 그말이오. 그 번역한 사람들이 바로 해 놨어. 그랬는데 이게 그만 이래 가지고서 위협하고 협박하는 바람에 잘못하면 뻘뻘 떨어요.

이래서, 오늘에는 어떤 원어 학자가 필요하냐? 원어는 고전어기 때문에 원어가 그게 다가 아니고 원어보다 요새 말이 더 많이 발달돼 가지고서 세밀하게 정확하게 돼 가지고 있다. 이러니까 자꾸 원어를 우상시 해 가지고 원어라 하면 그만 사람들이 꼼짝 못 하니까 ‘원어에 이렇다. 원어에 이렇다.’ 아, 내가 ○○신학교에 가 가지고 혼이 났다 하니까. 내가 해석해 놓은 거는 전부 그거 저 뭐 싹스를 몸이라고 해석해 놨는데 그만 싹스는 부패성이고 쏘마는 몸이라 이래 놓으니까 ○○신학교에 싹스 쏘마는 모르는 사람이 없어, 어떻게 퍼져 놨는지. 그게 내게 전부 공격이라.

이라니까 내가 꼼짝을 못 하고 ‘원어에는 이게 부패성인데 이거 몸이라고 이래 해석했으니까 다 틀리지 안했느냐?’ 이 뭐 손 골에 돼지 몰리듯이 몰려 가지고 꼼짝을 못 했어.

그래 내가 뭐 이런 성구도 말하니까 그것도 또 뭐 그거는 싹스 내나 부패성이라 하지 이랬는데 내가 한참 몰려 가지고 지금 오랫 동안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내가 기도하니까 요한복음 1장 14절을 봐라 이래.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해 놨거든. 그래 육신 이게 뭐인가 물어 보자. 그래 육신이 뭐인가 그때 그래 ○○○목사가 그 ○○신학교에 내 후배로 본과생이오. 이래서, ‘야,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한 육신이 그게 뭐꼬? 그게 싹스가 쏘마가?’ ‘싹스입니다’ ‘됐어' 그래 그만 나갔지. 나가서 `자, 그러면 여게서는 이 신학교에서는 싹스는 부패성이고 쏘마는 몸이라 하는데 싹스는 부패성이라 해 가지고서 내가 해석한 것 다 틀렸다고 이렇게 말했는데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님이 그러면 부패성이 되어, 부패성 돼 가지고 우리 구원했나? 대답해라.

하나님이 그 지혜를 딱 주셔서 딱 그래 놓으니까 꼼짝 못 하고 몰렸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꾸 돌아다닙니다.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밉상스럽게 자꾸 한다 말이오. 그래 놓으니까 다른 사람은 뒤에 욕을 해. ‘저놈의 새끼’ 이래 쌓아도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예수님이, 말씀이 부패성이 되어.’ 몇 번 하고 났더니마는 다시는 그 신학에 내가 있는 동안에는 아마, 그 뒤도 그 말은 없었을 거라. ○○○전도사님 가서 좀 이야기 해 보라고, 그거 안 그런가.

눌리면 안 돼요. 이 대학 안 간 사람들은, 대학을 안 가본 사람은, ‘대학도 못 간 게’ 대학에 가 봤자 별 배울 게 없어, 모두 다. 대학에 갔다 온 사람 봐. 뭣 또 있는고? 공연히 대학, 대학에 갔다 오면 뭐 큰 줄 알아도, 이 모르는 사람들은 아, 나를 대학만 시켜 주이소. 대학만 하면 내가 나와 가지고 가정을 막 이래 하고 천하를 휘두를 것 같지마는 나와 봐야 나와 본 사람 경험해 보면은 나와 봐야 별게 없어. 저 고등학교 선생 대학 나왔지? 안 나왔어? 나왔어? 안 나왔어? 안 나오고 고등학교 선생 해?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예수님이 재림해서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그의 나라를 두고, 그러면 그의 나라와 우리 전도가 다 관련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우리 전도와 관련이 있고 그의 심판과 우리의 전도와 관련이 있고 또 그분이 나타나셔서 영원히 같이 사는 거기에 우 든지 못 얻든지 쉬지 말고 전파하라.’ 말했어.

