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21:32
영육이 축복 받는 길
본문 : 창 13:5-18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13장 5절 "아브라함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거기에 다 수용이 안 된다 그말입니다. 용납지 못했다 그말은 거기에 두 집의 살림살이가 그 땅에서 살기에는 다 수용이 안 돼서 그 장소가 좀아 가지고 수용이 안 됐다 그말입니다. 못하였으므로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음이라" 그 소유가 많아 가지고 서로 같이 살 수가 없게 됐다는 것입니다. '없음이라' 7절에 "그런고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 투고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그 요 말을 보면 쫓아내는 것같이 그렇게 또 좁게 그래 보기 쉽습니다. 그 다음 말을 보면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그뭐 좋은 것은 하나 밖에 없는데 좋은 것 네가 하면 나쁜 것 내가 할 것이고 또 나쁜 것 네가 하면 좋은 것 내 할 것이고 그러니까 네 자율에 맡기니까 네 자유대로 선택하라 하는 요 말씀을 보면 나를 떠나라 요랬는데, 요런 것 좀 번역이 조금 더 잘 됐으면 좋을 건데 잘못하면 오해하기 쉽다 그말이오. 떠나라 하니까 똑 쫓아내는 것같이, 그라면 아브람이 롯을 학대하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게 번역이 돼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그러나 고 다음에 보면 그런 것이 아니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고 네 좋은 것을 택해라 그렇게 한 걸, 보면 그렇지 안하고, 또 뒤에 결과로 된 걸 보면 아브람은 가나안에 아무작도 쓰지 못할 물 없지 풀 없지, 거기서 뭐 목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만 전부 다 망하는 것이지 자기 직업이 망하는 거라. 소돔들은 그렇게 좋지 그래도 자기에게 속해서 따르는 사람들을 다 꼼짝 못하게 다스려서 얼마든지 타이르고 그들이 다 깨달아져서 마지막에는 양보를 하고 그렇게 나누어졌던 것입니다.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아주 참 에덴동산 같다 그말이오. 어떻게 좋은지 "동산 같고 또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런고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요단의 온 들을, 내가 요리 요리 하겠습니다. 경계를 그렇게 잡고 동으로 옮겨 가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이제 나눴다 말이지.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아무것도 없는 그저 물도 없지 발간 흙만 있는 이사야 49장에 보면 자산이라 발간 산이라 풀고 없고 뭐 발간 산에 그뭐 목축이 되겠습니까? 이제 다 망하는 것이지. 그래도 불평 없이 떠나게 된 이유는 뭐냐? 하나님 때문에 떠났다 그말이오. 모든 것보다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께 거치지 안하려고 떠났다 이거야.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우리가 여기에서도. 우리에게 계시해 주는 것은 소돔들이 모든 것이 풍성하고 또 형통 하고 그라면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될 터인데 사람은 이상합니다. 사람은 이상한 것이 풍성하면 죄인이 됩니다. 형통하면 죄인이 됩니다. 이러니까 모두 자기가 원치 않는 거슬리는 것이 있는 그것이 다 하나님의 사랑이오. 왜? 하나님이 당신에게 전지전능이 계시고 오만 걸 다 주재하고 주권하고 계시는데 그분이 못 줄 게 뭐 있으며 또 모자라는 게 뭐 있습니까? 없습니다. 못 줄 거 없고 모지라는 거 없지만 안 주는 게 주는 것보다 낫기 때문에 안 주는 것입니다. 안 주는 게 주는 것보다 나은 게 뭐인가? 나은 그것은 한 말로 말하면 교만이오.
주면 교만해지요. 주면 교만해지기 때문에 교만해지면 그 교만을 사람이 회개하기가 얼마나 어려우냐? 약 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했소. 겸손해지기가.
그만 사람은 눌려서 숨을 못 쉬게 근심 걱정 고통 이렇게 아주 그만 그런 일이들어 닥치면 볼 줄 아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 덕이 있고 아, 주 덕윤 이라.
덕이 있어서 윤기가 돼. 짜다라 돈을 많이 쳐 감아서 윤기가 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보면 다 그 사람 보면 참 감화가 돼지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아무도 악을 가하기가 싫고 그 사람을 뭐 대항하기 가 싫고 보면 다 모두 그 사람에게 동정을 하고 싶다 말이오. 동정을 하고 싶지 그 사람을 한번 악으로'네 그러니 나도 한번 대항해 보자' 하는 그런 것이 없을 만침 아주 덕 있는 사람이 돼서 이렇지만 그만 그것이 차차 차차 나으면 다릅니다. 육체의 이 병도 이 병이 차차 차차 나으면 그만 그게 달라집니다. 그만 사람이 달라지고 마음이 달라지고 강퍅해지고 불량해지고 뭐 참는 일이 없고 아, 그라면 나도 한번 해 보자 이리 달라들면 사람이 강퍅해서, 건강해지면 자꾸 사람이 강퍅해지고 악독해지고 불량해지고 점점 자기중심 자기 위주 자기주장 그만 그걸 내세우고 가지고 있는 것 그것 가지고 배짱을 냅니다. 이러니까 건강도 그러하고. 또 물질도 그래요 물질도 그러하고. 또 권세도 그러합니다.
