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감과 진리로 살아난다


선지자선교회 1983년 10월 17일 월새

 

본문 : 요3:5-8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우리 구원이 시작된 제일 근원은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생겨질  때에 영감과 진리로 목적이 생겨졌습니다. 영감은 하나님 자체가 발동할 때에  하나님 자체가 발동하는 그 발동을 가리켜서 영감이라고 말하고 진리는,  하나님의 자체가 활동하기 시작한 발동을 영감이라, 그 발동해서 결정이 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뜻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 마음에 생각이 그것이 자기의 의지로 결정되는 것, 자기에게  입지가 되어지는 것,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구원 근본은 하나님의 목적인데 그  목적도 하나님의 감화 영감과 하나님의 뜻인 진리로 그 목적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이 먼저요 하나님이 뜻을 정하신 그것이 다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뜻을 징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여서  그것이 시발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하신 그 예정 구원도 영감과 진리로 예정 구원이 된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가지고 그 모든 실지로 조성하시는  역사인 그 예정도 하나님의 영감과 진리로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도 창조도 영감과 진리로 창조를 하셨습니다.

 또 우리를 주님이 십자가상에 대속하시려고 도성인신해 오신 것도 영감과  진리로 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감하시고 그 진리로 예수님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속하신 것도 껍데기는 예수님의 인성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지마는 그 속에는 영감과 진리로 우리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것은 진리를 말합니다. 우리가  이 대속의 공로를 입어 가지고 중생된 것도 영감과 진리로 중생이 됐습니다.

 또 우리를 낳은 것을 야고보서 1장에서는 처음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진리의  말씀으로 너희를 낳으셨다. 그말은 하나님이 당신이 목적하신 목적의 결과, 처음  열매가 된다 말은 무슨 열매인가? 열매는 결과라는 말인데 그 열매는 무슨  결과라 말인가?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신 목적의 결과 그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으로 너희를 낳으셨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베드로전서 1장에도 '너희들이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씨로 됐다, 그렇게 됐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하나님의 목적 안에 택정된 것도 영감과 진리요, 그  다음에 예정 구원도 영감과 진리요, 창조 구원도 영감과 진리요, 구속 구원도  영감과 진리요, 우리 중생도 영감과 진리요, 또 우리의 남은 심신이 살아나는  것도 영감과 진리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현실에서 우리가 영감과 진리로 살아나는데 우리 현실은 성경에  우리 현실에서 이 심신의 기능이 살아난다. 그렇게 말씀하신 데도 있고 또  심신의 기능이 전부를 다 기울여서 충성을 해야 생명이 승리한다. 그래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그렇게 말씀 하셨는데 우리들을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이런 각도로 말씀하시고 저런 각도로 말씀하신 것이지 속에는 한가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은, 죽은 것은 심신의 기능은 죽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똑똑히 밝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육은 거듭나지 안했고  중생된 사람이라도 영만-거듭났다 말은 다시 살아 났다 말인데-영감과 진리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는데 아직까지 심신의 그 형체는 기본구원에서 부활을 하도록 돼 가지고  있지마는 그거는 기본구원이기 때문에 우리 형체가 부활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가지고서 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너무 어렵고 완전해야 되기 때문에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 성화구원은 사람 나름으로 그 사람으로서의 될 수 있는 것을 했을  때에 그것을 충성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구원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죽은 것이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이 죽은 것으로 인정하면  영감과 진리로 우리 심신의 기능이 현실에서 살아나는 것이고 또 예수님의  대속을 법적으로 입어서 법적으로와 또 생명에 속하게 돼 있는 속함으로,  법적으로와 소속으로, 법적과 소속으로 말하면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살았습니다. 법적으로 살아 있고 소속으로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는 이것을  전제로 하면 우리는 현실에서 살아 있는 이것을 벗지 안하면 이제 영원히 사는  영생이 됩니다.