‘살아계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심판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날 것을 인해서 증거하노니’ 그러니까 우리 전도가 거게 다 관련된다 그말이오. 우리 전도가 거게 다 관련 돼.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예수님이 재림해서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그의 나라를 두고, 그러면 그의 나라와 우리 전도가 다 관련 있습니다. 그의 나라와 우리 전도와 관련이 있고 그의 심판과 우리의 전도와 관련이 있고 또 그분이 나타나셔서 영원히 같이 사는 거기에 우리 전도가 관련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는 말하기를 18절로 20절에는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다 내게 주셨으니 너희들은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들이게 분부한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해라.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와 함께 있으리라.’ 이 러니까 이 복음 전도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동행하십니다. 복음, 내나 오늘 저녁에 양 잃은 비유에 하나님이 세 가지 역사로서 우리 안에서 내주해 계시는 것, 그게 없는 사람은 주님이 그 안에 계시지 안해. 내주해 계시는 것.

여게는 마태복음 28장에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고,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가지고 복음 전하는 자에게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겠다 했어.

모든 계명은 주님이 우리를 사랑함같이 이웃 사랑하라. 주님이 우리 구원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전부를 아낌없이 투자한 그와같이 우리들이 형제 구원을 위해서 전부 투자하는 요것이 전 신구약 성경이요 계명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들이 내 계명을 지켜 내 사랑 안에 거하라.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어떻게 한 것같이 너희들이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는 이것이니라 말씀했어.

구원을, 다른 사람의 구원을 손해 보이는 자는 그런 자는 저주를 받아야 됩니다.

다른 사람의 구원에 손해를 보여서 거게서 이렇게 저렇게 이간이나 붙이고 한 그런 거는 나중에 가서 하나님의 심판이 자는 줄 알아요? 비참해져요. 나중에 비참해지고 난 다음에, 그거 그러니까 그런 징계가 오기 전에 어서 우리가 회개를 해야 돼.

그래서, 우리도 이제는 얼마 요새까지 얼마 동안에는 자체 성화에 대해서 우리가 좀 힘을 썼습니다. 이래서 뭐 기도하는 사람이 양산동 산에도 끊쳐지지 안해요. 안 하고 또 꽃마을에도 끊치지 안하고 여기 보니까 지난 주간에도 매일 여게 기도하러 온 사람이 사백구십 명이라. 매일 여게 예배당에 와 가지고 기도하러 온 사람이 눈에 뜨인 대로 사백구십 명이라. 기도록에 기록한 사람만 해도 사백구십 명이라.

이러니까 좀 기도도 많이 하고 회개도 많이 하고 뭐 열심히 지금 그라고 있는데 이제 우리 자체의 정화 운동이 중요합니다. 중요하지마는 또 이 하나만 자꾸 하면, 밥만 먹으면 안 되고 장도 떠 먹어야 밥맛이 있지. 이러니까 이거 모양으로 이제 전도도 해야 우리 이 정화가 바로 돼지지 전도 안 하고 자꾸 회개만 하고 이랄라 해 가지고는 안 돼요.

이러니까 이제 또 우리가 착수해 가지고서 자, 과거에 자기가 몇 집씩을 두고서 계속 기도하자 이렇게 했지요? 그 기도에 대해서 오늘까지 계속하고 있는 사람, 그저 혹 빠져도 계속하고 있는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빠져도 계속하고 있는 사람. 빠질 때도 있고 계속할 때도 있고, 손 들어 봐요. 몇 없네. 그라면 안 돼. 계속 해야지요.

저는 여러 집 안 해요. 저는 넷 집 하고 있어요. 넷 집. 요 솜공장하고 저 마도로스집하고 또 저 바느질집하고 저 중앙병원하고 요 가까운 데만 도리도리 넷 집만 늘 기도하고 있어요. 있는데 하나님이 언제 들어 주실란지, 어짜든지 우리가 기도하고 그래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할까요 두 사람씩 인도할까요? 어째, 우리 여기 결의를 합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하기로 작정을 할까요 두 사람씩 인도하기로 작정을 할까요? 자,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전도해서 세례 교인되도록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하기로 작정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분은, 또 한 사람이 두 사람씩 작정해 놓고서 그래 한번 인도해 보자 하는 사람 또 그게 좋은 사람.

