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신앙

 

1984. 6. 10. 주일오후 

 

본문 : 사도행전 7장 52절∼8장 8절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저희가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오전에 우리 믿는 사람들이 기본 구원 얻는 것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얻습니다. 기본 구원 얻는 데는 사람들의 수고라는 것이 하나도 개입되지를  아니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구원이 너무 값이 헐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지성법과 하나님의 전지의 완전의 그  지공법에 저촉되지 아니해야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완전 세계의 완전 시민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리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라 할지라도 그  행위는 하나님의 전지하신 그 완전의 심판 앞에서는 다 정죄가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행함은 그 기본 구원 얻는 데는 관련하지를 못합니다.

관련하면 정죄가 됩니다. 다만 이 지극히 큰 기본 구원은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만 얻게 되고 대속의 공로로 기본 구원을 얻은 사람들이 영광 구원,  하늘나라의 실력 구원, 하늘나라의 그 부강 구원, 가치 구원 이 구원을 이루는  것은 기본 구원 얻은 자와 얻은 자 사이의 차이 있는 구원 인데 이것은 기본  구원 얻은 자람들이 그의 언행 심사에 모든 노력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건설 구원은 성도들이 다 차이가 있고 기본 구원은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 건설 구원을 이룰라고 지금 하는 것이 오늘의 노력인데. 과거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지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다 멸해졌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광야에서 다 멸망 받았다  이렇게. 그 뒤에 성령이 증거했습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멸망받은 것은 믿지 않는 연고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때에  가나안에 가도 안 죽고 영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것은 이  하나님의 교회에 하나의 상징으로 그렇게 표현해서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애굽은 세상, 홍해는 세례의 중생, 광야는 교회 생활,  요단강은 죽음, 가나안은 천국으로 이렇게 상징해서 예표해서 우리들에게  구원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들이 홍해를 건너 온 것처럼 우리가 다 세례도  받았고 중생도 했지마는 받지 안하면 하나님이 계시한 그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인정한다 할지라도 행하지 안하면, 그러면 인정 믿음은 가졌으나  행함의 믿음은 가지지 안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신앙 행위로서는 성화 구원을  이루지 못하고 광야 같은 이 세상에 속해서 세상 생활하다가 망하고 맙니다.

그들이 광야에서 살기만 살았지 광야에서 다 멸망을 받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가지를 못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도 기본 구원 얻는 데는 아무런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기본 구원은 이것은 안 얻을래도 안 얻을  수 없고 버릴래도 버릴 수 없는 절대적인 이거 작정으로 기본 구원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은, 이것은 우리의 심신 이 진리화되는  것이요 하나님화 되는 것이니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같이 되고 우리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의 활동과 같이 돼서 하나님은 원형이면 우리는 모형이라고  할 수 있고 하나님이 능동이라면 우리는 거기에 피동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것이 이루어져야 우리의 건설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건설 구원에 대해서, 건설 구원이 이루어진 요소는 영생이 다 된 것인데 영생에  대해서 주님이 설명하시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영생이 된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부자는 어려서 부터 이렇게 이  계명을 지켜 나왔다 할 때에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게 하나가 오히려 부족해서  네가 이 건설 구원이 안 되고 있다' 하나 부족한 것을 그 청년에게 말할 때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가고 그 건설 구원을 다 버리고 주님도 버리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부자입니다. 그래,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나가는 것이 쉬우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자기를 부인하지 안하면 안 되는데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거 아닙니다. '자기 부인한다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도 더 어렵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이 자기 부인이라 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 '자기 부인은 인간 스스로는 안  되고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마는서도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기 부인하는 방편을 성경에 세밀히  가르쳐서 그렇게 가르친 대로 그 방법을 써서 자기를 부인할려 하면은 자기  부인이 단번에 되는 게 아니고 조금씩 조금씩 부인돼 가지고서 마침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으로 자기의 전부를 삼고 하나님에게만 피동되는 사람이  되어질 때에 그는 완전자에게 연결되어 완전자에게 피동되어서 완전자로  인하여서 전 언행 심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언행 심사는 완전이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이 힘이 든다  이랬는데,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은 뭐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은 이 불교인들이  절에 가 가지고 불경하는 것처럼 오늘 허다한 기독자들이 예수 믿으면서  입으로만 예수 믿고 그저 자기 백 분지 일도 안 되는 한 행동 고것만 가지고  예수 믿는 거 다인 줄 알고서 이떻게 다 제 각각 위로를 받고 있으니 그건 또 다  주관 신앙입니다. 주관 신앙. 각각 이 사람은 내가 요 면을 믿으면서 고 면만  보고 내가 요렇게 믿으니까 고 면과 다른 사람과 대조해 보면 다른 사람보다  낫습니다. 이러니까 악령이 고것만 보라고 해서 자기 하나의 장점 고것만 보고  자기의 단점을 보지 못해 가지고 부자도 멸망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전 말씀에 두 가지 멸망하는 신앙을 말을 했습니다. 하나는 여론  신앙은 다 멸망받는다. 여론을 따라서 여론에 피동해서 여론을 따라 가는  여론에게 피동되는 그런 신앙은 다 멸망을 받는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 마태복음 16장에 있는 말씀에 그 말씀이 어데를 그렇게 해석해서  그렇게 하는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실 때에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더러는 세례 요한이라 더러는 엘리야라  예레미야라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이렇게 하더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관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유력한 사람이 그렇게 보니. 또 저렇게 권위  있는 사람이 저렇게 보니. 선배들이 저렇게 보니 해서 다 그 여론, 선배, 그  인간들이 다 구원 얻은 사람이라 성자라 할지라도 그 사람 성자는 그 사람  성자지 성자라고 해 가지고서 성자를 따라서 움직이는 신앙이 구원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어떤 위대한 사람이라도 사람 따라서  움직이는 것은 기독자의 건설 구원은 안 되는 것을 우리가 단정을 지워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 성자들의 전기를 보고서 성자들을 모방해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자들이 모방해서 신앙생활한 그 사람들이 당대는  모르지마는서도 그 말년에 가든지 그 이 세에 가 가지고는 완전히 신앙은  떠났습니다.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여론을 따라서 여론이 인정하니 됐다 모든 사람이 가는 대로  따라가면 됐다. 그것으로서는 우리의 심신이 하나님화 진리화되는 이 성화  구원은 안 됩니다. 그거는 안 되는 것을 알아서 우리는 아야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하니 다른 사람 믿는 대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교리 신조대로 그대로만  믿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서 믿어서는 안 되니까 그것을 우리는 버려야 됩니다.