 그러면 벗지 안하면 영생이 된다, 진리와 영감을 벗지 안하면 영생 된다,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다. 그러면 우리 현실은 심신의 기능이 살아나는 것이  현실이다, 현실에서만 살아난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또 현실에서 죽지 안하면  영생된다. 그렇게 하는 말이 다 같은 말인데,  죽지 안하면 영생된다 그말은 법적으로는 살아났고 소속적으로는 산 데에 속해  있지마는 현실에서 법으로 법적 살아난 것을 법을 어기고 진리의 말씀을 어기고  또 소속을 어겨버리면 사람들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그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현실은 다시 안 죽으면 영생합니다. 현실에서 안 죽으면  영생합니다. 또 현실에서 살아나면 영생합니다. 그러기에 안 죽으면 영생한다  말은 위에 이미 대속의 구원을 연결시킨 그 연결을 전제로 해 놓고 안 죽으면,그  연결을 버리지 안하면 영생한다. 안 죽으면 영생한다. 그말은 이미 대속의  구원으로 법적과 소속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전제로 하고 살아 있는 것이 안  죽으면 영생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그러면 현실에서는 안 죽으면  영생한다.

 또 현실에서 살아나면 영생한다, 그것은 이미 살아산 그것을 전제로 하지  안하고 현재에 심신이 실상으로는 법적과 소속을 버리고 실상으로는 죽어 있는  것인데 죽어 있는 그것이 현실에서만 살아날 수 있다. 현실에서만 영감과 진리와  결합이 되면 살아난다.

 그러니까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안 죽으면 살아난다 하는 그것이 먼저요 또  살아나면 영생한다 하는 것은 그것은 그 다음입니다. 안 죽 으면 영생한다.

그거는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그것이 순서가 먼저요 또 이제 살아나면 영생한다  하는 그것은 그 다음입니다. 순서로 말하면 첫째 둘째가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영감과 진리로 된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영감은 어떤  게 영감인가? 하나님 그 본체는 우리가 보지도 못하고 가까이 하저도 못합니다.

왜? 그는 완전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 가까이 하면 다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를 보면 죽기 때문에 볼 수 없다 하고 모세에게 '내가 너에게  나타나 보이겠다' 하시고 당신이 지나갈 때에 그 등을 보라 그렇게 해서 앞은  보지 못하고 등은 봤다. 그러기에 그것으로 가지고 그렇게 한 형식을 가지고  우리에게 당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알리셨습니다.

 등을 보이신 것은 당신이 행사하시는, 당신이 우리 사람으로 비하면 현실에서  행동하는 그 현실과 미래로 행동할, 현실과 미래로 우리가 하나님을 대하면  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현실로 지나가 버리고 이미 베푸신 사후의 그 일,  하나님이 움직이신 그 다음의 순서에 우리가 접 하면 살 수 있고 또 구원도 될  수 있지마는 당신이 움직이실 때에 같이 가면 죽는다.

 그래서 출애굽기 33장에 '나는 너희들과 같이 올라가지 않겠다' 하신 그것은  '왜? 내가 같이 올라가면 너희들은 목이 곧은 사람이라 내가 당장에 전멸할까  두렵다' 하는 그 말씀은 당신이 현실에서 역사하시는 그 직접 역사에 우리가  접하게 되면, 직접 역사와 접하게 되면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소멸돼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라 그렇게 말씀했어.

