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21:02
영생관
본문 : 창세기 5장 18절∼27절 야렛은 일백 육십이세에 에녹을 낳았고 에녹을 낳은 후 팔백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구백 육십이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에녹은 육십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므두셀라는 일백 팔십칠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칠백 팔십이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구백 육십구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잘못 깨달은 사람들은, 영생은 언제 하느냐, 찬송가 지은 것도 보면 이 세상 떠날 때에 영생한다는 그런 찬송을 지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리고 아마 한국교회 뿐 아니라 세계 교회에 영생은 죽은 후에 영생을 얻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십의 구 이상이 되지 않느냐. 백의 구십 이상이 되지 않느냐.
그만침 사람들은 생명관이 어둡습니다.
영생은 우리가 믿고 난 다음에 영생 얻는 것 아니고 영생은 중생될 때에 그때에 영생을 얻었습니다. 믿게 되는 것은 중생한 그 영이 비로소 자기의 마음과 몸 그게 육인데. 마음과 몸 그게 둘이 합해서 육인데 그 육을 영생된 영이 영 자기 뜻대로 이끌어서 그 심신이 인도를 받는 그 첫 행위가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것은, 심신의 행위는 믿기 시작하는 그것이 심신이 중생된 영 곧 성령님에게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중생된 영은 언제든지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서 성령님과 함께 동행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해 준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이 예수 믿기 시작하는 것은 언제부터 시작하는고 하니 부르심을 입을 때에 그때에 예수님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 중생은 언제 중생되는고 하니 그 사람이 믿기 전 하나님의 사람에게 전도를 들을 때에 그 듣는 전도와 동시에 성령님이 같이 임하셔 가지고서 그 사람을 중생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하는 것은 언제 중생했는지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래서 중생에 대해서 요한복음 3장에 가르치기를 바람이 불되 사람은 그 바람이 어디서 부는고 무슨 바람인지 모릅니다. 왜?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모른다 말입니다. 안 보입니다. 바람 부는 것을, 바람이 눈에 안 보이기 때문에 모르지만 나중에 그 바람 부는 것을 언제 아는고 하니 그 바람이 와 가지고 작용을 할 때에, 바람이 먼지를 날리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떤 가벼운 것을 날리든지 또 뭐 나무 같은 걸 흔들든지 이럴 때 '아, 지금은 동풍이 부는구나 서풍이 부는구나' 그렇게 알 수 있는 것처럼 중생된 것은 사람들이 모르고 중생하고 난 다음에 중생된 사람의 행동을 보고 비로소 '아, 이 사람은 중생했다 안 했다' 그렇게 안다고 요한복음 3장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랬는데 그 중생이라는 것이 예수님 믿고 난 다음에 특별히 그 은혜를 입어서 한번 그 심령에 큰 변화를 받는 그때가 중생되는 때라 그렇게 믿은 지 후에 그 사람이 완전히 은혜를 받았을 때에 그때 중생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성결교입니다. 성결교뿐만 아니고 장로교에서도 그 사람이 예수 믿을 때에 그때에 중생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백의 구십 구는 됩니다. 이만침 교리를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거기 대해서 또 안다는 사람들도 꼭 그렇게 알아야 된다는 그런 필요를 느끼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 대해서 그 교리를 뭐 자기가 안다 해도 평생 그것을 주장하는 것을 몇 번 주장도 하지 못하고 그저 시지부지하이 그라다가 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중생은 내 주관 역사는 하나도 없습니다. 영도 죽었지 마음도 죽었지 몸도 죽어 가지고 있는데 그까짓 게 죽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생명 역사를 하겠습니까? 죽어 가지고 있는 그 영을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와 가지고 그것을 영을 먼저 중생시킵니다. 영을 중생시키는 거는 단번에 중생시켰는데 그거는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가 와 가지고 중생시켰지 우리 주관은 뭐 원하거나 뭐 생각하거나 그런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게 중생됐습니다. 모르게 중생 됐는데. 우리는 영은 완전히 죽어서 기능적으로는 없고, 마음과 몸만 살아 가지고 날뛰는 것이 그것이 육체의 사람입니다. 타락 후에는 순전히 마음과 고깃덩어리만 날뛰지 영은 기능적으로는 완전히 없는 거와 같이 그렇게 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영을 살렸기 때문에. 육이라는 것은 영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육이라는 것은 마귀란 놈이 감추어 있기 때문에 영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한국 교회 뿐 아니라 세계 교회가 사람의 영관 영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 영관은 깜깜합니다. 영관은 칼빈도 영관을 말했는데 그 영관에 대해서 그저 영은 이성적 영 이성을 가진 거와 같은 그런 영인데. 이성 같은 영자데 그 영은 육에 속했느냐 영에 속했느냐 그러면, 마음이냐 뭐이냐 하면 마음이 영이요 영이 마음이요. 양심이 영이요 영이 양심이라 이렇게 전부 영을 마음에다 끌어 불여 놨지 마음이 아닌 영이라는 그것을 밝힌 것은 없습니다. 이것도 설교록에 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다 알 터인데 자기네들이 이 설교록을 읽어 보면 그 영이라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아마 이단시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은 마음이 아닙니다. 마음은 육입니다.
