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21:26
영원한 집
본문 : 고후 5:1-7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하늘에 있는 집, 하늘에 있는 집은 사람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신 주재이신 전능 전지 자이신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입니다. 사람이 지은, 유한한 사람이 지은 무너질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입니다. 이 집을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인데 여기 5절에 보면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우리 집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하시고, 이 집이 우리 집이 되도록 하나님께서 이 일을 하시고, 5절에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을 우리 집이 되도록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역사하시고, 그러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 일에 역사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이 일을 책임을 지우셨는데, 보증이라, 보증이라 말은 책임졌다 말입니다.
사람이 돈을 빌릴 때에 채무자 그 사람이 빌린 돈을 갚지 못할 때는 그 연대 보증자가 있어서 보증자가 그 일을 갚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는 생각도 안 했는데 알뜰히 살았지마는 그만 도장 한 번 잘 못 찍어 준 그것 가지고 살림살이를 다 털어 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래 가지고 나중에 그만 마음이 상해서 뭐 자살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보증입니다. 보증.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이 보증자로 이 책임자로 성령님을 세우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께서 보증으로 세웠습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속으로 성자 예수님에게 책임을 지우시고 예수님이 책임지시고 대형 대행 대 화친으로 대생을 하게 하신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또 대속해 놓으신 것을 성령님께 책임자로 이렇게 지우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여기에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이러므로가 무엇을 가리켜 이러므로 말하는가? 땅에 있는 장막집은 자기가 아무리 아껴봤자 단속해 봤자 이 장막집은 벌써 무너질 집이니까 이게 무너질 것이라 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이것 무너지면 어쩔까? 이걸 잘 지어야 되겠다.' 안 믿을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이 염려하고 원하고 노력하고 힘쓰는 땅의 것을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하나님께서는 이 집이 무너진다고 말씀했는데 안 무너지게 하려고 하는 그런 헛된 근심 걱정은 다 없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대해서 담대해졌습니다.
또 담대한 이유는 이것이 무너져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우리가 입을 수 있다. 이 집은 자기가 하늘에서 오는 집을 이 집이 무너질 그때에 이 집을 입어야 입어진다. 이러기 때문에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그때는 어떤 때인고 하니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을 덧입어서 개조할 수 있는 그런 기회다.
개조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에, 개조 안 하면 절단나는데 개조할 수 있는 이런 기회가 있어서 개조할 수 있는 기회가 오니까 기쁘고 즐겁지 마음 눌릴 필요가 없다 그거요. 그러면 무너질 집을 무너지지 않는 영원한 집으로 개조할 수 있는 이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두려움이 없어지고 담대합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곧 이 일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이루게 하시기는 누가 이루게 하시는고 하니 삯위일체 하나님이 이루게 하십니다. 밑에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하는 그 하나님이 거기에만 기록했지마는 그러면 이루게 하시는 이는 누군가? 이루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루게 하시고, 삼위니까, 위가 셋이니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게 하시고 이 일에 책임자는 삼위 중에 제 셋째가 되는 성부 성자 성령, 이 성령님을 책임자로 세우셨다, 책임자로 세우신 이분이 또 삼위일체 중에 일위가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 이 삼위가, 삼위일체인 이 하나님께서 이 일을 성령님께 책임을 지우셨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두려움이 없고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6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다. 이러므로가 무엇인데? "이러므로" 장막집은 이미 무너지기로 정하여져 있는 것, 이 장막집이 무너질 그때에 영원한 집 하늘의 집으로 개조를 받을 수 있는 그런 기회는 한 번밖에는 없는데, 한 요소에 한 번밖에는 없는데 무너질 기회에 개조가 되지 무너질 기회에 아니면 개조가 안 되고 그것은 항상 미결로 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너질 기회에 개조가 되는 것이니 개조를 해야 된다는 데 여기에 전심 전력이 다 기울어지지 이미 마음 쓰나 안 쓰나 무너질 집인데 그것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마음쓰고 힘쓰는 그런 일은 이제 떠났다 그거요.
