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활


선지자선교회 1989년 8월 8일 화전집회 

 

본문 : 계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

 

 여러분들이 이번에 들은 말씀을 가서 처음에 테이프를 몇 번 들어 가지고  확고히 잡고, 그 다음에는 기록된 설교록을 읽어서 자기 것을 삼아야 할 것입니다.

 자기가 설교 테이프를 듣는, 열 번 듣는 것보다 설교록 한 번 읽는 것이 효력이  낫습니다. 또 열 번 읽는 것보다 자기가 설교록을 읽으면서 재필기하는 것이  자기에게 더 유익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들을 때에 이 도리가 깨달아질지라도 이 자리를 떠나면, 좀 시일이  지나가면 믿어지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자리에서 들어도 이 말씀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 있고 통달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이것이 옳습니다.' 그렇게  말한 거와 같이 자기에게 뱀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에 반대되는 뱀의 지식이 그  속에서 버퉈 가지고 있고 자기는 뱀의 지식과 자기와 하나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식이 자기에게 잘 들어오지를 못하고 영접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길바닥에 뿌리운 씨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지혜 있고 통달한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합니다.' 하는 이 말씀을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지 안했으면 다 그것은  반지식론자의 그것은 다 비유로 한 그런 말이지 그거는 정상의 인격의 말이  아니라 그렇게 정죄를 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정죄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어디 있느냐 하면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특별 계시를  주지 안했습니다. 자연 계시인 하나님의 창조와 모든 만물과 하나님의 섭리와 또  인간들의 변동되는 모든 심리 구조들이 이것이 다 자연 계시입니다. 그것을 보면  하나님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뜻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도  깨달을 수 있고, 모든 인과 보응도 깨달을 수 있고, 영원 자존자와 단일 교회도 잘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그때부터는 이 자연 계시 가지고는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특별 계시를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악령의 유혹을 받아서  원죄라는, 원죄라고 하는 자기 중심 그것이 사람의 전체를 주권하고 있기 때문에  이놈은 하나님과 일대 적입니다. 하나님과 언제든지 정반대의 자입니다. 이것이  자기 속에 자기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를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들도 다 이 지식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지식은 업신여겨서 등한히 여겨 버렸고 인간들의 지식으로 가지고 만반의 준비를  해 놨지만 그것이 다 헛되고 말았습니다.

 새벽에 말씀하신 것 중에 우리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나 멸망받는 것이나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 것이다. 구원도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 것이요  멸망도 하나님의 주권대로 됐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셨고 예정하신 그것을  하나님이 주권의 능력을 가지고 그것을 하나씩 둘씩 성취해 나간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지옥 가기로 예정되고 그렇게 또 섭리해서 조성을 하는데  사람이 지옥 가지 안할 수가 있겠느냐? 또 하늘나라 가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데 의인이 되지 안할 자가 어디 있겠느냐? 그렇습니다.

 이래서 '멸망과 죄인도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 것이요 구원과 생명의 영광도  하나님의 주권대로 된 것이다' 하는 것을 약간 아침에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심판은 모순되지 않느냐?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그렇게 예정한  것을 누가 거역하며 또 하나님의 능력이 성취하는 것을 누가 대항할 자가  있겠느냐? 그러니까 하나님의 예정대로 하나님의 주권의 역사대로 모든 것이  달성되는데 사람에게 심판은 뭣 때문에 하느냐? 그 심판에 대해서 모순성을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독단으로 그렇게 해 놓으시고  사람들에게 '네가 잘못했다, 잘했다.' 이렇게 논평을 해 가지고 정죄를 해서  지옥의 형벌을 받고 또 영광의 구원을 얻게 되니 이러니 이것은 모순되지  안하느냐? 왜 범죄와 멸망의 원인은 하나님께 있는데 하나님이 그 책임을 지지  안하고 아무 권리 없는 피조물에게 책임지워 가지고 '네가 왜 이렇게 범죄했느냐?  너는 이런 범죄를 했기 때문에 이런 멸망을 받아야 된다' 이렇게 하니, 원인은  하나님께 있고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데 그 책임을 사람에게다가 전가시키니까  이것이 모순되지 않느냐 하는 것이 기독교의 어린 신앙들에게 의문되는  의문점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예정을 믿어야 합니다. 지극히 크고 작은 것  하나도 예정에 들지 안한 그것은 나타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여게 대해서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이 멸망을 만들어 놓고 멸망 만든 책임은  하나님께 있으니까 하나님이 그 벌을 받아야 될 터인데 또 하나님은 죄가 없다  하나님은 의롭다 그렇게 말하니 모순되지 않느냐 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이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절대 예정은 믿어야 됩니다. 또 예정된  그것을 하나님이 절대 주권의 능력으로 하나 하나 다 성취시키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 행함에 선악을 구별하는 심판이 있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심판대로 하나님이 영원 보응을 일으키시는 것도 믿어야 합니다.

 이러면 이 모순 저 모순 모든 모순이 가득 찬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이  모순이라는 그 과정을 통과해서, 통과해서 모든 것을 바로 아는 완전히 지식하는  그 종착에 도달하면 모순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절대적인 진리요 합리적인  일들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러기 때문에 이 모순 속에 들어가지 안할라고 합니다. 이 모순 속에  들어간다는 것이 힘이 들기 때문에 그런 성구는 이거는 난해절이라,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절이라 하고 보류해 둡니다. 또 자기가 보류해 두면 그대로 또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느냐 하면 자기의 모든 깨달음과 자기가 믿는 믿음, 신앙과  교리 신조 이 모든 것이 모순된 이 점을 그저 '이거는 그만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절이니까 이런 거는 다 제쳐두고 믿자' 하고 그래 믿어 나갑니다. 믿어  나가나 믿어 나가는 믿음이 조금 나가면 이 모순에 봉착합니다. 이 믿는 믿음이  모순을 찾아가게 됩니다.

 모순을 찾아가게 되면 모순되는 이 문제가 있으니까 거기서는 그 사람이  방황하면서 아무래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도 알고 그분이 참되다는 것도 알고  이런데 그분의 주장이 모순되고 이리 되니까 나중에 그 사람이 '모른다' 하는  번민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라다가 오랫 동안 못 견디니까 나중에는 그저 '믿어  두자, 믿어 두자.' 하는 맹종적인 또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 기독자들의 신앙이, 하나님의 절대 예정 주권, 또 하나님의 독존성  유일성, 하나님의 심판성 이런 것을 우리는 다 믿는데 그렇게 믿어 나가면 인간의  머리로 해석할 수 없는 그런 종착을 만나게 될 때에 사람들은 그만 거기서  번민하고 고통하다가 다 되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거기서 되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말씀대로 실행을 해 나가면 논리적으로는 도무지 모르는 그  길을 실행을 하면 거기서 환하게 통과돼 나갈 수 있는 옳은 정로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간단하게 말해서 혹 의문되는 것을 그것을 조금 해결되도록  하기 위해서 간단한 증거를 하나 여러분들에게 하겠습니다.

 사람이 자기 가정에 있는 자기의 소유라고 하면 다 사랑합니다. 다 사랑하는데  사랑하면 주인이 꼭 같이 사랑하고 또 그 사랑하는 사랑을 베푸는 것은 그것은  뭐이냐? 주인이 필요 있게 이용하는 것들입니다. 필요 있게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용하는 것을 주인의 주권과 주인 중심이라는 것을 떠나면 거게는  수많은 오해와 불만과 불평들이 많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그 집에는 보니까 불집게라고 이거 쇠로 만들은 불집게가 있는데 이  불집게를 주인은 사랑합니다. 아주 보배로운 보물로 그렇게 강직하고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그 이유가 뭐이냐? 그것은 아무리 뜨거운 연탄 부엌에 집어 넣어도  거역하지 안하고 잘 순종하기 때문에 그렇게 귀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주인에게  많이 쓰여지고 나면 불에 타고 타서 나중에는 아주 가느다란하게 이렇게  되어집니다. 그럴수록 주인은 사랑합니다. 마지막에는 그것을 연탄을 집으니까  너무 타서 약해서 집으니까 연탄이 툭 떨어질 만치 뿔라져 버립니다. 그러면  주인은 이제는 그것을 버립니다. 버리면서 '이 연탄집게 이거는 참 아주 보배롭게  잘 썼다. 이거는 아주 좋은 기계다.' 이렇게 하면서 버립니다.

 그러면 그 모든 존재의 동등권을 가졌다고 생각하면 연탄집게는 불평을 할  것입니다. '왜 다른 것은 한번도 이런 뜨겁게 굽히고 뜨겁고 하는 이런  고통스러운 일은 한번도 안 한 그것은 반지를 만들어 가지고 주인의 손에 항상  끼고 다니고 이렇게 또 목거리를 만들어 가지고 목에 걸고 이래 다니는데, 그거는  아무것도 안 하고 놀고 먹고 놀고 있는 것도 그렇게 하면서 나는 왜 불에다 평생  구워 가지고 이제 다 타서 없어지도록 이렇게 하느냐?' 하는 불평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존하면 불평 품을 수 있습니다. 자존하다면 '나도 스스로  있는데 내가 너 때문에 있지를 안했는데 왜 나를 연탄에 불에 태우느냐?' 하면  당당히 송사할 수가 있고 또 그 송사는 당당히 승소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연탄집게 그것은 주인이 연탄을 넣기 위해서 불에 타서 다 나중에 없어지기까지  불에 굽혀서 타지는 거기에 쓰기 위해서 당신이 그것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연탄집게가 존재하는 것이 그 일 하기 위해서 존재했고 그 일 하기 위해서  그분이 필요한 대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주인의 소유입니다.

