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육관

 

1986. 3. 23. 주일오전

 

본문:에베소서 4장 17절∼24절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본문 해석을 간단하게 증거하겠습니다.

어떤 감동이나 기분이나 그런 작용이 있기를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본문을 해석을 할 때에는 본문 해석을 자세히 들으십시오. 어떻게 해석을 하는가? 그저 성경 말씀을 근거하지 안하면 열심 있는 사람은 열심 있는 것으로서 자멸을 하고 게을한 사람은 게을한 사람으로 자멸하고 유식한 사람은 유식함으로 자멸하고 무식한 사람은 무식함으로 자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다 하나님이 주신 신구약 성경 이 도리가 유일한 법칙입니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 얻는 유일한 법칙이기 때문에 이를 잘 들어 깨닫는 것이 은혜받는 것이고 깨달을 때에 믿어지는 영감받는 것이 은혜받는 것이고 믿어지는 대로 실행을 안 하고는 견딜 수 없는 그 능력받는 것이 은혜받는 것이고 실행을 했는데 자기 혼자가 아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모든 피조물을 다 능가하는 그 결과를 맺는 것이 그것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제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으면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후부터는,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이방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예수님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한다.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다 이랬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이 지으실 때에 피동하는 작용물로 사람 마음을 지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속에 주체가 될 만한 그 주체성을 가진 마음으로 하나님이 짓지를 아니하셨고 지으실 때에 어떤 것에게 피동되는 그런 마음으로 지으셨기 때문에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것은 무주체성의 존재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주격이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주격에게든지 피동으로 살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으실 때에 그렇게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마음은 그 마음을 주장하고 또 마음을 지도하고 다스리고 그 마음이 행복되도록 걸어갈 만한 그런 아무런 주체성이 없고 주격성이 없는 것이 마음인데 ‘안 믿는 사람들은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그러니까 마음은 자기를 주도하고 자기를 지도하고 자기 마음을 주권해서 다스릴 만한 그런 주체성이 없도록 지어 놨는데 이 마음 제가 저를 주장할라고 애를 씁니다. 마음 제가 저를 주장할라고 애를 씁니다. 주장하지 못하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장할라고 이래 하니까 그것이 다 헛되고 망령된 것입니다.

망령되다 말은 미쳤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비정상이라 말입니다. 그 마음은 자체가 자체를 주장할 만한 독립성을 가지지 못했고 자립성을 가지지 못했고 어떤 것에게든지 반드시 지배를 받아야 하고 피동이 되어야 하고 주관을 당해야 되는 것이 이 마음인데 이 마음이 제가 주체가 되고 주관하고 해서 할라고 하니까 그 모든 것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뿐입니다.

사람은, 이 마음이라 하는 것은, 영이 죽었을 때에는 이 마음이 제가 제 맘대로 주장을 해 가지고서 이렇게 살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의 마음으로 한 것이 다 사망이 되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된 것이 사람인데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된 영물이요, 육이라 하는 것은 심신으로 된 물질입니다. 마음도 물질입니다. 이 영육관이 아직까지 세계의 기독교에 통일되지를 안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경에 ‘영, 육’이라 했기 때문에 영도 부인할 수 없고 육도 부인할 수 없고 영이 있다고는 인정하기 때문에 영은 뭐이 영이겠느냐? 영은 마음이 영이요 육은 고기덩어리가 육이라, 또 어떤 사람은 마음 중에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양심이 영이요 이 고기덩어리가 육이라 그렇게들 생각하고 또 성경에 마음과 영이 다른 것을 말한 곳이 있기 때문에 또 이게 문제다 해 가지고서 지금 통일이 되어 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확실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에 사람을 먼저 짐승과 같이 지었습니다.

그거는 흙에서 나왔었습니다. 그 다음에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의 사람으로 나타내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원형이라면 사람의 영은 모형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 하나님이 흙으로 만든 이 육은 그것이 생기를 불어 넣기 전에도 짐승과 꼭 같이 육의 생기를 가지고 살고 있었습니다. 거게다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기는 받았는데 아직까지 하나님과 연결이 되지 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연결시키기를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었다 이렇게 성경에다가 발표를 했습니다. 그건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 했습니다. ‘생기를 불어 넣으니까 사람이 산 영이 됐다’ 이랬습니다.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대로 있는 것이 사람의 영이요 이 물질계에 있는 게 아니라 영계에 속한 영체로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영입니다. 그러면,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그것은 독립성을 가지지를 아니했고 또 자립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에게만 피동해 가지고 살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코에 생기를 불어 넣었다 말은 그 생기는 성령을 가리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으라 하시면서 숨을 내 쉬면서 성령을 받아라 한 그것은 사람들 보기에 그런데 이제 그들에게 성령을 줘 가지고서 중생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산 영이 됐고 또 그 심신은 육인데 심신은 그 영에게 지배를 받고 영은 하나님에게 지배받고 또 심신은 영에게 지배받고 이렇게 됐을 때에 그때에 그 사람은 어떤 지능을 가졌더냐 하는 것을 조금 소개해 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다 네가 이름을 지어라. 이름을 지어라. 이름이라 하는 것은 그 행동과 일치된 것이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아직까지 ‘왜 저것은 범이라고 지었는가? 왜 저것은 원숭이가 되었는가?’ 하나, 그 이름은 대개는 그것의 본질 본성 또 생애 그 모든 것을 다 그 이름에서 표시하고 있는 그 오묘한 이름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그걸 모르지마는서도.

이 사람을 사람이라고 이름 지은 것 개를 개라고 이름 지은 것 그런 것은 그것이 다 그의 본질과 본성과 생애 법칙과 그 결과와 소속 그 전체를 똘똘 뭉쳐서 정확하게 표현한 것을 가리켜서 이름이라 이랍니다. 그 이름을 지어라 할 때에 그 이름을 아담이 아주 정확하게 지었습니다. 그 지은 걸 보고 하나님께서 잘 지었다 하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때에 아담이 모든 피조물들에게 이름을 지어 준 그대로 피조물은 오늘까지도 그대로 그 이름 그 직책 그 성질 그 범위의 생애를 하고 있지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한 역사이지마는서도 그것은 자존하신 창조주가 아담을 통해서 한 역사이기 때문에 그 역사는 역연 하나님이 하신 역사기 때문에 피조물은 변개하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이 범죄하고 난 다음에는 그만 사람이 하나님에게 영은 피동되고 심신은 영에게 피동되고 하는 그 생활이 그만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 사이가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만 동하고 정할 수 있는 완전 행위를 할 수 있는 게 영인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니까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죽어서 아무 기능의 작용은 하나도 없는 자 된 것입니다.

