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1984. 3. 16. 금새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베드로가 이렇게 성경 기록을 이렇게 한 것은 성령님의 마음이요 곧 베드로의  마음입니다. 베드로가 기록했으니 베드로의 마음뿐이라 하면 영감을 부인하는  말이 되고, 또 성령님의. 하나님의 마음이라 이렇게 하면 인간의 자유 의사를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이렇게 기록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자기를 증거했고 또 하나님을  말씀할 때에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이렇게, 편지를 받는  모든 성도들을 소개할 때에 또 이렇게 소개를 한 것이 곧 베드로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이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 베드로에게 감화 감동시켜서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마음같은 이런 마음을 가져 가지고 발표한 것이라  그렇게 우리는 알고 믿어야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사람에게 감동시켜 줄 때에 그 성령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또 하나님이신 성령님은 믿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마음을, 속에 마음을 이렇게 가지라 하는 것으로 그렇게 감동시켜  권유하셨고, 또 그 베드로는, 이 사람은 성령님의 감화를 바로 받아서 틀림없이  정확 무오하게 증거할 때에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그 마음이 되어졌다. 이렇게  우리가 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겉에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 양보다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양이 많고, 그 양은 자기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그  분량보다 자기만 볼 수 있는 그 분량이많고, 또 자기만 볼 수 있는 그 분량보다  하나님이 보실 때에 인정할 수 있는 그런 양이 더 많아야 된다. 그러면, 많아야  되는 건 자기가 모르는 그 속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가? 그것은, 베드로가  말하기를 '마음에 자책할 것을 깨닫지 못하나 이러므로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온전타 함을 얻지 못한다. 나보다 무한히 능하셔서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나를 심판할 것이매 그날에 내가  어찌 될지 모르겠다' 이렇게 자기가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고 있는 것이 더 그  양이 커서 '그게 어찌 됐나?' 하는 그런 염려와 두려움과 미완성된 그 점이  무한히 많을 것이고. '내가 모르는 점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점이 무한히 많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그것으로서, 본인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면이  더 양이 많았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서 우리가 증거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그 인격의 미,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성도들의 그 인격 하나님은  신격이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인격을 상대하시는데, 그 하나님이 상대하시는  인격은 영이 주격이 되고 심신이 그의 소유격이 되어지는 이것이 체계적으로  바로 됐을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인격이라고 말하는데 사람들이 말하는 인격은  그것은 영은 죽어서 알지도 못하고 심신만이 합작해 가지고서 하고 있는 그런  것을 가리켜 인격이라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성경대로 말한다고 하면 죽은  인격이라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인격이라.

 또 만일 영뿐이라면은 그거는, 그것도 죽은 인격이라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다.

왜? 영뿐인 것은 그것은 영이기 때문에 인격이라면 영과 육이 합해 가지고서 한  격위를 이룬 것을 가리켜서 인격이라고 말하는데 사람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인격됐다가 짐승됐다가, 다시 말하면 인격됐다가 육체됐다가 또  육체됐다가 인격됐다가 이렇게 자꾸 변동성이 많아서 인격이 됐을 때에 그때는  새사람이라고 말하고, 합해서 한 격위가 되지 아니하고, 합해서 된 격위가 아닌  그런 육체를 가리켜서 인격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육체라, 육체의 생각이라,  육체의 소욕이라 그렇게 말을 하고, 세상을 떠날 때에는 그의 영과 혼이 갑니다.

영과 혼. 영과 마음이 갑니다. 마음이라고 하면 마음은 하나의 그 존재를 말하고  마음 안에 그 분자, 요소는 그 수를 헬 수 없을 만치 복잡하고 많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영과 함께 낙원에 갑니다. 그러나 몸은 같이 가지 못하고  땅에 남아 있습니다. 왜? 몸은 이것은 영계에 가지를 못합니다. 갈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는 그런 부자유하는 그런 말하자면 저급의  것이기 때문에 가지를 못하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그 몸이 마음과같이  영같이 그렇게 신령하게 변화가 되어지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그것들을 초월한 그런 존재로 변화를 시켜 가지고 그 영과 마음과 몸이 합했을  때에 그 때에 부활한 온전한 그 사람입니다. 그 무슨 요소와 기능이 온전하다는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하나가 되어서 한 격위가 됐다는 말입니다. 그거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구름타고 재림하십니다. 재림할 때 그때에 셋이 합하여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요한복음 4장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지니 하나님은 영이시매 영으로 예배할 것이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 했다 말은, 예수님의  신성이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말씀해서 예수님의 신성이 인성을 통해서  말씀을 해서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 말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인데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니 주님의 그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무엇을 가리켜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는 하니 주님의 그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사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요. 아무리 하나님을 섬긴다고 입술로, 행동으로  한다 할지라도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은 자는 두루마기를 벗은 자이기 때문에  쫓겨나는 자이지 그자는 하나님 앞에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자는 쫓아냈다 하는 그 예복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가리켜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 무엇을 말하느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물론 말로도  입었다 이렇게 증거할 수도 있고. 또 자기가 행동으로서도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것을 그 행동으로 나타낼 수도 있지마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라' 그  말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자기만이 볼 수 있는 그 마음의 요소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예배 드리라, 또 자기도 볼 수 없는, 하나님이 하나님만이 보실 때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그런 자로 예배 드리라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보실  때에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그런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자기도 볼 수 없는 마음  곧 그에게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하나님 앞에. 마치 세리와 같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그 불쌍히 여기심을 받을 수 있는 그런 겸손, 다시 말하면  자기는 무지하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하나님은 알지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자기에게 미비점이 이미 갖추어 있는 것 보다도 더 많다 하는 그것을 생각하고  그점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입니다.