 그러면 저는 주인이 나는 연탄집게로 만들었으니까 내가 있는 동안 그 주인이  연탄집게로 아주 요긴하게 사용을 하고 한번도 집을라 해도 안 되도록 거역함이  없이 잘 이렇게 이용을 당하고 주인이 만족하게 이용을 당하면 나 할 직분을 다  했고 그거 하다가 불에 타서 없어졌으면 이것으로써 만족한 직분을 했다고 그  연탄집게는 그 주인에게 대해서 감사하고 만족해야 되지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한다면 자기 자체의 존재에 대한 모순한 그런 생각과 행동이 되겠습니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옳지 안한 것들에게 만물을 복종케 해서 만물이 옳지 안한 것들에게  복종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옳지 안한 것들이라 말은 죄인들이, 옳지 안한  것들은 죄인을 말합니다. 옳지 안한 것들 죄인들이 불에 때면 타지고, 또 쌀을  꾹꾹 씹어 먹으면 씹어 먹어지고 뭐 이렇게 전부 인간들에게 복종하고  이용당하는 것은 성경에 말하기를, 만물들의 말을 들어 보니 만물들이 말하기를  옳지 아니한 것들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은 조물주 그분의 명령을 인해서  그분에게 명령 순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라면서 그들은 또 말하기를 탄식하면서 소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뭇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는 네 가지로 중생했기 때문에 네 가지가 생명이요 네 가지가 지능인데 이  네 가지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기 소원대로의 자유하는 생활이요 이  네 가지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강제를 당하는 것들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의 뭇아들의 자유함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말씀은 중생된 사람들이  무죄로 살고, 의롭게 살고, 또 하나님과 화친으로 살고,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에게  받다 가지고 충만해지고 모든 만물에게 충만하게 시은해 주는 이것이 자기의  위치요 자기의 본분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만물들이 원한다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 합니다.

 이러니까, 사람은 두 종류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목적인,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자를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소원을 영원히 이루는 하나님의 교회를  목적했습니다. 교회를 목적한 것이 곧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자들이요 곧  그리스도의 구속을 받고 중생 과정으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런데 모든 존재 가운데에 모든 존재가 다 하나님의 목적인 이 구원, 교회를  성취하는 이 일을 위해서 전부는 다 만들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안 믿을  때에 고기도 잡아먹고 또 모든 온갖 식물들을 먹고 이렇게 배를 채워서 잘  자랍니다. 그것은 그들이 권리가 없어 그런 것이 아니고 앞으로는 그런 거를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그것을 구속 목적으로 세움을 받은 이 사람들의 하나님처럼  온전한 자가 되어지는 데까지의 이르는 데에 그 과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로  쓰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불택자들은 하나님의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입니다. 이래서 애굽을 이스라엘의  구속물로 사용하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 믿을 때의 사람은 어찌 되느냐? 사람은 모든 하나님의 지으신  창조물들은 그들에게 이용을 당하고 있습니다. 해도 이용당하고 물도 이용당하고,  공기도 이용당하고, 쌀도 이용당하고, 고기도 다 이용당하고, 이 채소도  이용당하고 전부 이용을 당합니다.

 '왜 너는 밥을 꺽꺽 씹어 먹으면서 그거는 네가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목적인  택자들을 위해서 이용하고 있을 때에 이용당하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고 하면  네가 밥 먹는 것도 공평이 아니지 않느냐? 네가 물 한 방울 마시는 것도, 네가 왜  물을 꿀떡꿀떡 마셔서 물을 희생을 시키느냐? 그것도 공평이 아니지 않느냐?'  그것이 조물주 한 분으로 말미암아 그 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하나님이 목적 달성의 그 과정을 거치기 위해서 거게 필수한 모든 것들을  구비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 것이요. 그러기 때문에 불택자는 택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거게 쓰실라고 지었습니다. 요것도 믿으십시오. 또 믿는 자  가운데도 층어리가 많습니다. 이래 층어리가 많은데, 이 층어리가 많은데 이  층어리 있는 것이 이것은 이것을 위하고 이것은 이것을 위하고 이것은 이것을  위해서 있도록 영원히 그래 있도록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이것을 위해서 있고 밑에서부터 위엣 것을 위해서 있으면 그거는  밑에 것이 희생이 되지 않느냐 하겠습니다. 이것이 위엣 것을 위해서 이용을  당하는 그 일을 하게 되면 이 전체의 달성된 혜택이 다 저의 것이 됩니다. 저의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칙에서 자기 한 사람이 자기 의무와 책임과 본분을  한다는 것은 전부 그것이 타를 위해서 즌재하는 것이요 역사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하나가 타를 위해서 존재하고 또 역사합니다. 타를 위해서 녹아집니다.

 녹아졌으면 녹아진 저는 어찌 됩니까? 녹아진 저는 타의 모든 것은, 타의 모든  것은 그것은 제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밖에는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사람이 자기는 일생  동안 모든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위해서 일생을 바쳤습니다.

 일생을 바쳐서 그를 위해서 완전히 쓰여졌습니다. 완전히 쓰여졌으면 그는  없어졌느냐? 완전히 쓰여졌으면 그는 모든 존재를 완전히 제것을 만든 것입니다.

 모든 존재는 저를 위해서 영원히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법도에는 점령법이 사망의 점령법과 다르고 이 세상에서 점식법이라든지  이용법이라든지 정복하는 그 법이 이것은 사망법이기 때문에 되는 것 같으나 안  되는 것입니다. 정복한 것 같으나 정복을 못 했습니다. 성공한 것 같으나  실패했습니다. 산 것 같으나 죽었습니다.

 이와 정반대인 하나님의 생명의 도는 죽는 것 같으나 삽니다. 다 준 것 같으나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체가 모든 존재를 전부 자기만을 위해서 있도록, 모든  존재가 자기만을 위해서 있도록 하는 일에 성공을 하는 비결은 자기가 모든 것을  위한 것뿐이고 모든 것을 위한 것으로서 다 쓰여지고 다 끝마쳤으면 모든 존재는  저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거 조금 아마 무슨 말인지 이러나 자꾸 듣고  여러분들이 생각하면 차차 깨달아질 수 있고 생각하는 것보다도 이 말씀대로  지켜 행하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행하면 즉시 깨닫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지켜 행하면 빨리 깨달아지고 지켜 행하지 안하고 자꾸 앉아서 책상  위에서 연구만 하면 잘 깨달아지지 안하고 지켜 행하면 빨리 깨달아지는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그거 한번 대답 한번 해 보십시오. 이거 말해야 잘 못  알아듣고 이라니까 재미가 없는 것 같은데 재미가 입어도 하나님의 도에  자기에게 이미 있는 도는 말씀하면 인정이 되고 자기에게 확실히 깨달음이  생겨집니다. 깨달음이 생겨지는 거는 벌써 그 속에 이 하나님의 도가 빈약하나마  내재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와 도가 합해 가지고 자기에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어린 신앙은 뭐이냐? 깨달아지지 안하고 뭐인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보다 더 어린 신앙은 반대고 대적이 됩니다. 대적이나 이  복음을 전할 때에 대적이 나중에는 '나는 모른다. 잠오고 듣기 싫은 소리뿐이다.'  그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마지막에는 제가 깨닫고 이 도에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살 수 있는 그런 사람도 마지막에는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이해가 안 돼도 들어서 두십시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해가 되는 그것으로써 다가 안 되는데 하나님의 도리를 듣고 자기가  깨달아 이해가 될라고 하면 이해되는, 이해되게 하는 그 방편은 무슨 방승입니까?  이해가 되게 하는 방편이 무슨 방편이요? 네, 실행입니다. 실행이 이해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왜, 실행하면 왜 이해가 됩니까? 실행하면 왜 이해가 됩니까?  실행하면 이해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기 때문에 산  믿음이라 그래 된다? 믿음에 능력이 나오기 때문에? 어? 누가 하노? O목사 백 점  맞았는데. 네. 실행하면 자신이 변화가 됩니다. 자신이 변화가 되면 이해가  돼집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주님의 이미 알고 있는 그 말씀대로 실행을 하면 말이오.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네 자체가 변화가 되고 변화되면 행한 그 진리를 제가  다시 알게 됩니다. 행한 진리를 다시 알게 됩니다.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하는 그 진리는 자기가 이미 알고 행한 그것입니다. 알고 행한 그것을  행하고 나면 이제 참 그것이 진리다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자체가 변화가 됐으니까 진리라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알고 나면  자유합니다. 왜? 진리를 알고 보니까 이 진리는 전지 전능의 지능을 가졌고 모든  존재를 진리가 창조한 시공의 능력이기 때문에 이는 모든 피조물보다 무한한  원인되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진리대로 행하는 데  대해서 그는 모든 생명이요 성공뿐이지 실패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고 행할 때에는 진리를 알고 행하는 그 모든 대적하는  자들에게 동정하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겨지지 거기 대해 두려움이라 하는  그런 것은 있을 수 없고 이거 너무 이 진리를 거역하니까 저것이 지금 폭탄  맞을라고 저래 하고 있으니까 저를 불쌍히 여겨서 그 자리서 피해서 그도 나와  같이 긍정하는 그런 믿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이해하는 사람이 되도록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하지 거게 대해서 대적되는 일이나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알기 전에는 진리를 행할 사람이 없습니다. 진리를 알면,  자기가 변화되어서 진리 아는 사람은 자기 진리가 돼지지만 변화되지 않으면  자기 진리가 돼지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것이 자기의 주관적 지식이 되고  자기의 본능적 지식이 될 때에 비로소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대로 행할  때에 자기는 성화되어서 진리와 일치되어서 객관 타율인, 하나의 율법인 타율이  내가 한번 행해 보면 그것이 자율이 됩니다. 그것이 자기의 본능이 되고 자기  주관이 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는, 사람이 불에 들어 가면 타 죽는다는 것을 자기 주관 지식으로 딱  알고 있는데 불에다 끌어 넣을라 해 보십시오. 불에 안 들어갈라 하는 것이  들어가고 싶기는 들어가고 싶지만 못 들어가구로 하니까 억지로 안 들어간다  그렇게 되지 안하고 본능적으로 불에 들어가기가 싫고 들어가면 죽는 줄 알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 기울여서 안 들어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진리를  깨닫고 나면 이 신앙, 하나님의 도리를 순종하는, 순종 안 하는 것이 죽는 거와  같고 순종하는 것이 자기가 소원하는 대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 법  대로 순종하는 것을 가리켜서 소원 성취했다 하는 자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뭇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 법도가 자기 주관이 되고, 자기 본능이 되고. 자기 자율이 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하는 것이 자기의 평생 소원하는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소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니까 자유요 그것이 평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자기를 변화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시간에는 모든 비합리적이요 모순적인 이 큰 기둥이 되는, 기독교의  큰 기둥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 또 하나님의 목적, 예정 창조,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섭리의 사활의 대속이 있는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믿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자기 자율과 부딪혀서 모순되기 때문에 믿지를 못합니다.