이래서, 중생은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로만 중생이 됐고 중생된 지 후에 그 다음에 중생된 영이 자기 마음을 다스리고 자기 몸을 다스릴 때에 그때에 신앙 행위가 시발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생이니 사망이니 하는 것을 사람들이 영생관도 바로 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에, 영생은 언제 영생하느냐 이 세상에서 사람이 죽으면 하늘나라 가서 영생한다 그렇게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영생은 언제 시작되느냐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나라에 갈 때에 하늘나라에서 영생한다 또 어떤 사람은 세상을 떠나 가지고 이다음에 부활하면 그때 영생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거다 틀렸습니다. 그거다 성경대로가 아닙니다.
이런데, 그걸 가지고 지금 다 주장하고 있는데, 그러기 때문에 올바른 걸 말하는 것을 자꾸 이단이라고 말하는데, 이단이라고 말한 그걸 자꾸 대항해서 '왜 이단이라 하느냐?' 이라면 그 사람들이 도리어 어두운 데로 들어갈 것이기 때문에, 뭐 영생이라 하든지 뭐 중생이라 하든지 뭐라 하든지 그만 그대로 내비두고 저거 틀렸으니까 혹 생각나면 기도나 할 일이지 거기 대해서 시비를 말하지 딴는 것은 그렇게 말하지 안해야 뒤에 그 사람들이 고칠 기회를 가지지 틀렸다고 싸우면, 사람은 자존심이 있어 가지고 그걸 잘 자기를 부인하지 안합니다. 죽어도 자기의 옳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그렇게 생각을 가집니다.
우리 교역자들도 그렇고 교인들도 그렇고 장로님들도 그렇고 권사님들도 그렇습니다. 자기의 하는 것이 틀렸지만 그것을 자꾸 틀렸다 하면 옳다 이렇게 나중에 해 나가고 결국은 사람과 대립이 돼지기 때문에 그 틀린 것을 틀렸다 소리를 하지 안하고 한번 틀렸다 하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이 뒤에, 퍼뜩 알면 알지만 모르는 사람은 그렇게 틀렸다. 소리를 자꾸 이렇게 심히 하면 대립만 돼지고 사람만 잃지 소용이 없습니다. 틀렸다 하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그저 슬그머니 그만 그래 내비둡니다. 내비두고 슬그머니, 내가 틀렸는가 그 사람이 틀렸는가 그만 슬거머니 내비둡니다. 말 다시 더 하지 안하고 내비둡니다.
내비두면 그 사람이, 내가 한번 말해 놓은 옳은 말 해 놓은 옳은 말 한 데는 진리와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그 말 해 놓은 것이 그 뒤에 조 사람이 속으로, 가 가지고 '그런데 이거 내가 틀렸나 그 사람이 틀렸나?' 속으로 생각을 합니다.
속으로 생각을 하면 '아, 그게 그런 게 아니다. 내가 틀렸다' 반성해 가지고 새로 고쳐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 말하기를 성경에서 '너희들이 서로 변론하지 말아라' 이랬어. '변론하지 마라' 변론 그거는 결국 어두운 사람을 어두운데 꼭 쳐박아 놓고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반성해서 돌아오게 하지 못하는 일이 되기 때문에 변론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영생은 언제 되는고 하니 영생은 중생할 때에 영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영생 받았으면 영생은 영과 육이 다 영생하는가? 아니오. 영만 영생 받았지 육은 죽어 있습니다. 영은 영생을 받았지만 육은 죽어 있는데 지금은 뭣하는 때인고 하니 중생하지 안한 사람은 중생을 시키는 일을 지금 하고 있고, 중생된 사람은 지금 심신을 영생시키기 처해서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면 전도하는 거, 어떤 사람은 전도해 가지고 이 사람을 예수님을 꼭 믿도록 하기 위해서 온갖 변론을 다 하고 온갖 뭐 논리를 다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거 다 믿음이 없는 소행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없는 소행인데, 다만 이 사람을 나를 통해서 중생시킬라고 하나님이 정하신 것 같으면 '예수님 믿고.
구원 얻읍시다' 그 말하면 벌써 그것으로 중생하고 넉넉합니다. 중생 될 사람이면 중생됩니다. 또 그라고 난 다음에 내가 그 말을 그렇게 했으면 중생이 안 된 사람은 중생이 뒬 기회이면 중생되고, 또 내가 그란다고 다 중생되는 거 아닙니다. 누구를 통해서 그 사람을 중생시킨다 언제 중생시킨다 하나님이 경륜을, 모든 경륜을 통해서 예정되어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 경륜이란 말은 시간과 공간이 딱 결정되어 있다 말이오. '이 사람은 아무 때 아무 장소에서 아무 이를 통해서 중생된다'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결정 안 된 것은 제가 죽어도 그사람 중생 못 시킵니다. 다만 결정된 것은 그저 오다 가다가 '예수 믿고 구원 얻읍시다' 하는 말만 해도 그 말이면 넉넉히 중생을 시킵니다.
중생 시키고 또 중생한 사람이라면 그 말만 해도, 내가 '예수 믿고' 하는 거는 예수님의 피를 증거하는 것이요 '구원 얻읍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벌써 피와 성령의 성화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 들어갔으니까 그 사람이 중생된 사람이 심신이 소생됩니다. 심신이 변화됩니다.
