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사활

 

1984. 4. 22. 주일오전

 

본문: 로마서 6장 5절∼11절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오늘은 세계가 다 부활을 기념하는 특별히 부활 주일로 그렇게 정하고  지킵니다. 또 지방마다 부활 연합 예배도 드리고 그렇게 합니다. 부산서도 여기  공설 운동장에서 부활 연합 예배를 드렸는데 우리 교인들도 가서 많이 참석한 줄  압니다. 부한 연합 예배, 또 성탄 연합 예배 그런 연합 예배는 가서 참석을 해서  같이 연합 예배에 은혜를 받고, 또 그것이 하나의 복음 운동의 시위도 되는  것이니까 그런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인연해 가지고서 쓸데없는  연합이라는 그런 연합에 미혹을 받아서 신앙생활에 지장되는 그런 연합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합이라고 다 좋은 것 아니고 나쁜 것  아니기 때문에 그럴 때는 구역장에게나 장로님들에게나 또 전도사님들에게나  저에게나 물어서 그런 것을 하고, 생전 가지 않던 그 첫길을 자기 생각대로 벌로  발을 내디디면 위험에 빠져 가지고 크게 손해보기 쉽습니다.

 오늘을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 주일로 이렇게 지키기로 하고, 또 부활 연보도  우리가 봉투를 내줘 가지고 모두 연보합니다. 부활 연보는 우리에게, 주님이  탄생하신 날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큰 구원이 열려졌으니까 기쁨의 날을  축하하는 성탄 연보도 하고, 또 주님이 죽으셨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신 이 부활도  우리에게는 큰 구원을 주시는 기쁜 일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또 감사  연보도합니다. 이래서, 부활 연보하는 그 연보는 우리 본 교회 운영에는 한 푼도  안 씁니다. 다 다른 어려운 분들을 돕는 그 일에다가 다 씁니다. 또 오늘 연보  낼 부활 연보도, 우리 본교회 뭐 지금 좀 빚이 있습니다. 빚이 한 이천여만 원  있습니다. 이자 나가는 빚이 이천여 만 원 있지마는 그런데 쓰지 안하고, 또 이  연보는 성탄 연보와 같이 그 어려운 형제들을 돕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조금이나마 나타내는 그런 일을 하는 데에 씁니다.

 그런데, 주일이라고 하는 주일은 어떤 날인고 하니 주일은 다 주님의 그  죽으심을 기념하는 날이요, 또 주님의 부활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기념한다는 말은 지나간 그 일을 우리들이 나타내는 것을 가리켜서 기념한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 자신으로 나타내서 증거를  하고, 또 주님의 부활하심을 우리 자신으로 나타내서 증거를 하는 것이 다  기념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유월절 그 성찬식에서 이는 내 몸을 표시하는 너희들을 위한, 이 떡은  내 몸을 표시하는 너희들을 위한 내 몸이요, 또 이 잔은 너희들을 위해서 세운  새 언약의 피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이 성찬을 베풀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기념하라 말은 주님이 어떻게 우리 위해서 피를  흘리셨으며 살이 찢기셔서 대속하셨는가 하는 그 대속을 우리가 깨닫고 그  대속에 합당한 우리로 생활해서 그 대속하심이 헛되지 않도록 그 대속하심을  우리 생애에서 나타내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접촉하고 듣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고 사신 그 대속은 과연 이런 뜻이며 이런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했구나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하라 그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주일 뿐만 아니고 우리는 언제든지 주일을 지킬 때에는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나타내는 일을 특별히 하는 날이요 또 주님이 부활하심을  특별히 나타내는 날인데. 이 주일날은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나타낼 수  있는 그 지식과 그 실감과 또 그 능력과 그 욕망의 힘을 우리가 새로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일날은 예배보러 오기 전에, 주님이 날 위해서 어떻게  죽으셨으며 어떻게 살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평소에도 늘 평생 생활이 그  생활이지마는 특별히 주일날 생각하면서 평소에 잊어 버렸던 것도 새로 깨닫고  또 그렇게 실감하지 못했던 것도 실감을 하고,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감동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도 감동의 관심을 받고, 우리의 모든 지식이나  욕망이나 우리의 각오나 결심이나 우리의 소원이나 욕심이 나 그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따라서 변화함을 입는 것이 주일날입니다.

