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1 22:54
예수님의 사활
1984. 4. 25. 수야
본문: 로마서 6장 5절∼11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제 9공과.
본문 : 로마서 6장 5절로 11절.
제목 : 예수님의 사활.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들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함이니라 (고린도후서 5장 15절) 공과를 가지신 분들은 다 펴 가지고 보시면 좋습니다. 다음 주일 공과입니다.
서론 : 기독교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영생케 하는 하나님의 구원이다, 기독교 외에는 인생을 죽음에서 벗어나게 하고 영생케 하는 길은 없다. 중생 못한 사람은 원죄와 본죄로 죽은 사람이 완전히 죽는 것이 세상이다. 세상을 끝내면 영원한 사방 지옥에 가서 멸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중생함을 입은 사람은 죽은 사람 속에 영생하는 속사람 이 살아나는 것이다. 그런고로, 죽은 겉사람과 영생하는 새사람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나 죽은 겉사람대로 살아 완전히 자기를 죽이는 세상으로 살고. 지혜 있는 사람은 현실에서 옛사람 자기를 죽이고 영생을 가진 새사람 자기로 살아 영생과 천국 실력 성장을 하여 가는 사람도 있다.
본론 :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우리 사람들은 누구나 원죄와 본죄로 인해 영원히 마귀와 죄와 사망의 것이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 택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셨다. 하나님으로서도 권세로는 죄를 멸하지 못하셨다. 하나님의 진리 법이 있기 때문에 죄값은 사망을 받아야 죄와 사망과 마귀의 일은 멸해진다. 그런고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셔서 우리 대신 죽으심으로, 완전히 죄 사망, 마귀를 정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구속받은 우리는 이 사랑을 깨닫고, 죄와 마귀와 사망과 하나되어 움직이는 옛사람을 나 아닌 나 원수임을 깨닫고 이 놈을 꺾고 죽여 얼씬 못하게 하여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일에 몸과 마음 생명을 다 바쳐야 한다.
둘째. 또 죄 짓지 않는 자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하나님 모시고 사는 자로 사는 데에 몸. 생명. 마음. 힘. 소유 바쳐 죽는 그 시간까지 계속하여야 한다. 그런고로. 기독자는 누구나 죄, 사망, 마귀를 멸하는 일에 자기의 전부와 생명을 바쳐야 하고, 또 죄 짓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하나님 모시고 사는 데에 내 모든 것을 다 바쳐 살아야 한다. 하나님이신 주님이 다 바쳐 이루어 주신 구원을 내 무엇이 아까와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안 된다, 셋째. 위 두 가지 투쟁 생활 속에 그리스도의 구속과 성령과 진리로 살아난 영의 사람 새사람, 다시는 늙지도, 죽지도. 고통도 없는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이 영생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참사람이다. 이것을 가리켜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로 살라고 하신 것이다. 위 첫째 둘째의 결사적 생활만 계속하면. 그 속에서 새사람은 영생으로 자라간다.
문답. 중생 안 된 사람은 세상에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냐 죽는 것이냐? 답에, 매일 매일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몇 가지 생활이 있느뇨? 답에, 죽어가는 생활, 영생을 이루어 가는 생활 이 둘이 있다.
셋째. 참 믿는 자는 몇 가지 죽음을 각오하여야 하느뇨? 답에, 두 가지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넷째. 두 가지 죽음은 무엇이냐? 답에, 옛사람과 죄와 마귀를 죽이는 일과 또 죄 짓지 않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 죽음을 각오하는 이것이다.
다섯째. 영생하는 새사람은 어느 속에서 자랄 수 있느냐? 두 가지 죽음을 각오한 승리 생활 속에서 자라간다.