 이제 믿어서 순종하고 나면 자신이 변화가 되기 때문에 이 말씀이 아멘이 되고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한 것은 다 일곱 교회에 대한 서론들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서론도 여러분들이 가면 그만 잊어버리고 가면 이 도리와  정대립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기 쉬우니까 가거든 이 테이프를 몇 번이든지,  확실히 자기가 알기까지 들으십시오. 알고 이해가 되기까지 들으십시오, 이해가  되기까지 듣고 난 다음에는 또 설교록을 읽으십시오. 읽으면 자기가 읽는  가운데서, 차차 자기가 변화되고 조금씩 행하고 행하는 데에서 변화되고 이래  가지고 도와 자기와의 일치가 됩니다. 하나가 되어 집니다. 이러면 자기가 이  하나님의 도로 걸어가는 것이 억지로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원하고 원하는  본능적으로 걸어가개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도를 지키는 것이 순종으로 지키는 것은 아직까지 어릴 때의  말입니다. 또 발단적의 것을, 제 일선에 나가는 그 발단면을 가르쳐 말하는  것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이 순종으로 걸어간 걸음이 뒤로 돌아보면 그것이 다  자유한 걸음이 됩니다. 나중에 그것은 자기 본능이 되고 자기의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억지로 믿는 게 아니고 자기의 절대 소원하는 소원이 돼서  소원 성취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항상 기쁨과  평강으로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뭐 무슨 말인지 자꾸 이거 좀 얼떨떨한 말만 자꾸  말하니까. 그래도 학생들은 잘 들어요. 학생들은 잘 듣고 목사들은 잘 못  알아들어요. 가르칠라 하면 힘이 들어요. 학생들은 잘 알아듣습니다.

 이제 에베소 교회 여기서 보십시오. 2절에 '내가 네 행위와' 자, 그러면 주님이  행위를 안다 말이오. 행위를 좋은 행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네 행위 손가락으로  꼽아 보십시오. '내가 네 행위' 또 수고 그라면 몇째입니까? 둘. '수고' 또 네  인내 또 몇째입니까? 셋. 또 악한 자를 용납지 아니한 것 또 몇째입니까? 넷. 또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그  몇째입니까 그러면? 다섯. 또 네가 참고 그라면 또 몇째입니까? 여섯. 또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또 몇째입니까? 일곱. 또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그라면 몇입니까? 여덟 가지. 아주 이 행위는 참 훌륭한 행위입니다. 훌륭한 행위.

 행위 하나만 잘해도 그러하지 또 수고한 거, 신앙의 수고하는 것. 뭐 또 못 참을  데 참고 견디는 것, 사람이 참지 못해서 죽을 지경이라도 참는 것 얼마나  귀합니까? 의로운 행위,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행위 하는 것은, 이 행위를 말하는  것은 비성경적으로 행위 하는 것을 가리켜 말함이 아니고 성경대로 행위하는 걸  가리켜 말합니다. 여게 '내가 네 행위를 안다' 이 행위는 성경적 행위입니다.

 성경적 행위요. 이거 똑똑히 들어야 돼요. 성경적 행위.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적 행위. 또 수고. 성경적 수고입니다. 성경대로의 수고요. 죄짓는 수고하는  게 아니고 뭐 돈벌이 하는 그런 수고가 아니고 성경대로 수고합니다. 성경적  수고. 또 인내를 알고. 성경대로 참고 견딥니다. 인내라 말은 계속이라 말이오.

 인내라 말은 계속. 성경대로 참고 견딘다 말이오.

 '저 사람이 저거 지금 저런 억울한 소리를 들으면 저거 지금 저 사람이 막 악을  품을 건데' 가 보니까 그렇지 안하고 소화를 잘 하고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자기의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직장에 면직을 당하고 난 다음에도  보니까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참고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이 믿는 일로 인해서  감옥에 가 가지고 감옥살이를 하고 있어도 가 보면, 저 사람이 인제 호독거리고  아마 병났을거다 하는데 가 보니까 잘 참고 견디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여게  기록한 인내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성경대로의 행위, 성경대로의 수고,  성경대로의 인내, '저 사람이 저렇게 손해를 많이 당하고 억울한 꼴 당하고  견디겠느냐?' 보니까 잘 견딥니다. 다른 사람에게 애매한 꼴을 많이 당하고 뭐  굉장한 섭섭한 꼴을 많이 당하지만 그 사람이 잘 견딥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거 섭섭한 꼴 당했으니까 그런 괘씸한 놈이 어디 있느냐?' 이래서 좀 편을  들어 줄라고 이라니까 도로 말하기를 '아니오. 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지당해서 당하지요.' 그라면 이 사람이 무슨 큰 죄나 있는가 생각하나 그렇지  안하요. 바울이 '나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하는 거와 같이 주님 생각하고 또  주님 앞에 자기 깨끗하게 생각해 볼 때에 다른 사람이 몰라서 자기를 욕을 안  하고 칭찬 하지 자기가 아는 대로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안다면 자기에게  대해서는 똥이 될 거라 그 말이오. 모든 것을 깊이 넓게 진실되게 생각하고  참습니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

 장로가 보니까 무슨 일을 하는데 자기 중심으로 교회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기어코라도 안 된다고 대적을 해서 수정을 합니다. 목사가 또 악으로 합니다.

 자기 중심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또 전도사가 그와 같이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직들이 다 그와 같이 합니다. 또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인인 관계를  가지는데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거나 하는 것 보니까 그게 전부 자기 중심이요  사욕 중심이지 하나님을 중심하고 위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구속을 중심하고 위주한 것이 아닌 것을 볼 때는 저거 가족이 말한다고  '그렇지 그렇지, 그렇지.' 한짝이 되지 안하고 이제 그것을 용납지 아니합니다.

 이런 것 다 귀한 것입니다. 이거 귀해요 안 귀해요? OO조사, 귀해요 안 귀해요?  알아듣겠나? 알아들려? 카브넌트 신학교서 배울 때와 같이 알아들려져?  알아들리면 돼! 알아들리면, 알면 죽어도 이 진리에 죽지 못 가, 딴데. 다 몰라  그렇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그러면 자기가 사도라고, 자기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에 직접 쓰여지고 있는 사도라고 그렇게 인정을 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대우를 하고 그렇게 권위 있게 일을 합니다. 교계에서 권위 있게 일을 합니다.

 교회도 또 교인들도 많이 모이고 권위 있게 일합니다. 또 교계에서 권위 있게  일합니다. 그 진영에서 권위 있게 일합니다.

 이런데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의 사도가 아니고 하나님께 직접 쓰여져서  하나님께 피동되는 것이 아니고 거기에 하나님께 피동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그  속에는 자기 중심이라는 중심 그것이 들어 가지고 하나님을 이용해 먹고 있지  하나님께 이용당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을 한다 말이오.

 발견해 가지고 그걸 드러내서 '이렇고 이렇기 때문에 아니다.' 이라니까 오는  거는 뭐 옵니까? 그 사람에게 오는 것은 뭣 오겠소? 떡이 오겠소 몽둥이가  오겠소? 욕오고 몽둥이 오고 핍박 오고 조롱 오고 그래 오지. 사람이 이렇게  비성경적인 그 모든 행위를 용납할 때에 막 꿀이 흐릅니다. 좋습니다. 그 행위를  구별해서 아니라고 대항하고 거부할 때는 거게는 굉장한 어려움이 오는 것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가 아주 훌륭한 일 많이 했습니다.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은 것  범사에 참습니다. 참는 것, 듣고 못 참을 일도 참지, 당하고 못 당할 일도 참지,  손해보고 못 참을 것도 참지, 아파서 못 참을 것도 참지, 고생스러워 못 참을 데도  참지, 억울해서 못 참을 데도 참지, 너무 피곤하고 기진해서 못 참을 데도 참지  얼마나 위대한 신앙가입니까? 이런 거 한 가지만 있어도 막 교회에서 덕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굉장할 것입니다.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견디고, 성경에 말하기를  '너희들이 산업을 뺏기고 기업을 뺏기고 네 활동 무대를 빼앗기고 모든 것 다  뺏앗기고도 주님을 생각하고 참고 견디면 복이 있다' 이랬습니다. 이 일이  쉽습니까? 이게 십자가의 걸음이오.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라고 열심히, 그래도 열심히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이거 4절에 참 또 기가 차는 소리가 있습니다. 4절에,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이렇게 이거 아주 다른 사람이 잘  못 할 일이 이거 몇 가지나 됩니까? 몇 가지 옳은 게 있어? 여덟 가지? 여덟  가지 있는데 왜 책망해 그라면 여덟 가지 일인데 책망을 합니다. 여덟 가지를  했으니까 칭찬했을 터인데 책망을 합니다. 요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여덟  가지를 했는데 칭찬은 하지 안하고 하나님이 책망하십니다. 왜 책망할까? 요거  알면 그만 됐는데. 여덟 가지를 했는데 왜 이리 주님이 말하기를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를 책망할 것이 있다. 왜 책망을 합니까? 요 책망한 거  요거 알면 참 다 됐는데. 자, 잘 아는데, 왜 책망하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장중에 불들리지 않고 있다' 네,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하는 이 처음 사랑은 뭐입니까? 이  처음 사랑은, 처음 사랑 버렸다고 왜 이렇게 책망하시는가? 처음 사랑은 주님의  사활의 대속을 말합니다. 처음 사랑. 사활의 대속 그러면 처음 사랑이라고 왜  하는가? 이것은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의 도성인신과 사활의  대속으로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됐고, 사활의 대속으로 나는 죄 사함을 받았고, 또  하나님 앞에 의로 인정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공심판을 통과했고, 하나님하고  화친을 가졌고, 또 영생하는 이 구원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인함인데 이 사랑을 잊었다 이랬습니다. 사랑을 잊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뭐이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뭐이 사랑이지? 이제 신학 양성원 교수 한번 콧대를 한번 눌러 줄까? 이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 처음 사랑 이 사랑이 뭐이지? 이 사랑이 뭐이 사랑이지?  자, 저 O목사? 그래. 맞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의 대속 이것이 사랑입니다.