 또 이렇게 마음 준비를 해서 주님을 더 깨닫고 주의 은혜를 더 깨달아 준비해  가지고 감격한 그 마음을 가지고 주일을 지키면서 '주일은 즐거운 날이라.' 이  주일 지키는 것이 무거운 짐과 같이 '또 주일이 왔으니 이 일을 못하겠다' 그런  것이 아니고 주일은 참 우리의 날 중에 제일 기쁜 날이요, 즐거운 날이요,  보배로운 날인 것을 우리가 깨닫기까지 자꾸 새김질하는 것이 좋고, 이렇게  깨닫고 또 주일날 와 가지고 예배드리는 그 예배 시간에서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새 지식을 또 가지게 되고, 새로운 각오를 가지게 되고, 새 소원을 가지게 되고  새 결심과 새 생활을 출발할 수 있는, 사람이 변화돼서 새사람으로 변화되어지는  그 은혜를 우리가 주일날 받고,  그 받은 그 은혜를 이제 '엿새 동안에는 자기 일을 힘써 하고' 하는 것은 받은  그 은혜를 엿새 동안에 자기 생활에서 나타냅니다. 이런 직장에서든지 저런  직장에서든지 그 직장은 하나의 구속받은 자의 구속을 기념하는 생활을 할 수  있는 장소요 처지지 그것이 우리 생활 아닙니다. 그 생활에서 구속하신 주님을  기념하면서 나타내는 그 생활을 엿새 동안 힘써 하는 그것이 자기 일입니다.

그게 자기 할 일입니다. 그것이 자기 구원을 이루는 일이요 그것이 믿는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서 할 일이요 주님이 그 거 하라고 세상에 둬 두시는 것이지 뭐 이  세상 먹고 마시는 이것 때문에 둬 두는 것 아니고, 먹고 마시는 것도 그 일  때문에 먹고 마시게 되는 것이고, 이 일 저 일 하는 것도 이 일 저 일 속에서 그  일을 하라고, 주님을 기념하는 그 일을 이 일 속에서 하고 저 일 속에서 하라고,  다만 장소와 같이 이런 종류 저런 종류의 그 일들을 맡기신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의 전부는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간단하게 기억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그 해석을 붙이면 여러분들이  좀 어려울 것 같아서, 아마 해석은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면은 다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벌써 듣기를 많이 들었고 많이 배웠기 때문에, 그저 잊어버리고  들은 것을 잊어버리고 배운 것을 잊어버리고 다 잊어 버려 그렇지 여러분들 속에  벌써 지식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다 버려 그렇지. 이러니까, 생각하면  나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을 우리가 우리 몸에서 기념해야 됩니다.

예수님의 두 가지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나타내는 그 생활을 하다가 우리는 끝을  마쳐야 됩니다. 우리가 죽는 것이 늙어서 죽는 일도 있겠고, 병들어 죽는 일도  있겠고 또 순교하는 일도 있겠고, 갑자기 무슨 물에 빠져 익사라든지, 무슨  사고로 변사되는 그런 일도 우리에게 있겠습니다. 이런 죽음을 하든지 저런  죽음을 하든지 우리는 죽는 그것은 필연적으로. 필연성으로 타락했던 우리에게는  한 번 있는 것이지마는 사람들 보기에는 저 사람은 늙어 죽는다, 저 사람은  병들어 죽는다, 저 사람은 물에 빠져 죽는 다 무슨 사고가 나서 죽는다, 저  사람은 주님 때문에 순교로 죽는다 그렇게 죽는 그 형태는 각각 다를지라도  우리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다 죽는 죽음인데 그 죽음은 그 죽음의 형태 속에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한 죽음을 우리가 죽어야합니다.