버리라 말은 모든 사람의 교리와 신조를 버리라 말 아니고 모든 사람의 교리와  신조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자기 진리 자기가 걸어가야 할 자기 궤도를  찾는 데에 한 참고로 삼을 것이지 그것이 자기 진리는 아니고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명령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론 따라서 믿는 신앙도 우리는 벗어나야 되고, 또 이 이방  종교들이, 이방 종교들은 다 자기라는 주관이 그 종교의 경전을 보고서 그  경대로 따라서 믿는 것이 이방 종교들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도 자기의  주관이 다른 모든 종교보다 기독교가 낫다 해 가지고서 기독교를 자기 종교로  선택해 가지고서 기독교에서 어떻게 믿나 이렇게 보고서 자기가 기독교를 선택해  가지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자기 신조와 교리로 삼아서 믿으면서 믿으면서  자기에게 이해되는 부분은 믿고, 또 자기가 행할 수 있는 부분은 행하고, 또  자기에게 마찰이 되는 것은 빼놓고 이렇게 해서 자기 주관을 중심 삼아 가지고서  자기 주관대로의 기독교를 만들어 가지고 믿는 이것도 다 헛일입니다.

 이렇게 믿는 것이 오늘 예수님이 초림하실 때나 노아 때나 그 노아의 홍수에  멸망받은 사람들이 기본 구원 못 받은 것 아닙니다. 택한 자면 다 받았습니다.

그때에 그들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따랐지마는서도 자기 주관을 부인하고  하나님이 보실 때에 흠없이 자기를 완전히 부인하고 하나님을 따라서 믿는 그런  사람들이 노아 때는 여덟 사람 밖에는 없었고, 또 예수님이 초림하셨을 때에는  그때도 많지를 못했습니다. 그때는 노아 때보다는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인자의, 임함이 노아의 때와 같다, 인자의 임함이 이스라엘 종교  말년과 같다.' 그런 말씀을 여러 군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믿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자기 주관을 표준해 가지고 자기 주관대로  믿는 사람, 성경 말씀을 표준해서 성경 말씀에게 자기 주관이 굴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성경 말씀을 굴복을 시켜서 자기에게 맞은 성경 말씀이면  용납을 하고, 또 성경 말씀 해석도 자기 주관에 맞도록 인간 주관에 맞도록 모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도록 모든 사람에게 인기를 끌도록 모든 사람이 환영을  하도록 요렇게 인본주의로 성경을 해석해서 모두 다 주관을 믿는 이 주관 신앙  그것은 다 헛되다는 것을 여기에 말씀을 해놨습니다.

 그러면, 주관 신앙이 헛되다는 것을 어데 말해 놨는가? 베드로가 예수님이 고난  받으실 것을 말씀하시니까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하옵소서' 하면서 간청을  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기 주관대로 예수님에게 간청한 것이요 예수님을  베드로 자기의 주관대로 하라고 그렇게 권유한 것입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거기에 유혹받지 안하시고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는다. 너는 사람에게 대해서만 생각하지 도무지  하나님에게 대해서 하나님이 어떠하시냐 섭섭하냐 뜻이 어겨지느냐 거슬리게  되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네가 생각지 아니한다.'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주관으로  믿는 도를 예수님이 부정한 것이요 베드로는 주관 도로 믿다가 사탄이라고  정죄함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여론을 좇는 도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주관을 표준하는  도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자기 주관을 표준하지 않는다고 해도 자기에게 맞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용납하지마는서도 자기 주관이 죽어야 되는 데에는 하나님  말씀을 다 버리고 자기 주관을 살리는 그것 때문에 다 실패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이 건설 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자기 부인해야 된다. 네가 네 자신을 부인할라 하면은 그것이  대내전이니 심히 어려움이 네 안에서 생겨날 것이고, 네가 모든 여론을 부인할라  하면은 대외전으로서 큰 박해가 있을 터이니까 대내전이나 대외전에 큰 박해가  있을 때에 네가 이 하나님의 도를 건설하며 마귀 일을 깨트리며 죄를 멸하며 이  멸망을 멸하며 구원을 건설하는데에는 네가 그 일을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이  다 죽을 각오를 가지고 죽는 그 십자가를 네가 짊어지고 따라야 되지 네가  죽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안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오전에 공부한 것은 주관을 믿는 도도 안 된다, 모든, 여론을 따라서  믿는 도도 안 된다, 자기 안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할 때에 이것은 혈육이 알게 한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가 너희에게 알게 하셨다. 이제는 십자가에 못박히기 이전 에는 주님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는 안 됐지마는서도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다음에는 내 아버지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러기에 이제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활하시기 이전에 아버지의 그  영감을 따라서 자기는 움직인, 영감을 따라서 발표한, 영감을 따라서 사상했고  지식했고 말했으니까 행동만 하면 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그것을  칭찬했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길이다. 이것이 하늘에 복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네가 영원히 요동되지 안하고 영원무궁토록 가도 요동되지 안할 영생이 되는  하나님의 심판에 가도 요동이 안 되고 억억만 년 영원히 가도 좀먹지 안하고  썩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고 병들지 안하고 죽지 않는 이 반석. 이 반석을 표한  것은 변동 없는 든든을 말합니다. 이 든든도 네 속에 영감대로 된 영감대로  움직이는 그것이 반석이다, 그것이 복 되다, 거기에 천국 건설은 거기에  이루어진다. 그것은 모든 음부의 세력은 다 이기게 된다, 그것은 천국 열쇠를  받게 된다, 그것은 땅의 것과 하늘의 것을 다 결정지우는 그런 심관의 권세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좋으라 하신 이  말씀대로 우리가 여론 신앙도 안 되겠고, 주관 신앙도 안 되겠고, 계시 종교라,  계시 신앙이어야 되겠는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이 계시를 따라서  믿어야 되는데, 신구약 성경을 우리가 말씀을 주시니까 이 말씀을 자기가  지키면서 이 말씀대로 하면 구원이 된다 하는 것을 생각하고, 이 말씀을 보고 이  말씀대로 지식하고 이 말씀대로 행하려고 애를 쓰는 여기에서부터 발족을 해야  되겠습니다. 이 말씀으로 자기 지식을 삼고 이 말씀대로 행하는 것으로서 자기는  신앙 출발을 해야 하겠습니다.

 이 말씀대로 지켜서 행하면서 이것으로서 다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우리가 무슨 소망으로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느냐?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자기 양심을 기르고 가꾸려는 목적입니다. 이 말씀을  지켜 행하면서 자기 속에 병든 양심이 치료가 돼야 될 것이고 파묻혀 있는  양심이 드러나야 될 것이고 자기에게 어린 양심이 장성해서 이 양심이 자기 마음  안에 욕심이니 주관이니 감정이니 온갖 정욕, 온갖 그 취미 이런 것을 다 통치할  수 있는 자기 마음을 다 사로 잡을 수 있는 장성한 양심으로 기르는 이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양심에서 자기 양심을  기르지 못하고 보호하지 못하고 찾지 못한다면 그 사람의 하는 일은 율법을  지키는 자이기 때문에 교만만 강하게 가지고서 멸망에 가장 강한 자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써  자기 양심을 찾고 자기 양심을 보호하고 자기 양심을 기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그러합니다.