이 소돔들이 멸망하기 전에는 뭐 여호와의 동산같이 그렇게 모두가 다 기름지고 모든 것이 다 풍성하게 되어지니까 소돔 고모라 성에 그 풍성한 게 무엇을 이루었느냐? 풍성한 것이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런 결과를 이루었으면 자꾸 풍성에서 풍성으로 자꾸 올라갈 터인데 그 풍성한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결과를 이루지 안했고 그 풍성이 들어서 점점 자기중심의 사람으로 더 강해져서 뭐 자기중심에 오만 것 다 하고 소돔 고모라 성이 그만 마지막에는 음란에 빠진 그런 자들이 됐고 아주 불량한 자들 이래 가지고 그런 나쁜 사람이 됐습니다. "소돔 사람은 악하여" 자기중심이어서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아주 하나님 앞에 전부 삐뚤어진 일만 한다 이거요.
우리가 자기 혼자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우리 서부교회 믿음의 식구들이 재적으로 말하면 아마 삼만 한 사오천 명 됩니다. 삼만 한 사오천 명 되니까 이 사람들이 전부 다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영만 복을 받아도 안 되겠고 육만 복을 받아도 안 되겠고 영과 육이 다 아울러서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이것이 문제입니다.
영과 육이 아울러져서 다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그러면, 복이 어디 있어서 하나 둘이 복 됐으면 복 됐지 한 동리에서 부자 하나가 있으면 부자 하나 그게 망해야 또 새부자가 나지 그 두 사람이 부자되기가 어렵습니다. 동리에 가보면 부자 하나 뭐 있거나 아무것이가 그때는 부자인데 지금은 아무것이가 부자입니다. 그러면 먼저 부자 그 사람이 망하면 또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됩니다. 그렇지 우리 서부교회 교인이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 다 합하면 서부교회 교인으로서 다 재적이 되어 있는 이름이 기록되어 가지고 등록되어 있는 그 숫자로 말하면 한 삼만 사오천 됩니다. 삼만 사오천 되는 이 사람이 어떻게 다 복을 받겠습니까? 또 우리 한국 교회로 말하면 얼마나 많습니까? 세계 교인으로 말하면 얼마나 많습니까? 이 숫자가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 다 복을 받아 가질 수 없겠다 이렇게 사람들은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께는 무한합니다. 아무리 우리 믿는 사람이 많다 해도 그 숫자는 세아려 보면 다 한정이 돼 가지고 있지 무한한 숫자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두 가진 것이 다 무한이라. 무한이고 얼마든지 창조할 수 있어.
이러니까 하나님이 모지래서 우리에게 복을 못 주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또 주기가 싫어서 못 주는 것 아니오. 성경에 말하기를 '모든 것을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안한다' 꾸짖지 안한다 그말은 후히 주시고 쪽 빼지 안 한다 그말이오.
꾸짖지 안한다 그말은 사람이 좀 뭘 한 번 얻으러 가고 두 번 얻으러 가면 그 사람이 주기는 준다 해도 뒤로 저뻥하이 그렇게 쪼를 빼면 아야 굶었으면 굶었고 곤란하면 곤란하지 얻으러 가기 싫다 그말이오. 그러나 주시고도 항상 받은 자보다 준 것을 좋아하고 또 받으러 오니까 주면서 좋아하는 것 그게 사랑의 세계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자식이 부모에게 받지만 부모에게 받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돼서 부모가 줄 때에 자신이 받을 때에는 부모 마음이 흡족하고 좋습니다.
거기에는 뭐 시기나 그런 것 없고 자꾸 좋소. 자식이 자꾸 부모에게 받을 수 있는 사람 또 이렇게 무엇이 잘 돼 나가니까 부모 마음이 좋다 그말이오. 그러나 사랑의 세계가 아니면 시기가 있고 질투가 있지만 사랑의 세계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러니까 우리 서부 교인만 해도 이만한 많은 수가 전부 다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영도 복을 받아야 되고 육도 복을 받아야 되고 다 복을 받아야 되겠습니다. 지혜의 복도 받아야 되고, 능력의 복도 받아야 되고. 또 기쁨의 복도 받아야 되고 평강의 복도 받아야 되고. 서로 화평하는 화평의 복도 받아야 되고 모든 사람을 관용하는 관용의 복도 받아야 되고, 이해의 복도 받아야 되고, 오래 참고 견디는 인내의 복도 받아야 되고, 또 겸손의 복도 받아야 되고, 강하고 담대한 복도 받아야 되고. 또 부지런한 그 복도 받아야 되고, 모든 것을 다 조절할 수 있는 조절의 복도 받아야 되고, 이런 복을 뭐 복이 얼마나 많은지 이런 복을 다 우리가 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이 이런 걸 다 주시지 하나님 외에는 이런 것을 사람에게 줄 자가 없고 또 가진 자가 없습니다.
이런데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복 주실 이는 하나님이신데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츰 많은 사람에게 어떻게 복을 줄 수 있겠느냐,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많은 사람에게 복을 줄 수가 있느냐? 하나님은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그분은 무한하신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생각할때에 풀 요까짓 거야 요 단풍나무 요런 거야 과학자들이 생각하면 요 얼마 되겠느냐 하지만 과학자가 아무리 제가 과학 만능이라고 떠들어 쌓아도 요 단풍나무에 대해서 알대로 다 알지 못했습니다. 왜? 지금과 또 좀 지나가며 은 또 지식이 또 새 지식이 나옵니다.