또 담대한 것은, 그러면 이 일을, 개조를 해야 되겠는데 이 일을 나 혼자 하는 것 같으면 그렇지마는 하나님이 이 일을 지금 되게 하려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힘을 쓰고 계신다. 또 삼위일체 하나님이 힘을 쓰고 계시면 그 일이 으례히 잘되겠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시려고 하면 대단히 좀 만만치 아니하고 서로 접하기가 힘들 터인데 성령님을 책임자로 지워 주셔서 성령님이 이 일을 책임을 짊어지고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런데 이분이 책임을 지시고 첫째로 한 일이 무슨 일인고 하니 우리도 모르는 데에 우리 죽은 영을 중생을 시켰습니다. 우리의 참 자기는 죽어 있는데 죽어 있는 자기를 중생시켰습니다. 이 보증자 성령님이 보증으로 앉았기 때문에, 책임을 졌기 때문에 첫째로 중생을 시켰습니다.
중생시키시고 난 다음에는 우리를 위해서 뭣 하시는고 하니 기도를 하시는데 참 탄식으로 기도를 하십니다. 마음에 안된 것에 대해서 안되면 지나가서 지나가 벌써 안돼 버리고, 덧입지 못하고 지나간 걸 인해서 탄식을 하시고 어쩌든지, 탄식이 있는 것만치 앞으로 힘은 더 쓰는 것입니다. 이래서,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성령님께서 전심 전력을 다 기울이신다 말입니다.
이래서 기도하시지, 또 성자가 또 이 일을 위해서 아버지 우편에서 계속 기도하시지 또 성령님께서 중생된 영을 붙들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우리 마음에게 자꾸 증거를 해 줍니다. 자꾸 이 일을 책임을 지고 역사를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러므로" "이러므로"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몸에 거할 때에는' 우리가 무너질 장막집으로 있는 그것은, 아무리 내가 주님을 부르고 주님을 바라본다 해도 무너질 장막집으로 되어 있는 그것은 주님과 따로 떨어져 가지고 있다.
무너질 장막집이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에서 오는 이 집을 입어서 이 집으로 개조가 되었을 때에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있다. 주님과 하나되어 있다.
그러면 주님의 참 집이 됐다. 주님의 영원한 집이 됐다.
그런고로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이러기 때문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보는 것은 안 믿는 사람들이 사는 생활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생활은 전부 보는 것으로 삽니다. 보는 것 의지하고, 보는 것 바라보고, 보는 것 인정하고, 보는 것에 갈급하고, 보는 것 가지고 안심, 자랑, 이렇게 전부 보는 걸 가지고 하지마는 우리는 믿음으로 한다.
믿음으로 한다 그말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교훈을 믿어 하나님이 약속에 선포한 대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 것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고 바라보고 의지하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이것이 다 믿음인데, 이러기에 믿음으로 살고 보는 것으로 살지 않는다. 이러기 때문에 보는 것 표준으로 살지 않는다.
이런고로 보는 것 표준으로 살지 않기 때문에 보는 것 표준으로 살 때에 떨던 떪이 없어졌다 보는 것 표준으로 살 때에 갈급하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이것 어찌 될까 해서 두려워하던 그런 두려움이 없고 이제는 거기 대해서 담대해졌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이 어떤 집인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우리의 이 몸의 모든 요소, 마음의 요소, 또 우리의 모든 행동의 각종의 것, 또 우리가 해 놓은 일, 또 우리가 갖추어 가지는 무슨 지위나 권세나 돈이나 지식이나 모든 그런 것들, 이것을 하나님이신 성령님과 하나가 돼서 성령화되는 것, 진리화되는 것, 그러면 성령과 꼭 한덩어리고 진리와 한덩어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한덩어리,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대로 된 것 이것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일을 이루게 하려고 탄식과 간절한 소원,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마음이 눌려, 세상 일에 대해서 담대하고 어쩌든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고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서 이렇게 애쓰니까, 내가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고 애를 써서 진리를 떠나지 않고 진리대로의 마음으로, 그때에 마음의 요소가 진리대로의 마음으로 끝을 마치고 또 영감대로의 마음으로 끝을 마치고 이렇게 내가 힘을 씀으로 되니까, 우리가 어떤 인간이 세워놓은 그 법을 떠나지 않고 내가 그 법을 지켰으면 재판에 대해서 담대하겠습니다. 그 법대로, 국법대로. '나는 국법대로 국법에 요래 돼서 국법대로 나는 지켰소' 하면 재판소 가 가지고 재판소에서 국법대로 지킨 것을 정죄 못 합니다.
그런 것과 같이 자기가 애를 써서 요렇게 하니까 진리와, 진리면 하나님 법칙인데 하나님 법칙과 하나가 됐으니까 하나님의 심판에서 담대한, 우리가 세상법을 지켜서 하나된 것 같은 요렇게 된 것으로 우리가 여기기 쉽습니다.