사람의 영이라는 것은 타락했으니까 죄를 짓지 안했겠느냐,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으니까 마귀에게 이용을 당하지 안했겠느냐?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이 오늘 일반적 신학자들이요 깨달은 사람들은 그렇게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대로 바로 깨닫고 있습니다.

그 영은, 영의 특수성은 하나님에게만 피동되지 다른 것에게는 피동될 수가 없는 것이 영이요, 또 하나님에게만 이용되지 다른 것에게는 이용될 수 없는 존재요.

왜? 하나님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것들이 침노하지를 못합니다. 또 영은 어데서 활동하느냐? 그 영은 그렇게 고귀한 영이지마는서도 그 영이라 하는 것은 어데든지 가서 활동 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고 그 영의 활동과 거처는 정해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마음에서만 활동할 수 있고 마음만 다스릴 수 있고 마음 안에서만 역사할 수 있지 그 범위를 벗어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은 자기 마음만 다스리고 남의 마음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자기 마음만 다스리고. 또 마음이라 하는 것은 자기 몸만 다스리도록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은 자기 몸만 다스리고 주장하고 그 몸은 어짜든지 그 마음의 지배를 받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기묘하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랬는데, 하나님과 인연이 끊어진 것은 뭘로 끊어졌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 하는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안하고 거역한 고것으로써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러면, 끊어지고 난 다음에는 그 영은 무능자가 되어서 아무 작용 못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때에 사람의 영이라 하는 건 단번에 죽었습니다.

죽었으니까, 사람이 새로 어머니에게 잉태되고 날 때에는 그라면 죽은 영으로 잉태되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죽은 영을 만드셨는가? 그렇게 사람들이 또 의문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 영육을 하나님께서 의롭게 창조했으나 창조가 딱 되면은 그것이 부정 모혈로 된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선조의 정죄하는, 선조의 그 반열에 딱 들게 되기 때문에, 그 선조의 반열로 됐기 때문에 그 반열로, 정죄한 그 정죄도 반열로 되어 가지고서 정죄받은 영이 되고 정죄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그때의 그 영은 다시 정죄받아 가지고 사망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영은 벌써, 하나님께서 사람의 심신을 지을 때는 의롭게 지으나 지은 다음에 원죄와 본죄의 정죄로 인해서 그것이 다 정죄받아 가지고 사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부정 모혈로 난 사람은 어떤 사람이든지 죽은 영과 그 심신이 둘이 합한 사람으로서 생산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죽고 난 다음부터는 어떻게 되었는가? 범죄하기 전에 산 영으로 되어 있을 때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다 이 아담 해와에게 복종을 했는데, 모든 만물이 복종했는데 범죄한 이후부터는 만물이 아담 해와에게 복종하는 것을 다 거부하게 돼 버렸습니다. 이래서, 사람과 사람끼리도 거부했습니다. 이래서 아담은 해와를 대적하고 해와는 아담을 대적해서 그때에 이 인인 관계에 소원이라는 것이 생겨졌습니다. 성글 소자 멀 원자, 서로 성글어지고 멀어졌습니다.

그 인인 관계에 소원이 생겨졌고 또 사람과 물질과의 그 관계가 다 소원해졌습니다. 이래서 아담은 모든 만물을 다 저주하게 되었고 만물은 아담을 저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타락 이후에는 만물이 아담으로 말미암아 저주받았고 또 만물은 아담을 저주했습니다. 저주한다고 그것을 창세기에 말씀했습니다.

이래서 과거에는 아담에게 모든 만물이 다 복종을 했지마는서도 범죄한 이후부터는 모든 토지들이 아담을 위하던 것이 아담을 반대해서 가시와 엉겅퀴를 냈다. 이것은 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토지가 저주를 받았고 만물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시조의 사람이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산 영과 육으로 되어 있는 산 사람으로 되어 있을 때에는 모든 피조물의 다 대리 주격을 가졌고 하나님 한 분에게만 피동되고 이렇게 있었는데 범죄함을 인해서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했고 모든 피조물은 아담을 거역해서 그때부터 모든 질서에 혼란의 이 사망이라는 이런 것이 생겨진 것입니다.

이랬는데,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안 믿는 사람들은 그 마음은 퉁퉁 비었는데, 마음은 그 마음을 주도하고 인도할 만한 그런 것이 없는데, 그런 주격체나 주도체와 그런 실력 있는 것이 없는 건데 그 마음이 그저 제 마음대로 제 생각대로 이렇게 할라 하니까 그 속에 자기 마음과 자기 몸을 이것을 통치해서 복되게 할 만한 그런 아무 주체력이 없는 것입니다. 없는 건데 이게 거게서 저가 주체를 할라고 하기 때문에 그거는 다 허무한 것이요 망령된 것이라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중생된 영이 지배를 하고 중생된 영은 하나님이 지배를 하면은 그 마음을 영원히 살도록 지배할 수 있는 그 실력이 있지마는서도 중생된 영과 이 마음이 연결이 끊어진 다음으로부터는 그에게는 생명의 지도가 올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것은 뭘로 사느냐 하면은 제 마음대로 삽니다. 마음대로 사는데 그 마음대로 사는 것은 그 무슨 주체력이 있느냐, 절대성이 있는 무슨 실력이 있으냐, 불변성이 있느냐, 완전성이 있느냐, 영원성이 있느냐, 참으로 정확성이 있느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거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이것을 가지신 분인데 하나님이 그 마음에 와 가지고서 주장을 하게 되면은 이거는 참으로 절대성이요 완전성이요 영원성이요 불변성이요 생명성인, 구비한 실력을 가진 것이 그 마음을 인도하는 것이 되어지지마는서도 그만 영과 끊어지면 그 마음은, 영은 죽은 영이기 때문에 뭐 있으나 없으나 한가지고, 이러니까 그 마음이 생각나는 대로 자꾸 마음나는 대로 그렇게 합니다.

이게 뭐 그 비유가 잘 될란지는 몰라도 어떤 과학물을 조작할라고 할 때에 그 사람은 거게 대한 일정한 그 물리가 있어 가지고 그 물리대로 요소를 구비해야 되고 또 물리대로 그것을 다 조립을 해야 되고 이래야 어떤 조성품이 생겨지는데 이거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원료도 뭐이 있어야 될는지 그것도 모르고 그저 또 어떻게 조성해야 될란지 그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이치를 모릅니까 아무 이치도 모르면서 자꾸 날뛰어서 뭘 만든다고 한다면 그 뭐이 만들어지겠습니까? 아무것도 만들어지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를 하나 만들라고 피아노를 만들 줄도 모르고 전연히 모르는 자가 피아노 만들라 하면은 재료도 모를 것이고 또 제작하는 그 모든 이치도 모르니까 그 하는 일이 다 헛된 것뿐이라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 그렇게 하지 말라 말은 이제 너희는 정확 무오한 지도를 받아 가지고 그렇게 살아라. 너희들은 이제 영이 살아났으니까 마음은 정확 무오한 영의 지도를 받고 중생된 영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하나님이 진리와 영감으로 지도하시는 그 진리와 영감의 지도를 받게 되니까 영의 지도를 받는 것은 피의 지도와 영감의 지도와 진리의 지도를 받기 때문에 그 마음이 이 세 가지 지도를 받아 가지고서 움직이는 것은 다 영생이라 이랬어. 다 영생이라.