 이걸 버렸다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목의 화친, 또  부활로써 하나님을 향한 영생의 소망 요 네 가지가 사랑입니다. 이 네 가지  외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요 사랑의 정의를 단정을 시켜 버리십시오.

 자, 세계에 제일 사람을이 좋아하는 게 뭐입니까? 세계 있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게 뭐입니까? (사랑) 저 뒤에도 한번 대답해 봐요. 세계에 있는 모든  인류들이 제일 좋아하는 게 뭐입니까? 사랑. 그 말은 맞습니다. 세계 인류에게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뭐입니까? (사랑) 어? 자, 이 중간 말고 중간 끄트머리,  중간 저, 이 중간 앞엘랑은 대답하지 말고 저 끝에 한번 대답해요. 세상에  인류에게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 어? 다 아네. 나는 모르는  줄 알고 지금 말했는데. 사랑이오. 사랑.

 세상에 인류에게 제일 주는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이라 하는 요것을 오늘  교회들이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모르고 있습니다. 사랑과 사랑을 구별하는 목사가  백 명 가운데에 하나가 있을똥 말똥합니다. 이래 놓으면 막 욕을 하고, 그래  놓으니까 자꾸 욕하는 말이 이단이라고 말하요. 욕 하는 말이 이단이라고.

 이단이라 해야 안 갈 거거든. 와 놓으면 난리가 나니까. 와 놓으면 그게  따글따글 살아 가지고 자꾸 꿈틀거리니까 이거 고장이라 그 말이오.

 우리 인류에게 제일 해독이 많은 것이 사랑이요 제일 유익이 많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면 제일 해독이 많은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뱀의 사랑. 뱀이  준 사랑.

 그러면 이 세상에서 안 믿는 사람들이 '사랑 사랑' 항상 밤낮 노래가 사랑이고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죽고, 사랑 때문에 갈급하고, 사랑 때문에  희생하고 하는데, 이 사랑을 모두 다 좋아하는 사랑인데 이 사랑이, 이 사랑이, 안  믿는 사람들 사랑하는 이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뱀 사랑이오. 그러면 이  사랑은 다 죽이는 해독이 제일 많다 하는 그 말이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이해가 됩니까? 아이구 이해가 되면 참 도통한 도인들이 될라고? 네, 이해가  되겠지요.

 그래서, 세상에 모든 사람들을 죽인 것이, 뭐 무덤에 가면, 나는 기도실 가면  가는 도중에 묘지가 있어요. 공동 묘지가, 시 묘지가 있는데 그 무덤이 뭐 굉장히  많아요. 그거 내가 언제 한번 '여게 몇 구나 들어 있습니까?' 한번 물어 볼라  하다 시간이 없어 못 물어봤는데, 그 모두 무덤마다 막 다 울고 불고 그래  이별했는데 그거 다 누가 그렇게 죽였습니까? 뭐이 죽였소? 울기는 왜 웁니까?  뭐이 울립니까? 뭐이 울리요? 사랑이 울리고, 사랑이 죽였고, 사랑이 속였고  사랑이 볼끈 붙들어서 꼼짝 못하게 합니다. 요새도 이 집회 올라 하는 데에, 집회  올라 하는 데에 제일 사랑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가지 못하게 해서, 사랑해서,  사랑해서 자식에게 유익되게 한다고 못 가게 해 가지고 못 온 그런 학생들  있습니다.

 내게 지난 주일날 밤에 어떤 학교에서 전화가 왔어요. '이런데, 거기 그래 간다  하는데 이 학생이 거게 가면 안 되겠는데.' 이렇게 자꾸 말하기 때문에 내가  있다가 '그만 뭐 고맙기는 고맙습니다만 저도 다 비판을 해 가지고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은 자유니까 그만 내비두고 갔다 오거든 공부를 좀  잘하도록 한번 시키이소.' 이라니까 그거 나중에 그만 그분이 '말이 통해야  말하지' 그래 그만 성을 내 가지고 해요. 성을 내 가지고 이라기 때문에 '그라면  거기 무슨 학교입니까?' 내가 이래 물으니까 '왜, 학교는 뭐할라고 묻습니까?'  '그러면 또 전화하는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왜 성명은 뭐할라고 묻소?' 이래 탁  끊어 버려.

 아마 거게도 아마 못 가구로 할 거라. 이거 참 사랑은 둘입니다. 사랑은 둘인데  인간 사랑 그것이 뱀의 사랑입니다. 뱀의 사랑은 언제 생겼습니까? 뱀의 사랑은  언제 생겼소? 저 조사님? 에덴 동산에서 생겼어. 뱀이 하와를 사랑하니까 하와가  참 이는 나를 생각하고 위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위한다 해 가지고 이제 뱀의  사랑을 받았어. 뱀의 사랑을 받아 가지고 또 아담에게 선악과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는데 그거는 뭘로 줬지요? 뭘로 줬어? 뭘로 줬어, 저 학생? 아담에게 하와가  선악과 줘서 먹게 한 그거는 뭘로 줬지? 학생 너 말이라, 너? 미워서 줬어?  사랑해서 줬어. 고거 똑똑히 알아야 돼. 사랑해서 줬어. 사랑으로 줬는데 그만  뻐드러져 버렸습니다. 사랑으로 줬는데 그것 먹고, 그만 뒈져 버렸어. 거게 속한  모든 자자손손이 전부 다 뒈졌어.

 이랬는데 이것을 죽음에서 살리기 위해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이 왔습니다. 뱀  사랑으로 다 죽여 놓은 것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왔습니다. 하다님의  사랑이 왔는데 하나님의 사랑이 뭘로 와 가지고 죽은 것을 영원히 살렸습니까?  뭘로 왔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뭘로 왔어? OOO목사님 한번 대답해 봐. 사활의  대속이라 하니까 모르겠다 좀, 해석 좀 해 보지. 사활의 대속이 뭐인데? 또 봐  저래 물으면 그만 모르는 거라. 그만 주문격으로 뚤뚤 뭉치면 알지 분류를 해야  뭐 알지. 사활의 대속 급할 때 그래 하지만 알고는 있어야 되지. 사활의 대속이  뭐인데? (사죄 칭의 화친 소망) 네, 그거 주 댔으니까 다 빠지지 않고 되기는  됐어. 그래. 그게 하나님의 사랑이라.

 사랑과 사랑을 구별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절 이하에는 보면 '천사의  방언을 하고 모든 지식을 통달하고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또 자기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해 주고 심지어 자기 몸뚱이까지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불사른  번제 제물로 드릴지라도' 사랑 없이 이렇게 할 수 있소? '드릴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으니까 그 사랑이 자기 소유를 다 줘,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희생해서 줘, 또 천사의 설교를 해 줘, 모든 세계에 있는 지식을  다 통달하도록 가르쳐 줘, 산을 옮길 만한 그런 믿음이 있는 그 믿음을 줘, 자,  이랬으면, 이라면 이만하면 족하지 않소? 이런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이랬어. 그러면 그 사랑이 무슨 사랑입니까? 네가 뱀의 사랑으로 이런 거 암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다 소용 없다 그말입니다. 이해가 돼요?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 없으면 네게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하는 그 사랑이, 그 모든 걸  희생한 것이 뱀의 사랑인데 뱀의 사랑으로 이 모든 것 희생할 만치, 네 소유와  몸을 다 줄 만치, 네 생명을 줄 만치, 소유를 다 줄 만치, 그에게 모든 세상  지식을 다 통달시켜서, 공부를 시켜서 그 지식을 소유할 만치, 또 산을 옮길 만한  그런 믿음이 있도록 만들어 준다 할지라도 사랑 없으면 아무 소용 없다 하는 요  사랑이, 요 사랑이 인간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이 생명과 평강이  충만한 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전에 공부를 시키고, 세상 지식을 다 통달시켜  주고, 또 웅변 연습을 해서 세상에 제일 말 잘하는 사람을 만들어 주고, 또 자기의  소유를 다 주고, 자기의 심지어 몸까지 다 희생해 줄 그런 마음을 가지는 아버지  어머니라 할지라도, 그걸 다 줄지라도, 요새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어요. 옛날은  돈을 모아 가지고 돈을 주면 된다 해 가지고 돈을 줬는데 돈을 주면 그래도  삼대도 사대도 그 돈이 나가니까 그렇지만 요새는 돈 많이 줘 봤자 하루  아침이면 활딱 돌려 가지고 빈주먹 싹 털도록 돌려 댈 수 있기 때문에 '이 돈은  맡겨야 안 되겠다' 이래.

 돈이 많은 사람들 삼계탕 한 그릇 얻어먹고, 삼계탕 한 그릇 얻어먹고 도장 하나  꾹 찍어 버리니까 다 날아가 버렸어. 너 알아? 너 안경 쓴 너, 어느 교회서 왔어?  어느 교회서 왔어, 너? 뭐라 하노? OO교회서 왔나? 너거 OO교회 올해 악기  가져왔나? 땔땅땔땅하는 거? 그거 하면 하나님이 기뻐 안 하셔. 요번에는  가져왔을지라도 딱 싸서 묶어 놓고 어짜든지 이 들은 바의 말씀만 새김질 하도록  힘쓰고 그런 것 하지 말아요. 너는 안 했지? 그래 이렇게 자녀에게 대해서 돈  물려 주는 것도 도둑놈이 많기 때문에 안 됐다. 또 부동산을 물려 주는 것도  사기꾼이 많기 때문에 안 됐다. 이라니까 어짜든지 돈을 대 가지고 남보다 입도  똑똑해서 말도 잘하고 지식도 통달하고, 또 이 세상에 아무도 뺏아갈 수 없는  모든 생활 박력의 그 기능들을 마련해 줘야 되겠고 이래 놓고는 턱 '내가  이랬으니까 우리 아들 다 이래 해 놨으니 참 족하지' 하면서 족하다고 뒤로  저뻥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노아의 홍수가  오니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다 매몰되고 말지 안했소? 우리  교회 한 사람 하나 있어. 여기 저 목발 타고 다니는 절름발이 하나 있어요.

