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9 01:23
영감으로 인정하는 실존
1987. 12. 20. 주일오후
본문:요한복음 14장 11절∼24절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도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오전에 거게 대한 서론을 약간 말했습니다. 우리는 타락해서 “사람이 육체가 됐다” 그말은 사람이 짐승같이 됐다 그말입니다. 그래서 좀 귀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 뺏기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아주 껍데기 아주 천한 것 그만 좀 있으면 쇠해지고 낡아지고 더러워지고 없어질 그런 것들만 알고 그것만 가치로 삼아서 거게만 욕심을 품고 그것만 상대해서 날뛰는, 본 지위에서 떨어진 타락한 인생들이 됐습니다. 여게서 주님이 오셔서 이런 것을 다시 회복해 가지고서 재생을 해서 온전한 사람으로 온전한 그 세계에 나아가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눈으로, 육체의 귀로, 육체의 이 수족으로 접하는 그것보다 마음이 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마음의 귀로, 마음의 눈으로, 마음의 수족으로 모든 걸 접하도록 그렇게 성장해 나아가고, 마음 중에도 그다음에는 양심으로 듣고, 양심으로 보고, 양심으로 행동하고, 그보다도 그다음에는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하고, 진리로 하고, 영감으로 하고, 하나님을 힘입어서 하는 이런 점점 온전함에 향하여 나아가는 이 성화 생활을 우리가 소망하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여기 11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내가’ 한 것은 신인양성일위로 육신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말합니다. 육신으로 나타나서 만질 수도 있고 또 먹을 수도 있고, 예수님은 육체로 있을 때에 그렇게 보이지 않지를 못합니다. 내나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육체만이 아니고 육체로 계실 때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안에 계시고 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계시고 서로 상호 내주하고 계시는 이 사실을 믿으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이걸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이는 주님만 믿고 알지 보이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 안에 계시는 것도 모르고 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보이는 인성을 가지신 주님 안에 계시는 것도 모르고 하기 때문에 이를 너희들이 모르지마는 이 실상 사실 이런 것이니까 너희들이 믿으라 이렇게 권면을 했습니다.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이것 믿기가 힘이 들어요.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보이는 모든 것보다 확실히 내 곁에 계시고 나와 같이 계시는 것을 믿는 것이 어렵다 그말이오. 또 보이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안에 계시는 것도 말을 해야 잘 이해가 안 되고 또 알기 어려워. 그러나 주님은 믿으라 이랬습니다.
“그렇지 못하겠거든” 보이는 분이 보이지 않는 분 속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속에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것을 믿으라. 믿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 그러면 주님이 육체의 계실 때에 썩은 나사로를 살려내고, 죽은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고,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게 하시고 한 그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시는 아버지가 하신 것이라 말입니다. 아버지가 하신 것이라.
그러면 보이는 주님보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그 일을 하신 것이니 너희들이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셔서 역사하시는 것을 너희가 믿을라 해도 ‘그것 이치에 안 그런데’ 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믿어지는데 믿어지지 안하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인해서 믿으라.
그러면 예수님의 하시는 그 일이 내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시고 축사하시는 그 주님은 그냥 그 자리 서서 있는데 누가 와 가지고 그렇게 보이는 떡을 자꾸 떼내 주니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음이 있습니까? 그것은 보이는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그와 같이 하신 것입니다.
보이는 주님이 ‘돌을 옮겨 놓으라’ 하고서, 아버지여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걸 감사합니다. 아버지여 이 사람들을 다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니까 이제 나사로를 살려 달라고 하시고 고함을 질러서 부르니까 나사로가 살아났다 말이오.
나사로가 살아났는데 보기에는 예수님이 고함 지르니까 살아난 것으로 보이지마는 실은 예수님이 고함 지른 것은, 큰 소리로 부른 것은 예수님이 부르신 게 아니고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서 큰 소리로 고함 지르는 그 일을 하시니까 그 하시는 일이 예수님의 음성을 통해서 나타나시고 그 일이 이루어진 이 사실을 너희들이 믿으라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는 것은 한 번만 해도 틀림없는 말씀인데 또 진실이라는 말 하필 붙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진실을 붙이되 한번 더 “진실로 진실로” 이래 놓으니까 또 거짓말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같이 그래 들려집니다.