 일반인들이 가지지 못한 죽음을 죽는 죽음을 해야 된다는 말은 주님이 죽으신  그 죽음을 우리가 우리 몸에서 나타내다가 끝을 마치는, 주님이 나 위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짊어지고, 우리 몸에서 주님이 나 위해 죽으신  그 죽으심을 본받고 대 이어서, 그 죽는 일을 계대해서 죽는 일을 하다가 늙어  죽음이 와도 다른 사람 보기에는 늙어 죽음이지마는 자기로서는 주님의 죽으심을  계대하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고,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병들어 죽어도 자기는  병들어 죽는 죽음이 아니고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죽음을 끝내는 죽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귀를 못 알아 들으면 잠이 오고, 또 거기에 딱 거머쥐고 정신을 차려서  마음을 붙이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이 될 수 있는 대로는 웅변에, 웅변에, 웅변에 취미를  붙이지 말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웅변에 취미를 안 붙이도록 하려고 애를 써야  됩니다. 웅변에, 웅변에 취미 붙이는 것은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에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웅변에 취미를 붙이지 말라 그 말은, 우리는 잘못 하면 그 말에 대한  이치 그 말이 나타내고 있는 그 진리에 우리는 가치를 두지 안하고 사람들이  유창하게 하는 그 웅변에 가치를 두고 취미를 두기가 쉽습니다. 어떤 그  열변이라든지, 묘한 뭐 수사의 말이라든지. 또 고저 청탁을 잘 해서 노래  부르듯이 그렇게 아주 음정을 잘 하는 그런 일이든지 그거 다 좋기는 좋지마는  그것이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웅변에 우리가 취미를 가지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고,  또 열심이 있는 열변에 취미를 가지지 아니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하고. 또 그  말의 엄위성, 그 말을 아주 엄격하게 해서 그 말을 엄중하게 하는 그 엄위  위엄과 엄위성에 취미를 붙이지 안하도록, 가치를 두지 안하도록 그렇게 애를  써야 됩니다. 그거는 저절로 자꾸 되기 때문에. 또 환경에, 많은 사람이 모였다  하는 많은 사람의 대중에 쏠려지는 그런 취미도 삼가해야 되고 또 같은 말이라도  저 첩첩 산중이나 어떤 아주 경치 좋은 데서 말을 할 때에 그 말이 달리  들려지고. 또 큰 환난이 와서 아주 죽을 지경인 그 위험한 그런 지경에서 들을  때에 말이 달라지는, 그 모든 환경에 따라서 내가 말을 듣는 것이 그 환경에  좌우되는 그런 것을 될 수 있는 대로 벗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벗도록 벗도록  그것을 노력해야 됩니다. 그것은 다 진리는 아닙니다. 진리를 나타내는 방편이면  방편이지 진리는 아니기 때문에 진리를 나타내는 이런 방편에게 제재를 받지  말라 그말입니다. 그 방편에게 될 수 있는 대로 제재를 받지 말고 다만 고  진리에 우리는 가치를 두고, 고 진리에 우리는 맛을 붙여 가지고서 거기에  우리는 붙들리고 기울여져야만 할 것입니다.

 이래서 대개 보면 어린 신앙들은 다 이런데 붙들려 가지고서 그것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에 다 그 평가로서 모든 설교는 결정을  합니다. 그러나 장성한 신앙가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평가하지 안하고  아주 미치괭이 소리같이. 모기 소리같이, 벙어리가 더듬거리며 말할지라도 그  말하는 그 진리. 진리 거기에다가 가치를 둡니다. 거기에 다가 가치를 두기  때문에, 뭐 이 세상이 진리는 가지고 이리 저리 못하고 진리를 나타내는 방편인  그런 방편은 진리 하나도 없어도 제일 일등 방편을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그건  세상이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는 하나도 없으니까 생명은 하나도  없지마는 그 방편이 일등 방편이니까. 모든 사랑이 둥둥 떠가지고 야단을 지긴다  말이오. 그건 다 껍데기요 허수아비요. 생명 없는 시체들입니다.