지난 주일에도 이 말씀을 증거했습니다. 여러분들이 그 줄기만 꼭 잡고 놓지 아니하면 차차 새김질을 하면은 깨달아지고 알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줄기와 해석을 혼합해 놓으면 그만 기억도 못 하고 도리어 실패하기 쉬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셨는가 그 죽으심을 본받아서 우리도 죽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우리도 죽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하신, 죽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되어 가지고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사는 자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죽으심은 두 가지 죽으심이니 우리도 두 가지 죽음을 예수님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뒤를 이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도 두 가지 죽음을 각오하고 두 가지 죽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에 연합해 가지고 우리도 다시 살아난 자로 영원히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 못 박히실 때에 몸만 죽으셨지마는 우리는 원죄와 본죄로 인해서 영이 죽고 몸은 살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에 연합한 자로 우리가 살면,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서 예수님의 죽으신 그 죽음에 연합해 가지고 그 생활을 하면 그 생활 속에서 영생하는 새사람이 자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이 있어야 고기가 사는 것처럼 우리 중생된 새사람은 어데서 살아서 자라가는고 하니 이 두 가지 죽음 생활을 하는 그 죽음 생활 속에서 살아서 자라가게 됩니다. 마치, 이런 초목이라는 이 식물들이 땅이 없으면 못 삽니다. 땅이 있어야 땅에 뿌리를 박고 자라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새사람은 두 가지 죽음 속에 뿌리를 박고 살아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한다고 해도 이 두 가지 죽음이 없는 사람 속에는 중생된 새사람이 거기에서 자라가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요 세 가지를 단단히 기억합시다. 예수님의 두 가지 죽음을 우리가 연합해서 두 가지 죽음을 계속하고 있는 고 계속하는 고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은 연한 순같이 자라서 속성하게 됩니다. 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중생은 하기는 했지마는, 중생은 했으니까 죽지 안하고 영생하는 생명을 가지고 있기는 있지마는 이 두 가지 죽음 생활이 없는 사람 속에 있는 영생하는 생명을 가진 새사람은 자라지를 못합니다. 죽지는 않고 영생을 가지고 있기는 있지마는 자라지는 못합니다. 마치 흙이 없으면 식물이 자랄 수 없는 거와 같이, 물이 없으면 물에 사는 고기는 거기서 자랄 수가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은, 이 사람은 다시 죽지않는 사람입니다. 또 영생을 가진 사람입니다. 늙지도 쇠해지지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으로 우리가 벌써 속사람은 중생돼 있습니다. 다 같이 한날에 중생을 했다 할지라도 사람은 두 가지 죽음을 계속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비유컨대 옥토 같기 때문에 중생된 사람이 빨리 자랍니다. 그러나 중생된 자는 오래됐지마는 두 가지 죽음이 없으면 흙이 없는 돌짝밭과 같기 때문에 거기에서는 중생된 새사람이 자라지는 못하고 언제든지 고대로 그저 생명만 유지하고 있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하나는 죄의 벌을 받아서 죄의 값인 그 형을 받아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으로 죽으셨습니다.
죄값을 예수님이 내지 안하시면 우리는 그 죄에게서 해방을 받지 못하고 마귀에게서, 사망에서 해방을 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그 형벌을 받으셨으니까 그만 죄의 형벌 다 받으셨으니까 죄는 볼일 다 봤습니다. 죄의 값을 예수님이 대신 받았으니까 우리에게는 더 죄가 요구할 수도 없고 죄가 없으니까 사망도 권세를 부릴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된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심은 죄의 값을 받아서 죄값이 남아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죽으셨으니 죄값이 남아 있지 않도록 죽으시는 것은 죄값이 없어지면 죄도 없어지고 사망도 없어져 버립니다. 그만 마귀도 거기에서는 용납을 못합니다. 죄가 없으면 사망도 그만 그거는 아무 힘없는 것이요, 또 마귀도 거기에는 거처를 할 수가 없는 것이요, 죄의 형을 받았으면 죄는 그 자리에서 녹아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죄와 마귀와 사망으로 더불어 싸워서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이런 것을 다 전멸을 시켰습니다. 예수님이 죄값의 이 죽음을 당하지 안했으면 죄는 그대로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죄가 남아 있으면 사망도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죄와 사망이 남아 있는 데는 악령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안하고 그 자리에서 생생히 왕 노릇을 하고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의 값을 받고 나니까 그만 죄는 더 형을 할 수 없다 말입니다. 죄를 지은 죄값을 주님이 받으셨으니까 그만 형을 할 권리가 없습니다. 본인이 돈을 쓴 것을 다른 사람이 대신 착 다 갚아 버리면 그 전주는 더 돈을 받을 권리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신 갚아서 다 받았으니까 더 청구할 것이 없습니니다.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죽으심의 하나는 마귀와 죄와 사망을 멸하기 위해서 죽으신 이 죽음을 우리도 죽어야 됩니다. 죄를 대적해서 죄를 멸하기 위해서, 내가 죽으면 죄는 살아나고 죄가 죽으면 죄에게 사로 잡혔던 사람은 살아나게 됩니다.