 사울이 자기는 율법으로서 흠이 없다고 말을 했는데 그 사람은 그전에는 양심을  기르지 안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자기는 교만한 사람만 됐는데 예수믿고 난  다음에는 늙어가 머리가 허영이 죽을 때가 다 되어 갈 때에 그 때에 자기는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 했는데, 젊은 청년으로서 율법으로 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냉정스럽게 하나님을 향하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려고 하면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그대로 지켜  행한다는 것이 전부 외식이요 거짓부리요 과장이요. 냉정스럽게 정평 한다면  하루 종일 말씀대로 행했는데 자기는 말씀을 알고 범한 고범죄를 범한 사람이요  사람의 눈을 속이고 마음을 속이고 사람을 속였지 실상 말씀대로 행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그 정죄를 자기가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부패성을 발견해서  죽이게 되고. 또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의 원수가 정말 뭐인가 말씀대로  행할려고 할 때에 내 원수가 나타납니다. 말씀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그 모든 것이 친구가 그러하고 친척이 그러하고 가장  사랑하는 집안 식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양심을 기를려고 살릴려고  하면은 그게 들어서 방해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당장에 한  시간에 알게 될 거고 하루 동안에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원수가 네  집안 식구니라' 말씀했지마는서도 원수가네 집안 식구리라는 이 말씀의 해석이  난 해절입니다. 이 절수의 해석이 난해절이다. 어찌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될 리가  있느냐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잡탱이 말을 하고 있지마는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하려고 하면 자기에게는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하루 성경을 몇 장을 봐야 되겠다' 하고 고것만 해도 성경  몇 장만 볼라고 해도 자기의 신앙생활의 방해자가 누군지 알게 될 것입니다. 또  자기가 성경보고 양심대로 깨달은 그 양심대로 살라고 할 때에 양심대로 사는 그  생활을 방해하는 그 원수가 누구라는 걸 환하게 알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우리가 지켜 행하는  소망이 어데 있는가? 행하는 것은 내 속에 파묻혀 있는 양심을 일으키고 양심을  살리고 양심을 길러서 이제는. 이 양심이 물욕도 네 이놈 눌릴 수 있고 정욕도  네 이놈 눌릴 수 있고 성욕도 네 이놈 눌릴 수가 있고 명예욕도 네 이놈 눌릴  수가 있고 권세욕도 네 이놈 눌릴 수가 있고 감정의 원수맺는 것도 네 이놈 눌릴  수가 있고 오기도 눌릴 수가 있고 교만도 눌릴 수가 있고 이렇게 이 양심이 자기  마음에 있는 온갖 그 기관과 요소 들을 눌러서 꺾을 수 있고 그렇게 해서 양심을  찾고 보호하고 기르면 양심을 찾고 보호하고 기르면 거기에서 양심보다 더  깨끗한, 양심보다 깨끗한 양심이 가책을 받는, 양심이 머리를 숙이는, 양심이  양심이 회개를 하는 양심이 회개하는 양심보다 더 깨끗한 성신의 감화 감동이  우리에게 옵니다. 우리에게 옵니다. 그는 내 양심으로는 이렇게 하면 됐다  싶었는데 그 양심은 아무리 분석해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지식을 내 이성이  비판해 가지고 내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 저리 비판해 가지고서 비판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나님의 말씀의 법칙을 가지고 내 이성 비판이  비판해서 이렇다 결정을 지웠는데, 그것이 맞은 때도 있지마는, 결정을 지웠는데  아, 내 이성을 초월한 이성을 초월한 내 이성으로서 놓고 떼 봐도 요렇게 밖에는  안 되는데 이성을 초월한 저 객관에서 내 밖에서 이렇게 해야 된다 하는 더  깨끗한 게 나오고 더 옳은 것이 나오고 더 바른 것이 자기 속에 나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도 가운데서 얼마든지 발견을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영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감화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의 감화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 자는 천부당 만부당이요  천리만리 밖이요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자라도 이 말씀을 지키는 목적이 뭐이냐?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키면 옳은 것을 찾기 위해서 바른 것을 찾기  위해서 자기가 옳은 사람되기 위해서 바른 사람 되기 위해서 완전자의 노를 풀기  위해서 완전자에게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완전자에게 가까이 있게 하기  위해서 이 소망을 가지고 말씀을 지킬 때에 양심은 살아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양심을 찾고 양심을 가꾸고 양심을 길러서 양심의  권위를 세우고 그러면 이 양심보다 뛰어난 분이 내 양심이 도달하지 못하는 내  양심을 지도해 주는 내 양심을 지도해 주는 그 지도가 있으니. 그것이 성신의  감화입니다. 일학년도 있고 이학년도 있고 삼학년도 있고 자기의 그 신앙의  정도에 따라서 그 영감은 어떤 자에게는 어리게 오고 어떤 자에게는 장성하게  오고 이렇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신앙이 나 장성한 신앙이나 어짜든지  자기가 양심을 기르는 것, 어짜든지 다른 사람의 이목이야 뭐라 하든지 사정이야  뭐라 하든지 이목이 나보담은 중하지 중하지만 하나님만은 못 해. 그러기 때문에  인간의 이목에서 끝이라고 종착할 것이 아니라 어짜든지 완전자 그분에게 노를  풀어야 되겠고, 그분에게 거슬리지 안해야 되겠고, 그분의 뜻에 맞추어야  되겠고, 그분과 동행해야 되겠다. 그분을 소망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그가  양심이 자라집니다.

 양심이 자라지면, 그 양심이 차차 세력을 얻으면 마음을 점령합니다. 마음을 이  양심이 통치합니다. 이 양심이 마음을 통치했을 때에. 영감이 그 마음을  통치해서 양심에게 지도할 때에 양심은 영감의 말을 들어 가지고서 행하려고  하면은 옆에 있는 모든 이런 주관들과 이런 모든 감정 모든 옛사람에게 속한 이  습성 이런 것들이 들어서 반대를 할 때에 반대를 해도 양심이 장성하면 그것을  눌리고 꺾어서 승리합니다.

 그러나 양심이 어릴 때에는 아무리 영감을 받았다 할지라도 옆에 돈 욕심나는  그놈이 들어서 강하게 주장하면 역시 양심이 울면서 할 수 없이 거기에서 강제를  당하게 됩니다. 권세욕을 당하면 강제를 당하게 됩니다. 번연히 죄인 줄 알고서  이거는 꺾어야 되고 뽑아야 죽여야 된다 눈물을 흘리면서 금식도 하고 기도도  하고 결심도 하고 해도 그 옳은 것을 그 자기 마음속에 있는 어떤 그 감정이나  어떤 분노나 어떤 시기나 어떤 욕심이나 어떤 정이나 욕이나 그런 것이 강하게  날뛸 때에는 그것을 억제하지 못해서 꺾어지고 맙니다. 그 꺾어짐이 뭐이냐  하면은 그것이 양심이 약한 것이 요 신앙 의지가 약한 것이요 영감을 받았으나  그들이 다 간수하지를 못하고 감당하지를 못해 가지고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서 양심을 기르고 양심에서 영감을 받고  영감 고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고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모든 희생이 납니다.