아, 알고 보니까 그것 아니라 또 더 알 게 있고 또 더 알 게 있어. 요 나무 한 개에도 20세기 과학이 떠들어 쌓아도 다 모를 만침 그만침 세밀히 모든 것을 능하게 하시는 분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전지전능자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얼마든지 있어. 복이 얼마든지 있어. 이제 말한 대로 그 복 우리가 모든 면에 도덕면이나 또 활동면이나 비판 면이나 평가면이나 또 소유면이나 자기의 평강면이나 쾌락면이나 강하고 담대한 면이나 뭐 이렇게 모두 다 명랑한 면이나 뭐 복 받을 복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복은 하나님이 얼마든지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고게 말이요 큰 죄라. 산아 제한을 하는 사람들은 왜, 산아 제한을 하느냐? 저거 딴에는 아주 큰 아주 무엇이나 발명을 해 가지고 아주 커다란 것을 조절하는 줄 알고 이거 수지 계산을 맞추어야 되지 자꾸 소비만 하고 수입이 없으면 안 된다 크게 수지 계산 맞춰 가지고 인구는 많고 다 에너지는 제한돼 있으니까 이렇게 해 가지고 제한하지만 그것 다 하나님 앞에 망령이요 죄를 지어서 망할 종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도 꼭 같게 요렇게 뭐 하나가 남녀 동침해 가지고 잉태해 가지고 낳아야 되는 줄 압니까? 그런 것 아니요. 이 죄 값으로 그런 것이지 하나님은 낳구로 할라면 사람을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명도 낳을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놓을 수 있느냐? 지금 낳을 수 있는 것은 바이러스 균 같은 그런 균은 일 초 동안에 억억만 마리가 더 됩니다. 억억만 마리도 더 나옵니다. 번식이 그만침 된다. 사람도 될 수가 있소. 있는데 왜 요렇게 하느냐? 요 죄를 짓기 때문에 그 죄를 돌이키고 거기서 회개하도록 하기 위해서 죄 짓는 자에게 조절하느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 꼭 열 달 동안 배어 가지고 있어야 애가 나오는 줄 압니까? 아니요. 인류 시조 하와는 아담에게 배지 안했는데 남자가 아이 낳았소. 아담에게서 당장 하와가 나오지 안했습니까? 이런데 예수님이 축복하시면 얼마든지 될 수가 있는데 아이를 적게 낳아야 된다 산아 제한 고 말이 하나님의 저주 저주 담뿍담뿍 저주가 갑니다.
그런데, 산아 제한을 반대하는 그것을 천주교에서 반대를 했고 천주교에서 반대를 했고 여호와 중인에서 반대를 했고. 한 사람들은 꼭 이단자는 그걸 아십시오. 그 사람들이 정통인가? 아니야. 이단자들은 정통에서 지키지 안하고 빠진 것이 있으면 그놈을 거머쥐고 마구 자킵니다. 고 지키면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있으니까 보라 아, 저걸 지키는 것 보니까 저기 참 정통이로구나 이래 가지고 사람들이 그거 정통이라고 인정받기 쉽다 말이오. 그러니까 정통자들이 지키지 안하고 빠져 놓은 교리는 반드시 이단자가 지킵니다. 이단자가 지키는 것은 그것 가지고 선전해서 봐라 너거는 그런데 이거는 어찌냐? 이러니까, 여호와의 증인이 국기배례 안 합니다. 천주교 산아 제한은 반대합니다. 반대하는데 지금은 그만 차차 차차 탄압이 심해지고 이라니까 또 거기서 반대하는 무리들이 많고 이라니까 슬슬 좀 타협이 돼 가지고 가는 것 같애요.
그라고 교황 바오로 2세가 요번에 왔다 갔는데 교황이 왔다 갔는데 사람들이 아주 교황에 대해서 굉장히 존경심을 가지고 이렇게 다 모두 존대합니다. 이런데 여러분들 잘못하면 넘어 가기 쉽다 그거요. 바오로 2세 교황, 천주교 교황이 왔다 갔는데 그 교황의 신앙을 그 교황의 신앙을 첫 째 아브라함 하고 비교를 해야 됩니다. 아브라함 신앙과 교황 신앙이 어떠냐, 이삭의 신앙과 교황의 신앙은 어떠냐, 야곱의 신앙과 교황의 신앙이 어떠냐 사도 바울의 신앙과 교황의 신앙이 어떠냐, 사도들 신앙과 교황의 신앙이 어떠냐? 보면 그 교황은 다 도덕주의요 불교적이요, 도덕주의요, 신앙주의가 아닙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그런 것 아니오. 이러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꾸 시대로 자꾸 속화돼 나가면 거기에 따라서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늘 말하는 것이 기독교 도덕주의 그 도덕주의는 사람들이 좋다고 환영을 합니다. 기독교 도덕주의, 이러기 때문에 그 불교가 무슨 주의냐 하면 그는 대자 대비주의요 대자 대비주의 그러니까 그것도 사랑주의요 그것도 대자대비인데 도덕에 따라서는 모든 일반 사람들의 이 모든 보편 생활에 있어서는 아무런 유익이 덕이 없다 이래 가지고 불교는 염세주의요 그는 이 모든 일반적인 그런 덕이 없다 이래 가지고 기독교를 모든 사람이 비판하기를 그는 염세주의라 이렇게 그만 비판하고 말았다 그거요.