 또 그 어떤 사람은 방편은 아무짝도 쓰지 못해서 방편은 제일 못 쓸 방편이나마  그 속에 세미한 진리가 있을 때에 그 진리에 끌려서 움직여, 뭐 비바람에  들리고. 어디로. 어느 그 틈에서 들려오고, 어느 그 바람에서 날려오고, 어느  떨어진 종이 쪼가리에서 그 진리가 나오고 했던지 고 진리에 가치를 두고서 고  진리에 기울여서 고 진리에 가치를 두고, 맛을 두고, 권능을 둬 가지고서 고렇게  하는 사람이 다 진리의 사람들이요 영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지금 진리를 가르치고 있는데 그저 고함을 지르면 뭐 그만 교인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할 때에 고함을 질러서 기도할 때 있는데 외나 실상 그  참 살고 죽는 큰 진리가 나타날 때에는 아무런 응답이 없고 그저 진리의 방편  보고서 모두 다 거기다가 가치를 두고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보여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신앙이 아직 어리다 그말이오. 진리를 나타내려 할 때에는  고함을 지를 수가 없습니다. 고함을 지를 수가 없고, 고함을 지르면 고만 진리가  나타나지지 아니하고 껍데기가 다 커져 버리기 때문에 알맹이는 오히려 없어지고  만다 그 말이오.

 오늘 오전에 말씀할라 하는 것은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의 우리가 발자취를  따라서 우리도 이 두 가지 죽음을 기념하는 이 두 가지 죽음을 본받고 채 받아서  주님이 나 위해서 두 가지 죽으신 이 죽음을 내가 받아 가지고 나도 이 두 가지  죽음을 주님을 따라서 죽다가서 끝이 나야 된다 하는 그것을 지금 오전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죽는 것이 뭐 죽는 그 죽음은 죽음의 그 형태가  병들어 죽는 것도 있겠고, 늙어 죽는 것도 있겠고, 또 무슨 물에 빠지거나  다치거나 그렇게 변사로 이상스럽게 죽는 그런 죽음도 있겠고, 또 순교로 죽는  그 죽음도 있겠고 있는데, 그 죽음은 어떤 죽음이든지 그거는 껍데기 죽음이요  그건 껍데기 죽음이요, 우리 알맹이 죽음은 그 죽음이 돼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알맹이 죽음은 예수님이 나 위해서 죽으신 그 죽음을 기념하는 그 일을 하다가  끝이 나야 됩니다. 그 일을 하다가, 그 일을 하다가 순교를 하든지, 그 일을  하다가 늙어 죽든지, 그 일 하다가 병들어 죽든지 그 일 하다가 무슨 물에 빠져  죽든지, 그 일 하다가 차에 치어 죽든지 어짜든지 그 죽음을 계속하다가 끝을  마치는 그 시간이 죽음 시간이 되어야합니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다면 우리는  외식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두 가지 죽으신 죽으심은 어떤 죽으심인가? 그저 간단하게  여러분들이 다 해석은 하고. 주님이 죽으신 죽음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죽은  우리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죄를 범하므로 죽음의 형을 받아 가지고 있는  그 형을 주님이 대신 받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러면, 죄라면 어떤 게 죄인가? 하나님의 그 법칙에 어긴 죄, 또 하나님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살아야 될 터인데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자기 생각대로, 자율대로, 주관대로 행동한 그 죄  하나님의 법칙을 어긴 죄, 또 자기주장대로, 자기주장이면 인류 주장, 국가  주장, 사회 주장 어쨌든지 피조물 주장대로 산 그 죄값. 하나님 말씀을 어긴  죄값, 자율대로 피조물 주장대로 행동한 그 죄값, 또 하나님 중심으로 위주로  하나님에게 속해서 제 일계명을 지키면서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될 사람이 피조물 중심으로, 자기중심 자기 위주 피조물 위주 이런 것으로 산  그것이 또 죄가 됩니다.