한번 말씀하면 그대로 다 그대로인데 뭐하려고 진실이라는 말 새삼스럽게 붙일 것이며 또 진실이라는 말을 두번이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렇게 붙이셨는가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당신의 말함이 에누리 있고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더 견고히 믿도록 하기 위해서 “진실로 진실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진실로” 하는 이 말을 붙이지 안한 말씀이나 진실로를 뭐 두 번 세 번 붙인 말씀이나 꼭 같습니다. 또 주님의 말씀은 백 번 말씀한 것이나 한 번 말씀한 것이나 꼭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들의 부패성을 헤치고 우리로 믿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강조하신 것입니다.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자는’ 이 나는 누굽니까? 나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신데 어떤 예수님 믿는가? 예수님은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고 또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신다. 예수님이 일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게 아니고 그속에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내주하셔 가지고서 보이는 일들을 하신다. 이 사실을 믿으라 그말이오.
하나님께서 볼 수 있게 역사하는 것만 네 눈으로 보고서 하나님께서 뭐 육안으로 보기에 손으로 만지고 어떻게 하고 말이지, 예를 들면 이 손으로 주물든지 안수를 하든지 뭐 어떻게 하든지 이렇게 해야 무엇이 되는 줄로 그렇게 알고 있는 그 모든 보이는 나타난 이 현상 세계라는 감옥 속에 갇혀 가지고서 이런 포대기 속에 싸여 가지고 여게를 뚫고 나가지 못하는 그런 자가 되지 말고 이런 것들을 완전히 꿰뚫어서 이런 것들에게 제한을 받지 안하고 이런 것들을 완전히 초월해서, 하나님이 보이는 형체 속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보이지 안한 무형의 존재로 계시고 보이는 형체 속에도 계시고, 역사하실 때는 보이는 형체의 작용을 통해서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고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일을 하시는 이 사실을 믿으라 그말입니다.
“나를 믿으면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그러면 “나를 믿으라” 뭘 믿으라? 성자와 성부와 성령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인간의 육안으로 볼 수 있게도 역사하시지만볼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보다 볼 수 없게 역사하시는 일이 더 많으십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믿으라”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저도 할 것이요”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이 해 주실 것을 믿고 바라고 인정하고 기도를 한다든지 이래 할 때에는 너거 눈으로 보기에 아무 흔적도 없고 아무 무슨 작용하는 것도 보이지 아니하나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 그 역사로서 보이는 것들을 조성해 낸다 하는 이 사실을 믿으라 말입니다. “믿으면 주님이 하시는 일을 다 제자들 너희들도 다 하리라” 오늘 우리들도 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그러면 지금 제자들이 이렇게 주님을 믿으면, 보이는 분과 보이지 않는 분을 믿으면,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일들을 해 내고, 또 보이는 일보다도 보이지 않는 일을 하는 것이 더 큰 일 하는 것이고, “이 사실을 믿으라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들도 다 하리라” 이러니까 육안으로 보는 것만 자꾸 상대하고 가치로 삼고 실존으로 삼는 자들아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이 사실을 믿으라. 육안으로 보이는 이것보다 육안으로 보이지 안하는 이것은 더 확실하고, 더 실상이고, 더 정확하고, 더 큰 이 사실을 너희들이 믿으라.
보이는 형체 가진 것 그것의 실존보다 보이지 않는 그 실존을 더 믿으라. 보이는 그것들의 세력보다 보이지 않는 세력은 더 크다. 보이는 성공보다 보이지 않는 성공은 더 크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성공을 위해서 보이는 것들을 다 투자했다. 인간들이 인식하고, 인간들이 지식하고, 인간들이 평가하는 그 차원 이하의 것만 인간들은 보지마는 그 위에는 무한이 있다. 그 위에 있는 것들을 너희들이 믿으라.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을 너희들도 할 것이고 또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주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
큰 일 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 말했습니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이 십자가 못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하심이라 그말입니다. 부활하심이라.
그러면 제자들에게 모든 일을 해 주시는 것은 누가 해 줍니까? 제자들에게 무슨 일이 다 이루어지고 하는 그것은 누가 그것 제자들이 구할 때에 기도하는 대로 다 되어지고 하는 그런 것은, 저 지난번 대구집회 때에 그 병 종류는 백서른 몇 종류고 나은 사람은 육백여 명이 나았는데 그 일은 누가 하는가? 이제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이지 않는 솜씨 보이지 않는 능력으로 해 놓은 일만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됐습니다.
됐는데,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할 뿐 아니라 나보다 더 큰 것을 하게 된다” 그것은 어찌 주님이 같이 제자들과 같이, 살아서 같이 있을 때에 그 제자들에게 주님이 하시는 그 기적적인 일을 하도록 하신 것보다 주님이 죽으시고 난 다음에는 더 큰 일도 할 것이다. 어떻게 그리 되는가? 그것은, 어찌 그리 되는가?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간다 말은 죽는다 말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다시는 세상 사람들이 보지를 못합니다.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주님으로 계셨습니다.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주님으로 계셨는데, “감을 인함이라” 어째 갔다고 어째 그래 되는가? 어찌 그렇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인성의 형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는 자유 자재가 안 됩니다. 이 보이는 형체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이 형체를 통해서 일하지 형체를 통하지 않고는 일하기가 어렵고 또 형체를 통해서 일할라 하니까 자유롭지 안해서 제자들에게 주님이 와서 일을 해도 하기가 힘이 든다 그거요.