우리는 모든 면으로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요 면만 복 받고 저 면을 복 받지 못하면 기형이라. 어떤 사람은 귀만 이만하고 한쪽 귀만 이만하고 그 몸뚱이는 조그만하면 병신 아니요? 요새 또 눈 큰 걸 좋다고 거석하지만 눈 큰 게 좋기는 뭐냐? 옛날은 또 눈 큰 게 좋은 게 아니라 눈이 쪽 째져서 요래 눈이 요래 딱 째진 것 또 그걸 좋아했습니다. 왜 그러냐? 이 인간들은 아무 질정이 없어. 왜 그러냐? 아, 눈 큰 사람들이 잘 사니까 요새는 눈 큰 걸 좋아하고, 또 옛날은 쪽 째진 사람이 잘 사니까 또 째진 걸 좋아했고, 옛날은 키가 조그만 했으면 다 잘 사니까 키가 조그만한 사람을 다 좋아했고, 지금은 저 서양에 갔다가서 있으니까 모두 키 큰 사람들이 잘 사니까 키 큰 사람을 좋아하고 그렇습니다. 또 옛날은 말이요 배 가 불룩한 사람들이 잘 사니까 배가 불룩하면 또 더 잘 봅니다. 배가 불룩, '아이구 그 사람 배 불룩하니까 사람 괜찮다 의인이다' 이라고, 요새는 또 배가 훌쪽한 사람들이 모두 잘 사니까 훌쪽한 걸 좋아하고. 인간들이 비판 이라 하는 그까짓 것 똥 같은 비판이요, 인간들의 비판 그까짓 거는 하나도 쓸모가 없고 가치로 칠 게 하나도 없어. 성경에 말씀한 것이라야 우리가 인정하지 인간들은 뭐 이라면 이라고 저라면 그 아무 절정이 없다 그말이오.
이런데,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런 복 저런 복을 모두 다 겸하게 받아 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 떡 갈 때도 흠 없는 그런 사람이 돼 가지고 가야 되는 이것이 참 복입니다. 언제 떠날지도 또 모릅니다. 뭐 젊다고 안 떠나요? 모릅니다. 건강하다고? 건강해도 소용없어.
며칠 전에 여기 대신공원에 아침마다 이 물통 들고 가 가지고 뭐 가 서 고함 쾌쾌 지르면서 등산하고 오래 살라고 그래 가 가지고 그래 가지고 물 가져 와서 또 생수 먹고 좋은 공기 마시고 이라니까 자기는 오래 살고 자기 가족들은 가지 못하고 있으니까 집에서 밥이나 하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저만 오래 살겠다고 돌아다니다가 이제 저만 오래 살라고 갔다가 어떤 사람은 또 그러니까 자기 부인 데리고 가고 또 아이들 데리고 가고 이렇게 합니다. 이랬는데 생수 그것 가지고 와서 아침 먹고 인제 세수는 하고 아침 먹고 양치하러 가 가지고 안 나와. 아, 가보니까 그만 그 자리 서 죽어 버렸어. 그게 우리에게 자연계시 라. 공기 많이 마셔도 그것도 그 저 한계가 있지 하나님이 축복 안 하시면 안 돼. 또 아무리 운동을 잘해서 건강해도 소용이 없어. 하나님이 축복하시야 되지.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같이 둥글둥글하게 축복을 받아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축복을 성경대로 받았어. 성경대로 신앙으로 받았어.
아브라함은 신앙의 사람이라. 이런데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디 있는지, 아브라함이 대자대비 그 짓 안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 천주교 교황같이 그리 다니면서 옷을 이런 옷을 입고 아주 장식을 이래 꾸미고 저래 꾸미고 '오 대자대비라' 이래 가지고 그런 짓 하지 안했어. 어디 기어 오그려 들어가 가지고 뭐 요렇게 쥐구멍이 오그라지게 그렇게 그랬지 그저 은밀한 가운데 하나님만 상대해 가지고 꼼짝을 못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이 뭐이냐? 현실에서 자기 닥친 현실에서 언제든지 현실마다 아 이 시간에 나 좋게 하느냐 하나님 좋게 하느냐 그것만 생각했어. 나 좋게 하느냐 인간 좋게 하느냐 그게 아니라 나를 좋게 하느냐 인간 좋게 하느냐 그거는 뭐는지 몰라도 하나님 좋게 하느냐 인간 좋게 하느냐 그게 아니고 하나님 위에 인간 좋게 하는 것이 그것이 다 기독교 도덕주의입니다. 기독교 도덕주의.