하나도 죽는 게 없어. 영생이요 완전이요 영원입니다.

그런데, 안 믿는 이방인과 같이 아무것도 없는, 튕, 튕튕 빈 것, 공허해 가지고 있는, 비어 가지고 있는, 마음에 거게서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작용해 가지고서 하기 때문에 그거는 다 튕튕 빈 헛된 것이요 그것은 다 망령된 것이다.

그러니까, 18절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총명이라 하는 것은 사람 마음 속에는, 총명이라 하는 것은 광명이라 말입니다. 사람 마음 속에는 밝은 빛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 빛이 우리 인간 마음 속에 독립 자립 자존의 빛이 있는 게 아니고 그게 전부 창조주 그분으로 말미암아 그 빛을 받아 가지고서 반사하는 것이 그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거게서 그만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버리니까 마치 전기불을 켜 놓으니까 환하다가 전선줄이 끊어지니까 그만 깜깜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인생이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 버리니까 그 총명이 어두워지게 됐다. 사람에게 빛이 없어지게 됐다.

양심이라면 다 좋은 줄 알지마는서도 양심이 그것이 불교인은 불교인 양심 그거 다 정함이 없고 그저 주위 환경에 부딪혀지는 대로 피동돼 가지고서 사람 양심도 변질돼 나가는 것입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가운데란 말은 마음 안에 있는 무지라 말입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마음 안에 있는 것은 튕 비어 가지고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말이오. 아무것도, 이렇게 생각하고 저렇게 생각하고 백지 모르는 소리를 하고 모르는 걸 말하고 있지 하나님만이 정확 무오한 것을 알고 계시는데 거기에 연결돼 가지고서 거기에서 듣고 배워 가지고 그대로 움직여야 그게 지혜로운 일인데 그 연결줄이 끊어지니까 아무것도 없는데 「무지함과」 지혜가 없다 말이오. 아는 게 없다 말이오.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그러면 이 마음이 자꾸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감각을 가지고 감동을 가지고 피동을 가졌던 것인데 거게서 피동과 감동을 가지지 안하고 보니까 그 마음이 그만 띤띤 굳어져서 다른 것에게 피동시킬 만한 능동의 것도 없고 피동도 안 되고 이러니까 그만 그게 굳어져 가지고서, 사람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꾸 감동을 받으면 자꾸 감동이 돼서 감동을 받아지게 되고 또 이 무지한 것에게 자꾸 거석해지면 그것이 점점 굳어져서 점점 무지하게 됩니다. 사람이 점점 무지하게 된다 말이오.

사람이 그러니까 안 된 감동을 받으면, 안 된 감동을 받으면 자꾸 안 돼집니다. 안 돼지니까 그것이 참과 옳음에 대해서는 점점 멀어지고 없어지고 이래서 악으로 띤띤해지고 마치 살이, 새 살이 예민하면 모든 신경이나 작용이 다 와 가지고 그 몸에 신진 대사를 잘 할 수가 있는 것이 피부요 모든 신경들이요 모든 혈관들인데 여게서 이게 끊어지고 보니까, 끊어지고 보니까 자꾸 커지기는 커지고, 커지기는 커지지만 병만 자꾸 커지고 자꾸 썩는 거로 커지고 상하는 거로만 커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마음이 옳은 명철과 지혜는 점점 없어지고 점점 악화되고 점점 무지화되고 점점 둔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과 연결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하나님과 연결에서 떠나 있도다.

그러기에, 사람이 이 피조물, 사람뿐 아니라, 어떤 피조물이든지 피조물이 창조주와 연결이 돼 가지고 있으면 사는 것이고 끊어지면 죽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제일 행복이 뭐이냐 하면은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 있는 것이요 두번째 행복은 창조주의 은혜가 그에게 이제 시달되는 그것이 둘째의 행복이요 셋째 행복은 창조주의 그 지능이 그 피조물을 통해서 역사해 가지고서 피조물의 하는 모든 역사가 창조주의 은혜의 기능을 받아 가지고 그 창조주대로 역사되는 그것은 다 영생이 되고 없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감각 없는 자 된다. 왜 감각이 없어? 안 믿는 사람도 자기네들이 감각을, 자꾸 말하고 있는데 여기 ‘감각 없는’ 하면 `왜, 안 믿는 사람이라고 감각이 없어?' 이 감각 없다 말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감각을 말하는데 그 감각이 이제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피동되는 그런 느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그런 건 전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피조물이 조물주로 말미암아 생겨졌고 조물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조물주로 말미암아 이제 성장되고 하는 것인데 그분과 끊어졌으니까 그분으로 말미암은 감동도 없고 깨달음도 없다.

하나님이 역사할 때는 감동을 가지고 역사하고 그 감동을 우리가 받았을 때에는 우리가 깨닫고, 깨달으면 고것이 우리의 이 심신으로 행동으로 전개돼 가지고 그것이 자꾸 생장하는 역사 가지는 것인데 이제 ‘감각 없는 자 되어’ 그걸 잘못 알면, 성경을 알기 어렵습니다. ‘왜, 안 믿는 사람이고 감각이 없어? 감각은 다 예민한데’ 할 것입니다.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자신을 방탕에 방임한다 그말은 방탕이라 말은 제대로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서 방탕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이 방탕은 어떤 게 방탕인가? 하나님에게 절대 피동돼야 되는 것인데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안하고 아무 자존자도 아니요 독립자도 아닌 이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 수밖에 없는 그것인데 그분과 떨어져 가지고서 제대로 움직이는 그것을 가리켜서 방탕이라 그랍니다. 사람이 그만 이러니까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지 안하고 연결이 없으니까 제대로 움직입니다. 「방탕에 방임하여」 그라다 보니까 자기 마음이나 자기를 뭐, 자기는 겉잡을 수 없으니까 자기 마음에 생각나는 대로 움직이게 되는 대로 자꾸 이와같이 움직이는 자가 된다 그말이오.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모든 더러운 것을」 모든 더러운 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더러운 것이라고 말하는가? 깨끗한 거와 더러운 거 두 가지 있는데 깨끗한 것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 깨끗한 것이라고 하는가? 여게는 모든, 움직임의 생애를 두고서, 생애를 두고 말하는 것인데 깨끗한 것은 어떤 것이 깨끗한 것인가? 깨끗한 것은 첫째로 조물주의 뜻에 딱 들어맞아서 조물주와 배치되는 일이 없이 조물주와 일치되고 그러면 조물주에만 일치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이 천 가지든지 만 가지든지 억만 가지든지 그것이 하나님 한 분의 속성대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에 딱 들어맞아서 하나님의 속성에 들어맞으니까 그게 더럽지 안하고 고 깨끗하게 됐다 말이오.