풍랑이 일어나서 제자들이 바다에서 고생당하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거게 물 위로 걸어올 필요가 없어. 그까지 올 필요가 없어. 그까지 올 필요가 없고 그만 영적으로 일하시면 되는데 그때는 그 제자들을 물에 빠지지 안하도록 건지려고 하면 당신이 오셔야 되고 물 위로 걸어와야 되고 또 소리를 내야 되고 또 이래 어째 해야 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안해.
지금은, 신인양성일위의 주님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제한받지 안하니까 살았을 때에는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을 때에 그때 ‘주님이 계셨으면 죽지 안했을 터인데 주님이 계시지 안해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그때는 예수님께서 저 딴데 가서 계시니까 나사로가 죽는 데 거게 계실 수가 없다 말이오. 저게 있으면 여게 못 있고 여게 있으면 저게 못 계시고 이렇지마는 이제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동양에도 이 시간 계시고, 서양에도 이 시간 계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같이 계시고 이렇게 하는 것이 자유 자재라.
“아버지께로 감이라” 내가 이 육을 입고 있을 때에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지마는 이제 일단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서 완전 승리를 하고 신령한 몸으로 이 부활을 하고 난 다음에는 자유 자재하기 때문에 지금보다 너희들 속에도 더 크게 역사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더 크게 역사할 수 있어서 지금은 요 조그만한 갈릴리 지방에서 일하고 있지마는 앞으로는 땅끝까지 이 복음이 다 전파되도록 그렇게 일하실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여게서 우리는 보이는 주님 안에 보이지 않은 아버지가 와서 일하신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역력히 가르치고 계십니다. 또 모든 제자들이 보고 듣고 접하는 그 모든 예수님의 행동은 “내 행동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시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그 일이 나를 통해서 나타내고 있다” 하는 것을 역설을 해서 자꾸 믿도록 하려고 애를 쓰십니다.
또, 상호 내주하는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을 보아서 너희들이 믿으라.
내가 아버지에게 구하니까 보이지 않는 그분이 와 가지고서 나사로도 살리지 안했느냐? 또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일 때에도 주님이 떡을 놓고 아버지 앞에 축사하시니까 보이지 않는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분이 오셔 가지고서 그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고도 남게 하셨다 말입니다.
이러니까 “나를 믿으라” 이렇게 보이는 분 속에 보이지 않는 분이, 보이는 분이 보이지 않는 분으로서 내주하고 계시는 이렇게 보이고 보이지 않는 면, 또 서로 상호 내주하는 것, 이것을 너희들이 믿으라.
그러면 나 하는 일을 너희들이 다 할 수 있고 또 이보다 더 큰 일 할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 신인양성일위로 살아 있으니까 너희들은 더 확실하고 든든하지마는 내가 아버지에게 감으로 더 확실하고 든든하다. 더 일하시는 능률이 더 크다 그말입니다.
우리 사람은 눈으로 보는 것, 입으로 말하는 것, 형체를 가진 것 그런 것은 실감을 가지고서 느끼고 있지마는 그만 무형의 존재면 그만 실감을 가지지 않습니다.
가지지 안해. 옆에 수십 명이 눈으로 보고 있는 그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이 보고 있는 것은 더 정확하고 더 확실하다 그말이오. 더 정확하고 확실하다. 그것을 자꾸 가르칩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신인양성일위의 제자들과 동행하실 때, 동행 동거하실 때 그때에 큰 일을 하십니까 예수님께서 볼 수 없는 예수님으로, 죽어서 볼 수 없는 예수님이 된 지 후에 더 큰 일을 합니까, 어떻습니까?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더 큰 일 하시는 것은 제자들과 함께 손잡고 이와같이 있을 때 그때에 더 큰 일 하십니까 이제 그만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는 승천하시고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안할 그때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큰 일 하십니까? 제자들과 한 자리에서 같이 이래 한 자리 손잡고 한 자리에 얘기하고 있을 때 그때에 예수님이 제자들을 지키심이 더 든든합니까 이제 보이지 않게 부활하셔 가지고서 눈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게 세상 끝날까지 같이 하시마고 하신 그 주님 지키심이 더 든든합니까? 어떤 게 더 든든합니까? 보이지 않는 주님이 보이지 않게 역사하심이 더 확실하고 더 견고하고 든든한 요 사실을 믿으라 말입니다.