영감 고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 전지자가 많이 납니다. 영감 그대로 행하려고 할  때에는 우리 속에 온갖 이제까지 나를 주장하고 있던 그 주관이 그 감정이 그  의지가 그 습성이 그 욕심이 그 정이 그 모든 이제까지 얽어 놓은 환경 주위의  세상 줄이 교제가 이것이 다 제가 절단나니까 제가 절단나니 이것을 끊으면 제가  절단나니까 이것들이 반대를 합니다. 반대할 때에 영감대로 자기가 할려고  하니까 결국은 그거 반대하니 그것이 마지막에는 자기 몸 안에 있다가 밖으로  나가 가지고서 밖의 세력과 합해 가지고서 하게 되니까 자기가 요 영감대로  하려고 하는데에는 자기 소유 내놓는 수밖에 없고 자기 몸을 내놓는 수밖에 없고  자기 목숨 내놓는 수밖에 없고 자기 무슨 지위나 권세나 내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십자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건설 구원 이루는 것을 너무 싶으게 봅니다. 싶으게 봐  가지고서 공연히 낙관시하고 이래 가지고 마귀에게 속아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건설 구원은 사데 교회에 보면 네가 살았다는 이름만 있었지 실상은 죽었다.

왜 죽었느냐? 너는 살았다는 이름이 있다 말은 '너는 구원을 이룬다고 말만 하고  있지 구원을 이룬다는 말만 하고 있지 실상은 구원 이룬 것이 없다. 왜 뭘 보고  말하느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했다.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 건설  구원은 온전한 행위 있는 것만치 건설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나 따나 있는  것 다 제 욕심대로 다 하고 세월이 고 시간이고 능력이고 재능이고 뮈 물질이고  모든 것 다 그와 같이 제 욕심대로 다 하고 제 찌끄러기 가지고  신앙생활하면서도 마귀란 놈이 들어온 마귀의 감화 받은 주관이 너가 이만치  했으니까 너무 지나치게 많이 했구만 하는 이런 것으로써 그렇게 쉽게 보고 하는  것은 헛일입니다. 그저 건설 구원 이루는 데는 행위를 완전한 행위 있는 것만치  건설 구원이 됩니다. 자기의 마음이나 생명이나 힘이나 뜻이나 감정이나 이것을  다 들여 바치는 데에서만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을 지키면 율법 행한 자가 되고 말씀을 초월해서 그 너머에 넘어가서  영감을 받아서 행할 때에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는 혈육이 안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가 너에게 알게 하신 것이니 이것이 복이 있다' 이렇게. 영감에  피동되는 요게 복이 있다, 영감에 피동된 요게 복이 있다, 영감에 피동된 요게  반석이다, 영감에 피동된 요게 교회 세운다, 영감에 피동된 요게 음부의 권세를  이긴다, 영감에 피동된 요것이 천국 열쇠를 받는다, 영감에 피동 요것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결정을 지우는 판결을 지우는 것이다, 결정을 지우는  것이다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에 보면. 이 스데반이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인데 일곱 집사  중에 한 사람으로서 이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성경에  기록했습니다. 이분이 자기 선조들이 범한 죄를 연해서 증거를 했고, 또 살아  있는 유대인들도 저희들이 이제까지 기다리고 있는 메시야가 막상 오니까  메시야를 정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하는 요 말씀을 증거할 때에 그들이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 하였도다 하니' 이렇게  천사들이 전한 것을 저희들이 듣고 메시야가 왔다 고 이랬지마는서도 저희들이  지키지 안하고 영접지 아니했다 하니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우리가 요 죄를 회개를 해야  되겠습니다. 여러분들이나 내나 자기에게 옳은 말을 해줄 때에 듣기 싫은 고놈이  옛사람 고놈입니다. 옳은 말을 할 때에 듣기 싫은 고놈이 원수요 옛사람이기  때문에 고것을 죽이기 전에는 우리 구원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늙어서 죽을 때 말하기를 '아, 나는 물질 그놈 때문에 물질만 보고  살다가 헛일했네, 나는 공연히 권세만 보고 살다가 헛일했네, 나는 정욕만 보고  살다가 헛일했네. 나는 이 세상에 공명만 보고 살다가 헛일했네.' 하는 사람  많이 봅니다. 그 사람을 공명욕으로 꼬와서 공명욕 그게 죄입니다. 공명욕  그거는 자기 아닙니다. 공명욕 그거는 자기 아니요 공명욕 귀신입니다. 공명욕  영이요 공명욕 영, 공명욕 영, 공명욕을 가진 영, 권세욕 가진 영, 물욕 영,  정욕 영, 안일 영, 생애 애착 영이 귀신이 들어와 가지고서 귀신이 내가 돼  가지고서 우리를 주관해 가지고서 말씀대로 살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이렇게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인제 이것이 왜 이 성경 말씀을 우리에게 기록해 줬느냐? 우리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말을 하면 그 귀신이 들어서 자기를 망치는데, 귀신을 쫓아내는 말  하면 감사히 받지 안하고 고만 원수가 돼 가지고서 대적을 해서 자기를 바로  지도하고 옳은 말 해줄 때에 양심에 가책되면 회개할 일이지 그걸 도로 원수로  삼아서 배나 마귀의 사람이 되는 그런 일을 금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마치고 자니라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오늘  오후에 말씀 증거할 것은 요것입니다.

 사울은 그가 가말리엘이라 하는 율법 선생 유명한 선생의 수제자입니다.

가말리엘의 제자요 가말리엘은 율법 선생으로서 가말리엘은 율법에 획 하나도  범하지 안하고 고대로 지키는 사람이오. 이러기 때문에 이 사울도 사울도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는 하나도 가책이 없이 그대로 지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율법으로서는 내가 흠없는 사람이라' 이랬습니다.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라.

 이렇게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구약에 모세 오경만 말하는 거 아닙니다.

구약 전체를 가리켜서 율법이라 말하고. 또 이 넓은 범위에서 신구약 성경은 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신구약 성경도 하나님의 율법이요 하나님의 계약이요  하나님의 예언이요 하나님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예언이라면 전체가 예언이요 율법이라면 전체가 율법이요 이랬는데, 이 율법에  대해서 흠없이 지켰지마는 그들이 하나님 말씀대로 하려고만 애를 썼지 하나님  말씀을 뭣 때문에 지키느냐? 완전자이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대주재시고  주권자시고 하나님이신 하나님 이신 이 분을 찾기 위해서 이분을 만나기 위해서  이분의 노를 풀기 위해서 이분에게 가까이 가기 위해서 이분으로 결합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안하면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말씀 지키는 사람은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말씀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내게 있는 양심을 찾고  양심을 자꾸 길러서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이거는 틀렸다 하니까 양심은  거기에서 세력을 얻고 못 쓸 모든 죄악의 욕심은 다 정죄 받아서 다 깨집니다.