 그러면 세 가지 죄로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아 있는데 이 세 가지 죄로 멸망  받아 있는 이 멸망을 주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대신 죽으신  것은 우리가 그 세 가지 죄를 범한 그 죄의 형벌을 예수님이 받으셔서 죽으셨기  때문에 그 죽으심은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그  죄를 완전히 멸하고 우리를 구출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긴  그 값은 사망인데 사망하지 않고는 그 죄를 없앨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 죄의  값을 다 받음으로써 그 죄를 멸하신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죽으심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그 죄악을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인간들이 자기들 주장대로 사는 그 죄악을 멸하기 위해서 죽으셨고,  거기에서 우리를 구출하려고, 그걸 멸하지 않으면 우리를 구출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걸 멸하는 것은 형벌받는 거 외에는 멸하는 도리가 없습니다. 죄 지은  것은 그 죄의 값을 받아야 그게 없어지지 달리는 없애지 못합니다. 하나님도  없앨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 피조물 저거들의 위주로  중심으로 사는 이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이 내 죄를 인해서 죽으신 그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걸머지고 기념하다가, 주님이 나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는 나도  주님을 대 이어 가지고 내게서 이 죄 짓는 자를 나도 죽이기 위해서 죽는  죽음입니다. 죄 짓는 자를 죽이기 위해서 죽는 죽음이 주님을 따라서 죽는  죽음의 하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 짓는 그 죄 짓는 것을 죽이기 위해서, 죄  짓는 것을 죽이기 위해서 당신이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을 따라서 죽는  죽음 중의 하나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는 죽음이 우리의 죽음입니다. 죄를  멸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죄 짓는 그 힘, 죄 짓는 세력, 죄 짓는 사상, 죄 짓는 성질, 죄 짓는  행동, 죄 짓는 욕심, 우리에게 죄 짓는 그것을 죄 짓는 그것을 죽이기 위해서  우리는, 그것을 죽이는 일을 계속 하다가 하다가, 우리에게서, 우리가 우리 속에  죄 짓는 그 힘이 있고, 죄 짓는 성품이 있고, 죄 짓는 것이 있다 말이오. 죄  짓는 것이 있는데 죄 짓는 그놈을 죽이는 일을 우리가 힘써, 죄 짓는 자를, 우리  몸에서 죄 짓는 자를 죽이는 일, 형제에게서 죄 짓는 자를 죽이는 일 죄 짓는  자를 죽이는 이 일을 계속 하다가 늙어 죽든지, 계속 하다가 병들어 죽든지,  계속 하다가 무슨 변사를 하든지, 이것을 계속 하다가 순교를 당하든지  어짜든지, 순교를 당하는 것이나 이런 거나 저런 거나 모든 그 죽음은 다 그것은  죽음인데 그 죽음을 외부에 무슨 죽음을 죽든지 우리는 우리 죽음은 죄 짓는  자를 죽이는, 나와 다른 이에게 죄 짓는 고것을 죽이는 고 일을 계속 하다가  세상을 끝마쳐야 된다는 것입니다. 고것이 우리가 주님의 한 가지 죽음을  기념하는 죽음인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주님이 죽으심은 하나는 죄를 인해서 죽으심이요, 하나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우리 대신 산 생활을 하기 위해서 죽으신  죽으심입니다. 우리 대신해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한, 죄를 안 짓는 그 일을  하다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죽으신 것은 하나는 죄의  형벌을 인해서 죽으셨고, 하나는 이제는 죄의 형벌을 내서 다 그 댓가를 내서 세  가지 죄를 문제 해결했기 때문에 이제는 다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이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그 화친을 다시는 버리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그 화친을 그대로 보수하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죽으심은 우리의 멸망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신 형벌을  받아 형을 받아서 죽으신 그 죽음이요, 형을 받아 죽으신 그 죽 옳은 죄를  멸하기 위해서 죽은 죄를 바싹 부셔서 없앤, 죄를 멸하고 죄의 권세를 멸하기  위해서 주님이 죽으신 죽음입니다. 한 죽음은 죄를 위해서 죽은 죽음 아닙니다.

한 죽으심은 이제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죄 없는 자로 살기 위해서, 또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자로 살기 위해서, 또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자로 살기  위해서 죽으신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두 가지 죽으심입니다.