이것 믿어야 돼요. 안 믿으면 안 돼.
마귀란 놈은 ‘네 눈으로 봤나? 네 귀로 들어봤나? 네가 먹어봤나? 네가 손으로 만져봤나?’ 도마 그도 ‘내가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안 믿겠습니다' 하는 그것은 영감입니까 마귀가 그렇게 했습니까? 마귀가 그렇게 했어, 도마. 이러니까 예수님께서 “만져보고, 네가 믿음 없는 자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 돼라” 하는 것은 마귀를 쫓아내고 나니까 그뒤에 도마도 딴 사람 되고 말았다 그말이오.
이래서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때도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에 예수님께서 육체로 하시는 일도 있지마는 육체로 있을 때에도 다 영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체로 하신 일은 아버지가 했고 예수님의 육체가 하지 안했고 다 아버지의 영이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영광을 아버지가 받으시도록 하기 위함이라” 우리가 주님에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것이 다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의 기도하는 것 이루어지는 것 그것 보고 모든 사람들이 ‘야, 하나님 참 위대하시다. 하나님 참 놀랍다. 감사하다.’ 그렇게 모든 사람이 하나님에게 칭찬을 하고 찬양하고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한 걸 그대로 다 이루어지니까 이루어진 그것 보고 모든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 앞에 구하는 것은 어떤 것을 해 주신다고, 우리가 아버지 앞에 기도하는 그것을 아버지가 해 주시는데 어떤 것을 해 주신다는 말입니까? 저 ○○○집사님, 어떤 걸 해 주신다 말이지요? 한번 대답해 봐요.
제자들이, 모든 성도들이 주님에게 기도하면 기도하는 그것을 다 들어서 이루어 주시는 것은 이루어 주신 그 결과를 보고 ‘하나님 아버지 참 감사하고 그렇게 귀하고 착하고 옳고 바르고 깨끗한 참 하나님이시로구나 공평된 하나님이시로구나’ 그렇게 영광을 돌리게 하기 위해서 다 너희들이 구하는 대로 들어 주시겠다 그랬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말입니까? ○○○집사님?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신다 말이지요? 그거야 알기 쉬운데 뭐, 죽은 호랑이가 산 개만 못해.
암만 명철해도 그만 졸면 그것은 송장 한가지라.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시지요, 이 장로님? 구하는 것 다 들어 줘요? 구하는 것 다 들어 주셔? ‘저 미운 놈 저놈 당장 오늘 밤에 뒈지게 해 주옵소서’ 그러면 기도 들어 줄까요? 그러면, 그래 어떤 기도를 들어 주시요? 아버지에게 영광 돌릴 기도만 들어 주시지.
‘나는 돈이 없고 저 돈 많으니까 오늘 밤에 저놈의 돈 확 뺏들어 다 내 주머니 다 들어오게 해 주옵소서’ 그것 그러면 그 기도 들어 주면 아버지께 영광 돌리겠소? ‘하나님은 도둑놈의 하나님이로구만. 도둑놈의 하나님이구로나.’ 안 그렇겠소?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영광 돌아가고, 칭찬 돌아가고, 감사 돌아가고, 모든 사람이 다 찬양할 수 있는 그런 기도를 해야 들어 주신다 그말이오. 알겠습니까? 맞아요 안 맞아요?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러면 지금 우리가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에게 기도하든지 기도할 때에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하면 누가 들어 줍니까? 누가 들어 줍니까 누가 해 줍니까? 누가 해 주요? 아버지가 해 준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주님이 해 주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뭣인지 몰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누가 해 줘요? 주님이 해 주시요, 주님이 해 주셔.
‘이걸 뭘 주십시오. 이 사람의 병을 낫게 해 주십시오. 이 일을 잘 해결해 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면, 기도하면 기도한 걸 누가 해 주시요? 주님이 해 주시요. 이런데 그걸 말을 좀 투룽하게 해 놨거든. ‘믿으면 된다’ 이래 놓으니까 이 사람들이 `믿으면 된다' 하니까 ‘이 병을 낫게 해 주옵소서’ 이러니까 믿음이 모자라 안 되니까 `믿습니다. 믿사옵나이다. 믿사옵나이다.’ 암만 믿어봤자 믿음이 하는 것 아니오. 알겠습니까?