 소멸되고 말고 그분이 간접적으로, 그 본체를 우리가 대하는 게 아니고 본체가  활동하는, 하나님 본체가 움직일 때에 움직인 그 움직임, 움직여 놓은, 움직여  놓은 움직임 그것을 가리켜서 영감이라 말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제일 가깝게 접하는 것이 영감으로 접합니다. 그  다음 영감이 또 나와 가지고 간접적이 돼서, 영감이 한층 더 밖으로  피조물들에게 나오실 때에 그때에 진리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체가 영감으로 움직인 그 움직임이 진리의,  진리는 곧 말씀입니다. 진리로 역사해 가지고 진리가 모든 피조물을 조성했고,  진리로 조성했는데 진리를 누가 주관했느냐? 영감이 주관했고, 영감을 누가  주관했느냐? 하나님 본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전부가 하나님 본체의 움직임에, 하나님 본체의  역사하심에 그 역사하심, 그 역사하심과 또 그 역사하심이 나왔을 때에 그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뜻이라, 하나님의 마음이 첫째요-우리 사람으로 말하면-그  다음에 하나님이 이렇게 하겠다 작정하신 그것이 의지를 세운 결정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진리 안에 영감, 영감 안에 하나님 그렇게  우리가 논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택함 구원도 영감과 진리로 이루어졌고, 또 예정  구원도 영감과 진리로 이루어졌고, 창조 구원도 영감과 진리로 이루어졌고, 또  대속의 구원도 영감과 진리로 이루어졌고, 우리의 건설구원인 성화구원도 영감과  진리로만 이루어집니다.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난다 말입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우리위 행위도, 우리의 행위도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납니다.

또 우리가 접촉한 '만물들이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 하는 그 자유를 무엇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인고 하니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 자이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로 사는 것이 그이의 본능이요  본질이요 소원이요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안한 것은 자기의 자유가 꺾어지고  억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로 살 때에는 영감과 진리로 중생된 자가 사는  것이고 악령과 악성으로 더불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영감과 진리를 떠나서 사는  것은 그것은 옛사람이 사는 것이요 중쟁된 영은 그때 강제를 당해 가지고서 이  육체 속에 붙들려서 '원치 안하는 곳으로 끌고 간다' 하는 그 말을 로마서 7장에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겉사람 이 심신 속에 내주하고 있는 것이 중생된 영인데 중생된 영은  영감과 진리로 사는 것이 저의 자유요 소원이요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게 살기를  원하지마는 영감과 진리로 살고자 하는 이것을 이 심신으로 된 심신을 악령과  악성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악령과 악성이 심신을 제가 이용해 가지고 심신을  끌고 동으로 가니까 고 안에 타고 앉았는 그 영은 그리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 심신이 죄짓는 데 가면 그 중생된 영은 그것 본능이 아니라서 싫지마는,  영이 짓는 게 아니라. 싫지마는 그 심신이 죄를 지으니까 그 중생된 영은 '원치  아니하는 데로 끌려가는 것을 보는도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속사람은 하나님 법을 즐거워하되 육체 속에 다른 법이 있어서' 다른 법이  있다.' 그말은 마귀의 법이라 말이오. '다른 법이 있어 가지고서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속사람을 끌고 가는 것을 보는도다.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이  사망의 세력에서 나를 구출할 자가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출할 수가, 구출됨을 받을 수 있다.' 하는 그걸 소망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우리가 무엇이든지 죽은 것이 살아나는 데에는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납니다. 우리의 이 심신의 기능도 죽은 것이 살아날 때에 영감과  진리로 살아나고, 또 우리의 행위의 죽은 행위가 살아나는 것도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나고, 또 우리가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업, 이런 업 저런 업 우리의 업체가  살아나는 것도 영감과 진리로만 살아납니다. 또 우리의 소유가 살아나는 것도  영감과 진리로 살아납니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둬라. 거기에는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동록도 안  슬고, 또 좀도 먹지 않고, 도적이 구멍도 뚫지 않는다.' 그말은, '동록 안  슨다.' 그말은 부패하지 않는다, '좀먹지 않는다.' 그거는 시간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또 '도적이 구멍 뚫고 도적질 하지 못한다' 마지막에 세상을 떠날 때에  홀빡 다 뻣겨버립니다. 자기의 심신의 형체만 부활하지 속에 기능이라 하는 것은  완전히 다 마지막으로 뺏기는 걸 가리켜서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에는 보면 '너희들은 밤에 속하지 안하고 낮에 속했기  때문에 도적같이 너희들에게는 오지 못한다. 너희들을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솔빡 다 뺏기는 그런 일이 네게 오지 않는다. 또 개인으로 죽음이라는 죽음이  와도 솔빡 다 뺏기는 그런 일이 너에게는 오지 않는다. 왜? 너희들이 빛의  아들이요 빛에 속했기 때문에 너희들은 그렇게 안 할 수 있다. 깨어 있으면  그렇게 안 될 수 있는데 깨어 있지 안하면 그 모든 기능과 살릴 것을 다 죽이게  된다.'  그러기에 현실에서,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의 몸의 기능을 살릴 수 있고 또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 영이 장성해질 수 있고, 영이 장성해져. 영이  자라가기는 자라간니다. 흠은 없는 온전한 자는 온전 하지마는 그것이 어린데  자라갑니다.