교황이 왔다 갔는데 내가 보기에는 신앙으로 참 했으면 좋겠다 싶은 것 그런 것 하나도 없어. 전부 기형적으로 다 교회를 한국에 있는 교회를 한국 교회를 모두 구제 교회가 돼야 된다, 불우의 이웃 돕는 이웃 돕는 그 교회가 된다. 전도하는 거 어짜는 거 그런 거는 아니고 어디, 나환자들이나 모든 불교나 이런데 찾아다니면서 다 이라니까 아, 그분은 대자 대비한 사람이다 참 사랑의 사람이다 이렇게 말했지 예수를 믿으라 성령을 받아라. 하나도 신앙적인 그런 설교는 한 마더도 하고 간 일이 없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눈을 떠야 됩니다. 그만 그이의 신앙과 아브라함의 신앙을 비교 해봐. 그 신앙이 같은가? 그분의 신앙과 사도들 신앙을 비교해 보라 말이오. 같은가? 그것을 가리켜서 기독교 도덕주의라 그래서 그 도덕주의에 빠지면 안 됩니다. 천주교는 기독교 도덕주의입니다.
이래서 해방 전에는 우리나라가 다 배가 고팠기 때문에 여기에 옥수수가루 죽, 옥수수가루 죽 그때는 참 곤란했습니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거기서 죽을 끓여 놓고 배급을 해 줍니다. 이러니까 내가 여기 위에 올라 가보니까 사람들이 죽 늘어서 가지고 있고 이래 모두 보니까 박지기 요만한 박지기 뭐 하나 들고 왔는데 '저거 무엇입니까' 이라니까 '죽 타 가지고 가는 것 아닙니까' 죽을 타 가지고 간다. '어디서 타 가지고 가는 겁니까?' '아 천주교에서 아침저녁으로 죽을 주는데 죽 타 가지고 간다.' 아 그것도 좋은 일이지요.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 이제 죽 타 먹으러 가는 그것 때문에 사람들을 그랬지만 이 부산서는 천주교가 용납 못 합니다. 천주교가 부산서는 활기를 못 핍니다. 교황이 부산 안 왔지? 부산 왔다 갔어? 부산 어디 갔다 왔어? 어? 수영 비행장에. 그 뭐하러? 여기 부산은 부산은 올 일 없다는 말 들었는데 부산은 신조와 교리, 기독교 참된 기독교. 부산은 한국에서는 부산이 신앙이 제일 낫습니다. 한국 안에서는 부산이 신앙이 제일 낫고, 그 다음에는 대구, 셋째로 서울 서울이 제일 허무합니다.
이러니까 여기에는 그런 게 와야 또 통일파도 부산은 와야 발 못 붙이오. 부산에 와 발 못 붙입니다. 또 전도관도 부산에 와 가지고 발을 못 붙이오.
우리는 신앙이 구비해야 되는데 이렇게 복 받는다 사람들은 단순히 생각해서 돈만 있으면 복 받은 줄 알고 밥만 있으면 녹 받은 줄 알고 밥만 잘 먹고 건강만 있으면 복 받은 줄 알지만 그것도 복이지만 그 복은 아주 사소한 복이요, 내가 여러가지 복 말했지요. 그 복이 다 큰 복들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복을 받아야 되겠는데 복을 나만 받을 게 아니라 나로 말하면 지금 서부교회에 속한 식구가 한 삼만 오천 되니까 삼만 오천이 다 복을 받아야 내가 복을 받은 것이지 이만 명만 복을 받아도 나는 반 밖에는 복을 못 받은 거라.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다 복을 다 받아야 되니까 삼만 오천 명이 다 복을 받아야 되겠고, 또 크게 말하면 또 우리 한국 교회가 다 복을 받아야 되겠고, 또 크게 말하면 세계 교회가 다 복을 받아야 되겠다 그거요.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하기를 세계 교회를 다 기도하지 않습니까? 그 기도 하는데 넓어 놓으니까 많은 기도하지 못하고 간추려 말하면 두 가지 종류의 나는 기도합니다. 하나는 뭐이냐?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 그렇게 기도합니다. 왜? 회개의 은혜는 회개의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은 회개하면 하나님의 노를 풉니다.
하나님이 이놈 밉상이다 하는 하나님의 노를 풀게 돼. 또 하나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이 믿음을 달라고 그래 기도해요. 믿음을 주는 것은 뭐이냐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라. 하나님의 노를 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다 돼요.
뭐 산아제한 안 해도 됩니다. 이런데 요새 보면 그만 의례히 아이 둘 낳으면 더 못 낳을 줄 알고, 또 보니까 더 낳을 수도 없어. 보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위생주의를 하는데 어떻게 병이 들어 났는지 아이 서이 놓으면 꼼짝을 못 해요.
아이 서이 낳으면 그만 꼼짝을 못 하고 이런데 옛날이야 아이 열까지 낳았소.
아이 낳고 자기가 들어서 첫 국밥 해 먹고 또 아이 낳고 첫 국밥 해 먹고 또 들에 일하는데 또 밥해 가지고 또 갖다 주고 그랬다 말이오. 이랬는데 이것도 다 이거 문화가 늘어가니까 전체를 보면 이 문화가 늘어가니까 모든 건강이 진보된 게 아니라 전부 병적이라. 요새는 아이를 낳아야 젖이 안 나와요. 아이 낳아야 젖이 안 나오니까 전부 인조 젖을 먹어 그리 아니면 여기에 뭐 인조 젖이라.