 OOO집사라고 이름이 그래요. 나는 이거 부끄러운 걸 잘 말해. 그런데 듣기  싫어하지만 듣기 싫은 거 아니라 좋기 때문에 강단에서 하지, 내가 말하는 거  하나님의 말씀 할 때는 다 좋은 거라, 그런데 그분이 말하기를 아들네들 모아  놓고 '자, 내가 너거한테 애비 노릇 이만치 했으면 됐지.' 막 큰소리를 한대요.

그래 아버지 노릇을 뭘 했느냐고 옆에 권찰이 물으니까 '자, 내가 성경 볼 만치  글을 가르쳐 줬지' 찍해야 한글밖에는 안 알려 놓고 말이지. '이래 놨지, 또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상속시켜 줬지, 또 이렇게 황금보다 귀한 믿음을 저거에게  줬지, 내가 새벽기도 안 나온다고 말이지, 새벽기도 안 나오는데, 암만 깨워도 안  나오니까 그만 이 목발든 사람이 뭐, 좀 건강하기는 건강하지만 힘이 있겠소?  그래 그만 저 바깥에 가 가지고 요강 단지를 이놈을 들고 와 가지고 그만 누워  자는데 방바닥에다 탁 던져 그만 깼다 말이오, 그래 놓으니까 이놈들이 안 일어날  수가 있어야지? 그래 가지고 그만 '아이고, 이렇츰 이래 가지고야 살면 뭐하노?'  그래 무월 있을 때인데 '아이고 내가 자살해야 되겠다' 그 앞에 못이 있어요.

못에 가서 자살할라고 암만 해도 자살해 가지고는 안 되겠고 또 집에 들어가  봤자 그렇고 아이고 내가 도망친다고 그만 서울로 도망쳤어. 서울로 도망쳤는데,  그래도 막 자녀에게 좋게 한 이런 놈의 자식들은 저 다 미국으로 모두 전부 다  도망 다 가 버렸어. 나도 도망 다 가 버리고 남은 거는 하나밖에 없어요. 다 도망  다 가 버리고. 미국으로 다 가 버렸어. 이런데 그분의 아들들은 다 기어들어 왔어.

다 기어들어왔어. 다 기어왔는에 다 잘 살아요. 다 기어들어와 가지고 저거가 다  재산도 모으고 다 그렇게 잘 살아요.

 그라면서 내가 할 일 다 했다고. '이만치 했으면 됐지' 이라면서 어디든지 가면  배짱 있습니다. 나는 자식에게 할 노릇 다 했다고, 그래 가지고 이놈들 뭐 돈 안  가져온다고 뭐 안 가져오면 야단이오. '나를 바라는 자는 결단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라' 당신을 바라보고 한 사람 결단코 수치당한 거 죽기 전에 다 보응해  주십니다.

 이래 가지고 뭐 알뜰히 오만 거 다 희생해 가지고 이래 해 놓온 것은 전부 가  가지고 너무 높아서 벼슬살다가 감옥에 들어간 것, 너무 높아서 죽임당한 것, 너무  높아서 지금 생전 코때기도 한번 보지 못할 거, 그만 이렇게 다 뺏들리고 말았어.

 천지는 변해도 하나님 말씀은 획 하나도 변치 않습니다! 믿습니까! (아멘!)  믿습니까! (아멘!) 어리석지 말아요.

 여게 보니까 여덟 가지가 휼륭합니다. 여덟 가지가 훌륭한데 책망한 것은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렇게 말해.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처음 사랑이 뭐이라? 이제 네 가지가 처음 사랑입니다. 요 네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이요 사랑은, 요 네 가지 외에는 없는 것으로 그렇게 단정을  지우십시오. 어디든지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을 말했거든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 요 네 가지라고 증거를 하십시오. 그라면 거게는 틀림  없습니다. 제가 어떤 구변가가 말해도 요 네 가지 외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하면 그것은 무식한 사람이라. 요 네 가지 속에 하나님의 사랑은 다 내포돼서  하나님의 사랑이 요 네 가지로 우리에게 나타나서 영원히 충만케 되어지는  이것입니다.

 그랬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이랬으면 위에 네가 이 여덟 가지는  잘하기는 잘했다. 이것을 칭찬을 해 주고 말이요, 여덟 가지나 했으니까 칭찬해  줘야 되지 않겠소? 이 칭찬을 해 주고 처음 사랑을 버렸다 이래야 될 터인데,  죽자껏 힘써 가지고 이 여덟 가지를 했는데 칭찬은 하나도 없어. 어떤 요한계시록  주석에 보면 '이거 칭찬했다' 나도 처음에 그런 주석 보고 처음에 그래  깨달았어요. '하나님은 장점부터 먼저 알아서 칭찬 하시고 그 다음에 뒤에 단점을  말해 준다' 이라는데 나는 그럴듯 하게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자세히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 여덟 가지 칭찬한 게 아니라. 칭찬한 게  아니라. 청찬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것을 노여워하셨다 말이오, 칭찬한 게  아니고.

 노여워하신 것은 뭐이냐 하면 거게 보면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촛대는 등불을, 촛대불 촛불을 가리켜서 촛대라고  말한 것인데 이제 그 사람들이 여덟 가지 행한 그것이 여덟 가지 행한 그것이  빛입니까 빛 아닙니까? OOO 조사님? 이거 재대로 대답을 못 하겠다 말이지.

 빛입니까 빛 아닙니까? OOO조사님? 빛 맞지? 네, 빛 맞아요. 빛이오. 촛대 옮겨  버리면 빛이 있어요 없어요? 그까짓 거 여덟 가지 있어봤자 처음 사랑  버렸으니까 다 없애 버린다 그 말이오. 촛대를 옮긴다 말은 이제 빛을 없애  버린다 그 말이오. 없애 버린다 말은 네 행위를 없애 버리고, 수고를 없애 버리고,  인내를 없애 버리고, 악한 자를 용납지 안한 그런 것도 없애 버리고, 자칭 사도라  하는 것을 시험해서 거짓된 걸 드러낸 것도 없애 버리고, 또 참는 것도 없애  버리고, 주를 위해서. 견디는 것도 없애 버라고, 게으르지 안하고 열심 있는 것도  없애 버리고 다 없애 버린다 그 말이오.

 그러면 이 여덟 가지 하나님이 칭찬했소, 여덟 가지를 싫어햇소 좋아했소? 요거  잘 알아야 돼요. 이거는 칭찬하고 사랑 버린 것만 하나님이 책망했다 이렇게  돼지는데 이 여덟 가지를 칭찬하지 안했소. 촛대를 옮긴다 말은 그거 없애  버린다. 보기 싫다. 네 참는 것도 보기 싫고, 견디는 것도 보기 싫고, 부지런한  것도 보기 싫고, 사도를,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도 보기 싫고, 악한 자를 용납지  안한 것도 내가 보기 싫다. 요거 이해가 잘 안 될 거라. 보기 싫다. 왜 보기  싫어요? 처음 사랑을 버렸기 때문에 보기 싫어, 그라기 때문에 처음에  말씀하시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일곱 별을 잡았다 말은 이제 하나님의 사자를 잡았다 말이요, 하나님의  종을 잡았다 말이오. 또 촛대를 잡았다 말은 교회를 잡았다 말이오.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을 붙들고 하나님의 교회를 붙들고, 네가 행위한 것도 네가 한 게  아니라 내가 너를 붙들고 이거 네 행위를 만들어 냈고 네 참는 것도, 또 계속하는  것도, 열심 있는 것도, 또 악한 자를 용납지 안한 것도, 거짓 사도를 드러낸 것도  그런 것도 전부 내가 너를 통해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마시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고 마신다는 말씀대로 너는 내가 너를 통해서 이런 것들을  나타냈으니까 이거 네가 한 게 하나도 없다. 내가 이거 전부 너를 붙들고 내가  했다.

 뭣 때문에? '내가 너를 붙들고 모든 행위도 했고, 수고도 했고, 인내도 했고 악한  자를 용납지 안한 거 이 여덟 가지를 다 내가 너를 붙들고 했다. 이 주재넘은  자야. 이거 네 여덟 가지 네가 한 건 줄 아느냐? 내가 붙들고 했는데 내가 붙들고  했을 때에 내가 열 개나 하라 하면 너는 찍해야 한 개 하고 내가 백 개를 하라  하면 한 댓 개 하고. 내가 하는데 그게 다 그대로 발휘되지 안하고. 네가 방해를  해서, 너는 만날 방해하고 내가 했는데 한 것에 내가 한 것이 다 그대로 백프로  전달이 되지 안하고 네가 중간에서 게을해서 내가 애를 먹고 그거 다 삭감 삭감  삭감되고 얼마 되어졌는데, 그와 같이 됐는데 네가 그것만 자랑 하고 그것만 큰  줄 알고 네가 다, 내가 그와 같이 한 거는 왜 이래 취급하노?' 그와 같이 주님이  뭣 때문에 이 여덟 가지를 하도록 해 줬어요? 뭣 때문에 여덟 가지 훌륭한  행위를 하도록 해 줬지? 처음 사랑 때문에 해 준 것이오 처음 사랑 때문에 처음  사랑 때문에 해 줘서 처음 사랑 이 사랑 노래 부르라고, 사랑 노래 부르라고 또  하나 해 주고 또 해 주고 자꾸 해 주니까 이게 사랑 때문에 해 줬는데 이걸랑,  사랑일랑 집어던져 버리고 이 여덟 가지 이것만 거머쥐고 야단을 지겨 버려.