 영이 중생된 영이 자라가는 것도 영감과 진리로 자라가고, 또 네 몸에  아직까지도 법적과 소속적으로는 살아 있지마는 실상은 죽어 있는 그것이  살아나는 것도 영감과 진리로 살아나고 안 죽는 것도 영감과 진리 안에서만 죽지  않는다. 같은 말입니다.

 또 네가 가지고 있는 소유도 영감과 진리로 그것이 끝나면,  영감과 진리로 쓰여졌으면, 영감과 진리에게 소속이 되면 그 소속은 우리의  소유라 하는 그 무슨 지위나 권세나 물질이나 무슨 어떤 소유든지 그 소유가  살아나는 것은 영감과 진리로 살아납니다.

 영감과 진리로 살아난다 말은 자기의 소유가 영감대로 행하고 진리대로 행하고  영감과 진리를 떠나지 아니하는 그 현실에서 완전히 결정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유다서에 말하기를 '단번에 주신 도라' 단번에 주신 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단번에 주신 도라 말은 우리의 모든 살아나는 것이 여러 계속해서 이 하나가,  하나가 살아나는 것이 차차 차차 살아나 가지고 그렇게 살아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몸에 세포라고 하면 그 세포가 살아난 그것은, 살아난 것은 현실에서  그거는 완전히 살아서 영생돼 버렸고 그 다음에 살지 못한 건 살아나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의 기능을 전부를 합해서 하나로 본다고 하면 서서히  살아나는 것이 되겠습니다. 부분적으로 살아나니까. 그러나 살아나는 것은  단번에 살아납니다. 단번에 살아나고 단번에 죽습니다. 이제 죽으면 다시는  살리지 못합니다. 한 번뿐입니다. 또 살아났으면 다시 죽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물이 탄식하는 것은 우리가 접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만물들인데 만물이 탄식하면서 하나님의 뭇아들들이 자유함에 이르는 것을  원한다. 그말은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자가 진리와 성령대로 살기를 원한다.

진리와 성령대로 살면 뭐하려고? 진리와 성령대로 살면 거기에 관련된 모든  피조물은 살아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우리가 진리와 영감을 버려버리면 우리에게는 중생된 영이  자라지 못하는 손해가 하나가 있고, 또 살아날 기능이 살아나지 못하는 것, 곧  법적과 소속적으로 살아 있는 것이 다시 죽지 안하고 영생하게 되는 것 그것을  우리가 얻지 못합니다. 또 우리와의 그때 내 현실에 관런돼 있는 그 모든 내게  속한 그것들이 살아나지를 못합니다.