그렇게 된 것으로 여기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되려고, 진리를 떠나지 아니하려고, 영감을 떠나지 아니하려고, 주님의 피공로를 떠나지 아니하려고 애를 써서 자기가 죽도록 충성하라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라는 이렇게 이 충성하는 이것 가지고 만들어지는 것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자기가 찍해야 껴입는 것이오. 입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는 처소라 말은 집이라 말인데 이 집을 덧입기를 우리가 뭐 입는 것이지 우리가 뭐 만들어 입는 것 아니오. 만들기는 누가 만듭니까? 하나님이 만드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덧입기만 했지 만들어 놓은 것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것 아는 자 하나도 없습니다. 요것 오늘 아침에 지금 증거하려는 것인데.
만드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입느냐? 입음으로 지나가 버렸어. 입음으로 지나가 버렸어, 하나님이 만드신 이 집을 이 집이 벗어질 때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어쩌든지 내가 몸을 떠나서 주와 합께 있는 그것이라" 그말은 떠난다 말은 벗는다 말인데, 장막집을 벗는다 말인데, 벗기를 원한다는 말인데 그 위에 말하기를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거기에서 요 촛점이 생겨지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벗기를 원하는데, 벗기를 원하는데 "떠나 주와 함께" 그러면 떠난다 말은 벗는다 말입니다. 벗기를 원하는데 뭣 때문에 벗기를 원하느냐? "벗고자 함이 아니요 덧입고자 함이라" 벗을 그때에 덧입는 것이라.
이러니까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을 덧입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그 만드시는 그 집을 우리가 덧입으면 그만 그것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덧입는 기회도 지나갔고 덧입었으면 다시는 덧입은 것을 보지를 못합니다.
덧입은 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집은 누가 지은 집이냐?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 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인데 이 집은 성자 예수님께서 있는 것을 다 들여서 지은 집이요, 성령님이 책임을 지고 지은 집이요, 또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영원한 집, 하늘에 있는 집, 하늘에 있는 집이라 말은 공간적으로 하늘입니까? '여기에는 아래라 위에라' 공간적인 높은 것을 말합니까 모든 평가적으로 높은 것을 말합니까? 땅에 위에 이 공중 하늘인가? 네, 평가적으로를 말하는 겁니다. 평가적으로. "하늘에 있는" 평가적으로. 그 이상이 없어. 그 이상이 없는 지고의, 지극히 고귀한 지극히 권위있는 이런 집이라.
하늘에 있는 이 처소를 덧입기를 원한다. 이 집은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는데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이것을 지으시고, 성자가 다 투자했고, 성령이 책임을 지셨고, 이 집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으로 정한 것이 이 집 짓는 것이고, 이 집을 당신의 목적으로 정하시고 이 집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영원까지의 예정을 하셨고, 또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대로 일차에 영계와 이 물질계를 창조를 하시고, 계속 하나님이 그것을 보존하시고 계속 섭리하셔서 재창조도 하시고 재종합도 하시고 분열도 하시고 이렇게 해 가지고 전체에,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것이나 또 이런 움직임이나 저런 움직임이나 하나님 외에, 삼위일 체의 하나님 외에 있는 그 모든 것은 영원한 집을 짓기 위해서 그것들이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다. 이것을 짓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것을 모두 다 구비시켜 놓고 이 구비된 것들은 기다리고 있다.
때를 기다리고 있으며 착착 그때 때를 기다려 가지고 때가 되면 순위대로 나와서 한 번씩 이용이 되는데, 이용이 되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리와 영감대로 그대로 하면 이 모든 것이 다 살아난다. 전부 살아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 진리와 영감대로 요렇게 자유하지 않고 진리와 영감대로, 중생된 자는 진리와 영감대로 살기를 소원하기 때문에 소원대로 하는 것이 자유라 그말이오.