 이 두 가지 죽으심을 우리가 기념하는 것은 우리가 몇 해를 살든지, 우리  마음이나 몸이나 또 우리 영이나 우리의 모든 소유나 우리에게 관련된 그 모든  것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서 죄 없는  자로 살고 또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자로 살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자로  사는 이 생활 이거는 깨끗한 생활이요, 이거는 의로운 생활입니다. 이  생활하기를 어데까지 했느냐? 몇 해 동안이나 했느냐? 또 얼마 어데까지 했느냐?  이 생활을 하기를 세상 끝까지 했습니다. 이 생활 하다가 세상을 끝마쳤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죄를 안 지을라고 하는. 죄를 안 짓는 것으로서. 죄를 안  짓는 것으로서 세상을 떴습니다. 또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으로서 세상을  떴습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것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은 이 두 가지 죽음이니 우리는 우리 현실에서  나와 나에 관련된 모든 것이 죄를 짓지 않는 이 일을 우리가 하고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이 일을 하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친한 이 일을 하고. 이 세 가지 이  일을 하는 것을 언제 늙을 때까지 하겠는가? 중치가 될 때까지 하겠는가? 늙어서  병들 때까지 하겠는가? 아니야. 이것을 하다가 끝을 마칩니다. 이것을 하다가  끝마치는 것, 이것으로서 끝나는 것 이것으로서 세상 생활 끝나는 것. 하나는  죄를 멸하다가 우리는 세상을 끝나는 것, 하나는 이 의로운 것을 행하다가  끝나는 것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에 따라서 두 가지 죽음을 우리 몸에서 채우는  이것이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죽음을 기념하는 것.

 또 한 가지는 주님이 이제 우리를 이 두 가지 죽음에서, 두 가지 죽음에다.

우리를 잘 살았든지 못 살았든지 두 가지 죽음으로 세상을 끝나는 이 길을  열어서 우리의 구원을 베푸셨고, 하나는 주님이 다시 우리에게 죽음에 관련되는  그 생활이 아니고,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죽습니다.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죽고.

죄를 짓지 안해도 죽습니다. 하나님으로 화평해도 죽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해도 죽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에게 복종 안해서 죽은 게 아니라. 복종해도  죽습니다. 이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그런 것입니다. 죽는데,  이제는 주님이 죽은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신 것은, 다시 부활하신 것은  우리들에게 또 한 길을 열어서 우리로 하여금 죽지 안할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서. 또 산, 영원히 죽지, 안 하는 영생 하는 기능을 가지고서 우리가  살고, 또 영원히 죽지 안하고, 썩지 안하고 쇠해지지 않는 일을 마련하고, 또  우리에게 영생하는 그 승리, 이 승리로 영원한 생명으로 살도록, 또 영원히 있는  그 모든 기능으로 살도록 또 영원히 있는 사업으로 살도록, 영원히 있는 소유로  살도록 이렇게 다시 산 자로 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진 것은 처음에 두 가지  죽음으로 와진 것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이 아니고, 그 두 가지 죽음을 토대로  해 가지고, 그것은 대속이고, 이 두 가지 대속을 인하여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길이 열렸으니 이것이 뭐인가? 이것은 우리로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도 않고 쇠하지도 안하고 더럽지도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는 산  기업을 우리에게 있게 하셨으니 곧 진리와 성령과 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이제는 진리와 성령과 피의 역사로 죽지 안할 사람으로. 늙지 안할 사람으로,  죽지 아니할 나로 늙지 아니할 나로, 죽고 늙고 쇠해지지 않는 기능을 가지고  죽고 늙고. 쇠해지지 않는 그 생애를, 죽고 늙지 안하는 그 일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죽으심에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해서 우리가 죽는  자 돼야 되겠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죽기는 죽는데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해 가지고서 연합한 자로서 죽어야합니다. 연합한 자로서 끝을 마쳐야  됩니다. 연합한 자로 끝을 마치는데, 끝을 마치고 난 다음에 부활함에 따라서  새로 사는 게 아니고, 우리는 이 삼각으로 나갑니다.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된 자로 죽고,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자로 살아 이 세 가지가 이 두 가지  죽음과 한 가지 산 생애로 둘이 나가서 이 두 가지 죽음은 기초가 되고. 근거가  되고 법적 해결이 되고 또 이 한 가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 것은 다시 썩는  것이 아니고 새 사람으로 우리가 죽지 안 할 내가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안할  우리가 있고, 늙지 안 할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 때에 죽을  사람으로 사는 거 있고 늙을 사람으로 사는 거 있고, 우리가 영원히 죽지 안하는  사람으로 사는 게 있어서 우리는 이 두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해서 우리가 죽는 생활해야  되겠고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해서 죽어야합니다. 두 가지 죽음에 연합해서 순교로  죽든지, 차에 치어 죽든지, 물에 빠져 죽든지, 늙어 죽든지 두 가지 주님의  죽으심을 내가 본받아서 그 죽으심을 내가 짊어지고 그 죽으심을 나타내는, 그  죽으심을 계대하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남은 십자가인데, 그 죽은 주님의  죽으심을 계승하는, 계대하는, 그 주님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나타내는 이 두  가지 죽음을 부요해도 하고 가난해도 하고. 높아져도 하고 낮아져도 하고,  평안해도 하고 어려워도 하고 이 일을 하다가 우리는 죽어야 됩니다. 죽는 자는  이대로 이 일 하다가 죽어야 됩니다. 우리에게는 죽어야 하는 자가 있으니 죽은  자는 이 일 하다가 죽고, 이제 이 죽는 자만이 아니고 영원히 죽지, 안할 자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안할 자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늙지도 쇠하지도 안할 사람으로서 우리가 영생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두 가지 죽으심에 연합하여 죽고. 주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하여 영생하는 이것이 이 주일날 이루는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  주일은 우리가 평소도 그렇지마는 서도 특별히 우리가 생각할 거 두 가지 주님의  죽으심에 내가 연합하여서 나도 두 가지 그 죽는 그 죽음으로 세상을 끝내겠다  요것을 우리가 해야 되고, 요것을 해야 되고, 그것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이지 그것이 중생된 새사람은 아닙니다. 그  생활을, 이것이 대속의 근거인데, 대속의 근거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해서, 두  가지 죽음에 우리가 연합해서 두 가지 죽음의 죽으심을 우리 몸에서 채우고  기념하는 이것으로서 우리는 죽고, 이것으로서 세상을 끝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으로 끝내면 순교나 물에 빠져 죽는 거나 뭐 별별 종류의 죽음이 있는데 그  종류의 죽음. 삼자들은 볼 때에 저 사람은 물에 빠져 죽었다, 저 사람은  순교했다, 저 사람은 차에 치어 죽었다 저 사람은 늙어 죽었다. 저 사람은  병들어 죽었다 이렇게 할지라도 할지라도, 우리는 그 죽음이 아니고 예수님의  죽으신 이 두 가지 죽음을 우리가 계속 하다가 그 죽음이 끝나서 죽는 죽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요,  또 그라는데 거기에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한 이 새사람으로, 새사람은 죽지 안합니다.