 내가 자유하지 못하고 영감과 진리대로 살지 못하고 그 자유를 뺏기고 강제로  악령과 악성대로 살게 되면 내 본능으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원함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본능도 둘이 됐습니다. 중생된 자의 본능이 있고 악령과  악성으로 죽어 있는 죽은 자의 본능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본능을 중생된  산 자의 본능으로 살아야 되고 죽은 자의 그 본능인 죽음의 본능으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관으로 살면 안 된다, 자율로 살면 안 된다,  본능으로 살면 안 된다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속에 그런 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모든 그 현실은 살아난 것은 자라가는 기회요 또 죽어 있는  것은 살아나는 기회요 산 것이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으로서 결정되는 기회요  이렇게 현실은 중요한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비유가 될 수 없는 것이지마는 예수님이 날 때도 영감과 진리로  마리아의 육을 이용해 가지고서 영감과 진리로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영감과 진리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기에 비유컨대 그 비유가 잘 될런지는  모르지마는 얼음이라고 하면 얼음, 얼음은 물하고 차운 것하고 그 둘이 합해  가지고서 얼음이 됐습니다. 그러면 얼음이 크는 것은 자꾸 물만 더 많이 붓고  추위만 자꾸 더 추워지면 얼음이 커 나가고 물과 추위가 없어지면 그 얼음은  녹아져서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법적으로 소속적으로 전체 완전 구원을 주님이 이루어 주셨는데 지금  여기에다 영감과 진리만 보태면 자꾸 강해지고 자꾸 커지고 온전해지고  견고해지지마는 영감과 진리를 떠나면 슬슬, 물과 추위가 없어지면 얼음이  없어지는 것처럼 자꾸 바람이 불어 가지고서 수분을 날려가도 그 얼음뭉텅이는  나중에 없어지고 맙니다. 또 따뜻해도 그거는 없어지고 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영감과 진리로  견고해지기도 하고, 장성해지기도 하고, 다시 죽지 안할 수 있는 영생 으로  옮겨지기도 하고, 또 영감과 진리를 떠나면 자라지 못하고 쇠약해지고 또  죽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로 우리가 되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낳으셨느니라' '처음 열매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의 뜻대로 진리의 말씀으로 너희들을 낳으셨느니라' 야고보서 1장에 말씀을  했고 '성령과 물로, 물과 성령으로 너희들이 다시 살아났으니 성령으로 살아난  자는 영이니라' '너희들이 살아난 것은 없어질 어떤 종자로 살아난 것이 아니고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났느니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 우리가 좀 깨닫고 가질 것은 자기 직장에서나 어떤  현실에서나 어디서든지, 어데서든지 거기에서 영감과 진리를 떠나면 자기는  멸망입니다. 영감과 진리를 떠나지 않고 영감과 진리로만 하면 나는 살았고,  살았으면 이 우주와 영계의 모든 피조물의 왕의 지위, 왕의 지위에 왕권이  살아났습니다. 왕의 능력이 살아났습니다.

 이래서 요한복음 1장에 '믿는 자들에게는 권세를 주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과 진리 외에는  우리의 권세도 없고, 영감과 진리 외에는 우리의 권세도 없고, 또 영감과 진리  외에는 우리의 힘도 없고, 영감과 진리 외에는 우리의 실력도 없고, 영감과 진리  외에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점령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모든  것을 점령한다 그말은 영감과 진리대로의 행동으로 모든 것을 점령하게 된다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영감으로 된 우리들이요 또 진리로 된 우리들이요,  그러기 때문에 영감을 떠나는 것은 자멸하는 것이요 진리를 떠나는 것은  자멸하는 것입니다. 어떤 그 현실이든지 그 현실에 주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것을 존재케 한 창조주는 하나님이십니다. 또 그것을 관리하시는 관리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또 거기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정하신 것도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 현실에서 영감과 진리를 떠나지 안하고 영감과 진리대로 하는 것은  영원 전부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그 현실에서는 승리하는 자가 되어지도록  살도록 정해 놓은 것입니다.

 그래 복인, 과거에 예정된 것이 어떻게 예정됐는지 우리는 모르나 현실을  보아서 과거에 예정된 것을 추상할 수 있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 앞으로  하늘나라에 어떻게 가서 있을런지 그걸 우리가 보지 못했지마는 현실을 가지고서  '그 사람이 하늘나라 가 가지고는 어떤 위치에서 어떤 지위에서 일할 수 있겠다,  거기에서 구원 얻을 수 있겠다.' 그것을 우리가 추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진리와 영감이 이것이, 진리와 영감이 우리 자체는 아닙니다.