자유해서 진리와 영감대로 살기를 만물이 탄식하고 기다리고 있다. 왜? 진리와 영감대로 살면 거기에 관련된 만물도 영원히 새로와져서 만물도 영생을 해서 영원히 새로와지기 때문에 탄식하면서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그때에, 구속받은 자가 자유하지 않고 마귀에게 죄에게 세상에게, 죽기를 두려워 함으로 이 모든 무너질 장막집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암만 해 봤자 소용 없는 것인데. 공연히 어리석어서 마귀에 꾀임받아 가지고 '너 이것 무너진다, 무너진다. 안 무너지구로 해라.' 무너지는데 무너질 때 덧입으면 그만 영원이 돼 버리는데 무너질 때 무너지지 않으려고 헛된 걱정 공연히 헛된 생각만 그래 가지고 이와 같이 지금 근심 걱정을 하고 있는 그런, 마귀가 주는 그런 유혹을 이제는 버리기 때문에 그런 종되는 거기에 다 놓여 가지고, "하나님의 뭇아들의 자유함에 이르기를 원한다. 탄식하면서 원한다." 뭣 때문에? 저거 무슨 부가 있어서? 무슨 유익이 있어서? 만물이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을 그렇게 탄식하면서 만물들이 지금 고대하고 있다. 탄식하며 고대하고 있다.
만물들이 벌써 지나간 것은 지나가서 다 죽었다 그말이오. 죽었으니까 아직까지 죽음이냐 영생이냐 하는 것을 미래에 두고 있는 모든 만물들은 "탄식으로 고대하고 있다" "만물이 탄식으로 고대하고 있는 그 탄식이 한없는 것을 우리가 안다" "만물의 피곤함을 우리가 안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는 말하면 모를 터이니까, 하늘에서 오는 우리의 처소, 영원히 우리가 입고 살 그 집, 우리가 영원히 가지고 살 그 처소, 그 처지, 그 형편, 또 영원히 가지고 살 우리의 몸, 우리의 마음, 우리의 인격, 그래서 에베소 4장 24절 이하에는 보면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입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으로" 그말은 의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한 것,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경영해 가지고 모든 것을 조직해서 제이위 성자에게 요 일을 책임지라 해 가지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우리를 대속해서 해 놓은 것이 의요, 또 요 의를 마지막 완료를 시키라 하고 책임을 지운 분이 성부 성자 다음에 성령이신 성령님이 보증을 하셔서 "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의와 진리와" 진리는 이는 하나님의 뜻인데 요 참된 이치, 이 이치는 전지전능을 가진 것이 참된 이치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지으실 때에 무슨 수단 무슨 방법 무슨 힘 가지고 지었느냐 하면 진리 가지고 지었습니다.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거룩함 요것은 뭐이냐?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구별해서 '요것보다 요게 옳다' 자꾸 가르쳐서 '야, 요거는 죽는 것이다 요거는 사는 것이다, 요거는 꾀이는 것이다 요거는 어떻다.' 그저 자각 가르치는 그것이 거룩 속에 들었어. 거룩은 자꾸 구별하는 것이라. 구별해 가지고 온전함에 도달하는 것.
너희들이 이렇게 함께 힘쓰는, 무슨 힘쓰는 것? 만드는 데 힘쓰는 것? 이거는 입는 힘이라. 입어야 되기 때문에 요 거룩은 인간 인적 요소, 신적 요소 진리 요소 인적 요소 이 요소가 다 합한 것을 표시해서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그게 집인 데 말하자면 그게 사람이라 또 그말이오. 집인데 그게 사람이오. 인격, 실력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미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 현실에서 진리대로 영감대로 요렇게 현실을 통과하려고 애를 쓸 때에 만들어지는 그것은 그저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집이 만들어진다' 요렇게만 우리가 알고 있는데 그 집을 인간이 결심해서 진리와 결합되는, 어떤 국민이 그 국법을 잘 지켰으니까 심판 때에 담대한 것 같은 그렇게 자기가 국법을 지키고 한 그런 게 아니라 그말이오.
우리가 그때 진리를 배반치 않고 영감을 배반치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숭배하는 요 마음으로 통과한 그 마음에 만들어진 그것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들어진 마음, 또 만들어진 그 몸, 또 만들어진 그 행위, 만들어진 그 일, 만들어진 그 물건, 그것은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해서 그거 통과해 가지고 만들어진 것만 우리가 보고 구경하고 했지 그것을 우리가 평가를 못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까지 유한한 인간이 되어 있고 제한된 인간이 되어 있고 항상 생각한다는 것이 우리의 땅에 속한 마음의 지능이요 이런 것이 한데 섞여 있기 때문에 이걸 모릅니다. 섞여 있기 때문에 가리 워져서 몰라.