새사람은 늙지 안하고, 새사람은 죽지 안하고 쇠해지지 안하고 낡아지지도  안합니다. 이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뭐이냐 하면은 영감으로 살고 진리로 살고,  영감과 진리로 살고, 또 이 두 가지 죽음은 예수님의 피공로로 사는데 예수님의  피공로가 주체가 되고 그 영감과 진리는 그 일을 하도록 협조를 해 주고. 해  주고, 이제 중생된 새사람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이 공로를 근거해 가지고서  진리와 영감이 예수님의 부활하신 부활을 근거해서 부활에 연결해 가지고서  우리를 영생하는 사람으로 살게 하고 두 가지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결시켜 가지고서 성령과 진리가 협조해 가지고서 두 가지 죽는 죽음을 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생활은 두 가지 죽는 죽음을 걷는 이것이 우리의 생활이요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서 산 생활로 사는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성령과 진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그 일을 연합 생활을  하도록 협조하시는 것이 성령과 진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우리를 연합시켜서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것이 성령과 진리의 협조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일날입니다.

 주일날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하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한 이 일을  실상으로 이루는 것을 점점 이루어 가고 육성해 나가고, 점점 튼튼하고, 점점  온전함을 이루어 가도록 하는 이 은혜가 주일날 특별히 있는 것이요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주일날이요. 주일날 이 은혜를 입어 가지고서 엿새 동안은 두 가지  죽음을 실행해 보는 것이요, 부활하신 이 새생명의 생활을 실행하는 것이 그것이  엿새 동안에 우리 할 일인 것입니다.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 첫째는 논리고. 논리에서 머물지 말고 논리에서 실감으로 전진해야  되겠고 실감에서 우리는 실상으로 이렇게 변화함을 입어 가야 되는 것입니다.

실상이 되어져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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