이라니까 하나님이 밉상으로 봤다 그 말이오. 이거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요?  처음 사랑은 내나 다른 게 아니라. 주님이 구속하신 것, 주님이 나를 구속하신 이  주의 사랑에 감격해서 '주여, 감사합니다.' 이라니까, '감사합니다.' 이 소리  하라고, 이 소리 하라고 신앙 행위도 되게 해주고, 인내도 주고, 열심도 나게 해  주고, 악하고 또 의로운 것도 구별하게도 해 주고 또 모든 이단과 그런 것들을 다  승리케도 해 주고 이렇게 해 주니까, 해 주니까 엉뚱이같이 한 것은 제가 잘나서  제가 한 척 하고. 하나님은 지금 사랑 노래 부르라고 이거 해 주는데 사랑 노래는  안 부르고 사랑은 다 멸시해서 집어던져 치워 버리고 이거 받은 거는 제가 한  것처럼 우쭐해 가지고 날뛰니까 얼마나 죽었소? 얼마나 꺼꾸로 됐소? 이해가  돼요?.

 이걸 '봐라, 내가 너를 대형 사죄했다, 대행 칭의 했다, 대화친으로 화목의  하나님의 자녀 만들었다, 또 내가 부활로써 너를 하나님을 향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했다.' 이렇게 말을 한번 하니까, 말을 한번 하면서 가르쳐 주니까  '아이고, 그렇습니까.' 하니까 좋아서 돈도 주고 뭣도 주고, 또 이래 하니까 또  자꾸 그러니까 자꾸 좋아서 하나씩 둘씩 여덟 가지나 줘 놨습니다.

 여덟 가지나 주니까 '하, 이거 참 기이한 일이다. 당신이 나를 사활의 대속한 이  대속을 노래만 부르면 뭐하노?' 또 요번에는 사활 대속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사활 대속하셨습니다.' 하면서 한번 노래 부르고 나니까 뭐이 선물이 떡 한  보따리 또 옵니다. 한 보따리 또 와. 이제 요걸 알았다 말이오. 또 사활의 대속을  이제 한번 사모하니까 또 뭣 와. 사활의 대속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눈물이 나니까  더 많이 와요 적게 와요? 많이 와. 이랬는데, 이거는 주님이 주시는 데도 다도  하지 안하고 제가 열 개 주면 찍해야 잘하면 뭐 두서너 개 하든지 너덧 개  하든지 이래 해 놓고 애만 먹여 놓고, 애를 먹여도 주님은 피곤한 줄 모르고 사랑  노래 부르니까, 대속하신 이 사랑을 감사하니까 피곤할 줄도 모르고 또 주는데,  이게 나중에 삐끄러져 가지고 이제까지 한 거는 방해해 가지고, 방해하면서 여덟  가지 행동 해 놓고 이 행동한 것은 제가 한 것으로 알아 가지고 '내가 여덟  가지가 하, 미꿈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는 이렇게 했습니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께도 교만하고 사람 앞에도 교만하고 이렇게 교만하고, 이것은 제가 한  줄로 이래 알고 이제는, 사랑 노래 부르기 때문에 그랬는데 감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찬양도 없습니다. 그로 인해서 움직여지는  움직임도 없습니다. 인제는 제 명예를 위해서 자기 영광을 위해서, O조사님?  O조사님 말이요, 미국서 여기까지 와 가지고 잠을 자는데, 자꾸 잠을 자는데 못  알아 들으면 안 돼요. 삐뚤어지면 안 돼. 요거 안 들으면 터들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어.

 이것이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을 하나님이 말씀해 놓고 이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하, 하나님이 이렇게 나를 대속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좋아서  선물 주는 것이 뭐이냐? 이 여덟 가지의 행동한 것 같은 이런 것들을 선물로  주십니다. 선물로 주시니까 요것이 교회가 삐끄러지게 탈선되는 중점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래 떡 이라니까 처음에는 하나님 앞에 사랑을 감사하고 찬송을 하고 이래서,  찬송하고 감사하고 이라니까 하나님께서 의의 행위를 주고 당신이 뭘 줍니다. 뭘  주면서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랑하고 난 다음에 둘째로는 뭘 자랑하느냐  하면 '네가 이런, 다른 사람은 죄에 빠지는데 너는 죄짓지 안하고 의롭게 사는  이것을 네가, 내가 살려 줄 터이니까 봐라,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이래 대속해  주신 이 주님이 이렇게 나로 하여금 의롭게 살도록 해 줬다.' 이래 가지고  하나님의 이 사활의 대속의 사랑을 감사하고 찬송하고 사활의 대속을 인정하고  받은 자에게 하나님이 덧붙여서 이제 모든 의로운 행위를 주시는 이것을 또  이것도 하나님이 나에게 이래 주셨다 하고 자꾸 자랑하면, 이제 하나님은 그  수입을 무슨 수입 바라요? 하나님은 무슨 수입 바랍니까? 무슨 수입 바라요?  사활의 대속 줬지 또 이거 모든 의로운 행위를 주지 그라는데 하나님이 지금  바라는 거는 뭐이요? 포도나무를 심는 것은, 주인이 심어 놓은 것은 포도 열매를  바라서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 네 가지 사활의 대속의 큰 사랑의 은혜를 줬지, 또 이 사활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모든 의로운 신앙 행위를 하나 하나 열매를 맺도록, 의로운  행위를 하구로 해 줬지, 그라면 이라는데 하나님이 바라는 건 뭐이요? 의로운  행위입니까, 의로운 행위입니까? 자, 들어요. 의로운 행위를 하나님이 바랍니까?  내가 너를 사활의 대속을 해 줬고 또 너에게 이렇게 의로운 행위를 내가 해 줬고  이라니까 하나님께서 뭣을 원하는지? 뭣을 원하는지? 자, 여러분들 내가 말할  터이니까 대답을 속으로 대답해 놓고 맞는가 안 맞는가 봐요. 이렇게 하나님이  사활의 대속을 해 주셨고 또 의로운 행위를 하게 해 줬으니 네가 남한테 눌리지  말고, 남한테 눌리지 말고 어깨를 척 벌리고 '나는 이런 의인이다' 이렇게 하라고  해 주셨는지, 또 그렇지 아니하면, 그거는 인제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자랑은 안 해도 '참 나도 실력은 있다. 내가 이만한 의를 행하지  안했느냐?' 자신 만만하라고 해 주셨는지, 또 '주님이 나를 대속하셨지만 나도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까지 당신을 위해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고, 감옥  생활도 하고 오만 거 다 희생했으니 하나님도 나에게 잘했지만 나도 하나님께  이만치 했으면 할 만치 했다.' 이것을 원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는지, 또  그렇지 안하면 '하나님이 나를 이 사활의 네 가지 대속으로 나를 무한한 해방을  주셨고, 무한한 소망을 주셨고, 무한한 권능을 주셨고, 무한한 광대한 무대를 줬고,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을 자기의 무대를 삼아 가지고 그것들을 막 웃기고  울리고 살리고 막 좋아서 찬송하도록 이래 만들 수 있는 이런 큰 기업의 무대를  줬다.' 이거 우리 기업이라. 그 기업이라 말이 있어요 없어요? OOO목사님, 성경  잘 알지. 그 기업이라 말이 성경에 있어요 없어요? 어디 있어? 에베소서에 있지.

네.

 이라라고 '이렇게 나에게 큰 사활의 대속도 주시고, 또 이게 무엇인데 독사와  시랑이 같은 이 독한 놈이고 모진 나쁜 놈인데 이것에게 의로운 행사를  주셨습니까?' 하고, '주여, 내가 뭐이기 때문에 이렇게 대접을 합니까?' 이라니까  하나님이 입이 벙긋하이 좋아서 또 하나 주십니다. 또 하나 주시니까 '아이구,  내가 이런 걸 어떻게 이거 주님이 하시고 자꾸 내가 한 것처럼 이렇게 해 가지고  자꾸 이래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나를 자꾸 의롭다고 높이지 않습니까? 이거 참  내가 뭐 어떻게 송곳 방석에 앉은 것 같습니다. 황송합니다.' 자꾸 이라니까  하나님은 좋아 하시요 안 좋아하시요? 하나님 마음에 주는 것이 재미가 있어요  없어요? 재미가 있는데 이게 좀 보니까 '봐라, 나는 이런 의가 있다. 이것도  행했다 이것도 행했다, 나는 이래 행했다. 이래 행했다.' 이것만 하고 주님이  자기를 붙들고 하도록 해 가지고 해 주신 이것도 까마득히 잊어버렸지, 주님의  사활의 이 대속 때문에, 그것 때문에 인연이 맺어졌고 그것 때문에 주님은 소원이  되고 그것 때문에. 이런 건 다 부속이라. 이거 의로운 행위 한 이까짓 거야 다  부속이라.

 찌끄러기라.

 인제 그것 때문에 당신의 전부를 우리 위해서 기울였기 때문에. 당신의 전소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전부를 우리에게 기울여서 우리로 당신의 전부를 삼으려고  이와 같이 하는 이 지극히 큰 사랑의 발동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이 사랑을  무시하고, 이것을 무시하고 이것을 다 배반하고 마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해서 뭐 소망이 있습니까 절망이 됩니까? 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 절망이  돼요 소망이 돼요? 절망돼. 절망돼. 하나님은 그러면 이 행위에 대해서 후회가  되겠소 '너한테 이런 의로운 행위를 준 걸 참 잘했다' 기쁨이 되겠소 후회가  되겠소? 후회돼. 그러니까 옮길라 하지 그러니까 옮기실라 해. 후회가 돼서.

 그러니까 하나님께 모든 것이 주권되어 있는데, 다 예정돼 있지만 예정된 것이  그대로 그런 방편으로 통해서 이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뭣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요? 뭣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까? 뭐? 네,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감사입니다. 우리의 감사.

 우리의 감사.

 또 찬송도 요새는 하나님 싫어하는 찬송 많아요. 왜? 교리와 신조에 삐뚤어진  거, 저거 신명 찬송이라. 이라니까 모든, 우리 교회도 보면 성악가들 이 좀  성악가들은 이 찬송에 대해서 가사에 대한 그거 예수님의 구속을 생각하는 그런  거는 하나도 없고 찌딱째딱 찌딱째딱 얼딱짤딱 이라면 뭐 좀 있으면 어깨춤  추기를 이래지는 이것만 좋아합니다. 전부 성악가들이 다 그래! 이래 놓으니까 뭐  찬송하는 거 전부 그거라야 찬송해.