심신이 변화되는데, 영생은 영은 중생될 그때가 영생이 벌써 된 것이요, 중생은 사람 본인이 알게 중생되는 것이 아니고 본인도 모르게 중생이 되는 것이요.
믿음이라는 그 믿음, 믿음 행위, 믿음 행위는 중생된 사람이 믿음 행위를 시작하는 것인데 그것을 가리켜서 부르심을 받았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것은 부르심 받은 거, 믿기 시작하는 것은 본인이 알고 본인 주관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기본 은혜를 받아 가지고 중생된 영의 힘을 힘입어 가지고 심신이 이제 예수 믿기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심신의 행위입니다. 심신의 행위인데.
심신의 행위 또 행위가 중생된 영의 운동과 중생시킨 진리와 영감과 피의 운동이 그 사람을 믿음 행위를 하도록 그렇게 속에 역사하는데, 자기는 그걸 모르기 때문에, 피의 능력을 듣기는 들었지만 피의 능력이 어떤지도 무엇인지도, 아직 어리기 때문에 모르지, 또 성령과 진리의 능력을 자기가 모르지 그러니까 제가 예수를 믿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제가 예수를 믿는 것처럼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가 행위를 하는 것같이 그렇게 여겨질 만한 그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심신 구원을 위해서 이 세 가지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역사하는 그 역사에 복종하는 것이 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의를 행한는 것은 제 힘으로 제가 행하니까 되고 안 행하면 안 되고 이렇게 보여질 만치 되어집니다. 보여질 만치 되어지지만 그거 자기 주관이 깨달아 지니까 그때 그래 되는, 깨달아지는 그 도수에 따라서 그래 돼지는 것이지 실은 그것이 알고 보면 피의 능력과 성령의 능력과 진리의 능력으로 자기 행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은 영생을 단번에 받아서 다시는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피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것은 영인데 그 영은 벌써 그때 영생을 가졌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영생 가진 것을 이 세상에서 가지느냐 하늘나라에서 가지느냐 하면 이 세상에서 중생될 때에 영생을 가졌습니다.
또, 심신은 단일체가 아닙니다. 심신은 하나가 아닙니다. 하나가 아니고, 심신은 마치 말하면 진흙 덩어리와 같이, 진흙 덩어리는 그것을 진흙 덩어리가 무슨 집채 무더기만한 진흙 덩어리라도 마치 아주 쏘문 채로 친 흙을 물에다가.
물을 넣어 가지고 이게면 뚤뚤 뭉쳐 한덩어리가 됐지만 서도, 그것은 실은 먼지 같은 그런 아주 가는 작은 흙이 한테 뭉쳐 가지고 그런 것이지 그거 실은 한 개가 아니라 그 말이오. 그와 마찬가지로 영은 단 일체이지만, 영은 한 몸뚱이로 돼,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이지만 마음은 여러 수천 수만 개가 합해 가지고 우리 마음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몸도 여러 수천 수만 개가 합해 가지고 몸이 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이거 배워 가지고 아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서 나는 그래 알았습니다.
이래서, 몸을 이렇다 말하는데, 이래 말하니까 다른 사람들이 그걸 퍽 반대를 하고 또 이랬었는데 요새는 이제 그걸, 오래 후에 알았어. 육도 세포가 여러 수천 뭐 수만의 세포로 되어 있다 이라니까, 세포로 되어 있나? 내가 물었어.
'세포로 되어 었으면 그라면, 손가락만 세포로 되어 있어? 손가락도 세포로 되어 있고 '눈 동공은 어떠냐?' 눈 동공도 세포로 되어 있고. 그 뭐 전부 세포로 되어 있대요. 간은 그라면 한 덩어리? '아, 간도 여러 수천 수만의 세포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제 그 증명이 됐다 말이오.
마음과 고깃덩어리는 수많은 분자로 되어 가지고 있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영생으로 살아나는 것도 수천 번 수만 번 걸쳐서 그렇게 살아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신이 영생으로 살아나는 것은 이것은 중복적이기 때문에 여러 수만 차례를 거쳐서 살아난다. 그러면, 그 심신이 영생하는 것으로 살아나는 것은 언제 살아나느냐? 자기 현실에서 살아난다. 현실에서 살아날 때에 어떻게 살아나느냐? 현실에서 그 현실에 해당 된 심신의 요소가 있기 때문에 해당된 심신의 요소가 그 현실에서 하나님의 인도, 예수님의 피공로를, 예수님의 피공로를 입고 영감과 진리로 그 현실에 움직이면 그 현실에 해당된 심신은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심신은 한목 다 살아났느냐? 살아났지만 그것이 천 분의 일이 살아났는지 만분의 일이 살아났는지 그것은 우리가 똑똑히 몇 분 지 일이 살아났다 그거는 모르지만 어쨌든지 현실에 믿음을 지켰으면 믿음 지킨 그 믿음을 인해서 현실에 심신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심신만 살아나는게 아니라 심신이 살아나는 그 살아나는 역사에 이용당한 모든 사물들도 다 살아났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사물들도 살아났어. 그러면, 현실에는 어떤 것이 살아납니까? 중생되지 안한 사람은 그 현실에서 영이,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이고, 중생된 사람은 현실에서 무엇이 살아나느냐? 