또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이래 놓으니까 믿음 자체가 무슨 힘이 있는 줄 아요. 믿음 자체는 아무 힘 없어. 믿음 자체는 아무 힘 없습니다. 암만 믿어봤자 안 돼. 암만 믿어봐도 안 돼요. 천 명이, 예를 들어서 무슨 이 문제를 두고서 자꾸 기도합니다. ‘주여 이것을 다 이걸 잘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듣는다” 했으니까 믿음으로 자꾸, 기도하고서 ‘믿습니다. 될 걸 믿습니다. 믿습니다.’ 천 명이 믿으면 그 믿음 가지고서 되는 줄 압니까? 믿음 가지고 되는 줄 압니까? 믿음 가지고 됩니까? 그래 믿을 때에 믿음이 그 일을 합니까 누가 하요, ○○○목사님? 믿음은 주님이 해 주시도록 주님에게 간청하니까 주님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알겠습니까? 믿음은 주님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지 믿음만 가지고 아무것도 못합니다. 주님이 이루시도록 내가 주님에 간청하는 것이라. 주님에게 내가 접선하는 것이라,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이 해 주실 것을 내가 믿으면 당신이 해 주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믿으면 당신이 믿는 그대로 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해 주시는 것은 주님이 해 주시고 믿음이 해 주는 게 아니고 믿음은 주님에게 해 달라고 교섭을 해서 주님에게 해 줄 수 있도록 연결을 시키는 것이 믿음이지 믿음 자체만으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구별해서 알아야 돼요.
이러니까 자,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누가 해 줘요? 주님이 해 주시는데, 주님이 해 주시는데 그러면 우리가 주님이 해 주실 것을 믿을 때에 믿는 믿음 그것이 그 일을 합니까 내가 믿을 때에 주님이 와서 해 주십니까? 믿을 때에 주님이 와서 해 주시요.
의심하는 것은 주님이 해 주신다고 했지마는 ‘이것 안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을 인정치 않는 것이라.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 주님을 거짓말 하는 주님으로 만들고 인정치 안하는 것이라. 주님이 언제 우리에게 속이는 거짓말 했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다 주님이 와서 해 줘. 주님이 친히 와서 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주님이 와서 하십니다.
무엇이든지 주의 이름으로 구하는 것은 주님이 와서 하셔. 주님이 와서 하시는데 주님이 무슨 뭐 뚜렷이 무슨 표적이나 있든지 무슨 해 주신다는 그런 보이는 증거가 있으면 좋을 터인데 주님이 해 주신다는 그런 보이는 증거, 보이는 역사의 증거가 있으면, 나타나서 뭐 움직이든지 무슨 뭘 하든지 그렇게 좀 소리를 내든지 뚱땅거리든지 뭐 좀 투닥거리든지 좀 뭐 목수들이 집 짓는 것 모양으로 무슨 좀 공작이나 역사가 그 보이는 그게 있으면 좋을 터인데 그런 게 없으니까, 그게 있으면 일을 잘할 수 있어요 그런,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를 가지고 일해야 더 일하기가 좋아요 그것 없이 해야 일하기가 좋아요? 주님이 일하시는데 그것 가지고 해야 일하기가 좋습니까? 그것 없이 일해야 일하기가 좋습니까? 그래도 보기에 뭘 칼도 있고 뭣도 있고 연장도 있고 이것 저것 뭐 볼 수 있는 그런 역사와 작용과 그런 모든 공작들이 있어야 그 일들이 잘 되겠습니까 없어야 잘 되겠습니까? 있어야 더 하기 쉽고 잘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없어야 더 주님이, 없이 눈에 보이지 않게 그렇게 역사하시고 해야 일이 잘 되고서 더 속히 되고 크게 된다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알기는 다 아는데. 알기는 다 알아. 참 여러분들 이제 상급이 있든지 심판이 있든지 핑계를 못 할 거야. 그래. 나보다 더 큰 일 한다. 내가 지금은 육체를 가지고 있지마는 내가 육체를 떠나면, 죽었다가 부활하면 더 큰 일 너희들이 할 것이다 말씀했어.
하나님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이 물계, 물형이라는 이 물형. 물형을 가지고 일하기가 쉽습니까 물형 없이 일하기가 쉽습니까? 물형 없이 일하기가 쉬워, 물형 없이.
그러기 때문에 자꾸 이렇게, 우리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일하기가 쉽습니까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무형의 역사로 일하기가 쉽습니까? 무형의 역사로 일하기가 쉽습니다.