이렇게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려는 것이 요것이 목적이요,  자기가 말씀을 지켜서 이 말씀대로 지켜 행했다 하는 행함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요것이 행함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말이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서 행하는 요 행함이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했다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 행함에 목적이 있는 고것은 다  율법자요 다 헛일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행함이 목적이 아니고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 이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 다음에는 자기에게는 뭣이 제일 선하냐? 욕심이 선하냐 감정이 선하냐  총명이 선하냐 이성이 선하냐 명철이 선하냐 지식이 선하냐? 그 모든 것보다  우리 주관에는 양심이 제일 깨끗합니다. 양심이 제일 깨끗하고 제일 맑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지키니까 이 양심을  선봉장으로 세우지 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양심을 찾지 않는다는  거는 거짓부리 돼요. 하나님은 양심 보다 무한히 탁월해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내가 먼저 양심도 반대하고 양심도 싫고 양심도 맞지 안하고  양심도 자기에게 거리끼거든 어떻게 하나님을 찾겠습니까?  이런고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법칙대로 내가 행함으로 행하는 것이 말씀대로  지켜서 행동하는데 목적이 있지 안하고. 말씀을 지켜 요대로 행함으로 내 속에  모든 양심을 대적하는 세력들이 차차 차차 꺾어지고 양심이 차차 세력을 얻고.

이 말씀대로 지킴으로서 이제는 양심을 억누르던 그 몹쓸 것들이 다 차차차  꺾어져서 쫓겨나고 물러가고 이제는 양심이 내 마음에 제법 어른 노릇을 하고,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모든 아시아에 있는 교인들이 목을 안고  울면서 가지 말라고 이라니까 '놓아라 너희들이 와 울어서 내 마음을  괴롭히느냐? 나는 예루살렘에서 내가 박해를 당할 뿐만 아니라 죽어도 마땅하다.

나는 내 마음에 붙들여서 나는 예루살렘에 죽을 줄 알고 안 갈 수는 없다.