진리 영감이 우리 자체된 것은 아니오. 우리 자체는 첫 아담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자체입니다. 생겨진 자체가 영감과 진리에 접선으로 살아났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에 접선으로 살아난 우리이기 때문에 영감은 우리를  살린 영감이요 진리는 우리를 살린 진리요, 영감은 우리를 키우는 영감이요  진리는 우리를 키우는 진리요, 영감과 진리는 우리의 소유를 다 살리고 든든케  하고 온전케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은 멀리 계시고 우리와 제일  가까운 것은 진리가 가깝고, 그 다음에는 영감이 가깝고, 그 안에는 진리와  영감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리를 버리는 것은 자살 행위요 영감을 버리는 것도 자살  행위요, 진리를 찾고 영감을 찾는 것은 자기가 자라고, 살아나고, 든든케 하고,  다시는 변동 없는 것을 하고, 모든 자기에 속한 것을 영원히 살아서,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그런 걸 묻습디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둔다. 그러면 물질을 내가  진리와 영감대로 사용하면은 하늘에 쌓아둔다. 그러면 돈의 형체가 살아납니까?'  그것을 그래 묻는 사람 있습디다. 그래 거기에 대해 좀 관심을 가지니까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그 물질을 사용하고 그 물질은 나에게 사용되고 하는 그 사용의 그  관계가 영생합니다. 그것이 이제 영원히 거기에 대해서 나는 사용권을 가졌고  물질은 나에게 이용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용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어서  하늘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이용될 수 있는 이용권을 가진 그것이 뭐이냐? 만물을  새롭게 해서 만물도 영생하도록 새롭게 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영감과 진리를 떠나면 우리가 죽습니다. 영감과 진리로만  우리는 자랄 수도 있고, 부강할 수 있고, 또 우리는 영광스러울 수 있고 모든  것이 돼집니다.

 그러기에 영감과 진리를 떠나지 맙시다. 영감과 진리를 떠난, 성령을 떠난 것은  온 천하를 다 제가 움직인다 할지라도 그것 다 죽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의 움직임이 아니라면 그 모든 것은 다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가치로  보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진리 아닌 이치가 있겠나? 하나심 예정 아닌 게 있겠나? 예정 아닌 게  없습니다. 진리로 되는 것 아닌 게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적인  진리와 일반적 진리 또 심판해서 죽이는 진리, 이러기에 예수님의 구속을 퉁하지  않고는 모든 것이 다. 그것은 죽게 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물론 진리로 삽니다. 진리로 살지마는 예수님의 대속을 연결하지 안한 것은  죽음의 진리기 때문에 그 진리대로 삶으로 진리대로 하루 삶으로 그만치 죽었고  이틀 삶으로 그만치 죽었고, 예정대로 하루 삶으로 그 만치 죽었고 또 한 달  삶으로 그만치 죽었고,  영감과 진리대로 삽니다. 하나님 예정대로 삽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망케 하는  것이 있고 생명케 하는 것이 있고 둘이 있으니 우리는 생명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진리가 있고, 심판도 진리로 심판합니다.

지옥도 진리로 보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신구약 성경 이 말씀은 영생하는  말씀입니다. 영생하는 말씀이요 이 말씀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있어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서 혼돈이 되면 그만 복잡해 가지고, 언제 예정에 대해서  묻는 사람이 아직까지 거기에서 혼동성을 가리지 못하게 됐고 이 혼돈성을  없애기 위해서 신학 술어를 새로 만들어 냅니다. 혼돈성을 없애기 위해 가지고  기본구원이니 건설구원이니 영이니 혼이니,  실은, 이분설을 말하고 있는데 실은 삼분설이 이게 정확합니다. 그러나  이분설로 말해 놓은 데가 많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 이분설을 말하는데 그만  이분설을 말하니까 사람의 심신 이 이분이 그것이 육 인데, 둘이 합해서 육인데  영은 떼 버리고 마음은 영, 몸은 육 이래 가지고 보기 때문에 실은 영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영을 모르기 때문에 영에 대해 말한 성경 말씀을 마음으로 해석하려  하니까 해석이 안 되니 그것은 전부 비유로 그만 다 도매해 버립니다. 비유로  도매해 가지고 그거는 비유라 그렇게 말해 가지고 합니다.