더럽다 말은 잡 것이 묻었을 때 더럽다 합니다. 더럽다는 것은 그게 고장이 나도 더러워지고 다른 것이 와 가지고 있어도 더러워지고 깨끗하다는 것은 근본 본질 본성, 하나님이 지으신 고대로 있는 것을 가리켜서 깨끗이라 합니다. 「더러운 것을」 하나님에게도 맞지 안하고 모든 피조물에게도 맞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자유의 율법이라 그렇게 해. 자유의 율법이라.

자유의 율법이라고 하는 이것은 모든 피조물, 천군 천사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곤충이나 또 생물이나 무생물이나 그 모든 존재에게 다 존재의 본질과 본성에 딱 들어맞고 모든 존재의 생리에 딱 들어맞고 모든 존재의 행복에 딱 들어맞는 고것이 자유의 율법인데 그건 이것에게도 자유하고 저것에게도, 모든 것에 다 자유고, 자유의 율법인데, 이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도 거슬리고 모든 존재에게도 거슬리고, 사람들이 입법하는 것은 어떻게 입법하나? 사람들이 입법하는 것은 인간을 표준해 가지고서 인간에 맞추어서 법을 정했지마는서도 그 법이 조물주에게는 해당되지 안하고 또 모든 피조물들에게는 해당되지를 아니합니다. 이런데 하나님의 법은 자유의 율법이라 하는 건 그런 법입니다.

이제「더러운 것을」 모두 다 더러운 것을 「욕심을 행하되」 이러니까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한다’ 이 욕심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제 개적 욕심을 말합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개적 욕심. 이거 사욕이라고도 말하고 육체의 소욕이라고도 말했습니다.

그러면, 성령의 소욕은 어떤 것이냐? 더럽지 안한 것이 성령의 소욕인데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도 그거 소원하고 인류도 소원하고 지옥에 있는 자들도 소원하고 피조물도 소원하고 모두가 다 소원하는 고 법칙이 있는데 고 욕심을 가리켜서 성령의 소욕이라고 말했고, 육체의 소욕이라는 것은 이것은 자기 심신만 원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심신만 원하는 것. 지금 김 일성 씨가 저렇게 하고 있는 것도 자기 심신은 좋다 하지마는서도 거게 다른 백성들은 다 싫어한다 그거요. 「욕심으로 행하되」 이 말은 자기 육체의 소욕으로 자기 사욕으로 행한다 그말이오.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를 배웠다 말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은 것인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면은 그리스도는 어떤 것을 가르치는가? 그리스도는 세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걸 가르치시는가? 제사장을 가르치고 선지자를 가르치고 왕을 가르칩니다.

그러면, 제사장을 가르치다니 그거 무슨 소리인가? 제사장은 창조주와 피조물 그 사이를, 모두 다 맞지 안하고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가 조화가 바로 되지 못해서 창조주는 피조물을 멸하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거역하다가 망하고 이렇게 모두가 다 이거 모순돼 가지고서 전부가 다 절단나는 이 사망밖에는 안 되는데 이 사망된 것을 제사장직이 이 피조물의 잘못된 것을 고쳐 가지고 창조주에 맞도록 하고 또 창조주가 노하는 것을 이것을 또 풀어 가지고서 긍휼로 바꾸게 하고, 그러면 이렇게 해서 이 피조물과 창조주의 조화를 맞춰 가지고서 창조주는 당신이 창조하신 그 뜻에 딱 들어맞아서 참 ‘지은 게 후회가 안 된다. 잘 됐다.’ 창조주도 시은자도 만족하고 이 피조물도 창조주에게 은택을 입을 수 있도록 고렇게 그 조화를 맞추는 것이 요것이 제사장 요 직책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창조주는 피조물을 멸할라고, 이 공의와 정의로 멸할라고 했고 피조물은 창조주를 거역하다 자꾸, 산다는 것이 거역하고 산다는 것이 거역해 가지고 자멸하게 되는 것이 고걸 이제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을 바로 잡아 가지고서 피조물은 창조주를 소망하면서 창조주만 바라보고서 행복을 받도록 하고 또 창조주는 피조물을 기뻐해서 얼마든지 당신의 전능을 가지고서 얼마든지 은혜를 베풀게 되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그 조화성을 바로 맺도록 한 것이 요것이 제사장 직책이라 그말이오.

너희들이 그리스도를 배운 것이 이와같지 않다 그 말은 너희들이 너거 사욕만 알 게 아니라, 너만 알 게 아니라, 너만 알 게 아니라 너거 배운 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가 다 바로 돼서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고 인간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또 영물도 다 좋아하고 영물만 좋아하는 게 아니라 모든 동물도 만물들도 다 좋아해서 이렇게, 모든 만물이 예수님을 주라고 시인하고 다 거기다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감탄함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이 법을 지켜서 너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네가 조화를 붙여서 화목을 하는 것이 네 직책인데 이렇게 배웠는데 너희들이 네 생각대로 마음대로 그렇게, 욕심대로 이 더러운 것을, 더러운 것은 하나님의 광명에 거슬려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그런 것을 네 욕심대로 행해 가지고서 자꾸, 네가 한 번 행하고 나면은 또 다른 거와 원수되고 두 번 하면 또 둘과 원수되고 세 번 하면 서이와 원수되고, 네 하는 것이 자꾸 모든 존재와 원수가 되어지고 이제, 모든 존재는 너를 멸할라고, 너는 모든 존재를 멸할라고 이래 가지고서 결국은 너도 멸해지고 모든 것도 멸해지는 이 사망법을 네가 지금 그렇게 네가 따라 하느냐?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것이 이와 같이 않다.