 욥이 말하기를 사람의 의를 '때묻은 옷과 같다.' 아무리 의라 해도 그것이 참  가치로 따져 보면 하나님 앞에 추하고 더럽고 내나 그것이 죄와 비슷한 그런  허무한 것이다 그렇게 평가를 했습니다. 그것도 뭐이냐? 인간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바로 알고 부인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는 예배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만을  믿어 그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입혀 줘야 된다 그분의 것을  은혜로 받아야 된다 하는 이것을 가진 그자가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자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이제까지 늘 하는 말은, 1절 말하는 것은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하는 말이 자꾸 이리도 말하고 저리도 말하고 여러 각도로  말을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지금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도의 인격의 미에  대해서, 하나의 육체의 형체로 말하면 낯에 볼이 아름다우면 그 신부가 아름답고  볼이 흉하면 흉하다, 아무리 다른 데가 잘생겨도 고만 여기 볼에 얄궂은 흉측한  병 같은 그런 것이 이만한 것이 하나 붙어 있으면은 다른 데 잘생겨 봤자 소용이  없다 그말이오. 또 거기에 아주 얼청이가 되어 가지고서 얄궂게 된 그게 하나  있어도 그만 다 미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인격의 미 가운데 미를 발표할 때에 '석류 한 조각  같다.' 석류는 겉은 아름답지 안하나 속은 아름답고, 겉은 한 개 뿐이나 그 속에는  한 개 속에 볼 수 없는 속에 수 많은, 아름다운 열매가 꽉 박혀 가지고 있다 그와  같이 그 사람이 말로 하는 거와 행동으로 하는 것보다 그 속에 마음의 작용이.

마음의 그 역사가 더 많다, 마음의 역사보다도 자기는 할 수 없어 하나님의 것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채워지지 못한 것이 얼마가 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다 완전한 것이 있으니 그분의 완전한 것을 내가 받지 안하면 안된다,  그러기에, 나는 그분의 긍휼을 구할 수 밖에 없고 그분의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다 하는 이 사람이 되어져야 되는 것을 이제까지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말의 각도를 모르면, 이 말을 무슨 말인고 제가 못 알아 들으면 늘  아침마다 꼭 같은 말을 하게 되니까, 이 말씀을 월요일날 아침부터, 새벽부텀  시작했는가 모르겠습니다. 월요일날 새벽부터 시작했나요? 예? 예, 월요일날  새벽부터 시작했는데 월, 화, 수, 목, 금 오늘 다섯 번째 계속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의 구조들도 말을 했고, 몸보다 그 마음이 심히 복잡하고  세밀하고 구비하고, 보다. 몸보다는 온전케 되어 있으므로서 몸보다 능력있다.