소젖도 가루 만들어 놓은 그것 인조 젖 아니요? 사람이 가공한 젖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얼마 좀 지나면 아이 많이 낳은 사람들이 세도가 있을 것입니다. 아, 암만 그래 봐야, 그까짓 것 뭐 그래 봐야 아들도 하나 손자도 하나 아버지도 하나 할애비도 하나 이러니까 삼대 독신사대 독신 그래 놓으니까 그까짓 것 뭐 힘을 쓸 수가 있습니까? 힘을 쓸 수가 없다 그거요. 이런데 보니까 암만 꺼주리 해도 아이구 그놈의 떼시리기 뭐 일어나면 아 들도 보니까 뭐 칠 형제 칠 남매, 또 손자도 칠 팔 남매 그러니까 자, 칠 이 칠 일어나면 되면 얼마? 칠 칠이 사십 구, 한대 가니까 사십 구, 또 사 대 가니까 사십 구니까 얼마됩니까? 사십 구에 칠이면 얼마고? 사칠 이 십 팔, 칠 구 육십 삼 아, 삼백 사십 몇 명이로구먼. 한 삼백 사십 몇 명이라. 이래 놓으니까 지금 미국이 뭐라고 쌓아도 흑인종에게 이제 앞으로 뺏깁니다. 뺏길 수밖에 없어. 왜? 그 사람들은 다른 것은 나쁘지만 산아 제한 안 해요. 이러니까 아이만 자꾸 낳아 놓으면 낳아 놓으면 또 이 미국 사람들은 자비한다고 이것 길가 갖다 낳아 던져 놨으니까 이것 또, 길러야 되지, 또 기르면서 이거 선한 일 한다고 애를 쓰는데 야, 이놈의 새끼야 선한 일보다도 너가 왜 새끼 안 났노? 네 새끼 낳아서 기르지 왜 그랬노? 안 낳으니까 딴 사람이라도 낳아서 길러야 될 것 아니겠소? 짐승도 보면 제가 낳아 가지고 기르지 안한 것은 다른 게 기르고 제가 안 낳은 것은 항상 남이 낳는 것 기릅니다. 여기 저 멧새라는 게 있는데 멧새 그거는 멧새 그거는 항상 제가 안 놓은 새저리가 알 낳은 새저리 기르요. 그러면 멧새는 또 요만한 게 요만한 게 이만한 새저리를 기릅니다. 나중에 보면 이놈이 길러 놓으니까 자꾸 물어다 주니까 처음에는 엄마인 줄 알고 좋았지만 나중에 보니까 물어다 주는 것 그것 가지고 배가 고파 안 되거든 이러니까 그만 애미 멧새 오는 걸 콱 물어. 가지고 잡아먹을라고 콱 물으면 아, 죽을 뻔하다가서 또 그만 석방이 되니까 달아나 가지고 겁이 나면서도 그래도 또 하나님이 그래 키우라 하니까 못 견뎌서 또 메뚜기를 잡아다 또 요렇게 갖다가 요래 먹이는데 조심해서 먹입니다. 조심해 먹이다가 한 서너 번 잡아먹힐라고 이래 하다가 보면 그 다음에는 아이구 안 되겠다 싶어서 도망쳐 버립니다. 이 모두 다 보면 별별 이치들이 있다 그거요.
이러니까, 인제 우리 교회는 이 주일학교를 지금 만이 주는 것은 나도 그것도 한번 생각해. 산아 제한 안 하거든. 아이 믿이 낳아라. 이라니까 서부 교인 있는 데는 막, 아이가 우굴우굴 합니다. 우굴우굴 해. 자 요새 아이 많이 낳은 사람 누가 많이 났는고 보자. 여기에 일찍 결혼한 사람 ○○○집사 왔어? 손들어 ○○○, 아이 몇이야 손가락으로 가르쳐 봐? 어? 다섯, 아이구 그라면 얼마 안 낳았다. 다섯 그까짓 거야 다섯이야 누가 못 낳아 다섯은 다 낳아요. ○○○씨 아이 몇이야? 여섯, 아이구! 그것도 뭐 얼마 안 된다. ○○○씨 얼마야? 열 하나, 열 하나 그래 열 하나 낳았는데 그래 부인은 나이가 육십 네 살인가 먹는데 영 청년이라. 하나도 피곤한 것 몰라. 보니 건강하고 그만 아주 건강해서. 이러니까 아이 낳는다고 약해지는 것 아니요. 이러니까 앞으로 아이 많이 낳은 사람이 다 차지할 것인데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이를 귀중히 여기니까 너거에게는 아이를 주자 이래 가지고 아마 주일 학교 학생들을 많이 보내 주는 것 같애요. 이라면에 너지 생각 안 하고 자꾸 저란다 해 가지고 이것도 나중에는 그거 주장을 하면 잡아다 죽일 겁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돼요.
이런데,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면 우리 영과 육이 금생 내세가 전부 다 잘 살 수 있는데 왜 축복을 못 받느냐? 축복을 받을 행위를 하지 안하니까 못 받는 것 있고, 또 하나는 축복 받을 행위는 하기는 하는데 축복을 주면 도리어 화가 되기 때문에 축복을 줄 수가 없고 근근히 지낼 만침 줍니다.