마음의 요소가 살아나고 고깃덩어리의 요소가 살아나고 마음의 요소가 살아난다 말은 마음의 기능이 살아난다 말입니다. 마음의 기능이 살아나고 고깃덩어리의 기능이 살아나고 거기 관련된 사건들이 살아나고 거기 관련된 모든 만물들이 살아납니다. 이러기 때문에, '만물들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유하는 거를 원한다' 그 말은, 자유한다 말은, 중생된 자들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기 때문에 소원은 영이 소원하는 것은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됐기 때문에 피와 성령과 진리에 복종하는 그 생활을 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이 중생된 자들이 자유하는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마귀와 죄와 사망에게 종이 돼 가지고 자유하지 못하고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유하기를 원한다 그 말은 성령과 진리와 피로, 원하는 대로 그대로 사는 것을 원하고 그렇게 살면 뭐 할라고? 그렇게 살면 만물이 뭣 때문에 그걸 고대하고 원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만물의 수입이 뭐입니까? 만물들의 수입이 뭐 이 ○○○씨 봐, 일찍부터 나왔으면 지금 목사가 됐을 건데 돌아다니며 그래 놓으니까, 돌아다닌 건 잘했지, 돌아다니고 다른 거 수입이 있고, 지금 후회 없어요? 후회 없습니까? 후회 없습니까? 예? 처음부터 그때부터 예수를 그래 믿었으면 지금 목사가 됐을 거라. 내가 볼 때 여기서 믿는 중에 첫째 가는 사람이었는데 돌아다니다가 뭐 지금 와 놓으니까, 돈이나 얼마 벌어놨는지 모르지만, 그때 예수를 잘 믿었으면 좋을 건데 잘 믿지 못하고 그만 그래 한 것을 후회가 돼요 후회 안 돼요? 말해 봐요. 후회될 거야. 지금은 이제 지금 후회가 되지, 되지만 나중에 죽을 때 가서는 더 후회가 될 거라. 죽을 때는 더 후회가 될 거라. 나중에 가서는 '요놈의 눈이 들어서 이랬다' 눈을 빼고 싶을 거라. 나중에 '요놈의 생각이 요렇다.' 지금 현실에서는 그 심신이 현실에서 살아납니다.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은 그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고, 기능이 살아나는 것인데, 기능이 살아날 때에 그 현실에서 심신의 기능이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였으면 움직이는 그 심신의 기능은 살아났고. 그 현실에서 하나님을 따라서, 진리와 영감을 따라서 움직이지 안하고 현실에서 그 기능이 사람을 따라서 움직였든지 자기 욕심을 따라 움직였든지 자기 주관을 따라 움직였든지 자기 생각을 따라서 움직였든지 돈을 따라 움직였든지 세상 부귀영화나 권세를 따라서 움직였든지 뭘 따라 움직였든지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는 것을 믿음이라 하고 하나님을 따라 움직이지 안하고 모든 피조물 세상을 따라서 움직였으면 그때에 해당된 심신의 기능은 영원한 사망으로 사망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둘째 사망이라 말했습니다. 왜 둘째 사망이라 했느냐? 불택자들은 첫째 아담으로 타락할 때 그때 다 영원히 사망됐는데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려 놓은 것을 자기 현실에서 이 살려 놓은 것을 벗지만 안하면 그만 영생하는 것인데 벗어버리기 때문에 사망이 되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현실은 심신의 기능을 영생을 시키느냐 둘째 사망으로 영원한 사망을 시키느냐 하는 것이 현실에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언제 영생하느냐? 영생하는 것은 현실에서 부분적으로 영생합니다. 완전히 다 영생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분자로 돼, 여러 수천 수만의 분자로 됐기 때문에 그 시간에 해당된 그 기능은 세상이 암만 그래도 하나님을 따라 움직였으면 그것은 그때는 벌써 영생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신의 기능도 살아나는 것은 단번에 살아납니다.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은 단번에 살아나는데, 그러면, 심신의 기능이 다 살아나는 것이 단번에 살아나느냐? 다 살아나는 것은 수백 번 수천 번을 걸려서 살아나는데 살아 난 것은 단번에 살아난다. 영도 단번에 살아나고 심신의 기능도 단번에 살아난다.
살아 난 거는 단번에 살아난다. 살아난 거는 단번에 살아났으니까 살아난 그것은 그 다음에는 뭐 하냐? 영생합니다. 살아난 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서도 어떤 사람은 성화가 많이 된 사람하고 안 된 사람 있습니다.
성화 많이 된 사람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그 주장과 힘이 강합니다. 또 그게 약한 사람은 세상대로 살라고 하는 그 심신의 기능이 강합니다.
그래서 영의 영생을 언제 얻습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영의 영생을 세상에서 얻는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들어 보십시오. 영의 영생은 세상에서 얻는 것인 것을 아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영의 영생은 세상에서 얻는다 하는 걸 아는 사람들. 이 가운데 손 안든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라? 손을 들어도, 그것도 이중인데 그 못된 그런 행위를 말이오. 알쏭하이 이중적으로, 이중 해 가지고 회색 행위를 하지 말라 말이오. 뭐이든지 다 그라기 때문에 자기가 속아.