그러면 이럴 때보다는, 자기가 세상 일에 분주 복잡하고 세상 욕심이 가득 찼을 때에는 이렇게 만들어진 것의 가치를 더 모르지요. 만들어지는 것을, 만들어진 것을 아주 모르고 그럴 때보다는 자기가 설교를 들을 때에 기도할 때에는 요 하늘에서 내려온 우리의 처소가 '이것이 좀 가치가 있다.' 똑똑히 좀 더 똑똑히 보입니다. 좀 더 똑똑히 보이요.
보이고, 성화된 것만치, 우리보다는 사도 바울 같은 이는 더 똑똑히 보입니다.
사도 바울 같은 이는 더 똑똑히 보이고, 그게 성화된 것만치 좀 똑똑히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처소를 덧입기만 하지 이 집은 우리가 지은 집이 아니고 전능자가 지었고, 전지자가 지었고, 완전자가 지었고, 영원 불변자가 지었고, 이분의 그 신성 이분의 속성을 보아 '아, 그분들이'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분들의 속성을 보아, 이분들이 잠깐 동안 엿새동안 지어 놓은 만물을 보아, 엿새동안에 지어 놓은 것에, 엿새동안에 지어 놓은 것에 억만분의 일이 되는지 억억만분의 일이 되는지 모릅니다.
모른 그것 요새 지금 원자를 하나 발견해 놓고 인간들이 뭐 과학 만능이니 떠들어 쌓는데 그것 엿새동안에 지어 놓은 한없는 그 많은 것 가운데에 뽀스래기 하나를 제가 눈을 떠 '아이쿠 이것, 원자가 있다. 원자가 있다.' 이 떠들어 쌓는 것이지 저거가 모르는 그것이 억억억억‥‥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엿새동안에 이것을 지으신 이달들이 이것 하나를 지으려고 하나를 유일한 목적으로 딱 세워 놓고 이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예정해 놓으셨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오늘까지 보존하시고, 이렇게 저렇게 섭리하시고, 성자가 있는 걸 다 기울였고, 성령이 책임을 졌고, 삼위일체 하나님이 책임을 졌고, 이렇게 크신 분들이 만든 집이다 그말이오. 크신 분들이 만든 집이다. 그러기에 이 집이 무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몰라.
우리가 이제 벗으면, 지금은 거울 속으로 거울 들여다 봐서 거기에 반사되는 거울 속으로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지마는 이 다음에는 직접 대면하는 것같이 환하게 밝아진다. "그때는 내가 아는 것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주께서 아심과 같다" 그때에 잘지은 집, 못지은 집, 벌거벗은 것, 이것을 생각할 때에 무거운 짐진 것과 같이 마음이 눌려진다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집은 오늘 아침에는 사람이 지은 집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인데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요다음에 그 집을 대략 한번 말을 하려고 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이 집을 우리는 입으면 돼. 입는데 입는 그것도 그래 힘이 들어. 입는 그것도 우리를 다 기울여야 입지, 이 다 기울인다고 이것 가지고 짓는 것 아니오. 다만 하나님이 지으신 집인데 그 집을 입는 것뿐이라. 입으면 제것 되는데 입지 않으면 헛일, 입지 않으면 영원히 벗은 자들로 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거는 현실에서 입는 것이니까 어쩌든지 현실을 놓치지 않아야 됩니다. 현실을 놓치지 않고 현실에, 뭐 방편을 무슨 방편을 쓰든지, 현실에서 속을 썩히는 방편으로써 요 현실에는 속을 썩혀야 진리와 영감과 하나된 것으로 통과하겠다 하면 속 썩히기를 주저하지 말고, 네가 진리와 영감과 하나되려면 목숨을 내놔 죽음으로라야 죽음이라는 이 방편으로 하나될 수 있다 하면 죽음이라는 방편이든지, 고문과 고형이라는 이 방편으로 네 현실에 당했기 때문에 너는 고문과 고형 이것을 견디면서 고문과 고형에서 진리와 영감을 배반치 않고 네가 하나되는 이것으로써 덧입게 된다, 뭐 죽음으로 덧입게 되든지, 고문과 고형으로 덧입게 되든지, 속 썩힘으로 억울함으로 덧입게 되든지, 지루함으로 덧입게 되든지, 자기에게 세상 욕심이 와 가지고 막 자기를 시들켜 재끼니까 그 욕심에 끌리지 않을 수 없을 때에 그 욕심을 이김으로써 덧입게 되든지 별별 방편이 우리에게 있어. 어쨌든지 덧입게 하는 기회 놓치지 말아라 그말이오. 놓치지 말아라. 무슨 방편으로 오든지 놓치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