죄를 완전히 멸하는 이 일에, 또 마귀를 완전히 쫓아 내서 물리치는 이 일에, 사망을 완전히 물리치는 이 일에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대항해서 싸워야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의 하나입니다.
주님이 죄값으로 죽었다는 것은 세 가지 죄를 늘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죄, 제 주장으로 산 죄,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 이 세 가지 죄로 인해서 마귀도 사망도 죄도 세력을 부리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지공법에서 그 죄의 값을 쏵 형으로 다 받고 나니까 그 죄는 볼일 다 봤습니다. 마귀도 거처할 수가 없습니다. 사망도 거기는 깨져 버렸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를 대항해서 싸워서 이 세 가지를 멸하는 이 일에 우리는 있는 생애를 다 바치고 이 일을 하다가 끝을 마쳐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 예수님이 대신 형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형 받을 거는 없고, 예수님은 형을 받아서 죄와 사망과 마귀를 멸했는데 예수님의 공로를 우리에게 입혔기 때문에 우리는 내 안에 있는 마귀 이웃 속에 있는 마귀, 내 안팎에 있는 죄 이웃의 안팎에 있는 죄, 내기에 있는 사망 권세 이웃에게 있는 사망 권세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결사적으로 노력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게 한 가지 죽음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이것들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도 죽는 죽음을, 자살은 하는 것이 아니고 그걸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서 우리는 살아야합니다. 그러다가 이 일 하다가서 끝맺어 죽어야합니다. 한 가지 죽음. 이 죽음을 힘을 쓰면, 이것을 죽이기 위해서, 이것을 멸하기 위해서 우리의 소유도 바치고 몸도 바치고 우리 전부를 바쳐서 이 세 가지를 멸하는 이 일을 하면 중생된 새사람이, 영생하는 새사람이 무럭 무럭 연한 순 같이 자랄 수 있는 참 영양 많은 옥토의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죽음은 죄 없는 자 되기 위해서, 죄를 범하지 않는 자 되기 위해서 죽기까지 우리는 힘써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이 복종을 하기 위해서 죽기까지 힘써 복종해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는 화친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기까지 힘써 가지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 생활을 계속 해야 됩니다.
그러면, 이 화친을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야 됩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 야합니다.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우리는, 이 세 가지, 하나님과 화친 생활. 하나님 모신 생활. 하나님께 복종 생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죄를 범하지 않는 생활 이 세 가지 생활을 인해서 또 죽는 죽음을 가져야 됩니다. 한 죽음은 멸하기 위해서 죽고, 한 죽음은 살기 위해서 죽습니다. 한 죽음은 멸하기 위해서 죽고, 한 죽음은 의인으로 살기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살기 위해서. 죄 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죽음을 취하는 것입니다. 죽기까지 이 세 가지를 힘 씁니다. 그러면, 이것이 예수님의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한 것입니다.