진실해. 틀리면 틀렸다고 그걸 여기서 한번 수치를 당하면 다시 고칠 것 아니라? 요라니까. 이걸, 자, 손을 안 들면 안 될 거고 요래 들면 안 보일 거라 말이요 의자 밑에 딱 요래 놓고 요래 들면 안 보일 거라. 요래 들면 안 보이니까 '가만히 봐 보자. 아. 이거 손 드는 게 옳으냐?' 다 보고 손 드는 게 옳다 싶으면 또, 손 안 드느냐 하면 그때 그만. 드는 게 옳다 하고 들라하면 안 되니까 드는 '와 들어?' 이라면 요래 가지고 있어요. 안 들며 요래. 요래 조금 보이요. 그래 나중에 이란다 말이오 더 들라 하면 이래 들고 그것이 회색 행위라. 아예 그래 하지 말아요 틀렸으면 틀렸다 옳으면 옳다 그렇게 솔직해야 돼지지.
영이 영생 얻어서 영생하는 것은 세상에서 영이 영생을 시작했습니다. 영생이, 세상에서 얻어 가지고 세상에서 영생 시작해서 영생하는 것이지 이 다음에 영생 얻는다는 그 찬송은 다 틀렸다 말이오. 그러나 그것을 다 고칠 수가 없고 다른 면이 은혜가 있으니까 그 찬송하는 것이지 뭐 이다음에 죽고 난 다음에 영생한다는 그런 교리도 찬송이나 설교는 다 틀렸다 말이오. 여러분들이 어디 가서 들어도 영생은 '아. 영생은 이다음에 죽고 난 다음에 영생한다' 하면 '이 설교는, 이 사람 요거는 틀렸다' 딱 그것을 줄을 딱 쳐 놓고 고라고 난 다음에 다른 면 은혜를 받고 이라면. '이 사람은 요거는 모르고 딴것만 아니까 딴 거 은혜 있다'하는 그것도 실상은 보면 이걸 몰랐기 때문에 넓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은혜가 되지 못하고 사망을 잘못 가르친 것이라 그 말이오.
그러면. 또 마음의 기능이 영생을 얻고 또 몸의 기능이 영생을 얻는 것은 언제 얻습니까? 그 영생 얻는 것이 죽은 다음에 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얻습니까? 언제 얻습니까? 세상에서 얻으면, 세상에서 얻으면 낮에 얻습니까? 밤에 얻습니까? 현실에서 얻습니까? 어디서 얻습니까? 현실에서 얻습니다. 현실에서 얻소. 현실은, 우리의 현실은 전부, 심신의 기능을 영생으로 살리는 그 현실인데, 이라니까, 성령님도 탄식으로, 중생된 영도 탄식으로 로마서 8장에 보면 중생된 영이 성령으로 더불어 함께 탄식하는 것은 심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훌떡 벗어 버려서 심신의 기능이 현실 닥치면 죽고 죽고 이래서, 현실을 쭈욱 닥치니까 현실에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생하는 그 대속의 구원을 얻어 가지 그 있는 것을, 영생을 얻어 가지고 있는 것을 현실에서 벗지 안하고 죽어도, 고깃덩어리가 죽어도 영생을 벗지 안하고 믿음으로 견고히 나가는 사람은 나가는 그 뒤에 현실을 지나가고 보니까 현실 지나가고 난 다음에 심신의 기능이 막 살아납니다. 현실에서 또 심신의 기능이 살아났고 현실에 심신의 기능이 살아났고 현실에 심신의 기능이 살아났고 자꾸 지나고 나니까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고. 어떤 자는 현실에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지 안하고 예수님의 공로를 입어서 살아날 수 있는 법적으로는 살아났는데 법적으로 살아난 심신의 기능이 현실을 닥쳐 가지고 자꾸 현실에 죽고 죽고 죽고 자꾸,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현실을 지나가니까 심신의 기능 이 자꾸 죽어 뻐드러집니다. 자꾸 뻐드러져서 둘째 사망으로 자꾸 뻐드러지고, 어떤 사람은 법적으로 영생 얻는 그 심신의 기능이 실질적으로 현실에서 살아나 가지고 락 살아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 영생을 세상에서 합니까 죽고 난 다음에 합니까? 세상에서 합니다. 세상에서 합니다. 세상에서 하는데, 영생은 어떤 자가 영생하는고 하니 중생된 영도 현실에서, 세상에서 영생으로 살고 있고. 또 중생 된 기능도 이 세상에서 영생으로 살고 있고 아직까지도 법적으로 만 살아났지 실상으로는 살아나지 못하고 심신의 기능은 이 현실에서 닥치는 현실에서 그 법적으로 살아난 것이 실상으로 살아나는, 영생으로 살아나는 거 있고 실상으로 살아날 때에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휘떡 벗어 버려 가지고 현실에 죽는 거 있고 요렇게 되어지는 것이 현실이라 말이요, 그러면, 현실에 자기의 그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기 때문에 심신의 기능 살아나는 것은 이 우주를 얻는 거보다 낫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잊어버리면' 새사람으로 살지 못했다는 말이오 '자기를 빼앗겼다' 말은 심신의 기능이 영생할 터인데 심신의 기능이 영생하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으로 죽었다 그말이오. 그러면, 천하를 얻어도 이거는 자기에 게 무익하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의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서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은 천하보다 가치가 더 크다 그말이오. 그런데 이거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전부 껍데기로 믿기 때문에 참 불쌍하고 가련합니다. 이거 왜 새벽기도 안 나와, 안 나오요? 뭣 때문에 안 나오요? 안 나오는 게 무슨, 돈 때문에 안 나옵니까? 다시 말하면 돈 때문에 안 나와요, 새벽 기도에 안 나오는 사람이 돈 때문에 안 나와요. 돈 때문에 안 나오지 않는 그 사람은 뭐이냐 하면 옛사람 악령 악성 악습으로 되어 있는 자기 고놈 때문에 안 나와. 고놈이 들어서 못 나오게 해.