 어제도 어떤 사람 하나 만나 가지고 기본구원 건설구원 말하니까 '그게  뭐인가?' 그게 복잡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는 사람은, 자기가 참으로 진리로 알려  하는 영감을 받는 사람은 들으면 팍 옵니다. 들으면 불이 탁 나와서 대번에  접선이 될 것이요, 자기가 또 혼자라도 깨달을 때에는 그때는 참 굉장한  자기로서 변화가 되어지는 그런 역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듣기 싫어하는  사람은 어짤 수가 없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데서든지 그것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영감과 진리와 악령과 불법이 있습니다.

악령과 불법이 있어. 악령과 불법이 있는데 악령과 불법에게 우리 심신의 기능이  속하면 불의의 병기가 되고, 불의의 병기도 이것이 영감과 진리에 속하게 되면은  의의 병기가 됩니다.

 이거는 이 무슨 종 이게 죄가 있소? 이게 공산주의가 치면 공산주의 저거에게  저거가 이용하는 종이고, 또 민주주의가 치면 민주주의가 이용하는 종이고  그렇습니다. 아이들이 이것 종을 치면 벌로 저거 장난에 이용할 수 있고 이거는  이용하는 대로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심신의 기능은 중생된 영과 진리와 영감에게 이용되는 대로 이용이  되어지고 의의 병기가 되어지고, 악령과 악성과 악습에게 이용이 되어지면 그것  또 그것이 되어지고,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심신은 죄가 없습니다. 심신은 죄가 없는데 심신이 범한  죄는 탈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완전히 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탈색이  되지마는 죄 자체는 억만 년 가도 그 죄 자체라 하는 것은 탈색이 안 됩니다. 죄  자체는 그 탈색이 없고 죄에 물든 것은 탈색이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 탈색하라 그 말입니다.

 기도하려고 기도회에 등록된 사람 숫자는 많이 올라갔습니다. 천팔 백구십육  명이 등록을 하고 지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권사님들과 장로님들은 우리 교회의 으뜸입니다. 우리 신앙에 본입니다. 아주  성경적 표본은 아니지마는 우리에게 본을 보이는 분들인데 권사님들은 다  참석했고 또 장로님들도 아홉 분은 기도회에 참석했고 남은 분은 이 자리에 오지  못해도 자기 처소에서,  너무 직무가 바쁜 사람들은 자기 직무를 행하면서 잠깐 눈감고 기도하고 잠깐  눈감고 기도하고 그렇게, 여기 오지 안해도 바쁜 가운데서 잠깐 잠깐 눈을  감고서 해서 삼십 분을 채운다면 그 기도는 하나님이 참 들을 수 있는  기도입니다.

 저도 여기서 다른 사람하고 얘기, 왔을 때는 다른 사람하고 얘기를 하면서,  열시 되변 자야 되니까. 또 다른 것 할 일이 있고 이러니까 에기하면서 속으로  한쪽머리 기도를 하면서 얘기하면서 이러면 기도 하다 보면은 그만 얘기하다  중단이 돼 버린다 말이오. 이러나 힘을 더 애를 써 가지고 이래 하면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나오지 안한 사람이라도 자기 직장에서 세 번 기도해서 보태  가지고 합해 가지고서 삼십 분 기도, 어떤 사람은 그것도 할 여가가 없어. 모든  인간 접대 많은 사람은 접촉하면서 오 분, 십 분, 일 분, 잠깐 잠깐 그저  묵상으로, 또 자기 일하면서 속으로 기도하는 것, 이게 제일 중요한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하고 애기하면서도 겉은 얘기하면서도  속으로 주님과 연결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이 교제는, 영교, 신인 교제를 가리켜 영교라  하는데, 신령한 교제 영교는 알맹이가 되고 사람에게 인인 교제는 껍데기가  되어져서 알맹이 영교가 인인 교제에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를 성전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 분 기도 후에 권찰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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