날래고 능력있고 예민하고 모든 실력이 낫다. 마음보다 영은 더 낫다. 마음은  영을 모형한 것이요 영은 하나님을 모형했기 때문에 무한을 모형한 것이요  영원을 모형한 것이요 완전을 모형한 것이다. 그러니까, 영은 어떤 것이다. 영을  암만 말해도 저거 주관이 다르기 때문에 영에 대해서 알지를 못합니다. 암만  말해도 자기 주관을 부인 하지 안하기 때문에 바로 알들 못하고 이라는 것으로서  성경 번역하는 사람들이 영이라는 그 원어를 온갖 것으로 번역을 해서 영으로  번역한 것은 적고 다른 것으로 번역한 것은 많도록 이만침 이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지금도 영을 말하지마는 영을 인정하는 교역자가 우리  총공회 진영에도 적습니다. 영을 인정하는, 영이 성경에 영이라고 있으니까 영을  인정치 안할 수 없지마는서도 영이 뭐인가 암만 말해야 그것은 귀에 들어가지를  아니합니다. 그러기에, 영은 별개의 존재로 그렇게 보지안 하고. 이 마음이나  영이나 혼이나 이성이나 이런 것은 다 하나인데 그 하나를 이렇게 발표하고  저렇게 발표했다. 마치 손 하나를 말하면 여기에는 손등이요 여기에는 손가락이요  또 여기에는 손바닥이요 이렇게 그 하나를 내나, 가를 수 없지마는 한 이 주먹을  요렇게도 조렇게도 자꾸 이렇게 발표 하는 것처럼 그렇게 발표하는 그 발표가  여러 종류로 발표가 돼 가지고 있지 그것이 하나이다. 그것을 분류할 수 없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다고 하는 것은 영을 말하는 것인데, 영은 존재하지마는서도  영은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서 없는 거와 같이 그렇게 죽어져 있는데 그의  마음은, 마음은 그것이 기능적으로나 모든 면으로 살아서 활동을 하다가 언제 다  죽느냐? 세상을 떠날 때에 그의 심신의 기능은 다 죽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입지 못한 사람들의 심신의 기능은 세상 떠날 때에 다 죽고  예수님의 구속을 입은 사람들은 심신의 기능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 심신의  기능이 예수님의 구속을 입어서 새생명을 받아 살게 된 자도 있고 또 새생명을  받지 못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구속으로 대심판을 이긴 산 자로 인정받는 그  대속을 입었지마는서도 그게 자기가 대속을 벗어 버리기 때문에 현실에 현실에  이거 입을래 저거 입을래 하니까 이 세상을 입고 그것을 벗어 내버리기 때문에  그것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기 심신의 기능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으로. 예수님의 대속을 입히신 그대로 실상 영생을 이루는 자도  있고, 또 영생을 이루지 못하고 그 대속을 벗어 버리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아서  심신의 기능이 죽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지금 영과 마음과 마음 그걸 가리켜서  혼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분리할 수 있는 아주 딴 존재라 그말이오. 그러나 마치  하나님의 모형인 사람의 영처럼 영의 모형인 마음이요 마음의 모형인 몸입니다.

마음은 보이지 안하지마는서도 그 사람 마음이 기쁜지 슬픈지 두려운지 평안한지  속에 강퍅한지 그 몸으로 다 안다 그말이오. 얼굴로 알 수 있고 피부로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눈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말이오. 눈 하나만 봐도 그 사람의  마음이 지금 어떻게 어떻게 돼 가지고서 슬프다, 기쁘다, 두려워한다, 뭐인가 원망  불평이 있다, 복수성을 가지고 있다, 악독을 가지고 있다 다 안다 이거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해석을 못해 그렇지, 심리학자들은 그런 걸말 해  가지고서 이렇게 말하는데 해석을 못 해서 발표를 못 하지마는 안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대할 때에 아. 이 사람은 삼가할 사람이다, 아, 이 사람은  미혹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속에 악독이 가득 찬 사람이다. 이 사람은 상대할  사람이 못 된다 다 그래 알지 않습니까? 이 사람은 이중이 많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좀 둔한 것같지마는서도 이중은 없는 신실한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이렇게  모든 면이 나쁘지마는서도 요 한 면만은 장점이 있다. 그렇게 속에 있는 마음을  껍데기 그 고기 덩어리 가지고서 짐작 해서 알 수가 있다 이거요.

 그러기 때문에, 몸은 마음의 모형이요, 마음은 영의 모형이요, 영은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사이비해서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자기가 뭐 '내가 마음이 상하지 몸은 상하지 않다' 이래도 마음이 상하면 상한  그것이 몸에 나타나서 몸도 상하고 있다 그말이오. 또 그의 영이 어떻다 하는  것을, 영이 어느 정도, 다 구속은 받았지마는서도 영의 실력이 어떻다 하는 것도  육에, 마음에 나타나고 있다 그말이오. 마음에 나타난 것이 또 몸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 영의. 실력이 얼마나 있었는지 십자가상에 못 박히실 때에나  그 전에나 예수님의 마음이 영을 거스려 보지를 못했고. 예수님의 몸이 예수님의  마음을 거스려 보지 못했고, 이렇게 몸은 마음에게, 마음은 영에게. 영은 신성에게  이렇게 복종해서 온전한 신인 양성 일위를 이루었고, 인성 만도 온전한 인성,  흠없는 온전 인성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신앙생활할 때에 이렇게 모두 다 하는 말이, 무슨 말 인고  하니 말 가지고 한다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것 아니라 말이오. 사람도 볼 때에 그  말로 뭐라고 한다 해도 말에는 세제 제일 선한 말을 하고 있는데 그 속에는 세계  제일 악독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거요. 또 마음에, 마음에 아주 정직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영은 죽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거요. 아무리 자기가 온갖  주장을 하고 무슨 말 한다고 해도 세상에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의 지식이,  인간의 지식과 인간의 과학들이 아무리 말해도 그 속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이거요.