하나는 멸하기 위해서, 하나는 이것을 다 깨뜨려서 다 멸망시키기 위해서, 이 셋을 다 멸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귀의 일을 멸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왔다고 했습니다. 사망을 멸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멸하는 데에 우리 소유와 몸과 젊음과 힘과 총명과 전심전력. 생명을 기울여야 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죽는 생활을 각오해야 됩니다.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또 하나는 사는 생활을 위해서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죽을 힘 다해서 살아야 됩니다. 생명을 다 바쳐서 살아야 됩니다. 어떻게? 죄 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바쳐야 됩니다. 시대 시대마다 죄를 지으라고 하고 죄를 지으면 그 사람을 칭찬도 하고 도와도 주고 이렇게 하는데, 죄 짓지 않을라 하면, 죄를 짓지 않을라 하면 감옥에도 가두고. 죄 짓지 않을려고 하면 사형도 시키고합니다. 모든 역대의 순교자들은 죄만 지으면 놔 줄라 했습니다. 죄를 안 지을려고 하다가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일을 그만 두라고 해서 '예' 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일을 그만 중단하면 안 죽을 터인데 중단을 안 하므로 불미 속에도 던짐을 받았고 사자굴에도 던짐을 받아서 죽음 속에 던짐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라고 할 때에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 모시고 살라고 함으로, 하나님 내놓으라 내놓으라 해도 안 내놓으니까, 마지막에는 우리의 생명도 그들이 끊을라고 달라들때에 생명을 끊겨도 하나님을 내주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또 한 가지 죽음입니다. 그러면 두 가지 죽음, 이 두 가지 죽음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육신은 이 살이 있고, 내장, 껍데기, 살, 근육, 살이 있고 또 그 속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 고기 덩어리 속에는 마음이 붙어 있습니다. 고기 덩어리가 없으면 마음이 유지를 못합니다. 고기 덩어리가 썩으면 마음은 영계로 가 버려야 됩니다. 또 마음이 없으면 중생된 영은 머물지를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제일 우리의 신앙에 제일 껍데기가 뭐이냐? 제일 껍데기 이 피부와 같이 제일 껍데기가 뭐이냐? 껍데기는 이 세 가지를 멸하는 멸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기독자의 제일 꺼풀 피부와 같은 것입니다. 또 이 세 가지로 사는 것, 이 세 가지로 사는 것이, 죄 없이 사는 것, 하나님에게 복종으로 사는 것, 하나님 모시고 사는 것이 세 가지 사는 것이 속에 뼈와 근육과 골수와 같습니다. 그라면, 그 속에 이것이 있으면 생명이 그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암만 젊은 사람이라 생명이 젊은 생명이 있다 할지라도 그만 그 피부만 싹 벗겨 버리면 속에 있는 생명은 그만 죽어져 버립니다. 피부가 있다 해도 속에 또 이 모두 뼈니 근육이니 골수니 이런 것이 없어도 생명이 그만 살 수가 없습니다. 짐승을 한 마리 잡아 놓고 그 껍데기를 다 벗겨서 없애 버리면 그 짐승 죽습니다. 껍데기가 있다 할지라도 그 속에 이 근육, 이 모든 내장 이런 것이 없어도 또 죽습니다. 꺼풀과 모든 근육과 내장이 있어야 그 짐승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생명이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영생을 가 진 그사람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영생을 가진 그 사람으로 현실에서 한 현실 한 현실 살면 하늘에 가서 영생하는 사람의 실력이자꾸 자라가고 그 사람의 기능이 자꾸 자라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껍데기 두 가지가, 아주 겉 껍데기 속 껍데기 이 두 가지가 없으면 그 속에 새생명은 자라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겉사람, 속사람, 또 중생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영의 사람 이렇게 우리도 세 껍데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생활을 우리가 해야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생활을 하는데 어데까지 할 것이냐? 죽기까지 해야 됩니다.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한 이 생활을 하려고 하면 우리 소유도 몸도 생명도 다 내놓지 안하면 못합니다.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됩니다.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자가 되면 또 주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죽으신 이 두 가지 종류의 죽으심에 우리가 연합해서 죽는 일 안 죽어도 아예 생명을 내 놓는 각오를 가지고, 죽을 각오를 가지고 '날마다 죽노라' 하는 것은 뭐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몸과 생명 다 바쳐서 벌써 결사단입니다. 모든 걸 다 바쳐서 이 세 가지를 멸하기로 각오하고.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멸하기로 작정하고, 이러니까 그 자기의 전부를 다 들이는 그 죽음. 또 하나는 살기 위해서, 이 세 가지로 살. 이 세 가지를 살리기 위해서, 세 가지로 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또 삽니다.