 이라니까 자꾸만 이거 뭐 행진곡 같은 거 그런 거라야 찬송하고 또 요새  유행으로 별곡 나는 거 그러니까 곡에 취미니까 취미 가지고 저거 재미 있는  것만 취하지 하나님의 대속의 이 구속을 이거 우리가 찬송하고 감사하는 그런  찬송은 없어진다 그 말이오. 이번에 통일 찬송이라고 지금 했는데 통일 찬송을  우리가 한 백 구십 곡, 백구십 곡을 빼 가지고 보니까 그전에 찬송 작가, 찬송을  지은 작가 그 사람들이 지을때 가사 한 그 가사 그대로에 되어 있는 그것을, 좋게  고쳤으면 좋지만, 좋게 고친다 할지라도 썩 좋지 안하면 먼저 지은 저자가 있기  때문에 그 저자를 무시하고 달리 고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동등이면 그전에  저자한 작가 그대로의 것을 우리가 받아서 사용해야 되지 그걸 무시하고 새로  변경은 못 합니다.

 못 하는데 과거보다 좋지 안하고 나쁜 것이, 나쁘게 찬송 가사를 고친 것이  백구십 장 속에 얼마? 백구십 장 속에 얼마? 구백구십이라 했나? 구백구십을  고쳤어. 백구십 곡에 구백구십을 고쳤어, 구백구십을 고쳤는데, 그 찬송을 처음에  성신의 감동받아 가지고 지어낸 그 사람의 감동으로 지어낸 것보다 좋게  고쳤으면 하지만 전부 나쁘게 저거 취미로 다 고쳤고 저거 해 만들라고 다,  저거가 했다고 할라고 고쳐서 작가들을 전부 무시해 버렸습니다. 또 아주 이 세상  인간들 취미 있고 인간들 재미 있게 다 고쳐 버려 놨어. 이래 가지고 구백구십이  고쳐졌어. 백구십 곡에, 백구십 장에 말이요, 백구십 장에 구백구십이  고쳐졌으니까 그 찬송 전부 난도질해 버려 놓은 것 아닙니까 그거 보니까 전부  인간적으로 고쳐 버렸지 하나도 은혜되게 고친 것이 하나도 없다 그 말이오.

 이래 놓으니까, 찬송은 제이 성경 같은 역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무식한 사람들은 다 성경은 잘 몰라도 찬송가를 보고 대개 그것을 교리 신조같이  여겨서 그래 신앙 생활 하는데, 이 찬송을 고친 거는 제이 성경으로 권위 있게  모든 교인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제이 성경이라 할 수 있는 이것을 백구십  장에 구백구십을 고쳐 놨으니까 자, 육백 곡을 다 열람을 한다고 하면 고쳐진  거는 얼마나 되겠지? 한 삼천 고쳐야 될 거라 말이오. 이것이 성경을 고친 거와  꼭 같다 그 말이오. 이게 전부 속화라! 이거 전부 속화로 해 가지고 저거  신명풀이 하기에만 좋구로 해 놨고 세상 사람들 듣기에만 좋구로만 해 놨지  구속하신 주인을 위해서 지은 찬송인데 주인에게는 상관이 없는 요거라요. 요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찬송가를 '네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 그 사람들은 다 찬송  지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한 찬송인데 너는 하나님의 사랑은 버려 버리고  너거 취미 있는 대로 고쳤다.' 이라기 때문에 '이래 나가서는 안 되겠다' 이러니까  우리는 부득이 거기서 예배 찬송으로 몇 장만이라도, 우리가 고친 것 아니고  우리가 새로 만든 것 아니고 옛날 찬송 저작한 그 사람들이 만든 가사 그대로에  우리는 받아 가지고 그대로의 것을 우리는 찬송하고 이들 따라가지 않겠다 하고  한 것이 백 구십 한 곡인가 두 곡인가 되는 그것은 우리는 거기서 고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꼭 그대로 옮겼고, 고친 것이 하나도 없다 말은 그거 틀린  말인데, 하나인가 둘인가 고쳐졌는데 그것은 교리와 신조에 어긋나기 때문에 고친  것이 있습니다. '영 죽은 나를' 하는데 찬송에는 죽은 나로 돼 가지고 있던가  죽을 나로 돼 가지고 있던가? 그전에 찬송, 옛날 찬송? 죽을 나요? 죽을 나로 한  그것은 성경에 위반됐기 때문에, 아무리 작가의 가사지만 성경에 위반되기 때문에  성경대로 고쳐서 영 죽은 나를 구속하려 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너희를'  했으니까 과거사기 때문에 그거 고치고 다른 거는 고치지 안하고 그대로 지금. 뭐  세상이 자꾸 뭐 자꾸 변해 나가고 이래도 우리는 옛날 작가 그 찬송을 그대로  하자 이라다가, 또 그때 말하기를 '이거 안 됐다 자꾸 사람들이 지금 저거  마음대로 고쳐져 나가니 무슨 찬송을 내놓을지 모르니까 안 됐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찬송 만드는 이것을 만들어서 찬송을 하자 그렇게 의논이 약간 있다가 그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거는 성경대로 지은 찬송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거  성경대로 찬송입니다. 그래 가지고 성경 찬송을 해 가지고 예배 찬송을 이렇게  하자 이렇게 해서 지금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게 다 설명해 놨어. 우리가 무슨 독단, 통일 찬송을 지금 하는데  우리끼리 찬송을 이래 만들어 가지고 한다 말이 아니고 '다 그라니까 우리는 거기  따라갈 수가 없다. 따라갈 수가 없고 그라면 어떻게 변해 나갈지 모르니까 이렇게  변하니 나중에 가서는 뭐라고 변해 나갈지 모르니 우리는 옛날 찬송 지은 그  사람들이 지은 가사 그대로 우리는 우리가 보수하면서 찬송하겠다.' 하고  그대로에 보수 해서, 그것도 많이는 못 하고 예배 찬송으로서 이백일 곡을 택해서  우리가 찬송으로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찬송으로 쓴다고 제일 반대자들이 서울 교회 제일 반대자들이  서울 교회, 제이 반대자들은 모르겠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렇게 반대합니다.

 기독교는 보수성도 가지고 또 전부 변화성도 가져야 되는데 변화성은 조건이  있습니다. 변화성은 꼭 좋게만 개정성으로 할 수가 있지 아무나따나 변화하는  변화성은 못 가져옵니다. 또 보수성은 좋으나 보수성에도 조건이 붙는 것은  보수성은 꼭 성경대로 준해서 성경대로 옳고 바른 것만 보수하지 성경에 위반된  것은 그것은 아무리 많은 세월을 거쳐 왔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시 개정할 수가  있다, 성경대로 개정할 수 있다. 성경은 개정을 못 한다 이게 우리의  신앙들입니다.

 이래서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여덟 가지 행위를 했다. 여덟 가지 행위를  했는데,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아노라 했지 칭찬했습니까? 칭찬  안 했어. 부애가 났어. 주님이 분개했습니다. 분개할 것 아닙니까? 그거 자식을  그걸 참 일반 그만 부정 모혈로 낳은 자식도 자식 같으면 하지만 이것이 낳아  놨더니만 망령을 부려서 또 놀러 돌아다니가 원수한테 납치를 당해 가지고 그놈  찾느라고 고생을 당했지, 겨우 찾아다 놓으니까 이게 목욕하러 가 가지고 또 물에  떠내려가 죽어서 또 죽은 거 또 병원에 들여 가지고 또 살렸지.

 이러그로 해 가지고 낳은 이 자식을 '야야 내가 너를, 불량자들에게 가 가지고  끌려 가 가 그런 것을 내가 이리 이리 고생해서 살렸다, 물에 빠져 죽은 것을  내가 이리 이리 고생해 살렸다.' 이런 얘기를 하면 그거 '우리 부모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참 부모의 은혜가 다른 부모보다도 우리 부모는 이거 같은  부모가 아니라 참 이 은혜가 얼마나 감사한지.' 그 마음에 부모의 은혜를, 사랑을  감사해서, 다시는 그런 탈선 행위를 하지 안할까 이렇게 생각하고 과자도 사 주고  뭣도 사 주고 이라니까 이제 보고 이거 자랑하고 다닙니다. '이거는 봐라 나는  이런 게 있다.' 이거 제게 있다고 이거 자랑하고 다니고 이것만 보고 좋아서 이런  게 있다고 자랑하고 다니고 부모는 까마득히 잊어 버렸어. 그만 부모는  잊어버리고 자꾸 그것만 자랑하고 돌아다닙니다. 돌아다니면 자, 그 마음에 섭섭지  안할 부모 있으면 손 들어 봐요. 자식이 그래 할 때에 섭섭지 안할 부모 있으면  손 들어 봐.

 섭섭할 부모들은 손 들어 봐. 여기는 다 손도 안 드네. 안 섭섭할세. 얼마나  섭섭하겠어? 내가 비유를 잘 못 해 그렇지 그와 같은 성질의 것들이라 그 말이오.

 굉장합니다.

 이라니까 주님이 섭섭하셔. 자, 그라면 더 주겠소 안 주겠소? 안 줘. 여러분들!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그 사랑과 그 은혜 이것을 잊어버리고 하는 것은 천하  인간들이 다 찬성하는 의를 행했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 없소! 주님에게는 적이요.

 원수요. 다 똥보다 더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어디서 떨어졌습니까? 처음 사랑은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인데  사활의 대속을 버렸으니까 어디서 떨어졌습니까? 여기 여반에, 어디서 떨어졌어?  어디서 떨어졌어요? 그것도 몰라? 어디서 떨어졌어? 하나님의 사랑이 몇 가지요?  하나님의 사랑이 사죄 칭의, 화친, 또 부활로 하나님을 향한 영원한 소망 이 네  가지인데 네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사랑 네 가지를 버렸으니까 어디서 떨어졌지? 우리 O조사님?  어디서 떨어졌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으니까 어디서 떨어졌지? 그래 한번  대답해 봐요, O조사님 대답해 봐. 어? 어디서 떨어졌어? 아, 여덟 가지 행위 하는  데서 떨어졌다. 인제 그런데 이거는 그런 말이 아니고 어디 붙어 있다가 뚝  떨어진 걸 말하는 거라.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그러면 붙어 있던게 뚝  떨어진 걸 말하는 거라. 어디 붙었다가 떨어졌습니까? 예? 자, 네 가지에 붙었던  데에서 떨어졌습니다. 맞소 안 맞소? 네 가지 붙은 데서 떨어지면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완전 멸망이라. 사죄에서 떨어졌으면 어디라요? 사죄에 떨어지면  죄구덩이에 빠져 버렸지. 칭의에 떨어지면 불의에 빠져 버렸지. 화친에 떨어지면  어디 빠져요? 하나님의 원수에 빠져 버렸지. 하나님을 향한 소망에서 떡  떨어졌으니까 정반대의 마귀에게 소망하는 멸망으로 떨어져 버렸지. 그라면  희망이 있어요 없어요? 복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비참하고 비참해.