고놈은 죽여야 되는데 그게 자기인 줄 안다 그말이오. 고놈을 죽여야 되는데.
악령이라 말은 자기중심의 영이라 말이요, 악성이라 말은 자기가 뭘 하든지 자기중심 자기 위주로 하는 그것이 악성이요, 악습이라 말은 자기중심으로 행동해놓은 모든 행동, 버릇 습성해 놓은 거, 저축해 놓은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겁니다. 이거 옛사람이라. 그놈을 죽여야 된다 말이오. 죽여야 되는데 고놈이 제인 줄 알고 착각을 하고 자꾸 그거는 자기 아니요 자기를 죽인 원수인 자기인데 착각을 하고 자꾸 그놈으로 살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그말이오.
반사들은, 오늘 아침에 내가 이것만 간추리고 증거 할라 했는데 여러분들이, 이거는 다 알았으니까, 이걸 알아야 속에 힘이 난다 말이오. 이걸 알고 살아야, 그러면, 이 세상에 지금은 뭣 하는 현실이냐 하면 여기는 영생이 있고 영원한 사망이 있고 둘이 있는 세상이오. 둘이 있는 세상인데 자기의 행동하는 그 행동이 지금 영생을 이루는 행동이 있고 영원한 사망을 이루는 행동이 있고, 있으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중에 가치가 영생이냐 생명이냐, 자, 영생이 있고, 영생이 있고 사망이 있고. 그러면, 영원한 사망에 속한 돈 부귀영화, 부귀영화 모든 것이 다 있고 영생에 속한 부귀영화가 다 있으니까 여러분들 어느 걸 택할랍니까? 영생에 속한 거 택하겠소? 영원한 사망에 속한 부귀영화를 택하겠소? 영생에 속한 부귀영화를 택할 거 아닙니까? 이걸 알아야 된다. 그 말이오, 이걸 알아야.
그러면, 내가 현실에서 영생에 속한 부귀영화도 있고 또 영원한 사망에 속한 부귀영화도 있으니 그것이 어떤 것이냐?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 지키는, 인정 순종 하는 행위를 하면서 얻은 것은 다 영생하는 모든 소유라 말이오.
영생하는 부귀영화라. 다니엘이 총 총리 했지만 그 사람이 총 총리된 것은 영생하는 총 총리라. 다니엘의 총 총리가 하늘나라 가면 없는 줄 압니까? 아니오. 하늘나라 가서 총 총리의 그 영광과 총 총리의 권세와 총 총리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니엘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나와 하늘나라 서서, 다니엘과 나와 둘이 부활했을 때에 나는 사람을 예를 들면 수천 명 수만 명을 놓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리는 이 능력이 있고, 다니엘은 파사 나라에서 거기서 총 총리한 그 능력이 있고 이러니까, 총 총리한 그 능력과 권위와 영광과 거기서 신앙을 지킨 그 영광 이 있고, 나는 또 사람을 가르친 영광이 있고 각각 다르다 그말이오. 그게 없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 말미암아 온 재물 하나님의 뜻대로 삶으로 말미암아 그 재물을 사용한 것,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사물을 다 접촉한 거 그것은 전부 영생이 다 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형체는 안 가지고 가도 그것의 기능은 간다 그 말이오, 그것의 기능은. 호주머니에 돈 넣어 놓은 이걸,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아 두라 그러면 동록도 좀도 쓸지 안하고 도적도 구멍을 뚫지 못하고 다 영생한다.' 그 말은 이 돈이 하늘나라 가는 게 아니라 그 말이요. 그때. 지금 어디 가 있는지 내가 잘 모르지만 ○조사님, 사람이 뭐 그런 걸 좀 아는데 조금 좁아서 잘 좀 넓게는 몰라 좀 그런데, '아, 그러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면 그러면 물질이 갑니까? 어째 갑니까?' 이것도 그 사람은, 가르치며. 내가 희망 있게 봤어. '아, 그걸 묻는 거 보니 요거 참 바로 알라고 하는 갑다' 물질이 갑니까? 그라면, 돈을 백 원짜리 이 걸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이 보물을 하늘에 저축하는 것인데 보물을 하늘에 저축하면 백 원짜리가 하늘나라 갑니까? 어떻습니까? 뭐이 갑니까? 대답해 봐. 백 원짜리 돈이 가는 게 아니라 백 원짜리라는 권리가 가요.
그 능력이 가요.