제사장 이 성격을 배워서 제사장으로 너희들이 살고, 그러면, 나만 사는 게 아니라 저 사람도 모든 사람은 다, 모든 기독자들은 하나님과 피조물과 나와 다른 사람과 자꾸 그 사이 조화가 바로 돼 가지고 이 모든 더러운 것은 다 도태시켜 다 청산하고 자꾸 바로 옳고 바로 되게 해 가지고 조화가 바로 돼 가지고 모두가 다 생명과 평강과 화목과 사랑으로만 되어지는 이것을 네가 배우지 안했느냐? 또 그리스도를 배웠다 말은 선지자를 배웠다는 말인데 선지자를 배웠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의 법칙에 복종함으로 그것이 생명이요 다 행복이 되어지는 것인데 너는 이 모든 모르는 사람들에게, 모르는 이웃에게, 모르는 만물들에게 하나님의 절대적인 이 법칙을 끌어다가 모르는 그자들에게 알려 가지고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 법칙을 알아서 하나씩 둘씩 알아 가지고 먼저 사람이 알고, 사람이 하나님 법칙을 알아서 하나님 법칙에 따르게 되고, 또 그 사람이 알므로 그 사람이 모든 사건을 대할 때 그 사건을 또 하나님 법칙대로 그 사건을 모두 다 처리하게 되고, 하나 그 사람이 하나님 법칙을 알므로 말미암아 모든 이런 물질이나 저런 물질을 사용할 때에 그 모든 하나님 법칙에 맞도록 이렇게 사용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그 진리 지식을 피조물들에게 전달해서 피조물들이 다 돌이켜 가지고 하나님의 유일한 절대적인 생명의 법 완전법 이 법도와 제도에 따라서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얼마든지 피조물에게 이 은혜를 부어 줄 수 있고 피조물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의 축복을 받아 가지고 잘 살도록 하는 이것이 네 직책이 아니냐 이렇게 배우지 안했느냐? 그러면, 그리스도를 배웠다 말은 선지자의 성격인 선지자의 직책 이것을 네가 배우지 안했느냐? 또, 그리스도를 배웠다는 말은 하나는 왕직을 배웠다 말입니다. 왕직을 배워서, 왕은 통치하는 것이 왕직인데 하나님이 하나님의 완전성을 가지고 단일성으로 통치하는 그 통치를 네가 모든 존재들에게 다 전파하고 이렇게 다 선교하고 다 이래 선포해서 이제, 하나님, 자존자 하나님, 이 하나님 한 분의 법칙에게 모든 것들이 다 피동되어서 이것이 완전 정치의 단일 정치가 이제는 통일 정치가 돼 가지고서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는,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고 다스림을 받는, 지배받는 것이 곧 보호받는 것이요 다스림받는 것이 곧 멸망을 피하는 것이요 행복을 가지는 것인데 이렇게 제사장직 선지직 왕직을 배운 것이 이와같지 않느냐 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진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같이’ 하나님의 자존자 창조주, 진리라 말은 그분의 뜻이, 그분의 경영과 그분의 소원과 그분의 계획 말이오. 자존자 완전자 그분의 소원인 그 뜻이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예수님 안에는 뭐, 무슨 뭐 이 세상의 어떤 위인의 뜻이 예수님 안에 있지 안했고 어떤 그전에, 예수님이 혈육을 입고 오시기 전에도 이종교가 많았는데, 오시기 전에도 모든 이종교가 있었지마는서도 이종교의 뜻도 예수님 안에는 있지 안했고, 예수님이 도성 인신 하시기 전에는 ‘창조할 때에 물 위에 운행하더라’ 또 ‘모든 것을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 해와를 만드셔 가지고서 에덴 동산에 머물게 하는 그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그 하나님이 곧 도성 인신하신 신성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우리가 사람을 어떻게 지을꼬?’ 할 때에 `우리 모양으로 짓자’ 할 때 그때는, 우리라 하는 복수는 누구인가? 그 복수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일체의 복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지어 가지고서, 한 하나님이신데 그 직분은 세 가지로 해 가지고서 이 세 직분이 합해 가지고서 우리 구원이, 인간의 구원이 되기 때문에 인간을 지을 때에 이 셋이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우리의 형상대로는 성부의 속성대로 성자의 속성대로 성령의 속성대로 한다는 말이니까 성부의 역사와 성자의 역사와 성령의 역사 그 모든 역사를 다 힘입고 그 모든 공로를 다 힘입고 그 은택을 다 힘입어 가지고서야 이제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자가 되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예수님에게서 듣고’ 그러면 진리가 예수님 안에 계셔 가지고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또 말씀하신 것이 내나 진리입니다.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요한1서에 ‘셋이 있으니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은 하나라’ 이랬는데 이 셋이 하나 돼 가지고 우리에게 증거하고 인도하고 있다 그렇게 말씀했는데,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세 가지 대속의 공로 안에서와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은 영감 안에서와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은 진리 안, 이 세 가지,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안에서 우리가 가르침을 받았다 그말이오.

이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어.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는 이런 가르침을 받지 못하는데 예수님의 공로 안에서 이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서 우리가, 세상에 석가모니가 그렇츰 그렇지마는서도 자존자를 몰랐고 석가모니가 그렇츰 애를 썼지마는서도 인생이 어째 났으며 어떻게 되며 인생의 구원이 뭐인가 자기 마음의 생각대로 이래 한 것이니까 성경에는 다 틀렸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제일, 이종교가가 크게 많은 사람이 따르고 있는 그자가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제일 심판을 크게 받을 것이라 그말이오. 왜? 사람을 삐뚜르게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데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들이 그 안에서 받았으면, 가르침을 받았으면, 이제 22절에 말합니다. 「너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되느냐? 여게 두 가지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미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옛사람은 이렇게 이렇게 된 사람이기 때문에 이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러면, 이렇게 위에서 이제까지 해 나온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은 너희들이 근본 이렇다, 이 세상은 이리이리 해서 허무하고 이렇고 하기 때문에 이 허무한 데 너희가 빠지지 말아라. 또 너희는 이 가운데서 구출해 가지고서 이런 구원을 받아 가지고 나왔으니 너희들은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들이 지금 앞으로 할 일이 뭐이냐 하면은 옛사람은 벗고 새사람을 입는 것이 너희들의 할 일이니 이 일을 열심히 해 가지고서 죽기 전에 옛사람을 다 벗고 새사람을 완전히 입어서 새사람이 되어 가지고서 이제 주님 앞에 서도록 하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게 대해서 간단하게 잠깐 좀 말하겠습니다.

사람의 마음과 고기덩어리 이 둘을 합해서 육이라고 말하고 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음받은 존재인데 그거는 이 물질 존재가 아닙니다.

물질이 아니고 영물이요 영체입니다. 영물이요 영체이기 때문에 그거는 물질이 아닙니다.