 '어디서 떨어진 것을 네가 알라. 알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처음 행위는 무슨 행위겠소?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 행위를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처음 사랑의 행위. 이러니까 처음 행위라 하는 건 어떤  행위냐 하면 처음 행위라는 것은 무슨 참고, 견디고, 의를 하고 뭐 하는 그런 것을  말한 것 아니오. 견디고, 게으르지 안하고, 뭐 거짓과 참을 드러낸 그런 행위  말하는 것 아니오, 무슨 행위겠습니까? '주님께서 나를 이 죄에서 영원히  해방시키기 위해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를 대형해서 이제 사죄해 주셨으니  감사하다. 내가 어떻게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를 죄에서 해방시켰는데  내가 무심히 장난삼아 죄를 범해? 나는 그럴 수 없다.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나를 죄에서 해방시켰으니 나도 이제 이 죄를 내가 죽기까지 대적하고 죽어도  인제는 죄에게 내가 가담하지 안하고 죄를 용납지 안해야지. 죽어도 죄 없는 자로  살아야지.' '내가 죽어도 내가 의를 놓지 안하고 내가 의에서 살아야지. 내가 목을  끊긴다 해도 하나님 다시 배반하지 안하고 하나님 모시고 살아야지' '온 천하가  나를 절망 가운데 파묻는다 할지라도, 절망 절망 수십 층어리 절망 속에 파묻혀도  나는 거기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당신을 소망합니다! 당신은 나의  전부입니다! 온 천하가 나를 절망 속에 파묻어도 당신은 나의 소망입니다! 나는  당신 한 분으로서 나는 소망 이요 나는 만족이요 나는 충만이다!' 하는 이것이  처음 행위입니다. 이것이 처음 행위. 이것을 당신이 원해요. 이것만 하면, 이거  하면 공산당 이기기는 누가 해 줘요? 누가 해 줘요? 우리가 공산당 이길 수  있어요? 못 이겨요. 이것만 하면 이기게 해 줘요. 이기게 해 줘.

 이라면 예수님의 사죄가 왔으니까, 사죄가 왔으니까 마귀 죄 왕이 우리에게 와서  왕노릇 해요 못 해요? 왕노릇 해요 못 해요? 왕노릇 못해요. 내가 안 한다 하면  그만이지 제까짓 놈이 나한테 강제 못 해. 요 비밀을 아십시오.

 자, 죄가 왕노릇하면 그 사람이 먼지만한 죄라도 제가 이길 권리가 있어요  없어요? 백성이 강해요 왕이 강해요? 왕이 강해요. 예수님의 대형의 사죄를 내가  벗으면 죄는 즉시 나에게 왕이 됩니다. 나는 그 죄에게 복종을 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털끝만한 죄도 이기는 자가 없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도, 의를 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대행의 칭의로 의를 해서  하나님과 나와의 하나돼서 하나님의 공심판이 나를 인정하는 자가 됐으면  공심판이 인정하는 자가 됐으니까 모든 의는 내것입니다. 모든 의는. 전지  전능자가 내게 와 가지고, 전지 전능 완전자가 내 속에 와 가지고, 내 속에 와  가지고 역사를 하는데 전지 전능자가 내 속에 와 가지고 역사를 하니까 내가  말한 것이 전지 전능자의 말이요 내가 행동한 것이 전지 전능자의 행동인데,  행동인데, 이분이 아니고는, 전지 전능자가 아니면 털끝만한 의라도 멸망치 안할  의를 할 수 있어 없어? 요것도 여러분이 말로 그래 할 게 아니고 깊이 느껴봐야  돼.

 자, 털끝만한 의라고 그 의는 멸망을 시킬 수가 있어요 없어요? 예? 털끝만한  작은 의라고 그걸 멸망시킬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시키요. 마귀와 이 모든  피조물이 멸망을 시킬래야 멸망을 시킬 수도 없고 창조주도 멸망을 못 시켜. 의를  창주주가 멸망시킬 수 있어요 없어요? 못 시키요. 창조주도 멸망 못 시키고  피조물도 멸망 못 시키는 것은 의가 크다고 그런 게 아니라 작은 의도  그러합니다. 이것을 믿어.

 작은 것도 그러하는데 이 의는, 의라는 것은 완전한 것인데 완전한 것은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만들 수 있어요 없어요?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을  만들 수 있어요 없어요? 못 만들어요. 완전한 것만이 완전을 만들 수가 있지요.

 지극히 작은 의라도 완전자만이 만들 수 있지 완전자가 아니면 만들 수가  없어요.

 예수님의 사활의 그 대속, 칭의의 대속을 내가 믿으면 나는 의에 완전자가 돼요.

 하나님과 연결돼서 하나님의 충만은 내게 와 가지고 내 안에서 역사해요. 내  안에, 내 안에 내가 돼 가지고 역사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너희들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알리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셔서 역사하시는 역사를 봤습니까 안 봤습니까? 본 사람들  손 들어 봅시다. 못 봤는가배? 왜 못 봤어? 다 봤지. 여러 수만 번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들 모양으로 보고도 못 봤다 보고도 못 봤다, '요번에만 보고 내가  다시는 믿지요' 이게 시험하는 거라. '너희들이 알리라' 했어. 너희들이 알리라.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알리라. 이랬어.

 이라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자기가 믿는 요 믿음을 가지면, 사활의  대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면 사활의 대속은 누구하고 결합을 시키요? 사활의  대속은 어디다가 당글어 매요? 하나님께 볼끈 당글어 매 버려. 하나님께.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은 나를 죄 없는 데 볼끈 당글어 매고, 의로운 데 볼끈  당글어 매고, 하나님하고 한덩어리 되도록 볼끈 당글어 매고, 하나님만 소망해  사는데 볼끈 당글어 매니까, 거게 볼끈 당글어 매니까 이것은 전부 이것밖에는 될  수가 없어.

 이런데 '처음 사랑을 버렸는고로 네가 어디서 떨어진 것을 알라. 그래서 네가  처음 행위를 하라.' 처음 행위를 하라. 그러면 처음 행위를 하라 말은 이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해 주셨으니 내가 의롭게 살아야 되겠다 하고 그렇게 이제  하나님이 나를 구속한 사랑을 생각하고 이제 이런 거 저런 거 모든 의로운  행위를 하라고 하는 그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까? 의로운 언행심사의 행위를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그 행위를  하라는 것입니까, 감사하고 감사해서 그 사랑에 감격해서 이런 저런 모든 세상  생활 이런 행동을 하라 말입니까 그 사랑에 감격한 그 행위를 하라 말입니까?  찬양하고 감사하는 그 행위 하라 말입니다.

 그 행위 하면 그 행위에 감격하면 죄는 지을 수 없어 안 지어. 의는 죽어도 안  할 수가 없어 해. 의 하는 게 목적이 아니고 구속하신 그 사랑을 생각하고 거게  감격하고 거게 감사해서 이렇게 주님이 사랑을 이래 하기 때문에 자기는 안 할  수 없는 그것으로서 하는 거라. 그게 하라는 일이 아니라.

 이래서, 처음 행위를 하라는 것을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에 감사와 찬송하고 거게  감격한 그 행위를 하라는 것이지 이제 이런 저런 일을 하라는 그것도 좋지만  그것은 이제, 자동차가 지내가면 먼지가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일어나요. 그거는  먼지라. 먼지 한가지라. 주님의 대속의 이 사랑에 감격해서 거게 감격하고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 모든 행동은 죄 없는 행동이요. 의로운 행동이요, 빛의 행동으로  되어지는 그것은, 차가 지나가니까 먼지는 필연적으로 나지. 필연적으로 나.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이 대속을 자기가 생각 하고 기념하니까 그  기념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은 저절로 돼져.

 '내 피를 기념하라 내 살을 기념하라' 그말은, 기념하라 말은, 기념하라 말은 뭐  하라 말입니까? 예수님이 사활로 대속한 것을 기념하라 말은 사활의 대속하신  것은 그것은 자, 내가 대답할 터이니까 여러분도 다 답을 해 봐요, 속으로. 사활의  대속한 것은 원형, 근본 형체 원형. 기념하는 것은 뭐이요? 모형. 기념하는 거는  모형. 예수님이 사활의 대속하신 그 대속하심과 같은 그것을 기념하라 말이오.

 그런 행위를 하라 그 말이오. 이것이 제일 중요해서 첫째 말해.

 이제 이러니까 이거 뭐 일곱 교회를 다 가르칠라, 여러분들이 이것은 그냥 말고  자꾸 가서 재독을 듣고 설교록을 자꾸 읽으십시오. 여러분들과 지금 거리가 멀기  때문에, 여러분들의 주관과 너무 거리가 멀기 때문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 자, 다  잠깐 기도합시다.

 주님, 이제 계시해 주신 이 계시의 말씀과 우리의 지식과 주관과 본능과 이  심신의 정력 전부가 똘똘 뭉쳐 하나되어 주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고 주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주님의 모형 생활이 되어지도록 은혜를 주시고 하나도 헛되이  받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래서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인 이 교리 신조를 올바로 깨달아 가질 때에  인간병은 다 절단나고 고기덩어리의 병도 다 절단나고 생활병도 다 절단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주님과 저희들과 하나되어 있는데에는 빛 가운데는 어두움이  근방에 오지도 못하는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이 은혜로 영육에 충만함을 받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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