여기서는 만 원짜리 백 원짜리 만 원을 모아 가지고 이래 있었는데, 가서 은행에 가 가지고 주면서, 만 원을 주면서 '날 이거 표를 해 주시오.' 하니까 수표 요만한 수표 쪼가리를 하나 줘. 그게 내나. 백 원짜리 만 원이면 뭐 들면 묵직할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라. 그것의, 그것의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표 이거 가지고 어디 가도 떡 그라니까 만 원 준다 그말이오. 또 이걸 이걸 떡 이걸 가지고 외국에 갈라 해 때는 이걸 떡. 그 외국에서 사용하는 또 이거 외국에서 사용하는 수표를 또 종이 쪼가리를 또 바꿨다 말이오. 바꾸는데, 이 종이 쪼가리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종이 쪼가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미국에 가 가지고, 미국에 가든지 일본에 가 가지고 떡 가서 내놓으니까 만 원을 척 준다 그말이오. 그게 뭐이냐? 종이 쪼가리는 그 돈의 권리의 표라 그말이오. 권리의 표.
그와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 물질을 가지고 가는 게 아니라 돈의 권세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돈의 권세. 자기가 세상에서 벼슬을 살았으면 그 벼슬을 가지고 그 나라에 그게 있는 게 아니라 그 나라에 벼슬의 권리와 위엄과 영광과 존귀를 다 가지고 가는 거라. 이러니까 이 세상은 참 묘한 세상입니다. '묘한 주시니 참 감사하다'고 '묘한 세상 주시고' 그 찬송 우리는 잘 안 하는데 묘한 세상 주시는 그거 참 아주 좋은 찬송입니다.
이래서, 영생은 이 세상에서 하는데, 그러니까, 날마다 그 영생을 어디서 이루느냐? 영생을 물건에서 이루고, 일에서 이루고 사람에서 이루고, 여기서 이룹니다. 영생을 다른 데서 이루는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이거 어떤 현재 막 일이 있는데 그 일이 영생 이루는 일도 있고 영원한 사망 이루는 일도 있고 그 물건이 영생을 이루는 물건도 있고 그 물건이 영원한 사망을 이루는 물건도 있고 그 현실에서 사람 접촉하는 사람과의 관계 가진 그것이 영생 이루는 관계도 있고 영원한 사망 관계 이루는 관계도 있으니까 뭐 할 거냐 그말이오. 영생을 이루는 그자 해야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그것이 뭐이냐? 그 방편이 뭐이냐 하면 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해서 산 채로 승천했으니까. 에녹이 산채로 승천했으니, 그러면, 영과 육이 산 채로 승천 한 사람입니다. 산 채로 승천했는데, 그러면, 에녹만 승천했습니까? 에녹이 산 채로 승천했는데 그 외에 또 영생으로 지금, 영생으로, 그 기능이 영생으로 하늘나라 간 게 뭐 있겠소? 뭣 뭐 있겠소? 에녹이 가지고 살던 보물의 권능도 다 하늘나라 다 갔다 그말이오.
그러기에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돈이 가는 게 아니라 그것의 기능이 갑니다. 기능이, 권리가. 여기서도 만 원짜리도 아닌데 가 가지고 주니까 조그만한 수표 조그만한 걸 하나 내주니까 그게 내나 돈의 만원의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걸 또 여기 외국 은행에 가 가지고 바꾸어 가지고 미국 가 가지고 그거 내 놓으니까 또 돈 만 원 준다 말이오. 그래 그게 뭐이냐 하면 기능의 표라.
기능의 표. 그게 돈이 아니고 기능의 표라 그말이오. 그러니까, 가지고 갈 때는 기능을 다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지금, 그러기 때문에, 오늘은 뭐 하는 때인고 하니 모든 우리의 영과 육의 기능을 지금 자꾸 영생시켜서 가지고 가는 것이요, 또 우리의 모든 관련된 사물의 기능들을 다 우리가 가지고 살려 가지고, 가지고 가는 것들입니다. '영의 병' 하는 그것도 아마 다른 데 나갔으면 뭐 얄궂을 건데 이제 그만 거의다 '백 목사 말하는 거는 무조건 틀렸다 할 게 아니라 좀 생각해 보자. 이상스러운 말한다.' 영의 병이라니? 영은 중생했는데 무슨 병? 영의 병은 무슨 병이라고 했지요? 범죄한 병? 예? 무능도 죄라. 중생된 영이 자기 심신을 통치하기를 예수님이, 예수님의 영이 예수님의 심신을 통치하듯이 그 영이 심신을 죽는 데로 끌고 가면 예. 하고 끌려가야 될 터인데. 심신에게 권리를 빼앗겨 가지고 영이 심신을 통치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서 무능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이러니 모든 것 중에 영생과 영원한 사망이 있기 때문에 가치를 거기 둬라. 네 일생 생활 할 때에 영생이냐 사망이냐 거기다가 가치를 두고 살아라. 돈에 가치 두지 말고, 사건에 가치 두지 말고 영광이나 지위나 권세 그까짓 놈의 데에 가치 두지 말고 영생에 가치 두고 영원한 사망에 가치 둬라. 이게 영원한 사망이면 암만 줘도 소용없다. 이거는 영생이면 암만 어떻게 해도 좋다. 가진다 말이오.