아니고, 이 육이라고 하는 것은 심신으로 되어 있는 것인데 이거는 순전히 물질입니다. 마치 짐승은 영은 없지마는서도 육은 있습니다. 짐승은 육은 있고 영은 없습니다. 짐승은 영이 없고 육은 우리와 같은 육이 있는데 짐승의 육은 조금 저급이라고 하면은 우리 사람의 육은 고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짐승에게도 우리의 이 마음과 같은 마음이 있고 고기덩어리와 같은 고기덩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의 요소에 온갖 마음에는 참 수많은 요소가 있습니다. 거게는, 간단하게 말하면 거게서 희로 애락을 아는 마음이 있고 또 감정도 감각도 있고 모든 이성도 있고 계산성도 있고 다 있습니다.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짐승에게도 있습니다. 다만 짐승은 저급이고 우리 마음은 고급이라는 거 그것만 차이 있지 짐승에게도 그것이 없는 것은 아니고 다 있기는 있습니다.

있는데, 예를 들면은 사람은 무슨 예산을 대면은 예산 대는 범위가 좀 넓습니다.

넓고, 짐승은 범위가 좁습니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도 다 같은 마음을 가졌지마는서도 그 마음의 시야가 넓은 사람 좁은 사람 있어서 시간으로 말해도 바로 현실이라 하는, 현실이라 하는 고것만 보는 사람도 있고 그래도 한 열흘 동안 한 달 동안 보는 사람도 있고 일 년 보는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일생 동안이라는 시간을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일생보다도 자기 죽고 난 다음에 후대의 자손들까지 그 시간을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러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재명이라’ 사람은 죽어 가지고서 이름을 남긴다 그래 가지고 짐승들보다 보는 시야가 좀 넓다 말이오.

시간적으로도 범위가 좀 넓고 또 공간적으로 또 범위가 넓습니다. 공간적으로도 짐승은 고 자리만 알지마는서도 여게서 이리 되면은 지금 고다음이 어찌 되느냐? 여게는 지금 풀이 없지마는, 우리에 있는 그 짐승이 나갈라고 애를 쓰는 것은 뭐이냐 하면 여게는 풀이 없지마는 훅 뛰어 나가서 저쪽에 나가고 보면은 저게는 초장이 있어 가지고 풀이 있다 그걸 벌써 시야가 좀 그만침 넓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그러나, 처음에 난 양새끼로 말하면 그것은 알지 못하니까 그저 에미 밑에, 젖 밑에 거기 가 가지고서 배 밑에 젖만 빨아 먹으면 될 줄 알지 장 그것만 알면 그것이 장 나오나 말이지. 나오지 안하는데 이게 차차차 이제 시야가 넓어져 가지고서 이제 다른 풀을 먹고 자꾸 이렇게 한다 그거요.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이렇게 차차차차 그이의 보고 듣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이 다르다 보니까 시야가 넓어진다 그거요. 그래서 좀 고급이고 저급이고 또 발달이 됐고 미개하고 이것만 다르지 종류는 꼭 같다 말이오. 사람의 육이나 짐승의 육이나 꼭 같습니다.

그래서, 짐승도 다 그거 예산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만 계산하지마는서도 그거는 이성이 없다. 이성 비판이 없다. 비판 없는 거 아니오. 그 범위가 좁지. 그래서 사람을 어떤 철학자는 말하기를 ‘사람은 고급 동물이라. 짐승은 저급의 동물이라. 고급과 저급과만 다르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도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천 층 만 층 구만 층인데 사람이 죽으면 먼저 이 아랫도리는 제일 먼저 없어지고 그 다음에는 이 웃도리는 차차 없어진다. 없어지는데 사람의 정신이라 하는 것은 죽고 난 다음에 얼마까지 유지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아주 잘난 사람은 몇천 년도 가고 못난 사람은 그저 몇십 년 가면은 다, 이 상체도 없어지고 만다. 이게 유명한 철학이라 그말이오.

이렇게 해서 사람들 모든 철학자들은 이분설에 말합니다. 상체 하체 이렇게 말하는데 그게 다 모두 다 뭐이냐 하면은 발달이 더 되고 덜 된 거게서 있다 그거요. 그래서 제가 늘 말하기를 ‘공부를 할라면은 역사를 공부해라’ 하는, 역사 공부 하라 그 말은 좀 시야를 넓혀라 그말입니다. 역사 공부 하라 말은, 역사 공부를 하면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이런 형편 저런 형편 있기 때문에 그 좀 시야를 넓게 보기 때문에 오늘 울 일도 조금 넓게 보니까 앞으로 또 웃을 일이 닥칠지 모르기 때문에 경솔히 울 것이 아니고 오늘 좋다고 막 세력을 부리고 월권 남용할 것이 아니라 조금 넓게 보면은 그 세력이 또 없어질 때도 있다 그말이오.

자꾸 범위를 좀, 시야를 넓혀라 하기 위해서 역사 공부를 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 말한 거 법을 공부하라 한 그것은 이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있고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도 있기 때문에 네 단독 개인 사욕이라는, 사욕이라는, 자기라는 이 함정에 빠져 들어가서 우물 안에 든 개구리와 같이 그렇게 자멸하는 일을 하지말고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의사를 알아서 인간 전체를 좀 망라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지고서 자기의 사와 이 공을 좀 한목 연결해 가지고서 그렇게 좀 가치 있게 편리하고 든든한 그 생애를 하도록 해라 하도록 하기 위해서 법을 공부하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저는 뭐 자녀 공부시킬 때에 법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법을 공부시킨 거는 아닙니다. 저는 뭐 아들 딸 전부 법을 공부시켰습니다. 법을 공부시켜서 모두 정외과 뭐 법과 모두 다 이렇게 나왔는데 그래도 그 사람들 하나도 법 가지고 종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뭐이냐 하면은 인간이 자타의 이 대아를 생각하고 자기라는 이 조부라운 무형의 함정에 들지 안하고, 빠지지 안하고 좀 모든 사람을 공통의 전체면을 알아라 하는 것으로 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이제 옛사람과 새사람 이 둘이 있기 때문에, 옛사람과 새사람이 이 둘이 있으니 이 옛사람으로 이와같이 지금 자꾸 감옥 속으로 들어가는 그런 데로 들어가는 그런 일을 하지말고 인생은 빛이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와 연결됨으로서만 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너희들은 그리스도를 배운 것도 그렇지 않고 예수 안에서 배운 것도 다 그렇지 안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라는 조부라운 이 함정으로 들어가지 말고, 자기라는 이 주관으로 자꾸 들어가지 말고, 주관으로 사욕으로 들어가지 말고 이제 이 주관이라는 주관이 있는 동시에 객관이라는 모든 타가 있다.