또 우리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우리 사람들이 인정할 만한 그런 방편을 통해서 일하기가 쉽습니까 우리 사람들이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그런 방편을 통해서 일하기가 쉽습니까? 인간들이 인정할 수 없는 방편을 통해서 일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알고 믿을 수 있는 그 범위 내에 큰 성공이 있습니까 보지도 못하고 인정도 못하고 믿을 수 없는 그 세계에 큰 것이 있습니까? 어데 큰 것이 있소? 그 세계에 큰 것이 있어. 참된 것이 있고.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리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면 이 아는 것, 세상 사람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데 우리는 보고 들었으니까 육안으로 봤습니까 이 육의 귀로 들었습니까? 육안으로 본 게 아니라. 육안으로 본 게 아니고 성경 말씀에 당신이 계시로 말씀하셨기 때문에 계약의 말씀으로 우리가 봤어. 계약의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가 들었어.
이래서, 세상은 알지도 보지도 못하지마는 우리는 알고 보고 “우리 안에 계시겠음이라” 그러면 우리 안에 계시겠다는데 우리 안에 계실 때에ㅡ이거 잘 안 들으면 몰라, 고기덩어리가 돼 놔서.ㅡ그러면 형체로 와서 계셨습니까 무형의 존재로 계셨습니까? 그러면 뭘로 봤습니까? 뭘로 봤습니까? 뭣으로 들었습니까? 당신이 말씀하셨으니까, 신구약 성경에 이와같이 말씀했으니까 우리가 말씀으로 봤지. 말씀으로 들었지. 또 우리 안에 계시는 것을 우리 마음으로 봤지. 마음으로 봤다 말은 뭣이요? 우리 마음으로 인정하지. 인정하니까 봤지. 말씀해 놔도 부인하면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이지. 인정할 때에 본 것이지. 믿을 때에 본 것이지.
요런데, 자, 주님이 육안으로 볼 수 있게 와서 일하실 때와 볼 수 없게 와서 일하실 때에 우리에게 일하는 능률이 어느 것이 큽니까? 요걸 꼭 잡아야 돼. 요걸 못 잡기 때문에 사람들이 안 돼. 이것 믿는 목사가 많지 안해. 믿는 장로가 많지 안해. 믿는 전도사 권사들이 많지 안해.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이라” “나보다 큰 일 할 것이라” 큰 일 하는 것은 왜 큰 일 한다 했습니까? 지금은 내가 유한한 몸을 입고 너희들과 같이 있기 때문에 육으로 가지고 너희들에게 해 줄라 하는 것은 뭐 별로 많은 일을 할 수가 없어. 또 내가 육을 입고 있기 때문에 육을 입고 있는 내가 너희들 안에 가서 육을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마음으로 들어가 가지고 일할라 하더란대도 부자연스러워서 일을 그렇게 능률 있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 못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고 난 다음에는 아무 제재받을 것 없이 너희들 속에 가서 얼마든지 활동해서 일할 수가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보다 큰 일을 할 수가 있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우리와 같이 계실 때에 육체로 형체를 가지고 같이 계실 때에 더 큰 능력의 역사를 할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무형의 존재로 와서 계실 때에 능력으로 더 큰 능력으로 역사할 수가 있습니까? 저 뒤에도? 그냥, 여러분들이 꼭 알고, 그렇게 알기 쉬운 게 아니라. 알기 쉬운 게 아니라.
내가 아래 저녁에, 그 뭐꼬? ○목사를 여기 세우고 내가 여기 교역자들 많이 왔는데 칭찬을 하고 이랬더니마는 모두 저희끼리 삐쭉삐쭉 하면서 ‘헤, 누가 뭐 저만치 못 깨달은 사람이 있을까니 강단에 서서 저보다 선배들이 많이 있는데 강단에 서서 큰소리 텅텅 하고 교만해서 아무짝도 못쓰겠더라.’ 그래 가지고 내가 오늘, 오늘 내가 어데 전화를 했어. 전화를 하면서 아침에 ‘편하냐’ 이래 물으니까 그래 조사인데 좀, 좋은 조사라.
그래서, ‘○목사 설교하는 것을 들었나’ 이러니까 ‘예 들었습니다' `설교 잘하지 않더냐' 내가 이래 물으니까 뭐라 하는 게 아니라 ‘모두 금요일날은 뭐 서울서도 오고 전국에서 모여드는데 목사님 설교 소리를 들으려고서 지금 그래 모였는데 그래 다른 사람이 서면 그만 실망이 되고 이렇습니다. 자꾸 배워가는 각단을 배우려고 줄기를 끝까지 배워나가려 하는데 그렇습니다.’ 떡 이래. 그래 내가 또 뭐라 하는고 보려고 좀 알아 내게 좀 그런 것 같아서 ‘새벽 설교 들었나’ 내가 이러니까 `저는 엊저녁에 올라와 버렸습니다’ 그래.