마음에 붙들여 나는 안 갈 수 없다.' 고 마음이 무슨 마음이냐? 그 양심은, 사도  바울이 양심을 길러 놓은 그 양심은 자기의 몸과 생명이 감옥에 갇히든지 죽든지  할 것 없이 이 양심이 명령할 때에 이 양심을 거슬리지 못했습니다. 이 양심은  그 생명을 자유했고 자기의 몸을 자유했고 자기 욕심들을 자유해서 이렇게  장성한 그 양심이 비로소 하나님을 가깝게 만났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밀접하게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마지막에는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성경 말씀에서 하나 하나 자기가 지켜서 행할 때에 이  말씀대로 행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다 가짜요 외식이요  거짓부리라 그말이오.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무슨 목적이냐? 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은 내 속에 이 모든 죄악을 멸하는 그것이 목적이요 죄악 멸해  가지고 뭐하려고? 이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은 것을 다 틔우기를 목적이요,  틔워 가지고 뭐하려고? 하나님 만날라고 하나님 만날라고. 그러면 하나님을  만날라 하니까 하나님 만나는 데에는 그 네 마음 가운데에 뉘를 선봉장으로  세우겠느냐? 하나님 만드는 데는 선봉장을 지식을 선봉장으로 세울까? 이성을  선봉장으로 세울까? 감정을 선봉장으로 세울까? 정서를 선봉장으로 세울까?  욕심을 선봉장으로 세울까? 이 무슨 정치로 선봉장을 세울까? 아니야, 자연의  빛이라고 한 그래도 우리 속에는 양심이 제일 밝고 정확하고 명철하고 그게 옳고  깨끗하니까 양심을 선봉장을 세워야 되겠다 하는 것을 깨달아지는 것이 기독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이러니까, '아, 이거 이거 마음에 틀렸는데 양심에 가책이 되는데 이거는  아닌데' 이러니까 내가 말씀을 보고 생각함으로써 양심과 일치되어서 양심이  말씀에게 복종하고 우리를 말씀에게 복종을 시키는 이 역사가 양심인데 그  양심을 찾아서 차차 차차 길러가니까 이제는 마치 물에 있는 고기를 잡아서  오병이어 도시락 속에 다 반찬을 삶아서 찌져서 딱 넣어 놓으니까 고기 그거는  바다 가서는 다시 살지 못하는 것처럼 이제 우리가 모든 세상에 활동하던 그  활동을 다 잡아서 도시락 속에 넣어놔야 이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이오. 이러니까 자기의 주관이나 수단이나 뭐 다 있지마는 과거에는 세상  그까짓 거 이렇게 말 한마디만 휘뜩 뒤비트리고 이라고 저라고 그런 거  있지마는서도 이제는 그놈을 잡아서 찢어서 다 볶아 놨기 때문에 이건 세상에도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어. 이렇게 양심이 주장을 하고 양심에 거리끼는 모든  죄악을 죽여서 다 양심이 자기 마음을 통일화시키고 자기 마음을 다 지배하도록  양심을 길러서 양심이라는 이 대장 밑에 대장의. 슬하 밑에 들어차 가지고서 이  양심을 앞잡이를 세우고 이 양심을 선봉장을 세워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서 이렇게 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이것이 영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는 말은 착한 양심이  영감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영감을 찾아가서 영감 고대로 해라. 그 대로 해야  네가 옳고 바르고 참되다. '사람에게 배울 것이 없는 것은 너희 안에 기름  부음이 있으니 너를 중생시킨 성령이 계시니 그가 너에게 옳고 바르고 참되 것을  너희에게 알려준다. 그대로 너는 거하라 그대로, 살아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은 이렇게 율법으로서는 흠이 없는 사람이지마는 그는  율법을 지켜서 다른 사람은 행하지 못하지만 저는 율법을 지켜 행했다  이행했으니까 율법을 지켜 행했다 했으니까 거기에는 우쭐이 나오고 교만이  나오고 그는 율법에 대해서는 흠이 없다, 이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못하는  사람에게는 정죄를 했지 자기는 고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을 돌아다니면서 마구 죽이고 집집마다 다니면서 끌어내 가지고 박해를  했던 것입니다. 그가 만일 율법을 지킬 때에 내가 율법대로 껍데기로 행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요, 우리  속에 있는 양심을 살리는 이 말씀이요, 우리를 양심화 하는 이 말씀이요, 양심화  해 가지고서 그 다음에 진리화 하려는 말씀이요, 진리화 해 가지고서 이제  성령화하려는 말씀이요, 그래 가지고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가 되어서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는 주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고 하나님은 머리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지체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몸이 되고 하나님의 것이 되고  하나님의 종이 되고 하나님의 신부가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양이 되고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이 되고 선지자가 되고 왕이 되고  이렇게 하려는 이 목적을 가지고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뭣 때문에  지키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내가 변화됨으로 내가 변화될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말씀지켜서 그 행동할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변화되기  위해서 지킨다. 변화해서 뭐하려고? 변화해서 하나님 만날라고, 하나님을 찾아서  만나서 하나님을 모실라고 하나님의 성전이 될라고,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 믿는  신자들의 행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서 요대로 행했을 때에 고 일을  해놨을 때에 기쁨이 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지킨 고 행동을 해놨을 때에  기쁨이 옵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껍데기 피상적인 기쁨입니다. 피상적인 기쁨,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한 고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자신이 변화된  것, 자신이 변화된 고것을 찾으면은 변화된 걸 찾으면 변화된 것은 나오지  안하고 변화 안 된 게 나오기 때문에 웁니다. 웁니다. 울고 난 다음에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기독자의 웃음은 울음 통해서 나오는 그 웃음이 웃음이요,  기독자의 소망은 낙망을 통해서 낙망을 초월한 그 속에서 나오는 소망이 소망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지는 기쁨은 주님이 말씀 하시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안에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라' 하는 이 기쁨, 기독교는 기쁨의 도입니다. 기쁨은  뭐이냐? 이 세상 기쁨은 세상 나라의 기쁨은 다 욕심적 기쁨입니다. 알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기쁨은 욕심적 기쁨이요, 기독자의 기쁨은 그보다는 조금  초월하다 해 가지고서 이성적 기쁨입니다. 이성적, 이성 비판해 가지고서  평가적으로 기쁘고 비판적으로 기쁜 이거 이성 기쁨입니다. 이성 기쁨 이거는  언제든지 주관 기쁨이요, 그러나 이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이 와 가지고서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이거는 이성적도 아니고 비판적도 평가적도 아니고 뭐  기쁠 만한 이유도 이유가 있어 기쁜 것도 아니고 가치가 있어 기쁜 것도 아니고  논리가 있어 기쁜 것도 아니고 어쩐지 모르게 성령이 와서 우리를 기쁘게  담대하게 평안하게 소망으로 충만케 하는 것이 이것이 성령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이 이론적 신앙을 완전히 배격합시다. 주관적 신앙을,  완전히 배격합시다. 우리가 이 신앙으로 나갈라고 하면 아낌없이 자기와 말씀과  거슬릴 때에는 사정없이 자기를 부인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말씀과 자기 사업과  거릴낄 때는 사정없이 사업을 부인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말씀과 자기의 모든  입장이 다를 때에는 입장을 사정없이 부인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말씀과 자기  목숨이 대립이 될 때에는 사정없이 이 말씀을 영접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부인해 버려야 되겠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여기에서 죽고 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렇게 할 각오를 가지고 '너희들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려라 이게  너희의 당연한 예법이니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온전하고 기뻐하시는 뜻을 너희들이 분별하도록 하라' 그말은 뭐이냐?  그럴려는 그전에 '몸으로 산제사를 드려라' 하나님의 뜻이면. 죽고 사는 것 상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면 내 몸은 내 생명은 제단 위에 올려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면 무조건 복종입니다. 나에게 당신의 뜻을 알려 주옵소서 할 때에  알려 주시지 내가 수지 계산 맞춰 보고서 내기에 아무 손해 없고 유익되면 내가  복종합니다. 그런 조건부의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뜻은 천리 만리 멉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알리신 요 영감,  영감 거기에 그리스도의 복은 나습니다. 영감 거기에 그리스도의 복은 거기에만  옵니다. 영감 거기에 이 복은 내리앉고, 영감 거기에 튼튼한 견고함은 거기에  오고, 요 영감 거기에 하나님의 교회는 서고, 영감 고것이 음부의 세력은  이기고, 영감 거기에 천국 열쇠는 오고, 영감 고것이 세상을 정죄하고  구원합니다. 세상을 정죄하고 구원합니다. 영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육이라 말은 이 인간의 심신에서 나온  그런 것은 뭐 어떻게 높으고 어떻게 광대하고 어떻다 할지라도 그거는 다 무익한  것이다. 이 깊은 속에 영감에서 나온 영감 만이 사람을 살린다, 영감만이 자기를  살리고 영감만이 단체를 살리고 영감만이 교회를 살리고 영감만이 가정을 살리지  영감 외에는 살리는 역사는 없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이러니까 이 영감을 받을라고 하는데에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타고  들어가야 된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이 말씀대로 지켜서 내가  행해야 되겠다 고것을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 이 말씀대로 지킬라 하는 것은 이  말씀대로 행함으로 내기에 이 모든 마귀, 죄. 사망 이 모든 이런 것들을 멸하는  것으로 말씀을 지키십시오. 말씀을 지킬 때는 이것을, 말씀을 지킬 때는 내게  있는 죄를 멸하기 위해서, 마귀 역사를 마귀의 주장을 멸해서, 내가 말씀대로  지킬라 할 때에 마귀의 감정, 내 주장으로도 나 오고 가족들로부터 나오고 환경  사람으로 올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지킬라 하니까 마귀란 놈이  대적합니다. 내가 말씀대로 지킬라 하는 거는 너 죽일라고 내가 한다. 너  죽일라고, 마귀에 대항하지만 요건 마귀기 때문에 대항한다. 너를 죽일라고  대항한다. 너를 죽일라고.

 이러기 때문에. 말씀대로 말씀을 행하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옛사람을 죽일라고.

죄악을 죽여 버릴라고 마귀의 역사를 멸할려고, 그래 가지고 뭐 하려고? 내가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감감합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 말씀대로 행했습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 고것이  목적이 아니라 말씀대로 행하고 난 다음에는 나는 다 완성이 다 끝났을 것이요.

말씀대로 지키는 것이 뭐이냐? 지키는 것이 자기 안에 마귀의 일을, 죄를,  사망을 멸하기 위해서 말씀대로 지키는데 그거 멸했으니까 다 되었느냐? 아니다.

멸하고 그것을 방해하는 것을 멸하고 내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내가 말씀대로 지금 지귄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나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느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될라고 지금 과거에는 종과 같이 아주 천해서 내  마음 속에는 제일 천물이요 제일 빈약하고 세력을 쓰지 못하고 입만 벌리면  주먹으로 콱 쥐박아서 팍 쳐박아 버리고 그저 눈만 뜨면 꽉 쥐박아 버리고 쥐어  박혀서 꼼짝을 못했던 이 양심을 이제는 내가 찾아서 욕심이 뭐래도 '이놈, 이  양심에게 복종해야 되지 너는 그라면 안 된다.' 모든 마음 가운데에 있는 온갖  분자와 요소들을 다 이 양심에게 복종을 시켜서 양심을 장성케 길러 가지고서 이  양심이 우리를 끌고 하나님에게까지 나아가도록 이렇게 하려는 이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그렇게 지키다 보니까 이 우리의 원수가 토벌이  되지지, 그리 지키다 보니까 우리 마음에 선봉장으로 세워서 우리를 인도할 수  있는 양심을 우리가 찾게 되지, 자꾸 말씀대로 지키니까 말씀대로 지켜 양심은  세력을 먹고 양심에 반대되면 막 세력이 꺾어집니다.