 이러기 때문에, 생명없는 인간의 지식이요, 또 인간의 그 과학도 지식중의  하나인데 과학이요, 이런 것이, 이것이 죽은 것을 살리는 것이 예수님이라  그말이오. 이 죽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외 대속의 공로에게 삼켜지고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에 삼켜지면 이 죽은 지식이 살아나고 죽은 과학이 살아난다  그말이오. 삼켜진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대속을 크게 말하면 사죄와  칭의와 그 화친의 생명인데 그, 모든 과학이 이 사죄에게 삼켜져서 사죄에  이용당해서 사죄받은 것이 되고. 사죄에 이용당해서 사죄에 속한 것이 되고.

사죄의 것이 되고 칭의의 것이 되고 화친의 것이 되면 그것이 영원히 죽지 안할  것으로서 새로와진다 그거요.

 그러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도 동록도 먹지 안하고 도적도  구멍을 뚫지 못한다'하는 그 말은 물질 그것이 하나님의 구속에게 이용당해서  구속의 것으로 쓰여지고, 구속의 것에게 속하고 구속의 것에 이용을 당하고,  구속의 것이 되어지고, 이 구속을 나타내는, 구속을 나타 내는, 구속에 속해서  구속의 손발이 된다 이거요. 손발. 이건 여러분들이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하는  말인데 이 말을 딴 데 가서 말하면 마구 이단 투성이라고 말하요. 그 백분지 일도  모르는 사람이 그 백을 다 제가 평가 할라하면 알 수가 있겠소? 그러기 때문에  자꾸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말이오, 못 알아듣기 때문에. 사죄의 수족이 된다 말은  무슨 말이냐 그것을 알아 듣게 하기 위해서 비유 말하는 말입니다.

 사죄의 수족이 된다 말은 자기의 있는 재물이 사죄에게 속해 가지고 그 재물이  사죄를 나타내고 있다 예수님의 사죄를 그 재물이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그 재물이 예수님의 사죄를 인간들에게 알려 주는 데에, 그  재물이 다 활용을 해서 그 재물로 인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죄를  증거받아서 사죄를 알게 됐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인데 그 돈을  가지고서 선교를 해서 선교사를 보내 가지고 그 선교사가 가 가지고 사죄를  증거했으면 그 사람이 증거한 동시에 그 돈도 같이 증거한데에 활용당하고  이용당하고 역사를 했다 그말이오. 그것을 가리 켜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그 쌓아두는 것이라 말이오. 그거 이해가 됩니까? 돈이 사죄의 수족이 된다,  칭의의 수족이 된다, 화친의 수족이 된다 거기에 소속하고 거기에 이용을 당한다  이거요.

 이런 소리를 모르고 떡 한 마디만 듣고 가 가지고서 '아, 돈이 예수님의 사죄의  공로의 수족이라더라' 이래 놓으면 그 사람들 죄 짓게만 만들고 그래 가지고 자꾸  백 목사를 이단이라고 정죄한다 말이오. 그들이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을 그것을 자꾸 말해 가지고 그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니까,  욕을 얻어 먹으니, 거짓 걸로, 욕을 얻어 먹으니 거짓걸로 핍박하는 것이니까  내게 상급이 있겠지마는 그것이 안타까워서 될 수 있는대로 그런 사람들이 그런  죄를 범하지 안하도록 하려고 내가 애를 쓰는데 애를 쓰는데 그들이 몰라서 거짓  걸로 핍박하면 상이 되지마는서도 상을 받기 위해서 그 사람들로 알지 못한  핍박을 자꾸 하도록 그렇게 만들면은 어찌 됩니까? 만들면은, 연자가 다리가  부러진 것을 이어 줬더마는서도 박씨를 물고 왔는데 보배가 나왔지마는서도  역부로 다리를 분질러지도록 만들어 가지고서 부러진 다리를 이어 주니까 그  뒤에 박을 쪼개니까 뭣 나왔습니까? 귀신 나왔지요, 귀신. 그거 하나 예화를 들어  말하는 것인데 그것도 사람들이 인간의 심리 마음 작용을 가리켜 말 했습니다.

겉으머리는 같지마는서도 속에 그 마음의 작용을 들어서 말씀을 하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요걸 잊어버리지 말아야 돼요. 안 잊어버려야 되는데 잊어버리면 또  뒤에 말할라 하면 그거다 말해주지 안하면 무슨 말인지 모르지. 그러니까 그거  말하다 보면 사간 가지. 그러니까. 8월달 5월 달 집회를 한다고 해 봤자 고거  찍해야 한 가지 도리밖에는 가르치지 못해요. 하나를 요모로 가르치고 조모로  가르치고, 고 하나 가르치는 고거는 새벽에 가르치는 것 안 잊어버렸을테니까 또  오전에 고거 계속해서 가르치고 오전에 가르친 것 오후에 가르치고 자꾸 요래  되니까 그것이 좀 배워지고 알아지지마는서도 고만 지금은 새벽에 가르치고 난  다음에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죄만 짓고 돌아다니다가 그 뒤에 거석하면 모른다  그말이오.