그걸 아직까지 그분이 똑똑히 지금 깨닫지는 못하고 있지마는 희망이 있다 말이요, 희망이 있어. 희망이 있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크다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찾으려고 애를 쓰고 거게서 무엇을 하려고 애를 쓰니까 그래 자라면 얼마 안 가서 자라져요, 그만. 됩니다.
이러니까 여게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인함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견적인 역사로 와 가지고 역사하는 것보다 사활하셔 가지고 불가견적의 역사로 역사하는 것이 그 역사가 더 크다. 이것을 자꾸 지금 강조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예수님하고 같이 한자리에서 같이 먹고 이와같이 내치 동행하고 다닐 때에 그때에 제자들에게 주님이 도와 주시고 같이하시는 것이 그때가 큽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보이지도 않고 그만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보이지도 안하고 눈에 보이지도 안할 그때가 제자들과 같이 해서 일하는 것이 큽니까? 그때가 큽니다.
또 제자들이 보이는 형체를 가지시고 자기들과 함께 하는 그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그 주님이 자기에게 더 효력 있게 역사합니까, 눈으로 보지 못하는 무형의 불가견의 주님으로 자기들에게 역사하시는 것을 자기가 인정만 하면 와서 할 수 있는데 그렇게 하시는 게 더 큽니까? 그게 더 커.
베드로가 처음에 물 위에 척 내려 가지고서 물 위로 걸어갈 때에는 누가 그렇게 걸어가게 했습니까? 아버지가 걸어가게 했소 주님이 걸어가게 했소? 주님이 걸어가게 했다 말이요, 주님이 걸어가게 했어. 그때는 무슨 주님이 형체를 가지고 했습니까? 형체를 가지고 했소? 형체 없어. 나중에 물 속에 빠져들 때에 거머쥐고 이래 뻐뜩 들어올려 가지고서 같이 갈 때에는, 갈 때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주님으로 했습니까 형체를 가지신 주님으로 했습니까? 그러면 처음에 혼자 걸어갈 때가 상급입니까 나중에 예수님하고 같이 배로 걸어올 때가 상급입니까, 어느 것이 상급입니까? 어느 게 상급이요? 갈 때가 상급이라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 올 때가 행위에 상급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손 한번 들어 봐. 몰라? 갈 때가 상급이야. 올 때는 하급이라. 알겠습니까? 그러면 형체를 가지신 주님이 우리에게 크게 역사할 수 있습니까 형체를 가지지 않고 무형의 존재로 우리에게 역사할 때 크게 역사할 수 있습니까? 무형의 존재로. 우리 육체로 되어 있는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이 종을 이것 움직이기가 이것 쉽습니까 이 육체 안 하고 내 마음으로 움직이기가 쉽습니까? 내 마음으로 이것 종을 움직이기가 쉽습니까 이 손으로 육체로 거머쥐고 움직이기가 쉽습니까? 자, 어느 게 쉽습니까? 내 손으로 거머쥐고 움직이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 내 마음으로 가지고 움직이기가 쉽다고 생각하는 분 손 들어 봐.
허, 잘 든다. 내 마음으로, 자, 여러분들 지금 수천 명 모였는데 이것 자, 한번 움직여 봐. 자, 여기 냅둘께. 종소리 나구로 해 봐. 나는 혼자 자, 손으로 여러분들 마음으로 움직이구로 해 봐. 마음으로 움직이게 해 봐. 소리 나구로 해 봐. 이러니까 한 마디도 못 알아들어. 저 ○○○조사 보니까 하나 손을 바로 들었다.
우리는 이 유한된 고기덩어리 이 속에 들었기 때문에 이거라야 되지 신령한 것은 못 해. 주님은 우리에게 와서 해. 주님은 뭐이냐? 형체를 가지고 일하시는 것이 우리가 마음으로 일하는 것같이 어려워. 알겠습니까? 무형의 존재로 일하는 것은 우리가 고기덩어리로 하는 것같이 쉬워.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가 성경 말씀에 약속하신 주님을 마음으로 영접하면 마음으로 내 안에 계셔서 ‘주님 나와 함께 계신다’ 하면 전능이 계셔. 전지자가 계셔. 함께 계시는 걸 믿을 때에 그분은 무형의 존재로 내 속에 계시면서 오만 것 다 능하게 할 수 있어.
그러면 주님이 혈육을 가지시고 제자들과 같이 계실 때에 그때에 제자들과 같이 하시는 그 역사가 더 확고합니까 제자들이 주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들이 그때 마음으로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믿고 주님이 자기에게 함께 하실 것을 믿을 그때에 계시는 주님이 더 확고합니까? 어느 주님이 더 확고해요? 어느 주님이 더 확고해요?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그 주님이 더 확고합니다.