 이러니까 일대 우리 마음속에 큰 전쟁이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 마음 속에 큰  전쟁이 일어나 토벌해야 됩니다. 이럴 때에 양심이 이제는 세도를 부리고  양심에게 내 몸이 복종해, 내 마음이 복종해 이래 가지고서 이 양심의 인도를  받아서 말씀을 지키는 가운데에서 영감을 받고, 영감은 양심이 듣습니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는 것은 영감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거든 들으라.

영감은 양심의 귀로만 듣지 이 육안의 귀로는 못 듣습니다. 이러니까 한  자리에서 말씀을 해도 어떤 자는 듣고 어떤 자는 못 듣는다 그말이오. 이래서  우리의 모든 행복이나 성공이나 능력이나 승리나 이런 것은 다 영감에게만 속해  있습니다. 딴 데 없습니다. 영감에게만 속해 있으니까 우리가 영감에 속한 이  구원, 건설 구원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가 뭐 할 것입니까? 먹으면 뭐하며 입으면  뭐하며 잘 살면 뭐하며 오래 살면 뭐할 겁니까? 구원 이루지 못하면 살면 살수록  비참하고 정죄만 많이 받지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우리는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이 영감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우리는  노력을 해서 이 일에 우리는 주력을 해서 이 걸음을 차차 차차 힘 있게 걸어가야  되겠습니다.

 영감을 찾기 전에 양심을 찾고 양심을 세워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인도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보다 위에입니다. 양심을, 죽은 양심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일으켜 살려서 선봉장으로 세우고 선봉장으로, 세운 이 양심을  앞장세우고 양심의 인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가면 영감 받고 영감  받으면 제 삼자들이 볼 때에는 '아이구 저 생활이 딱딱해서 어찌 살꼬? 재미가  없어 어찌 살꼬?' 요거는 여러분들이 아마 체험을 했을 터인데 요거 체험한  사람은 알아 들을 것이오.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이치를 가만히 생각하니까  기쁨이 나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성에서 나오는 이성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립니다. 이성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리는 그 기쁨이 초보입니다. 일보요, 자기  속에 물욕이 들어서 기뻐하는 그 물욕은 내나 멸망할 그놈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자기 속에 물욕이 들어서 기쁘게 하니까 저 사람이 와 그런데  저렇게 기뻐하느냐? 물욕 그놈이 들어서 기뻐합니다. 물욕이 들어서 기뻐하는 그  기쁨은 얼마 안 가서 자기를 고통으로 바꾸어 주고 맙니다. 이 물욕이나  감정이나 주관이나 온갖 정욕이나 이런 욕심이나 각양의 온갖 정욕, 온갖 감정.

온갖 정서. 온갖 시기 질투, 온갖 그 죄악의 이런 것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  원수 중에 불이 타니까 기뻐합니다. 원수가 그 사람 지금 이제 망했단다 하니까  기뻐합니다. 그 기쁨 그런 다 썩은 기쁨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데 그런 거는 다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모든, 기쁨을 초월한 기쁨이 뭐이냐? 그 기쁨이 이성 기쁨입니다. 이성.

신구약 성경 말씀을 가지고 따져서 비판적으로 따져 가지고 오는 기쁨이 이성  기쁨이요, 그것도 주관 기쁨이요 자기 주관에서 만들어 낸 기쁨입니다. 주관  기쁨이요, 이성 기쁨이 지나가면 그 속에 양심 기쁨이 있습니다. 양심이  기뻐해서 기뻐하는 양심 기쁨이 있습니다. 양심 기쁨, 양심 기쁨 그것도 주관  기쁨입니다. 양심 기쁨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주시는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충만케 하리라' 하나님이 주신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죽음에서도 기뻐하고 십자가상에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인간의  이성이나 양심이나 그런 데에 비판을 받지 않는 그런 것들을 초월한 초월한  고차원의 기쁨입니다. 이 밑의 것이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을  닥치니 기쁘고, 주를 위해서 죽을 거 생각하니 기쁘고, 환난이 오니 기쁘고,  손해당하니 기쁘고 유익이 와도 기쁘고 어쩐지 기쁩니다. 기쁜데 이 기쁨이  어데서 나왔는고 그 구면을 찾습니다. 이성 비판으로 따져봐도 기쁠 게 하나도  없고 감정으로 따져봐도 기쁠 게 하나도 없고 욕심으로 따져봐도 아무 기쁠 게  없고 양심으로 따져봐도 아무 기쁠 게 없는데 어쩐지 기뻐서 죽음도 기쁘고  즐거움으로 환영할 수 있고, 이제 이 그리스도의 도를 위해서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지기를 원하고 원하는 그런 기쁨이 옵니다.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오.

 그런고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인간 죽음에서 인간 죽음에서 측량  못할 인간 지식 인간 주관을 초월한 기쁨이요 이는 세상이 빼앗아가지 못하는  기쁨이라. 이 기쁨이 기독자의 기쁨이라. 이러기 때문에 내가 말하는 것은  기독자의 신앙생활이 울며 사는 생활이 아니요 슬픈 생활이 아니라 한없이 기쁜  생활이오. 기쁜 그대로 말로 할라 하면 다른 사람이 미친 사람이라, 저거  미쳤다, 미쳤다 할 수 있어. 그래 나는 예수 미치광이라 하는 사람 더러 보는데  미쳤다고 하는데 모든 사람이 볼 때에 이성 비판으로 미쳤다고 하는데 저 사람이  암만 봐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이성 비판으로 모든 과학적으로 비판해서  역사적으로 비판해서 미치광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사람은 기뻐 못 견딥니다. 못  견딥니다. 혹 미치광이도 있지마는 자세히 살펴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기쁨을  받은 사람이요, 그 사람은 주를 위해서 죽는 그 길을 닥치면 기뻐 못 견뎌서  날라 뛰어 들어갈 것이오.