자타가 있어서 자기와 타가 있기 때문에 타는 대세력을 가진 모든 많은 것들이요 자체로는 자체기 때문에 네 위주로 자꾸 들어가면 너는 자꾸 고독해지고 외로워지고 점점 자멸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고 또 모든, 모든 전체를 봐서 자꾸 너를 넓혀서 자꾸 타로 이렇게 번져서 자꾸 점령해서 이와같이 나가게 되면은 너는 광대한 세계를 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자꾸 주관으로만 들어가지 말고 객관성을 보라. 그래서, 너 주관은 작고 객관은 크기 때문에 네가 자꾸, 주관은 객관에 의뢰해 가지고 살아야 되는 자로 알고 자꾸 객관을 따라서 화친할라고 자꾸 애를 써라.

그래서, 이 객관성을 가지고, 이래서, 모든 교육이라 하는 것도 주관성 교육이 있고 객관성 교육이 있는데 미개한 나라는 대개는 주관성 교육으로 이와 같이 나가고 있고 조금 문화한 나라들은 객관성 교육법을 이렇게 실시하고 있는데 이래서 자꾸 주관에서 객관으로 나가고 나오라. 나가는데 어데까지 나가느냐? 모든 사람들은 나가기를 피조물이라는 그 범위 너머를 나가지 못하고 피조물이라는 범위 안에서 이래 나가기 때문에 그 범위를 넓이 잡은 사람은 세상에 많은 점령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존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는 뭐이냐? 기독교는, 모든 이종교는 다 주관성에서 이 피조물끼리만 믿고 움직이고 있는 것인데 기독교라는 것은 피조물 외에, 자존자 창조주 이분이 당신이 모든 것을 피조물된 우리에게 주셔 가지고서 피조물 너거끼리만 똘똘 뭉치지 말고, 창조주 자존자 주재자가 있으니까 이분을 따라서 이분과 화목하고 이분과 연결을 가지고, 이분으로 말미암아 너거가 생겨졌고 이분으로 말미암아 보존되고 이분으로 말미암아 자라가고 있기 때문에 지금 앞으로 남은 때도 이분으로 말미암아 너는 성장되고 보존되고 자라가도록 행복되도록 능력 있도록 하는 이 길을 취해라 하는 것이 그것이 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래서, 여게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래서, 사람이라는 것은 영육으로 지음받은 것인데 영은, 영은 그것은 단일성, 단일성 존재로 되어 있는 것이 영이고 이 육이라 하는 것은 수없는 종합성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육인 것입니다. 마음이라 하는 것도 그 요소가 수천도 넘습니다.

나는 의학을 공부하지 안했지마는서도 원리에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 육은, 육은 이 세포를, 많은 세포들이 있다 이라는데 육도 많은 세포가 있지마는서도 마음이라는, 마음이라는 이 심리라는 것은 더 많은 굉장한 세포가 되어 있습니다.

되어 있는데, 이 세포는 예를 들면은 이 손가락 하나에게 세포가 많지마는서도 이 세포가 다 독립성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포가 독립성을 다 가지고 있고 생명도 독립 생명을 가지고 있고 자기의 모든 이 통치도 제 나라가 있어 가지고서 조그만한 세포도 제 나라대로 다, 제대로 다 독립성을 가지고 있지마는 이 독립성이 절대로, 하나인 이 전체의, 이 전체의 독립하는 그 독립성에게 따라서 거게 피동으로 그 분자로 돼 가지고 있지, 거게 모형으로 되어 있지 그 모형이 떨어지면은, 그 모형이 떨어지면 이게 암도 되고 이게 무슨 병도 돼 가지고 절단나는 것입니다.

그래 가지고 이제, 자기의 한 생명이라는 그 주체성에 거게 모형성으로 거게 소속하고 피동되어지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 몸은 또 마음에 그와 같이 지금 조직체에 피동되어 가지고 있고 이 마음이라는 것은 영에 피동되고 영은 또 조물주에게 피동되고 이래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게 원리입니다.

원리인데, 사람이 그 마음의 모든 요소 중에 어떤 한 요소가, 이 통일성을 가지고 하면은 고 단체로서 기본 해 가지고 통일성을 가지면 그게 깨지기 전에는 있지마는서도 그 통일성 가진다는 그 마음이 자기의 영과의 관련성이 없으면은 그만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백 년 살았다 하면은 백 년을 살았으니까 많이 살았다 산 줄알지마는서도 그것이 아닙니다. 백 년 사는 것은 심신의 이 요소들이 영과의 연결성을 가지지 안했기 때문에 이게 다 끊어져서 죽은 것인데 죽는 것이 어떤 것은 하루 동안에 죽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오십 년 만에 죽는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백 년 만에 죽는 것도 있고 어쨌든지 세상 생활을 끝날 때는 완전히 죽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예수님이 오신 것은 뭐하러 오셨느냐? 이 죽는 것이,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어서 썩을 것이 썩지 안할 것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으로 없어질 것이 영원히 있는 것으로 유한한 것이 무한한 것으로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렇게 다시 부활하기 위해서, 속량을 받아서 이 모든 것이 살아나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이 공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사는데 하루면 살았으며 하루 사는 그것이, 하루 사는 그것이 절대인 자존자이신 완전 영원 불변의 완전에게 연결되어 있는 거기에 연결되고 거기에 피동돼 가지고서 이것이 한 시간을 살았으면 그것은 다 영생이 됐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영생이 됐고 만일 거기에 피동되지를 아니하고, 이것이 거기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이것이 거게서 끊어진 데, 끊어진 데에 자기 마음을 주체로 삼았든지 또는 그렇지 않으면 어떤 회사를 주체로 삼았든지 또 어떤 국가를 주체로 삼았든지 사상을 주체로 삼았든지 어떤 민족을 주체로 삼았든지 어떤 것이 주체로 됐든지 주체는 한 분뿐이신데 그분으로 말미암아 연결돼 가지고 됐으면은 영생이 되고 거기 떨어져 가지고는 어떤 그 사이비한 그런 모든 단체 어떤 실력 있는 존재라도 그거 다 실력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말미암아 피동된 것은 다 사망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한 시간 사는 것이 영생을 이루느냐 한 시간 사는 것이 영원히 사망을 이루느냐 그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라는 거, 마음이라는 이것은 뭐, 마음이라는 그것을, 과학자들이 무슨 의학을 하든지 과학자들이, 과학자들이 눈이 멀어 가지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눈이 멀어 가지고 있어요. 과학자들이 눈이 멀어 가지고 있는 것은 창조주가 있고 자존자가 있어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어졌다는 요것을 딱 인정하고 보면은 ‘그분이 전지 전능자라’ 거게서 뻗쳐 나온 줄 알면은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쉬울 것인데 그분을 부인하고 보니까 이것들끼리 뒤죽박죽 이라기 때문에 항상 그 실마리를 풀지 못하고 끝을 보지 못하고 항상 허망한 것만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사람의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아담 해와의 자손으로서 만들어진 이 심신을 예수 믿는 사람은 딴 심신을 가지느냐? 딴 심신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요거 똑똑히 아십시오. 예수 믿는 사람도 심신 가지는 것이 이심신을 딴 심신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이 심신은 이거는 무주격체입니다. 무주격체요 또 이거는 피소유격으로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은 마치 비유컨대는 이 심신은 베조각과 같습니다.