이러니까, 껍데기를 인해서 죽음의 각오 또 그 알맹이를 위하여 죽음의 각오.
두 가지 죽음의 각오로. 각오뿐만이 아니라 두 가지 죽음의 각오로 죽음에서 죽음의 생활을 함으로, 죽음의 생활을 함으로 죄가 멸해지고 마귀가 멸해지고, 사망이 깨어지고, '자기에게 해당되는 것은 다 깨 버리고, 또 죽음을 각오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을 다 제물로 바쳐서 살므로 죄 없는 자로 살아가게 되고, 또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로 자라가게 되고,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자라가게 되니까 요 셋을 살리고 기르기 위해서 죽는 죽음,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 멸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이 제일 껍데기, 세 가지로 살기 위해서 죽는 죽음이 알맹이. 이 껍데기와 알맹이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한 영생하는 그 사람은 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죽지 않소. 이 사람은 죽지도 않고 이 두 가지 이 생애 속에, 두 가지 신앙 속에, 두 가지 인격 속에, 두 가지 이 깨끗 속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은 그 가운데서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 아니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이 우리의 영인데, 우리 영은 내이지마는, 내이지마는 내가 결사적으로 이 셋을 죽이는 일을 하지 안하면 중생된 그 영을 만나 보지 못합니다. 이 세 가지를 살리기 위해서 결사적으로 노력하는 이 생명을 바치지 안하면 중생된 새사람을 만나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천하를 얻어도 무슨 유익이 있느냐' 하는 자기를 잃는다 그 말은. 왜 천하를 말했습니까? 사람들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것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취하기 위해서 자기를 잃어 버렸습니다. 왜 잃어버립니까? 몇 가지가 없어서 중생된 새 사람을 잃어 버렸습니까? 중생된 새사람 자기를 잃어 버렸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자기를 잃어 버렸습니까? 영생하는 참자기를 잃어 버렸습니까? '자기를 잃든지' 했는데, 뭣이 없어서 잃어 버렸습니까? 뭣이 없어 잃어 버렸지요? 죽음이 없어서 잃어 버렸습니다. 죽음이라니? 몇 가지 죽음?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소. 두 가지 죽음이 없어서 잃어 버렸습니다. 한 가지 죽음은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나는 생명 바쳐서, 멸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한 죽음. 생명을 아끼면 이놈을 죽이지 못합니다. 이놈을 죽여서, 생명 내놓고 이놈으로 더불어 싸워서 죽여도 생명이 끝퀼 시간이 안 되면 일 분 일 초라도 일찍 죽는 거는 아닙니다. 사람이 어리석어 겁이나 그렇게 하지. 그렇지 않소. 일 분 일 초도 뭐 일찍 죽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이놈을, 세 놈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결사적으로 각오하고 생명을 바쳐서 이놈을 멸하는 일을 하고, 생명을 바쳐서 이 세 가지를 살리는 일을 하고, 세 가지 살리는 일 한 이것이 영생 아닙니다. 세 가지 살리는 일 한다고 이것이 새사람 아니오. 세 가지 살리는 일 한 이거는, 이거는 죽습니다. 세 가지 살리는 일을 해도 죽습니다. 그런 가운데에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돼서 악한 자가 가까이 오지도 못하고 악한 자들이 만지지도 못하는,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영, 참사람이 거기에서 죽기까지 해서 세 가지를 살려 놓은 그걸 뜯어 먹고 삽니다. 알겠습니까? 죽기까지 해서 세 가지를 살려 놓은게 있지요? 세 가지 살려놓은 거 그거 먹고 삽니다. 또 세 가지 살려놓은 그거는 세 가지 죽인 그거 먹고 삽니다. 세 가지 죽인 그것을 세 가지 산 그것이 뜯어먹고 살고, 그거 뜯어먹고 세 가지 산 그것을 중생된 새사람은 그것을 뜯어먹고 삽니다. 그것이 전부 진리 덩어리요 영감 덩어리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 덩어리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말로는 암만 해도 이래밖에는 못합니다. 자기가 이 두 가지 죽음을 죽으면 이 두 가지 죽음으로 이 세, 가지를 죽이고 세 가지를 살립니다.