그라면 자, 두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손 들어 봅시다. ‘두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 막 이란다. 저거는 두 사람 될 거라 아마, 그뭐. 원하면 돼요. 자, 한 사람씩 그래 전도해 가지고서 인도하기로 이걸 작정하기로 원하는 사람 손 들어 봐요. 안 원하는 자도 있어? 안 원하는 자도,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인도하는 것도 안 원하는 자도 있어? 안 원하는 자가 있어? 저 뒤에 안 원하는 사람도 있네. 손 안 들은 사람 있네.

들어 들어. 몽둥이 맞지 말고. 좋게 말할 때 들어요. 하나님 앞에 몽둥이 막, 그때 죽을 지경 되고 난 다음에 뭐 개갈거리면서 자꾸 하지 말고.

그말 있어. 네가 남의 것에 충성치 않으면 누가 너의 것을 너에게 주겠느냐 그말 했어. 남의 자식 아끼지 안하면 누가 제 자식을 아껴 줄 사람이 누가 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식을 아끼지 안하면은 하나님이 우리 자식을 아끼지 안해요. 암만 공부 시키고 뭐 일류대학 해 봤자 노랗소, 뭐. 끝이 노래. 싹이 노래. 희망 없어. 공부 많이 해서 돈 벌면 되는가? 돈벌어도 그 사람 돈벌이 때문에 예수 못 믿고 구원 절단나 버리고 벌거벗은 구원 얻으면 비참하지 그거 무슨 성공이야? 자, 그러면 한 사람이 한 사람씩 전도해서 인도하기로 그렇게 이제 하나님 앞에서 작정하고 기도하고 지금 노력할 사람, 그러면 한 사람 할라 하면 두 사람 세 사람도 자꾸 이렇게 해 가지고서, 뭐 한 사람 하는 것보다 두 사람 하는 게 더 좋지요. 세 사람하면 더 좋고.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자, 아무리 못 해도 한 사람 이상은 인도해야 된다 하는 그걸 작정하고서 그래 지금부터 출발하기로 작정하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봅시다. 아따 이제 힘 있게 든다. 힘있게 들어. 이 이래 들면 밉상일 건데 막 이래 들어요. 나도 이래 들었어. 자, 그러면 이제 이걸 작정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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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3456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1980년 29공과 선지자 2015.12.11
3455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1984년 10공과 선지자 2015.12.11
3454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840513주후 선지자 2015.12.11
3453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840513주전 선지자 2015.12.11
3452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1984. 5. 13.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11
3451 예수님의 제자/ 누가복음 14장 25절-35절/ 840516수야 선지자 2015.12.11
3450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하라/ 베드로후서 3장 3절-14절/ 870811화새 선지자 2015.12.11
3449 예수님의 재림/ 베드로후서 3장 8절-13절/ 1977년 36공과 선지자 2015.12.11
3448 예수님의 재림/ 베드로후서 3장 1절-13절/ 820418주후 선지자 2015.12.11
3447 예수님의 유언/ 사도행전 1장 8절-9절/ 800111 지권찰회 선지자 2015.12.11
» 예수님의 심정/ 누가복음 15장 1절-7절/ 881019수야 선지자 2015.12.11
3445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에베소서 1장 15절-23절/ 1982년 16공과 선지자 2015.12.11
3444 예수님의 사활/ 요한복음 13장 1절/ 1976년 16공과 선지자 2015.12.11
3443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절-11절/ 1984년 9공과 선지자 2015.12.11
3442 예수님의 사활/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890808화전집회 선지자 2015.12.11
3441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절/ 840428토새 선지자 2015.12.11
3440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 절∼11절/ 1984. 4. 22.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11
3439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절-7절/ 840426목새 선지자 2015.12.11
3438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절-11절/ 840425수야 선지자 2015.12.11
3437 예수님의 사활/ 로마서 6장 5절-11절/ 840422주전 선지자 2015.1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