비유하면 베조각과 같습니다. 이 베조각을 검은 물을 들이면 이 베가 새카만 것이 돼 버리고 맙니다. 또 이 검은 물을 다 빼고 탈색을 하고서 만일 푸른 물을 들이면 새파래지는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 벗어라 입으라 말하는 말은, 벗어라 입으라 말하는 것은 뭐이냐? 우리 심신의 기능은 꼭 이거는 변하지 안하고 아무리 천국에 가서 제일 일등으로 사는 사람도 그 사람도 처음에 첫 아담에게서 받은 그 심신의 기능이요 또 아주 구원을 잘 못 이루는 그 사람도 내나 그 기능이요 다 그 기능인데 그 기능이 이것이, 꼭 기능 그 기능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부정 모혈로 났을 때에 받아 가지고 있는 그 기능 꼭 그 기능이오. 꼭 그 기능인데 이 기능이 이제 속하기를, 이 기능이 점점 속하기를 전능에 속할 수도 있고, 이게 이렇게 하지마는서도 나는 이거 힘이 없으니까 들고 이렇게 이렇게 하지마는서도 이제 아마 힘이 있는 사람은 이걸 가지고서 뭐 던졌다가 별스러운 거 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저는 아무 힘 없소. 내가 이래 흔드는 것 나 힘 없는 사람 나 같으면 이래 찍해야 부지런히 해도 요래밖에 못하지마는 힘 있고 조화 있는 사람은 이거 가지고 굉장히 빨리 흔들 수 있겠습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가려켜서 도구로 비유했습니다. 도구라.

이래서, 하나님에게 붙들린 도구가 되면 전능자에게 붙들렸기 때문에 전능의 일을 할 수가 있고 또 이것이 전능자에게 붙들리지 안했으면 그대로 있다가 죽어지는 것이고. 또 이게 악령에게 붙들리면 악령에게 붙들려서 죄를 짓는 일이 자꾸 능숙해 가지고서 그와같이 되어지고 또 하나님께 붙들리면 생명과 의에 속한 일을 하는 데에 능숙해지고 이래 가지고서 일생을 살다가 나중에 자기가 심판받아 가지고 어떤 사람은 그 기능을 영생으로 어떤 사람의 그 기능은 영벌로 그렇게 심판함을 받아 가지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너무 시간이 많이 갔는데. 우리의 심신은, 오늘 오전까지는 요것만 배웁시다. 우리의 심신은 바꿔지는 것 아닙니다. 내나 그 심신의 기능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님이 구름 타고 오시면 이 마음의 형체나 몸의 형체나 요 형체는 꼭 같이 부활받습니다. 영원히 죽지 안하고 썩지 안할 것으로 부활받습니다. 부활받으나 기능은 우리가 현재 현재에서 그 기능을 살려서, 살리고 죽이는 그것으로서 달라지기 때문에 부활할 때에 어떤 사람은 형체는 부활했지마는서도 그 속에 있는 기능은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고 기능은 다 유황불 구렁텅이에 가고 껍데기만 형체만 살아 가지고 가는 사람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그 기능을 다 살려서 전능의 기능을 가지고서 하늘나라 가는 사람들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능은, 요 기능은 변하는 게 아니다. 내나 첫째 아담에게 속한 그 심신의 기능의 요소들이다. 요소들인데 그 기능의 요소가 사망으로서 물들어지면 사망의 기능이 되고 생명으로 물들어지면 생명의 기능이 되기 때문에 이제, ‘벗어라’ `입으라' 벗어라 입으라 말은, 벗어라 말은 탈색하라. 비유컨대 탈색을 해 버려라.

또 입으라 말은 새로 염색을 해라 그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후에 이제 어떻게 탈색을 하며 어떻게 염색하는가, 이래서 오후에는 어떤 사람이 옛사람이며 어떤 사람이 새사람인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으라 했으니까 옛사람이 어떤 게 옛사람이며 새사람이 어떤 게 새사람인가 하는 이것을 우리가 확고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되지 제가 옛사람으로 살면 죽는 것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도 옛사람으로 사는 게 어떻게 어떤 게 옛사람으로 사는지 모르기 때문에 자꾸 옛사람의 일을 할 때에 어떤 사람이 ‘네가 그러면 죽는 것이다. 죽는 것이니까 새사람으로 이래 살아라’ 하면 그걸 똑똑히 모르기 때문에 못 알아 듣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너 그라면 그게 옛사람의 일이가, 새사람의 일이가?’ ‘옛사람의 일인 줄 압니다.’ 그라면서도 고집을 부려.

옛사람으로 사는 게 어떤 건데? 옛사람으로 살면,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산 기능 하루 살았으면 하루 산 기능, 몇십 년 살았으면 몇십 년 산 기능 일생을 살았으면 일생 산 그 기능 그거는 완전히 영원한 멸망으로 사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건 다 서론이고 오후에는 새사람과 옛사람에 대해서 성경이 가르친 대로 증거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사람을 벗어야 될 건가, 또 어떤 사람을 우리가 입어야 될 건가? 입어야 될 사람을, 입으라 말은 물들이라 말이오. 염색하라 말이오. 벗어라 말은 탈색하라 말이오. 탈색.

그러면, 탈색이나 염색이나 하는 데에, 베조각은, 베조각이 달라집니까 베조각은 그 베조각입니까? 베조각은 그 베조각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심신의 그 기능인데, 그 기능인데 악령으로 염색하면 그것은 다 이제, 심판할 때에 유황불 구렁텅이로 보내 버리고 또 성령으로 염색하면 그것은 다 영생이 되어서 하늘나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시간 많이 갔기 때문에, 오후에 이제 새사람과 옛사람에 대해서 증거를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증거한 것은 서론으로 옛사람과 새사람을 증거하는 데에 거기에 있어야 될 배경을 잠깐 증거한 것입니다. 오후에 빠지지 말고 다 나와서 옛사람 새사람 그것을 똑똑히 알아야 되지, 그 옛사람이 뭐 오만 거 다 합니다. 옛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옛사람이 왕도 되고 옛사람이 박사도 되고 옛사람이 뭐 신사도 되고 미인도 있고 미남도 있고 꽉 있습니다. 다 있습니다.

그러나 다만 거게 무엇으로 지금 감염됐느냐 하는 것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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