죽음을 가지고 세 가지를 죽였는데 세 가지는 죽고 아직까지 기한이 있으면 남아 있습니다. 안 죽고 남아 있습니다. 세 가지를 죽음으로, 이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죽었는데 기한 이 차지 안했으면 살아 있습니다. 세 가지를 죽이기 위해서 생명을 바쳤는데. 다니엘이 죄 짓지 않는 사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사람으로, 하나님과 화친한 사람으로 생명을 내놓고 이 세 가지 사람으로 살았는데 사자 구덩이에 집어넣었지마는 생명이 끝나는 시간이 안 되니까 사자가 먹지 못하고 거기에서 나왔습니다. 불미 가운데에 넣었지마는 불이 태우지를 못하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생명을 다 바쳐서 세 가지를 멸했습니다. 그들은 죄를 멸했습니다. 마귀를 멸했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멸했습니다. 무죄를 살렸습니다. 하나님께 복종을 살렸습니다. 하나님과의 화친을 살렸습니다. 이렇게 살려놓은 그것을 먹고서 자라가는 것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사람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사망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다음 주일 공과는 여러분들이 공과를 가서 읽어 보면 알지마는 요게 제일 요긴한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죽이는 데에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서 죽음의 각오를 가지고 이 세 가지를 멸하는 고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이 세 가지를 살리는. 이 세 가지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전부를 다 바쳐서 사는 그 생활을 계속 하는 그 두 가지 죽음 계속 속에 고게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이 자라 갑니다. 고게서 하나님의 아들이 자라갑니다. 하나님의 속성 같은 인격이 자라갑니다. 거기에서 영생하는 사람이 자라갑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다 통치할 수 있는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 노릇하는 이 참사람이 거기에서 무럭 무럭 자라가고 있습니다. 뭣 먹고 자라? 죄를 멸하고 죄 없는 그것을 먹고 자랍니다. 사망을 멸하고 하나님께 복종한 이것을 먹고 자라갑니다. 마귀를 멸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이것을 먹고서 자라가는 것이 중생된 새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힘쓸 것 아닙니다. 중생된 새사람으로 사는 새사람은 우리의 몸의 주인 이고 마음의 주인입니다. 주인이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영보다 낮은 것이요 영에게 소속한 것 들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생활 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이 애쓰느냐? 몸이 애를 쓰고 마음이 애를 씁니다. 다시 말하면 심신의 육이 애를 쓰고 있습니다. 심신의 육이 애를 쓰는데 어떻게 애를 쓰느냐? 이 심신이 죽을 각오라 말은 이 심신 전부가, 이 심신 전부가 죄를 멸하는 뭉텅이요, 사망을 멸하는 뭉텅이요, 마귀를 멸하는 뭉텅이요. 죄를 없이 한 뭉텅이요, 죄없는 뭉텅이요, 하나님께 복종하는 뭉텅이요, 하나님과 화친한 뭉텅이니 이 뭉텅이가 영입니까 육입니까? 이 뭉텅이가 영입니까 육입니까? 자, 이 뭉텅이가 세 가지를 멸하고 세 가지로 살아 계속 하고 있는 이것은 세 가지는 죽이고 세 가지는 산 이것은 육의 뭉텅이입니까 영의 뭉텅이입니까? 자 영의 뭉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봅시다. 하나도 안 들고, 그러면.