이러니까 이 말은 오늘 우리가 늘 말하기를 주님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 안에 계시고 자기 언행심사를 맡아 주관하여 주옵소서 이렇게 주님이 자기 안에 계시는 것을 믿을 때에 주님이 와서 계실 수 있어. 내 안에 주님이 계시는 걸 믿고 내 언행심사를 주님이 주관하실 것을 믿을 때에 그분은 전지 전능으로 내 언행심사를 주관할 수 있다 말이오. 내가 믿는 믿음이 끊어지기 전에는 당신이 내 속에서 전능으로 역사하실 수 있어. 내 속에 계심을 내가 믿을 때에는 전지 전능으로 역사할 수 있지만 내가 믿지 안할 때는 할 수 없어.
이러니까 우리 구원이 이렇게 이 신령하고 신비한 구원이기 때문에 자꾸 마귀는 우리를 이 외부로 나가 가지고서 이 유형적인, 이 모든 신령한 능력이 제한받고 이것 방해받는 이것 꼭 유형이라야, 모양이 있어야 형체가 있어야 인정하니까 형체 속에 하나님의 능력을 가둬 버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요렇게 만드려고 자꾸 만든다 그말이오.
그런고로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주님,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주님보다도 육안으로 볼 수 없고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주님,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주님보다도 양심으로 볼 수 있는 주님, 양심으로 볼 수 있는 주님보다도 중생된 영과 자기 심신이 한덩어리 돼 가지고 볼 수 있는 주님, 이 주님이 자기에게 최고로 역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최고로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는 이것을 믿어야 돼요.
그러면 다니엘이 사자구덩이 들어갔을 때에 그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그렇게 했다 하는데 그것은 천사를 보내서 그러는 것은 누가 그랬습니까? 주님이 했어. 주님이 하셨는데 당신이 하시면 될 터인데, 당신이 하시면 될 터인데 그것은 사자이기 때문에 그것은 물질이요 짐승이니까 천사를 보내 가지고 입을 틀어막아야 된다 그거요.
또 불이 타고 있을 때 그때는 그뭐 당신이 능력으로만 하면 되기 때문에 와 가지고서 불기세를 멸하니까 와서 태우지 못했다 그말이오. 성경에 보면 주님이 형체 가지고 역사할 때도 있고 형체 없이 역사할 때도 있고 이러니까 형체 없이 역사할 때가 더 자유 자재로 큰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 형체만 인정하지 마. 육안만 표준, 육안을 표준하지 말라 그말이오. 육안을 표준하지 말아야 됩니다. 육안을 표준하지 말고 마음의 눈을 육안보다 더 표준하고, 마음의 눈보다도 양심의 눈을 더 표준해. 양심으로, 양심으로 있다 하면 우리 마음으로 있다는 것보다 더 확고하고 더 강해. 굳세.
양심으로 믿고 인정하는 그 실존보다, 양심으로 인정하는 실존보다 영감으로 인정하는 실존은 바로 완전한 실존이라.
자, 오늘은 또 인제 봉지를 쪼그매 뗐으니까, 자꾸 여러분들이 배워야 될 터인데, 이래 놓으니까 내가 삼십육 년 아니라 삼십칠 년이 다 돼 가는데 삼십칠 년 가르쳐도 만날 장 가르쳐 봐야 장 모른다 하니까 그것 탈 아니요? 또 물으면 모르지 또 물으면 모르지. 이러니까 자꾸 들어서 흘러 떠내려 보냈기 때문에 그래.
오종덕 목사님이 말하기를 가르쳐 놓고 뒤에 물으면 또 모르고 이러니까 가르칠 게 많으니까 참 좋다고서. 이 가르칠 게 없으면 힘들 건데 가르칠 게 많으니까 좋다고 하는 모양으로 나는 가르칠 게 많은 게 좋은 게 아니라 그만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못 알아들으니까 답답해, 내가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까.
녜, 잠깐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들에게 이 보이는 수건을 벗고 보이는 것 속에 더 귀하고 실존의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보이지 않는 그 속에 하나님의 계약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 계약으로 되어 있는 그 속에 하나님이 증거하는 영감으로 되어 있는 이 실존, 이야말로 완전하고 깨끗한 것인 것을 깨달아 저들이 이 육안으로 가리워져서 육안만 표준하고 육안과 육의 귀로 육의 모든 이 수족으로 접하는 이것만 인정하고 이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는 데에서 완전히 이 수건을 벗겨 주시고 이 모든 사망의 보자기 마귀의 보자기를 다 벗고 주님의 계약과 영감에서 보는 이 사실은 실상이요 실상 중에 실상이요 온전 중에 온전인 것을 확실히 깨닫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