 어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내가 말했는데. 이게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는 것이다 말했는데 이게 어떤 것이냐?' 알 만한 사람들에게  말해도 딱 명중하지 못하고 이리 이리 하다가 나중에 뭐 찾아보고 어쩌고 해  가지고서 그렇게 말을, 답을 하기는 해서 바로 알기는 압디다.

 이러니까, 다시 다른 말로 말하면 믿는 사람의 마음은 속에 심히 복잡해야 된다  그말이오.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어도 된다. 아무것도 없이 그저 텅 비면 된다.'  그거는 불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불교의 참신이라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생각지  안하고 무로 돌아가는 것이 불교의 참신입니다. 무. 없는 걸로 돌아가는 것.

마음도 없다 생각도 없이 아무 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다, 전부 아무것도 없다  이래 놓으니까 다 나만 있다. 그러기 때문에, 천상 천하에 유아 독존이라 내가  제일 높다. 그 모든 것이 다 내다. 이렇게 '내다' 하는 그 모든 것이 자기라 하는  것이 그 결론이 지어지기 까지는 무슨 순서를 밟는고 하니 무아주의로  둘어갑니다. 자기는 없다, 아무것도 없다, 없다, 없다, 없다, 모든 것이 없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으니까 '음!' 하는 것뿐이라. 중은 보면 표가 나요. 중은  보면 표가 나는 것이 외모로 보면 아주 점잖은 것 같은데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가 나옵니다. '음!' 참 부처같소. 그 부처 그 속에 아무것도 없지 안해요? 부처  속에는 아무것도 없지 않아요? 형체만 있지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이 부처같이  생긴 사람이 돼집니다.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보고 '아 불교인들 중들은 다  점잖하고 그렇게 생겼다' 하는 사람있고. 눈을 보고 보는 사람은 불교가 이렇기  때문에 그 불상과 같이 이렇게 모두 불교인들은 이렇게 용모가 이렇다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기독자는 그 마음에, 마음에 수많은 기관이, 마음의 그 기관을 뭐  심리학자들은 이 세상에 나타낸 걸 보고서 그렇게 말을 하는 것도 수가 굉장히  많습니다. 마음 속에는 기관이 많다, 모든 분자들이 많다 하는 그것은 다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주보다 복잡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그렇게  그 심리를 연구한 사람들이요 새 심리가 아니고 그 종교 창설자들이 명상 가운데  자기가 생각해서 사람은, 사람은 우주다, 우주보다 복잡하다, 우주는 단순하고  사람의 마음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한없는 것이 있다 그렇게 말을 합니다.

기독교에서는 뭐라고 말을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그 무한하심의 하나님의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시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속성은 그 무한하심에, 그 생각은 한  가지 생각만 아니라, 여러분들이, 예를 들면 풀 한 포기 이거 있는데 풀 한  포기를 지금 그 식물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이 풀 한 잎사귀 속에는 세포가  얼마가 들었다, 근육이 얼마나 들었다 이러지마는 그 속에 아무리 볼래야 보기  어려운 생명이 얼마나 들었다. 생명이라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안 합니다.