자, 축복 받는 비결은 뭡니까? 세 가지. 간단해요. 세 가지 뭡니까? 첫째 현실에서 첫째 자기를 생각하느냐 주님을 생각하느냐 자기 좋게 하느냐 주님 좋게 하느냐? 요게 첫째입니다. 현실에서 나 좋게 할라면 요래야 되겠고 주님 좋게 할라면 요래야 되고 그러면 쉬 알아듣게 나 좋게 하느냐 주님 좋게'하느냐? 여기서 결정됩니다. 자기 좋게 하면 누구의 걸음 따라 가는 거요 롯의 불신, 또 하나님 좋게 하면 아브라함의 신앙 따라가 아브라함의 신앙 따라 가는 것이고, 고 다음에는 뭡니까? 사람들의 의사 또 하나님의 의사 사람의 뜻 하나님의 뜻 요 둘이 현실에 반드시 서로 봉착되고 있습니다. 이런데 사람의 뜻을 생각하면 누구의 자손입니까? 자, 사람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앞세우면 롯의 자손입니다.
또 인간 의사보다 하나님의 의사를 앞세우면 누구의 자손입니까? 아브라함의 자손 뭐 쉬워. 아브라함의 자손은 홍하고 롯의 자손은 망해요. 이거는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져 보면 이치가 그래요. 그냥 이렇게 그렇다는 게 아니야.
이치가 다 그래 돼 가지고 있어요.
셋째로는 뭡니까? 눈에 보이는 그 모든 좋은 조건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중하게 여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 조건이 만반에 구비가 된 이 좋은 조건 이것을 내가 춰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고 축복을 거부 하게 되겠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라 하면 이걸 내놓아야 되고 요럴 때 있다 말이오.
하나님의 축복도 받고 보이는 것도 받고. 둘 다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좋지만 가다가는 이 보이는 것, 이것을 내가 손해 안 볼라 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못 받겠고 하나님 축복을 받을라하면 보이는 것 이것 손해 보여야 되겠고 이렇게 둘이 이렇게 서로 상충 될 때가 있다 그 말이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고 보이는 것은 아깝지만 그 하나님의 뜻을 어겼을 때에는 뜻에 맞추어서 내놓아야 되는 요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아브라함의 신앙은 그만 영과 육이 복을 받고 아브라함이 복을 얼마나 받았소? 아브라함이 복 받은 것은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은 수를 받았다고 했는데 아브라함을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하지 말아라. 육체의 자손으로 말하면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믿음의 자손이 그렇게 많다' 그랬습니다. 나도 말이오 교훈적으로 말하면 내 자손이 얼마나 되느냐 하면 이만 사오천 명이라.
이만 사오천 명. 나는 그래 여러분들이 내 믿음의 자손이라 그렇게 생각해요.
이만 사오천 명. 육체의 자손이야 뭐 몇 안 되지만 이만 사오천 명, 또 이만 사오천뿐 아니라 이제 우리 진영에 이렇게 사람을 이래 생각을 하면 지금 십 몇만 돼요. 십 몇만 믿음의 자손은 십 몇만 그래도 교훈을 받아 자꾸 먹고 하는 것이 그거는 연결이 있다 말이오.
이런데, 그 모든 사람이 다 영과 육이 아울러 복을 받아야 되는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많이 받았어. 우리가 자꾸 나도 지금 요 현실에서 나 좋게 하지 안하고 하나님 좋게 현실에서는 나 좋게 하는 것 사람 좋게 하는 것 보다 하나님 좋게 현실에서는 사람 좋게 하는 것도 아니고 현실에서 하나님 좋게 하나님 좋게 함으로 사람 좋으면 좋고 하나님 좋게 함으로 나 좋으면 좋지 하나님 좋게 하는 요걸 시켜서 하나님 좋게 하는 요 중심으로, 또 현재에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의사를 딿는 요 중심으로, 또 현실에서는 보이는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축복 위주로 요렇게 나아가면 복은 받을 수 있다 그거요.
복은 받을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지 안하고 조그매만 주고 또 줬다가 뺏들었다가 줬다가 뺏들었다가 요렇게 많이 주지 못하는 이유는 뭐이지? 우리 ○○○권찰님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왜 많이 못 주지요? 얼마든지 못 주는가? 얼마든지 주면 좋을 건데 얼마든지 왜 못 줘? 아 대답해 봐 얼른. 어? 대답은 하면서 왜 뭐 더 색채를 낼라고? 예, 받아 가지고 잘못 쓸 것이기 때문에 안 주는데 잘못 쓰는 것 뭐입니까? 잘못 쓰는 거는 다른 것 없어요 교만이오.
어짜든지 하나님 좋게, 또 하나님의사 하나님의 축복 요 세 가지만 자꾸 계속해서 생각하면, 천하 것을 다 자기가 차지했다 할지라도 잘못 쓸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씨 한번 해 봐. 잘못 쓸 수 없지. 요 세 가지만 생각하면 교만할 수 있을까 없을까? 교만할 수 없어. 요 세 가지만 생각하면 세 가지 생각하니까 축복 받고. 또 세 가지 생각하니까 받아 놓은 것도 또 잘 사용하고, 또 세 가지 생각하니까 또 더 받게 되고 얼마든지 요 세 가지만 생각하면 자꾸 잘 됩니다.