그러면, 모든 생활 방편 중에는 여러 가지 방편이 뭐 수억만도 많은 방편인데 무슨 방편 취할랍니까? 말해 봐요. 여기 반사. ○○○씨 대답해 봐. 무슨 방편 취할 거라? 예? 뭐라 해? 틀렸어. ○뭐꼬? 네가? 무슨 방편 취할 거라? 이거 중간반 반사들 이거 헛일이라. 또 ○○○,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꾸벅 꾸벅 졸아 가지고 뭐 할 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그거 모르면 학생들 암만, 골만 빠져 봤자 소용없어. 진리를 가르치면 그 속에 진리가 역사할 거 아닌가? 이러니까, 이 세상에 인간의 생활 방법이 억억만도 넘지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이 제일 좋지 그 외의 거는 다 사망이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하나님과 동행하는 방법, 피조물과 동행하는 방법. 하나님과 동행하면 피조물은 따라와서 내 종으로 나와 날 따라와서 동행하게 되고, 하나님 버리고 피조물과 동행하면.
하나님 배반하고 피조물에게 동행하는 것은 피조물에게 끌려서 피조물의 종으로 동행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행동하는, 생활하는 모든 방편이 피조물을 내 종으로 삼는 그 방법이 있고 피조물에게 내가 종 되는 방법이 있으니까 하나님 모셔서 내가 하나님의 종 되면 피조물은 내 종 되고 내가 하나님 배반하면 저는 암만 이거는 내 돈이라 해도 그 돈의 종이 됐소.
이러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거, 피조물과 동행하는 거. 하나님 버리고 피조물과 동행하는 거, 하나님과 동행만 하면 피조물은 다 내 소유가 돼 버렸어.
또 기쁨 중에는, 기쁨 중에는 몇 가지라 했습니까? 두 가지 기쁨. 하나는 십자가의 기쁨, 십자가의 기쁨 이거는 받아 봐야 되지 받아 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 자연 계시에서도 알아요. 예수 안 믿는 아이들도 '야, 이거 지금 우리 집에 꿀을 떴는데 이 꿀물이 단데 이거 저게 뒷집에 한 그릇 갖다 주고 올래' 하면, 아들이 한 오형제가 있다고 하면 '내가 가지고 가지요. 내가 가지고 가지요' 다 제가 가지고 간답니다. 꿀 물 가지고 가는 걸 제가 가지고 갈라 해 가지 그 갈라 하기를. 서로 가지고 갈라 해. 그래 가지고 이라니까. 서로 그래 싸니까 부모가 판정을 해서, 제일 꼬마 '그러면. 네가 갖다 주고 오너라.' 그래, 다른 거는 시투른하다 말이오. 또 그러다가 '야, 이거 우리 집에 없는데 그 사람들한테 이걸 좀 얻어 가지고 오너라.' 이라니까 다섯 놈이 서로 안 갈라 합니다. 얻으러 가는 거는 얻으러 가기 싫어해. 또 다섯 놈 인데 그것보다도, 그라니까, 서로 안 갈라 소리는 안 하고, 내가 간다 소리는 안하고 있다가서 '네가 가라' 이라면 기쁜 마음이 없이 실쭉해 가지고 얻으러 갑니다. 그보다도 '야, 아무것이 집에 거기 무엇이 좋은 게 있는데 우리 집에는 없으니까 고놈 좀 훔쳐 가지고 오너라' 훔쳐 가지고 오너라' 그라면 그 오형제 가운데에. '너 가라' '나는 안 갈랍니다.' '너 가라' '나는 안 갈랍니다' 안 갈라 한다 그말이오.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들어 놓은, 타락 속에도 그거 양심이 있기 때문에 비판을 할 줄 안다 그말이요.
이러니까, 십자가의 기쁨은 내나 주는 기쁨이야. 주면 더 많아져. 주님과 연락이 안 되면 주면 작아지지만 연락이 되면 주면 많아져요. 저 수원지에 수도, 수도관이 있는데, 수도관이 있는데 여기, 주는데 말이요, 주는데, 처음에는 한 집을 줍니다. 나중에는 물 먹을 집이 백 집이 생겼습니다. 이라면 수도관이 커지겠소 작아지겠소? 어떻게 돼져? 수도관 이 커지겠어 작아지겠어? 예? 크게 만들어야 될 것 아니오? 뭐 일 미리, 뭐 삼 미리, 십 미리, 백 미리 자꾸 크게 만들어야 될 것 아니냐 그말이요. 내가 커진다 그말이오. 하나님에게 은혜 받아 가지고 모든 피조물에게 자꾸 주고 주고 이라니까 피조물에게 주는 양이 많으니까 하나님께서 부득이 나를 자꾸 키워서 하나님께 많게 받도록 해야 된다 말이오.
십자가의 기쁨은 줌으로의 기쁨이요, 주의 선물 받고 이제 주님 만나서 기쁜 것은 하나님에게 얻어 기쁨이오. 하나님에게 받아 가지고 피조물에게 주는 기쁨 하나님에게 받는 기쁨 이 두 기쁨이 성도들의 기쁨인 것입니다. 이것은 죽지 안하고 없어지지 안하는 완전 기쁨이요.
이라니까, 이 삼 육 이것을 똑똑히 학생들에게 가르쳐서 이걸 속에 박아서 주입되면 그 학생이 택한 자이면 딴 데 못 갑니다. 택한 자이면 그 학생은 딴 데 예수 믿으러 못 가요. 딴 데 이렇게 가르치는 데가 별로 많지를 못하다 그말이오. 이런데 엉뚱하게 자꾸 가르쳐 놓기 때문에 이리 저리 돌아다니지 이걸 진리를 가르쳐요.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