그러나 그게 제일 중요하다 그말이오. 그래 말을 하는데그 모든 것을 누가  하느냐? 그 모든 것을 누가 전부 세포를 만들었으며 세포가 지금 살아 있도록  작용을 하며 활용을 하고 있느냐? 그것을 주님이 홀로 주권적으로 그것을 개별  섭리해 가지고서 하시는데. 이것을 통해서 하시고 저것을 통해서 하시는데 당신이  하는 것이 딱 중단돼 버리면 이 모든 만물의 존재는 다 끝나 버리고 만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계시 5장에, 그 두루마리가 다 이렇게 말려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펼 자가 없다, 펼 자가 없다 그말은 이 역사의 전개가 없다 그말이오 역사의  전개가 없다. 역사는 그걸 그만 예수님의 대속이 아니면 역사 그거는 그만 끝나  버리고 말지 전개할 수가 없다. 왜? 그것이 하나님 앞에 거슬려져서. 하나님 앞에  거슬려졌기 때문에 그것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고 멸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늘에도 땅에도 그 두루마리를 펼 자가 없고 그 책을 펼자가 없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그 책을 펴더라.' 이 역사와 모든 존재들의 미래를  전개하게 됐다. 그분이 아니면, 그분의 대속이 아니면 미래의 전개는 중단되고  만다 그말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 사람의 마음이 자꾸, 죽어 있지 말고 마음이 어떤 사람은  그 고기덩어리 속에 마음이 하나만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둘이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셋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네 면을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다섯 면을 작용할  수가 있고. 열 면을 작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 수 많은 면을 작용하고 있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가 한 사람인데 한 사람인데 발표하기를 '눈이 안팎에  가득 찼다' 이랬습니다. '눈이 안팎에 가득 찼다.' 마음 안에 이 기관이 작용하니까  그 기관을 말해서 거기에 그 작용이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경영도 하고  활동도 한다. 그래서 마음 안에는 수많은 존재들이 있어서 이것들이 다 회의를 해  가지고, 수많은 존재가 회의를 해 가지고서 그 회의에 모든 다론들이 많이 있고  회의가 복잡해져 가지고서 차차 차차 이것이 회의가 합의가 돼 가지고 결의가 돼  가지고서 마지막에 하나로 나서는데, 어떤 사람은 그렇게 결의가 돼 가지고  하나로 나서는데 욕심이라는 그놈이 지금 주장을 해 가지고 그래 나서니까  거기에서 하나로 나서기는 나서지마는서도 마음 속에, 예를 들면 백 가지  기관이라 하는 것이 한 육십 가지는 단합이 됐지마는 사십 가지는 반대를 하고  있다, 그게 사람의 무능입니다. 그게 사람의 무능이라. 이게 합해져 가지고 있는데  합하는데 욕심 그놈에게 세력을 못 이겨서. 욕심 세력을 못 이겨서 욕심 세력에게  강제로 끌려 가지고 되는 것 있고, 이제 그게 아니고 모두가 이래 가지고 그 사람  속에 마음 속에 제일 세력 강한게 뭐이냐 하면, 제일 옳고 강한 것은 양심인데 그  양심의, 그 양심의 그 덕에게, 양심의 감화에게 양심의 그 설득에게, 양심에게  이해를 받아 가지고서 온 마음 전체가 양심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서 양심 중심의  결의가 합의가 돼 가지고서, 통합이 돼 가지고서 이렇게 작용한다 하는 그 사람을  가리켜서 양심의 사람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래서, 마음 안에 이런 복잡한 것이  있어 가지고서 회의를 해 가지고 결의를 해 가지고 있다가. 그 마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단순하게 그렇게 그런게 아니고 그 속에 수많은 것이 있기 때문에 '네가  입술로는' 입술로는 네가, 이 마음의 작용으로서 입술은 이래했지마는서도 속에  지금 그 다른 마음의 수천의 작용은 지금 딴 거하고 있다, 이것을 발표해서 '네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마음으로는 나를 멀 리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마음으로는 나를 멀리한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도 그렇습니다. 사람도 그 사람의  입술만 보고 인정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아주 무능한 사람이요. 입술만 보고  인정하는게 아니라 입술 보고, 그 입술보다도. 입술보다도 더 나타내고 있는 눈도  보고, 눈 보다도 더 나타내고 있는 그 피부를 보고 그 모든 걸 봅니다. 그 모든  걸 보고. 또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걸로 통해서 자기 안에 있는 마음을 들춰 다  본다 이거요. 마음을 들여다 보는데 마음 없는 입술 그것은 아주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마음 없는 입술 그거는 가증스러운 것이요, 마음 없는 행동은  가증스러운 것이라. 마음이 있어서 마음에 그것이 둔해서 뭐 이렇게 저렇게  발표도 못 하지마는서도 그 마음 속에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 성품이 모든 것이  똘똘 뭉쳐 가지고서 하나가 돼 가지고서 둔해서 발표도 못 하고 이래도 그 모든  것이 합해서 뭉쳐 가지고서 이렇게 행동할 때에 그 행동은 그 속을 보는 사람은  그 행동을 가치있게 본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예를 들면은, 아주 대접한다 하는 것이, 대접한다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 누른 밥 요걸 우리 강사 목사님께 대접하자 해 가지고  요걸 요래 가지고 품안에 요래 끼워 가지고서 요래 자꾸 돌아다니다가 만나지  못하니까 이게 몸에, 뭐 몸에 있는 때는 다 묻었지 바짝 말랐지 그저 참 흉한데  '이거 목사님에게 한번 드릴 것도 없고 변변찮은데 이거 좀 자셔 보십시오.'  드렸다 말이오. 그 보니까 벌써 땀이 묻었고 때가 묻었고 더러워 안됐다  그말이오. 그걸, 이거 먹고 강사 죽으라고 먹으라 하느냐고. 그래 인제 고만  바깥에 내 던져 버렸다 말이오. 딱 고라고 난 다음에 성령의 감화가 딱 끊어졌어.