 여러분 우리가 공연히 이 주관 신앙에서 여론 신앙에서 머물고 있는 이런  죽음의 구덩이를 벗어나지 못하는 여기에 있지 맙시다. 우리는 여기에서  초월해서 그 계시 신앙, 영감 신앙 이래서 새 피조물이 주장하는 창조주  하나님인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그 기쁨을 우리가 받도록 합시다. 그 기쁨을  받아야 이제는 생사의 경제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생사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죽음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요 삶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요 이런 거 다 초월했기 때문에 생사는 자기 발아래 밟고 있는데 그 둘이 떠  가지고 있는데 그런 것들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런고로, 우리는 제일 당면한 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양심을 우리가  찾아서 가꾸어 살리고 양심이 내 이 심신을 지배하고 양심이 심신을 지배하면  영이 비로소 내 전부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나를 지배하고 나면은 그  양심이 영을 모시게 될 것이요, 영은 내 양심을 지배하고 양심은 내 마음의 모든  이성과 지식을 지배하고 그라고 나면은 그 다음에 몸을 지배해서 우리가 살게  되는 것이니까. 기독교 안에는 기쁨이 없는 거 아닙니다. 한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한없는 담력과 평강이 있습니다. 측량 못 할 지극히 큰 무한의 소망이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를 찾아야 되니까 우리가 언덕을 떠나서 이것 주관 신앙을 떠나서  이 여론 신앙을 떠나서 십자가의 원수의 길을 떠나서 자기를 부인 하지 못하고  자나 깨나 자기. 기도해도 자기, 비판해도 자기, 인인 상대해도 자기, 설교를  들어도 자기, 설교를 해도 자기, 경영을 해도 자기, 내나 옛 사람 예수 믿는다는  이름만 바꿔졌지 실상은 그놈은 그놈입니다. 이놈을 우리가 알아 가지고 이놈을  죽여서 이놈을 원수인 줄 알고 죽여야 되지 그놈이 예수 믿어봤자 내나 옛사람  노릇하는 것이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을 죽이는 데에는 죽이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무조건 내가 고대로  말씀대로 실행을 하는데 실행하면 그놈이 죽어. 말씀대로 실행하는 거 실행하는  거 행하기 위한 목적이냐? 아니야. 말씀대로 실행하는 데에서 옛사람 그놈을  죽이고 말씀대로 자꾸 시작하면 실행하면 내 속에 모든 이 신적 요소, 육적 요소  이거는 깨끗한 건데 심적 요소, 육적 요소에게 병이 들어서 악령, 악성, 악습  이놈이 와 가지고서 지배하고 있는 이 병이 슬슬 벗겨져 나갑니다. 이게 누에가  허물 벗듯이 자꾸 벗겨져 나가. 말씀대로 지켜 행 하니까 자꾸 벗겨 나가.

벗겨져 나가는 고걸 보고 재미나 재미를 붙이고 벗겨져 나가, 그러니까 자기  속에 양심이 나옵니다. 자기 속에 참사람이 나옵니다. 나오면 자기가 봐도 '야  참, 나도 이런 사람이 됐나? 나도 이럴 수 있는 사람이냐?' 암만 봐도 그  사람에게 나쁜 게 없어. 그때 자기가 생각해 보니까 나쁜 게 없어. 생각하기에  다 비판 못했어도 성경을 뭐 성경볼 게 아니 라 성경에 뭐라고 했노? 요럴  것이다. 고럴 것이다. 하고 성경 보면 그렇소. 성경과 나와 같애. 이래서 영감을  만나는 것이니까, 우리가 아무래도 영감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여론 신앙  지나가서, 주관 신앙 지나가서 양심 신앙으로 성장해서 거기에서 지나 가  가지고는 이제는 성령과 영은 한 덩어리라.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같이 해.

이러니까 그 다음에는 영의 신앙,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영으로  사는 자는 영의 생각.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예수 믿는 걸 이제 너무 건설 구원을 쉽게 보는 이걸 아주  오늘 완전히 우리가 회개를 해야 됩니다. 건설 구원을 너무 쉽게 봅니다.

하나님화 되는 게 그렇게 쉽겠습니까? 우주 만물을 통치할 수 있다는 게 그리  쉽겠습니까? 하나님이 콩하면 콩, 팥하면 팥. 하나님과 동정이 같이 된다는 게  그리 쉽습니까? 쉽지 않소. 하나님과 일치가 되지 안하고 피조물을 어떻게  다스리겠습니까? 우리는 만복의 근원이요 복의 기관이요 만물의 중보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성화입니다. 암만 기본 구원을 얻어도 이 성화 안 됐으면 그  나라에서는 쓸모는 없오. 가만히 가서 영원히 죽지는 안하고 있지.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전부를 기울이지 안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우리는 그 어려운. 실상을 알고  어려운 정도를 알고 우리는 그게 맞도록 우리가 못해도 향해서 갈라고 애를 쓰고  우리가 동경해야 되지 아야 미리 쉽게 여겨서 근방에 가지도 안했는데 됐다고  생각하는, 사울왕이 됐다고 기념비 세워 가지고 멸망하는 거와같은 그런  어리석은 자가 우리가 되지 안해야 됩니다.

 


선지자선교회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공지 백영희와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2.07.04
공지 순생 순교의 종 백영희 목사님 [1] 선지자 2021.02.22
공지 법전과 주해서 · 성경과 백영희목회설교록 김반석 2020.05.30
공지 백영희목사님의 ‘목회설교록’에 관한 교훈 모음집 선지자 2019.12.18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자료 1,2,3차 통계표 [3] 김반석 2015.12.20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1] 선지자 2015.10.19
공지 백영희목회설교록 출간 백영희목회연구소 선지자 2015.10.16
2336 영감과 진리 안에/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31018화새 선지자 2015.12.09
2335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다/ 요한복음 3장 5절-8절/ 831017월새 선지자 2015.12.09
2334 영감과 진리의 능력/ 디모데후서 3장 16절-17절/ 831019수새 선지자 2015.12.09
2333 영감과 진리의 능력/ 요한복음 15장 1절-14절/ 830703주전 선지자 2015.12.09
2332 영감도리 순종생활/ 마태복음 16장 15절-17절/ 791208토새 선지자 2015.12.09
2331 영감된 사람/ 마태복음 16장 13절-28절/ 840610주전 선지자 2015.12.09
2330 영감된 사람/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 1984. 6. 10.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2.09
2329 영감된 사람/ 마태복음 16장 13절-26절/ 840613수야 선지자 2015.12.09
2328 영감된 사람/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1984년 12 공과 선지자 2015.12.09
2327 영감론/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850805월밤집회 선지자 2015.12.09
2326 영감론/ 디모데후서 3장 15절-17절/ 1985. 8. 6. 화새집회 선지자 2015.12.09
2325 영감론/ 에베소서 4장 13절-14절/ 890207오후교역자회 선지자 2015.12.09
2324 영감받는 연습/ 고린도전서 1장 18절/ 850602주새 선지자 2015.12.09
2323 영감받는 조건/ 야고보서 1장 25절/ 800801금새 선지자 2015.12.09
2322 영감순종은 실상이다/ 히브리서 11장 1절-2절/ 810103토새 선지자 2015.12.09
» 영감신앙/ 사도행전 7장 52절-8장 8절/ 840610주후 선지자 2015.12.09
2320 영감신앙-여론/ 마태복음 16장 17절-20절/ 840612화새 선지자 2015.12.09
2319 영감신앙-여론/ 마태복음 16장 13절-28절/ 840611월새 선지자 2015.12.09
2318 영감으로 인정하는 실존/ 요한복음 14장 11절-24절/ 871220주후 선지자 2015.12.09
2317 영감의 권위성/ 마태복음 16장 13절-20절/ 840616토새 선지자 2015.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