요렇게 요긴한 것 요지 요것을 딱 까 가지고 입에 딱 넣어 줘도 삑삑삑 씹어 내버리고 안 먹으니 이렇게 까 가지고 요리를 만들어 입에 탁 어 넣으면 사르르 녹구러 요래 만들어 줘도 안 먹고 끼억끼억 개어 내니까 이제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저 요런 것 흘딱흘딱 둘러 마시야 돼요. 요번에 대구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복종하는 고거나 이거나 다 한가지라. 그거나 이거나 다 한가지야. 각도가 틀리지.
이러니까, 우리가 전부 다 복을 받아야 되겠으니 복 받는 데는, 그저 복을 받아 놓으니까 그 복을 잘못 쓰는 거, 또 그 복으로 쪽을 빼는 것 그 말이 있어요.
'권불 십 년이요 조불 삼 년이라' 권세를 부리는 것은 십 년을 안 가고 쪽 빼는 거는 삼 년 안 간다. 쪽 빼는 그게 더 보기 싫어. 쪽 뺀다 말 압니까? 쪽 뺀다 말은 뭐 좀 있으면 쪽을 쭉 빼는 것, 권세 부리는 것은 좀 다른 사람을 이래 위협하고 그만 누르고 독재고 이러지만 쪽을 빼는 아주 있다고 다른 사람을 업신 여기면서 삐쭉하이 쪽을 빼는 것 쪽 빼는 거는 참 보기 싫어. 이러니까 뭘 얻으러 가도 쪽을 빼면 아야 죽었으면 죽었지 얻으러 가기도 싫다 말이오. 안 그렇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복 받을 길을 자꾸 하는데 복을 줄 수 없는 것은 복을 받아서 감당을 못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내 어제 아래 어제 와 가지고 몇이 와 가지고 나는 어째 그렇습니까? 내가 하나님 아닌데 그거 압니까? 나는 어째 어째 몸이 좀 피곤하고 약합니까? 나는 그거 진찰 못 하지. 못하는데 나는 한 말로 말했어. 어짜든지 다 모두가 다 회개할 병입니다. 우리가 고칠 병이라. 고치면 돼. 고치면 자꾸 되고 고칠 병이라. 이러니까 고칠 병이 뭐입니까? 그게 뭐뭐 딴 게 뭐 있겠습니까? 다 교만이지. 나는 그 짐작만 그래 하고 남의 일을 내가 알겠소? 자기 일은 자기만이 안다 했소. 자기 일은 자기만이 사람에게 물을 것이 없다. 네 안에 있는 기름 부음만이 너에게 바로 가르쳐 주지 다른 이는 가르쳐 줄 이가 없다.
이러니까 더듬어 보라 그말이오. 더듬어 보라. 이래서 아, 저 사람은 건강을 받으니까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고 건강 받으니까 저 사람은 건강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익 본 사람이 많다. 저 그 사람 건강 때문에 그만 어떻게 설치는지 건강 때문에 손해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래 돼 버리면 안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받아 가지고 잘못 쓰고 받으므로 많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자기가 망쳐질 판이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안 주시고. 그러니까 받을 방편을 쓰지 안해서 못 받는 것, 또 받아 가지고 이것을 간직을 잘못해서 못 받는 것 오늘 아침에 둘 배웠습니다. 받을 방편은 잘해도 간 직 못 해도 안 되는 것, 또 간직은 잘하려고 해도 받을 방편을 안해도 안 되는 것, 받을 방편도 싶고 간직도 잘하고 (저 꽃마을에 할머니 아들 알아들어? 뭐 공부 뭐 이래 가지고 고시 시험친다고 막 이래 떠들어 쌓는 그것보다도 이거 그만 이걸 해. 하나님 앞에 축복 받고 자꾸 축복 받고 또 잘 쓰고 축복 받고 잘 쓰고 이라면 당장 하늘같이 올라 갈 건데) 이 외에 복 받는 길이 없습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당장 자기 현실에서 그날에 그만 표납니다. 자기 현장에서 이 시간 요 세 가지 생각하면 아이구 나는 사람을 좋게 하고 하나님 좋게 한 사람이 아니다. 나 좋게 하고 하나님 좋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라면 신앙에 덕이 있는 게 아니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잘 보이지만 신앙에는 덕이 없다 이 뭐 생각 하면 환하게 알 수 있어. 이러니까 이 걸음 걸을라 하면 장 거슬려서 장 싸우는 걸음이고 고난당하는 걸음이라. 뭐 하나님에게 얼마든지 있는데 뭐 염려할 게 뭐 있는가요? 어짜든지 밑에 물은 있으니까 파요. 자꾸 파면 물이 나와요. 파면 물이 나오고 또 이제 자꾸 푸면 물 자꾸 나와. 푸면 자꾸 나와. 하나님에게 복 받을 걸 하고 복을 주시거든 복을 잘 사용하고 그라면 뭐 얼마든지 무진장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