성령의 감화가 끊어져서 고만 그 부흥사 집회하다가 은혜가 없어서 고만 집회를  못 하고 말았다 말이오. 그걸 암만 은혜를 회복할래야 회복을 못 하고 이래  있다가 나중에 '네가 껍데기' 그 물질 그것만 볼 줄 아는 사람은 고등 요리  주면은 속에 '히, 강사 이 거짓말쟁이. 이래 자꾸 이래 쌓고 있으니까 이거 한번  대접이나 하면 이래 놓으면 제가 좋아서 대접을 하니까 나한테 매수당해 가지고  이 사람은 참 강사를 대접하는 사람이라 이렇게 여길 것이다' 하고서 지금 돈을  들여서 대접을 떡 하고 이러니까 '아, 이렇게 잘 먹었습니다. 좋은 걸 대접합니다.'  하는 그자라 그말이오. 그자니까, '네가 사람의 그 물질만 보고 그 사람의  얼굴빛도 눈도, 그 육체도 보지 못하고. 육체도 보지 못하는 것이 그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이며, 마음도 보지 못하는 네까짓게 무슨 하나님 본다고 증거하고  있느냐?' 가증스럽다 그말이오. 그래서 그 강사가 그걸 회개를 하고 오랫동안  하는 가운데에서 그 은혜를 회복했다, 그런 말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구에 ○○○교회에 있는 사람이 없네요. ○○교회 있는 사람 이 저  ○집사 왔소? ○장로 장모 ○집사 왔어요? 이 추 집사가 갔으면 ○집사가  새벽기도 안 나오고 못 견딜 것인데 게을러졌구만, 그분이 죽었기 때문에. 좋은  일군 죽었습니다. 참. 있어 갈수록이 어떻게 마음에 아쉬운지. 그래 ○○교회에  있을 때인데. 집회를 하는데 모두 식사를 돌려가며 합니다. 돌려가며 하는데 하루  낮에는 '아' 말하기를 '오늘은 지금 아무 장로님이 대접하는데, 그 장로님이  대접을 하는데 오늘은 아주 좋은 서양 요리를 대접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저녁은 참 좋은 대접을 받겠습니다. 그라는데 나는 그때 강사로 가 있을 때에  그말을 들을 때에 나는 그게 마음에 좋지를 못했다 말이오. 그래 인자 '저는 오늘  낮에는 안 갈랍니다.' 이라니까 자꾸 가자고 이래. '안 갈랍니다.' 자꾸 가자고 해.

'그러면 안 갈랍니까?' 인자 안 갈라 하다가서 하도 가자고 쌓아서 억지로 끌려  갔다 말이오. 끌려 가 가지고, 주는데 이거는 뭐 보기도 싫고 먹기도  싫지마는서도 아주 안 먹으면 안될 것 같아서 할 수 없어서 조그매 먹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많이 먹었습니다. 많이 먹고 조금 먹고 이랬는데 그때 나도 큰 욕  봤습니다. 그날 저녁에 설교 못 했소. 다른 사람들은 그만 여러 날 고생했습니다.

일어나도 못하고, 저는 그 이튿날 새벽에는 설교를 했고 그 날 저녁에는 설교 못  했고, 저녁을 대접받았는데 저녁 먹고 설교 못 했어. 다른 사람들은 그만  사흘까지 드러누워 가지고서 고생을 했다 그거요. 그랬는데, 식중독이 돼 버렸어.

 나는 왜 그래 께끄름하냐 하면 이제 그것이 돈 있다 하고서, 돈 있다 하고서  이거 속에 아무 정성 한 내끼도 없고 돈 자랑하는 것이고 자기 자랑하는 것이고.

그놈의 자기 자랑 먹고 돈 자랑 먹고 할라 하니까, 그걸 생각하니까 가기가  싫더라 말이오. 가기가 싫은데 싫은 걸 조그매 찍어 먹고 그게 들어 가지고서  그만 속에 거석해 가지고 식중독이 돼서 설교 못 했습니다. 그날 밤에 마침  ○○○선생님이 집회 참석하러 왔어. 그래서, 아 내가 오늘 지금 못 먹을걸 먹어  가지고서 이렇게 설교 못 하겠는데 저녁 설교 하라고. 그래 저녁 설교를  ○○○선생님이 저녁 설교를 하고 새벽 설교는 제가 계속해서 했었습니다.

이러니까, 강사로 가면 여러분들도 여기 그런 경험 있을 것입니다. 강사로 가면,  아무리 좋은 걸 해 줘도 그 식사를 못할 때 있고, 아주 허무한 식사라도 잘 할 때  있습니다.