육의 뭉텅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봅시다. 여기는 와 안 들어? 알기는 아는 모양인데 여러분들이 뭐 신학 박사보다 낫소, 아닌게 아니라. 그렇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이 육의 뭉텅이입니다. 육체라는 이 육체 뭉텅이입니다. 육체의 뭉텅이가 이 여섯 가지를 겸한 육체의 뭉텅이가 돼야 거기에 중생된 영이 그 속세 자리잡고 주인공으로 왕으로서 거기 삽니다. 이 사는 영 속에, 영 속에 진리와 하나님이 거기에 계셔서 성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걸 굳게 잡아야 됩니다.
그저 우리가 자꾸 세상의 과학을 연구하는 것도 좋지마는 자기를 연구하는 것이 둘째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연구하는게 중요하고 둘째로는 자기를 연구해서 내가 요라니까 사나 저라니까 사나? 또 내가 요렇게 하니까 뭐이 되나? 저렇게 하니까 뭐 이 되느냐? 이래서, 성경을 가지고 자기를 연구하고 하나님을 연구해서, 우리가 말로는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나님의 것이라, 하나님 종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의 지체가 되면 세 가지 멸하고 세 가지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지체요, 하나님의 몸이요, 하나님의 성전이요, 그 속에는 중생된 영이 내주하고 영 안에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간단하게 다음 주일에 요걸 가르쳐서 학생들도 비겁한 학생들 만들지 말고, 못난 학생들 만들지 말고, 과거 역사에 보면 노인들 순교자가 적습니다.
노인 순교자가 적고 청년 순교자가 많고, 청년 순교자보다 소년 순교자가 제일 많습니다. 소년 순교자. 깨끗해. 깨끗하고 또 그들이 다 진리를 바로 들었기 때문에 생명을 아끼지 안해.
이러니까, 겁내지 맙시다. 기한 전에는 일 분도 세상이 봤리 죽일 수도 없고 일 분도 더 지체도 하게 못합니다. 공연히 어리석게 겁내지 말고 이 두 가지 죽음의 용사가 됩시다. 두 가지 죽음의 용사. 이 세 가지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죽음을 각오해야 됩니다. 이 세 가지를 멸하다가 죽어 버렸으면 승리입니다.
할렐루야입니다. 뭐 백 년 살다 죽으나 십 년 살다 죽으나 이 세 가지를 멸하는 생활로, 멸하는 생활로 끝을 마쳤으면 그 사람은 승리입니다. 이 세 가지를 멸하는 생활을 하다가 이 세 가지를 멸하는 생활을 계속하지 못하고, 세 가지 멸하는 생활을 과거에는 많이 했지마는 세 가지를 멸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세상을 마쳤으면 그 사람은 비참한 사람입니다.
세 가지를 살리는 이 일을 위해서 생명을 바치는, 이 세 가지를 살리는 일을, 죽음 앞에서도 이 세 가지를 살리고 불미 앞에서도 세 가지 살리고 사자 앞에서도 이 세 가지를 살리고, 공산주의 앞에서도 이 세 가지를 살리고, 어떤 세력 앞에서 세 가지를 살리고 이 세 가지를 살리는 이 일을 모든 거 돌보자 안하고 전부를 다 기울여 이 세 가지를 살리는 일을 계속 하다가 세상을 딱 끝마쳤으면 마귀는 볼일 다 봤습니다. 고만 더 우리를 시험할 수 없소. 완전한 승리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한 것같이 그만 승리자입니다.
이려니까, 이렇게 세 가지 멸하고 세 가지 살리는 것이 예수님의 피에 팔린 주의 것 되는 것이요. 이것이 주님에게 복종하는 종이요, 이것이 주님을 모실 수 있는 성전이요.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하고 기도 많이 하시고 어짜든지 우리가 요 일을 자꾸 계속하고 연습해서 지극히 작은 데서부터 연습해 가지고 작고 큰 것을 양보하지 말고, 하나도 양보하지 말고 죽일 것은 꼭꼭 다 죽이고, 살릴 것은 꼭꼭 다 살려서 하면 요런 가운데서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새사람은 활개치면서 참 잘 먹고 물씬 물씬 자라게 됩니다. 이 공과를 외우도록 하십시오.
다 같이 기도하다가 통성으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