 제가 저 서울에 ○○교회에 집회를 갔는데 그 교회에서 그날은, 그때는 월남한  사람들이 거기 모두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니까, 강사 대접을 뭐 돌아가며 하는데  이 상이, 그때 상이 이만합니다. 이만한데, 여기, 그때 한 상에 그러니까 천 원  든다고 해. 천 원 든다고 하는데, 그때 천 원이면 요새 한 십만원은 좀 더  될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차리니까 막 수북하이 이래. 그런데 저는 일주일 동안  집회하면서 그 식사하러 가 가지고는 한 내끼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도 못  먹고 아예 그래서 고만 그 다음부터는 안 가고 다른 사람 다 식사하러 가라고  하고서 저는 바깥에 나가 가지고서 과일을 이걸 그래 사 가지고서 주인더러 좀  해 달라. 해서 동동동 썰어 가지고 이래 뭘 타 가지고 과일을 이거 하나씩 이래  둘러 마시고 집회하고 식사는 하나도 못 했습니다. 그렇츰 속에 마음 없는, 마음  없는 껍데기 외식하는 그 대접이라 하는 것은 나는 다니는 중에 그만침 내가  외식을 몰랐었어.

 그러니까, 여기에서 월남한, 월남한 성도들이 많지마는서도 참 외식이 많다  그말이오. 물질주의라. 물질뿐이지 속에 마음이 없고 정성이 없다 그 말이오. 마음  없고 정성 없는 그거 말은 해도 못 먹습니다. 못 먹고 다 토해 버리고 다 내버려  버리요. 실은. 먹는 줄 알아도. 사람도 거석한 사람은 물질보다 몸이요 몸보다 그  마음이요 마음보다 영입니다. '아, 이 사람은 신앙이 통해' 하는 그거는 영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이 통하면 아무래도, 영이 통한 사람은 금방 만나도 같은  수족같소. 나도 그 사람의 수족이요 그 사람도 내 수족이요. 또 친밀해서 아무  그런 것 없이 그만 둘이나 서이나 하나라. 그 사람의 일이 내 일이요 내 일이 그  사람의 일이요 그 안 팎이 다 같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외식하지 말고, 껍데기로 하나님을 대하지 말고 속이지 말고  저만 속는 하나님이 속는게 아니라 제가 절 속이는 것이지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처음에 뭘 말했습니까? '마음을 다하고' '마음을  다하고' 그게 없으면 안 됩니다. 이러니까 외식하는 행위를 하지 맙시다. 저만  속습니다.

 사람도 그렇소. 사람도 사귈 때에, 대화할 때에 말은 같이 하는데. 말은 같이  하는데, 그 상대방이 모르는 사람이고 예수 안 믿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대해지는 것은 다릅니다. 그 사람도 영은 죽었지마는서도 마음이 있기 때문에,  마음은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은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생전 초면이지마는서도 그 말하는 거나 그걸 볼 때에 마음을 봐 주는 것으로서,  다 같은 사람이 말해도 이 사람이 말할 때에는 그 사람이 기분이 좋고 이 사람이  말할 때는 기분이 나쁘고, 또 순전히 마음도 죽었고 고기덩어리만 있는 그런 아주  피상적인 아주 천한 인물이 있어. 천한 인물은 껍데기 용모나 보고 뭐 젊음이나  그런 것 보지 속에 있는 또 마음은 보지 않는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외식하지 말고. 이제 앞으로 좀 더 많이 계속해야 되겠는데, 이거 좀  알아야 되겠는데 이제 오늘 아침까지는 다 그라면 내비두고 속에 내용을 혹  해석을 하겠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외식하지 말아요. 외식하지 말아요. 그라면, 외식하는 거는 자기를 속이는  것뿐입니다. 외식하지 안하고, 이 세상에서 사람을 상대해서 살 때에는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하니까, 배암의 그 심리, 배암의 것을 다  알기는 알고 나는 그렇게 하지 안하고, 알기는 알고 그거를 방어는 해야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바로 조화있게 바른 조화를 가지기는 가지고, 상대방을 모르면  어찌 조화를 가집니까? 배암의 것을 모든 것 다, 마귀의 것이라 말이오. 마귀의  것이나 다 모든 것 다 알고 나는 행하지 안하고 그와 조화는 바로 가지지 안  하면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맙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리고. 자꾸 새벽 기도를 나오라고 자꾸 이래 권찰들 권면해요. 여러분들이  암만 가서 말해 봐야 소용없고 새벽에 나와서 배워야 알아야 신앙생활하지  모르는게 무슨 신앙생활합니까 하기를? 장로님들이라고 뭐 다압니까? 몰라요,  몰라. 장로님이 무슨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까? 영 아주 주일학교 학생들도  그보다 낫게 아는 학생들이 많이 있는데. 자꾸 말해서 새벽으로 와서 뭐이 육신의  외모는, 외모는 하늘나라 못 갑니다.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외모는 나는  부자다 나는 무슨 지위다 권세다 벼슬을 뭣 가지고 있다. 그게 외모자, 죽을 때에  없어지는 그거는 외모요. 영원히 없어지지 안하는 그것이 속에 알맹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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